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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22)화 (22/87)
  • 22

    피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그리고 원귀가 상체를 들썩이며 끅끅 소리 내어 울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릴 죽인 새어머니와 남동생은 저희가 죽으면서 아픈 아버지를 두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억울해서, 억울해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습니다!』

    원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이 원한을, 이 원통함을! 어떡해야 합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원귀 아래로 피눈물이 고였다. 서러움 가득한 말을 숨죽여 듣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가 원귀를 보았다.

    “새어머니라는 자와 남동생이라는 자의 이름이 뭐지.”

    이름을 물을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원귀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이름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위치를 말했다. 이한이 알겠다, 같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원귀가 이한의 답을 기다리던 중 차사가 온다며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급하게 떠났다. 하람이 원귀가 떠나고도 말이 없는 이한을 보았다.

    “뭘?”

    “아까 그 원귀 원한 해결해 주실 건가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네?”

    이한이 장죽과 검을 없애고 훌쩍 일어섰다. 하람이 일어난 이한을 멀거니 올려다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 일어섰다.

    “설마, 아무것도 안 할 건가요?”

    “고민 좀 해 보고. 옷 입어라.”

    이한이 벽에 걸려 있는 하람의 재킷을 턱짓했다. 하람이 입을 열었다가 이내 재킷을 재빨리 입었다.

    “도와줄 수 있으면 돕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보다 먼저 할 게 있다.”

    “네? 뭔가요?”

    원귀의 원통함을 다 해결해 줄 것처럼 듣더니 억울한 원한 해결보다 더 급한 게 있단다. 하람이 황당함을 담아 보는데 뒷짐 지고 선 이한이 문을 턱짓했다.

    “따라오시려고요?”

    “어.”

    “사람들 있을 텐데요?”

    “알아.”

    “사람들 죽…….”

    “이미 한바탕했으니 앞장서라.”

    뭐지, 이 당당함은? 하람이 어서, 하고 말하는 이한을 빤히 보다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있었던 곳이 상주방이었는지 접객실이 보였다.

    여전히 사람 가득한 접객실을 보며 한 발짝 나가는 순간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일제히 컥! 소리를 냈다. 하람이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있던 사람들이 꼭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허옇게 질렸다.

    누군가는 목을 부여잡고서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양팔을 부여잡고 벌벌 떨었고, 또 누군가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당황스러워 접객실을 불안하게 훑던 중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저는 신을 모시고 있어 잘 모르지만 오한이 나고, 숨이 막힌다고 하더군요.’

    설마, 하고 이한을 보는데 이한이 앞에 있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여상하게 접객실을 훑었다.

    “이한 님, 이거 설마…….”

    “저깄군.”

    이거 설마 당신 때문에 그런 거냐고 말하는데 이한이 갑자기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아니, 사람들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게 안 보이나? 하람이 벌써 저만치 앞서간 이한을 황급히 뒤따랐다.

    “이놈과 사이가 나쁘군.”

    이한이 꺽꺽거리고 있는 상준의 옆에 서서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것도 많이 안 좋군.”

    “……네?”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이한이 왼손으로 상준의 뒤통수를 잡더니 테이블에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하람이 놀라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먼저 가지.”

    이한이 상준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유소를 빼내더니 하람의 손에 쥐여 주고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숨을 쉬지 못해 뻣뻣하게 있던 사람들이 몸을 늘어뜨렸다.

    “……뭐, 뭐야?”

    “아까부터 무슨…….”

    “아으, 머리야…….”

    “어후, 무슨…… 어, 하람아?”

    “어, 이하람!”

    막혀 있던 숨구멍이 뚫린 듯 다급하게 숨을 내쉬던 친구들이 하나, 둘 정신 차렸다.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상준을 제외하고 테이블 옆에 서 있는 하람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았다. 하람이 쥐고 있는 유소를 주머니에 넣고는 친구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놀라게 했네. 미안.”

    “야! 괜찮냐?”

    “언제 일어났어?”

    “방금.”

    이한이 사람을 때릴 줄이야. 아니, 직접 때리지는 않은 건가.

    하람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짚고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준의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진짜 간다고 말했다.

    “운전할 수 있겠냐?”

    “아니, 야, 그러지 말고 하람아. 내가 데려다줄게. 내 차 타고 가자.”

    기철이 같은 방향이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차를 태워줄 기세에 하람이 두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 너무 멀쩡하니까 괜찮아.”

    “무슨 소리야. 너 쓰러졌다가 이제 눈 떴어.”

    “기철이 차 타고 가!”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몸이 무거운 것 외에는 상태가 좋았다.

    “나 정말 괜찮고, 누나 차 타고 와서 차 갖고 가야 해.”

    하람이 인사한 후 바로 몸을 돌렸다.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접객실을 나갔다.

    조금 전까지 이한과 있었던 덕분인지 종알종알 떠들며 따라붙던 귀신들이 따라오지 않았다. 한결 나은 상태로 주차장으로 가 차 운전석에 앉았다. 조금 빠른 속도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진에게 차 키를 주었다. 그러고는 사랑채로 넘어가는데 정자 옆에 있는 나무 앞에 서 있는 한복 차림의 이한을 발견했다.

    이름을 부르려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가만 보다 발소리 죽여 정자와 가까운 곳에 있는 굵직한 소나무 뒤에 숨었다.

