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logue. (7/7)
  • Epilogue.

    욕실에서 이현의 고양이 나비를 씻기고 나오던 보영은 멈칫했다. 이현이 보고 있는 TV 화면 때문이었다.

    TV 속에는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에 대한 취재 보고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방송되고 있었다.

    ― 부와 명예, 권력까지 모두 가진 태석준 부회장이 대체 왜 그런 연쇄 살인을 저지른 걸까? 놀라운 것은 태석준의 손에 죽은 것은 폐건물에서 나온 일곱 구의 시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핏줄조차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저건…….’

    보영은 다큐멘터리 성우의 말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이현의 뒤통수를 보았다.

    이현은 소파 테이블과 소파 사이 바닥에 늘어지듯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보영은 3주 전 일을 떠올렸다.

    〈사장님, 이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 같아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 건물이 이렇게 방치된 게 벌써 10년도 더 넘은 일이고, 계속 이런 용도로 사용되었었다면…… 누군가는 여기서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가끔, 아니. 자주 정 비서는 참 신기해. 꼭 진짜 본 것처럼 말을 하잖아.〉

    〈그게…… 감이 좋다는 소리는 종종 들어요. 믿기지 않으시다면…….〉

    〈아니. 아무래도 좋아. 그 좋다는 감이 틀린 적은…… 없었던 것 같네. 특히 나비가 사라지면 귀신같이 찾아내잖아.〉

    그는 당시 그녀가 어떻게 그곳에 시체가 묻혀 있는지 알아챘느냐고 묻지 않았다.

    과정이 어쨌건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만 하곤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처리하겠다는 게 알고 보니 저런 거였지.’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척이나 명료했다.

    익명의 제보자(아마도 이현)로부터 ‘몇 년 전 폐건물에 뭔가를 묻는 사람을 봤는데, 그게 태석준 같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은 대대적인 수색을 펼쳤다.

    그 결과 저 시신들을 찾을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망한 피해자들은 모두 석준이 하려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마찰이 있었던 이들이었다.

    회사의 간부급 인사도 있었고 한때 석준을 모셨던 운전기사도 있었으며 본사에 항의하러 왔던 하청 회사의 직원도 있었다.

    ― 우리 취재 팀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당시 태양 그룹에서 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태훈 회장의 장남 태석훈 씨가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 태훈 회장은 이 사고로 장남 태석훈 씨, 사위였던 김 씨 그리고 손자까지 잃었다.

    이현의 작은아버지이자 모든 사건의 발단인 태석준이 구속되고 정확히 3주가 지났다.

    이현은 장부에 기록된 일을 기반으로 10년간 조사하고 모아 온 자료를 증거로 제출했다.

    태석준의 지시를 받아 경찰로서 하면 안 될 일을 했었던 보영의 아빠가 남긴 유산이 바로 그 장부였다.

    그는 석준이 지시한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하며 받았던 금액과 일의 내용 등을 모두 기록했다.

    예를 들어 석준이 가해자인 상해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무마하는 건 기본이었고, 태양제약이 신약을 개발했던 시기에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이 죽자 유가족이 소송을 걸려고 하는 걸 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글만으로는 태석준의 악행을 증명할 수 없었으므로 이현은 장부 속에 적힌 악행의 증거를 찾아 모으는 데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모했다.

    이현의 철저한 준비 덕에 관련된 이들이 증인으로 소환되며 태석준의 무기 징역이 바로 오늘 선고되었다.

    ‘괜찮으신가……?’

    보영은 나비를 품에 보듬어 안고 이현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 그 사고로 사망한 태훈 회장의 손자는 태석준의 아홉 살 난 아들이었다. 태석준이 구속된 후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그날의 사고는 브레이크 고장이었는데, 태석준의 살인 청부 교사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사를 맡았던 장 모 형사가 뇌물을 받고 증거를 은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모 형사라면 아빠를 말하는 거겠지……?’

    보영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2주 전부터 TV와 인터넷 등 모든 매체는 태석준에 대한 뉴스로 도배가 되었다.

    ― 태석준과 면담을 했던 프로파일러 이 교수는 태석준의 상태에 대해 전형적인 소시오패스라고 했다. 태석준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했던 태석훈이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후계 서열에서 밀린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면서 말이다.

    「또야. 저놈의 뉴스만 들으면 오빠는 기분이 저기압이 돼. 놀아 주지도 않고. 캬악!」

    보영은 시선을 내려 나비를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나비가 갸르릉 소리를 흘렸다.

    「장 실장이 그렇게 지압하라고 하는데도 말도 안 듣고!」

    “……지압?”

    날카롭고 매서운 얼굴로 TV를 쏘아보는 이현에게 들리지 않도록 보영이 소리를 작게 죽여 물었다.

    「응. 삼 무슨 혈이라고 했는데? 여기, 여기.」

    보영이 팔에 살짝 힘을 풀자 나비가 꼼지락거리며 저를 감싼 수건을 헤치고 자신의 뒷발을 까닥거렸다.

    그 모습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만큼 귀여워 보영은 가까스로 웃음을 사리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보영이 재차 소리를 죽여 물었다. 나비가 다시금 뒷발을 까닥이며 눈을 흘겼다.

    「여기라고! 여기!」

    아마 나비가 이렇게 깜찍하게 바르작거리는 모습만 봐도 이현의 사나운 기분이 조금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영은 나비를 바닥에 내려 주곤 곧장 휴대폰을 검색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혈 자리?’

    정말 그런 혈 자리가 있을까 싶었지만 의심이 무색하게 결과가 검색되었다.

    ― 자신이 당연히 가져야 할 자리를 갖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했을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던 태석준의 면담 중 태도는 현신한 악마와 다르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그렇다면 그 약간의 노력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피해자들은 대체 어떤 노력을 해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TV를 힐끔 보았던 보영은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사뼈 위로 세 치……? 가만, 세 치면 9센티 정도인가?’

    보영은 손가락으로 세 치의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거기 서서 뭐 해?”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보영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TV를 끈 이현이 소파에 팔을 걸치고 그녀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 나비, 다 씻겼어요.”

    “몇 번을 생각해도 신기해. 내가 씻기려 들면 난리인데 정 비서가 씻기면 순순한 게.”

    이현이 희한하다는 얼굴로 그녀와 나비를 빤히 보았다.

    ‘그야 저는 말이 통하니까요.’

    보영은 쓴웃음을 삼켰다. 나비도 평소에는 그렇게 오빠, 오빠 하며 이현을 찾았지만 정작 자신의 편의를 추구해야 할 때는 그녀를 찾았다.

    “털은 대충 말렸어요. 빗질만 해 주면 돼요.”

    보영은 이현과 약간 거리를 벌리고 앉아 수건에 감싸인 나비를 내려놓았다.

    “내가 해 볼까?”

    “네?”

    “씻길 때마다 매번 부탁하는 것도 미안하고.”

    보영은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이현을 보다 이내 빗을 넘겼다. 그러자 그가 나비를 제 앞으로 당겨 빗을 든 손을 올렸다.

    “아! 살살…… 해 주셔야 해요.”

    그녀를 힐끔 본 이현이 이른 대로 손을 천천히, 섬세하게 움직였다.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 조금 시원해. 몇 번 해 보다 보면 낫겠지.」

    훌쩍 큰 나비가 마치 품평하듯 소리를 냈다. 보영은 웃음을 삼켰다.

    “왜?”

    “나비도 사장님 빗질이 꽤 마음에 드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나비 얼굴이 기분이 좋아 보여서요.”

