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1)화 (11/87)
  • 11

    “……처음 뵙자마자 큰 실례를 끼쳤습니다.”

    “알면 됐다.”

    천만에, 라는 좋은 단어가 있는데. 정말 성격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 저 또한 처음 보자마자 말을 함부로 하고, 그도 모자라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 무슨 실례인지. 낭패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하람이 어색하게 헛기침하고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는데 이한이 짧게 대꾸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술친구라도 하든지.”

    “네?”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되묻자 이한이 정자를 향해 고갯짓했다. 하람이 고개를 돌려 정자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정자에 작은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잠에서 아직 덜 깼나. 하람은 차려진 주안상과 술친구를 하라는 이한의 말이 믿기지가 않아 두 눈을 끔뻑였다. 그와 달리 이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더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정자를 향해 걸었다.

    그는 본래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정자에 놓여 있는 수건에 발을 대충 닦고는 반질반질한 정자 위로 차려진 주안상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정자 난간에 허리를 기대며 장죽을 입에 물었다.

    장죽 대통 속으로 담뱃잎을 채우고, 불을 붙이려는데 하람이 문이 아니라 창을 통해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너 무슨!”

    아무렇지도 않게 창밖으로 나오려는 하람의 모습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사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람이 창에서 훌쩍 내려와 창 아래에 놓여 있는 반질반질한 커다란 돌 위로 안전하게 내려섰다.

    “이게 더 가깝잖아요.”

    그도 모자라 놀라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이한을 향해 태연자약하게 대꾸하고, 웃었다.

    하람 또한 맨발 상태였다. 하람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으으 소리 내며 푸른 잔디 위를 뛰듯이 빠르게 걸어 정자 앞에 섰다. 이한이 그러했듯 수건에 발바닥을 닦은 뒤 먼지 하나 없는 정자 위로 올라섰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을 하고서 자리에 앉는 이한의 맞은편에 앉아 웃었다.

    “정자가 보이는 커다란 창이 있는데 문으로 굳이 갈 필요 있나요.”

    이한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담 좀 넘어봤다. 창문 넘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람이 손으로 제 코 아래를 슬쩍 쓸고는 제게 잔소리할 것만 같은 이한을 피해 고개를 돌려 제가 나온 창을 보았다.

    “너는…….”

    ‘이렇게 오면 더 가깝지 않습니까. 더 빨리 뵙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예쁘게 봐주세요.’

    하람의 예상대로 잔소리를 하려던 이한의 입이 갑자기 머리에서 울리는 수줍음 가득한 목소리에 다물렸다.

    갑자기 울린 수줍은 목소리가 안개처럼 뿌옇게 번졌다. 눈매를 일그러뜨린 이한이 장죽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목소리가 마치 꿈이었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하람은 제가 넘어온 창과 예쁘게 차려진 주안상을 본다고 당황한 이한을 보지 못했다.

    “……예. 다음부터는 문으로 돌아서 나오겠습니다.”

    제가 나오라고 해 놓고 빨리 왔다고 난리다.

    어쩐지 순영보다 더 빡빡하게 구는 것 같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꼰대를 만난 기분이다.

    입술을 슬쩍 내민 채로 짧게 대꾸하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이상함에 고개를 들었다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한을 뒤늦게 보았다. 똑같이 눈가를 찌푸렸다.

    심각한 이한의 얼굴에 그가 또다시 어디 안 좋은 건가 싶어졌다. 하람이 방금까지 툴툴대던 것을 잊고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있는 이한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괜찮으세요?”

    손 아래로 닿은 이한의 손이 대리석처럼 단단하면서도 서늘했다.

    하람은 손에서 느껴지는 낮은 온도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겹쳐진 손을 약하게 잡았다. 하람이 걱정하는 사이 이한이 머릿속에 짧게 울렸다가 사라진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눈을 감고서 조용히 기다렸다.

    “머리 어지러우세요?”

    그에게만 들렸다 사라진 목소리는 착각이었다는 듯 기다려도 더 들리지 않았다.

    답답함에 눈을 더욱 찌푸렸다가 이내 혀를 차는데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찌푸리고 있는 시선을 들자 손을 잡고 있는 하람의 손이 보였다. 이한이 눈매를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람이 이한의 일그러진 눈매에 어색하게 기침하며 손을 거뒀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이야기를 잘하다가 갑자기 넋을 놓고, 얼굴을 찌푸린다. 이한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계속 이러면 저만큼이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람이 이유를 알아야 제가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한이 답을 반드시 듣고 말겠다는 듯 단호한 하람의 시선을 보다 장죽을 입가로 가져갔다.

    바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에 하람이 다음을 기약하며 그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부른다니?”

    “호칭이요. 할머니처럼 신, 이라고 하면 되나요?”

