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생각해 보니 이한과 있는 동안 씻지 않았다. 이한이 냄새를 맡는지, 맡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냄새가 날 것 같아 샤워하기로 정했다.
이한이 오기 전에 씻고 나가기 위해 급하게 옷을 벗었다.
평소보다 보디 워시를 많이 쓰고, 꼭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빠르게 씻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개운함에 피식 웃는데 별안간 벽에서 이한의 상체가 불쑥 나왔다. 하람이 놀라 소리 지르며 잡고 있던 샤워볼을 내던졌다. 이한이 벽에서 나오며 아무렇지도 않게 피했다.
“옷이랑 짐 몇 개 가지고 온다더니 왜 씻고 있지?”
이게 짐 싸는 거냐는 듯 이한이 하람의 젖은 머리카락에서부터 놀란 얼굴, 하얀 거품 가득한 몸을 지나 발을 보았다. 하람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 같이 지내는 동안 씻지 못해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씻는데…… 저기, 그 시선 좀 어떻게…….”
너무 대놓고 훑는 거 아닌가.
민망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하람이 말을 더듬거리며 양팔로 슬그머니 제 가슴을 가리고, 몸을 옆으로 슬쩍 틀었다. 이한이 코웃음 쳤다.
“볼 것도 없는데 무슨, 빨리 씻고 나와.”
집터가 너무 더러워,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희부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뭐야…….”
방금까지 이한이 있던 자리를 보던 하람이 어느새 들고 있는 한쪽 다리를 내리고 어색하게 마저 씻었다.
“이사 가라.”
씻고, 옷을 입고 나가자 언제 왔는지 거실에 팔짱 끼고 서 있는 이한이 다짜고짜 이사 가라고 한다.
“……죄송한데 앞뒤를 좀 더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사를 무슨 1층 편의점 심부름 보내듯이 아무렇게나 말한다. 황당해서 얼굴을 구기며 묻자 이한이 혀를 찼다.
“집터가 안 좋아. 여기서 더 지냈다간 병이 생길 거다.”
“병이요?”
“그래. 다 챙겼으면 이만 가지.”
이한이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다는 듯 연기가 되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을 길게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왜 저러는 거야. 그리고 왜 맨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데.”
어이가 없어서. 하람이 다시 한번 더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접이식 카트에 상자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어깨가 왜 이렇게 딱딱하지?”
집에 갔는지 차에 이한이 없다. 그런가 보다 하고 트렁크에 상자를 싣는데 아까부터 어깨가 딱딱하고, 허리가 찌뿌듯하다. 하람이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치다 행동을 멈췄다.
“……설마, 내가 자는 동안 때리나?”
짐을 얼마 챙기지도 않았는데 어깨에 뭐가 있는 것처럼 무겁고, 자꾸 결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던 몸이 아프다. 하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어볼 게 한, 두 개가 아니네.”
고개를 저으며 운전석에 앉았다.
본가로 가는 길에 대형마트가 보였다. 영진의 심부름이 생각나 마트 주차장으로 가 차를 세웠다. 여상하게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오렌지와 바나나, 사과 등. 과일을 이것저것 카드에 담으며 과자 쪽으로 가는데 어디선가 흑흑, 흑흑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트와 어울리지 않는 소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보던 중 진열대가 없는 벽 앞에 쪼그려 앉아 우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엄마를 잃어버렸나 싶어 아이에게 다가가 똑같이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왜 혼자 있어?”
아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 잃어버렸어?”
하람의 물음에 아이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하며 주변을 살폈다.
낯선 사람이랑 말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걸까. 아이를 보던 하람이 어색하게 웃는데 아이가 시선을 맞췄다.
『내가 보여요?』
짧은 물음에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람이 도망치듯 상체를 뒤로 훅 물렸다.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훑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트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나이 든 여자와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이상한 사람 보듯 보고 있었다.
『엄마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안 와요.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한테 데려다주세요…….』
귀에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아이를 보았다가 병아리색 원피스 아래로 다리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하람이 손을 내미는 아이를 피해 다급하게 벗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카트 손잡이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나왔다.
땀이 얼마나 나오는지 눈까지 내려왔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 걷던 하람이 멈춰 섰다. 곧장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카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주저앉았다.
“……아, 맙소사.”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덜덜 떨며 이마를 짚고 잠시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화들짝 놀라 하며 몸을 뒤로 뺐다.
“손님, 괜찮으세요?”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는 인상 좋은 중년 여자의 얼굴을 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또 귀신일까?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이 살아 있는 사람 같긴 한데.
