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
  • 06.

    “물러날 생각이 없어?”

    이현이 턱을 괴고 물었다. 그의 집, 아일랜드 바에 마주 앉은 보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영의 앞에는 예의 정철우가 그에게 건넸던 장부의 복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이걸 보니 더욱이요.”

    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가능하면 보영을 이 일에서 열외로 두고 싶었다.

    정철우가 사건을 덮은 비리 형사였다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숨으로 자신에게 빚을 갚았다. 그러니까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 정도는 자신도 지켜 주고 싶었다.

    “물론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뭐라도 하고 싶어요. 아빠는 빚을 갚으려 했고, 저도 돕고 싶어요.”

    보영의 눈빛은 무척이나 다부졌다. 문득 10년 전 잠깐 보았던 정철우가 생각이 났다.

    그 남자도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꽤나 우직했고 신뢰가 갔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남자가 다짜고짜 건네는 그것을 믿을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런 눈빛을 좋아하나 보네. 가만 보니 재일이 형이랑도 결이 비슷한 눈빛인데.’

    “나비야, 중요한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해.”

    문득 보영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안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나비를 향해 말했다. 나비가 계속 야옹거리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긴 했지만 지나치게 설명하는 어투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다고 걔가 말을 알아들어?”

    “……알아들을 수도 있죠.”

    “그게 말이 되는…….”

    이현은 말을 잇다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나비가 정말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신기하네?”

    그가 말하자 보영이 멋쩍게 웃고는 나비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며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고양이를 다룰 때만큼은 저렇게 자애로울 수가 없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그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종내에는 안쓰러울 만큼 숨죽여 울던 여자와 동일 인물 같지 않았다.

    ‘울긴 했었나?’

    퉁퉁 부은 눈이 증명해 주긴 했지만 지금의 보영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했다.

    이현은 그런 보영을 관찰하듯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까의 보영을 떠올리자면 어째서인지 자꾸 실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S’를 직접 만나서 쓸모 있는 정보를 가져올 수 있을 지도요.”

    “쓸모 있는 정보? 그런 건 필요 없어.”

    “왜요?”

    “내가 이 일을 몇 년을 준비했는데. 자그마치 10년이야.”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철우가 건네준 장부를 기반으로 10년을 준비했다. 확실한 증인이 필요해 정철우를 찾았던 것뿐이지, 준비가 덜 된 건 아니었다.

    “사장님은…… ‘S’가 태석준 부회장님이라고 생각하세요?”

    이현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사납게 비틀었다.

    “다른 생각하지 마. 정 비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나와 사귀는 연기뿐이야. 그것만 잘하면 돼.”

    “그게 이 일에 무슨 도움이 되나요?”

    “내게 도움이 되잖아. 할아버지의 눈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고. 자신의 경영권을 위협하는 태석준이 괘씸하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이야. 내가 하는 짓을 곱게 봐줄 만큼 아량이 넓진 않으셔.”

    그가 거기까지 말하자 보영이 뭔가 생각난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쉽게 뱉지는 못했다.

    “그…… 아닙니다.”

    “뭔데.”

    “제 이야기는 모두 아시잖아요. 하지만 사장님 이야기는 몰라서요. 20년 전 사장님 아버지 사고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이현은 시선을 내리떴다. 태훈 회장에게는 유약하고 능력 없는 모자란 놈이었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했던 아버지였다.

    모든 비극은 태훈 회장의 압박과 능력 좋고 수완 있지만 차남이기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태석훈의 동생이자 그의 작은아버지인 석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나중에 하는 걸로.”

    이현은 부러 웃으며 말을 흘렸다. 사실은 아직도 떠올리면 선명했다. 하루가 다르게 퍼석하게 말라 가며 신경 정신과 약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할까.”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 갔다. 보영은 그제야 시간을 인식했다는 얼굴로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선 그에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이현은 그런 보영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그런데 하나 묻겠습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계속 반말하실 거예요, 아니면 회사에선 또 존댓말 하실 거예요?”

    보영이 물었다.

    “뭐가 좋은데?”

    “존댓말…….”

    “그럼 반말할게. 이제 한배 탔으니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그리 말하며 이현은 히쭉 웃었다. 보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었나.

    보영의 얼굴에 미미한 신경질이 서렸다. 이현은 피식 웃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재미있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보영이 현관문을 열었다. 이현은 그런 보영을 따라 신발을 신었다.

    “왜…….”

    그런 그의 행동에 보영이 의아하게 물어 왔다.

    “데려다줄게.”

    그의 말에 보영은 한동안 그를 희귀 동물 보듯 보았다. 아까 한 번 내지른 후로 그와 그녀 사이에 있는 얇은 막 하나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가 사장인데, 눈빛이 너무 불손한 거 아닌가?’

    “시간이 너무 늦긴 했어도 바로 아래층인데요.”

    ‘용감한 건가, 아니면 잊어버린 건가?’

    이현은 그의 집 현관문을 힐끔 보는 보영에 관자놀이를 긁적이곤 물었다.

    “도둑 들었던 거 잊었어?”

    역시나 그의 말에 보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기야 잊을 만하긴 했다. 보영은 이 며칠 새 엄마의 장례를 치렀고, 10년 전 죽은 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아, 기억해요. 그럼요.”

    “집 살펴 줄게.”

    이현은 곧장 걸음을 옮겨 보영의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 보영이 쫓아왔다.

    401호에 도착하자 보영이 머뭇거리며 키패드를 눌렀고, 이현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처럼 집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베란다가 열려 있나?’

    이현은 곧장 걸음을 옮겨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쿠당탕탕!

    막 베란다 문을 열었던 이현은 어마어마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보영이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식탁 의자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뭐 해?”

    “그…… 뭐가 있는 건 아니죠?”

    이현이 눈으로 보영을 훑었다. 구명줄 잡듯 식탁 의자를 부여잡은 보영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 역시 동공이 크게 팽창되어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거다.

    “……우리 집으로 갈래?”

    “네?”

    “여기서 잠이나 자겠어?”

    “네?”

    “무슨 소리만 들려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인데.”

    이현은 보영에게 걸어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 * *

    “어차피 처음도 아닌데, 자고 가.”