    한동안 이현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빗질을 당한 나비는 그의 빗질이 끝도 없이 계속되자 보영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짜증을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으,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를! 정 비서가 좀 가르쳐!」

    “어어?”

    영문을 알 리 없는 이현이 나비를 따라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보영이 그런 이현을 만류했다.

    “사장님, 그 정도면 됐어요. 너무 오래 해도…….”

    “아, 그런가?”

    보영은 자신의 앞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나비의 수건을 차곡차곡 개었다.

    “미안해.”

    “네?”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슬슬 집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보영이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현이 손 위에 턱을 괴곤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매양 보고 있어도 적응되지 않는 그림 같은 얼굴에 가슴이 괜스레 두근거렸다.

    “자꾸 아버지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려서.”

    “그건…….”

    보영은 검게 꺼진 TV 화면을 힐끔 보았다.

    “그건…… 사실이긴 하니까요. 아빠도 이 정도는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는 사장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뭐가?”

    “긴 시간 준비한 복수를 하신 분 치고는…… 후련해 보이진 않으셔서요.”

    보영은 슬쩍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검색했던 혈 자리가 떠오른 탓이다.

    “괜찮으시면 제가 지압 좀 해 드릴까요? 기분이 좋아진대요.”

    “갑자기?”

    “잘할 자신은 없지만요.”

    “혈 자리…… 라. 큭, 형도 그런 소릴 하던데.”

    낮게 웃은 이현은 이내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보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팔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바지 좀 걷을게요.”

    이현이 대답할 새도 없이 보영은 그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곤 신중하게 복사뼈부터 위로 9센티미터를 가늠했다.

    “여기를 지압해 주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보영은 엄지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이내 후회했다.

    ‘너무 거침없이 굴었나 봐.’막상 손을 대고 보니 그녀와 달리 굵고 혈관이 도드라진 정강이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겠다.

    이현과 사귀자고는 했지만 이따금씩 나누는 짧은 키스 외에는 아직 어떤 진도도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 다리를 이렇게 서슴없이 만진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맹세코 남자 다리는 처음 만져 봤다. 그리고 제대로 지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그가 보고 있을 정수리가 따갑게 느껴져 보영은 눈을 굴리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시, 시원하세요?”

    “아니. 간지러운데.”

    “아, 그…… 러세요?”

    보영은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세게 주었다.

    “지금은요?”

    “별로.”

    “아…… 그럼…… 이건요?”

    보영은 결국 두 손을 다 썼다.

    한 손으로는 종아리를, 다른 손으로는 정강이 위를 덮고 “끄응.” 하고 힘을 주는 소리가 날 정도로 꾹꾹 눌렀다. 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압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엄청 별로인데.”

    보영의 손끝에 힘이 탁 풀렸다. 손이 얼얼했다.

    ‘이래서는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됐네. 있는 힘을 다했는데…… 정말 제대로 배워 봐?’

    보영이 낙심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이현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보영은 그제야 이 두 얼굴을 가진 남자로부터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난치신 거예요?”

    “아귀힘이 세네. 정 비서. 소도 때려잡겠어.”

    그녀에게 뻗었던 다리를 당겨 온 이현이 위로 올라간 바짓단을 내리고 그녀가 내리눌렀던 자리를 문질렀다.

    보영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벌써 3주다. 번번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아는데도 매번 당해 버렸다.

    ‘앓느니 죽지.’

    그녀가 청소를 한 걸 뻔히 알면서도 사무실에 먼지가 많다며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해서 당황시키는가 하면, 그녀와의 약속을 잊은 것처럼 굴다가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고, 재일이 보란 듯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 안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딱히 기분이 저조하진 않으신가 봐요.”

    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요즘 뉴스만 보면 기분이 저기압이시라고 해서 해 본 거였는데요.”

    “누가?”

    “네?”

    보영은 현관을 향해 나가려다 우뚝 섰다. 돌아보니 이현이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곤 다시 물었다.

    “내가 뉴스만 보면 저기압이 된다고 누가 그러냐고.”

    “그…… 게.”

    보영은 눈을 굴렸다. 뭐라고 해야 가장 적당한 답이 될지 격렬하게 생각했다.

    “아까…… TV 보시는 얼굴이 심각해서요.”

    “……아아.”

    잠시간 보영을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거야?”

    “네.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요.”

    보영이 현관으로 향하자 이현도 그녀를 따라왔다.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바로 아래층인데요.”

    “내 마음인데.”

    이현이 그녀의 손을 자연스레 잡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런 건 또 철두철미해.’

    바로 아래층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사적인 만남 후에 그녀를 홀로 보낸 적이 없었다.

    보영은 그가 단단히 쥔 자신의 손, 그리고 넓은 등을 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연인으로서의 이현은 그를 처음 알게 됐을 때만큼 달콤하거나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지만 충분히 그녀를 소중히 대해 주었다.

    그녀를 놀려 먹는 게 재미있다며 간혹 심술궂게 굴긴 해도 밉지 않았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내가 이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그도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현이라는 남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아는 한다지만 과연 얼마나?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만큼은 좋아할까?’

    보영은 힐끔 이현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속을 알 수가 있나. 워낙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 가늠할 수가 있어야지.’

    현관문 앞에 다다르자 보영이 슬그머니 그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여지없이 이현이 가볍게 집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내일 봬요.”

    “응. 잘 자.”

    보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복도로부터 멀어지는 이현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하면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건전해도 이건 너무 심하게 건전하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보영은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짙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의 모든 것이 좋아졌다. 그의 미소, 목소리, 눈빛, 체취…… 심지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때의 모습까지도 말이다.

    ‘고양이처럼 시원하게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아.’

    고양이와도 이렇게 소통이 잘 되는데 정작 사람인 이현과는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사장과 비서…… 라는 벽 때문이려나?”

    보영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처럼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별게 다 궁금했다.

    “짝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보영이 입을 비죽이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연스럽게 퇴근 후 일상을 함께 보내지만 그뿐이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자신만 그런 것 같아 못내 서운하고 속이 상했다.

    * * *

    “한 말씀만 해 주시죠!”

    “고(故) 태석훈 씨의 아들이자 태석준 부회장의 조카로서 현재 심정이 어떠십니까?”

    “태이현 사장님! 이쪽 좀 봐 주시죠!”

    보영은 이를 악물고 이현의 곁을 지키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이현의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냄새를 맡은 취재진들이 매번 진을 쳐서 난리였다.

    재일이 엄선한 경호 팀이 사력을 다해 취재진들을 막았지만, 그 몸싸움의 여파가 보영에게까지 올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태훈 회장님 역시 사건이 터진 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신데요, 현재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부친 역시 태석준의 피해자였는데요!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태이현 사장님!”

    “윽!”

    보영이 침음을 삼켰다. 경호 팀을 뚫고 나온 거대한 대포 카메라가 이현을 찍으려다 그녀의 머리를 거세게 쳤기 때문이다.

    보영은 순간적으로 썼던 인상을 지우곤 이현을 보좌해 ‘하랑 이노베이션’의 창립 18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문화 홀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역시나 주위가 조용해지기 무섭게 재일이 이현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보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경호 팀들이 질린 얼굴로 낮게 한숨을 쉬며 대열을 정비했다.

    “괜찮아요.”

    “바로 쉬실 수 있게 휴게 공간으로 모시겠습니다.”

    재일이 앞장서자 이현이 움직였고, 그리고 그 뒤를 보영이 따랐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만 열렬한 취재 열기는 당하는 입장에선 가슴이 선득할 정도로 무섭게 다가왔다.

