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9)화 (19/87)

19

가지 말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벽에 불안하게 기대서서 장죽을 입에 물고 태우는 이한을 보던 하람이 방을 나갔다.

집에서 옷을 챙길 때 만약을 대비해 검은 슈트를 챙겼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나갔다가 사랑방 맞은편에 있는 침방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하고 들어갔다가 보기 좋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옷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한과 있는 동안 우렁 각시와 우렁 도령이 정리한 듯싶다. 신기해하다 행거에 걸려 있는 슈트를 꺼내 갈아입었다.

슈트에 어색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가자마자 누마루에서 장죽을 태우던 이한과 눈이 마주쳤다. 하람이 인사를 하기 위해 이한에게 다가가는데 이한 또한 다가왔다.

“가져가라.”

이한이 검붉은 색 유소(流蘇)를 내밀었다. 유소를 본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이한 님 검에 걸려 있던 거 아닌가요?”

자세히 보니 이한이 가지고 있는 검에 노리개처럼 달려 있던 그것이다. 하람이 이걸 왜, 하고 이한을 보았다.

“내 것을 가지고 있고, 보이면 어리숙한 것들이 알아서 피할 거다.”

이한이 일부라도 반드시 밖에 내보이라고 하며 하람의 손에 유소를 쥐여 주었다.

“내가 아끼는 것이니 조심해서 가지고 있어라.”

하람이 유소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바지 주머니에 넣고 술을 밖으로 조금 빼냈다. 이한이 한숨을 쉬고는 장죽을 넘기고 하람이 하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병원에 가고부터 몸이 급격히 무거워지고 어지러워질 거다. 속에서 무언가 나오려고 하면 억지로 참지 말고 뱉어라.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을 잡지도, 따라가지도 말고.”

넥타이 양 끝을 잡고 움직이는 이한의 손이 거침없다.

하람이 대답하지 않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이한의 손을 보다 한 박자 늦게 네, 하고 답했다.

“네가 얼굴을 아는 자를 제외하고 대화하려고 하지도, 답을 하지도, 이름을 알려주지도 말고.”

넥타이 매듭이 완성됐다. 멀어지는 이한의 손을 보던 하람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한을 보았다.

“위험할 거 같으면 내 이름을 불러라.”

고작해야 장례식장에 가는 것뿐인데.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도 걱정된다는 얼굴을 한다.

“알겠습니다.”

괜히 긴장됐다. 하람이 장죽을 넘기고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했다.

“……돌아오면.”

구두를 신는데 등 뒤에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하고 뒤를 보았다.

“물었던 것들을 답해 주겠다.”

이렇게 또 넘어가는 건가 했는데 답을 해 준다고 한다. 하람이 의외라는 눈으로 이한을 보다 다녀오겠다고 인사했다. 손을 흔들어 주지도, 그러라는 답을 하지도 않는 이한을 뒤로하고 사랑채를 떠났다.

이한이 과도하게 걱정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주머니에 든 유소 덕분인지 걱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이한의 말대로 누가 몸을 위에서 누르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러면서 어딘가 스산한 느낌까지 들었다.

긴장하며 차에서 내렸다가 괴이한, 분명 사람이 아닌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 한쪽이 움푹 파인 자, 다리 하나로 불편하게 걷는 자, 아이를 품에 안고 느리게 떠도는 자, 몸에 칼자국이 가득한 자 등. 하나같이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고, 초점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형아, 형아.』

『우리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이리저리 피하며 걷는데 그 모습에 저희들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하던 것들이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며 계속해서 말을 걸어댔다.

이한이 답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묵묵히 걷는데 끈질기게 따라왔다.

어쩐지 병원에서 벗어날 때까지 쫓아올 것 같다. 귀라도 틀어막을까 하다 그럼 더 이상할 것 같아 대신 주먹을 쥐었다.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주문을 외우듯 혼잣말을 읊조리며 ATM 기기에서 돈을 뽑았다.

그대로 돌아섰다가 사고사로 죽은 듯 흉측한 몰골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몸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바닥에 계속 고이는 모습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꼴에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손으로 급하게 입가를 틀어막고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우욱!”

이한이 제 미래를 볼 수 없다고 하는데도 그의 말대로 몸이 무거워지고, 토했다. 쓰려 오는 속에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돈만 보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기통을 부여잡은 채 숨을 고르던 하람이 헛웃음을 짧게 터트렸다.

“……내가 억지 부려 놓고는.”

가지 말라는 사람한테 억지 부려 놓고 후회하고 있다.

