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6)화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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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직접…… 이요?”

하람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내도 그저 덤덤하게 웃던 순영이 또다시 생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하람이 지금껏,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지독하리만치 들었던 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만나라는 말을.

신(神)을 만날 수 있는 건가. 아니, 신을 직접 모시는 자 외에는 볼 수 없는 거 아니었나? 어릴 때는 분명 볼 수 없다고 했는데?

하람은 어릴 때 신을 보기 위해 신이 지낸다는 사랑채를 멀리서 지켜보거나, 주변을 맴돌고는 했는데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에 관해 묻고 다녔었다.

신을 보자마자 눈을 잃었다, 대가 끊겼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 이외의 존재라서인지 풍기는 기세가 꼭 사나운 호랑이나 큰 구렁이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사나운 기세가 풍겨서 제대로 볼 수 없다고도 했다.

어린 나이의 하람은 호랑이와 구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에 결국 순영을 바로 옆에서 모시는 강원댁과 운전기사에게 찾아갔다. 순영 모르게 신에 관해 물었는데 그들 또한 본 적 없다고 했다.

부엌 이모, 가사도우미 이모, 정원 삼촌, 강원댁, 운전기사, 누나 영진까지. 신의 얼굴을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자 하람은 결국 순영에게 신에 관해 물었다. 정말로 제가 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인지. 순영은 걱정과 달리 친절하게 이유를 알려주었다.

“외인은 함부로 보기 어려운 분이시지요.”

“왜요?”

“저는 신을 모시고 있어 잘 모르지만 오한이 나고, 숨이 막힌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절대로 사랑채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아셨죠?”

평소 단호하게 말하지 않는 순영이 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사랑채에 가지도, 보지도 말라고 주의 줬다. 그리고 귀하신 몸을 귀하게 여기라고 했다. 그때부터 하람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하람 님께서 바라신다면 직접 뵐 수 있습니다.”

어릴 때까지만 해도 몇 대가 대대로 모시고 살아온 신은 그 신을 직접 모시는 자 외에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관심을 완전히 끊고 살았는데……. 순영이 지금껏 후환이 두려워 보지 못하게 했던 그 신을 직접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신께서는 지금 사랑채에 계십니다. 하람 님이 뵙고자 하신다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늘따라 순영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충격적이다.

고요한 강물과도 같던 순영이 마치 부처의 탈을 벗은 것처럼 농을 하는 것만 같아 하람이 조금 멀거니 순영을 보았다. 순영이 말갛게 웃었다.

“신께서 하람 님이 뵙길 원하신다면 얼굴을 보이신다 하셨습니다.”

직접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참고 있던 관심이 폭발한 듯 신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여태 보여 주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 보여 준다고 하는 걸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보고 싶기는 한데, 무슨 생각으로 만난다는 걸까.

도대체 왜. 몇 번을 생각해도 너무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어 넋이 반쯤 나갔다.

“……자, 잠깐만요. 보이신다고요?”

누가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존재인 줄 알겠다. 아니, 사실 신이라고만 들었지 그 신이 실재하는지, 그리고 사람의 외형인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 해봐야 외형을 볼 수 없다, 집안 대대로 모셔왔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순영의 입에서 나온 의미가 모호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람이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순영이 하람의 물음에 대답 대신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느리게 나눠마셨다.

유유자적하게 차 마시는 순영의 모습을 멀거니 보던 하람이 별안간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제가 할머니 다음으로 신을 모시는 건가요?”

순영처럼 세습 받는 걸까. 하람이 설마 하고 의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보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순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대답을 해주는 걸까. 당황스러움과 경악, 혼란 등이 섞인 눈으로 순영을 보는데 순영이 갑자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이고,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생각에 빠진 듯 눈을 감은 순영을 보던 하람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느리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사이 하람에게 충격적인 말을 연속해서 말한 뒤 눈을 감고 있던 순영이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보살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신과 나누시는 건 어떠십니까?”

“신, 네?”

