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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1)화 (31/87)

31

오랜만에 듣는 영진의 밝은 목소리에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영진의 말에 답하던 중 내리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출근 잘하고. 일 있으면 연락해.”

짧은 기다림 끝에 사무실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백팩을 앞으로 돌려 메고 뒷문 근처 안전바를 잡고 섰다.

반쯤 넋을 놓고 서 있는데 정거장에 멈출 때마다 사람들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비켜서던 중 단발머리 스타일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핏기 하나 없는 것처럼 창백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걱정스레 보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기울이고 있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부딪쳤다.

힘없이 뜨여 있던 눈이 점점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하람이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안전바를 잡지 않은 손을 드는데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보여?』

여자의 물음에 하람의 눈이 크게 뜨이고 몸이 파드득 떨렸다.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손으로 다급하게 막고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소란스러운 심장 박동을 듣다 돌렸던 고개를 천천히 바로 했다가 또다시 시선이 부딪쳤다. 빤히 보는 시선에 더 버티지 못하고 때마침 하차하는 사람들과 함께 급하게 내렸다.

마트에서 귀신을 봤을 때처럼 속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헛구역질이 나와 입을 틀어막은 채 잠시 서 있다 눈에 보이는 카페로 달려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침에 먹었던 타락죽을 다 토했다.

“……샌드위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테이크 아웃이요.”

속이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출근해야 했다. 힘없이 화장실에서 나와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산 뒤 버스 대신 택시를 탔다.

늘어져 앉아 차창 너머를 보는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진짜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안 됐다.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 나빠졌다.

나빠진 속에 결국 택시에서 내려 다시 한번 더 토하고, 약국에서 약을 사 먹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택시를 타려다 택시 기사의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안개를 발견했다. 오싹함에 택시를 타지 않고 그대로 보내고 근처 버스정류장 벤치에 주저앉아 넋을 놓았다.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출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출근할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우진의 앞에 선 하람이 난처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하람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평소 근면 성실한 하람답지 않게 아파서 병가를 내는 것도 모자라 연락도 없이 늦는다. 무슨 일 있나 싶어 전화하려 핸드폰을 짚는 순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핼쑥한 몰골의 하람이 왔다.

“출근이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 병원은 다녀왔어? 아니지, 괜찮은지 확인하게 같이 가자.”

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람의 손을 잡았다. 힘없이 서 있던 하람이 놀라 얼굴을 번쩍 들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지금 상태로 병원을 가면 또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기겁하며 정말 괜찮다고 하는데 우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정말 괜찮아? 너 당장 쓰러질 거 같아.”

“네, 괜찮아요! 금방 나아질 거예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귀신을 봐서 속이 좋지 않은 것뿐이다. 병원에 가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하람이 약 먹었다고 하며 우진의 손을 놓았다.

“아프면 말해. 알았지?”

여전히 걱정하는 우진에게 알겠다는 대답 후 자리로 가 가방을 벗었다.

“대리님, 괜찮아요?”

“어? 어. 걱정시켜서 미안.”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맞은편 자리에 있는 성준이 말을 걸어왔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그런 말이 어딨어요. 다들 걱정했어요.”

“맞아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대리님, 완전 보고 싶었어요.”

성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말을 더했다. 하람이 고맙다고 짧게 인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확인 못 했던 것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는데 회의 시간이 됐다. 태블릿 PC를 챙겨 회의실로 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럼 이 건은 하람이랑 선혜 씨가 확인하고…….”

회의에 한창 집중하는데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짧게 떨었다. 슬쩍 꺼내 확인했다가 굳었다.

[하람 님, 지네 각시예요~ 리모델링 관련으로 통화 가능하실까요?]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아니었던 걸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로 해야 하는 걸까. 만날 때마다 말할 거 같은데 진지하게 물어볼까.

“하람이?”

“네? 아, 죄송합니다.”

문자 보고 있던 게 걸렸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급한 거면 확인하고 와.”

“아…… 그럼 금방 돌아올게요.”

연락이 온 김에 통화해야겠다. 하람이 우진의 허락에 지네 각시에게 전화하며 회의실을 나갔다.

-『어머, 하람 님!』

“통화 괜찮으세요?”

-『오후에 전화 올 줄 알았는데! 물론이죠.』

“그 정말, 리모델링 진행하실 건가요? 제가 아직 포트폴리오나 상담을 제대로 한 게 아니라서…….”

