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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지연多生之緣 (2)화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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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남긴 허무한 읊조림을 되새기던 순영이 어찌할 줄 몰라 헤매다 방문을 벌컥 열었다. 화급하게 방에서 뛰어나갔다.

“또 무슨 짓을…….”

안대청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황급히 앞장서 나갔다. 곧이어 나온 순영을 위해 집 가까운 곳에 세워둔 차 문을 황급히 열어주었다.

순영이 차에 타기가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렇게 말했건만, 기어이…….”

태어날 때부터 계속 속을 썩이던 딸이 기어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순영이 제 충고를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딸을 향해 한탄하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신이 보았던 미래가 달라지고 있다.

달라진 미래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탄과 후회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순영이 손에 잡힌 가방끈만 초조하게 잡았다, 놓았다 반복하는 사이 차가 도로 위를 빠르게 달렸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바쁘게 목적지로 향하던 중 부리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분만실에 들어간 산모가 진통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제왕절개를 택했다고 알려주었다.

예로부터 사람의 몸에 칼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늘 아래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신이 몸에 절대로 칼을 대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기어이 칼을 대고 말았다.

순영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짧은 생을 스스로 끊어 내는 결정을 한 딸 생각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두 눈을 굳게 감았다.

* * *

순영의 딸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고, 몹시 허약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었다.

약한 몸으로 힘겹게 생을 이어오던 중 신이 조언했다.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절대로 몸에 칼을 대지 마라. 그럼 바라는 만큼 무탈하게 살 거다.’

신의 조언에 최대한으로 조심하며 살았는데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거기, 계십니까?”

가혹하기도 하고 참 모질기도 하다.

생을 다한 자 특유의 차가운 손을 부여잡고 가만 서 있던 순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저 외에는 없는 공간에서 슬프게 누군가를 찾았다.

“……그래.”

순영의 흐느끼는 듯 힘없는 숨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낮은 대답이 울렸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나타났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검은 구두가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아래에서부터 안개가 피어올랐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안개가 점점 인영의 모습을 갖추었다. 곧 검은 슬랙스와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순영과 함께 책을 읽던 남자가 소리 없이 순영의 옆에 섰다.

반듯하게 선 남자가 순영을 닮아 단아한 인상의 여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생이 다한 자가 그러하듯 온기가 없어 얼굴이 더없이 창백했다.

아기님을 낳는 동안 흘렸던 땀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여자의 이마 위로 맺혀 있는 땀을 조용히 닦아 냈다.

“제가 이제 무얼 해야 할까요. 도대체 무얼…….”

죽은 순영의 딸과 같이 순영 또한 날 때부터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었다. 아니, 그녀의 선대부터 타고 올라가면 멀쩡한 삶을 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나고, 운명이 좋지 않았다.

순영도 죽은 딸과 같이 결혼 후 2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제는 딸까지 떠나보냈다.

죽은 딸을 보던 순영이 아뜩하기만 한 제 생에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너무 힘이 든다는 듯 소리 죽여 울었다.

남자가 참고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트린 순영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손에 남아 있는 땀을 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네 딸이 남긴 아이들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순영의 딸이 죽으면서 순영에게는 이제 제 어미가 죽은 줄 아직 모르는 다섯 살배기 손녀와 이제 막 태어난 손자가 가족의 전부가 됐다. 이제 가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손녀, 손자를 제대로 보살펴야 했다.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지만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남자의 말에 순영의 울음소리가 더없이 구슬퍼졌다.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던 남자가 한 걸음 뒤로 가 차사가 다녀가면서 혼까지 사라진 여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죽은 여자를 보는 남자의 얼굴 위로 허망함이 비쳤다.

한참 죽은 여자를 응시하던 남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순영의 어깨 위로 손을 두려는 순간 문 너머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다시 물러났다. 동시에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닫혔던 문이 열렸다.

“마님, 아기님을 뵐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막 분만실에 들어선 여자가 아까까지는 느껴지지 않던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가 꼭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선득하면서도 흉흉했다. 움츠린 몸이 벌벌 떨렸다.

여자가 온몸을 떨다 앞으로 공손하게 모은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하게 깍지 꼈다.

