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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8)화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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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나이 많은 노인에게 말을 함부로 놓는 꼴 같다.

    그 나이 많은 노인이 제 할머니라는 사실에 하람이 남자를 보며 있는 대로 눈매를 찌푸렸다.

    하람이 남자를 보며 불편하다는 기색을 한껏 내보이는 사이 탁, 문이 닫혔다. 문 닫히는 소리에 하람이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순영이 어느새 사랑채를 나가고 없었다.

    “무엇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 것이냐.”

    순영이 떠나면서 닫은 문을 멀거니 보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보던 하람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라간 입술로 장죽 끝을 입가로 가져갔다.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이 한국 특유의 도리는 알 것 같은데. 아니, 한량 같기도 하고 또 망나니 같기도 하고.

    남자를 가만 보던 하람이 허,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말했다.

    “저희 할머니에게 말을 함부로 놓는 것이 불편합니다.”

    남자는 백발에 주름살이 있는 순영과 달리 머리가 검다 못해 몹시 건강해 보였다. 그래서 그가 순영이 모시는 신이라고 해도 말을 놓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람이 참지 못하고 생각한 그대로 가감 없이 말했다.

    거침없는 하람의 말에 장죽을 입에 문 채로 가만히 있던 남자가 별안간 하하하! 크게 웃었다.

    얼마나 크고, 시원스럽게 웃는지 벌어진 도포 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상체가 눈에 띄게 들썩였다.

    크게 웃는 남자를 보던 하람이 제 말의 어디가 웃긴 건지 모르겠고 또 기분이 좋지 않아 입술을 비틀었다.

    “네 눈에는 내가 순영보다 어려 보이느냐? 아니, 내가 사람으로 보이느냐?”

    사랑채가 떠나가라 화통하게 웃어대던 남자가 장죽을 입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 있는 하람을 향해 웃긴 이야기를 다 한다는 듯 웃음을 담아 물었다.

    하람은 저를 보는 남자의 새카만 시선에 어떤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왜 기묘한가 했더니 얼마 있지 않아 알아차렸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물음에는 웃음기가 가득하지만 마주한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남자가 대답 없이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하람을 보다 장죽 끝을 다시 입에 물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하기야, 내 겉모습이 사람과 같으니 착각할 만하겠구나.”

    남자가 자문자답하며 장죽을 잡지 않은 손으로 짧게 손짓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그만 앉거라. 할 말이 많지 않으냐.”

    남자가 고개를 들기 귀찮다는 듯 하람에게 앉으라고 하며 장죽 끝으로 경상 위를 탁탁 쳤다. 그러고는 장죽의 대통 속에 있던 검게 탄 담뱃잎을 재떨이에 털어냈다.

    남자를 보던 하람이 주변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먹물이 튀지 않은 방석이 있었다. 그나마 깨끗한 방석을 가져와 처음 서 있던 자리에 두고, 앉았다.

    자세가 낮아지면서 남자와 시선이 가까워졌다.

    남자의 눈동자가 더없이 짙었다. 그리고 생기가 전혀 없었다.

    어딘가 텁텁하면서도 깊은 눈동자에 하람은 오싹한 소름이 돋아 소리 없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얼마나 사람 같아 보이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다 할까. 그래. 네 눈에는 내가 몇 살로 보이지?”

    남자가 다시 한번 더 소리 내어 웃으며 하람을 보았다. 하람이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대놓고 뚫어져라 보았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그을렸으나 핏기가 없는 피부, 시원하면서 퇴폐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검은 도포.

    어쩐지 국사 교과서에나 볼 법한 남자의 모습에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신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자꾸만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람이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적게 주면 스물 후반, 많이 주면 서른 중반 같습니다.”

    목이 타들어 감에도 불구하고 하람은 제 대답을 궁금해하는 남자를 위해 생각했었던 대략적인 나이를 말했다.

    “서른이라…….”

    남자가 말끝을 길게 끌며 시선을 돌렸다. 활짝 열려 있는 창 너머를 보더니 오른 다리를 반으로 접어 앉았다. 무릎 위로 팔을 대고 제 얼굴을 받쳤다.

    흔히 엄마 다리라 말하는 자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벌어진 도포 자락이 더 벌어졌다. 하람이 제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을 허옇게 드러내는 남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조금 붉혔다.

    시선을 피할 수도 없고. 어색함에 헛기침을 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네 말을 들으니, 얼핏 그런 것도 같군.”

    창밖을 응시하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하람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입가에 언뜻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그 웃음에서 어딘가 회한의 뜻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상함에 조심스레 묻자 남자가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이내 짧게 소리 내 웃었다.

    “내가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를 몰랐는데 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아서 말이다.”

