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8)화 (18/87)

18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한에게 제 뜻을 전했다. 하람이 멈췄던 차를 다시 움직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영진에게 택배 가져오라는 전화가 왔다. 잊지 않고 택배를 챙겨 본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접이식 카트를 질질 끌며 안채로 갔다.

“하람아!”

안채 앞으로 가자 영진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뭐 이리 많이 사 왔어?”

“아, 그냥…….”

여자아이 귀신에 놀라 과자를 보이는 족족 담았다. 큰 상자에 과자가 가득했다. 놀라 하는 영진을 대신해서 건넌방에 상자를 두고 나왔다.

“참, 네가 새 주인 됐다면서?”

벗은 신발을 다시 신는데 갑자기 영진이 등을 퍽! 소리 나게 쳤다. 난데없이 등짝을 맞은 하람이 얼굴이 찌푸리며 상체를 비틀었다.

“어떻게 알았어?”

“할머니가 알려 주셨어.”

“할머니 일어나셨나 보네.”

“응. 아, 할머니 아파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셨으니 인사 가지 마.”

순영에게 문안 인사를 못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기 위해 안방으로 가려는데 아프다고 한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많이 아프신 걸까. 하람이 다급하게 올라가는데 영진이 팔을 잡아 세웠다. 하람이 영진을 보았다.

“신을 모시게 됐을 때처럼 계속 모시던 신이 빠졌잖아. 후유증 같은 거라고 당분간 문안 인사도 오지 말라셨어.”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냥 할머니 말씀 듣는 게 좋아.”

영진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른다. 하람이 영진의 말에 답답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영진이 그런 하람을 흐음, 소리 내며 살폈다.

“나는 우리 다움이가 다음 주인 될 줄 알았는데, 네가 됐네.”

“무슨 말이야?”

“다움이가 할머니랑 비슷하거든.”

무슨 말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영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신이나 영물 같이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보거든.”

아무래도 본가를 떠나 있었던 사이에 다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하람이 저도 이제 귀신이 보인다고 말하는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다 음? 소리를 냈다.

“……다움이가 할머니랑 비슷하다는데 내가 왜 주인이 됐지?”

“응? 너도 몰라?”

“응.”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신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보다 너는 신병 기운 없어?”

“신병?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이한의 주인이 되기로 했는데 말로만 듣던 신병 같은 병을 앓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한에게 물어봐야 할 듯싶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사랑채 쪽을 힐끔 보았다.

“그래? 참, 떡볶이 남았어!”

영진이 부엌으로 가 떡볶이가 든 냄비를 가지고 와 내밀었다. 하람이 냄비를 카트에 두었다.

“아, 누나 차 저녁에도 빌릴 수 있을까?”

“왜? 뭐 나갈 일 있어?”

“장례식장을 가야 할 것 같아서.”

“장례식장? 알았어. 곱게 가져와야 해.”

차 키를 돌려주지 않고 영진에게 인사했다. 더 할 일이 없어 사랑채로 갔다.

이한이 먼저 사라졌다. 사랑채에 있겠거니 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왔나.”

어느새 반투명한 감색 창의에 흰색 바지를 입고 장죽을 들고 있는 이한의 앞에 그와 같이 한복 차림에 키가 훌쩍한 남자가 서 있었다.

상투를 튼 머리에 흑립을 쓰고 옥색 도포를 걸치고 있는 남자는 마치 선비 같았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뭐지, 하다가 흑립에 그림자 진 남자의 눈이 노란색이고 얼굴 피부가 꼭 뱀의 비늘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설마, 하고 긴장하는데 남자가 눈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낮지만 부드러운 음색으로 인사하더니 허리까지 짧게 숙인다. 하람이 따라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인사해라. 내일부터 인간 이외의 것을 알려줄 구렁덩덩신선비다.”

“구렁더, 네?”

『구렁덩덩신선비입니다.』

한 번에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몹시 잘생긴 구렁덩덩신선비가 호를 그리며 순하게 웃어 보였다. 하람이 구렁덩덩신선비를 멀거니 보다 장죽을 물고 있는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아, 소리를 냈다.

“구렁이 요괴다.”

별거 아니라는 듯 여상한 말에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하람이 헉! 하고 뒷짐 지고 선 구렁덩덩신선비에게서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사람을 해하지 않는 놈이니 겁낼 것 없다. 구렁덩덩신선비는 내일부터 이놈을 잘 가르쳐라.”

『그러지요. 그럼 하람 님, 내일 뵙겠습니다.』

구렁덩덩신선비가 웃더니 다시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려 사랑채 뒤쪽을 향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떠났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던 하람이 다시 이한을 보았다.

“구, 구렁이 요괴라니. 뭐, 뭔가요?”

