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3)화 (13/87)

13

이한은 태어난 하람을 보고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이름을 알게 되고, 인영을 보게 됐다. 하람이 제가 잃어버린 기억과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하늘이 정한 주인으로 보이는 다움이 아닌 하람을 주인으로 정했다.

오도전륜대왕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한이 작은 술잔을 두 손으로 잡아 입가로 기울이고, 단숨에 삼키는 하람을 보며 장죽을 꽉 잡았다.

“……흡.”

이한이 복잡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는 사이 지독하게 쓴 술을 삼킨 하람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차가운 음료를 마신 것처럼 머리가 띵했는데 가슴은 끓는 물을 마신 듯 뜨겁다 못해 부글부글 끓었다.

가슴에서부터 번지는 열기에 전신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뻣뻣한 손가락과 발가락이 쫙 펴졌다. 하람이 계속해서 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생각한 것이라도 있나?”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난간 위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하게 흔들거리는 하람을 보다 작은 자개함을 열어 속에 든 담뱃잎을 장죽 대통에 적당히 채우고, 입에 물었다. 하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시야가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누가 몸을 흔드는 듯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물거리는 시야로 이한을 보았다.

“……제가 아직 제대로 들은 것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할머니처럼 이 집에서 계속 지낼 수 없습니다. 일하면서 계속 오고, 가고 할 것 같습니다.”

순영에게 효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늦었지만 하람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할 생각이었다.

“뭐?”

어떠냐는 듯 보는 하람을 보던 이한이 이상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정말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군.”

말을 안 듣는다니. 제가 무슨 말을 안 들었다는 걸까. 이번에는 하람이 눈가를 찌푸렸다.

“내가 분명 지금 하는 일을 잠시 쉬고 재산과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도우라고, 당분간은 이 집에서 지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듣는군.”

이한의 말에 뒤늦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자 난간 위로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이한을 보던 하람이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고는 슬쩍 웃었다.

“저는 이한 님을 돕겠다고 했지, 말을 잘 듣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한이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는 것과 동시에 하람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 * *

“아으으…….”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다. 지끈거림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두통약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하람이 앓는 소리를 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잠기운이 남은 시야가 환했다.

조명이 켜진 것처럼 환한 사위에 보이는 굵은 서까래와 대들보를 멍하니 보았다.

“일어났나.”

익숙한 풍경을 말없이 응시하는데 머리 위에서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좇아 위를 보고 싶은데 몸이 무거웠다.

다시 한번 더 끙 소리를 내자 혀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락, 천이 스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곧 시야에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넌 어디 가서 술 마시고 하지 마라.”

이제 막 깼는데 이한이 아주 한심하고, 하찮은 것을 다 본다는 얼굴로 타박한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흠흠!”

얼마나 잤는지 목이 완전히 잠겼다. 형편없는 목소리에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기억 안 나나?”

그렇지 않아도 한심함이 가득한 이한의 얼굴이 아주 몹쓸 놈을 본 사람처럼 구겨졌다. 구겨진 얼굴에 아무래도 제가 사고를 친 것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예.”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쳤을까. 하람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을 기다리는데 이한이 미간을 좁히더니 손을 들어 하람의 이마를 짚었다.

“또 머리가 아픈 건가.”

뜨끈뜨끈한 이마에 한기가 퍼졌다. 기분 좋은 시원함에 하람의 입에서 나른한 한숨이 길게 나왔다. 이한이 쯧쯧 혀를 찼다.

“고작해야 술 한 잔 마셔 놓고 정신을 잃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작해야 술 한 잔이라는 말에 하람은 어떻게 된 건지 생각났다.

그러니까 할머니 순영에 관해 말하던 중 그가 마시라는 술을 마셨고, 독한 술기운에 그대로 잠들었다.

하람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이한이 다 들리게 혀를 찼다.

“이제 혼자 술 마실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대에도 혼자 마셔야 할 것 같군.”

아쉬움이 느껴지는 말을 끝으로 이한이 잡고 있는 장죽의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금세 희부연 연기에 감싸였다.

향냄새와 풀 냄새, 담배 냄새에 얼굴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람이 저를 본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한의 생기 없는 얼굴을 보다 눈을 감고, 늘어졌다.

“일어나라.”

이한의 손이 닿은 이마가 시원했다. 더 자고 싶은데 이한이 혀를 차며 깨웠다. 하람이 감은 눈을 떴다.

“우렁 각시랑 우렁 도령이 새벽 내도록 이것저것 부산하게 굴었다. 그만 일어나서 밥 먹어라.”

“……예? 우렁 각시랑 우렁 도령이요?”