    불안이 짙게 밴 얼굴로 베란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보영이 이제야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눈을 돌렸다.

    “아니, 저는 그렇게까지는…….”

    “여기서 잘 수 있겠어?”

    “……자야죠. 오늘 하루 피한다고 내일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우직하다. 심지가 곧았다. 이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곧추세웠지만 이현에겐 보였다. 보영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은 수시로 베란다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베란다 문을 꽁꽁 닫고 잠그고 싶은 기색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어. 정말 여기서 잘 거야?”

    보영이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할까, 아니라고 할까?’

    “……네. 그 도둑이 혹시 제게서 아빠가 갖고 있었다던 장부를 찾는 거라면 제겐 없으니까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현은 억지로 입매를 둥글게 휘는 보영의 업무 미소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겠어.”

    그는 미련 없이 보영을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문단속 잘하고.”

    “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알기는 할까. 지금 자기 얼굴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입은 괜찮은데, 얼굴은 괜찮지 않았다.

    이현이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까지도 보영은 집에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집 안 곳곳을 뒤숭숭한 얼굴로 이리저리 산만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 * *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있던 보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그리고 여덟 번째 문단속을 했다.

    살짝 커튼을 열고 사람 그림자가 있지는 않은지 슬그머니 보고, 집 안에 들어오면서는 현관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지는 않을지 잠자코 서서 굳어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비빌 걸 그랬나.”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 보영은 눈썹을 팔(八)자로 내려뜨렸다.

    며칠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그에게 그런 식으로 의지하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었다.

    똑똑똑!

    좀처럼 눕지 못하고 있던 보영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현관문에서 들려온 문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똑똑!

    얼음처럼 굳은 보영은 세상에서 이보다 무서운 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정 비서!”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잔뜩 긴장해 솟았던 어깨에 힘이 툭 빠졌다.

    “정보영?”

    밖에서 다시 한번 그녀를 부른다.

    “아으…… 깜짝이야!”

    보영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앞에는 이현이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서 있었다.

    “사장님, 왜…….”

    보영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생각해 보니까 역시 무리여서.”

    “네?”

    “그 도둑이 장부를 찾는 거라면 내 집에 들어올 수도 있잖아. 그러니 역시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이현이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걸 들어 올려 보였다. 이불이었다.

    “같이 자.”

    보영은 황당한 심정으로 이현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이현이 현관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곧장 침대 아래에 자신이 가져온 이불을 펄럭여 깔고 작은 경추 베개까지 그 위에 놓은 후, 바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마치 작정하고 온 듯 그의 위치 선정은 정확했고, 행동은 간결했으며 의지 역시 확고했다.

    “사장님, 지금 뭐 하시는…….”

    “한배를 탔으니 같이 감당하자고.”

    이현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말했다. 그때였다. 바람인지 뭔지 밖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서서 문가를 보았다.

    “……밤새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울 게 아니면 그냥 자자고.”

    “네?”

    “그 도둑이 나한테도 들까 봐 무서워서 온 거니까 그러려니 해.”

    보영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덧붙이는 이현의 말에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서워하는 사람이라기엔 너무 담담한데……?’

    그와 그녀의 눈이 불시에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우수수, 들려왔다. 보영은 창밖을 힐끔 보았다가 다시 이현을 보았다.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조금 덜 놀랐다. 이현은 마치 잠을 청하듯 눈을 감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졌다.

    ‘아아. 정말이지…….’

    보영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는 정말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 것을 걱정한 게 아니었다. 무서움을 타는 것도 아니었다.

    보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가를 휘었다.

    “……바닥이 딱딱해서 배기지 않으시겠어요?”

    “별로.”

    보영은 이현의 발밑 쪽으로 빙 돌아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머리맡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불이 꺼지고 스탠드 등만 은은하게 거실 겸 방을 밝혔다.

    침대 아래 누운 이현이 돌아눕는지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영은 그의 존재감을 그 어떤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느끼며 오늘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허리를 펴고 누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큰일 난다던데요.”

    “변하긴 누가 변해.”

    “사장님이요. 친절했던 건 연기였고, 그 후 저를 압박했던 사장님이 진짜 아니었어요?”

    “난 매사에 진심이었는데.”

    “진심이요?”

    침대 아래에서 이현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내내 불안함에 예민하게 일어섰던 신경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필요한 게 있으니까 잘해 주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 후에는 적이라고 생각했으니 잘할 필요 없었고.”

    “태도가 확실하시네요.”

    거칠 것 없이 당당했다. 보영이 대꾸하자 이현이 낮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멋쩍었나 보다.

    “그럼 지금 잘해 주시는 것도 필요한 게 있어서인가요?”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의미로.”

    “다른 의미라면……?”

    보영은 미루어 짐작했다.

    ‘그가 이전에 말했듯이 이제 한배를 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곧장 되돌아올 것 같았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보영은 눈을 굴려 침대 아래쪽을 힐끔 보았다.

    ‘그새 자나?’

    보영은 눈꺼풀을 끔뻑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였다. 그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곤 굳었다.

    졸음기 따윈 하나도 없는 이현의 눈이 그녀를 뭐 하냐는 얼굴로 생뚱맞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으셔서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보영은 몸을 뒤로 슬그머니 뺐다.

    ‘아, 민망해라.’

    은은한 스탠드 등이 조금 검붉어진 그녀의 얼굴빛을 아무렇지 않게 가려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신경 쓰이고 그래. 그런 의미.”

    “네?”

    다시 자리에 누우려던 보영은 몸을 반쯤 일으키곤 침대 아래쪽을 보았다.

    “정 비서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가.”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보영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시선을 내렸다.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고 천정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의 시선도 그녀에게 쏠렸다.

    “뭐 이렇게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보이는 스파이가 다 있지 했었어.”

    이현이 마치 그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설핏 웃었다.

    “결국 돌고 돌았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적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 그래서 다행이구나라는 생각이 지금 드네.”

    보영은 저도 모르게 손아래 짚고 있던 이불을 살짝 움켜쥐었다.

    나쁜 마음을 품었고, 불순한 동기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게 왜인지 마음 한편을 눅눅하고 저릿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희한하고 이중적인 성격으로 저런 통찰력이 있을 건 뭐람.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잖아.’