“배우고 싶다고 하기에 똑똑한 것을 가지고 왔는데.”

“똑똑한 것이요?”

“구렁덩덩신선비는 박식하면서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요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이한이나 순영에게 배우는 건가 했는데 전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선생님이 나타났다. 얼떨떨한 나머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을 텐데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건가?”

“네? 아, 아니요.”

“냄비랑 짐은 두고 들어와라.”

이한이 장죽을 입에 물며 사랑채 사랑방에 들어갔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한 하람이 느지막이 카트를 사랑채 건물 가까이 두고 신발을 벗고 사랑방에 들어갔다.

외출한 사이 우렁 각시가 방을 치웠는지 방이 말끔했다.

하람이 보료 위로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장죽을 입에 물고 있는 이한의 앞에 방석을 두고 앉았다. 마른침을 삼켰다.

“……저, 이한 님.”

“장례식장에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라고 말할 건가.”

하람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던 말이 이한의 입에서 나왔다. 하람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 떻…….”

“앞서 말한 것처럼 안 된다. 다른 사람을 보내든 해라.”

이한이 혀를 차고는 장죽을 다시 입에 물었다. 하람이 턱이 한껏 당겨질 만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제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친구가 죽은 것도 아니…….”

“이한 님.”

친구가 죽은 것도 아니라니. 말이 심한 거 아닌가. 참지 못하고 이한의 말을 자르자마자 이한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이하람.”

이한이 전에 없이 낮은 목소리로 하람을 부르고 반으로 접고 있는 다리 위로 장죽을 잡고 있는 팔을 걸쳤다.

“순영을 위한 네 노력이 가상해서 예뻐하고, 봐주고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네 주제를 알고 본분을 지켜라.”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고는 흉흉하게 뜨고 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희부연 연기와 함께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아무 말 없이 이한을 보던 하람이 주먹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정말, 제가 인간이 아닌 것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전부입니까?”

이한이 인간이 아닌 것들을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제가 견딜 수 있을 것 같냐고 했었는데, 하람은 왜인지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까.”

제가 모르고, 설명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어서 못 가게 하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감은 눈을 서서히 뜨는 이한을 보며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주인이 돼야 하는 이유부터 이사하라는 이유, 장례식장에 가지 말라는 이유까지. 제대로 설명해 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게 설명해 주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숨기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이한은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데, 정보를 알려 주지 않는다. 하람이 반드시 답을 듣고 말겠다는 듯 이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깜빡이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어울리지 않게 강경한 하람의 모습에 이한이 혀를 차며 장죽을 입가로 가져갔다.

‘……혹, 제게 숨기는 게 있지는 않으십니까?’

물부리를 입에 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꽃향기를 닮은 향이 맡아졌다.

또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곧장 벌떡 일어나 창을 벌컥 열어 밖을 빠르게 훑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또 놓쳤을까. 눈에 보이는 풍경을 훑었으나 아무도 없다. 그리고 힘 하나 없는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고, 향도 사라졌다. 창턱을 짚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 너머를 한참 응시하던 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하람을 보는데 문득 낯선 기억이 들었다.

곧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 따뜻한 복숭앗빛 뺨, 조심스럽게 품에 안기는 몸, 은근하게 맡아지는 모란 향. 낯설면서 어딘가 낯설지 않은 기억에 미간이 좁혀졌다.

“……숨기는 건 없다. 그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말해 주려고 했었다.”

숨기는 것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한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기억에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나는 모든 게 다 처리되면 말하려고 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롭던 이한이 이상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하람이 고개를 아래로 기울인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기대 서 있는 이한에게 가 소리 죽여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한 님…….”

괜찮으시냐고 물으려는데 별안간 손목이 그악스럽게 틀어 잡혔다. 그리고 시선이 부딪쳤다. 하람이 숨을 훅, 삼켰다.

“나는…….”

이한의 오른쪽 눈 아래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곧 턱 아래로 뚝 떨어졌다.

마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인다. 말을 더 잇지 못하는 이한을 보던 하람이 저도 모르게 떨리는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이한과 하람, 모두 무어라고 말을 하지 않는 동안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계속해서 더해졌다. 하람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압박감에 하람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진동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그 거슬리는 소리에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이한이 정신 차렸다. 하람을 보던 시선을 돌려 제가 잡고 있는 창백하게 질린 손목을 보고, 놓았다. 하람이 통화하는 사이 뺨에 길게 내려온 눈물을 닦아내고 손을 멀거니 보았다.

“이한 님.”

왜 눈물이 나왔는지 몰라 의아해하는데 이름이 불렸다. 이한이 어느새 통화를 끝낸 하람을 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꼭 가야겠다는 하람의 단호한 모습에 결국 이한이 졌다. 하람을 보던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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