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생지연多生之緣 (1)화 (1/87)

01. #01. 하람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뿐인 공간.

백색소음이 흐르는 고즈넉한 공간 속에 별안간 핸드폰 벨 소리가 소란스레 울렸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던 중년 여자, 순영이 벨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 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 여보세요? 네. 네, 그리고요?”

평소 무슨 일에도 서두르지 않는 순영답지 않게 조금 화급하게 통화를 이어간다.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순영을 힐끔 본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통화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책에 집중하는데 얼마 있지 않아 통화가 끝났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통화를 끝내는 순영의 모습에 남자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서두르느냐.”

순영이 전화를 끊고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검은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틀어 묶은 남자가 툭 하고 무심하게 물었다.

남자의 질문에 이제 막 통화를 끝내고, 바쁘게 움직이던 순영이 행동을 멈췄다. 이내 손에 꽉 쥐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방해됐다면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곧 손자가 태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같이 가시지요.”

순영의 입에서 최근 들어 심심하면 나오는 ‘손자’라는 단어가 또 나왔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말한 단어를 또 꺼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남자가 초조한 낯의 순영을 보며 짧게 웃었다.

“그렇구나.”

남자가 보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 덮었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소파에 등을 편하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태양 빛에 그을린 듯하면서 핏기 하나 없는 남자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 끝을 느리게 두드렸다. 그 반복적인 두드림이 고요함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다.

생각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가방을 챙기던 순영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남자의 손이 멈췄다. 굳게 감겨 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그리 급하게 움직일 필요 없다. 인시에 태어나니 아직 여유 있다.”

남자가 제가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면서 덤덤하게 읊조렸다.

무심함이 느껴지는 남자를 보던 순영이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남자가 말한 인시(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시계를 가만 보던 눈을 돌렸다. 제 다급함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여상하게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더없이 덤덤한 모습에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신(神)께서는 제 손자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순영이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러면서 책 속 활자에 빠진 남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책을 보던 남자가 순영의 물음에 침음하며 반듯한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그러고는 보고 있던 페이지를 느리게 넘겼다.

팔랑. 종이가 넘겨지면서 만들어지는 특유의 소리와 함께 기울어졌던 남자의 고개가 바로 됐다.

“순영 네 손자 말이냐?”

질문이 퍽 재미있고, 같잖다는 듯 남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웃음이 담겼다.

재미있다는 목소리에 책을 읽던 순영이 따라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낡은 책 위를 손으로 짚었다. 그녀의 돋보기안경 위로 흰색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가 비쳤다.

“일전에 제가 궁금하다 하지 않았는데도 손자에 관해 먼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 손자를 궁금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남자가 순영에게 그러했듯 순영 또한 남자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어쩐지 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어서 빨리 사실을 고하라는 뜻이 조금 스며 있는 것 같다.

덤덤하면서 어딘가 묵직한 순영의 말에 인간사에 관한 책을 보던 남자가 피식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뒤 팔걸이에 팔을 대고는 그 위로 얼굴을 괴었다.

남자가 순영의 말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손에 든 책을 보고, 페이지를 넘기기만 했다.

그렇게 제 할 일만 하는 남자의 모습에 순영이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듯 향 좋은 보이차를 한 입 마셨다.

반가운 객이 중국에서 알아주는 귀한 것이라고, 사는 데 정말 힘들었다고 자랑하며 준 차다.

객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보이차의 맛이 제법 좋다.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에 순영의 얼굴 위로 연꽃 같은 단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네 말대로 궁금했던 것도 같다.”

조용히 책을 읽던 남자가 갑자기 호기심을 인정했다. 그도 모자라 책을 보던 시선을 돌려 눈을 동그랗게 뜬 순영을 보았다.

순영이 놀라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을 반달처럼 접었다. 그거 보라는 듯 웃었다.

“차 한 잔 마시겠습니까?”

승자의 웃음을 짓고서 선심 쓰듯 묻자 남자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영이 새 찻잔을 가져왔다. 찻잔을 적당히 데운 뒤 보이차를 적당히 채워 건넸다.

“분명 사람일 터인데. 미래가 보이지 않아.”

남자가 잔을 받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신’이라고 불린 남자는 과거와 미래를 보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막 어미의 배 속에 자리한 아기님부터 죽을 날을 받은 노인까지. 지금껏 보지 못한 미래가 없었다.

그런데 순영의 손자인 아기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운명을 가진 산모의 배 속에 있어 그런 것 아닙니까?”

팔자가 기구하다 못해 운명이 복잡하게 꼬인 여자에게 귀한 아기님이 찾아오셨다.

우리 아기님이 앞으로 얼마나 살고, 어떻게 지내실까. 슬쩍 미래를 보려는데 산모의 기운이 강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기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꼭 죽은 사람처럼 까맣게 보였다.

남자에게 차를 준 뒤 차를 마시던 순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복잡한 제 운명만큼이나 꼬인 운명을 가진 딸에 관해 넌지시 꺼냈다. 남자가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남자가 순영의 말에 단호하게 부정하며 차를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마음에 드는지 얼핏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남자가 찻잔을 테이블 위로 소리 없이 두고 앉은 자세를 바꿨다. 늘어지게 앉았던 자세에서 반듯한 자세로 바뀌었다.

“순영아.”

“예.”

“네 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을 테지.”

“……예.”

자세를 바꾼 남자가 제 말에 얼굴 위로 침울함과 슬픔이 훅 내려앉은 순영을 보았다.

“그럼 산모가 죽는다고 해서 태아의 미래가 보이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겠지.”

순영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래서, 궁금했었다.”

“……그러셨군요.”

아무리 보아도 도통 보이지 않는 아기님의 미래가 떠오른 듯 남자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몇 년 아니, 몇백 년 동안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고, 화가 났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남자가 팔걸이 끝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혼잣말했다. 지켜보던 순영이 생각해 보니, 하고 말하며 자세를 바꿨다.

“신께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없었기 때문…….”

순영의 말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다 별안간 말끝을 흐리고, 눈가를 찌푸렸다. 곧장 두 눈을 감았다.

남자가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가 싶어 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불안감에 다급하게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이 없다.

조급함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남자가 손을 들어 막았다.

심각해진 남자의 모습에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눈을 감고 집중하는 남자를 보던 순영은 혹 제 손자에게 문제가 생겼나 싶어 덜컥 겁났다.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숨 막히는 고요함이 계속 이어졌다.

순영이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곧 계속 들려 있던 남자의 손이 그의 반듯한 눈가 위를 짚었다. 핏기 하나 없는 손끝이 이마를 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순영이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아까부터 계속 떨고 있는 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순영, 네 딸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남자가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뜨며 한탄하듯 읊조렸다.

뜻이 모호한 남자의 말에 순영이 한 박자 늦게 “네?” 하고 되묻는데 남자가 한껏 억눌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의 다리에 놓여 있던 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순영이 화들짝 놀랐다.

떨어진 책을 멀거니 보다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를 따라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앞장서라.”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시에 태어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자의 입에서 나온 앞장서라는 말에 순영이 놀라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면서 홀린 듯이 앞서 챙겨 두었던 가방을 잡았다.

“복잡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그리 말해 주었거늘…….”

순영의 물음에 남자가 답을 하듯이 작게 혼잣말하며 제 몸을 천천히 지웠다. 점점 사라지는 남자를 지켜보던 순영이 숨을 삼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방에 있던 남자가 안개 같은 흐린 잔상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남자가 남긴 뜻 모를 읊조림만이 방에 홀연히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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