    보영이 눈꺼풀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사장님. 사장님과 제가 한배를 탄 것, 적은 아니라는 것,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너무 정도 이상으로 잘해 주지는 마세요.”

    “왜?”

    “코 꿰이실지도 모르니까요.”

    “코가 꿰여?”

    이현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으나 보영은 그대로 돌아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도둑이 무섭다는 핑계로 내려와 같이 있어 준 것도 고마워요.”

    “아아.”

    이현이 알아챘냐는 듯 낮게 웃었다. 보영은 그의 반응에 역시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첫 번째가 어렵지, 두 번째는 어렵지 않지?”

    “뭐가요.”

    “같이 자는 거.”

    그의 대답에 보영은 피식 웃었다.

    “이게 같이 자는 거예요?”

    “같은 집, 같은 방, 같은 시간에 나란히 누워 자니까. 뭔가 다른 생각 했나?”

    “일전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제집에서 불을 끄고 두 시간 동안 있다 가셨던 게 생각나서요. 누군가에게 연인답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려고요.”

    “아, 속이 시커먼 놈인가 보네.”

    “네. 속이 시커먼 분이셨어요.”

    보영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삼켰다. 이현의 어조 역시 가벼웠으므로 이 가벼운 대화가 의외로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근래 들어 가장 마음이 힘든 요즘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이현 덕분에 웃게 됐다. 예상하지 못한 평안한 밤을 보내게 됐다.

    홀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곱씹고 아빠에 대한 억울함을 켜켜이 쌓으며 보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나은 밤을.

    보영은 눈을 감았다.

    * * *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아니야…….”

    보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로운 목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니……! 으……!”

    처음엔 꿈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보영은 목소리의 출처를 깨닫곤 몸을 벌떡 일으켜선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사장님?”

    보영은 이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현이 괴로운 듯 몸을 뒤척였다. 꽤 힘들어 보여 보영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깨우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뻗은 손은 그를 깨우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던 이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꽉 쥐었기 때문이다.

    “잘못…… 잘못했어요…….”

    보영이 손을 빼려다 굳었다. 그에게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나약한 목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잘못했어요…… 작은엄마……!”

    이현의 작은엄마라면 태석준 부회장의 아내일 것이다.

    ‘사장님이 그분에게 잘못할 게 뭐가 있지?’

    보영은 자신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이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잘못……!”

    그 순간, 마치 이현이 물속에서 건져지듯 눈을 부릅떴다.

    “하아……!”

    멍하니 천장을 보던 그가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움찔하며 그녀의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보영은 그 손을 꽉 잡았다.

    “정 비서.”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 악몽을 꾸면 아빠가 이렇게 손을 잡아 주곤 했어요.”

    “뭐?”

    “그러고 나서 잠이 들면 다시 악몽을 꾸지 않았었어요.”

    이현이 그녀가 맞잡은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악몽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불면증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요.”

    “……내가? 누가 그래?”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인 경우가 있다. 보영은 그를 자극하는 대신 눈을 내리뜨고 덧붙였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시도해 보세요.”

    “뭘.”

    “손 잡아 드릴게요.”

    이현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사장님이 아무리 잘생기셨어도 아무 짓도 안할 테니, 안심하고 주무셔도 돼요.”

    “뭐?”

    그가 진심으로 놀란 태도라서 보영은 조금 멋쩍어졌다.

    “……음, 농담이었는데요.”

    아무 짓을 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도 그걸 자제할 이성은 있었다.

    “정말 효과 있어요.”

    보영은 더 힘을 실어 말했다. 이전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가 편하게 잠든 걸 본 적이 없었다.

    보영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현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깊은 밤이었고, 이 작은 집에는 그녀와 그 단 둘 뿐이었다. 보영은 어쩐지 조금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녀가 민망해지기 직전, 이현이 눈을 감았다.

    보영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은 채 기다렸다. 그가 잠이 들기를.

    그리고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현이 잠이 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보영은 천천히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손에 힘을 푸는 순간 이현의 미간에 잔득 힘이 들어갔다.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그래서 보영은 다시 그의 손을 잡고 숨을 죽였다. 그러면 그가 편해졌다.

    ‘……사장님 꿈은 뭐가 그렇게 아프세요?’

    그가 안쓰러웠다. 삼류 막장보다도 못한 인생이 대체 뭔지 궁금해졌다.

    보영은 그렇게 한참 이현의 머리맡을 지켰다.

    * * *

    이현은 눈을 떴다. 드물게 푹 잤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현은 그대로 일어나려다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시선을 내렸다.

    ‘아. 그랬지.’

    간밤에 보영이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주겠다며, 효과가 있다며 그의 손을 잡았었다.

    그는 늘 밤이면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잠자리가 편한 적이 드문 탓이다.

    어제도 괜스레 보영에게 신경질을 낼 것 같아 그냥 눈을 감았는데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잡고 있었던 거야?’

    이현은 그가 깔고 잔 이불 옆을 보았다. 보영이 옆으로 누운 채 그에게 손을 내주고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진짜…… 여러 가지 의미로 신경 쓰이게 하네.’

    이현은 천천히 보영의 손에서 제 손을 뺐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거였다. 아주 많이 피곤했는지 보영은 차가운 바닥에서도 곤하게 잘만 잤다.

    “정보…….”

    잘 거면 침대에 올라가서 자라고 하려던 이현은 그만두었다.

    장례로 인한 보영의 상조 휴가는 이번 주 까지였다. 그는 출근을 해야 했지만 보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현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이 든 보영을 안아 올렸다. 불편했는지 잠깐 움직이기는 했으나 다시 그의 어깨에 기대 늘어졌다.

    이현은 피식 웃곤 침대 위에 보영을 눕혀 주었다. 그러자 익숙한 자리를 찾아 보영이 옆으로 몸을 돌려 베개를 파고들었다.

    “부러워 죽겠네. 뭐 이렇게 잘 자.”

    이현은 보영을 웃으며 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얼굴 위로 흐트러진 보영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따뜻한 숨이 흘러나왔다. 이현은 침대 끝에 앉아 그런 보영을 멀거니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효과가 있긴 했네. 정말.’

