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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14)화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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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서 사무실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려는데 방에 시계가 없었다. 핸드폰을 찾아 입고 있는 바지부터 셔츠 주머니를 모두 뒤적이는데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홀린 듯이 이한을 보았다.

“저기, 혹시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이한에게 핸드폰을 말했다가 문득 핸드폰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이 없는 이한에게 까만색에 제 손바닥보다 작고, 네모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람이 말하는 꼴을 가만 보던 이한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장죽을 떼어 냈다.

“누굴 바보로 아는군. 노앵설.”

이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쿵 하는 작은 소리와 타다닥, 발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곧 다홍색 치마에 노란 색동저고리를 입은 여자아이가 다가와 두 손을 내밀었다.

『까맣고, 작고, 네모난 것이야!』

다섯 살은 됐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여자아이의 입에서 늙은 꾀꼬리 같은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에 하람이 놀랐다가 아이가 내밀고 있는 손에 있는 제 핸드폰과 지갑을 발견했다.

“아, 고마워.”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과 핸드폰이 왜 아이에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핸드폰을 찾았다. 아이가 잡고 있는 핸드폰을 가져갔다.

『이것은 뭐야?』

핸드폰만 가져가니 아이가 잡고 있는 지갑을 더 내밀었다. 하람이 지갑이라고 알려주고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이건 필요 없어?』

지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놀랐는데 시간이 그리 늦지 않다 못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다.

크게 안도하는데 아이가 지갑을 가져가려고 한다. 하람이 어어, 하고 손을 내밀었다.

“아, 그것도 필요한 거야.”

『알았어, 가져가!』

아이가 선심 쓴다는 듯이 지갑을 주고 타다닥 소리 내며 문으로 달려갔다. 얼마 있지 않아 아이가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하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라진 아이를 보던 시선을 돌려 이한을 보았다.

“애, 애가 사라졌어요!”

“그냥 애가 아니니까.”

“네?”

“노앵설이라는 잡귀(雜鬼)다.”

“……귀신이요?”

너무나 사람 같은 아이가 귀신이라고 한다.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보는데 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렁 각시와 도령이 만들어 줬다는 음식을 먹긴 먹었는데 잡귀라니. 눈앞에서 본 귀신에 입술이 다물리지 않았다.

“노앵설이라는 여자아이 모습을 한 착한 귀신인데 집안일을 지켜보고, 기억하는 것을 좋아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물어보면 대답을 잘해 주는데 네가 맘에 들었는지 대답 대신 직접 가져왔군.”

이한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문을 열어 상을 밖에 내놓고 다과상을 가져왔다. 하람이 느지막이 자리에 앉았다.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불렀는데 다과상이 화려했다. 맛있어 보이는 삼색의 꿀떡부터 도장 떡, 한 입에 먹기 좋게 깎아져 있는 사과, 숙실과 식혜까지. 달콤한 향을 풍기는 다과상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고민 끝에 분홍색 꿀떡을 한 입 먹었다. 떡을 우물거리며 핸드폰으로 오늘 일정을 보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한이 식혜를 들었다. 식혜를 마시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집에 귀신이 많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라도 있냐는 듯 이한이 보는 시선을 마주 보던 하람이 방을 휘 둘러보았다.

“나쁜 귀신도 있는가, 해서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자유로 귀신부터 옥수역 귀신, 춤추는 귀신, 팔척귀신, 봉천동 귀신 등. 이것저것 많이 들었다.

앞서 짧게 만났던 노앵설처럼 착한 귀신만 있는 게 아니라 살짝 걱정돼서 묻는데 이한이 고개 저었다.

“집 밖에는 많지만 이 집은 내가 있는 한 악한 것들은 들어올 수 없다.”

이한이 성주신(집에 깃들어 집을 지키는 가신 중의 하나)과 비슷한 건가.

안도하다 ‘집 밖에는 많지만’이라는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많다는 건…….”

“이제 영안(靈眼)을 가지게 됐으니 보일 거다.”

“영안, 이요?”

“외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계에는 잡귀와 악귀 같은 귀신뿐만 아니라 요괴, 도깨비, 신수, 신령 등. 인간 외의 존재가 가득하다.”

그러니까 괴담으로 떠도는 귀신뿐만 아니라 온갖 것이 다 있고, 그걸 보게 됐다는 건가.

괜찮아진 줄 알았던 머리가 다시금 아프기 시작했다. 하람이 눈을 감고 이마를 지그시 짚었다.

노앵설이 눈에 보였다는 건 다른 귀신도 보인다는 것. 이한의 말대로 평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복잡해졌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몇 번 누른 뒤 감은 눈을 뜨고, 손을 내렸다.

“씻고 집에 갔다 오겠습니다.”

“집? 네 집은 여기일 텐데.”

앞으로 본가에서 출퇴근할까 하는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가서 옷가지와 노트북 따위를 가지고 오려는데 무슨 일인지 이한이 뾰족하게 반응한다.

