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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27)화 (2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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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순영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할까, 고민하는데 순영이 시선을 마주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닌 것 같다고 생각만 한다는 게 그만 얼굴에 드러난 듯 딱 걸렸다. 하람이 끙 소리 내며 제 뺨을 몇 번 쓸었다.

    “……음, 네.”

    난감한 얼굴로 답하자 순영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께서 티를 잘 내지 않으시긴 합니다.”

    “네. 많이 안 하십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자 순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람 님 이름을 신께서 지어 주신 거 아십니까?”

    “네. 제가 태어난 날에 지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처음입니다.”

    “네?”

    “부탁드리기도 전에 신께서 먼저 지어 주신 경우는 하람 님이 처음입니다.”

    “그게…….”

    “저와 제 딸, 영진 님, 다움 님 모두. 부탁을 드려 정했습니다.”

    순영이 당황해서 굳은 하람에게 식사 다 한 거냐고 물었다. 하람이 한 박자 늦게 네, 하고 답하며 상을 들고 일어섰다.

    하람이 방 밖에 상을 두고 오는 사이 순영이 다구를 꺼냈다. 정갈한 손길에 덖음차 두 잔이 만들어졌다.

    “신께서는 작명학에 다소 약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름 몇 개를 보여드리면 미래를 보고 말씀해 주시고는 했는데 하람 님은 보자마자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이한이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것만 알았지 제가 처음이라는 건 몰랐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가운데 순영이 찻잔을 한 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람 님이 아직 배 속에 있을 때. 관심 없는 척하시면서 하람 님에 관해 먼저 말하고, 사람들 생각에 늘 사랑채에서 지내시는 분이 안채에서 지내시기도 했군요.”

    “안채에서요?”

    “예. 상방에서 지내시면서 연락을 기다리고, 미래를 틈틈이 보셨습니다. 관심 없는 얼굴을 하고서 제 핸드폰을 몰래몰래 보셨지요.”

    그때를 생각하는지 순영이 소녀처럼 뺨을 발갛게 하며 작게 웃었다. 반대로 하람의 얼굴은 괴상하게 구겨졌다.

    관심 없는 척? 관심 없는 얼굴로? 몰래몰래? 새침데기도 아니고. 아니, 이한을 말하는 게 맞나?

    이한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연속에 구겨진 얼굴이 도통 펴지지 않았다.

    얼굴을 구긴 채로 가만 앉아 있던 하람이 다급하게 제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들었다. 찬물 마시듯 크게 한 모금 마셨다가 뜨거움에 윽 소리 내며 황급히 잔을 멀리했다. 조심스레 차를 마시던 순영이 놀라 잡고 있는 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으십니까?”

    홧홧함에 남은 미지근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람이 깜짝 놀란 순영에게 어색하게 괜찮다고 하며 얼굴을 애써 폈다.

    “그 정말, 신께서 그러셨, 습니까?”

    “예. 안 믿기시겠지만 정말 관심 많으셨습니다.”

    제게 관심을 가지는 이한이라니. 조금도 상상이 안 된다.

    남자다운 얼굴로 매사 무관심한 듯 나태하게 있는 이한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이한이 두 명일 리도, 순영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중간에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순영이 적당히 식은 차를 새로 따라 주었다.

    “지금 사랑채에서 지내신다고요?”

    “네? 네.”

    “그거 아십니까. 지금까지 사랑채에서 지낸 주인은 없습니다.”

    “……네?”

    “사랑채에서 밥을 먹은 사람도 없습니다.”

    이게 지금 다 무슨 말일까. 어렵게 펴졌던 얼굴이 다시 괴상하게 구겨졌다. 순영이 눈을 폭 접어 웃었다.

    “신과 가장 오래 그리고 편하게 지냈던 제 어머니도 사랑채에서 지내지 않았습니다.”

    연속적인 충격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 하람이 입을 작게 벌린 채로 어쩐지 지금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순영을 멍하니 보았다.

    “제 걱정보다 두 분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고, 기분 좋습니다.”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보며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순영의 모습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결국 이전 주인과 원귀에 관해 물어봐야지, 했던 것을 다 까먹었다. 하나도 묻지 못하고 그대로 안방을 나왔다.

    “가?”

    안대청을 지나는데 다움이를 안고 있는 영진이 인사해 왔다. 여전히 반쯤 넋을 놓고 있던 하람이 어어, 하고 답하다 막대 사탕을 먹고 있는 다움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제가 주인이 잘 된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이한의 아래에서 고생시킬 수 없다. 차라리 제가 고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중 다움의 팔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솜사탕 같은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갓난아기 주먹만 한 것들은 작은 몸에 비해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을 끔벅여 댔다.

    “아.”

    동글동글한 눈과 작은 크기에 알아차렸다. 충기여서. 버들강아지풀과 비슷하게 생겨서 버들 벌레라고도 불리는 요괴였다.

    다움이 인간 외의 것을 본다더니. 요괴와 친하기도 한지 빤히 보는 시선에 다움을 보호하듯 충기여서들이 팔을 뒤덮고 있다. 하람이 다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행 허락받으면 말해 줄게.”

    “알았어. 너무 억지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신한테 잘못 걸릴라.”

    다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데 충기여서들이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빨을 내보였다. 여기서 더 건들면 깨물겠다고 위협하는 꼴이 어딘가 귀여워 작게 웃고는 안채에서 나갔다.