    이현은 가볍게 주먹을 쥔 채 이불 위에 놓여 있는 보영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어 잡아 보았다.

    “자주 생각나겠는데.”

    낮게 중얼거린 이현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을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파묻힌 보영을 눈에 담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걸. 네가 이렇게 좋은 여자인 거 말이야.’

    왜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 했다. 이현은 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편, 늦게까지 늦잠을 잔 보영은 손등을 간질이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비?”

    ‘왜 나비가 여기 있지?’

    「일어나! 배고파 죽겠어! 우리 오빠는 심하게 부지런하고, 정 비서는 너무 게으르고! 왜 중간이 없어?」

    나비는 시끄럽게 짱알거렸다. 하지만 보영은 막 잠에서 깬 나른한 머리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에 바빴다.

    ‘왜 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지? 얘는 어떻게? 또 베란다……?’

    보영은 베란다를 보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단히 단속을 한 만큼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뭘 그렇게 고민을 해? 우리 오빠가 여기 놓고 갔는데.」

    “뭐?”

    「식탁 위에 뭘 놓고 갔어. 가서 봐봐. 내 밥도 주고!」

    보영은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식탁으로 갔다. 하얀 메모지에 힘 있고 시원한 글씨가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집에서 쉴 거지? 나비 좀 챙겨 줘.

    보영은 그 황당한 메모를 멀거니 보다 피식 웃었다.

    ‘나비를 챙겨 주는 게 아니라, 그녀가 혹시 혼자 있는 게 무서울까 봐 데려다 놓은 게 아닐까.’

    「정 비서! 밥 달라니까!」

    본능에 충실한 나비가 그녀의 발치에 와서 앞발로 다리를 툭툭 쳤다.

    보영은 몸을 숙여 나비를 안아 들었다.

    「뭐야? 왜 그렇게 징그럽게 웃어?」

    “내가? 아닌데?”

    「이잉? 기분 엄청 좋아 보는데?」

    “기분 탓이겠지. 너 눈치가 참 없구나, 나비야.”

    보영은 나비의 턱을 간질여 주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밥을 챙겨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 비서!」

    “왜?”

    「주말에 맛있는 거 못 먹어서 어떻게 해?」

    “맛있는 거?”

    「우리 오빠가 장 실장하고 통화할 때 그렇게 말하던데? 정 비서를 동행하려고 했지만 힘든 일을 겪어서 무리일 것 같다고.」

    “주말? 주말이라면……?”

    보영은 이현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가 그 주였다.

    ‘아! 태석준 부회장의 생일 만찬!’

    보영은 나비를 위해 야채를 썰던 손을 멈추었다.

    태석준 부회장. 그가 ‘S’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아빠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정 비서가 다음 주 작은아버지 행사에 동행하기 전에 하나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요. 그래야 멸시를 같이 당하고도 그러려니 하겠죠.〉

    언젠가 이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보영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 * *

    석준의 생일 만찬은 태훈 회장의 자택인 한남동에서 이루어졌다.

    외부 노출을 싫어하는 태훈 회장의 성향 때문에 태양 그룹 일가가 치르는 대부분의 행사는 집 안 내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았다.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라 생각보다 사람은 적을 거야.”

    차에서 내리기 전, 이현이 넓은 정원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적은 게 이 정도라고요?”

    태훈 회장의 자택 앞에는 보기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 고급 차량들이 줄지어 사람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가족이 아니더라고 꼭 불러야 하는 사람들은 불러야 하니까.”

    그가 말하는 꼭 불러야 하는 사람들이란 만찬을 도울 외부 인력부터 태훈 회장과 태석준 부회장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라고는 해도 모두 정치면이나 경제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이다.

    “설마 기죽은 건 아니지?”

    창밖을 보며 계속 마른 입술을 축이는 그녀를 보며 이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보영은 눈만 돌리다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재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건 아니에요.”

    보영은 그녀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재일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했다.

    ‘이 옷이 뭐가 어때서.’

    알고는 있었지만 재일은 이현에 관해서라면 눈빛부터가 달라지는 사람이었다.

    〈정보영 씨는 지금 사장님과 교제하는 여성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겁니다. 그만큼 정보영 씨의 행동거지와 외모는 곧 사장님의 얼굴이라는 이야기죠. 준비해 드린 원피스는 이탈리아에서 직접 직수입한 유명 디자이너의 옷입니다.〉

    보영은 재일이 내민 연분홍 계열의 셔츠웨이스트 원피스를 거절하고 그녀가 가진 옷 중 가장 고가의 베이지색 코트 원피스를 입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디자이너 작품은 자그마치 4,000만 원이라는 가격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가면 오히려 제가 사장님의 돈을 보고 접근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왜죠?〉

    〈저는 이런 옷을 입을 만한 수입을 벌지 못하고, 저의 집도 이런 옷을 감당할 만한 재력가가 아니기 때문이죠. 작정하고 찍히자면 못 입을 것도 없겠지만…… 저는 사장님의 결혼 방패막이 아니었습니까? 잘 보여야 할 것 같은데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 재일은 결국 이현의 체면을 위해 준비한 원피스를 다시 회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은 50만 원짜리 코트 원피스가 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슬슬 갈까.”

    내리기 전에 이현이 보란 듯이 한숨을 한 번 삼키곤 차 문을 열었다. 보영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먼저 내린 이현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고 차에서 나왔다.

    “모쪼록 조심해. 다들 고상한 가면을 뒤집어쓴 하이에나들이니까.”

    이현이 낮게 속삭이며 그녀의 팔을 당겨 자신의 팔짱을 끼도록 했다.

    보영은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일이 준비한 메이크업과 헤어까지는 거절할 명분이 없어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완벽한 화장과 컬이 풍성하게 들어간 웨이브 머리를 하고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릴게요.”

    이현이 마주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환영해. 그들이 사는 세상에 온 걸.”

    보영은 이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싱그러운 잔디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관리된 정원으로 들어섰다.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기 위한 드높은 회백색 담장 안쪽에는 족히 100평은 넘을 것 같은 드넓은 잔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의 행사를 돕기 위해 왔을 업체 관련 직원들은 하나같이 하얀 셔츠에 검은 하의로 단정함을 유지했고,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정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 주변에 앉거나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키친 바가 설치되어 즉석에서 요리를 해 주었고, 그 옆으로는 준비된 뷔페 음식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다.