“신께서 하람 님이 고민하고, 놀라실 것을 아셨는지 기다리고 계셨다고 합니다. 가시지요.”

뭐? 고민하고, 놀랄 줄 알았다고? 하람이 순영에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순영이 응차 소리와 함께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영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가시지 않는 충격에 벌어진 입이 다물리지 않는다. 순영이 앉아 있던 보료에서 나와 바로 옆에 설 때까지도 하람은 그녀를 따라 눈을 돌릴 뿐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가시지요. 앞장서겠습니다.”

반쯤 넋을 놓은 채로 멍하니 순영을 보는데 순영이 손을 내밀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말입니까?”

수명이 다 된 전구도 아니고. 하람이 자꾸만 깜빡거리는 정신에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순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하람 님이 또 언제 쉴지 몰라 오늘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언제? 오늘 쉴 줄 알았다는 건가? 아, 신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이다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제가 쉬는 날을 모르시는 건가요?”

오늘 쉴 줄 알았으면서 또 언제 쉴지는 모른다고 한다. 이상함에 되묻자 순영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신께서 후일을 미리 보지만 하람 님의 미래만큼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하람이 저도 모르게 저를 내려다보는 순영을 보며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순영이 소녀처럼 작게 웃었다.

“저는 신의 말을 전달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이 모르는 것은 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신을 모시는 순영 또한 무속인이었다. 미래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는데 집안 대대로 모시는 신은 그보다 더 넓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다 정확성까지 높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돈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뉴스에 나오는 유명한 기업인부터 나랏일 하는 정치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연예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꽤나 많은 돈을 가진 재벌까지. 돈 있는 사람이라면 순영을 찾아와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며 몇 번이고 점을 봤다.

그런데 제 미래를 모른다고 한다. 하람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마음만 먹으면 복권 당첨 숫자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람이 황당함에 뒤로 넘어갈 것 같아 다급하게 바닥을 짚었다.

“……다 아는 게 아니셨습니까?”

“저 또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신이 알려주는 것 외에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은 다 뭐란 말이지? 높낮이에 큰 변화가 없는 순영의 덤덤한 말을 듣던 하람은 하마터면 버릇없이 말을 자르고, 소리 높여 물을 뻔했다.

어쩐지 순영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하람이 답답함을 토해내듯 숨을 크게 뱉고는 고개 숙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순영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존재를 알 수 없었던 신을 만날 수 있고, 미래를 보는 줄 알았던 순영이 제 미래는 볼 수 없고.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인간 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제가 어쩌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신을 모실 수도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나중에는 사실은 누군가 제게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집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해진 금액으로 오래된 카페를 어떻게 리모델링 할지, 고택 리모델링을 어떻게 할지로 복잡했는데. 머릿속이 순영과의 만남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하.”

지금껏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머릿속을 터트릴 듯이 가득 채워졌다. 갑자기 많은 것이 들어찬 머리가 묵직하다 못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시다면 신께 후에 찾아뵙겠다고 전해도 되겠습니까?”

“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하람이 덤덤한 순영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어떻게 하겠냐는 듯 빤히 보는 시선에 아뜩함이 느껴져 결국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신께서는 하람 님의 생각을 중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편할 때 뵙자고 하십니다.”

하람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순영의 얼굴이 어쩐지 지금 상황을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그냥 정신을 완전히 놓고 싶어졌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순영보다도 아니, 신이라는 자가 제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너무 당황스럽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주춤했던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하람이 혼란스러워하는 중 순영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신이라는 자와 통할 때는 눈을 감아야 하는 것 같다. 눈치로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다 마음을 정했다. 하람이 바닥을 짚었다.

“지금 바로 만나 뵙겠습니다.”

순영의 말마따나 제가 언제 쉴지, 본가에 또 언제 올지 몰랐다.

만나야 한다면 얼른 끝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람이 눈을 뜬 순영 모르게 한숨 쉰 뒤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순영이 키가 훌쩍 커 어느새 저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하람을 올려다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사랑채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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