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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26)화 (2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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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맛있는 것을 발견한 자 같은 모습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하람이 제 손목을 조심스레 부여잡으며 상체를 뒤로 조금 물렸다. 구렁덩덩신선비가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이 집에 있는 한 하람 님은 그 어떤 것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겁니다.』

    구렁덩덩신선비가 언제 입맛을 다셨냐는 듯 태연하게 읊조리고는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서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모양에 하람도 더 질문하지 않고 보고 있던 서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온갖 동물 귀신, 손각시, 재물을 다 뺏겨 악귀가 된 탐관오리 등. 그리 두껍지 않은 서책에는 귀신부터 요괴, 도깨비까지 전래동화로 보았던 익숙한 내용이 다수였다.

    그중에서 따로 눈여겨봐야 할 것 같은 내용을 태블릿 PC 카메라로 찍고, 옮기다 어딘가 익숙한 내용에 손이 멈췄다.

    “……여자 쌍둥이?”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니요.”

    아무래도 이한과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하람이 태블릿 PC에 크게 메모해 두고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질문 한 번, 두 번.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는 사이 시간이 저녁 시간에 가까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또…….”

    책방채를 나서는 구렁덩덩신선비를 따라 나가자마자 입구에 한 손에 장죽을 물고 서 있는 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응? 언제 오셨어요?”

    온다는 말도,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의아해하며 묻는데 이한이 대답하지 않고 구렁덩덩신선비를 가만 응시하더니 장죽을 입에서 떼어 냈다.

    “두 번은 없다.”

    단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말에 미간을 좁히는 순간 구렁덩덩신선비가 이한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구렁덩덩신선비가 커다란 구렁이로 변하더니 이내 땅으로 미끄러지듯 꺼졌다. 지켜보던 하람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잔디가 얕게 깔린 바닥에 흔한 구멍 하나 없는데 몇 미터는 될 법한 구렁이가 흔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크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이한이 다시 장죽을 입에 물며 앞장섰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 뒤를 따랐다.

    아무 말이 없는 이한의 뒤를 따라 걷던 중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이 보였다.

    이한의 맨발을 가만 보며 걷던 하람이 슬쩍 운동화를 신고 있는 제 발과 지나온 길을 보았다.

    “아.”

    이한의 발이 잔디에 닿는데 소리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다. 또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입에서 감탄 같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이한은 정말 살아 있는 자가 아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잠시 멈췄던 걸음을 움직이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냈다가 화면에 떠 있는 영진의 이름에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 할머니한테 인사하러 와.

    더 할 말 없다는 듯 통화가 끝났다. 하람이 황당한 눈으로 핸드폰을 보다 이한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이한이 시선을 마주했다.

    “할머니한테 인사드리고 와도 될까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한에게 허리를 작게 숙여 인사한 후 안채로 갔다.

    앞마당으로 가자 안채에서 나오는 주치의가 보였다. 주치의에게 인사한 후 툇마루로 가자 영진이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영진과 함께 안방에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얼굴을 못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순영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좋지 않다. 방석에 앉아 걱정스레 보는데 순영이 옅게 웃으며 차 마시겠냐고 물어왔다. 답을 하기도 전에 영진이 자연스럽게 보조했다.

    “다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희만 잘 지내면 되나요. 할머니가 잘 지내셔야죠. 안 그래?”

    “맞아요. 몸은 어떠세요?”

    향긋한 국화차가 든 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순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만그만합니다. 두 분은 어찌 지내셨습니까?”

    “저는 할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변호사 만나고, 집안일하고, 자주 오시는 분들에게 연락드렸어요.”

    순영과 영진의 시선이 가만히 앉아 있는 하람에게로 돌려졌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아,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전 사랑채에서 지내고 있어요.”

    “별일 없으시고요?”

    사랑채에서 특별하게 하는 게 없어서 짧게 말했는데 순영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본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 별일, 없는 거 같습니다.”

    이한에게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하고 원귀가 꼬이고 그 원귀가 집 앞까지 왔었으나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답이 영 믿음이 가지 않는지 빤히 보는 눈을 마주 보다 슬쩍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하람 님과 신 모두 조용하시고, 조심스러운 분들이라 큰 걱정은 없지만 혹여 문제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한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걸까.

    더없이 차분한 순영의 반응에 당황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참, 할머니. 하람이가 할머니 몸 상태 좋아지면 여행 가자고 하는데, 어떠세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꺼내려던 말이 영진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하람이 티 나지 않게 놀라 하는데 순영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의외라는 눈빛인지 아니면 놀란 눈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가운데 순영이 잡고 있는 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상관없는데…… 신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네?”

