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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25)화 (2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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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너무 말라서 안타깝다더군.”

    하람이 죽 먹던 것을 잠시 멈추고 얇은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몸을 보았다.

    우렁 각시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말랐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적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다고 한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우렁 각시는 저를 얼마나 찌울 생각일까요?”

    어린 손자 챙기는 할머니도 아니고. 웃긴다고 생각하다 문득 사극에서 보았던 그 무거운 쌀가마를 가볍게 드는 듬직한 돌쇠만큼 찌우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무리라고 자문자답하며 피식 웃고는 죽을 먹었다. 아무 말 없던 이한이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죽을 먹는 하람을 훑었다.

    “나 정도는 돼야 한다는데, 무리 같군.”

    “네. 진짜 무립니다.”

    이한만큼이라니. 이한이 돌쇠만큼 막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그 또한 체격이 좋고, 근육진 몸이었다.

    하람이 이한의 널따란 어깨와 반쯤 드러나 있는 가슴을 슬쩍 보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이한 같은 자연스러운 근육과 체격을 가지고 싶어 열심히 운동했으나 안 됐다. 혹시나 하고 약을 먹어가면서까지도 해봤으나 역시나 안 됐다. 근육진 몸매를 포기했다.

    “……우렁 각시에게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그보다 아까 원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냥 둘 건가요?”

    가벼워진 분위기에 궁금했던 원귀에 관해 슬쩍 묻자 계속 누마루 너머를 보던 이한이 시선을 맞췄다.

    “너는 질문이 많군.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인가?”

    새카만 나머지 동공과 각막이 잘 구분되지 않는 이한의 눈에 귀찮음과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마주 보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려 피했다.

    사실 하람은 질문을 그리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질문하기 전에 앞서 최대한으로 알아보다 안 되면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한과 관련된 것은 제가 알아볼 수 있는 정보나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질문이 많아졌는데…….

    “……궁금함에 괜한 오해를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질문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짜증 나더라도 물어보고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람이 동치미 국물을 떠먹으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대신 이한이 한숨 쉬었다.

    “……네 말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혼자 괜한 착각과 오해를 하는 것을 나 또한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를 짓씹듯, 그러면서 원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음산하게 읊조린 이한이 제 시선을 피하는 하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질문을 많이 하는 자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질문을 조심하고 경계해라.”

    질문하는 게 뭐가 그리 문제라고. 하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이한이 잡고 있는 장죽의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희부연 연기가 번지더니 금세 연기에 휩싸였다. 하람은 고작 질문인데, 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경계 어린 스산한 눈빛에 질문을 삼켰다.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않고 조용히 죽을 먹길 몇 분.

    줄어들지 않던 단호박죽이 눈에 띄게 줄고, 배가 불렀다. 그리고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 계셨군요.』

    멋들어진 한복 차림의 구렁덩덩신선비가 웃으며 인사해 왔다.

    하람이 이한에게 인사한 후 방에서 몇 가지를 챙겨 구렁덩덩신선비를 따라 사랑채 뒤쪽에 있는 책방채로 갔다.

    “와…….”

    처음 와 본 책방채에는 도서관처럼 책이 가득했다.

    창과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다 뒤덮고 있는,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책에 감탄이 멈추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맡을 법한 특유의 향과 사랑채와는 또 다른 고즈넉함에 입이 닫히지 않았다.

    『책방채에 처음 오십니까?』

    “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하람이 아이처럼 멍하니 사랑채보다 조금 작은 책방채를 둘러보자 구렁덩덩신선비가 낮게 웃으며 안쪽으로 이끌었다.

    『책밖에 없어서 그런지 이한 님과 저 외에 찾아오는 이가 없긴 합니다. 앞으로 하람 님도 자주 오시게 될 겁니다.』

    안쪽에 책 읽기 편하도록 두툼한 보료와 장침, 베개, 경상, 문방사우 따위가 있었다. 하람이 그 앞에 방석을 두고 앉았다.

    『듣기로는 하람 님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구렁덩덩신선비가 책장에서 오래돼 보이는 서책 몇 개를 가지고 맞은편에 앉았다. 하람이 네, 하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껏 인외 존재에 관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구렁덩덩신선비가 이것부터 읽어 보는 게 좋겠다고 하며 서책 하나를 내밀었다. 하람이 가지고 온 태블릿 PC를 옆에 두고 내밀어진 서책을 받으려다 굳었다.

    “……이거, 제가 그냥 받아도 되는 건가요?”

