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위가 스산할 정도로 조용했다. 도시에서 흔한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말없이 천장을 보던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목줄의 끝이 없었어.”
생각해 보니 이한의 가슴에서 나온 실타래가 보였으나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게 실타래가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다.
“물어볼 게 한두 개가 아니네.”
일어나자마자 이한에게 궁금한 것을 다 물어보려고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방문했다.
“종연이?”
“응. 네 친구라던데?”
한창 자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더 자고 싶어서 무시하는데 울림이 끊기지 않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가 종연이라는 애가 집에 왔다는 영진의 말에 씻지도 않고 부랴부랴 나왔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애가 안 오고 대문 앞에서 너 기다리고 있어.”
어제 만난 종연이 왜 왔을까.
의아해하며 대문으로 가자 정말 대문 밖에 종연이 서 있었다. 영진에게 고맙다고 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종연에게 다가가 인사하는데 왜인지 종연의 얼굴이 이상했다.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어딘가 멍해 보이면서 지쳐 보였다.
어디 아픈가 싶어 아프냐고 묻는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상해서 종연아, 하고 불렀다가 종연의 옷차림이 어제와 같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박종연.”
조심스레 부르며 긴장하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오, 늘은, 혼자, 시군요.』
종연의 입에서 여자 목소리 같은 미성이 나왔다. 이상함에 미간이 좁혀졌다가 퍽 익숙한 음성에 아, 소리가 나왔다.
“어제 만났던 그 원귀군요.”
『다시 찾아, 뵙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단어를 뚝뚝 끊어 말하던 종연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람이 슬쩍 집 안쪽을 보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이, 분과 친하신, 거 같아, 이분, 으로 왔, 습니다.』
“……그래서 종, 하. 종연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만 종연이는 두고 안에서 얘기하죠.”
빙의라니. 아무 관계도 없는 종연이에게 피해 가게 둘 수 없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나와서 얘기하자고 하는데 종연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저는, 이 대, 문을 넘을 수 없, 습니다.』
“네?”
종연으로 분한 원귀가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을 보며 눈에 띄게 떨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대문을 넘을 수 없다는 원귀의 말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려문을 보는데 별안간 눈앞에서 검은 연기가 훅 번졌다. 곧 연한 회색빛 도포에 흰색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검은 검을 쥔 이한이 가볍게 바닥에 내려와 섰다.
“예가 어디라고 왔지. 대문을 닫아라.”
이한의 뒤에 서 있던 하람이 황급히 대문을 단번에 닫았다.
『저, 저는 그저, 말씀…….』
“네 얘기는 이미 다 들었다. 돌아가라.”
이한이 두 번 경고하지 않겠다는 듯 검집을 잡은 손 엄지로 방패를 툭 쳤다. 그 손길에 시커먼 검날 일부가 드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종연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귀하신, 분이시여,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의 워, 원을 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인 이한의 모습에 원귀가 무릎을 꿇을 듯 자세를 낮추다 별안간 욱, 소리를 냈다. 곧 검은 액체를 울컥울컥 토했다. 후드득 쏟아지는 액체에 하람이 크게 기함하며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었다.
“네게 꼬일 거다. 물러나 있어라.”
앞으로 뻗은 손이 종연에게 닿기 직전 이한이 한 손으로 잡았다. 하람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났다. 종연이 상체가 들썩일 만큼 밭은 숨을 토해 내다 입가를 닦아 냈다.
『제발, 우리의 원을, 풀…….』
“이곳은 명부에서 일하는 자가 오가는 곳이다. 이대로 소멸되고 싶지 않다면 꺼져라.”
이한의 음산한 경고에 오금이 저린 듯 종연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이내 그의 상체가 뒤로 훅 넘어가더니 원귀가 훅 떠났다.
“친구를 안채에 들여라.”
이한이 혀를 차고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람이 황급히 쓰러진 종연을 일으켜 세웠다. 쓰러진 몸을 어색하게 업고서 대문을 넘었다.
“뭐야! 네 친구 왜 이래?”
안으로 가자 툇마루에 앉아 빨래를 개던 영진이 놀라 급하게 달려왔다. 하람이 영진의 도움을 받아 툇마루에 종연을 길게 눕혔다.
“하, 더위 먹었나 봐.”
“세상에.”
귀신 들렸었다고 할 수 없어 대충 핑계를 댔는데 통한 듯 영진이 선풍기를 가지고 나왔다. 하람이 종연의 옆에 대충 앉았다.
“이것 좀 드세요.”
무거운 종연을 옮긴다고 기운을 많이 뺐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강원댁이 눈치 좋게 시원한 물을 주었다. 단숨에 다 마셨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다. 가만 앉아 있다가 영진을 도와 수건을 개기 시작했다.
말없이 빨래를 개던 영진이 참, 하고 하람을 보았다.
“떡볶이 먹었어?”
“아. 잘 먹었어.”
“다행이네. 과일 먹을래?”
