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런데 바쁜 오도전륜대왕 님이 왜 나타나신 건가요?”
얼핏 들었을 때는 이한이 김상준을 테이블에 처박아서 벌을 주려고 한 것 같던데. 진짠가 싶어 빤히 보는데 갑자기 이한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빌어먹을 노인네.”
아니, 왜 갑자기 욕하는 거지? 지금 설마 오도전륜대왕보고 노인네라고 한 건가?
경악하는 순간 화르르,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다 장죽을 잡고 있는 이한의 왼손을 불태우는 오싹할 정도로 새카만 불을 발견했다.
“이, 이한 님, 손!”
하람이 덜덜 떠는 손으로 불타고 있는 이한의 왼손을 가리켰다. 뜨겁지도 않은지 이한이 불타는 왼손을 꼭 남의 손 보듯 무감각하게 보았다.
“부, 불을!”
왼손을 감싼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듯 활활 타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뜨겁고, 아픈 것 같아 물을 찾는데 이한이 됐다고 했다.
“흑암지옥을 관장하는 오도전륜대왕의 흑염이다. 절대 끌 수 없다.”
정말 가만둬도 되는 걸까 하는데 곧 장죽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한이 혀를 찼다.
“마, 말도 안 돼…….”
방금까지만 해도 장죽을 잡고 있던 왼손이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손을 활활 불태우던 불도 사라졌다. 하람이 얼굴을 허옇게 하고 숨을 삼켰다.
“이럴 것 같더라니.”
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긴 소맷자락을 내려 왼쪽 손목을 가렸다.
놀라 어어, 소리를 내던 하람은 불현듯 이한이 상준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은 게 떠올랐다.
“설마, 인간에게 해를 가해서 그런 건가요?”
고작해야 한 방 먹인 것뿐이다. 설마 하며 보는데 이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찌 되었든 살아 있는 자에게 해를 끼쳤으니까.”
그저 한 대 쳤을 뿐인데 손을 가져가다니. 하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한 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아니, 왜 김상준을 때렸어요?”
상준은 이한의 왼손 아니, 왼손 새끼손가락 손톱 때만도 못한 존재였다.
정말 하찮은, 그것도 오늘 처음 본 놈 때문에 왼손을 잃다니. 하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한의 행동에 얼굴을 구겼다. 이한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김상준이라는 자의 과거를 보니 널 부반장이라고 부르던데.”
“네? 아, 네. 고등학생 때 김상준이 반장, 제가 부반장이었어요.”
“부반장?”
이한이 낯선 언어를 들은 사람처럼 눈매를 구겼다. 하람이 물을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을 책임지는 자를 반장이라고 하는데 저는 부반장, 부책임자였어요.”
“네가 반장보다 못하다는 건가?”
“서열로만 보면 그렇죠.”
상준은 대학 입시 때 리더십 있는 사람이라고 포장하기 위해 반장이라는 직을 반쯤 샀다. 그러다 보니 반장직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거기다 재수까지 없었다. 반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그를 다 싫어했다.
김상준의 본모습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생님도 부반장이었던 하람을 더 챙기면서 상준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이 집안에서 좋은 계급을 가지지 않은 자가 나오다니…….”
오랜만에 상준과의 일을 생각하는데 이한이 짐짓 충격받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하람이 작게 웃었다.
“서른 명의 대표인데요 뭐. 그리고 부반장도 좋은 계급이예요.”
누가 들으면 반장이 엄청 대단한 계급인 줄 알겠다. 소리 죽여 웃다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제가 부반장이라서 때린 건가요?”
이한이 아무리 특이하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계급이 낮다고 때릴까.
황당함을 담아 보는데 이한이 아니라고 하며 술잔을 들었다.
“김상준이라는 자와 네가 싸우는 과거를 봤다.”
“제가 상준이랑 싸웠다고요?”
떡볶이를 먹으며 상준과 언제 싸웠는지를 생각하는데 이한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넌 옛날에도 할 말을 하는 성격이더군.”
“저요?”
“김상준에게 네가 재수 없는 걸 왜 내 탓으로 돌리냐고 하던데.”
단편적이지만 언제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기억났다.
그러니까 협력 수업 관련으로 조를 짜는데 아무도 상준과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상준과 조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하교 시간에 갑자기 시비를 걸어왔다.
무어라고 하든, 늘 그랬듯이 무시하는데 점점 정도가 과해졌다. 결국 화가 터졌다.
‘네가 재수 없는 걸 왜 내 탓으로 해? 네가 애들이랑 잘 지냈으면 이런 일 없잖아. 남 탓할 시간에 네 과거를 돌아보지 그래?’
좋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참고 있던 짜증이 터지면서 있는 대로 빈정거렸었다.
하람은 어릴 때의 일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 뺨을 슬쩍 붉히며 헛기침했다.
“그때 기분이 좀, 별로였어요. 그래서…….”