이 사실을 이한에게 절대로 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얼굴과 손을 씻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과 정면으로 시선이 만났다.

푸른빛이 비칠 정도로 창백한 얼굴, 남자다우면서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그리고 흰색 상의에 감색 바지와 재킷을 입고 옆구리에는 웬 붉은색 밧줄 뭉치를 걸고 있다. 그도 모자라 팔찌까지 하고 있다.

패션과 분위기가 어딘가 묘한 남자를 빤히 보다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적패지(붉은 천에 저승으로 가야 할 자의 이름을 쓴 것)에 이름이 없는 자가 날 보다니.』

놀랍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다는 남자의 기색에 뒤늦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람이 놀라 한 걸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목소리가 다소 허스키한 남자가 딱딱하게 굳은 하람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삐죽 나와 있는 유소를 보았다. 아하, 소리를 냈다.

『‘그놈’의 새 주인이라는 자인가 보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는데 남자의 입에서 어딘가 묘한 말이 나왔다. 하람이 스리슬쩍 피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이번 대는 남자인 모양이야.』

“……절, 아십니까?”

말을 걸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고 머리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입이 먼저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목줄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생겼네.』

이한이 말하지 말라고 했었다. 뒤늦게 후회하는데 남자의 입에서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렸다.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훅 가라앉았다.

“저는 목줄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니, 목줄이라니. 누가 들으면 이한이 개인 줄 알겠다.

어이가 없고, 기분도 좋지 않다는 티를 겉으로 드러내자 내려왔던 남자의 눈썹이 다시 위로 올라갔다.

『목줄의 주인이 아니다?』

“네. 이한 님은 개도 아니고, 목줄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목줄을 한 이한이라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하자 남자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놈의 주인 아니라고 할까 봐, 네놈도 아주 맹랑하구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한만큼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건 확실히 알겠다.

“저와 이한 님은 별개입니다.”

얼굴을 아는 자를 제외하고 대화하지도, 답을 하지도 말라는 이한의 말을 완전히 잊었다. 남자의 말에 지지 않고 받아치며 답을 기다리는데 남자가 비뚜름하게 다물고 있는 입술을 열었다.

『……네놈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이 왜 궁금하십니까.”

『내 특별히 너를 직…….』

『아이고, 강림차사 님!』

그렇지 않아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남자가 이를 갈듯이 살벌하게 읊조리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남자의 외침에 말이 묻혔다.

강림차사? 강림차사를 보던 하람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하람을 보던 강림차사가 뛰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아이고오 소리를 내며 달려온 남자가 강림차사의 옆에 섰다.

『시간 다 됐는데 왜 아직도 여기 계십니까?』

강림차사가 3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면 새로 온 남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어려 보였다. 그 모습에 설마, 하고 입이 조금 벌어졌다.

『월직차사, 이놈 얼굴 잘 기억해 둬라. 앞으로 자주 만날 거다.』

『아이, 차사 님, 깨끗한 손을 왜 자꾸 씻으십니까. 이번에 또 늦으면 염라대왕님이 쉴 시간 없이 굴린, 이놈이 누굽니까?』

강림차사에게 하소연하듯 말을 쏟아내던 월직차사가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따라서 월직차사를 보았다.

『오도전륜대왕님이 부리는 망자의 현 목줄 주인.』

강림차사의 말에 월직차사가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하람을 위에서 아래로 주욱 훑었다.

『……아. 그렇군요.』

월직차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강림차사를 보았다.

『정말 늦었습니다. 일직차사 님 혼자 두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 이제 그만 가야 합니다.』

요즘에는 씻김굿이 없어서 난동 부리는 걸 잘 아시지 않느냐는 월직차사의 말을 들으며 하람을 보던 강림차사가 몸을 돌렸다. 가만 서 있는 하람을 보며 콧방귀 뀌고는 멀어졌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월직차사가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는 하람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하람이 어어, 하고 따라서 엉거주춤 인사했다. 월직차사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강림차사를 따라 순식간에 떠났다.

“……영화 속 사람들을 볼 줄이야. 아니, 사람들이 맞나?”

언젠가 심심하다고 데이트나 가자는 우진과 영화를 본 적 있었다. 인간은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치는데 그 49일 동안 겪는 일에 대한 내용의 영화를.

그 영화 속에 나오는 강림차사와 월직차사를 보았다.

어쩐지 난데없는 곳에서 연예인을 본 것처럼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하람이 아무도 없는 복도를 멍하니 보다 병원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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