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2)화 (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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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화낼 것 없다. 인간이 마시기엔 제법 강할 것이다.”

    술이 강하다는 이한의 말에 조금 안심됐다.

    하람이 이한의 말에 찌푸렸던 얼굴을 펴며 늘어지려는 몸에 힘을 주다 다시 한번 더 얼굴을 구겼다.

    “인간이 마시기엔, 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지금 제게 인간 외의 존재가 마시는 술을 권했다는 건가?

    황당하고 또 어이없어서 안주 대신 장죽을 물었다가 연기를 내뿜기를 반복하는 이한을 보았다.

    이번에도 웃어넘기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한이 웃지 않고 물고 있던 장죽을 아래로 내렸다.

    “말 그대로. 그보다, 순영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냐고 물었던가.”

    희부연 연기가 물안개처럼 이한을 감쌌다.

    검은색 일색의 이한이 뿌연 연기 속에서 검은 눈빛을 느리게 감췄다가 다시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던 하람은 주변이 뿌옇게 보여서 그런 것인지 이한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게 무슨 술을 먹인 거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중 이한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하람은 드디어 제 궁금함을 풀어 주려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은 날 때부터 천수(天數, 타고난 수명)가 정해져 있다. 그 생과 사는 하늘에서 정하는 것이라 산 자와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거침없이 푹 하고 깊게 찔러 들어오는 칼처럼 말에서 자비가 없다. 한 줌의 희망이 꺼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점점 멀겋게 변했다.

    “특히나 벌을 받고 있는 나는 더더욱.”

    순영은, 할머니는 정말로 죽는 걸까. 정말로 떠나는 걸까.

    하람은 이한의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모습에 순영의 죽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정말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가 떨어지듯 숙여졌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하람이 슬픔과 참담함에 푹 숙인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하, 억눌린 울분을 토했다.

    “순영이 생전에 지은 죄가 없어 귀신이 되어 떠돌지 않을 거고 좋은 곳에서 환생할 거다. 그러니 후회 없이 보내 줘라. 그래야 순영이 맘 놓고 편하게 갈…….”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겁니까?”

    이한의 말이 이어지던 중 얼굴을 덮은 하람의 손가락 사이로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와 말을 잘랐다. 한숨처럼, 눈물처럼 아련한 목소리에 이한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래.”

    한 박자 늦게 답하며 복잡한 시선으로 순영이 자고 있을 안채 쪽을 바라보았다.

    “……다만 얘기를 해볼 수는 있겠지.”

    이대로 할머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미련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머니와 함께 있고 싶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걸까, 라고 생각하던 하람이 의외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한을 응시했다.

    “……얘기, 요?”

    “그래.”

    방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의아함에 미간을 좁히는데 이한이 장죽을 길게 물었다가 놓았다.

    “……망자는 생시(살아 있는 동안)의 업보에 따라 명부(저승 세계)로 가거나 극락으로 가 심판을 받는다는 걸 들은 적 있나?”

    “네. 들은 적 있습니다.”

    “그 명부에는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이 있는데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 죽은 넋이 3년째 되는 날에 만나는 열 번째이자 가장 마지막에 만나는 왕이 있다.”

    열 명의 시왕(十王)은 하람도 여러 매체를 통해 조금씩 들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어서 가는 저승에서 망자가 살아생전에 지은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 이었던가.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얕게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시왕에 관해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이한을 보며 뒷말을 기다리는데 이한이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그 오도전륜대왕의 명으로 이곳에 묶여 있다.”

    이한의 낮은 목소리를 조용히 듣던 하람의 얼굴이 한 박자 늦게 와락 구겨졌다.

    “……신께서는 죽은 자라는 겁니까?”

    명부에 있는 왕의 명을 받았다니. 그럼 날 때부터 신이라는 게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게 아닌가! 생각하지 못한 내용에 그만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한이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듯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아생전에 지은 죄업의 경중과 선행, 악행 등을 3년 동안 심판받았다. 길고 긴 심판이 드디어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남은 심판을 기다리던 중 오도전륜대왕이 갑자기 내 판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한이 앞에 있는 술잔을 들었다.

    “난 이전에 지나온 아홉 개의 지옥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은 상태였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저 판정만을 바라는 것뿐이었지.”

    지나온 아홉 개의 지옥이 다시 떠오른 듯 이한의 눈매가 설핏 구겨졌다. 하람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두 손을 깍지 꼈다.