    고개만 빼 앞을 보다 이한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까마귀를 발견했다.

    “제가 사람을 치다니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마당에 이한 혼자 있고, 그의 앞으로는 까마귀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다.

    “이미 벌을 받고 있는데 1, 2년 늘어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예, 손을 가져가셔도 됩니다.”

    설마 저 까마귀와 대화하는 걸까. 아니면 저한테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대화하는 걸까.

    도대체 누구와 대화하는지 보려고 지그시 노려보는데 꼭 이한을 내려다보는 것 같던 까마귀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날개를 얕게 달싹였다. 동시에 그 앞에 있던 이한이 몸을 홱 돌렸다. 하람이 움칠, 짧게 떨었다.

    “……애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인사는 다음에 하시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는데 딱 걸렸다. 하람이 소나무 옆으로 쭈뼛쭈뼛 걸어 나갔다.

    이한이 소리 내어 한숨 쉬며 팔짱 끼는 순간 까마귀가 푸드득 소리 내어 가지 위로 날아올랐다. 곧장 하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팔과 손목을 지나 손바닥에 내려섰다.

    『조만간 보자꾸나.』

    별안간 머릿속에 나이가 느껴지면서 낮은 울림이 있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곧 까만 깃털이 흩날리더니 까마귀가 사라지고 그 대신 새까만 석산 한 송이가 손바닥에 놓였다.

    까만 석산을 처음 봤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보는데 이한이 다가왔다.

    “혹시 차사 만났나?”

    아니, 차사 만난 걸 이한이 어떻게 알지?

    그보다도 병원에서 차사를 만나다 못해 대화까지 했다.

    이한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석산을 보며 눈치 살피는데 이하람, 하고 불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

    “대화까지 했고.”

    “……네.”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이한이 서늘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그럼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을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정자로 갔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던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가 뒤를 따랐다.

    “기대 안 하셨다고요?”

    “어.”

    “저 차사랑만 말하고 귀신이랑은 말 안 했습니다.”

    “나는 분명 네 얼굴을 아는 자를 제외하고 대화하려고 하지도, 답을 하지도, 이름을 알려주지도 말라고 했고.”

    맨발을 수건에 닦고 정자 위로 올라가던 이한이 그렇지 않냐는 듯 뒤따라온 하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하람이 헛기침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잠시 멈춰 섰던 이한이 정자 위로 올라가 정자에 있는 주안상 앞에 앉았다.

    “원귀가 씐 것만 봐도 알지.”

    “……그건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 내 떡볶이.”

    하람이 이한의 맞은편에 털썩 소리 내어 앉았다.

    석산을 바닥에 두고 재킷을 벗다가 주안상 중앙에 떡하니 놓여 있는 영진이 준 떡볶이를 발견했다. 맛있는 냄새에 반색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 박종연이라는 자 때문에 이름이 밝혀지고, 김상준이라는 자 때문에 원귀에게 꼬였다는 거 알고 있다.”

    “어떻게요?”

    떡볶이를 앞접시에 옮기던 하람이 어느새 장죽을 입에 문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장죽을 문 채로 황당한 얼굴을 했다.

    “내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볼 수 있다는 걸 그새 잊었나?”

    이한이 과거와 미래를 보는 자라는 걸 그새 잊고 있었다.

    제 과거를 볼 수 없어 모를 줄 알았는데.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될 줄이야. 하람이 놀란 얼굴을 했다가 떡볶이를 마저 옮겼다.

    “아까 그 까마귀 뭐예요?”

    주제를 바꿔야 할 것 같다. 모른 척 아까부터 궁금하던 까마귀를 꺼냈다.

    이한의 반응을 살피며 떡볶이를 먹는데 영진이 다움이의 입에 맞춰 떡볶이를 만들었는지 떡볶이가 달다. 매운맛이 조금도 없는, 색만 빨간 떡볶이를 먹는데 자작하던 이한이 새카만 석산을 보았다.

    “오도전륜대왕.”

    “아, 오도…… 네?”

    “오도전륜대왕의 현신이다.”

    얼굴만 한 까마귀가 명부 시왕 중의 한 명인 오도전륜대왕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되묻자 이한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 모습으로 나타나기엔 다소 위험하니 현신으로 나타난 거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어디에서도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이한의 말은 어딘가 묘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람이 떡볶이 먹던 것을 멈추고 이한을 보았다.

    “인간과 귀신, 요괴 등. 수많은 존재가 사는 이승과 마찬가지로 이 너머에도 수많은 존재가 살고 있다.”

    이한이 한쪽 다리를 반으로 접어 앉았다.

    “그중에 신과 명부의 왕들은 이승에 직접적으로 완전히 관여할 수 없다. 또 나타나면 오늘 네가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모습 그 이상의 문제가 생긴다.”

    이한의 말에 그가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숨을 쉬지 못하던 사람들이 바로 생각났다.

    “……그럼 일이 많다는 건 죽은 자들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심판을 해야 할 죽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 길게 쉴 시간이 없다.”

    언젠가 태어나는 수보다 죽는 수가 더 많다는 뉴스를 본 적 있었다.

    오도전륜대왕이 환생을 심판하는 자이니 바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거다. 하람이 그렇군요, 하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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