    ‘꼭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

    보영은 눈으로 정원의 풍경을 훑으며 생각했다.

    “오빠! 정 비서도 같이 왔네?”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보영은 이현을 따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온 이본이 그녀에게 반가운 얼굴로 눈인사를 건넸다.

    “보영 씨가 입은 옷이 심플하니 깔끔하네요? 어디 제품이에요? 내가 옷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본은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색 계열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산뜻해 보였다.

    “태양 아울렛에서 구매했습니다. 지난 시즌 상품을 행사 가격에 구매한 거예요. CCO라는 의류 브랜드고요.”

    “아…… 그렇구나. 괜찮은 곳이네요. 마감이 조금 더 꼼꼼했으면 좋았겠지만요.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오빠가 이렇게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올 줄 몰랐거든요.”

    이본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말을 돌렸다.

    “긴말은 됐어. 할아버지는?”

    “집 안에 계셔. 엄마도.”

    왜인지 이본이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왜 그런가 그녀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현은 그녀를 데리고 현대 미술관처럼 감각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태훈 회장의 자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야. 얼굴 좀 자주 비추지. 회장님이 걱정 많이 하시는데.”

    그들이 들어서자 앞치마를 한 단아한 중년 여성이 반가운 기색을 비쳤다.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할아버지는요?”

    “지금 서재에서 부회장님하고 이야기하고 계셔.”

    보영은 저도 모르게 이현의 팔을 꽉 잡았다.

    ‘태석준 부회장?’

    그런데 그녀가 움칫하자 이현이 마치 그녀의 속을 읽은 듯 팔에 꼈던 팔짱을 풀고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곧 보영은 흠칫했다. 그의 손이 무척이나 차가웠기 때문이다.

    ‘수족 냉증이라도 있었나?’

    “그런데 그 아가씨는……? 있지, 이현아, 내가 노파심에 말하는데…… 소문의 그…… 아니지?”

    보영은 그녀에게 실례가 될까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묻는 여자에게 마주 미소 지었다.

    “맞아요. 소문의 그 여자분. 그러니까 아줌마는 좀 이쁘게 봐주세요.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잖아요.”

    “그게…… 뭐…… 아무튼 서재로 가 봐.”

    여자는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안쪽을 가리켰다.

    “할아버지 성질이 워낙 대단해서요.”

    “각오는 하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집 안 내부는 미로 같았다. 겉에서 봤을 때는 시원하게 오픈된 구조인 줄 알았는데 긴 복도를 따라 거실, 주방, 화장실. 그 외에도 온실, 접객실 등으로 용도가 나누어져 있었다.

    “할아버지, 저 이현이에요.”

    이현은 그중 격자무늬가 들어간 한실 앞에 서서 소리를 냈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굵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영은 일전에 보았던 태훈을 떠올렸다.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풍채 좋고 기운도 좋았던 노인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던지는 나쁜 버릇도 가지고 있었고.

    ‘설마 나한테도 그렇게 집어 던지려나? 다치면 산재 처리는 해 주시겠지?’

    보영은 애써 긴장을 풀어 보려 그런 우스개 생각을 하며 이현이 여는 문 안쪽을 보았다.

    거대한 원목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을 가득 메운 책들 가운데에는 검은색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태훈과 태석준. 그리고 석준의 아내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보였다.

    “한 번을 네 발로 찾아오지를 않더니 그래도 작은아버지 생일이라고 오기는 왔구나.”

    거칠 것 없는 성격답게 화통하게 뱉은 태훈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랜만이다, 이현아.”

    보영은 태석준 부회장을 보았다. 하얗고 마른 얼굴에 안경을 낀 그는 얼핏 보면 병약하고 유약해 보였다.

    하지만 경영에 한해서는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그가 현재 태양의 실세였고, 중심이었다.

    최근에는 태양의 메인 사업체인 에너지 개발 쪽으로도 욕심을 내 아직 정정한 태훈 회장과 적지 않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다.

    에너지 개발 사업을 넘겨받아야 태양의 후계자로서 확고히 입지를 다지는 것일 테니, 욕심을 내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태훈 회장은 옛날부터 장자 계승 주의를 가진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러니 이현을 미국에서 불러들인 거고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작은아버지. 그리고…… 작은어머니.”

    이현이 가볍게 묵례했다. 보영 역시 그를 따라 묵례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이현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는 독기 어린 작은어머니의 시선에 소름이 다 끼쳐 왔다.

    보영이 저도 모르게 이현을 보았다. 다행히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예의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은 좀 어떠……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이야기 들었다. 그 아가씨가…… 그……?”

    석준은 말을 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태석준은 태훈 회장처럼 불도저는 아니야. 그가 사업을 키운 방식을 보면 미리 설계해 놓고 그 판이 자기 뜻대로 굴러갈 수 있게 적절히 말을 배치하는 책략가지. 그래서 태훈 회장과 더 맞지 않는 거고.’

    “인사시키려고 부르시자마자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는 정보영이라고 해요.”

    “시끄럽다. 더 들을 것 없다.”

    역시나 태훈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

    “거기 너. 좋은 날, 좋은 자리 망치지 말고 내 집에서 나가. 어디 주제도 모르고 오기를 와?”

    보영은 다소 놀라운 심정으로 태훈 회장을 보았다.

    그래도 이현의 말로는 자리는 가릴 줄 안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보영입니다.”

    “허어?”

    보영이 태훈의 일갈에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인사하자 태훈이 이 고얀 것 좀 보라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인사를 드리러 왔으니 인사는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태훈 회장이 그녀를 살기등등하게 쏘아보았다. 보영은 맞잡고 있는 이현의 손을 저도 모르게 꼭 잡았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사실 손에 땀이 다 났다. 태훈 회장의 기운은 그녀 같은 햇병아리가 함부로 받아칠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젊은 친구가 담력은 좋네요. 아버지 마주 보고 저렇게 인사하는 젊은 친구는 그다지 없었잖아요.”