“그래.”

제가 알고 있는 그 우렁 각시를 말하는 걸까.

하람이 두 눈을 끔뻑이는데 이한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거뒀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사라져 하는 수 없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불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정자에서 술을 마셨는데 지금 있는 곳은 이한의 방이다. 하람이 방을 둘러보다 여전히 가슴을 드러내고 있으나 어제와 다르게 반투명한 감색 창의에 흰색 바지를 입고 있는 이한을 보았다.

“정자에서 술을 마신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어떻게 여기 왔죠?”

“내가 옮겼다.”

“……네?”

이한이 순식간에 당황한 하람을 보며 제 두 팔을 앞으로 짧게 뻗었다.

“이렇게 안아서 말이다.”

별거 아니었다는 듯 가볍게 말하고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문가로 갔다.

하람은 제가 술김에 걸어오거나, 부축을 받아 온 줄 알았는데 이한이 옮겼다고 한다. 그것도 꼭 공주님을 안듯이!

기껏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 올라왔다. 입이 쩍 벌어졌다.

“밖에 나가서 잘 먹고 잘사는 줄 알았는데 굶고 살았나? 몸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볍던데.”

문가로 간 이한이 무거워 보이는 교자상을 하람의 앞에 턱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우렁 각시도 네가 보기 안쓰럽다고 많이 차렸다고 하니 다 먹어라.”

교자상에 수북하게 쌓인 밥부터 콩나물과 버섯, 갈비, 전복 등이 가득 들어 있는 사람 얼굴만 한 뚝배기, 산적과 김치 같은 일곱 개의 반찬까지. 상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려했다.

많은 가짓수와 양에 이한과 우렁 각시라는 자에게 제가 얼마나 말라 보이는지 확실하게 알게 됐다. 하람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아, 그래?”

이한이 고봉밥만 한 하람의 얼굴에서부터 셔츠가 낙낙한 상체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퍽도 가볍지 않다는 듯 크게 코웃음 치고는 효종갱이라는 해장국이라고 알려주고 장죽을 입에 물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기색에 말을 더 할 수가 없다. 턱이 당겨질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하람이 제 앞에 있는 숟가락을 집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에 숟가락을 찔러 넣다가 상에 제 몫만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한 님은 안 드세요?”

설마 이걸 혼자 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못해도 3인분은 돼 보이는 양을 보고 슬쩍 묻자 이번에는 이한이 입을 쩍 벌렸다.

“네 눈에는 내가 아직도 인간으로 보이나?”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대놓고 경악하는 얼굴에 그제야 이한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상기했다. 하람이 헛기침하며 숟가락을 다시 집었다.

“그럼 식사를 전혀 안 하세요? 배가 고프, 지는 않으시고요?”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상도 차리는데 전혀 먹지 않는다는 걸까.

“먹을 수는 있지만 굳이 찾아서 하지 않고, 배고픔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한과 지내면서 밥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니.

너무 좋다. 귀찮은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해장국처럼 개운하면서 시원한 국을 기쁘게 먹는데 이한이 하람을 빤히 보았다.

“귀찮은 일 하나 줄었다는 얼굴이군.”

“……흠흠!”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있었다. 맛있었는데, 양이 너무 많았다.

적당히 먹고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먹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한이 다 먹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본다. 노골적인 시선에 하람은 괜히 눈치가 보여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계속 먹는데 양이 눈에 띄게 줄지 않고, 배가 몹시 불렀다.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고 제가 방금까지 누워 있던 보료를 힐끔 보았다.

“제가 또 민폐를 끼쳤네요. 저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잠자리가 바뀌거나 옆에 누가 있으면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이 많았다. 이한도 그런가 하고 말하는데 이한의 얼굴이 또다시 구겨졌다. 그 얼굴에 알아차렸다.

“아, 주무시지도 않는군요…….”

우리 이한 님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구나. 그렇구나. 하람은 어쩐지 제가 좀, 많이 한심한 것 같아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켜보던 이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리 말하지만 화장실도 안 간다.”

“……예.”

이한에 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진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된다.

하람이 고개를 느릿하게 주억였다. 이한이 하람을 보다 절반 넘게 남아 있는 밥과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반찬을 보았다.

“다 먹은 건가?”

“예? 예.”

“……너무 조금 먹었는데?”

“아, 일어나자마자 많이 못 먹습니다.”

새벽 내도록 부산하게 준비했다는 우렁 각시와 도령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침을 많이 먹지 못했다. 늘 토스트 하나와 커피 한 잔 마시고 출근했다.

“아, 맙소사, 출근!”

출근해야 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하람이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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