    그저 가족 여행 가는 것뿐인데 이한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걸까.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내용에 그만 멍해졌다. 지켜보던 순영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당분간은 어려우실 겁니다. 저는 언제든 괜찮으니 신과 의논하고 알려주세요.”

    가족 여행 간 동안 사랑채에 이한 홀로 남아서 허락이 필요한 걸까, 생각하는데 어딘가 묘하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당분간은 어렵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의아함에 묻자 순영이 눈에 띄게 놀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영진에게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며 보냈다. 영진이 어리둥절해하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하람 님, 신께 들은 것이 없습니까?”

    둘만 남자 순영이 왜인지 소리 죽여 물었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닫힌 문을 본 뒤 힘없이 네, 하고 답했다. 순영이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이한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고,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뭘 이렇게 많이 숨기는지. 어쩐지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로 큰 프로젝트 대표를 맡게 된 것 같다.

    엄청난 후폭풍을 감당하더라도 그냥 물어야 할까. 하람이 고민하는데 순영이 소리 내어 침음했다.

    “아무래도 신께서 하람 님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봅니다.”

    순영에게는 미안하지만 이한이 그냥 숨기는 것 같다. 하람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이마를 짚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아주 간단한 것 외에는 정확하게 들은 게 없는데, 할머니에게 여쭤봐도 되나요?”

    이한이 질문을 신중하게 하라고 했으니 이전 담당자인 순영에게 물어도 되지 않을까. 조금 기대하는데 순영이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시겠습니까?”

    대답하고 얼마 있지 않아 정갈한 상이 앞에 놓였다. 하람이 순영을 따라 숟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식사를 적게 하시는군요.”

    안채 부엌 이모가 차려준 밥상은 우렁 각시의 밥상보다 가짓수가 단출하면서 양이 적었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먹는데 조용히 죽을 먹던 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람이 입꼬리를 미세하게 당겨 미소 지었다.

    “그래도 사랑채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 늘었어요.”

    “……사랑채에서 식사하셨습니까?”

    열심히 준비해 준 우렁 각시에게 미안해서 최대한으로 먹다 보니 그새 먹는 양이 아주 조금 늘었다.

    제 딴에는 대단한 일이라 어색하게 너스레를 떨었는데 순영의 반응이 영 이상하다.

    꼭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놀란 얼굴에 미간을 슬쩍 좁히자 순영이 잠시 말이 없다가 늘 짓던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신께서 하람 님을 정말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에 젓가락을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람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잡고 있는 젓가락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동시에 순영이 물 잔을 들어 물을 짧게 마시고 내려놓았다.

    “신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주인으로 다움 님을 추천했었습니다.”

    이한의 새 주인으로 다움이라니. 당황스러운 가운데 번뜩 다움이의 현재 나이가 생각났다.

    “다움이는 너무, 어리지 않나요?”

    “제 어머니는 일곱 살에 주인이 됐었는걸요.”

    “……와.”

    일곱 살에 주인이라니. 너무 놀라워 입이 헤 벌어졌다가 증조할머니가 일곱 살에 주인이 됐다는 말에는 감탄이 나왔다. 순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머니는 일곱 살 때부터 쉰이 넘어서까지 신을 모셨었죠.”

    “평생, 모셨네요.”

    서른 살인 지금도 이한과 지내는 것이 불편한데 일곱 살부터……. 잘 상상되지 않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가운데 순영 또한 증조할머니처럼 평생 모셨다는 것이 생각났다.

    “할머니도 쭉 모셨네요.”

    “어머니보다는 짧지만 어쩌다 보니 저도 평생 모셨네요.”

    순영이 후후, 작게 웃고는 다시 한번 더 물을 마셨다.

    “저는 어머니처럼 어릴 때부터 신을 모시는 게 적응하기 쉽고 또 신기까지도 있어서 다움 님을 추천했었는데……. 신께서 단호하게 하람 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순영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확실히 어릴 때부터 이한과 지내는 게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부모님과 어울리듯 이한과 가까이 지내면 적응하기도 쉬울 거고 보다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한이 단호하게 저라고 했단다.

    하람은 다움처럼 어리지도, 신기가 있지도 않았다. 거기다 인외 존재를 믿지도 않고 이한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왜? 하고 기어가듯 작게 묻자 순영이 사랑채 방향을 보았다.

    “……한낱 인간인 제가 신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신께서 하람 님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귀하게 여긴다고 하기에는 너무 방목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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