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하람. 그러니깐 하늘에서 내리신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은 할머니 순영이 모시는 신이 제가 태어난 그 날 지어 주었다고 했다.
무속 신앙을 믿지 않아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는데 순영이 더없이 진지하게 귀한 이름이니 많이 부르고, 많이 쓰라 했다.
이름이 귀해 봐야 그저 이름이다 싶어 신경 쓰지 않았으나 하람은 이상하게 우진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은 듣기 좋았다.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름의 울림이 귀에서 머리로, 그리고 가슴으로 번졌다. 하람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대표님, 일 많으세요?”
건축사무소와 멀지 않은 곳에 우진의 집이 있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람이 익숙하지 않은 거리를 훑으며 걸었다.
- 아니. 여기만 보면 되는데. 왜?
괜찮아진 것을 눈치챈 듯 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현장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람이 잠시 멈춰서서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길만 제대로 찾으면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 하람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힘없이 옅게 웃었다.
“현관 비밀번호 그대로죠?”
- 응. 아, 어제 집에서 작업해서 더러울 텐데 괜찮겠어?
넌지시 묻는 우진의 목소리에 괜찮다고 답하려는데 핸드폰 너머로 확인해 달라고 하는 외침이 들렸다.
아무래도 통화보다 공사 이야기를 먼저 나눠야 할 것 같다. 하람이 입을 다물었다.
예상대로 핸드폰에서 작업 결과가 나쁘지 않다, 드러난 벽면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자재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이번에는 우진이 통화 중이라는 것을 잊었는지 아니면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지 공사 담당자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우진답기도 하고 또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말없이 가만 듣던 하람이 흠흠,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대표님, 전화 끊어도 돼요.”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대화하는 게 불편하지 않은 걸까. 라고 생각할 즈음 핸드폰 너머로 먼저 가보겠다는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람이 미간을 좁혔다.
“일 다 하고 오세요.”
- 왜,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괜찮으니까 다 하고 오세요.”
서른이나 먹은 저를 마치 다섯 살 먹은 아이처럼 대하고, 걱정한다.
하람이 저 때문에 바쁘면서도 퇴근하려 하는 우진에게 짧게 한소리 한 뒤 길을 찾아 걸었다. 우진은 하람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담배 연기 내뿜는 소리만 냈다.
우진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여유가 흐르는 인상과 달리 때때로 아이 같은 똥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대답을 잘하다가 갑자기 대답을 하지 않는다거나, 외롭다고 같이 술을 마셔달라고 하거나, 악몽 꿨다고 같이 자 달라고 조르거나. 어울리지 않는 고집을 부려 결국 제 뜻대로 하게 만들었다.
반드시 지금 퇴근하겠다는 듯 아무런 대답이 없는 핸드폰에 다시금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졌다. 하람이 끙 소리 내며 이마를 짚었다.
우진의 목소리에 마음이 안정된 듯 아까보다 뜨거움이 덜했다. 약은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책 보고 있을 테니 일 다 끝내고 오세요.”
- 이미 인사 다 했는데.
병원에 가는 대신 우진의 집에 있는 건축 잡지를 보며 쉬어야겠다. 어느새 이마 위로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큰길을 찾아 나가는데 별안간 웅웅거리는 정체 모를 이명이 또 들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동 소리처럼 잔잔했던 이명이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굵게 느껴졌다.
이명으로부터 시작된 두통에 이마를 짚은 손이 잘게 떨리고, 시야가 먹먹해졌다. 언젠가 깊은 바다에 빠졌던 때와 같이 시야가 보이지 않아 하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쿵쿵쿵. 가슴이 더없이 불안하게 뛰었다. 평상시의 속도 그 이상, 마치 제자리에서 500m 달리기를 하듯 거세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허리가 점점 굽어들었다.
“아…….”
고통을 참지 못한 하람이 신음하며 허리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잡고 있던 핸드폰이 손을 떠났다.
하람이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는 이마를 짚었다가 무섭게 쿵쿵거리는 가슴 위를 짚었다. 빠르다 못해 소란스러운 가슴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히 꺼져버린 시야에 눈을 떴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포심이 왈칵 올라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여린 신음을 내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람은 어릴 때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편두통과 격통을 자주 느꼈다.