    보영은 이현의 뒤를 따르며 흐트러진 옷매무시와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언제까지 이럴까.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이 열기를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하랑 이노베이션’의 18주년 창립 기념행사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한 아트 센터의 문화 홀을 통째로 빌려 진행되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규모를 최대한 줄여 진행하였으나 이렇게 소란해서야 의미가 없었다.

    “회장님 쪽에서도 태인희 대표님에게 행사를 취소하라고 여러 번 압력을 넣었다고 했다던데 기껏 고집해 진행한 현장이 이렇게 엉망이어서야.”

    이현은 재일의 불만 어린 말을 뒤로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하랑 측에서 내준 공간은 공연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VIP들을 위한 전용 라운지였다.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문화 홀 안뜰은 잔디가 푸르렀고 햇빛이 따사로워 고즈넉함마저 주었다.

    “쉬고 계십시오. 저는 잠시 일정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확인만 하고 와, 형. 괜히 입구에 있는 기자들 차단을 했네 안 했네 까칠하게 굴지 말고.”

    “……그럴 생각은.”

    “있었잖아.”

    이현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재일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현이 웃음을 삼키며 덧붙였다.

    “구태여 기자들을 그냥 내버려 둔 고모 생각을 알 것 같아서 그래.”

    “태 대표님 생각?”

    “고모는 태 씨 집안에서 그나마 나하고 가장 비슷한 부류거든.”

    이현이 창가에 걸터앉으며 하는 말에 재일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괜히 시끄럽게 하지 말자고, 형. 아니, 장 실장님. 앞으로 태양 호텔은 하랑 이노베이션의 힘이 많이 필요해요. 밉보여서 좋을 거 없어요.”

    “이제 모든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사장님 아버지가 태인희 대표님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게 아니지 않습니까. 눈치를 볼 건 없…….”

    “누가 눈치를 봐. 지난 20년간 끔찍하게 미움받았던 일로 오히려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판에.”

    잠시 재일과 이현이 서로를 말없이 마주 보았다. 이현은 서글서글하게 미소 지었고 재일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냉랭한 표정이었다.

    보영으로선 그들이 주고받는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에 숨죽여 그들을 지켜보았다.

    “……알겠어.”

    이내 재일이 순순히 대답하자 이현이 다시 한번 빙긋 웃었다.

    “행사는 정시에 시작하려나?”

    이현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묻자 재일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곤 밖으로 나갔다.

    ‘장 실장님이 저런 표정일 때는 세상 무섭게 조마조마하던데, 사장님도 참 간덩이가…… 남달라.’

    보영은 속으로 생각하며 이현이 마실 음료를 준비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채 걸음을 딛기 전에 뒷걸음질 쳐야 했다. 이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엇……!”

    중심을 잃는 바람에 비틀거리는 걸 이현이 바로 세워 주었다.

    “괜찮아?”

    “아뇨, 갑자기 잡으셔서 다칠 뻔…….”

    그러나 보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현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 위쪽을 덮었기 때문이다.

    “혹은 안 났네. 멍도 안 든 것 같고.”

    부러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누른 이현이 입꼬리를 휘었다.

    “카메라에 머리 맞았잖아.”

    보영은 이현이 잡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그가 매만졌던 머리 부근으로 손을 올렸다.

    “보셨…… 어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때때로 그녀는 그가 하는 행동의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그가 이렇게 조금만 보고 있을라치면 정신이 사나워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이제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보영은 어색하게 내려앉는 공기를 환기하려 입가를 당겼다.

    처음에는 몇 번인가 이렇게 묘한 분위기가 찾아왔을 때 혹시 그가 다가오진 않을지 기대를 갖곤 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그 기대는 무너졌고 이번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보영은 확신했다.

    그는 그저 여전히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지도 몰랐다.

    ‘회장님의 결혼 독촉을 막을 방패로 말이지.’

    헷갈리게 하는 남자가 제일 나쁜 남자라던데 태이현은 확실히 나쁜 남자다.

    ‘나쁜 놈.’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별생각이 다 들었다.

    좀스럽게 이러지 말자고 생각하며 보영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마실 거라도.”

    “가만 보면 앓는 소리를 할 줄 몰라.”

    보영은 그가 잡은 팔을 힘주어 빼려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은 여전히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앓는 소리요?”

    “아프다, 힘들다, 무섭다, 외롭다, 보고 싶다. 그런 거.”

    “그야…… 사장님도 안 하시잖아요.”

    “나?”

    확실히 그와 그녀의 관계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퇴근 후에 밥을 함께 먹고, 나비를 함께 돌보고, 나란히 앉아 TV를 본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는 여전히 어딘가 멀게 느껴졌고, 보영은 그런 그의 부유감 때문에 조금 불안했다.

    “먼저 안 하시면서 바라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다지 말할 일이 없는데?”

    “그거 보세요.”

    역시 이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는 거다.

    그렇게 판단한 보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곤 그의 팔을 떨쳐 냈다. 그러자 이현이 당황스러운 듯 자신의 손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이러니까 기분이 굉장히 나쁜데?”

    “저도요.”

    보영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장님께서 진짜 연애하자고 한 이후 3주가 지났어요. 그 3주 동안 사장님의 주변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고요. 작은아버지가 살인으로 검거됐고, 태훈 회장님은 쓰러지셨어요. 회사 주가는 떨어지고 문밖에만 나가면 취재진들이 들들 볶아요. 그런데 저한테 단 한 마디도 안 하시죠.”

    “무슨 말?”

    “사장님이 어떤지요. 절대 괜찮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안 괜찮은지, 어떻게 힘든지, 잠은 잘 자는지.”

    “잠?”

    “수면 장애 있으시잖아요.”

    보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고양이와 말을 할 수 있기에 그녀는 이현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오빠는 여전히 잘 못 자. 어쩌다 한 번씩은 술도 마시고 어쩔 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해.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는데 이상해. 이상한 얼굴이야.〉

    나비가 말했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는 절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밤늦게 전화가 왔었는데 자동 응답기였거든? 어떤 여자가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태양 그룹이 자기 남편 없이 잘 돌아갈 것 같냐고, 이건 다 모함이라고, 작은아버지 살인자 만들어 가며 태양 그룹 회장이 되고 싶냐고 너 같은 건 죽어 버려야 한다고 아주……!〉

    그녀가 모르는 사이, 이현에게는 작은어머니의 저주 같은 전화가 자주 걸려 오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자동 응답기에 녹음되는 목소리는 나비도 다 듣고 있었다.

    〈어제 장 실장이 다녀갔거든? 우리 오빠가 열이 있대. 오빠는 참 대단해. 열이 39도까지 올랐다는데 하나도 티가 안 나더라니까? 정 비서는 알았지? 우리 오빠랑 짝짓기 한 암컷이니까!〉

    그가 아팠다는 사실도 몰랐다. 너무 멀쩡해 보였다. 자신이 한심했고, 그런 티 하나 내지 않는 이현에게 섭섭했다.

    “사장님이 하시면 저도 하겠습니다. 아프다, 힘들다, 무섭다, 외롭다, 보고 싶다. 그런 거.”

    말을 마친 보영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속 모를 얼굴을 하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하실 생각 없으시면 됐어요. 단지 전…… 진짜 연애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이전과는 다르다고요. 하지만 달라진 게 없네요.”

    심장 한쪽이 지끈거렸다. 자신은 여전히 그의 비서일 뿐이었고, 이현은 수수께끼처럼 굴었다.

    “사장님은 제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요. 우리는 뭐예요? 연애라는 걸 하고는 있어요? 제가 정말…… 좋기는 하세요?”

    말을 잇는 동안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내 물어보고 싶었지만 왜인지 무서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건 아주 많이 바쁜 그에겐 뜬금없고 사사로운 투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늘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었다.

