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9)화 (9/87)

09

하람은 문득 과거가 생각났다. 그러니깐 순영에게 그녀가 모신다는 신에 관해 물었었던 때가.

사람들의 말대로 신이 정말 험악한지, 외형이 사람이 맞는지 또 얼마나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남들이 선뜻 묻지 못하는 것들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물었었다.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었는데 순영은 늘 그렇듯이 웃으며 알려주었다.

“신께서는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보다도 오래 사셨습니다.”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요?”

“네. 하람 님이 생각하는 그 이상을 사셨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할 정도로 말이죠.”

순영이 어느 전래동화 속 이야기를 하듯 까마득한 신의 존재를 살갑게 알려주었다. 어렸던 하람은 순영의 말에 그때부터 신이라는 자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머리가 차분해졌다. 차분해진 머리에 어릴 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신이라는 존재가 지금 제 앞에 있고, 말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은 저와 같은 사람과 같은 모습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마주 보고 앉아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하람이 사랑채에 오기 전까지 느꼈던 호기심을 상기하며 짧게 숨을 쉰 뒤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분명 이번에는 제가 경우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용서하실까, 이해하실까 하고 몇 번을 생각했으나 사람이 아닌 상대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람은 짧지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동시에 제가 답지 않게 뾰족했음을 그리고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했다.

신(神).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순영이 모시고 있는 신이었다. 그것도 집안 대대로 모시고 있는 신.

신 덕분에 지금껏 집안 대대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했었다. 그에게 잘못하면 저만 큰일이 나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제 실수로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하람의 짧은 사과에 무어라고 말을 하는 대신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떼어 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하람을 응시했다.

입고 있는 하얀 셔츠만큼이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 제 잘못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피식 웃었다.

“마냥 어린 줄 알았더니 사과도 할 줄 아는군.”

꼭 풀 죽은 초식 동물처럼 아래로 축 처진 하람의 고개와 어깨를 보던 남자가 다시금 장죽을 입가에 가까이했다가 멀리 떼어 냈다.

“나는 지금껏 몇십 아니, 몇백 년을 살아서 나도 내 나이가 정확히 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힘이 없지만 나직한 목소리가 나왔다. 바닥이 꺼지는 것처럼 깊고, 묵직한 목소리에 하람이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내 이름이 이한이라는 것뿐이지.”

이한.

하람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한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저도 모르게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여 소리 내지 않고 읊조렸다.

“이마저도 알게 된 것이 네가 태어날 때였으니……. 나이를 알게 되는 것은 또 언제가 될지 모르겠군.”

이한은 몇백 년을 살아왔으나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이름 두 글자뿐. 나이도, 가족도, 심지어 저에 관해서도 몰랐다. 이한이 한숨 쉬는 대신 잡고 있는 장죽 끝을 다시금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고 저를 보는 하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기묘하다.

이한은 하람이 저를 보며 기묘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그 또한 하람을 보며 기묘함을 느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기묘함과 약한 불쾌함이 전신에 가득 흘러넘쳤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지금껏 만나온 자들과 달라서일까. 이한은 하람에게서 느껴지는 단정하면서도 기묘한 기운에 깊어지려는 생각을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보아하니 순영에게서 곧 죽는다는 것을 들은 모양인데 걱정할 것 없다. 그동안 해온 일이 있어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을 거다.”

이한의 손에 잡혀 있는 장죽 끝에서 뭉근한 연기가 새어 나왔다. 하람은 눈에 보이는 저 연기만큼이나 이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딘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하는 일을 잠시 쉬고 순영이 그랬듯이 재산과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라. 너는 재산을 크게 가지면 화(禍)가 오니 영진에게 더 남길 수 있도록 하고.”

분명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데, 이상하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하람이 이한에게서 나오는 말을 멀거니 듣다 그를 보던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크게 뜨인 하람의 두 눈이 떨렸다.

“그리고 당분간 이 집에서 지내라. 네 몸에 붙어 있는 액(厄, 재액·고통·병고 등을 이르는 말)이 너무 많아 역겨운 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다 아프다.”