온갖 검사를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아픔은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또 서른 살이 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하람이 고등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낸 우진도 잘 알고 있었다.
- 하람아, 하람아!
하람의 생각대로 고집부리던 우진이 툭 소리와 함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더 다급하게 하람을 찾았다. 그사이 하람이 가슴 위를 짚은 채로 늘 그랬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이상했다. 그저 아프기만 하던 평소와 달리 무언가가 울컥하고 가슴에서부터 목까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입 밖으로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아 다급하게 두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이하람 씨?”
아픔을 참으며 듣기 싫은 이명을 무시하는데 별안간 봄바람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입가를 틀어막은 채로 허리를 잔뜩 굽히고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하람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단정한 인상의 여자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누구, 시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힘겹게 묻자 여자가 옅게 웃었다.
“마님께서 하람 님을 찾으셔서 모시러 왔습니다.”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마님’이라는 단어에 당황했다가 곧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님’이라는 단어를 들은 탓일까. 걱정스레 보는 여자에게 제가 아는 그 ‘마님’과 비슷한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어딘가 초월한 것 같은 할머니와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는 모습에 굽히고 있는 허리를 천천히 바로 했다.
여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직접 주워 들었다. 이내 통화가 끝나 화면이 검게 변해 있는 핸드폰을 하람에게 건넸다.
“신께서 지금 가시려 하는 곳은 귀한 몸이 가시기에 적절치 못하다 하셨습니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어쩐지 지금 제가 가려는 곳을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여자의 말에 하람의 눈이 한껏 찌푸려졌다. 여자가 허리를 작게 숙였다.
“미천한 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자세한 것은 마님께서 하람 님이 오시면 설명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어딘가 시대에서 벗어난 것 같은 말은 정중했으나 한편으로는 강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람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에 왜인지 고등학교 때 핸드폰으로 협박하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어이없는 생각에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제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요?”
하람에게서 거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여자가 당황한 듯 눈을 몇 번 잘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미래를 보는 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여자의 얼굴이 이러다 곧 울겠다 싶을 정도로 안 좋아졌다. 마치 엄마에게 혼이 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아이 같은 여자의 모습에 하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깔끔하게 정리된 제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짧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파서 심술 좀 부려 봤어요. 갈게요. 할머니 어디 계세요?”
괜한 심술을 부렸다는 하람의 말에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람이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선, 핸드폰부터 돌려주세요.”
우진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됐다고 문자를 보냈다. 몸 괜찮냐는 답장에 답을 보내는 대신 차창 너머를 보는 사이 까만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차에서 먼저 내려 하람이 타고 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하람이 감사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린 뒤 활짝 열려 있는 익숙한 정려문을 보았다.
충신을 기린다는 내용과 연행헌(蓮杏軒)이라는 한자가 적힌 정려기를 힐끔 보고는 정려문을 넘었다.
“변한 것이 없네.”
오랜만에 온 연행헌, 본가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해를 막아 주는 키가 큰 아름드리나무부터 그 아래로 피어 있는 하얀 들꽃마저 모두 그대로였다.
기이하리만치 조용하면서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풍경을 휘 둘러보는데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익숙한 낯에 굳은 얼굴이 펴졌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하람 님, 오셨습니까?”
몇 년 만에 보는 걸까. 하람이 저를 보며 더없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중년 여성을 따라 편안하게 웃었다.
“오시는 데 불편한 것은 없으셨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강원댁은 여전히 순영만큼이나 자애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하람이 어느새 제 옆에 서 있는 강원댁에게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묻고는 안으로 걸었다.
“이곳 생활이야 다 그만그만하지 않겠습니까? 하람 님은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현장 나가고, 설계하고, 쉴 시간 생기면 쉬고.”
한남동 산기슭에 있는 본가는 한옥으로 날을 잡아서 둘러보지 않는 이상 다 볼 수 없을 만큼 넓었다. 집 어디를 가든 한참을 걸어야 했는데 강원댁이 곧장 안채로 이끌었다. 하람이 순영이 늘 머물고 있는 안채로 향하며 여전히 잘 관리된 한옥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