    똑똑.

    그때였다.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례적으로 다소 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현의 눈이 문가로 향했다.

    보영은 돌아서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곤 입구로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태인희예요.”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보영이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그곳에는 일전에 봤던 것처럼 인희가 한 손에 검은 스틱을 짚고 서 있었다.

    ‘혼자 온 건가?’

    인희 홀로 서 있는 모습에 보영은 얼른 한 쪽으로 비켜서 주었다.

    사무적으로 입가를 끌어 올린 인희가 스틱을 짚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은 여전히 통창의 턱에 기대앉은 채였다. 인희는 그런 이현과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부터 조금 쪽팔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저 친구가 들어도 되겠니?”

    보영은 뒷걸음질 쳐 문가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 같으니 자신이 자리를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들어도 돼요. 그러니까 나가지 마, 정 비서.”

    등 뒤로 문고리를 잡았던 보영이 우뚝 섰다. 이현의 고요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하세요, 고모.”

    보영은 망설였으나 우선 그대로 있기로 했다. 이현이 있으라고 했으니까.

    “……작은오빠 일은 네 작품이지?”

    “새삼 확인하자고 오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태연한 이현의 반응에 인희는 또 잠시간 말이 없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일전에 이현의 사무실을 방문했었던 인희는 태양 그룹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20년 전의 사고를 알게 된 지금, 보영은 왜 인희가 그토록 이현에게 날 서게 굴었는지 알았다.

    20년 전 이현의 아버지가 몰았던 차에는 인희의 남편도 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죽었고, 당시 임신 중이었던 인희는 그 충격으로 아이를 잃고 자살 기도까지 했었다. 인희가 다리에 장애를 가지게 된 것도 모두 그때의 사건 때문이었다.

    재벌가에서는 ‘결혼’이 거래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인희의 결혼은 열렬한 연애결혼이었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었다. 그 처절한 슬픔을 어떻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알았니.”

    “10년쯤 됐어요.”

    “네가 미국으로…… 갔을 때?”

    “네.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지 아주 양심 있는 형사분이…… 그때 그 사고 파일과 작은아버지의 비리에 대한 자료를 넘겨줬거든요.”

    이현의 시선이 힐끔 그녀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인희를 보았다.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니. 나한테 말을 했으면.”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까.”

    이현의 대답은 단호했고 또 부드러운 표정과는 달리 냉정했다.

    “……그래. 네가 작은오빠 집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최근에 알았어. 그래. 네 입장에서는…….”

    “그 일을 갖고 고모를 원망하진 않아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은 괜찮으니까 언급할 필요조차 없죠. 곱씹어 봤자 불쾌해지기만 할 뿐이고.”

    그는 여전히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태연했고, 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보영은 그가 안쓰러웠다.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기대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나에게도…….’

    그래서 그녀를 좋아한다면서도 곁을 내주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작은오빠가 아버지를 끈기 있게 설득해 계속 야구를 하게 한 것도…… 어찌 됐든 네가 장손이기 때문이었겠네. 아버지가 너무 옛날 분이라 그룹은 무조건 장손이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으니까.”

    인희는 질린 듯 허탈하게 덧붙였다.

    “작은오빠라면 자기 자리를 언제 뺏길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이현은 대답 대신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 말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널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살 수 있었잖아요. 고모도.”

    “뭐?”

    “힘들게 임신했던 아이를 잃고, 고모부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었었다는 건 나도 알아요.”

    이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밉고, 아버지의 실수를 덮겠다고 장례를 무빈소로 조용히 처리한 할아버지도 밉고, 당시 그 모든 걸 묵과한 태석준도 밉고…… 미칠 듯이 미워서 살 수 있었잖아요. 하랑 이노베이션도 태양에 기대지 않고 이만큼이나 키워 냈고요.”

    인희의 뒷모습이 엷게 흔들렸다.

    “미워하는 힘으로도 사람이 독하게 살 수가 있더라고.”

    “이현아.”

    “사실 이런 생각도 했죠.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면 고모는 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 아, 고소하다.”

    이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인희를 보았다. 스틱을 짚은 인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넌 정말 큰오빠랑 안 닮았어.”

    “엄마하고는 닮았어요?”

    “아니. 어떻게 그 둘 사이에 이런 놈이 태어났지 싶은데.”

    “너무하네. 내가 뭐가 어때서요.”

    인희가 스틱을 짚어 이현 쪽으로 다가가며 몸을 옆으로 살짝 틀었다.

    그녀를 본 보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인희의 얼굴에 울 것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큰오빠는 사업을 할 만한 재목은 아니었어도…… 이렇게 뒤로 딴짓하는 과는 아니었거든. 오히려 자신의 유약함을 어떻게든 가리려다가 제풀에 무너질 만큼 약했지. 네 엄마도 그랬고.”

    “태양의 왕관은 아버지한테 너무 무거웠죠. 매 순간 자기 목을 조르는 족쇄 같았을 거예요.”

    “……그동안 미안했다.”

    “그게 다예요?”

    인희의 꺼질 것처럼 후회 짙은 사과에 이현이 가볍게 대꾸했다. 인희가 설핏 웃었다.

    “이제 그럼 그거 안 해요? 태양 따위 망해 버려. 고모 레퍼토리 있잖아요.”

    “……너 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 아버지는 예전 같지 않아. 작은오빠가 구속된 마당에 너밖에 더 있니.”

    “아아. 싫은데. 그냥 고모 가져요.”

    “미친 소리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하네. 왜 이렇게 변했니? 10년 전엔 그래도 순진한 맛이라도 있었는데.”

    인희가 돌아섰다. 내내 서글서글하게 미소 짓던 이현의 표정도 동시에 사그라졌다.

    “이 친구는…… 그래서 뭐니? 작은오빠 쪽 사람 아니었니?”

    역시 태인희다. 보영은 인희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긴장했다.

    “맞아요. 작은아버지 수행 비서가 S라는 이름으로 고용했죠. 하지만 말했잖아요. 나하고 사귄다고.”

    “그게 진짜라고? 이제 다 아는데도 사귀어?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믿어요. 좋은 사람이니까.”

    “…….”

    인희는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문가로 다가왔다. 보영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뒤쪽의 이현에게 말을 남긴 인희가 나갔다. 보영은 소리 없이 문을 닫은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확히 어디라고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인희는 묘하게 이현과 닮은 사람이었다.

    보영은 곧장 몸을 돌려 공간 한쪽에 마련된 음료 바에서 커피 머신 전원을 켰다.

    ‘태인희 대표님과의 관계는 이제 괜찮은 건가? 앞으로 좋아지는 건가? 대화가 나쁘게 끝난 것 같지는 않으니까…….’

    보영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곱씹으며 캡슐 커피를 머그잔에 내려 이현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커피 잔을 받아 든 이현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옆에 내려놓았다.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지.”

    “네?”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 싶어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만큼 인희의 등장은 파급력이 컸다.

    “정보영.”

    그는 어지간해서는 그녀를 ‘정 비서’라고 불렀다. 게다가 지금은 업무 시간이었다.

    사무실이 아니기는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보영이 움찔했다.

    “이리 와.”

    “네?”

    “이리 와 보라고.”

    그가 제 앞에 서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보영은 아연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막상 다가서기가 무섭게 이현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감아 안았다.

    “사장님……!”

    보영은 당황해 얼른 떨어지려 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몰랐다.

    하지만 이현은 통창 앞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부드럽지만 힘 있게 그녀를 안고는 어깨에 기대듯 얼굴을 묻었다.

