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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16)화 (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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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튼을 직접 누르면 안 되는 이유를 물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들렸다. 하람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훑는 이한을 멍하니 보았다.

    “적어도 둘. 사고도 있었고.”

    “무슨, 사고…….”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사고라니. 오싹함에 조심스레 묻는데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내렸다. 이한이 따라서 내렸다.

    특별한 것 없는 복도가 어쩐지 오늘따라 좀 무섭게 느껴진다.

    마른침을 계속 삼키며 걷다 현관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하고 번호키도 직접 누르지 않고 핸드폰으로 눌렀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디퓨저 향과 먼지가 반겨주었다. 하람이 어느새 살벌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 이한에게 편하게 들어오세요, 하고 들어갔다.

    “편하게 들어갈 수가 없군.”

    “네?”

    “불을 모두 켜라.”

    신고 있는 구두를 벗지 않고 선 이한이 갑자기 불을 켜라고 한다. 하람이 본능적으로 조명을 모두 밝혔다. 이한이 잡고 있던 검의 끝으로 현관문에 걸려 있는 그림 족자를 툭툭 쳤다.

    “네가 직접 사서 걸었나?”

    “네? 아니요. 선물 받은 겁니다.”

    세로로 긴 족자는 친구가 현관에 식물이나 관련된 것이 있으면 좋다면서 집들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었다.

    “쯧. 물러나라.”

    가정집에 하나쯤 있을 법한 색색의 꽃 사이로 어린 소녀가 있는, 정말 평범한 것인데. 뭐지, 하는데 이한이 갑자기 칼자루를 잡더니 검을 뽑았다.

    “무엇이 나오든 절대로 소리 내지 말거라.”

    “네? 아, 네네!”

    스르릉, 오싹한 소리를 따라 검집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검날이 드러났다. 이한이 더 물러나라고 하고는 검집으로 족자 위를 툭툭 쳤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아무것도 없는 미끈한 검은 검날 위로 금색으로 빛나는 점이 듬성듬성 나타났다. 뒤이어 금색 선이 나타나더니 점과 점 사이를 이었다.

    연결된 모습이 꼭 북두칠성 같다고 생각한 순간 킥킥, 어딘가 이상하면서 소름 돋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 꽃을 바라보고 있던 족자 속 소녀의 눈동자가 정면을 향해 휘릭 돌려지더니 족자가 제멋대로 펄럭거렸다.

    『뭐야, 내가 보이는 거야?』

    잔뜩 쉰 쇳소리와 함께 족자에서 무언가 불쑥 나왔다. 하람이 다급하게 두 손으로 제 입가를 덮었다.

    족자에서 나온 것은 사람과 같이 눈 두 개에 코, 입술이 있었는데 위치가 달랐다. 눈 하나는 세로로 누워 있고 하나는 코 옆에 있었다. 그리고 코는 콧방울이 위로 가 있었는데 입술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욱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흉측함에 하람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그림에서 나온 것과 눈이 마주쳤다.

    『놀랐구나? 놀랐지? 그렇지?』

    족자 속 소녀와 똑같은 원피스를 입은 귀신이 괴이하게 웃으며 그림에서 완전히 다 나왔다. 하람이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 뒤로 주춤 물러났다.

    『꺄학학! 놀랐어! 놀랐어!』

    공포 만화에서나 볼 법한 얼굴의 귀신이 위치가 다른 두 눈을 반으로 접어 캭캭! 큰 소리로 웃었다.

    이한이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하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가지 마! 조금만 더 놀라줘! 소리 질러줘어!』

    귀신이 그렇지 않아도 길게 찢어져 있는 입술을 더욱 찢으며 하람에게 날듯이 달려들었다.

    “잡귀 따위가 어쩌다 악귀가 됐을까.”

    귀신의 양손이 입가를 짓누르고 있는 하람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이한의 읊조림과 함께 귀신의 한쪽 다리가 잘렸다. 하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꺄악!』

    “엄한 놈 놀라게 하지 말고 이리 오거라.”

    다리가 잘렸는데 사악, 마치 가위로 종이를 자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에 정말 종이가 떨어졌다.

    놀라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채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보는데 귀신이 고막이 터져라 소리 지른다. 하람이 얼굴을 구기며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검은 검날이 귀신의 팔을 베어 냈다.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지는 종이 너머로 혀를 차는 이한이 보였다.

    “내가 더 잘 놀라주마.”

    이한이 잡고 있는 검을 위로 들었다.

    높게 들린 검날이 귀신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귀신이 소리 지르며 하람을 지나 거실 벽에 걸려 있는 하늘 그림 속으로 후루룩 들어갔다. 이한이 다시 한번 더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와 하람의 옆에 서서 어깨를 짚었다.

    “집에 저 그림 말고 그림이 또 있나.”

    “……어, 없, 어요.”

    “그래. 다시 입을 가려라.”

    하람이 재빨리 제 입가를 덮었다. 이한이 귀신이 들어간 그림 앞에 섰다. 그대로 길게 내리그었다.

    『끼야악!』

    그림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나왔다. 곧 그림에서 사라졌던 귀신의 얼굴과 팔 하나가 나왔다.

    “명부로 잘 가거라.”

    이한이 제 얼굴을 잡으려 드는 팔을 몸을 뒤로 물려 피한 뒤 귀신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

    『싫어어어!』

    귀신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가 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졌다. 이내 떨어진 종이가 검은 불길에 화르르 소리와 함께 불타 사라졌다. 굳어 있던 하람이 사라진 종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귀신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믿을 수가 없어 방바닥을 멀거니 보는데 별안간 손이 내밀어졌다.