    “너 지금 이현이 저놈이 철없이 노는 일에 편드는 거냐?”

    바로 태훈의 분노가 석준에게 쏠렸다. 그러자 석준이 곤란한 듯 쓰게 웃었다.

    그리고 태훈의 횃불 같은 부리부리한 눈이 곧장 그녀에게 향했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다. 너 같은 애들이 이현이를 만나 무슨 일확천금을 바라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이 말이야! 저놈은 잠깐의 감정에 혹해 휘둘릴지 몰라도 내가 그렇게 안 두니까 험한 꼴 보기 전에 그만둬라.”

    “할아버지, 말씀이 심하세요.”

    “너는 닥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말 뼈다귀 같은 계집애한테 홀려 갖고는 이 좋은 날 무슨 짓이야!”

    태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재에 있는 모든 책들이 다 들썩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큰 울림이었다.

    “며늘아!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라. 그래도 이현이 어미가 죽고 나서는 네가 몇 년 데려가 키우지 않았니? 네 아들 같은 놈이 저런 애를 데리고 왔는데 어떻게 말 한마디를 안 해!”

    곧 불똥은 이현의 작은어머니에게 튀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지닌 마른 여자는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이현을 보았다.

    보영은 그 잔인하리만치 서늘한 눈에 숨을 삼켰다. 마치 눈빛만으로 온몸을 못으로 찍어 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님,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보아하니 아버님께 대거리할 만큼 담력도 세고 어른들 앞에서 저렇게 손까지 잡고 있는 걸로 보아 적당히 버릇이 없는 게 어디 가서 지진 않겠어요.”

    “뭐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끝까지 들어 보세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현이 짝으로는 안 되죠. 이현이가 어떤 애인데요. 우울증 약에 찌들어 불우하게 사셨던 아주버님과 술에 의존해 살았던 형님 아래에서 컸는데도 저렇게 반듯하게 컸잖아요.”

    보영은 이현을 보며 냉담하게 말을 잇는 여자를 보며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이현이는 아주 특별한 아이죠. 야구를 참 잘했는데…… 어깨가 그렇게 망가져 버리고 나서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떠나 버린 것 봐요. 독립심이 얼마나 강해요. 그런데 이제 돌아와서는 이 사람이 키워 둔 호텔을 훌륭하게 이어받았죠.”

    ‘그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현의 작은어머니의 화법은 아주 오묘했다.

    “아버님께서 이미 생각해 둔 혼처 자리가 있는데도 데리고 온 게 저런 아이인 것도…… 이현이가 평범한 아이들 속에 섞여 야구만 하며 큰 덕에 편견이란 게 없는 덕분이겠죠. 앞으로의 기업 경영에는 그런 시각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태훈이 작은어머니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이번에 경영 회의에서도 임원진들 속을 뒤집어 놓은 거 아니겠어요. 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이현이가 지향하는 대중적이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호텔이요.”

    ‘교묘하게 사장님을 비난하고 있어.’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이현의 작은어머니는 이현을 세워 놓고 난도질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훈 회장은 안 그래도 그 일로 이현에게 화를 냈었다.

    게다가 이현의 아버지가 우울증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가 술에 의존했다는 사실 역시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곤 있지만 결국 이현도 불량품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렇지. 이현아, 내가 장 실장에게 너도 정신과 상담을 한 번 받아 보라고 권유했는데, 상담은 해 봤니?”

    “정신과라니? 무슨 소리냐?”

    작은어머니는 그녀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저 이현을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주버님과 형님이 불안정하셨고 유년 시절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만큼 이현이의 건강도 걱정이 돼서요. 20년 전과 같은 불상사가 또 일어나면 안 되니 미리 준비해 두는 거죠.”

    ‘저 아줌마가……!’

    보영은 저도 모르게 이현의 손을 으깨 버릴 듯 꽉 잡았다.

    ‘이런 게 어떻게 가족이야? 멀쩡한 조카를 왜 정신병자 취급을 해? 미친 거 아니야?’

    “이현이 너,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거냐?”

    보영은 이현을 힐끔 보았다. 그는 내내 작은어머니의 걱정을 가장한 폭언을 듣고 있었다.

    “문제는요. 너무 건강해서 탈인데요. 안 그래도 장 실장에게 작은어머니의 권유를 듣고 감사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작은어머니가 차갑게 입매를 비틀었다.

    “혹여 무슨 문제가 있다면 바로 내게 알려야 한다. 네 아버지가 그런 문제가 있었다고 너까지 그러면 나는 대체……!”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이현이를 잘 돌보겠습니다.”

    내내 사태를 관망하던 석준이 덧붙였다. 태훈 회장이 복잡한 빛을 띠고 자신의 차남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버젓이 그룹을 이끌어 가고 있는 부회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현을 끌어들인 건 왜지?’

    보영은 의아해졌다. 이현은 태훈 회장의 손자지만 석준은 아들이었다. 장남이 없고, 차남이 이만큼 그룹을 이끌어 왔다면 자연스럽게 물려주는 게 오히려 맞을 것이다.

    “아, 그렇지. 혹시 오면서 거기도 봤니?”

    “네?”

    작은어머니가 앞에 놓여 있던 차를 들어 마시며 시리도록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하실 말이다. 집이 4년 전에 리모델링을 했어도 그 지하실만은 그냥 두도록 내가 아버님께 부탁드렸단다. 네가 힘들고 속상할 때마다 그곳에서 속을 달랬잖니. 네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고.”

    “……그랬죠.”

    이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보영은 뒤통수가 선득해졌다.

    ‘이 집, 이 가족, 저 사람들 모두 이상해.’

    보영은 마치 그녀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진짜로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태훈 회장이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다. 성질대로 화내고 할 말 못할 말 다 퍼부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애는 돌려보내라.”

    “여기 오려고 밥도 안 먹였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할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저는 보영이하고 함께할 겁니다.”

    “이 자식이!”

    “정말 좋은 여자에요. 집안끼리 맺어 사업을 확장하는 일은 시대가 지났죠. 그렇게 힘을 빌지 않아도 태양은 태양이에요.”

    “격이 맞아야 할 거 아니야! 격이!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모를 대학에! 집이 버젓하기를 해, 교양이 있기를 해! 대체 어디 내놓으란 말이야!”