    그답지 않은 어리광 어린 몸짓에 보영은 정말로 당황해 굳었다.

    “네 시간 잤어. 그것도 띄엄띄엄.”

    “……네?”

    “모든 일이 다 끝나면 잠을 잘 잘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보영은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설마…… 아까 내가 속마음을 말해 달라고 해서……?’

    턱 아래에 닿는 단정하게 세팅한 이현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여전히 멍해. 자고 싶은데 자려면 힘들어.”

    “……그래도 술에 의지하지는 마세요.”

    그녀가 중얼거리자 이현이 웃는지 어깨에 기댄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아. 태석준 뉴스를 볼 때마다 매 순간. 하지만 그러다가도 너하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아. 널 보는 게 즐거워. 그래서 난 괜찮아.”

    이현이 조금 더 가까이 그녀를 당겨 안았다.

    “외롭진 않았어. 재일이 형이 있으니까. 그 형 극성은 너도 알잖아.”

    “……알죠.”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 본 적이 없어. 기댈 줄 몰라. 다 잘해도 이건 서툴러.”

    “그런가요.”

    서툴게 기대 와서 하는 말에 가슴 언저리가 찌르르 울렸다. 보영은 울 것처럼 웃었다.

    “좀 지치는 날은 네가 생각나. 그래서 늦은 시간이어도 나비 핑계 대고 부르잖아.”

    “핑계였어요?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냥 보고 싶다고…… 하면 되는데요.”

    “쉽네. 단순하고.”

    “……뭘 해도 계략적인 게 몸에 배어 있으시네요.”

    그 말에 또다시 웃는 그의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보영은 내려뜨렸던 손을 천천히 올렸다. 그리고 그의 넓은 등을 가볍게 덮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마주 안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손에 닿은 등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뜨거웠다. 그리고 그의 품은 생각 이상으로 설레고 뭉클해서 행복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 전에 열이…… 있으셨잖아요. 그땐 왜 말 안 했어요.”

    “서운했어? 아픈 건 모양 빠지잖아.”

    “모양 안 빠져요. 서운했어요. 제가 아플 때 이야기 안 하면 사장님은 어떨 것 같은데요.”

    “……싫은데.”

    “말해 줬으면 좋겠죠?”

    “어.”

    “역지사지예요. 늘 가슴에 새겨 두세요.”

    “지금 나 가르쳐?”

    “네.”

    보영은 조심히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려 보았다. 그의 몸이 움칫했다. 그게 귀엽게 느껴졌다.

    말도 안 됐다. 이현은 그녀의 상사였고 무시 못 할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귀엽다. 사랑스러웠고 불쑥 너무 가깝게 느껴져 마음이 들떴다. 이렇게 한순간에.

    “여전히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헷갈려?”

    “아뇨.”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웠다. 마음이 넘쳐흘렀다.

    보영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스스로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제 입술을 가렸다.

    이현이 방금 뭐 했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퍼뜩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미쳤어, 정보영. 지금 근무 시간이야! 제정신이야! 지금 뭘 한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최대한 차분해지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그녀의 몸을 두른 팔을 풀지 않은 탓에 물러설 수조차 없었다.

    “뭐야?”

    “……뭐가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하자고 하고 싶었다.

    그녀는 업무 시간에 상사이자 애인이기도 한 남자에게 기분에 휩쓸려 뽀뽀하거나 하는 그런 비서가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아아.”

    이현이 뭔가를 납득했다는 듯 고양이처럼 얄궂게 웃는다.

    “일부러 제동을 걸어 두고 있었던 건데 그게 아쉬웠나 봐. 정보영은.”

    “네?”

    이현이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휘고는 그녀를 더 가까이 당겼다.

    “사장……! 읍!”

    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뒤통수를 감아 잡은 이현이 입술을 붙여 왔다. 하지만 늘 가볍게 닿거나 살짝 머금다가 떨어지는 입술은 조금 더 격정적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힘에 입을 살짝 벌리자 그 사이로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무릎에 힘이 풀려 휘청하는 걸 이현이 단단히 잡아 주었다.

    입술을 핥고 그녀의 입 안까지 눈 깜짝할 사이 쓸고 나간 이현이 입술을 살짝 떼곤 말했다.

    “사랑하니까 아껴 주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니까 완전히 내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애써 정도를 지키고 있었더니 마음에 안 들었어?”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이현에게 이런 얼굴이 있는 줄 몰랐다.

    낮게 내리뜬 눈과 다소 거만하게 올라간 입꼬리, 입맛을 다시듯 제 입술을 핥는 붉은 혀까지.

    그녀를 향해 욕심을 드러낸 남자의 민낯은 오싹할 정도로 섹시했다.

    “그럼 이제 슬슬 나가 보자, 진도.”

    “네?”

    “나는 보기보다 그렇게 섬세한 동물은 못 돼서, 네가 우리 사이의 정의를 보다 확실하게 하고 싶다면…… 몸으로 말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왠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기분이다.

    “마…… 말로도…… 말로도 방법은 있지 않을까요?”

    “아니. 나도 서툴지만 말했잖아. 내가 어떤지. 그러니 너도 서툴러도 나한테 맞춰 줘. 내 언어에.”

    언어라는 건 소리로 표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현의 언어는 단어로 구체화될 수가 없었다.

    보영은 다시 한번 입술을 틀어막혔다. 평소 가벼운 스킨십을 할 때와는 달리 그의 손이 다소 야릇하게 그녀의 등허리와 엉덩이 윗부분을 틀어쥐었다.

    입 속을 휘젓는 물컹거리는 감각에 머릿속이 다 닳은 것처럼 몽롱해졌다. 따라가기만도 벅찼다.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저 뜨겁고 달떴다. 발밑이 붕 뜨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할 거야? 슬슬 시작인데.”

    뒤통수에 꽂히는 재일의 목소리에 보영은 깜짝 놀라 눈을 퍼뜩 떴다.

    정신을 차리자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의 허벅지에 옆으로 걸터앉아 있었고, 얌전하게 슬랙스 안에 들어가 있던 셔츠도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드러난 허리에 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고, 그녀의 손은 이현의 목을 속박하듯 감싸고 있었다.

    “으…… 엇!”

    보영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으로부터 떨어졌다. 이현은 웃으며 혀로 제 입술을 한 번 핥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영은 정말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흘깃 보니 다행히 재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아아. 살 것 같네.”

    보영은 서둘러 셔츠를 다시 슬랙스 안으로 넣었다. 다가온 이현이 그녀의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곤 악마처럼 소슬하게 미소 지었다.

    “내 침 묻었네.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

    “네?”

    “하긴. 10분 넘게 했으니.”

    “네?”

    보영은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와 키스를 한 게 10분 이상이라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까지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각오해 둬. 정 비서.”

    “네?”

    “고삐가 풀려 버려서 말이야.”

    이현은 그렇게 말하곤 VIP 라운지 문을 열었다. 돌아서 있던 재일이 인상을 쓰며 그를 의전했다.

    보영도 서둘러 그들을 따라 나갔다. 아직도 가슴은 터질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미쳤어, 미쳤어. 이게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보영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식히며 이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뜨거웠던 감각이 다시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슬그머니 기대가 피어오른다.

    ‘엉큼해. 정보영. 난 그냥 욕구 불만이던 건가?’

