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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30)화 (30/87)
  • 30

    정확하게 어떤 답을 듣고 싶냐고 묻는 말에 하람이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다물고, 다시 조심스레 열었다.

    “이한 님을 돕겠다고 밖을 돌아다니고, 무리하고 그러면서 친우처럼 지냈던 주인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한이 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 너머를 응시했다.

    “……어렸다.”

    이한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어렸지만 늘 신중했다. 하지만 그만큼 호기심도 넘쳤다. 날 만날 때마다 질문을 쉬지 않고 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과거를 꺼내는 이한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별안간 기분 좋은 꿈을 이야기하듯 읊조리던 이한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내 하루가 궁금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제가 만족할 때까지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제 하루를 종알종알, 얘기했다.”

    이한이 잡고 있던 장죽을 내려놓고 창턱을 가볍게 짚었다.

    “내가 화를 내고 귀찮아해도 계속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1년, 계속…….”

    이한의 말에 모순이 있었으나 표정과 말이 아련해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 허했다.

    “계속, 계속했다.”

    짐짓 넋이 나간 것 같던 이한의 시선이 얼핏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하람의 미간도 좁혀졌다. 하람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 한가운데를 짚었다.

    심장이 꼭 누군가의 손에 틀어 잡혀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걱정하고, 기다렸습니다. 많이…… 그리웠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입에서 무언가가 주륵 흘러나왔다.

    “……이, 이한, 님.”

    시야가 어지러웠다. 하람이 여전히 창 너머를 보고 있는 이한을 힘겹게 불렀다.

    작은 부름에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가 그답지 않게 눈을 크게 떴다.

    “……이하람!”

    깜짝 놀란 이한이 다급하게 하람의 어깨를 그러잡는 순간 하람이 피를 울컥 토해 내더니 힘없이 눈을 감았다.

    * * *

    시야에 보이는 어둑한 풍경이 생경했다.

    제대로 닦이지 않은 흙길, 관리되지 않아 엉망인 잔디, 희부연 물안개.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강에 설마 하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뒤를 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화가 나 있는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듣기 싫은 쌍욕을 하고 말을 쏟아냈다.

    돈, 너, 엄마, 보험, 인생. 어딘가 퍽 익숙한 말을 바보처럼 멍하니 듣다가 참지 못하고 손을 든 그때 툭, 상체가 밀려났다. 웃고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지만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풍덩! 소리와 함께 써늘함이 전신을 감쌌다.

    “……허억!”

    하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목덜미가 크게 받쳐졌다.

    “그래. 숨 쉬어라.”

    언제 상체를 일으켜 세웠는지, 또 언제 입을 벌렸는지 모르겠다.

    크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는 이한을 마주 보며 막연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

    “그래.”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받쳐주고 있는 이한의 팔을 더듬더듬 짚었다.

    “꿈이 아니다. 지금이 현실이다.”

    부릅뜬 눈으로 놀란 기색이 완연한 이한의 얼굴에서부터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팔, 보이지 않는 왼손을 찾아 훑었다.

    하람의 화등잔만 하게 뜨인 눈이 점차 줄어들고 가쁘게 들썩이던 가슴이 점차 느려졌다. 마지막으로 이한의 팔을 꽉 잡고 있는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그, 그 원귀가 말한 대로 강에, 빠졌어요.”

    “……원귀?”

    어둑한 풍경부터 무어라고 사납게 몰아붙이던 남자, 강까지. 모두가 원귀가 말한 것이었다. 하람이 이한의 손에 천천히 누우면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정말 강에 빠졌어요. 정말 남동생한테 밀려…….”

    “알았으니 그만 말하고 쉬어라.”

    이한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간을 좁힌 하람을 뒤로하고 오른손을 들었다. 곧 턱, 하고 시커먼 검이 잡혔다.

    단호한 뒷모습을 올려다보던 하람이 다급하게 이한을 불렀다.

    “자, 잠시만요! 지금 원귀…….”

    “순영을 불러줄 테니 쉬어라.”

    잠시 멈췄던 이한이 다시 움직였다. 하람이 신음하며 힘겹게 일어나 이한의 팔을 부여잡았다.

    “원귀는, 아무 잘못 없어요.”

    “……아무 잘못이 없다?”

    이한이 느릿하게 몸을 돌려 제 팔을 잡고 버티는 하람을 보았다.

    “그 원귀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틀을 꼬박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무 잘못이 없다?”

    이한의 얼굴이 전에 없이 매서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는데 최근 느껴지지 않던 그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그도 모자라 어디선가 호랑이가 우는 것 같은 오싹한 소리까지 들렸다. 하람이 끄윽,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 한…….”

    “금방 끝난다. 쉬고 있어라.”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 같은 강한 기운에 몸이 아래로 자꾸만 내려갔다. 결국 떨리던 다리가 굽혀지고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한 님의 악업을 줄이는 것을 도우라고.”

    소맷자락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힘없이 버티던 하람이 작게 외치며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원귀의 원을 푸는 것으로 이한 님을 돕고 싶습니다.”