    남자가 혼잣말하듯 답하고는 앞에 앉아 있는 하람 너머, 벽에 걸려 있는 검은 검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딘가 반쯤 넋을 놓은 것 같은 남자의 얼굴에 그를 보던 하람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와 같이 선득할 정도로 새카만 검이 벽에 걸려 있었다.

    검붉은 색의 노리개 같은 것이 길게 늘어져 있고, 검집에 기이한 무늬가 그려진 검은 이상하게도 오싹함을 선사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검에서 느껴지는 의미 모를 강한 거부감에 하람이 미간을 좁히고는 돌렸던 몸을 바로 했다.

    고작해야 검이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새 옅은 소름이 돋은 팔 위를 쓸었다.

    “너도 저 검이 무서우냐.”

    검을 보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하람에게로 닿았다. 하람이 질문에 답하라는 듯 날카로운 남자의 시선에 팔 위를 쓸던 손을 내렸다.

    “……예. 기분이 무척 나쁜 것이 무서운 것도 같습니다.”

    하람이 마치 남 일처럼 조금 꼬아 답하고는 만족하냐는 듯 남자를 응시했다.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남자가 하람의 대답에 피식 소리 내 웃더니 이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래, 올해 나이가 어찌 되지?”

    “서른입니다.”

    “서른? 생각보다 나이가 있군.”

    남자가 감탄한 듯 눈매를 찌푸리며 읊조리고는 침음했다. 하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나이를 묻기에 솔직하게 말했더니 밑도 끝도 없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경우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없을 줄이야. 하람이 어이가 없어 그만 허, 하고 입 밖으로 크게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큰 헛웃음에 남자가 한쪽 눈을 찌푸리더니 지금 제가 들은 것이 참인가 하고 하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금 비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 기가 막히고, 웃겨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래? 무엇이 그리 기가 막히고 웃겼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하람은 남자의 빈정거림이 담긴 목소리와 웃음소리에 제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자가 순영이 모시는 자라지만 경우 없이 하대하는 것도 모자라 명령조로 툭툭 말하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아서였다.

    할머니 한정으로 경우가 없는 놈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다 일관적으로 재수가 없는 듯해 그만 참지 못하고 비웃고 말았다. 그리고…….

    하람이 병풍 아래 더없이 편하게 앉아 저를 보는 남자의 머리에서부터 다리까지 죽 훑었다.

    자세히 보니 막연히 기른 저 머리카락과 한복만 어찌하면 저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 않을 것 같다.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다.

    “할머니에게 하대하시는 것부터 당연하게 하는 명령, 그리고 시대와 맞지 않은 말투가 웃겨서 웃었습니다.”

    현시대에서 벗어난 남자의 언사와 행동거지에 순영에게 갖추는 예의를 도저히 갖출 수가 없다. 하람이 더없이 진실하게, 제가 생각한 그대로 조금의 가감 없이 그대로 말했다.

    덤덤하다 못해 단호한 하람의 말에 그를 보던 남자가 별안간 허! 하고 하람이 그러했듯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한 시선으로 하람을 응시했다.

    어딘가 흉흉한 시선이 꼭 너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모양새다. 하람이 지레 당황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피했다.

    더러운 주변을 보며 남자의 시선을 피하는데 얼굴이 따갑다.

    무시할 수 없는 따가운 시선에 불현듯 순영에게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산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비웃음을 당한 남자가 순영에게 네 손자 참 버릇없다고,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다고 고자질하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한 순간 익숙한 말투가 들렸다. 하람이 설마 하고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어디 한번 말해 보지 그래? 응?”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던 남자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말투로 덧붙여 말했다.

    남자의 입에서 사극에서나 들을 법한 말투가 아닌 요즘 사람들 아니, 익숙한 말투가 나왔다.

    현대 말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갑자기 확 달라진 남자의 말투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

    남자가 요즘 말투를 모를 것이라고 은근 무시했는데. 하람이 제 무시를 완전히 뒤집어엎은 남자의 말투와 흉흉하기 짝이 없는 기세에 반쯤 넋이 나갔다.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나왔다. 하람을 보는 남자의 시선에 흥미가 더해졌다.

    “왜, 말투가 달라지니깐 적응 안 되나?”

    “……아니,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어리둥절한 와중에 남자에게서 다시 한번 더 익숙한 말투가 나왔다. 하람이 한 박자 느리게 답하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말려들었다.

    아니, 정말로 실수했다.

    어디 한번 받아쳐 보라는 듯 저를 뚫어져라 보는 또렷한 시선에 떠났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하람은 훅 돌아온 정신과 함께 신이라고 불리는 남자에게 자신이 속절없이 말려들었고, 실수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시야에 여전히 입꼬리를 당겨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하람은 그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차분하게 생각했다.

    생각에 빠진 하람을 보던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는 장죽 끝을 입에 물었다. 익숙한 손길로 경상에 있는 목재 함을 열어 그 속에 든 담뱃잎을 장죽 대통에 넣고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연기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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