    보영은 실소를 흘렸다. 태이현에게만큼은 이렇게도 쉽다는 게 어쩐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 * *

    “창립 기념회에 와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씀에 앞서, 제게 궁금한 게 많으시겠죠? 그래서 보란 듯이 기자분들을 막지 않았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단상 위에 오른 인희는 이런 자리가 익숙한 모양인지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보영은 이현, 재일과 함께 그들을 위해 마련된 원형 테이블에 앉아 인희가 인사를 하고 있는 단상 위를 보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기자분들이 그렇게 궁금해하신 제 입장을 말씀드릴 테니, 앞으로 취재로 인한 소란은 피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보영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현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의 모습이 홀 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사실 제 입장이랄 것도 없지만 간단히 솔직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어지는 인희의 말에 문득 재일이 차갑게 웃었다.

    “나도 이제 짐작이 가네. 태 대표님, 너하고 같은 부류 맞아. 계획적이야.”

    재일의 말에 이현이 눈썹을 까닥이곤 보라는 듯 단상 위로 시선을 향했다.

    “저는 20년 전의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과 복중의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고가 태석준…… 부회장의 사주라는 게 드러났죠. 그런데 제가 할 말이 뭐겠어요. 태석준, 죽을 때까지 교도소에서 나오지 말라고 법조계에 제 전 재산을 갖다 드려도 모자라겠죠.”

    인희의 말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말씀드리면 제가 설립한 회사 하랑 이노베이션은 태양 물산이 전신이기는 하지만, 이름을 갈아엎은 만큼 다 무너져 가는 걸 제가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지금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니 하랑의 앞에 태양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기사는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영은 속으로 다소 질겁했다. 인희의 발언은 태양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은 사업가로서는 쉽게 하기 힘든 파격적인 직언이었기 때문이다.

    “태양의 태훈 회장님이 제 아버지이고 호텔을 맡고 있는 태이현 사장이 조카이며 소시오패스 연쇄 살인마 태석준이 제 작은오빠이기는 합니다만, 그런 가십으로 하랑의 18년 창립 기념행사를 망치고 싶지는 않네요. 그러니까 이쯤 하실까요. 기자님들.”

    인희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말을 맺으며 가볍게 띠운 미소에는 감히 말 붙이기 힘들 압력이 배어 있었다.

    “역시…… 회장감은 고모인데.”

    이현의 중얼거림에 보영이 힐끔 이현을 보았다.

    “사장님.”

    이현이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하세요?”

    “……고모하고는 절대 척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더는 미움받진 않겠구나…… 그런 생각.”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보영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조금 후련해 보였다. 그녀가 볼 때 굳이 호불호를 가른다면 이현은 인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기존 일정 취소해 가며 이 행사를 우선시하신 건 매듭을 짓고 싶어서 그러셨던 거죠?”

    “가끔 보면 정 비서는 참 신기해.”

    “네?”

    “내 곁에 스파이라도 심어 두고 있는 것 같아. 잠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아, 설마……?”

    이현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재일에게로 향했다. 보영은 웃음을 삼켰다.

    재일이 그녀의 스파이가 되어 줄 리 만무했다. ‘나비’라는 복병이 있는 줄 이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그녀도 그녀의 작은 비밀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그도 알 날이 오지 않을까.

    애꿎은 재일만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영문을 몰라 했다.

    * * *

    “아으, 덥다 더워!”

    보영의 앞에 ‘로또 택배’라고 쓰인 택배사 조끼를 입은 동일이 털썩 앉으며 그녀에게 뭔가를 던지듯 내밀었다.

    “이거야?”

    “그래. 대체 그놈이 뭐가 좋아 네가 이러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어쩌냐. 딸 같은 조카가 좀 찾아 달라는데.”

    동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연신 투덜거렸다. 보영은 동일이 내민 종이를 살펴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태도가 사장님 앞에서도 일관되면 믿을 만한데 말이야.”

    그녀의 가시 돋친 말에 동일의 표정이 조금 삐죽해졌다.

    이렇게 이현이 없을 땐 조카를 사랑하는 끔찍한 삼촌처럼 굴지만, 정작 이현이 앞에 있을 땐 사장님, 사장님 하며 기분을 맞추기 바쁜 동일이다.

    혹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그러는가 싶었지만, 물어봐도 자기를 그렇게 쓰레기로 봤냐고 펄쩍 뛸 뿐이니 그녀로선 모를 노릇이었다.

    “삼촌, 나 몰래 사고 치지 마.”

    “에? 갑자기? 내가 무슨 사고를 쳐? 성실히 사는 사람한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역시나 동일이 또 방방 뛰었다. 딱히 지난 5년간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괜스레 불안했다.

    핏줄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녀에게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동일뿐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내가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정보력은 삼촌이 좋잖아.”

    “그럼! 네가 이제야 내 가치를 알아보는구나?”

    칭찬을 못 하겠다. 금세 콧대가 으쓱해지는 동일에 보영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동일이 가져온 종이를 갈무리해 가방에 넣고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삼촌, 여기 장어 유명해. 삼촌 장어구이 좋아하잖아.”

    “장어……? 히익? 비싼데 괜찮겠어?”

    “삼촌한테 돈이 아깝겠어? 나 저녁 먹고 다시 들어가서 일해야 해. 먹자.”

    배시시 웃은 보영은 동일이 좋아하는 장어를 시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예전에 사기를 치고 다닐 때, 값비싼 브랜드 슈트를 입고 뺀질거리던 동일보다 이렇게 유니폼을 입고 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더 멋있다는 걸 본인도 알면 좋으련만.

    “많이 먹어.”

    보영은 그렇게 그녀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아 준 동일과 식사를 마친 후,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멈춘 그녀의 앞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와서 섰다. 보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데 뒷좌석 유리창이 내려가자 그녀도 아는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영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타게.”

    태훈이었다.

    * * *

    “우리가 마주 앉아 차 한 잔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으니 간단히 하지.”

    그녀가 타자, 차는 곧장 호텔 주차장으로 향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쓰러지셨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태훈 회장은 일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전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매스컴에는 흘러 들어가지 않게 신경을 썼는데. 이현이에게 들었나?”

    “네.”

    “그놈도 입이 싸구먼.”

    냉랭하게 말한 태훈이 그녀를 싸늘하게 보았다. 보영은 무릎 위에 모아 잡은 두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공기만으로도 숨이 억눌렸다.

    “그래서 석준이가 벌인 소꿉놀이는 끝났으니 자네도 그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들의 일로 충격을 받고 쓰러졌던 게 언제냐 싶게 태훈은 안색이 나쁠지언정 강건해 보였다.

    “그 말씀은…….”

    “자네는 정말 그 위치, 그 입장, 그리고 그 정도 학식으로 장차 태양을 승계할 이현이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나?”

    “저는…….”

    태훈은 말 그대로 그녀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는 십 수 개의 계열사와 수만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태양이라는 기업의 회장이었다.

    몇 마디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하찮은 것을 대하는 것 같은 얼굴로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묵살하고 있었다.

    “이현이 엄마에 대해 아나?”

    보영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싸늘하게 식은 손끝을 보다 눈을 들었다.

    “그 애도 자네 같은 여자였어. 아무것도 없었지. 이현이 아비가 그 여자가 아니면 죽겠다고 해서 들이긴 했는데 내 평생 그렇게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야.”

    “사장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뭐야?”

    보영은 순간 머리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의 기운과 압박에 눌려 고개도 들지 못했는데, 그 말에 그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사장님 앞에서도 사장님 어머니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냐고…… 물었습니다.”

    “자네가 무슨 상관…….”

    “상관있습니다. 사장님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텐가?”

    보영은 구명줄 잡듯 맞잡고 있던 손의 힘을 탁 풀었다.

    “그 애는 이현이 아비를 지탱하기에도, 스스로를 지탱하기에도 여렸어. 하기야 남들 앞에서 광대 짓이나 하던 애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끝까지 제 아이를 지키지도 못하고 병들어 죽은 건 모두 자기가 불러들인 업이야.”