하람에게서 흐르는 기묘함과 단정함 사이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유 모를 검은 액이 지독하리만치 강한 악취를 풍겼다. 이한이 얼굴을 슬쩍 구기며 장죽을 입가로 가까이했다. 곧 그의 주변으로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이한이 반쯤 넋을 놓은 하람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연기를 피웠다. 하람이 그런 이한을 두고 복잡하게 엉킨 생각을 조용히 정리했다.

신이라는 이한 또한 순영이 죽는다고 한다.

할머니가 죽는다니. 영원히 살 것만 같던 순영이 죽는다는 말에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 느껴졌다.

하람에게 있어 순영은 할머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순영은 부모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몹시도 살갑게 대해 주었다.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주었고, 모나지 않게 자라도록 잡아주었다.

언제나 귀한 몸, 귀한 님이라고 하며 존중해 주었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다.

“……신이잖습니까.”

말하는 이가 없어 적막한 가운데 하람이 떨리던 두 눈을 들었다. 희부연 연기 사이로 장죽을 입가로 가져가는 이한을 보았다.

“순영, 아니, 그러니깐 우리 할머니 죽음을 미루는 방법 같은 거, 모르시나요?”

하람은 할머니이자 엄마이기도 한 순영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었다.

남들 다 한다는 아들 노릇, 손자 노릇을 제대로 한 적 없었다. 흔한 선물, 흔한 용돈 한번 드린 적 없었다.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남들 다 사준다는 붉은 속옷 한 벌도 사드리지 못했다.

한 것이라고는 순영이 바라는 대로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앓는 것 외에는 몸 건강하게 산 것이 다였다. 순영을 이대로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귀한 몸 부디 귀하게 여겨 귀하게 살라는 말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데…….

“전지전능한 신이잖아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으면서 아뜩한 하람의 목소리에 이한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열려 있는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하늘이 검게 변해 있다.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 달과 그 아래에 있는 정자, 연꽃이 흐드러지게 가득한 연못을 보며 숨을 길게 뱉어냈다.

‘한 님은…… 못 하는 게 없잖아요…….’

연못을 보는데 별안간 목소리가 들렸다. 연못을 보는 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목소리를 좇아 사방을 둘러보는데 장죽 끝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장죽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대통 속에 들어 있던 담뱃잎이 사방으로 퍼졌다.

저와 하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한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별안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어느새 덜덜 떠는 손을 들어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겠다고. 이제, 이제 제발 그만하세요…….’

힘이 없는, 처음 듣는 여린 목소리가 머리에 시끄럽게 울렸다. 그러면서 가슴이 지끈거리다 못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한이 이마를 짚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려 검은 상처가 자리한 가슴 위를 짚었다.

쿵, 쿵쿵! 평소 죽어 있는 가슴이 격렬하게 뛰다 못해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허억!”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한이 소리 내어 숨을 크게 삼켰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 숙인 채 이를 악물고 있던 하람이 거친 숨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열린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여린 달빛에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이한의 얼굴이 보였다.

꼭 가슴이 답답한 사람처럼 가슴을 크게 짚은 채로 입을 한껏 벌려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여유가 없는 이한의 모습에 하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신이 고통을 느낄 수도 있나?

하람이 무슨 이유인지 몹시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이한의 모습에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장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이한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어, 어디, 아프신가요?”

가슴을 짚고 있던 이한의 손이 별안간 제 어깨를 짚고 있는 하람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그도 모자라 감은 두 눈을 번쩍 떠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하람과 시선을 맞췄다.

‘……또 다치셨습니까? 제가 걱정한다는 것을 아시면서 왜 이다지도 다치십니까. 혹시 일부러 다치시는 겁니까?’

‘이것 보거라. 내가 다쳐야 네가 나를 보지 않느냐?’

마주한 이한의 눈동자가 떨고 있었는데 그 눈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고 또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경악과 혼란스러움 따위가 보이는 눈에 이상하게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탔다. 하람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소리 나게 삼켰다.

눈을 계속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부여잡은 손을 보았다.

창백한 피부처럼 손에서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얼음장같이 서늘한 손이 제 손을 동아줄처럼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