    귀신에 씌면 귀신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하람은 원귀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원치 않게 죽고 이승을 떠도는 원귀를 돕고 싶었다.

    “……미련한 놈인 거, 압니다. 그래도 돕고 싶습니다. 원을, 풀어 헤매지 않게 해주고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신을 잃은 게 원귀 탓이 아닐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래도 오해하는 것 같다는 말 대신 돕고 싶다고 했는데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람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이한 님…….”

    이한이 원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타이밍을 보다가 조심스레 꺼내려 했는데. 아무 말이 없는 이한의 눈치를 보는데 이한이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답을 기다리는데 어디에서 턱턱 소리가 들렸다. 곧 벽에서 검붉은 빛 털을 가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갑작스레 나타난 흉흉한 기세의 호랑이에 하람이 놀라 크게 물러났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이한의 곁을 한 바퀴 돌았다. 이한이 그의 허리까지 오는 호랑이를 짚고 둥근 귀에 맞춰 자세를 낮췄다.

    “네 미련한 주인을 죽이려 든 물에 빠져 죽은 원귀를 물어 와라.”

    호랑이가 하람을 노려보더니 시뻘건 눈을 빛내고는 뒤돌았다. 시야에서 훅 사라졌다.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그래. 원을 어떻게 풀지 어디 한번 지켜볼까.”

    - 정말 출근할 수 있어?

    “네? 네.”

    -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출근 준비를 하는데 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 우진이 정말 출근할 수 있겠냐고 몇 번이나 물어댔다.

    “괜찮습니다. 출근 준비도 다 했어요.”

    - 걱정되는데…….

    “괜찮아요. 회사에서 봬요.”

    꼭 출근하겠다는 마음을 느꼈는지 우진이 마침내 전화를 끊었다. 하람이 우렁 각시가 반듯하게 다려둔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하람, 어디 가?』

    백팩을 메고 방을 나가자 노앵설이 크게 외치더니 우다다 달려와 다리에 철썩 붙었다.

    “음, 출근이라는 걸 해서 오후에 들어올 거 같아.”

    『출근? 오후 언제? 늦어?』

    “저녁 먹을 때쯤 올 거 같은데, 올 때 과자 사 올게.”

    『과자 싫어. 그냥 가지 마.』

    노앵설이 왜 이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노앵설을 난감한 눈으로 보는데 사랑방 문이 열리고 이한이 나왔다.

    “그놈은 말을 안 듣는 놈이다. 떠들어 봐야 소용없으니 보내줘라.”

    『정말이야? 하람은 정말 말을 안 듣는 인간이야?』

    바로 어제, 원귀의 원을 풀어주겠다고 붙잡았던 것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한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호랑이가 원귀를 못 찾아서 당황스러운데. 장죽을 입에 문 이한을 보던 하람이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지금 나가면 후회할 거다.”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올려다보는 노앵설을 난감한 눈으로 보는데 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후회한다는 걸까. 하람이 굳은 얼굴의 이한을 가만 보는데 이한이 툇마루로 몸을 돌렸다. 결국 뒷말을 듣지 못하고 노앵설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다녀올게.”

    『꼭 돌아와야 한다?』

    “응.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흔드는 노앵설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신발을 신고 안채로 넘어갔다.

    “왔어?”

    안채로 가자 영진과 다움이 맞이해 주었다.

    “할머니는 주무셔?”

    “응. 잠이 느셨는지 아직 주무시네. 퇴근할 때 인사드려. 가자.”

    다움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영진의 차를 중간까지 얻어타기로 했다.

    하람이 빤히 보는 다움에게 인사한 후 나란히 걷는데 어디에서 고양이와 강아지가 하나, 둘 나타나더니 금세 둘러쌌다.

    뭔가 싶어 보자 다리를 절뚝이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한쪽 귀가 조금 커팅된 고양이가 울었다.

    만져달라는 걸까. 하람이 고민하다 검지로 슬쩍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고롱고롱 소리를 냈다.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적응 안 된다.”

    언제 멈춰 섰는지 영진과 다움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람이 숙이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너도 보이는가 보네.”

    “뭐가?”

    “너 지금 뭐 만졌어?”

    당황스러운 눈으로 보는 영진을 마주 보던 하람이 제 아래에 가득한 강아지와 고양이를 보았다.

    “……아.”

    집 뒷마당에 숨어 있던 유기 동물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다 죽은 동물인 것 같다. 하람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조심해야겠네.”

    “너도 금방 적응할 거야.”

    그러려나. 하람이 쓴웃음을 짓는데 다움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웃어 주었다.

    차 조수석에 앉고 얼마 있지 않아 차가 출발하고 대화하는 사이 다움의 유치원에 도착했다.

    “참, 여행 허락받았어.”

    “정말? 잘됐다!”

    “다음 달에 가라고 했으니 천천히 숙소 정하고 하면 될 것 같은데.”

    허락받은 사실을 전하자 영진이 신났다. 어디에 갈지, 며칠 동안 머물지, 몇 명 갈지를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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