“……알겠습니다.”

여자가 힘겹게 버티고 선 사이 순영이 힘겹게 답하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눈 아래 길게 흘러 내려온 눈물을 닦아 냈다.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느리게 갈무리하고는 떨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먼저 가 계세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영이 어느새 쓰러질 듯이 파랗게 질린 여자를 먼저 보냈다. 사시나무처럼 떨던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급하게 분만실을 나갔다.

여자가 떠나고 한동안 소리 없이 죽은 딸을 보던 순영이 창백한 손을 잡았다. 소스라치게 차가운 손에 온기를 남기고는 죽은 딸에게서 힘겹게 등을 돌렸다.

태어난 아기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순영이 분만실을 나갔다. 사람 한 명 없어 적막한 복도를 천천히 걸어 신생아실로 향했다. 그 뒤로 남자가 소리 없이 뒤따랐다.

남자보다 한 걸음 앞장서서 느릿하게 걷던 순영의 시야에 밝은 불빛이 보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신생아실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순영의 눈가가 떨렸다. 손수건을 꽉 쥐고 있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순간 남자가 드러냈던 모습을 다시 감췄다.

긴 복도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신생아실 앞에 멈춰 섰다.

“……세상에.”

우는 아기, 곤히 잠든 아기, 눈을 깜빡이는 아기를 소리 죽여 보는데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서 있던 간호사가 순영을 발견했다. 허리를 짧게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옮겼다.

간호사가 하얀 강보에 감싸인 아기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유리창 가까이 다가왔다. 순영이 어느새 눈물에 푹 젖은 눈으로 간호사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님을 보았다.

얼마나 순하신지 외인의 품에 안겨 있어도 울지 않는다.

어미가 죽은 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작은 입술을 잘게 오물거리는 아기님을 보던 순영이 두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간호사가 아기를 편하게 보라는 듯 창가에 마련된 바구니에 아기를 눕혀 주고 떠났다.

바구니 속에 홀로 있어도 얌전하시다.

크게 우는 다른 아기들과 달리 더없이 순한 아기님의 모습을 가만 보는데 별안간 아기님의 얼굴 위로 옅은 풍경이 보였다.

처마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비, 바람에 흔들거리는 마른 나뭇가지, 저무는 해 그리고 검게 시든 모란.

이제 태어난 아기님과 어울리지 않는 슬픔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미래를 보고 또 막아 주는 신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운명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만 눈물이 또 터지고 말았다. 순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 흡.”

아기님을 보며 소리 죽여 우는 순영의 뒤로 아기님에게 혹시나 좋지 않을까. 잠시 모습을 감췄던 남자가 스르륵 다시 나타났다.

티 한 점 없는 밝은 피부, 말간 눈, 복숭앗빛 뺨, 여린 석류색 입술.

‘한 님. 이한 님.’

아기답지 않게 또렷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는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소리를 쫓아 복도를 훑는데 그와 순영 외에는 없었다.

다시 아기님을 보는데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본 사람처럼 눈가가 옅게 떨렸다.

“……순영아.”

남자가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두꺼운 유리창 앞에 선 순영의 옆에 서며 눈에 띄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내 이름이, 이한이었다.”

놀라움과 생경함,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이한의 목소리에 눈물 흘리던 순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삶을 살면서 계속 몰랐던 이름을 알게 됐다.

놀란 얼굴로 굳어 있던 이한이 두꺼운 유리창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유리창에 닿은 이한의 손끝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그도 모자라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더없이 하얗게 질렸다. 순영의 얼굴 또한 점점 하얗게 질렸다.

“지, 지금…….”

“지금까지 살면서 몰랐던 이름을…… 이제야, 이제야 알게 됐다.”

이한이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강보에 감싸인 아기님이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추고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저를 보고도 울지 않고 조용히 눈을 마주하는 아기님을 넋을 놓고 응시했다.

아기님의 새카만 구슬 같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몸에 있는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이 아뜩해졌다.

이한이 무어라고 감히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아뜩함에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너는 하람, 하람이 좋겠구나.”

이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아기님이 작은 입술로 방긋 웃었다. 이한이 곧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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