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한이 얼마나 강하게 잡고 있는지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하람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점점 꺼져가는 손에 눈가를 구겼다.
“저, 손 좀…….”
하람이 제 손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한 대신 그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힘을 줘 잡아당기는데 꼼짝도 하지 않는다.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결국 포기하고 이한을 본 순간 넋을 놔버린 듯 멀거니 저를 보는 시선에 갑자기 단전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왔다.
순영에게 오면서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금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람이 고통이 가득 담긴 숨을 몰아쉬는 이한과 같이 두 눈을 한껏 찡그렸다. 그도 모자라 갑자기 스멀스멀 올라오는 아픔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아 윽, 소리를 냈다.
오랫동안 겪어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아픔에 늘 그랬듯이 습관처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갑자기, 왜 하필 지금, 본가에 오기 전에도 아팠으면서! 또다시 찾아온 두통과 정체 모를 격통에 하람의 허리가 천천히 굽어들었다.
하람의 손을 부여잡고서 가슴의 격통을 참던 이한의 찌푸려진 눈에서 힘이 조금씩 빠졌다. 천천히 잦아드는 고통에 이한이 숨을 토해내다 다리를 굽힌 채 신음하는 하람을 뒤늦게 발견했다.
마치 아픔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하람이 고운 눈매를 찌푸린 채로 고통에 찬 숨소리를 내고, 그도 모자라 허리를 잔뜩 숙이고 있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과 같은 앓는 숨소리를 내는 하람을 멀거니 보았다.
“……너?”
이한이 두 눈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하람의 모습에 아까부터 계속 강하게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머리, 가…….”
아픔에 본인도 모르게 이한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반쯤 기대고 있던 하람이 바닥을 기듯 잠긴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이한이 작은 소리를 들었다. 손을 들어 하람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워 내고 드러난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손 아래로 절절 끓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이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한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하람의 다리가 푹 꺾였다.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곧 무너지듯 이한에게로 몸이 기울여졌다. 하람이 이한의 위로 쓰러지며 머리랑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말하더니 이내 정신을 잃었다.
* * *
“태어날 때부터 병을 가지고 있으셨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날 때부터?”
“……네.”
“신병(神病)이라도 되는 건가.”
먹물이 얼룩져 있는 황금빛 보료 위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하람이 꼭 죽은 사람처럼 숨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그의 옆에 앉은 순영이 하람의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약하게 닦아 주며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 하람 님 같은 분이 또 계셨나 확인해 봤으나 없었습니다.”
창턱에 기대앉아 하람을 보며 연기를 내뿜던 이한이 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껏 이런 경우가 없다는 것을 이한 또한 알고 있었다. 순영보다 먼저 가문을 지키고, 이끌었던 그이기에 하람이 특이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가신(家神)처럼 가문의 모든 이들을 병과 액운 등에서 지켜 주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몸에 붙어 있는 이유 모를 액 때문에 아픈 걸까. 아니면 제가 하람을 의도적으로 모른 척했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하람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혹 다움 님을 보셨습니까?”
하람의 병이 무엇이고, 어찌하면 나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순영이 반쯤 잊고 있었던 이름을 꺼냈다. 하람을 보던 이한이 순영을 보았다.
“그래. 보았다.”
하람의 집안에는 대대로 신병을 가진 자가 태어나거나, 들어왔다.
이한을 받드는 주인이 죽을 시기가 되면 마치 대를 끊기게 하지 않겠다는 듯 다음 주인이 태어나거나, 어디선가 나타나 계속해서 대가 이어지게 했다.
그 기묘한 이어짐에 따라 순영 다음으로 누가 신의 주인이 될까 하던 중 하람의 누나 영진의 딸 다움이 죽은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순영이 하람에게 오기 전 길한 동물 귀신과 놀고 있던 다움을 떠올리며 이한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람 님보다 다움 님이 더 잘하실 것 같은…….”
“아니. 하람이다.”
하람은 착하고 순하였으나 본인이 아니라고 한번 정한 것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속 신앙을 믿지 않았다. 이한을 모시기에 그리 적절치 않았는데 이한이 단호하다.
지금껏 하늘이 정해 주는 대로 주인을 정하였다던 이한이 전에 없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한다. 생경한 모습에 하람의 식은땀을 닦던 순영이 손을 멈추고서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순영의 옆에 잠들어 있는 하람을 응시하며 잡고 있던 장죽을 입가에 가까이했다.
하람을 응시하는 눈이 날카로운 매의 눈 같기도 하고, 살벌한 포유류의 눈 같기도 하고. 순영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싸늘한 이한의 시선에 소리 없이 한숨을 짧게 쉬었다.