    “내놓으려고 만나나요. 내가 좋아서 만나는 거죠.”

    태훈의 생떼 같은 말에 유연하게 대답한 이현은 조용히 웃곤 덧붙였다.

    “나가 있을게요. 어쨌든 인사는 제대로 시키고 싶어서 온 거니까요.”

    “꺼지라니까!”

    결국 태훈 회장의 손에서 책 한 권이 날아왔다. 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일에게 산재 처리를 해 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보영이 눈을 떴다. 이현의 등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나이 드셨다고 너무 막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노망나셨어요? 보영이, 아직 우리 집 사람 아니에요. 밖에 이야기라도 새어 나가면요?”

    책은 이현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보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맞았나?’

    “그럼 밖에서 봬요.”

    이현은 곧장 그녀를 데리고 서재를 나왔다.

    “괜찮으세요?”

    보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졌다. 광대뼈 부근이 빨갰다. 손이 닿자 이현이 움칫했다.

    “아…… 그게, 멍이라도 들면…….”

    ‘아, 오버했다.’

    보영은 손을 떼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광대뼈를 긁적였다.

    “겉으로나 포악해 보이지, 나쁜 분은 아니야. 던진 책, 종이 재질이 특수한 거라 엄청 가볍거든. 아프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걱정하는 거야? 나를?”

    “네?”

    이현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곤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보영도 그가 보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지트…… 셨다고 했죠? 그리우면 내려갔다가 오실래요?”

    보영은 이현의 작은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물었다. 하지만 이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검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현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냉담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믿어?”

    “네?”

    “아지트?”

    이현이 기가 찬다는 듯 삐딱하게 웃었다.

    “저긴 아지트가 아니었어.”

    “네?”

    그리고 보영은 그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 * *

    푸른 잔디 정원에서는 작은 클래식 음악회가 펼쳐졌다. 고상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고급스러운 음식,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군상들의 집합.

    보영은 그중에서도 스탠드 테이블 앞에 이현과 나란히 서서 생일 축하를 받고 있는 태석준 부회장 부부를 바라보았다.

    “바쁘신 와중에도 오늘 이렇게 초대에 응해 주시고, 축하해 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대단하게 굴 일이냐 싶지만…… 그래도 막상 축하받으니 좋긴 좋네요.”

    석준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보영은 내내 그 옆에 서서 인형처럼 미소 짓고 있는 석준의 부인이자 작은어머니를 지켜보았다.

    “훗.”

    문득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현이 그녀를 보고 웃고 있다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왜 이래?’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 저쪽 좀 그만 봐.”

    “네?”

    이현이 몸을 슬쩍 낮춰 작게 말했다.

    “그렇게 째려본다고 작은어머니 얼굴에 구멍 안 뚫려.”

    보영은 심술궂게 웃는 이현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와 한배를 탔긴 하지만 하루아침에 끈끈한 동지 의식이 생겨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현이 짧게 축약해 들려 준, 태훈 회장의 집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그 누가 들었어도 광분할 것이었다.

    “이렇게 남편의 생일에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먼 길 와서 남편으로부터 호텔을 이어 받아 열심히 하고 있는 이현이한테 고맙네요.”

    축사가 석준에서 작은어머니에게로 넘어갔다. 그녀의 언급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현과 보영에게로 쏠렸다.

    “아시겠지만 저는 이현이의 청소년기 시절 저 애를 키웠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데리고 온 거 있죠. 사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데 저는 아까부터 그 생각 때문에 속이 상해서…….”

    ‘연기를 잘하는 건 가족 내력인가?’

    집 안에서와 달리 이현의 작은어머니는 꽤 사회성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보영에게로 쏠렸다. 웅성임이 이어졌다. 보영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작은어머니의 ‘속이 상해서’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별로고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곧 작은어머니는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쳤다며 서둘러 인사를 마쳤다. 하지만 보영은 그것이 꼭 고의 같았다.

    “눈에 힘 빼. 이것도 충분히 예상 범위 안의 일이었어.”

    이현이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다가 손을 들어 보영의 눈을 가렸다 뗐다.

    ‘자기를 저렇게 조롱하는데 왜 이렇게 자꾸 웃는 거야?’

    보영으로선 알 수 없었다. 의아한 그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처음과는 다른 온기가 돌고 있었다.

    보영은 그와 맞잡은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연기란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손에 익숙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그때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모인 중년 여성 여럿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정신과를?”

    “왜 예전에 그런 소문 있었잖아. 태 사장 아버지가 우울증 있었다고…… 엄마도 술 의존증이었잖아.”

    “아, 그래서 정신과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고 이미 뭔가 시작됐을지도 모르지.”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얼마 전에 아버님이 태훈 회장님 쪽에서 혼담 들어왔다고 나한테 우리 애 이야기하셨었단 말이야. 정말 태 사장이 정신 병력이 있는 거면 어떻게 해?”

    “뭘 그런 걸 신경 써. 태양 그룹인데.”

    “들었잖아. 지금 만나는 여자도 있다던데.”

    “아까 부회장님 사모님 이야기 못 들었어? 회장님이 노발대발하셨다잖아.”

    “그나저나 그건 정말 아닌데…… 정신병자라니…….”

    보영은 이를 악물고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방만 담담하게 보고 있었다.

    이곳에 있자니 자신이 점점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보영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런데 그 소릴 어디서 들었어?”

    “어디겠어. 부회장님 사모님이지. 걱정돼서 얼결에 하신 이야기지만…….”

    그 순간 보영이 이현의 손을 놓았다. 이곳에 와서 참 여러 번 참았다. 인간으로서의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보영?”

    “제가 회장님께 꼭 잘 보여야 하나요?”

    “어?”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니고, 사장님과 제가 잘될 일도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보면 회장님께 잘 보이고 싶어도 잘 보일 가능성이 없으니 상관없을 것 같네요. 아마 장 실장님이 후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장님 얼굴에 먹칠했다고 절 죽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이현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그런 이현을 향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직원이 서빙하는 붉은 와인을 들고 한 곳을 향해 직진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보영은 힘을 주어 가볍게 사람들을 밀치고 가운데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연한 하늘색 정장을 입은 이현의 작은어머니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보영입니다. 아까 집 안에서 인사드렸었죠?”