    가까이에서 본 서책은 꼭 박물관에 있는 것들과 같이 아주 오래돼 보였다. 손이 살짝 떨렸다.

    흰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웠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선선하게 웃었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하람 님 가문의 것입니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이한 님도 여기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한 님은 이미 이곳에 있는 책을 다 보았습니다. 다 외우고 있으실 테니 땔감으로 쓰셔도 아무 말씀 없으실 겁니다.』

    땔감으로 써도 된다고 하니 걱정이 줄었다. 서책을 받아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서책을 펼치자 한자가 반겨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한자에 이걸 다 읽을 수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 한자 옆으로 한글과 뜻이 적혀 있었다.

    조선 땅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귀신에 관해 보는데 질문을 하라고 한다. 하람이 음, 소리 내며 고민하다 고개를 들었다.

    “이 책 내용이 아닌 다른 내용을 물어봐도 되나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흑립을 벗어 옆에 두던 구렁덩덩신선비가 샛노란 눈을 반짝였다. 하람이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 이사하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왜 그런지 아시나요?”

    『이한 님이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바로 알아차렸다.

    하람이 아니라고 할까 하다 그냥 네, 하고 바로 인정했다. 구렁덩덩신선비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입지와 터, 혼.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 이사하고부터 잘 풀린다, 새로 이사한 집이랑 안 맞는 것 같다 같은 말을 들은 적 있습니까?』

    “네, 자주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을 몇 번 들어 봤어요.”

    『그 집의 터가 좋지 않거나 그 집에서 죽은 사람이 많거나 하는 여러 요소로 건강이나 재물, 복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한 님이 이사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구렁덩덩신선비의 말을 듣던 중 불현듯 이한이 집터가 좋지 않다고, 더 지내다간 병이 생길 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지 않아도 집터가 좋지 않아 병이 생길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한의 눈에는 그게 다 보이는 걸까. 아니면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의아해하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이한 님이 그러셨다면 필시 뭐가 있는 것일 겁니다.』

    이한도 모자라 구렁덩덩신선비까지 안 좋다고 한다. 무속 신앙을 믿지 않아도 정말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위치와 조건이 좋아 어렵게 구한 집인데. 아깝기도 하고 또 아쉽기도 해서 바로 답을 하지 않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하람 님, 하고 이름을 불렀다. 시선을 마주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한 님은 이 집 너머에 있는 온갖 전문가라는 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고 있는 분입니다. 단순한 이유로 말하는 분이 아니니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보세요.』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고민 좀 해 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이한 님을 잘 아시나요?”

    어쩐지 구렁덩덩신선비가 이한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으음, 소리 내어 침음했다.

    『이거 난감하군요. 잘 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뱀 비늘 같은 미끈한 뺨을 손끝으로 느릿하게 매만지며 고민하다 하람을 보았다.

    『어떤 부분으로 물으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러, 가지로요.”

    『흐음, 저 같은 것이 감히 말씀드리기 어려운 분이지요.』

    “대략적이라도…….”

    『아주 오래 살아 있는 자, 명부에서 돌아온 자, 이 집을 지키는 자, 악한 것들을 베는 자, 소멸을 꿈꾸는 자, 선한 것들의 말을 듣는 자. 정도라고 할까.』

    답이 어딘가 애매하면서 묘했다.

    구렁덩덩신선비도 이한의 진짜 정체를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걸까. 하람이 구렁덩덩신선비의 노란 눈을 빤히 보며 의중을 파악하다 그럼, 하고 운을 뗐다.

    “이한 님이 장례식장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아시나요?”

    장례식장에 간다고 했을 때. 이한이 온갖 것이 가득하다고, 그것들을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제가 견디지 못할 거라고 경고했었다. 그때 하람은 틀린 건 없다고 생각했으나 무슨 일인지 그것 외에도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귀 탓에 그런 건가 하고 생각하며 보는데 구렁덩덩신선비가 가볍게 웃었다.

    『죽은 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온갖 것들이 가득하죠. 차사가 놓친 것부터 떠도는 것, 그것들을 잡아먹는 것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약한 것을 좋아하고 탐하길 좋아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에게 걸리면 인간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대로 먹혀 죽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으면서 하찮은 것을 말하듯 여상하게 말하던 구렁덩덩신선비가 갑자기 한쪽 눈썹을 위로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람 님은 잡것들이 꼬이기 쉬운 몸을 가지셨군요.』

    낮게 읊조린 구렁덩덩신선비가 입꼬리를 당겨 웃더니 뱀의 혀처럼 중간이 갈라진 혀로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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