얼굴에 달아오른 열기가 가라앉지 않는다. 손부채질하며 변명하다가 빈정거린 이후에 있었던 일이 번쩍 생각났다.
“잠깐만. 설마, 상준이가 저를 때린 걸로 해를 가한 거예요?”
치기 어린 충고를 하고 몸을 돌렸다가 네가 더 재수 없다고 외치는 상준의 주먹에 뺨을 맞았었다.
이후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똑같이 주먹을 들었고, 자연스럽게 싸우게 됐다.
혹시나, 하고 묻자마자 이한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장죽 끝을 입가로 가져갔다.
도대체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건지. 어린 날의 싸움을 남에게, 그것도 이한에게 걸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크흠. 그 손은 언제쯤 돌아오나요?”
“이승과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친 게 아니니 금방 돌아올 거다.”
“정도에 따라 다른가 보네요. 불편하진 않으세요?”
“고작 손 하나 없는 것을.”
“고작이라고 하기에는 왼손 자체가 없잖아요…….”
하람의 말에 이한이 피식 웃었다.
“아홉 지옥을 건널 땐 스스로 걷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었다.”
떡을 입가로 가져가던 하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이한을 보았다.
도대체 아홉 지옥은 어떤 곳이고, 이한은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마치 모든 것에 해탈한 것 같은 이한을 보는데 문득 소름이 돋았다. 곧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군요.”
이한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왜인가 했더니 흑염이 절대 꺼지지 않는 것, 인간에게 해를 끼치면 벌을 받는다는 것 등을 이미 다 알고 여유로웠던 것이었다. 다 알고 상준을 친 것이었다.
여상하기 짝이 없는 이한을 응시하던 하람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한이 별다른 대꾸 없이 익숙하게 오른손으로 자작했다.
“그러고 보니 쓰시는 검도 이승의 것에 관여할 수 없다고, 마음만 먹으면 벨 수 있다고 했었죠. 다 경험해 봐서 알고 있는 거였군요.”
오도천륜대왕의 벌이 과한 게 아니라 사실은 이한이 이승에 관여할 수 없도록 불이익을 준 거라면?
사라진 왼손을 가리고 있는 소맷자락을 보던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이한이 의외라는 눈으로 하람을 보았다.
“매번 내 말을 잊고 있어서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매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람이 피식 웃고는 자작하는 이한을 찌푸린 시선으로 보다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혹시, 이한 님도 악귀나 원귀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이한은 분명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 명부의 심판을 받은 죽은 자, ‘망자’였다.
제가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을까 싶어 응시하는데 이한이 잡은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그렇다는 답보다 더 확실한 답으로 보이는 쓰디쓴 웃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한 또한 악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안 했을까.
이한이 악귀라니. 잠깐, 귀신을 베는 이한이 악귀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한을 막을 자가 이승에 있나?
‘오도전륜대왕님이 부리는 망자의 현 목줄 주인.’
“……목줄.”
하람의 말에 이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한 님이 지금의 이한 님으로 남을 수도 있고, 악귀가 될 수도 있는 거군요.”
도대체 목줄이 뭔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목줄을 한 개는 주인이 잡을 수도 있고, 길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목줄이 없는 개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았다. 도망갈 수도, 사람을 물 수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짧게 만났던 강림차사와 일직차사의 반응과 차사를 만났느냐는 이한의 물음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하람이 이를 악물었다. 이한이 한 박자 늦게 입꼬리를 슬쩍 당겨 느른하게 웃었다.
“잘 잡고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른다.”
이한이 술잔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들었다. 곧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그의 가슴에 있는 검은 상처 아래로 길게 늘어진 검은 실타래를 가볍게 그러잡아 약하게 흔들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꼭 사슬을 닮은 목줄이 손길을 따라 일렁였다.
어째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건가 했는데. 저 가슴의 상처가 뭐지, 했는데. 알고 보니 목줄 때문이었다.
충격에 전신이 굳었다. 하람이 경고 어린 말을 끝으로 목줄을 놓고 술을 단번에 넘기는 이한을 보며 그도 모르게 떨리는 두 손으로 깍지 꼈다.
목줄도 충격인데, 지금껏 지켜 준 존재가 죽이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막연하게 믿었던 존재가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이 선뜻 열리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멀거니 있는데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자를 성큼성큼 떠났다.
홀로 남은 하람은 상 옆에 있는 다섯 개의 빈 술병을 보다 느지막이 석산과 재킷을 챙겨 일어섰다. 이한의 방이 아닌 가지고 온 짐이 말끔하게 정리된 방으로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에 가 옷을 벗다가 셔츠에 묻어 있는 검은 액체를 뒤늦게 발견했다.
꼭 피 같아 팔에 소름이 돋았다. 황급히 옷을 벗고 씻었다.
석산이 말라죽을까 봐. 빈 페트병에 물을 적당히 담은 뒤 석산을 넣었다. 해가 강하게 들어오지 않는 곳에 두고 어느새 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