    “회장님께서 병을 주신 건 아니고요?”

    “뭐야?”

    태훈 회장의 눈에서 횃불 같은 노기가 일었다. 하지만 보영은 이를 사리물었다.

    “사장님께도 혹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면 회장님은 사장님께 잔인한 폭력을 일삼으신 겁니다. 폭언도 폭행입니다.”

    어이가 없는지 태훈 회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만해, 정보영. 태훈이야. 사장님 할아버지라고!’

    하지만 그만둬지지가 않았다. 태훈은 분명 태훈의 방식대로 이현을 아꼈을 것이다. 화가 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져도 절대 이현이 맞도록 던지지 않은 것처럼.

    그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보영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회장님은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사장님의 부모님을 모자라느니, 못쓴다느니 부정하는 건, 곧 그 자식인 사장님마저 부정하시는 겁니다.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뭐야? 이, 이……!”

    태훈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뭔가를 집어 던질 태세였지만 다행히 차 안에는 던질 만한 게 없었다.

    “회장님이 보시기에 제가 아주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빠는 끝까지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대한민국의 경찰이었고, 엄마는 많이 아팠지만 저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런 두 분 밑에서 태어난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태훈이 세상에서 제일 되바라진 것을 보는 것처럼 불쾌하게 눈을 떴다.

    “사장님은 태양 그룹을 지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요. 회장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요. 감정이 있어요. 저는 사장님을 행복하게……!”

    똑똑!

    격앙되어 말을 잇던 보영은 갑자기 들려온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등지고 있던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였나 보다.

    이내 그녀의 등 뒤로 차 문이 활짝 열렸고 돌아보자 이현이 차체를 짚은 채 몸을 반쯤 숙이고 있었다.

    “……하다 하다 이제 울리기까지 하세요?”

    이현이 그녀를 한 번 보고, 이어 태훈 회장을 보았다.

    “너, 너……! 이 애는 절대 안 된다! 어디서 눈을 되바라지게 뜨고 말대답을!”

    “그래서 좋은 거예요. 이 여자가.”

    “뭐야?”

    이현은 그녀의 팔을 잡고 차에서 내리게 했다. 보영은 얼떨결에 그에게 끌려 내린 후 얼른 눈가를 수습했다.

    “살면서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사람.”

    “행복이 밥 먹여 줘? 태양이 너한테 어떤 부와 명예를 주는지 몰라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야!”

    태훈 회장이 차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든 말든 이현은 그녀를 데리고 뒤돌아섰다.

    한데 그의 등 뒤로 딱, 하는 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보영이 놀라서 돌아보니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태훈이 집어 던진 게 이현의 등에 맞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불행해졌는지, 태석준이 왜 저렇게 됐는지, 왜 고모는 태양을 버린 건지…… 아직도 모르세요? 그럼 진짜 답이 없는 건데요.”

    이현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놈! 거기 서! 네놈 당장 호텔 사장직에서 잘라 버린다! 이놈! 태이현!”

    “바라는 바에요.”

    이현이 중얼거렸다. 보영은 그와 태훈을 번갈아 보았다.

    이현은 이내 태훈의 차를 등지고 걸음을 옮겼고 보영 역시 그와 함께했다.

    “태이현!”

    등 뒤로 닫히는 자동문 너머에서 태훈의 고함이 들렸으나 이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에는 이현이 태훈을 진정시키려는 기미라도 있었는데 지금의 그는 정말 많이 화가 나 보였다.

    “사장님…….”

    주차장에서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때까지 이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저 차 보이면 무시해. 이제 정말 시작이니까.”

    “네?”

    “다음에는 정 비서 앞으로 돈 가방을 들고 오려나. 회유 그다음엔 협박 또 그다음엔 회유. 번갈아 가며 열 번쯤 하다 보면 지치시려나.”

    보영은 다소 헛헛하게 중얼거리는 이현의 옆모습을 멀거니 보았다.

    “그 전에 네가…… 질려서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내가 잘 막아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어떤 개소리를 했든 그냥 무시해. 원래 저 나이쯤 되면 노망나.”

    평소보다 더 차갑고 빈정거리는 어투에 보영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현의 손이 그답지 않게 차가웠다.

    ‘긴장한 건가……? 아니면 무서워하거나…….’

    보영은 잠시 그를 살피다가 손을 뒤집어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이현이 말없이 꽉 움켜쥐었다.

    “질리지 않아요. 무서워서 도망가지도 않고 돈은 있으면 좋겠지만, 사장님은 돈보다 비쌉니다.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보영이 말을 마치자 이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를 멈추었다. 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놓은 그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었다.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사장님…….”

    “미안해. 이상한 말들 듣게 해서.”

    “저하고 결혼할 생각은…… 있으신가 봐요.”

    “뭐?”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현이 얼굴을 들었다. 보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회장님한테 그렇게까지 행동하신 거죠?”

    보영은 눈을 끔뻑이다가 슬그머니 손을 올려 이현의 볼을 손에 담았다.

    “이상한 말들을 듣긴 했지만 지금 기분이 꽤 좋아요.”

    손끝으로 이현의 눈가를 어루만지고 보기보다 부드러운 피부를 소중히 보듬었다.

    “아직 제대로 만난 지 한 달…… 도 채 안 됐지만 좀 과하게 상상하게 되네요.”

    이현이 이지러진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곤 보영과 제 이마를 맞대고 그녀의 얼굴을 두 손에 쥐었다.

    “……아직 근무 중이에요, 사장님. 장 실장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이현이 입을 맞춰 오려 하자, 보영이 얼른 그의 입술을 막고 말했다. 그러자 이현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곧 8시야. 퇴근 시간 이미 한참 전에 지났어.”

    이현이 곧장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멈췄던 엘리베이터를 다시 작동시키며 몸을 세웠다.

    사장실이 있는 46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한데 그가 곧장 사장실 바로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

    “아래층은 왜……?”

    그녀의 중얼거림에 씩 웃은 이현은 사장실로 가는 버튼을 취소했다.

    아래층은 호텔의 스위트룸 객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의뭉스럽게 이현을 보았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를 데리고 곧장 객실로 향했다.

    이현이 문을 열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통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와……!”

    호텔에서 일했지만 그녀와는 인연이 없는 객실이었다. 하루 묶는 데만도 250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보영이 절로 탄성을 지르며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야경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어둠 속에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고 있는 수백, 수천 개의 건물들이 밤을 수놓았다.

    “견학인가요?”

    보영이 웃으며 이현을 보았다. 어느새 이현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조금 이르지만.”

    “네?”보영은 순간 멍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생일은 내일이었다. 하지만 말한 적은 없었다.

    피융! 펑! 퍼퍼펑! 퍼퍼퍼퍼펑!

    그때였다. 조금 멀리 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불꽃놀이가 터졌다. 보영은 이현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불꽃놀이에 시선을 뺏겼다.

    불꽃 축제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꽤 규모가 커 보였다.

    “오늘 무슨 행사 하는 날인가 봐요.”

    “행사?”

    이현이 의뭉스레 웃었다. 그러곤 다시 한번 밖을 향해 턱짓했다.

    머지않아 건물 전광판에 ‘Happy birth day, BY’라는 문구가 반짝였다.

    ‘BY…… 라면…….’

    보영은 설마 자신의 이니셜일까 싶어 확인하듯 이현을 보았다. 그런데 어째 이현의 표정이 다소 의기양양했다.

    “사장님…… 미…… 아니, 이게 무슨……!”