괜찮다고 답하려는데 영진이 일어났다. 곧 사과와 오렌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너 진짜 사랑채에서 지내?”
“응.”
“어때? 아프고 그러진 않아?”
영진의 능숙한 손길에 과일이 금방 속살을 드러냈다. 하람이 사과 모양의 사과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아직 모르겠는데. 왜?”
“전에 할머니가 며칠을 앓았다고 해서 너도 그런가 했지.”
이한을 처음 만났을 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던 때 말고는 특별하게 아팠던 적 없다. 저는 없다고 말하며 사과를 먹다가 순영이 번쩍 생각났다.
“할머니 주무셔?”
“그러신 거 같은데, 왜?”
“인사 안 드려서.”
“난 또.”
사과를 먹으며 빨래를 개던 하람이 누나, 하고 영진을 불렀다.
“할머니 몸 괜찮아지면 여행 갈까.”
순영과 아직 여행 한번 가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추억을 쌓고, 사진을 찍어둘까 싶어 영진에게 말했는데 영진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애가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다 하지? 사랑채에서 지내더니 애가 착해졌나?”
영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기특하다는 듯 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영진을 보다 머리를 슬쩍 뒤로 뺐다. 영진이 피식 웃었다.
“어디로 가게? 우리도 같이 가?”
“누나만 괜찮으면.”
“나야 좋지. 할머니 몸 약해서 외국은 무리 같고, 제주도 어때?”
“나쁘지 않지.”
그러고 보니 우진에게 아직 휴가 얘기를 안 했다. 순영에게 여행 얘기를 하기 전에 우진에게 휴가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기침 소리가 들렸다.
종연이 깬 걸까. 빨래 개는 걸 멈추고 종연을 봤다가 입가에 묻어 있는 검은 액체에 깜짝 놀랐다.
재빨리 종연의 상체를 드는데 종연이 또 기침하더니 검은 액체를 울컥울컥 토했다. 셔츠에 후드득 떨어지는 액체에 그만 멍해졌다.
“야! 더위 먹은 거라며!”
놀라고, 당황스러워 굳어 있는데 영진의 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람이 어, 소리를 내다 종연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등을 쓸어내리길 몇 번. 종연이 한 번 더 크게 토하더니 감은 눈을 잔뜩 찡그렸다.
“……으으.”
과일을 다 먹을 동안 정신 차리지 않던 종연이 드디어 눈을 떴다. 하람이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는 종연에게 괜찮냐고 하며 물을 내밀었다.
“……아오, 고맙다. 아니, 내가 왜 여기 있냐?”
“네가 왔으니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영진에게는 핑계를 대긴 했는데 종연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자 종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뭐지? 난 분명 애들이랑 장례식장에서 술 마시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서 기억 안 나는가 보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그러게 술 좀 적당히 마시라고 타박하자 종연이 어리바리한 얼굴로 그래야겠다고 더듬더듬 답했다.
“더위 먹은 게 아니라 술병이었구만?”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영진이 나이만 먹었지 애들이라며 잔소리하더니 부엌 쪽으로 떠났다.
“……하람아, 나 더위 먹었냐?”
대충 둘러댄 말인데 종연이 진지하게 물어온다. 당황한 눈을 보다 시선을 옆으로 슬그머니 피했다.
“그…… 네가 우리 집 앞에, 쓰러져 있긴 했어.”
“뭐?”
기겁하는 종연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말을 아끼는데 때마침 영진이 꿀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재빨리 종연에게 넘겼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이른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진한 꿀물과 영진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정신 차린 건지 종연이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영진이 혀를 몇 번 차고는 어서 가라고 하며 손을 저었다.
“……내가 진짜 더위를 먹은 건지, 아니면 돌았는지. 병원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전혀 없어.”
대문 밖으로 나가 주차되어 있는 차를 본 종연이 다시 한번 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술 많이 마시면 그럴 수 있지. 심하면 병원 가봐.”
“그래야겠다.”
연락도 없이 난데없이 찾아온 종연이 연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하람도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안채를 지나 사랑채로 가는데 툇마루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부엌으로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여자를 본 것 같은데?
미끄러지듯 재빠르게 사라진 누군가를 좇아 부엌을 보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는 슬리퍼를 벗었다.
“밥 먹어라.”
대청을 지나 방으로 가는데 이한이 툭, 던지듯 말하고는 누마루로 갔다. 하람이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욕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누마루로 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한이 누마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에게 인사한 후 죽과 간단한 반찬 몇 가지가 놓여 있는 죽상 앞에 앉았다.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다는 걸 들은 걸까. 양과 가짓수가 확연히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았다.
“……우렁 각시는 저를 살찌우고 싶은 걸까요.”
이한이 식사를 하지 않으니 분명 1인분일 텐데 단호박죽이 면기에 한가득 들어 있다. 살짝 기가 질렸다.
이번에도 남길 것 같은데.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보던 이한이 장죽을 입가에서 조금 떼어 내며 하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