    이한이 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눈매를 찡그렸다. 그러다 물고 있는 장죽을 입가에서 떼어 냈다.

    “부르는 사람마다 호칭이 달랐다. 귀신, 신, 도깨비, 성주신. 그리고…….”

    워낙에 오래 살아 사람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이한이 의외라는 얼굴의 하람을 보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한, 이라고 불렸으니 네가 편한 대로 불러라.”

    “음, 알겠습니다.”

    호칭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듯 하람이 아무 말이 없다. 과연 어떻게 부를까, 하고 지켜보던 이한이 티 나지 않게 웃었다.

    “그나저나 순영에게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나 보군.”

    “네? 네.”

    이한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고는 오른쪽 다리를 반으로 접었다. 무던한 하람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인간 외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한이 접은 다리 위로 팔을 대고 연기를 길게 내뿜어 냈다.

    “네. 믿지 않습니다.”

    하람은 순영과 영진에게 집에서 지낸다는 신부터 그와 비슷한 다른 인간 외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몇 번 말했었다.

    믿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인간 외의 존재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순영이 신의 도움을 받아 미래와 과거를 보고 돈을 번다고 해도 믿음을 크게 가지지 않았다. 하람이 이한의 덤덤한 말에 단호하다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인정했다.

    하람의 답에 순식간에 옅은 연기에 감싸인 이한이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비소를 날리는 것도 같고, 생각에 빠진 것도 같고. 하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도 믿지 못하냐고 말하는 것 같은 이한의 입술을 보다 후, 숨을 짧게 뱉었다.

    “……사실, 지금도 좀 믿어지지 않습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눈앞에 있으나 생긴 것이 워낙에 인간과 같아서 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혼잣말하듯 작게 읊조린 하람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는 이한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보기 드문 번듯한 얼굴과 잘빠진 몸 때문인지 신이 아니라 어느 유명한 사극 배우 같아 보였다.

    TV, 책, 소문을 통해 보고 들었던 어딘가 문제 있는 귀신으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순영이 신이라고 은연중에 알려준 이한을 앞에 두고도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람이 자꾸만 딴 길로 새는 생각에 느리게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를 다시금 상기하며 연기를 내뿜는 이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께서 사실 저희 할머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지 않으실까 하는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하람의 노골적인, 그러면서도 더없이 애절한 말과 눈빛에 그를 보던 이한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진실하다고 해야 할지. 불쌍하리만치 불안하게 떨리는 하람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에 문 장죽을 떼어 내고, 연기를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내뿜어 냈다.

    “정말 나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군.”

    이한이 의미가 모호한 말과 함께 주안상에 있는 하얀 백자 술병을 들었다. 연꽃 향이 은은하게 나는 투명한 술을 술잔 두 개에 적당히 채웠다. 곧장 술이 채워진 잔 중 하나를 집었다.

    “이제 맨정신으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을 텐데 한 모금 마셔라.”

    술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은 이한이 잔 하나를 하람의 앞에 둔 뒤 제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를 보던 하람은 문득 이한이 제게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짓궂게 올라간 입술과 달리 눈빛이 침중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보다 남의 감정과 생각을 잘 읽지 못하는 제가 이한의 감정은 어째서 이리도 잘 읽히는지 모르겠다. 이한을 가만히 보던 하람이 숨을 길게 쉬고는 제 몫의 술잔을 들었다.

    “조금만 마시는 게 좋을 거다.”

    이한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입가에 슬쩍 기울였다.

    “……윽!”

    정체를 알 수 없는, 본가에서 처음 마셔보는 이름 모를 술은 지금껏 마셔온 그 어떠한 술보다도 강했다. 얼마나 강한지 목이 이대로 녹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람이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는 술이 남아 있는 술잔을 주안상에 던지듯 화급하게 두었다. 그러고는 거친 열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홧홧한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목이 어찌나 뜨거운지 손에도 화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술이 그리 약하지 않은데 고작 한 모금 아니, 반 모금 만에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불타는 것만 같다.

    침을 아무리 삼켜도 가시지 않는 쓴 기운에 결국 주안상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병 하나를 다 비우고 나서야 조금 나아졌다. 한숨 쉬며 아무렇지도 않게 잔에 술을 채우고, 마시기를 반복하는 이한을 보았다.

    분명 같은 술을 마시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다. 어쩐지 저만 다른 술을 마신 것 같다.

    잔을 채우고, 마시는 이한을 별종 보듯 보던 하람이 시선을 내려 제 몫의 술잔을 보았다.

    “아…….”

    반은 마신 줄 알았는데 소주잔보다 작은 백자 잔에 술이 반보다 조금 더 남아 있었다.

    한 잔을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하람이 다시 한번 더 얼굴을 와락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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