“……무슨, 연유이신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이한은 마치 살아가는 이유가 담뱃잎을 태우는 일인 것처럼 연꽃이 가득한 소담한 연못과 정자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 보이는 검을 보며 매일같이 담뱃잎만 태웠다. 회한과 슬픔, 그리움이 뒤섞인 의미 모를 분위기를 풍기며 덤덤하게 지냈다. 때때로 홀로 지내는 사랑채를 엉망으로 어지르고 후회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강압적으로 굴지 않으면서 다른 신들이 그러하듯 장난 한번 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하람과 연관되고부터 달라졌다.
순영은 표류하듯 고요하기만 하던 이한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 믿기지가 않아 조심스럽게 연유를 물었다.
“……하람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창 너머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이한의 주변을 감싸던 연기가 묽게 퍼지고, 그가 입고 있는 검은 도포 자락이 일렁였다. 그 기묘한 모습을 멀거니 보는데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힘없는, 음산할 정도로 낮은 이한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드디어, 이 생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이한은 눈을 크게 뜨는 순영이 아닌 알 수 없는 기이함으로 가득한 하람을 더없이 진하게 응시했다.
“……아.”
내려앉은 하람의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곧 천천히 눈꺼풀이 위로 들렸다.
고요함 속에서 눈을 뜬 하람이 시야에 보이는 낯선 풍경에 이제 막 뜬 눈을 느릿하게 이리저리 굴렸다.
굵은 서까래와 대들보, 하얀 토벽 그리고 병풍.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다. 숨을 삼킨 채로 조용히 눈을 굴려대던 하람이 상체를 느리게 일으켜 세웠다.
“여긴, 어디야?”
새벽 특유의 검푸른 기운이 흐르는 공간은 홀로 지내는 오피스텔도, 회사 사무실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지 알 수 없는 낯선 풍경에 당황하고 말았다.
잠들기 전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풍경을 멍하니 살피는데 별안간 일반 담배와는 다른, 조금 더 짙은 냄새가 났다. 코에 맡아지는 익숙한 냄새에 제가 지금 있는 곳이 이한이 머무는 사랑채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담배 냄새는 나는데 이한이 없다. 어느새 말끔하게 치워진 사랑채를 보며 이한을 찾는데 짙은 담배 냄새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냄새가 났다.
바람 냄새 같기도 하고 또 진한 물 냄새 같기도 하고. 지독한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에 길들여진 코가 냄새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답답함에 눈가가 찌푸려졌다.
하람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훑던 중, 열린 창 너머에서 맨발로 연못 주변을 걷고 있는 이한을 발견했다.
이한은 생각보다 키가 제법 컸다. 180이 조금 넘는 저보다도 더. 그리고 머리카락 또한 생각보다 더 길었다.
그러고 보니 방만하게 벌어진 도포 자락 아래로 드러난 상체도 꽤나 좋았었다. 입고 있는 도포부터 한 번도 자르지 않은 것 같은 긴 머리카락, 단련된 몸. 아마도 과거에 제법 이름 있는 집안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몸이 건장했으니 분명 무관이었을 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훑다 벽에 걸려 있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검을 보게 됐다.
“……마음에 안 들어.”
예사 검이 아닌 듯 새벽빛에 보아도 기분 나쁘다.
검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무관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시 연못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이한을 보다 그를 따라 연못을 보았다.
본가에 있는 연꽃은 다른 곳에 있는 연꽃과 달리 1년 내도록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연꽃 연못을 보니 연꽃이 다 져도 한동안 연꽃 향이 진하게 풍겼던 것이 떠올랐다. 동시에 왕에게서 이 집을 받은 조상이 연꽃을 좋아해서 연꽃 연못이 있다는 순영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왕의 총애를 얼마나 받았으면 집을 받는 것도 모자라 귀하다는 연꽃과 비싼 비단잉어까지 다 받았을까. 하람이 연못을 가만 보다 이한과 구름과 달을 그림처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정자를 보았다.
건축 쪽 일을 하다 보니 아래도 건축물을 조금 더 자세하게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사랑채라는 공간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정말 함부로 짓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 코에 맡아지는 것, 풍기는 분위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다 생각해서 지었다. 덕분에 사랑채 주변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하늘 아래 유일한 지상낙원처럼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정신이 들었나.”
허투루 허비되는 것이 없는 풍경을 보는데 갑자기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람이 단아하면서 섬세한 아름다움이 흐르는 풍경을 보다 어느새 저를 보고 있는 이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부딪친 시선을 마주 응시하다 잠들기 전의 기억에 그의 얼굴을 살피는데 불안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졌는가 보네. 묵직한 오싹함을 머금고 있는 이한을 향해 짧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