    시간이 늦은 탓일까. 사랑채로 가는 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동물처럼 생긴 귀신과 요괴가 꽤 보였다.

    요괴인데 시선이 부딪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한다. 그 귀여운 모습을 뒤로하고 사랑채에 가자 귀신과 요괴가 없는 스산한 사랑채가 반겨주었다.

    그러고 보면 안채에는 온갖 것들이 가득한데 사랑채는 조용했다.

    이한의 탓인가 하는데 시야에 어른 팔뚝만 한 지네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멈췄다.

    설마 이것도 요괴인가. 아니면 이한의 함정일까.

    슬금슬금 다가오는 지네가 너무 현실적이고, 징그럽게 생겼다. 질색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중 용마루에 노앵설과 앉아 있는 이한이 보였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이쪽을 보고 있는 이한을 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멈춰 섰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네가 하람의 주변을 느릿하게 돌더니 다시 앞에 섰다. 곧 몸체에 거품이 일더니 점점 커졌다. 이내 아리따운 여자가 됐다.

    『객이 그렇게 귀엽다고 하여 왔는데, 참이었네요!』

    여자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그 상태로 놀라 굳은 하람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하람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웃으며 이한을 보았다.

    『고생 꽤나 하시겠습니다.』

    “적당히 놀려라. 이러다 넘어가겠다.”

    하람의 생각대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한이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고아한 인상의 여자 옆에 서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하람을 보았다.

    “괜찮으니 숨 쉬어라.”

    지, 지네가 사람으로, 그것도 여자로 변했다. 놀라 숨을 쉬지 않던 하람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뭐, 뭐죠?”

    “뭐긴. 요괴지.”

    『구렁덩덩신선비는 직접 알려 주셨다고 하셨잖아요. 어서 제 소개도 해 주세요.』

    꼬리처럼 엉덩이 너머로 지네 몸체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여자가 우아하게 웃었다. 이한이 소리 내어 한숨 쉬었다.

    “지네 각시다.”

    “……지네 각시요?”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트위드 투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요괴란다.

    뒤에 있는 미끈한 지네 몸체만 아니면 정말 사람 같은데 사실일까. 구렁덩덩신선비와 비슷한 건가, 하고 보는데 지네 각시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성의가 너무 없으신 거 아닌가요?』

    “구렁덩덩신선비도 똑같이 말했다.”

    『할 말 없게. 성함이 하람 님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아, 네.”

    『저는 지네 각시라고 합니다. 하람 님 드리려고 케이크 사 왔답니다. 어서 가서 드세요.』

    지네 각시가 빨리, 빨리 하고 재촉하며 하람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하람이 당기는 힘에 어어, 하며 따라 걸었다.

    툇마루로 가자 정말로 케이크가 있었다. 그것도 자주 가는 단골집 픽이 꽂혀 있는 치즈케이크! 하람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디카페인 커피랑 아메리카노가 있는데, 드시겠어요?』

    “커피요? 디, 디카페인으로…….”

    『우리 하람 님, 저랑 입맛 비슷하시구나!』

    지네 각시가 잔을 찾는데 언제 내려왔는지 노앵설이 물 잔을 두 개를 내밀었다. 지네 각시가 호호 웃으며 텀블러를 열어 잔에 커피를 따랐다.

    『다들 어서 드세요.』

    커피를 얼마 만에 마시는지 모르겠다. 반쯤 감격하며 마시는데 노앵설이 작은 포크로 케이크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맛있어!』

    『그렇죠?』

    감탄하는 노앵설이 귀여운지 지네 각시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케이크를 크게 잘라 접시에 두고 하람의 앞에 두었다.

    『초코케이크도 사 왔으니 치즈가 별로면 말씀하세요. 우렁 각시랑 우렁 도령도 와요!』

    뭐지. 이 인싸 요괴는? 포크로 치즈케이크를 먹던 하람이 부엌으로 가 우렁 각시와 도령을 찾는 지네 각시를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이건 뭐야?』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뭐지, 하고 보자 노앵설이 커피를 가리키며 보고 있었다.

    “커피라는 거야.”

    『커피? 나도 마실 수 있어?』

    “음, 마셔 볼래?”

    『좋아!』

    어쩐지 어른을 따라 하고 싶은 아이 같다. 하람이 웃으며 커피가 든 잔을 내밀었다.

    “밤에 잠 못 잘 수도 있으니 조금만 마셔.”

    “저 녀석은 잠 안 잔다.”

    어느샌가 장죽을 손에 든 이한이 하람의 옆에 앉았다.

    『으, 이거 맛이 이상해.』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노앵설을 보던 하람이 이한을 보았다.

    “그런가요. 이한 님도 드세요.”

    “됐다.”

    『우렁 각시가 또 나중에 먹겠다고 하네요. 어찌 저리 겁이 많은지.』

    다른 요괴들도 먹고 또 식혜도 잘 마시던데 이한도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다시 한번 더 권해 볼까 하는데 부엌으로 갔던 지네 각시가 돌아왔다. 이한이 우렁 각시는 두라고 하며 장죽을 물었다.

    『하람 님이 다른 남자와 같은 것도 아닌데.』

    “인간 남자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겁내는 게 당연하지.”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다가 불현듯 우렁 각시 설화가 생각났다. 인간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해됐다.

    “우렁 도령은요?”

    『하람 님 내일 아침 식사에 필요한 식자재 구하러 갔다네요.』

    인간 남자는 싫지만 밥은 차려준다니. 밥에 진심인 한국 요괴답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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