    “……그래, 판정만을 바랄 뿐이었는데, 오도전륜대왕이 그러더군. 모든 감각이 거세된 흑암지옥에서 있는 것이 복으로 보일 정도로 생전에 지은 죄가 무겁다고.”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감각이 없는 곳에서 있는 것이 복이라는 걸까. 하람이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입가로 가져가는 이한을 의아함을 담아 멀거니 보았다.

    “오도전륜대왕이 판정을 내리는 대신 아홉 지옥을 지나며 잃어버린 육신과 혀를 되돌려주더군. 지금의 모습으로 이곳에 내려보내고는 악업을 줄이고, 용서받으면 판정을 하겠다고 하면서 지옥에 가기 전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

    이게 다 무슨 말이고,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람은 분명 귀에 들리는 언어가 한국말인데 아주 먼 나라의 말을 듣는 것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잔을 보는 이한을 얼굴을 찌푸린 채로 멀거니 보았다.

    “난 오도전륜대왕의 명으로 오랫동안 이 집안을 보살피며 악업을 줄이고 있으니 얘기를 해볼 수는 있을 거다. 단, 확답할 수는 없다.”

    이한이 아래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하람을 보았다.

    “그리고 너는 내가 악업을 줄이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을, 소멸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오도전륜대왕이 시왕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윤회를 끝내고 환생을 심판하는 자였다. 하람이 바라는 대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순영을 오래 살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한지도 확답할 수 없었는데 거기다 하람이 오도전륜대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신을 모시는 주인이 되어 악업을 줄이는 걸 도와야 했다.

    “할 수 있겠나?”

    분명 하람은 무속 신앙과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죽을 때까지 지금껏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던 신의 주인을 할 수 있을까. 이한이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굳은 하람을 보다 앞에 놓인 술잔을 느리게 채우고, 마셨다.

    하람은 모르겠지만 집안 대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문의 사람부터 일하는 자들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신을 믿고, 따랐다. 그도 모자라 주인이 되기를 거부한 자 또한 없었다. 이렇게 선택하게 하는 것도, 기다려 주는 것도 모두 하람이 처음이고 이한에게 이는 큰 모험이었다.

    순영과 그녀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아버지까지. 주인이 되라는 뜻을 몹시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만약 다움을 주인으로 정하면 다움 또한 받아들일 것이다.

    하람이 답을 하지 않는 사이 지금까지 만났던 주인들을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이한의 앞으로 빈 술병이 하나에서 두 개가 되고 또 세 개로 빠르게 늘어났다.

    지금까지의 인생과 정반대의, 생각하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된 상황에 생각이 많을 테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을 거다.

    예상대로 말이 없는 하람을 보며 술을 계속해서 마셨지만 늘 그랬듯이 취하지 않았다.

    이한이 세 번째 병에 조금 남아 있는 술을 술잔에 모두 털어냈다. 그러고는 지독하리만치 쓴 담뱃잎을 태웠다.

    “아…….”

    그렇게 네 번째 술병까지 비우며 조용히 술을 마시던 중 하람의 고개가 스르륵 숙여졌다. 이한이 짙은 연기를 길게 뿜어 내며 이를 악물고 약하게 떠는 하람을 보았다.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오는 걸까. 아니면 정말 취하기라도 한 걸까. 담배 연기로 희부연 시야에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 하람과 곧 사라질 듯 흐릿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이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부터 보이기 시작한 인영이 또 나타났다.

    잊을 만하면 보이는 흐릿한 인영은 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고 반듯한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에 보이는 덩치와 손이 작고 또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소리라도 들리면 알 수 있을 텐데. 이 생각만 벌써 몇 년 아니, 30년 가까이 하고 있었다. 이한이 입에 문 장죽 물부리를 부서져라 깨물었다.

    “……하겠습니다.”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인영을 보는데 잔뜩 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인영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한이 억눌린 하람의 목소리에 입에 문 장죽을 떼어 내며 어느새 고개를 든 하람을 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인영에 가려져 있던 하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를 악물다 못해 울기라도 했는지 눈이 조금 붉었다.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듯 붉은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있다. 그 모습이 꼭 버려진 짐승을 닮아 안타깝기도 하면서 또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이한이 단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저를 사납게 응시하는 하람을 멀거니 응시하다 힘없이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등. 많은 것이 달라질 거고, 선택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신의 주인이 되면 하람이 지금껏 몰랐던 존재들을 보게 되고, 듣게 됐다. 그리고 한번 정한 후에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한이 입술을 굳게 다문 하람을 보다 장죽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술잔을 가리켰다.

    “그래도 하겠다면 네 앞에 있는 그 술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마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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