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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7)화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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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영이 여전히 조금 당황한 낯의 하람에게 소리 죽여 웃어 보이고는 앞장서서 걷고, 안채 문을 열었다.

    “어, 아니…… 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하람이 조용히 뒤따랐다.

    신이라는 자는 안채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를 다 돌아다니는 순영과 달리 안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사랑채에서만 머물렀다. 그래서 순영이 점을 볼 때 사랑채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외인을 들이고, 이야기를 듣는다고 했다.

    신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해서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사랑채를 마침내, 다 커서 보게 됐다.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랑채를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티 나지 않게 떠는데 별안간 끼이익, 오래된 경첩 특유의 고약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많이 낡았네.”

    귀에 꽂히듯 들리는 경첩 소리에 나중에 안채 경첩을 바꿔야겠다는 직업병이 돋았다. 하람이 고개를 돌려 이제 막 닫힌 아자살 문을 보며 어떤 경첩을 쓰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본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벌겋게 변해 있다.

    오전이 짧아진 것이 아무래도 겨울이 다 됐구나 싶다. 하람이 눈에 보이는 붉은 노을을 보다 얇은 셔츠에 감싸인 팔 위를 쓸었다.

    입고 있는 하얀 셔츠가 조금 얇았다.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나기로 했던 클라이언트가 유독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 해서 단정하게 입었는데, 다 소용없어졌다.

    괜히 입술을 비트는데 순영이 멈춰 섰다. 따라서 멈춰 서자 순영이 문을 열려고 하다 몸을 돌려 하람을 보았다.

    “하람 님. 신께서는 현재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나 오랜 시간을 사셨던 분이라 입고 있는 것이나 말투 등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신이라는 자가 어릴 때 들었던 호랑이와 구렁이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형태를 가진 걸까. 하람이 차분하게 답하고는 앞에 선 순영을 보았다.

    신과 그 신을 모시는 자는 일반인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하람은 독특한 패션과 말투에 관해 다행히 순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순영 또한 요즘 사람들과 다르게 한복을 입고, 어딘가 붕 뜬 말투를 썼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한복을 입고, 늘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때때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누군가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듯 삼인칭 말투를 쓰기도 했다.

    오늘도 역시나 단아한 한복을 입고 있으시다. 고운 한복처럼 세월이 흘러 얼굴에 주름이 많아도 그저 곱기만 하시다.

    여전히 고운 순영을 보다 불현듯 언젠가 가족들과 가까운 일본 온천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생각났다.

    노인에게 온천이 좋다고 해서 가려고 했었는데. 늘 건강할 줄만 알았던 순영의 몸이 약해졌으니 못 가게 됐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네? 아, 아닙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니, 순영의 말만 믿을 수 없다. 하람은 당분간 본가에서 지내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순영이 여는 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와.”

    문 너머로 천천히 보이기 시작한 풍경에 처음 든 생각은 무척이나 더럽다였다.

    여기만 지진이라도 난 걸까. 바닥에 온갖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떨어져 있었다.

    베개, 액자, 책, 난초, 흙, 방석.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 사이로 요새 보기 힘든 서예용 붓과 벼루도 나뒹굴고 있었는데 온돌 바닥 위로 검은 먹물까지 엉망으로 퍼져 있었다.

    가득 튀어 있는 먹물 자국과 종이에 깨달았다. 지진이 아니라 신이라는 자가 제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다 집어던졌다는 것을.

    더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하람이 제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들어가시지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앞서 청소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순영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더럽혀진 바닥을 이리저리 차분하게 걷는 순영의 모습에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람이 앞장선 순영의 뒤를 따라 조금 짜증스럽게 사랑채에 들어갔다.

    유리조각과 먹물, 흙으로 엉망진창인 바닥 위를 조심하며 걷던 중 단단하기가 이루 말하기 어렵다는 벼루가 깨져 있는 꼴을 보았다.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하람이 속으로 ‘힘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거야.’ 하고 읊조린 뒤 발걸음을 멈춘 순영의 옆에 섰다.

    “모시고 왔습니다.”

    자꾸만 눈에 거슬리는 더러운 바닥을 훑던 하람이 순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창백했다.