    “바닥 차다. 그만 일어나라.”

    하람이 굳은살이 가득하면서 길쭉하게 잘빠진 이한의 손을 보다 입가를 덮고 있던 손을 올려 잡았다. 당기는 힘에 힘들이지 않고 일어섰다.

    “뭐, 뭐예요?”

    “그림 귀신.”

    “그림 귀신이요?”

    이한이 손을 거두고 꺼낸 검을 검집에 탁 소리 나게 넣었다.

    “밤마다 그림에서 나오는 잡귀.”

    노앵설 같은 잡귀라는 건가. 그런데 노앵설은 저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하람이 집 안을 둘러보는 이한을 보았다.

    “저기, 잡귀도 나쁜 잡귀, 좋은 잡귀가 나뉘나요?”

    “잡귀라고 해도 귀신은 귀신이니까.”

    “노앵설은 착했잖아요.”

    “그림 귀신도 본래는 착하다.”

    “네?”

    흉측하게 생기다 못해 저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는데, 착해? 하람이 얼굴을 구겼다.

    “저기요, 죄송한데 저 방금 좀 위험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귀신에 관해 잘은 모르지만 위험했다. 진짜로, 위험했다. 그런데 이한이 창 너머를 보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충 답한다. 하람이 황당한 얼굴로 이한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착한 귀신이 왜 저를 노려요. 말이 다르잖아요.”

    회복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이한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던 사람답지 않은 하람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그림 귀신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 않고 그저 자는 사람을 깨워서 놀라게 하는 장난을 좋아하는 귀신인데…….”

    그림 귀신의 손이 닿은 걸까. 이한이 하람의 밤색 앞 머리카락 위에 묻어 있는 물감을 털어냈다.

    “왜 널 잡아먹으려 했을까.”

    “……모르세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손을 털어내자 물감이 사라졌다. 이한이 아무것도 모르는 하람을 보다 그림 귀신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하늘 그림을 엄지 끝으로 가리켰다.

    “이 집에 있는 그림을 모두 불태워라. 안 그럼 또 다른 그림 귀신이 붙을 거다.”

    그림 귀신은 잡귀 중의 잡귀라 잡아도, 잡아도 쉽사리 꼬였다. 이한이 그림을 빤히 보고 있는 하람에게 알겠냐고 했다.

    “이하람. 대답…….”

    “저 그림 왜 그대로예요?”

    이한의 검이 분명 그림을 벴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내리그었는데 그림이 그대로다! 하람이 목소리를 높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이한이 따라서 그림을 보았다가 다시 하람을 보았다.

    “그림이 왜.”

    “검으로 벴잖아요!”

    “아.”

    난 또 뭐라고. 이한이 넣었던 칼을 다시 길게 빼냈다. 하람이 이한의 검을 보았다.

    검의 앞면과 뒷면에 무늬가 다른지 앞서 보았던 북두칠성 같은 무늬가 아니다. 한자로 무어라고 길게 쓰여 있다. 금색으로 쓰인 한자 중에 아는 글자가 있을까, 하고 보는데 검이 흔들거렸다. 시선을 들어 이한을 보았다.

    “이건 이승의 것에는 관여할 수가 없다. 이승의 것 외의 존재만 베고, 찌를 수 있지.”

    이승? 관여? 이승 외의 존재?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에는 소용없다는 건가?

    “……근데 그림은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

    “아, 닌가?”

    살아 있는 사람이 그려서 괜찮은 건가? 저건 기계로 프린트한 그림 아닌가? 아, 그 기계를 살아 있는 사람이 조작해서 괜찮은 건가? 하람이 별 한심한 놈 보듯 보는 이한을 보다 시선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각오하면 이승의 것도 벨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거다.”

    이한이 다소 음산하게 읊조리고는 꺼냈던 검을 다시 넣고 엄지로 작은방을 가리켰다.

    “여기 온 목적.”

    “네? 아, 네.”

    “나는 이 건물을 살필 테니 다 끝나면 이름 불러.”

    하람이 네, 하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방으로 갔다.

    이사 올 때 썼던 박스를 가지고 있었다. 하람이 창고에 있는 박스 중 몇 개를 꺼내 가져와 조립했다.

    본가에서 지낼 때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 탓에 본가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다. 옷을 일주일 치 챙기고 다음으로 책을 챙기는데 선반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책 하나가 툭, 떨어졌다.

    [죽음에 관하여]

    죽음이라는 글자 탓인지 이상하게 이한이 신경 쓰인다. 책 제목을 보던 하람이 슬쩍 열려 있는 작은방 문을 보았다. 조용함에 안도하며 책을 원래 위치에 두다 문득 이한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악업을 줄이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을 그리고 판정받는 것을 도와야 한다.’

    왜 판정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 뭐가 있는 걸까.

    다음에 기회 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책을 챙겼다.

    추가로 핸드폰 충전기와 이어폰, 다이어리 따위까지 챙겼다. 떠나기 전 간단하게 씻을까 싶어 욕실에 갔다가 거울에 비치는 이리저리 뻗쳐 있는 머리를 발견했다.

    “……이 꼴로 계속 있었다고.”

    영진이 까치집이라고, 머리 엉망이라고 할 때 머리 감을 걸 그랬다. 거울에 비치는 중구난방인 머리를 보던 하람이 헛숨을 터트리고는 칫솔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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