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3)화 (3/87)
  • 03. #02. 인연 연(緣)

    “저기, 대리님.”

    “응?”

    “……평면도랑 실측이랑 다른데요?”

    “음, 설계도 새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간이 테이블과 노트북뿐인 공간 속. 오래돼서 수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낡은 평면도를 보던 두 남자가 동시에 한숨 쉬었다.

    “……아니, 정확한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일주일, 오픈 일자 다시 조정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최대한 맞춰 보고 안 되면 그때 조정해야지.”

    “평면도 있다고 그렇게 당당하더니만. 어째 엿 먹은 기분이네요.”

    으아아 소리 내며 머리털을 뜯는 남자와 달리 시종일관 차분하던 남자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로 끝을 태우는 사이 옆에 선 남자가 따라서 담배를 꺼냈다.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하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점점 옅어지는 연기 아래로 나타나는 얼굴이 몹시도 피곤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게 했다.

    담배를 잡지 않은 손으로 줄자를 길게 뺐다가,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하며 하람을 보던 성준이 끙 소리를 냈다. 이내 노트북을 펼치는 하람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대리님.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못 주무셨잖아요.”

    “응?”

    “제가 사무실 가서 가구랑 다 다시 살펴볼 테니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쉬시는 게 어떠세요?”

    노트북 위로 화면이 뜨기 시작했다. 하람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종이컵으로 대충 만든 재떨이에 버렸다.

    걱정하는 사람 맘도 모르고 그저 태연자약하기만 하다. 퇴근할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에 줄자를 이리저리 만지던 성준이 다시 한번 더 대리니임, 하고 간곡하게 불렀다.

    “진짜 피곤해 보여요. 오늘은 진짜 들어가 쉬세요. 네?”

    “여기 말고도 돌아봐야 할 곳 두 군데나 더 있어서 퇴근해도 똑같아.”

    “……워어.”

    툭 하고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곧 죽어도 일을 하겠단다.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진짜, 제발 들어가세요, 라고 말하려 했던 성준이 다음으로 어딜 갈지 고민하는 하람을 멀거니 보다 한 박자 느리게 정신 차렸다.

    “대리님, 일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너무 과해요! 아니, 전에 대표님이 말씀하신 거 잊으셨어요?”

    대표님이 무슨 말을 했었지. 노트북을 보던 하람이 “무슨 말?” 하고 말하며 고개를 돌려 성준을 보았다.

    “우리 하람이 무조건 쉬게 해!”

    성준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귀가 쨍할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소리를 얼마나 크게 질렀는지 좁은 공간에 목소리가 왱왱 울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듣게 된 커다란 고함에 하람이 깜짝 놀라 굳었다. 그를 보고 있던 성준이 하람의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대표님한테 대리님 퇴근 안 한다고 다 이를 거예요.”

    “아니,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등이 강제로 떠밀리기 시작했다.

    하람이 제 등을 꾹꾹 밀어내는 성준의 힘에 난감하다는 듯 얼굴을 조금 구겼다.

    성준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었다.

    쉬라고 하는 성준의 마음이 고맙지만 쉴 수 없다. 안 된다고, 다 끝나면 쉬겠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 소리에 하람의 입이 굳고, 그의 등을 밀던 성준이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람이 자리에 멈춰 서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 위로 [우진 대표님]이란 다섯 글자가 떠 있었다.

    타이밍 정말 기가 막힌다. 하람이 짧은 한숨과 함께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귀에 핸드폰이 닿기가 무섭게 쿡쿡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이하람. 자꾸 내 말 안 들을 거야?

    전화를 건 남자도 일하는 중인지 제법 소란스러웠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부터 우렁찬 고함, 톱질 소리, 가구가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까지. 온갖 공사 소리로 정신없었는데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은 이상할 정도로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 또 대답 안 하지. 응?

    웃음기가 가득한 우진의 목소리에 찌푸려져 있던 하람의 얼굴이 펴졌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하람의 웃음소리에 성준이 눈치 좋게 테이블 옆으로 떠났다.

    하람이 멀어진 성준을 보고는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 우리 하람이한테 전화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 이거 너무한데?

    우진이 넉살 좋은 사람 특유의 여유 가득한 웃음을 터트리며 무심한 하람을 놀렸다. 진중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우진의 목소리를 듣던 하람이 손을 들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따끔거리는 눈을 감고 약하게 매만졌다.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하는데 우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성준을 보았다. 성준은 캐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집중해서 일하는 성준을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쉬어도 될까. 성준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피곤하긴 한데. 노트북에 들어갈 듯이 보고 있는 성준을 보다 아까부터 조금 어지러운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서 열이 옅게 느껴졌다.

