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29)화 (29/87)
  • 29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조건을 들으니 반드시 물어야 할 것 같다. 하람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이한을 보며 다시 한번 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제가 귀신과 요괴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한과 요괴, 귀신들의 반응이 달랐다. 뭐라 해야 할까. 요괴와 귀신들은 제게 안달 비슷하게 냈는데 이한은 그걸 몹시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한이 요괴가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려 주려는 지네 각시의 말을 끊었었다. 뭐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마주하자 이한이 미간을 훅 좁혔다.

    고작해야 미간을 좁힌 것뿐인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마치 누군가 전신을 내리누르는 것 같다. 하람이 아래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버티다 슬그머니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한이 잡고 있던 장죽을 느리게 입가로 가져갔다. 대답 대신 입바람을 부는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다른 질문을 해라.”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에 하람이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무는데 이한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다른 질문을 하면 답해 주지.”

    “아니요. 저는 이 질문에 답을 듣고 싶습니다.”

    무슨 일인지 이한이 답지 않게 회피한다. 뜬금없는 말에 짐짓 놀랐던 하람이 단호하게 재촉했다. 역시나 답지 않게 단호한 하람의 모습에 이한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답을 듣기 전까지 여기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다리가 슬슬 저리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득 될 거 하나 없지만 유치하게 버티는데 이한이 소리 내어 콧방귀를 뀌었다.

    “누가 손핸지 모르겠군.”

    이한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어디 한번 버텨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람이 턱이 한껏 당겨질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먼저 말을 하면 지는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소리 내지 않길 몇 분. 꿋꿋하게 버티던 하람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입술을 이로 꽉 물었다.

    의자에 앉는 게 익숙한 다리가 쥐라도 난 듯 저렸다.

    다리를 길게 펴 주무르고 싶었는데 이한에게 지고 싶지 않다.

    힘겨운 얼굴을 하고서 애써 버티는데 반듯한 허리도 앞으로 조금씩 기울어졌다. 결국 숨을 삼키며 무릎을 크게 부여잡았다.

    하람의 입에서 나온 바람 소리 같은 작은 소리에 태연자약하게 담뱃잎을 태우며 밖을 보던 이한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하람을 가만 보다 하, 숨을 길게 쉬었다.

    “내 대답이 뭐가 그리 중하다고 그렇게 버티지?”

    고작 대답 하나 듣겠다고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큼 무리하고 앉았다. 이한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하람을 보았다. 끈질기게 버티던 하람이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렇게까지, 안, 하면 계속 숨기실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이한을 오래 보지 않았지만 그가 끈질긴 자라는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하람이 안 그러냐는 듯 이한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이한이 피식 웃었다.

    “잘 아는군.”

    “네. 그래서…… 버티는 겁니다.”

    지독한 자에게는 그만큼 지독하게 굴어야 한다. 하람이 장죽을 입에 물지 않고 그저 잡고 있는 이한을 보며 독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이다.”

    이한이 맥없이 한숨을 쉬더니 잡고 있던 장죽을 내려놓았다.

    “넌 신내림이 뭐라고 생각하지?”

    마침내 이한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나왔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신이 무속인에게 씌는 걸, 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병은.”

    “신내림을 받으…….”

    “넌 나와 지내면서 신병을 앓은 적 있었나?”

    없었다. 상태가 더없이 멀쩡했다.

    다리를 길게 펴던 하람이 의아함에 굳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널 무속인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익숙해지도록 몸의 문을 조금 열었을 뿐.”

    그렇지 않아도 아프지 않냐는 영진의 말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하람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네가 내 기운에 익숙해지고 또 무리하지 않도록 아주 조금 열어 두었는데…… 귀신과 요괴들이 그 틈을 아주 좋아한다. 호시탐탐 노리는 것들이 언제 어떻게 꼬일지 알 수 없다.”

    이한이 말하는 틈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귀신과 요괴가 꼬이는 것을 보면 조금 이해될 것 같았다. 하람이 벌리고 있는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가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네? 어떤…….”

    답이 다 끝난 게 아니었던 걸까. 생각에 빠져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던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당분간 이 집에서 지내라고 했던 것 말이다.”

    “아,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한이 창턱에서 내려와 하람의 곁에 섰다. 올려다보는 시선을 마주 내려다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지금쯤이면 보이겠군.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아라.”

    이한이 오른손으로 하람의 감긴 눈가를 덮었다. 서늘함이 번졌다.

    “……눈떠라.”

    이한의 오른손이 멀어졌다. 하람이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떴다.

    이한을 처음 만났던 날. 네 몸에 붙어 있는 액이 너무 많아 역겨운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눈에 보이니 알겠다.