구분할 수가 없어 여자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훑다가 아이와 다르게 제대로 다 보이는 몸에 힘없이 웃어 보였다.
“……아, 현기증 때문에 잠깐 쉬고 있는 거예요.”
귀신을 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현기증 핑계를 대며 괜찮다고 하자 여자가 진짜인지 확인하듯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다.
눈에 띄게 떠는 손으로 땀을 훔쳐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몸 상태가 나아지자 혹시나 하고 주변을 살핀 뒤 숨을 길게 뱉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린다는 것이 이런 거였나.”
예상보다 빠른 깨달음과 만남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카트 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한참 멀거니 앉아 있던 하람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래도 하겠냐는 이한의 말에 하겠다고 제가 직접 말했다. 정신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크게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눈에 보이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과자를 눈에 보이는 족족 담았다. 곧바로 계산대로 가 빠르게 계산하고 주차장으로 가 차에 탔다.
“하…… 피곤해.”
한 것도 별로 없는데 몹시 피곤하다. 차에 타자마자 핸들에 이마를 기대고 축 늘어져 있는데 시야에 연기가 보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은 이한이 보였다.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이군.”
“……예.”
정말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드는 이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찾아달라는 애를 만났는데, 다리가 없었어요.”
아이는 동글동글하면서 순한 노앵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도망칠 정도로 오싹했다. 하람이 다시 떠오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혹 손을 잡았거나, 따라가거나 하진 않았고?”
“……네.”
“잘했다.”
의외라는 얼굴로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한을 보니 어쩐지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졌다. 숙이고 있는 상체를 바로 했다. 안전벨트를 하고 차 시동을 걸었다.
마트에서 멀어질수록 빠르게 뛰는 심장 속도가 느려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핸들을 부여잡고 운전하던 하람이 이한을 힐끔 보았다.
“혹시 제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나요?”
그러고 보니 인간 외의 것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뒤늦게 물으며 저리는 손을 쥐락펴락하는데 허벅지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하람이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친구 종연의 이름에 거치대에 두고 전화를 받았다.
- 하람, 바쁨?
“운전 중이라 통화 길게 못 해.”
- 아아, 짧게 할게. 경수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대학병원 장례식장이라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왜 이한의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한을 짧게 보았다가 그러냐고 하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 한 놈 일하고 있어서 일곱 시에 갈까 하는데 넌 어떻게 할래?
“나도 가야…….”
경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한 친구였다. 안 갈 수가 없어 간다고 하는데 별안간 계속 가만히 앉아 있던 이한이 손을 뻗어 말을 막았다. 하람이 말을 멈췄다가 종연에게 제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갑자기 막으세요?”
“가지 마라. 가서 좋을 것 없다.”
이한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들었던 팔을 내렸다. 신호에 걸린 틈에 이한을 보던 하람이 그럴 수 없다고 하며 정면을 보았다.
“잠깐이라도 가야 해요.”
하람의 단호한 답에 이한이 한숨 쉬며 이마를 덮는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넘겼다.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곳이 어딘지 아나? 바로 병원이다. 그리고 장례식장은 죽은 자의 장례를 지내는 곳이다. 온갖 것이 가득하다.”
정면을 보며 읊조리던 이한이 하람을 보았다.
“그것들을 이제 막 보기 시작한 네가, 그것도 내가 없는 상황에서 견딜 수 있을 것 같나?”
네가 감히? 하고 떠보는 것 같은 이한의 물음에 하람은 잠시 잊고 있었던 마트에서 보았던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다.
“그림 귀신과 있을 때 아무것도 못 했던 것을 생각하고 자중해라.”
그림 귀신을 만났을 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참고, 떠는 것 외에는 못 했다. 심지어 여자아이를 만났을 때는 도망갔다. 하람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두 눈을 감은 이한의 모습을 보다 핸들을 돌려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알려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정면을 보는 몸을 돌려 눈을 뜨기 시작한 이한을 보았다.
“이한 님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귀신을 봤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계속 피하고, 숨을 생각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알려주시면 배우겠습니다.”
하람은 순영과 조상들이 이한과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운전기사처럼 그저 목적지에 가고,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하고 싶고, 빨리 끝내고 싶었다.
들리지 않는 답을 기다리며 깍지를 끼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이한이 소리 내어 한숨 쉬었다.
“……넌 정말 내 말을 지독하게 안 듣는구나.”
이한이 피곤한 기색을 비추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점점 모습을 지웠다. 조수석에 희부연 연기가 떠돌다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