    쉬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제 일을 성준에게 떠넘긴 것만 같아 찜찜해졌다.

    어떡하지. 고민하다 결국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으로 핸드폰 아래를 손으로 덮었다.

    “성준아, 나 먼저 가 볼 테니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해 줘.”

    “진짜요? 급한 일 있어도 대리님 말고 대표님한테 말씀드릴 거니 푹 쉬세요!”

    성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제발 쉬세요! 라고 말하며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하람이 수고하라는 인사 후 밖으로 나가고,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갔다.

    마무리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계단을 조심해서 밟아 내려가다 제가 지금 통화 중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람이 뒤늦게 아래를 감싸다 못해 멀리 떨어뜨리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귓가에 가져갔다.

    성준과 인사를 나눈 그 잠깐 사이 우진이 그새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사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우진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으며 타이밍을 재는데 길게 이어지던 지시가 끝났다. 하람이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 응?

    “저 오늘 반차 내도 될까요?”

    - 반차? 왜 무슨 일 있어?

    “머리 아파서 좀 쉴까 해서요.”

    - ……저런! 약은? 약은 먹었어?

    사람들 다 열심히 일하는데 저만 맘 편하게 쉬는 것만 같아 무작정 쉬고 싶다는 말을 하기가 뭣했다. 그래서 평소 달고 사는 두통을 핑계로 꺼냈다.

    하람이 평소 편두통에 자주 시달리고, 두통약을 늘 들고 다니는 것을 우진도 잘 알고 있었다. 약 먹었냐고,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진심 어린 물음에 하람이 답하려는데 입 밖으로 두통이라는 두 글자를 꺼내서일까. 진짜로 머리가 아파졌다.

    무언가 날카로운, 마치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드릴이 사실은 제 머리를 뚫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팠다. 갑자기 쨍하고 아픈 머리에 목적지 없이 걷던 하람의 발이 뚝 멈췄다.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고, 징징 울리는 것도 같다. 하람이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손바닥 아래로 끓는 듯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머리가 뜨겁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머리에 모여 있던 열기가 온몸으로 퍼진 듯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 가만히 서 있던 하람이 비틀거렸다.

    - 하람아?

    꼬박꼬박 잘 대답하던 하람에게서 계속 대답이 없다.

    - 하람아, 이하람!

    불러도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우진의 목소리가 커지고 다급해졌다.

    하람은 저를 부르는 우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어라고 답을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꼭 차가운 빗물에 푹 젖은 것처럼, 절절 끓는 물에 깊게 빠진 것처럼 온몸이 들끓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구에 열이 오른 듯 홧홧했다. 하람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뜨거운 눈에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려 눈가를 덮었다.

    메마른 손바닥 위로 언뜻 물기가 느껴졌다. 물기에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길거리에서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눈물이 손끝에 묻어 있었다. 언제 터져 나왔는지 모를 눈물에 찌푸려진 하람의 눈동자 위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 하람아! 무슨 일 있어? 이하람!

    “……아.”

    지금 당장 달려올 것 같은 우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멍하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하람이 힘겹게 답하며 다시 한번 더 눈을 감았다 떴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몸이 뜨거우면서도 한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눈물에 당황하고 말았다.

    -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걱정 가득한 우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을 바지에 대충 닦아낸 뒤 멍한 시야로 천천히 걸었다.

    - 반차 처리해 줄 테니 지금 바로 병원 가. 아, 아니다.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 지금 어디야?

    “아니, 괜찮…….”

    정처 없이 느리게 걷던 하람이 걸음을 멈췄다.

    눈에 보이는 길거리가 낯설다.

    분명 방금까지 있었던 카페 건물은 일하고 있는 건축사무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주변을 잘 알고 있는데, 여긴 어디지?

    눈에 보이는 거리와 건물이 모두 이상하게 낯설었다.

    여긴 어디지? 주변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이상함에 주변을 빠르게 살피는데 귀에 들리는 우진의 목소리까지 멀게 들렸다.

    “대, 대표님. 대표님.”

    핸드폰까지 이상이 생긴 건가 싶어 우진을 부르는데 아까부터 계속 들리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은 순간 찰캉, 지포 라이터가 열리는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 아, 조용한 곳으로 왔어.

    “하, 대표님…….”

    - 응. 하람아.

    우진의 다감한 부름에 혼란스러움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두통과 나쁘던 기분도 좋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