    “……아.”

    눈에 보이는 다리가 온통 검붉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형상의 불길한 검붉은 안개가 발에서부터 다리, 허리, 상체를 뒤덮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져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밀어내는데 흩어지지도,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단순하게 떨어질 액이 아니다.”

    충격에 말을 잃어버린 하람을 보던 이한이 다리에 붙어 있는 작은 액 하나를 잡아 제 얼굴까지 들었다. 한 손에 크게 틀어 잡힌 액이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이 비명 질렀다.

    “이건 저주다.”

    이한의 손에 잡힌 액의 얼굴이 부글거리더니 눈이 돋아났다. 곧 퍼렇게 뜬 눈 아래로 눈물과 비슷한 것을 줄줄 흘렸다. 말없이 지켜보던 하람이 급하게 숨을 삼켰다.

    “저주, 요?”

    “그래. 내 기운도 버틸 만큼 아주 강한 저주.”

    이한이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었으나 액이 터지지 않았다. 되레 하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무슨…….”

    “네 가문은 무슨 일인지 태어난 모든 이들이 이런 액을 달고 있었다. 나는 이 액들을 약하게 만들며 최대한 천수를 누리도록 하는데, 넌 전에 없이 많다. 액이 너무 쌓여서 이것들이 한 사람의 저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쌓인 것인지 알 수 없다.”

    고통스럽다는 듯 계속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액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액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람의 다리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하람은 평소 액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액들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저마다 꿈틀거렸다. 하람이 으, 소리 내어 기겁했다.

    “이,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완전히 없앨 수 있나요?”

    어느새 창턱에 엉덩이를 대고 서서 장죽을 손에 든 이한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어찌했는데, 내 기운이 전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독한 액은 네가 처음이라 나도 모른다.”

    이한의 기운이 통하지 않는다니. 도대체 얼마나 독한 액이라는 걸까. 하람은 조금 아뜩해졌다.

    “다만,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네 천수를 갉아먹고 있다. 그러니 이 집, 특히 내 곁에서 지내면서 최대한으로 억눌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대답하지 않고 멀거니 보는데 이한이 연기를 몇 번 길게 내뿜었다.

    부연 연기가 가까이 왔다. 그러자 전신에 붙어 있는 액들이 소란스레 떨더니 작게 쪼그라들었다.

    어쩐지 액이 담배 연기에 기겁하고 닿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의아해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담배, 평범한 것이 아니군요.”

    설마 하고 묻자 이한이 장죽을 입가에서 떼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명부의 것이다.”

    지독한 액이 고작해야 담배 연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황당해하다 이한이 입에 물고 있는 장죽을 보았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지만 담배를 왜 저리 계속 태우나 했더니. 알고 보니…….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지고, 망연해졌다.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축 늘어졌다.

    이한의 눈에 제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그리고 이한은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 걸까.

    너무나 막연해서 저리는 다리를 쭉 편 채로 넋을 놓고 있는데 액이 점점 보이지 않았다.

    단순하게 떨어질 액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이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리를 내려다보던 하람이 아, 소리를 내며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다른 질문을 하면 답해 준다고 하셨으니, 질문 하나 더 할게요.”

    “……난 분명 답을 했을 텐데?”

    이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굳은 얼굴의 하람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마른침을 꿀꺽 소리 내어 삼켰다.

    “제 이전의 이한 님 주인에 관해 알려주세요.”

    묻고 싶었던 세 가지 중 이제 하나 들었다. 하람이 다리를 약하게 주무르며 이한을 빤히 응시했다.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한이 헛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선대가 왜 궁금하지?”

    “선대를 알아야 제가 어떻게 할지 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람은 순영처럼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 증조할머니가 이한과 편하게 지냈다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하는 마음에 선대의 경험을 참고하기로 했다.

    하람의 질문이 의외인지 이한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누군가는 집에만 머물렀고, 누군가는 밤늦도록 밖을 돌아다녔었다.”

    평소 이렇다 할 감정이 잘 보이지 않던 새카만 눈동자 위로 그리움이 짧게 비쳤다가 사라졌다.

    “또 누군가는 나를 돕겠다고 무리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했다.”

    이한은 아주 오랜 세월을 살고 있다고 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삶을 살았던 자답게 그의 말은 어딘가 아득하게 들렸다.

    “또 친우처럼 지낸 자도 있고, 주종 관계로 지냈던 자도 있었다.”

    그리 길지 않지만 세월이 느껴지는 말을 어느새 가만히 듣던 중 시선이 부딪쳤다.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답은 뭐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