-『아이참, 제가 설마 이한 님과 있는 하람 님께 거짓말을 할까요? 그리고 하람 님 명함 받고 인터넷에 다 검색해 봤는데 리모델링 한 거 너무 맘에 드는걸요?』

정말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지 지네 각시가 지금까지 했던 몇 가지 건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예상 못 한 전개에 정말 당황했다.

-『남편도 좋다고 했다고 했어요. 하람 님 편하실 때 오세요!』

어쩌다 보니 오늘 오후에 방문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람이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난 핸드폰을 멀거니 보다 주머니에 넣고 회의실로 돌아갔다. 얼마 있지 않아 회의가 끝났다.

“저기, 대표님.”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나갔다. 계속 남아 있던 하람이 마지막으로 나가는 우진을 슬쩍 불렀다. 우진이 응? 하고 하람을 보았다.

“……그, 아는 지인이 리모델링 요청을 해 와서 그런데 오후에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당연히 괜찮지. 혼자 갈 수 있겠어? 지방은 아니고?”

걱정 어린 물음과 함께 커다란 손이 하람의 이마를 덮었다.

“음, 열은 없네.”

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하람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무실이랑 얼마 안 멀어요.”

“다행이네. 그럼 그건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바로 퇴근해.”

우진의 허락이 떨어졌다. 하람이 인사한 후 자리로 돌아가 밀린 일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에는 귀신이 보이지 않았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하는 일에 모니터에 들어갈 듯이 집중해서 일하는데 현장 확인하러 갈 시간이 됐다.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절로 긴장됐다. 멀쩡하던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본능적인 두려움과 걱정 탓에 온몸이 차게 식고, 식은땀이 솟았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운전하며 현장으로 가는데 운전석 너머로 사람이 아닌 것이 보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인지 얼굴 반쪽이 없는 귀신, 오토바이 슈트를 입고 있는 다리가 없는 귀신, 날개가 으깨진 까마귀 떼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나머지 떨렸다.

“……대리님?”

빵! 빵! 빠앙!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얼마나 어지러운지 소리가 멀게 들렸다.

입 안에 고이는 쓴 물을 계속해서 꿀꺽꿀꺽 소리 내어 삼키던 하람이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차가 한쪽으로 훅 쏠리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동료 선혜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선, 혜 씨, 미안한데, 나 대신…….”

“대리님, 제가 운전할게요!”

운전할 수가 없다.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운 하람이 문을 열고 차를 내렸다. 선혜가 운전석에 앉았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조수석에 구겨지듯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하람의 상태가 좋지 않다. 오한이라도 드는지 덜덜 떨고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선혜가 어떡하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하람을 힐끔거리다 신호에 걸리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곧장 우진에게 전화하려는데 하람이 느릿느릿 글로브박스에서 물을 꺼냈다.

“어, 대리님, 괜찮으세요?”

“……아, 네. 운전 내가, 해야 하는데 미안해요.”

물을 마시니 울렁이던 속이 조금 나아졌다. 입을 꾹 다문 채로 계속 구토감을 참던 하람이 선혜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대표님한테 전화하려고 했어요.”

우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하면서 하람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기 위해 전화하려 했는데 때마침 하람이 깨어났다.

“그리고 사과하지 마세요. 아픈 게 대리님 탓도 아니잖아요.”

선혜가 깨자마자 사과하는 하람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다 핸드폰을 다시 넣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다 왔네요.”

참는 사이 목적지에 다 왔다. 하람이 휴지로 새어 나온 식은땀을 닦고 거울로 제 상태를 확인했다.

현장에서 못 볼 꼴을 보여 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귀신이 없었다. 아프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힘없이 웃고는 첫 번째 현장 확인을 마무리했다.

현장으로 이동할 때마다 하람은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주변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고, 현장에 가서는 한껏 긴장했다. 그러다 보니 퇴근 시간 즈음에는 전신이 다 아팠다.

“진짜 혼자 가실 수 있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오늘 확인해야 하는 현장을 다 돌았다. 그리고 퇴근 시간도 됐다.

남은 곳은 지네 각시 집뿐. 하람이 선혜에게 퇴근하라고 하고 운전석에 앉았는데 선혜가 퇴근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요.”

“대리님 얼굴이 지금 어떤지 못 봐서 그래요. 저 퇴근 늦어도 되니까 운전할게요.”

“아니, 나 정말 괜찮아요.”

목적지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선혜가 잘못 휩쓸리거나, 문제가 있을 수 있어 보내려는데 자꾸 안 가고 버틴다. 하람이 정말 괜찮다고, 제발 가라고 애타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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