    마치 환상처럼 검은빛이 도는 연기에 감싸인, 요즘 사람들은 잘 이용하지 않는 장죽 끝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

    장죽 끝을 잡고 있는 창백한 손가락이 조금 움직인다고 느낀 순간 후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손가락을 보던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이제 막 담배 연기를 내뿜어 낸, 사납다 못해 어딘가 싸늘하면서 묵직한 분위기의 남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부딪친 시선이 몹시도 서늘했다. 얼마나 서늘한지 부딪친 안광이 꼭 시퍼렇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시선이 부딪친 것이 맘에 들지 않는 걸까. 아니면 시선을 마주한 것이 불만인 걸까. 하람은 저를 금방이라도 베어낼 듯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퍼런 안광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밀려나는 것처럼 주춤주춤 뒷걸음치는데 별안간 숨이 턱, 막혔다. 무언가가 목을 강하게 틀어쥔 듯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남자의 새파란 안광에 얼어버린 듯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끄윽…….”

    하람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가만 응시하던 남자가 시선을 돌려 당황한 낯의 순영을 보았다.

    “모두 물렀느냐.”

    남자의 입에서 퍽퍽하리만치 묵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에 하람이 일그러뜨리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네.”

    순영이 남자를 향해 짧게 묵례한 뒤 대답했다.

    남자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고는 앉아 있는 금빛 보료에서 느리게 일어섰다.

    훌쩍 일어선 남자가 장죽을 잡지 않은 손으로 창호지가 곱게 발린 창을 벌컥 열었다. 창 너머를 스윽 길게 살피고는 이내 처음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소리 내어 앉았다.

    “가까이.”

    검은 도포 자락에 감싸인 남자의 팔이 낮게 들렸다. 곧 손끝으로 하람을 가리켰다.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끅끅 소리를 내던 하람이 눈을 찌푸렸다. 동시에 순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열린 창에서 새어 들어온 바람을 타고 남자의 주변을 옅게 감싸던 연기가 창 너머로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연기를 따라 감춰졌던 남자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남자는 독특했다. 아니, 기이했다.

    분명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수묵화 같기도 하면서 잘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하다 못해 선득했다. 그래서 하람은 제가 지금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껍데기를 두른 번뜩이는 칼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압도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남자의 기운에 어릴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나운 호랑이와 큰 구렁이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 풍겨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말이. 그러면서 순영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한 말을 이해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긴지 어깨에 걸쳐지고도 길게 흘러내렸다. 그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것처럼 얼굴색이 짙었는데 이상하게도 핏기와 생기가 전혀 없었다.

    기이한 분위기를 보다 뒤늦게 방만하게 벌어져 있는 남자의 검은 도포 자락을 발견했다.

    “와…….”

    너무 어이가 없어 그만 입 밖으로 탄식이 나왔다.

    아니, 자신을 믿는 사람한테 가슴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걸까. 한껏 벌어진 도포 자락에 남자가 깔끔한 성격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하람이 남자의 벌어져 있는 도포와 드러난 가슴, 가슴에 옅게 나 있는 검은 상처를 멀거니 보는데 별안간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하람이 물러난 만큼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고작해야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것이 전부인데 진한 담배 연기가 코를 찔렀다.

    담배 연기가 얼마나 독한지 눈이 다 따갑다. 하람이 슬쩍 눈가를 비볐다.

    눈을 비빈다고 한쪽만 트인 시야에 남자가 입술 끝을 늘어뜨리며 웃는 것이 보였다. 그 웃음마저도 어딘가 기이해 보였다.

    “그리한다고 나아질까.”

    남자가 가소롭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다는 듯 웃으며 낮게 읊조렸다. 그 비웃는 것이 분명한 남자의 말에 발끈한 하람이 지금 비웃는 거냐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숨이 턱 막히던 목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고,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등골이 오싹하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비비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순영이 넌 이만 나가 보거라.”

    남자는 하람만 보인다는 듯 하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람은 마주한 남자의 형형한 시선에 제 얼굴이 어쩌면 뚫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해야 하나 생각하는 데 남자가 순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다급하게 순영을 보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던 순영이 조금 놀란 눈으로 하람을 짧게 보았다가 다시 남자를 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아직 말씀을 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나를 믿지 않는데 길게 말해 무어 하느냐. 넌 그만 가서 쉬어라.”

    순영을 보던 하람이 다시금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남성적인 느낌과 함께 퇴폐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단아한 순영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먹물처럼 짙으면서 어린 남자, 순백의 눈처럼 하얗고 나이 든 순영.

    하람은 순영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놓는 것도 모자라 명령조로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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