“여기 말고 실제로 지내는 집에 가서 옷이랑 짐 몇 개를 가지고 올까 합니다.”

“왜 거길, 너는 이 집을 왜 이렇게 불편해하는 거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이한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더니 장죽 끝을 입에 물었다. 하람이 제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모습에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작게 쉬었다.

“……이 집은 어딜 가나 지나치게 넓고, 외진 곳에 있습니다. 지내는 데 불편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느껴지지 않지만 안채에서 지낼 때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었다. 하람이 황당하면서 이해할 수도 없다는 기색의 이한을 보다 살얼음이 떠 있는 식혜를 들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집에서 짐을 챙기면서 우진에게 전화해 일을 줄여줄 수 있는지 물어야겠다.

하람이 식혜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이한이 물고 있던 장죽을 떼어 냈다.

“나도 가지.”

같이 가겠다는 이한의 말에 술술 막힘없이 넘어가던 식혜가 잘못 넘어갔다. 하람이 컥 소리 내며 급하게 입가에 대고 있는 그릇을 떼어 냈다.

목에 밥알이 들러붙은 것 같아 콜록거리자 이한이 혀를 차더니 물을 내밀었다. 급하게 물을 마셨다.

“……하, 감사합니다.”

“너는 참 손이 많이 가는구나.”

누구 때문에 식혜를 잘못 삼켰는데 그 누구가 쓴소리한다.

어이가 없어 하람이 이한을 황당함을 담아 보는데 이한이 고개를 저었다.

옷에 음식을 다 떨어뜨리면서 먹는 아이 보듯 하는 시선을 보다 핸드폰을 집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택시 예약을 하려는데 주소가 산이라서 그런지 예약이 불가한 지역이라고 나왔다.

아무래도 영진에게 차를 빌려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한이 따라서 일어났다. 하람이 왜 일어나냐고 묻는 대신 이한을 황당함을 담아 보았다.

“같이 간다고 했을 텐데.”

“왜 같이 갑니까?”

“같이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같이 가면 안 되는 이유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람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선 이한을 보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한 님이 굳이 갈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고.”

“그…… 후. 가슴을, 그 옷으로 가면 사람들이 다 볼 겁니다.”

가슴에 옷이 닿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못해 한복을 입고 있다.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다 볼 것이 분명했다.

하람이 팔짱을 끼고 있는 팔 너머로 보이는 이한의 가슴을 짧게 보았다가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 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나? 아니, 그래. 바꿔 주지.”

이한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긴 머리카락이 하나로 높게 묶였다. 그리고 반투명한 감색 창의가 감색 셔츠로, 흰색 바지가 검은색 슬랙스로 바뀌었다. 하람의 입에서 헐, 소리가 나왔다.

“이제 됐나?”

어디 한번 핑계를 대 보라는 듯 이한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무슨 핑계를 대도 다 받아칠 것 같은 이한의 모습에 결국 하람이 졌다.

“……누나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앞에서 기다리지.”

한숨을 길게 쉬며 방 밖으로 나갔다.

누나 영진은 안채 안방에서 지내는 순영의 방 맞은편에 있는 건넌방에서 지냈다.

사랑중문을 지나 안채로 넘어가자 앞마당에서 빗질하던 사람들이 인사했다. 하람이 따라서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한 후 안채 안쪽으로 가는데 이제 막 툇마루에서 내려오는 강원댁과 만났다. 웃으며 인사하는 강원댁에게 인사한 후 할머니께서 주무시느냐고 물었다.

“네. 오랜만에 늦잠 자시는 것 같습니다.”

“누나도 자고 있나요?”

“영진 님은 뒷마당에서 다움 님과 있습니다.”

“네. 혹시 할머니가 저 찾으면 잠시 집에 다녀온다고 전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툇마루로 올라가지 않고 뒷마당으로 가자 장독대 옆에 서서 안을 보고 있는 영진과 다움이 보였다. 누나, 하고 부르고 다가갔다. 영진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너 진짜 본가에 있었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어깨까지 자라 있던 머리카락이 귀가 훤히 보일 만큼 짧아져 있다. 하람이 꼭 괴물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영진의 손에 들린 대접을 가져갔다.

“그저께 왔어. 뭐 하고 있어?”

“와와! 삼촌이다!”

“아, 다움이가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해서 고추장 푸고 있었지. 너 어디에서 지냈어?”

“사랑채에서 지냈어.”

“……사랑채?”

오랜만에 본 삼촌이 반가운지 다움이 크게 반겼다. 하람이 부스스한 다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데 영진이 비명 지르듯 소리를 높였다. 하람이 놀라 고개를 뒤로 빼며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야! 미쳤어? 안채 두고 왜 사랑채에 있어! 할머니랑 신이 아시면 어쩌려…….”

“할머니랑 신이랑 다 알고 있어. 차 키 좀 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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