    “앞으로 미안할 일이 많아서 미리 뇌물이라도 먹일까 싶어서.”

    “네?”

    “사람은 돈으로 길들이는 거니까.”

    보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다.

    “정보영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좋지? 누가 이런 이벤트를 받아 봐. 저 전광판도 내 거야.”

    “네?”

    “가진 것 중 자랑할 게 돈밖에 없네. 싫어?”

    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보영은 실소를 흘렸다. 자랑할 게 왜 돈밖에 없나.

    어째서 그에게 이렇게 빠져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태이현이라서 좋았다.

    하필 설렌 남자가 말도 못 하게 잘났을 뿐이다.

    “싫을 리가요.”

    가볍게 대꾸한 보영은 문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다면 이 불꽃놀이도…… 우연이 아닌 건가요?”

    “재일이 형이 저 건물 옥상에서 욕을 하고 있겠지. 연애 참 별스럽게 한다고.”

    “아…….”

    괜찮은 걸까.

    공사 구분은 한다던 재일은 그녀와 이현의 관계가 ‘진짜’가 되자 이전보다 더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말할 뿐.

    ‘감히 네 까짓 게? 그런 눈빛이었지.’

    보영은 쓰게 웃곤 숨을 들이켰다. 우선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살다 보면 평탄한 날은 얼마 없다. 불행하고, 힘들고, 지치는 순간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더 확실하게 가슴 안에 새겨 두려 했다.

    삶이 힘들 때 한 번씩 꺼내 보면 다른 건 별게 아니게 될 테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보영.”

    보영은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현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일 토요일이야.”

    “네.”

    “출근 안 해.”

    “……? 네, 그렇죠?”

    보영이 의아해할 때였다. 이현이 그녀의 목을 입술로 물었다. 보영은 어깨를 움츠렸다.

    등줄기가 다 저릿해졌다. 그는 그녀의 반응에 얄궂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넘기곤 다시 한번 입술을 목덜미에 길게 묻었다.

    “네 생일이라 더 좋은 거 같아.”

    “네?”

    “고삐를 언제 풀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거든.”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 의미를 알아들어 버렸다. 보영은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현실적인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씻을 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속옷도 없으며 갈아입을 옷마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이현의 입술이 보영의 입술을 덮쳐 왔고, 그녀의 몸을 불편하게 감싸고 있던 블라우스와 슬랙스가 벗겨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등 뒤로 폭신한 이불 감촉이 느껴졌다. 이현의 단단하게 다져진 상체가 어둠 속에서도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보영은 숨을 들이켰다.

    “나 조금 비겁한가?”

    “네?”

    “할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조금 있을지도 몰라.”

    무슨 의미인지 몰라 숨을 가쁘게 내쉬며 멍하게 있자니 이현이 몸을 숙여 그녀의 귓바퀴를 가볍게 물고 중얼거렸다.

    “완전히 가지고 나면 네가 날 둘러싼 주변 여건 때문에 도망가지 않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사장님.”

    보영은 이현의 뜨거운 몸을 온 마음을 다해 부드럽게 보듬어 안았다.

    “아까 회장님과 대화하면서 생각했어요. ‘이런 환경에서 태이현이라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나여야만 해.’ 하고요.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현이 팔로 제 몸을 지탱하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둘 다 행복해질 권리 있잖아요. 제겐 이제 아무도 없으니 사장님이 제 가족이 됐으면 좋겠어요. 함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청혼이야?”

    “아. 그렇게 되나요?”

    보영이 시치미를 떼고 말하자 이현이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 보영은 행복해졌다.

    ‘이 남자가 웃었으니까 됐어.’

    이현이 다시금 입술을 삼켜 왔다. 보영은 두 팔을 한껏 벌려 그를 안았다.

    그녀는 생각지 못했다. 스물여덟 살의 생일을 이렇게 특별하게 맞이하리라고는.

    * * *

    ‘주도면밀해라. 이런 걸 칭찬을 해야 해, 아니면…….’

    처음부터 이 스위트룸에서 이럴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영은 이현이 준비해 둔 통이 큰 민무늬 원피스를 입고 걸음을 살금살금 옮겼다.

    사실 집에 그를 위해 준비해 둔 선물이 있는데 그건 이따가 전해야 할 것 같다.

    대신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동일이 건넸던 종이를 꺼내 들고 다시 침대로 왔다.

    그녀의 기척에 잠이 깼는지 이현이 눈을 부스스 떴다.

    “아침이에요, 사장님.”

    암막 커튼 밖으로 밝은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이현이 작은 침음을 삼키며 아이처럼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아, 오랜만에 정말 잘 잤다.”

    정말 만족스러운 수면이었는지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보영은 그 앞으로 자신이 가져온 종이를 펼쳐 보였다.

    “……이게 뭐야?”

    “야구, 취미로 다시 해 보실래요?”

    종이에 적힌 것은 은퇴한 야구 선수들 중에서도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회인 야구단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눈엔 사장님이 아직 야구를 많이 좋아하시는 걸로 보여서요. 조기 축구처럼 가끔 주말에 가볍게 하시면 어떨까 해요.”

    종이를 훑은 이현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삼촌이 찾는 걸 도와줬어요. 그쪽에서도 사장님이라면 대환영일 거예요. 다름 아닌 태이현이니까요.”

    이현이 손을 뻗어 그 종이를 손에 쥐었다.

    “사장님 집에 있는 야구 잡지들, 강릉에서 유소년 야구단 아이들과 함께 뛰던 모습…… 제가 본 중 가장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하지만은 됐어요. 대답만 하세요. 좋아요, 싫어요?”

    보영은 그가 다른 생각을 하게 두기 싫었다.

    입장 때문에, 위치 때문에, 여건 때문에 그가 좋아하는 하나를 포기하는 게 싫었다.

    진지하게 하라는 게 아니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는 정도로만.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했지만 그게 다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아니니까요. 팔, 이제 괜찮잖아요.”

    보영은 그가 부상당했던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이현이 그녀와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자주 참여는 어렵겠지만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도 좋고요. 이런 기회 없다니까요?”

    “약장수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권할 때 그냥 하시죠?”

    이어진 보영의 말에 결국 이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팔을 잡아 침대로 끌어 올렸다.

    그 탓에 보영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다시 그의 밑에 깔려 눕게 되었다.

    그런데 허리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야릇했다. 보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사장님이 안 하시면 제가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야구화도 샀는데, 그거 쓸모없게 돼요. 무슨 리미티드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현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빙글 웃었다.

    “좋으신 거죠?”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고 원피스를 천천히 위로 끌어 올렸다.

    “하아.”

    보영은 야릇한 기분에 숨을 깊게 토해 냈다. 이현이 그녀의 코 위에 자신의 코를 가볍게 비빈 후 눈을 맞췄다.

    “네 덕분에 행복해. 정보영.”

    “나도요. 어제 이벤트…… 고마워요. 내년 생일도 기대되네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현의 얼굴이 아주 잠시 굳어졌다.

    그러게 첫 이벤트부터 너무 과했다. 보영은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덜컥 그녀를 행복하게 만든 남자의 예상하지 못한 단순함에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남자와의 이런 날들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에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메어 왔다.

    “왜 웃어?”

    “행복해서요. 사랑해요. 태이현 사장님.”

    “내년에 받을 이벤트 생각하니까 행복해?”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보영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현이 나무라듯 그녀의 코를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아얏!”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이현이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 정보영.”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다 아프도록 미어졌다.

    너무 행복해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구나. 처음 알았다.

    보영은 웃었다. 앞으론 이 통증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많은 날들 동안 이 남자 덕분에 행복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