    “무슨…… 일이죠?”

    “아까 축사할 때 말씀하셨던 이야기로 하도 사람들이 수군거려서, 제대로 보여 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작은어머니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는데요, 20년 전 저희 사장님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아홉 살 난 아드님을 잃은 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이현 씨 탓은 아니죠.”

    작은어머니의 눈에 예의 독기가 바짝 일었다.

    “사고였어요.”

    “이봐요, 아가씨.”

    “저는 물론 그 사고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고를 이유로 부모님을 모두 잃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청소년을 지하실에 가두고 핍박하고 매질할 이유는 없죠.”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열여섯 살의 남자아이면 힘이 얼마나 센지 아세요?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작은어머님께서 하시는 모든 표독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학대를 그냥 받아들였어요. 그땐 정말 자신의 아버지가 사고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봐요!”

    이현의 작은어머니가 정원 곳곳에 배치된 경호원들을 향해 눈짓했다. 보영은 그것을 눈치채고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작은어머니에게 와락 뿌렸다.

    연한 하늘색 정장은 금세 못 쓰게 되었다. 분명 그녀로서는 쳐다도 못 볼 고가의 옷이겠지만 속이 다 시원했다.

    “그거 아세요?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요. 조작된 사건이죠.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그 사건을 조작했던…… 형사를 알거든요.”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급하게 다가온 경호원들이 그녀를 잡아끌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은 곧 떨쳐졌다. 이현이 그녀를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제가 사장님의 연인이라서 이분들이 수치스럽고 속상해할 만한 짓이요.”

    “뭐?”

    보영은 다시 이현의 작은어머니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 욕보이는 짓은 그만둬 주세요.”

    “당신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다 있는데.”

    “뭐……!”

    “장부가 있어요. 우연히 찾았어요.”

    보영이 그렇게 말한 순간 이현이 뒤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합니다. 취했어요. 작은어머니, 죄송합니다.”

    “우웁! 읍!”

    보영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현은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 버린 현장에서 그녀를 끌고 급하게 태훈 회장의 자택을 나왔다.

    너무 당황해서 재일을 호출할 생각도 못 한 그는 한남동의 고급 주택 사이를 그녀를 끌다시피 해서 정신없이 나왔다.

    “사장님……!”

    “무슨 생각이야? 왜 그랬어?”

    어딘지 모를 공원으로 그녀를 데려간 이현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소리 지르듯 말했다.

    “미쳤어?”

    “아뇨.”

    “그런데 아까 그건 뭐야?”

    “화가 났습니다.”

    “왜!”

    “사장님이 그 집에서 그런 취급을 받으니까요!”

    이현의 언성이 커졌고, 보영도 역시 답답함에 목소리를 키웠다.

    “내가 그런 취급을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말했지! 그 집에서 멸시받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사장님을 짓밟을 권리는 아니잖아요! 아닌데! 다 사실이 아닌데! 사장님이 작은어머니의 아이를 죽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 화풀이를 다 받아요! 그것도……!”

    보영은 울컥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장례를 치러야 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사장님도 연이어 부모를 잃은 불쌍한 아이였는데……!”

    제법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보던 이현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저 지하실은 아지트가 아니었어. 속죄의 방이었지. 작은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건 우리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화는 고스란히 내게 쏟아졌어.〉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저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밤새 갇혀 있기도 했고, 맞기도 했고, 폭언을 듣기도 했지.〉

    〈회, 회장님은요? 회장님은……!〉

    〈그때 난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낸 줄 알았어. 그 집에서 태이현으로 살려면, 그나마 날 행복하게 했던 야구를 계속하려면 입을 다무는 수밖에. 그땐…… 사촌 동생이 죽은 게 내 탓 같았거든.〉

    보영은 그 말을 잇던 이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춘기의 학대로도 모자라서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집에서 늘, 끊임없이 정서적인 학대를 받아 온 것이다. 적어도 작은어머니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야구를 못 하게 됐을 때 미국으로 떠나 버렸던 걸까. 그냥 다 버리고.’

    하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다. 전문 경영인으로, 그리고 10년간 갈았던 날카로운 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요. 내가 다 너무 억울한데……!”

    “그러니까 네가 왜 화를 내냐고! 내 일이야! 너는 그냥 네가 맡은 역할만 하면 됐어!”

    “나도 알아요! 이건 과한 거 나도 알아요! 그런데 선을 넘어 버렸어요! 나도 안다고요!”

    보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잘 세팅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는 이현을 보았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냐며, 무섭다며 광분하고 끝낼 정도도 아니었다.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해! 장부니 뭐니 왜!”

    “그러면 ‘S’든 태석준이든 반응을 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반응을 왜 네가 끌어내냐고!”

    “선을 넘었다니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사장님이 신경 쓰여요! 사장님 때문에 심란해요! 그냥 받을 거 받고 줄 거 줄 사이였으면 저도 안 이랬을 거예요!”

    “정보영!”

    “좋아하나 봐요.”

    “뭐?”

    “제가 사장님 좋아하나 보죠. 계속 아니라고, 안 된다고, 말도 안 된다고…… 성격이 얼마나 나쁜데. 그렇게 생각하며 브레이크 걸었는데…… 내가 브레이크를 잘 걸었으면 아까 안 그랬겠죠. 잘 컨트롤했겠죠.”

    이현이 그녀를 멍청하게 보았다. 그녀가 본 중 가장 정신 줄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기대는 없었지만 마음이 아주 많이 쓰려 왔다.

    “보호해 주고 싶었어요. 사실이 아니라고. 주제넘게 일 망쳐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보영은 그대로 허리를 넙죽 숙였다. 시야가 흐렸다.

    ‘말을 뱉자마자 차이네. 하.’

    이현은 말문이 막혔는지 여전히 그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오늘은 일단 돌아갈게요. 10년 전부터 한 준비라 때를 보고 계신 거였잖아요. 이 일로 ‘S’든 태석준이든 움직이면…… 사장님이 이기는 거예요.”

    이현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차인 마당에 고백한 상대와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보영은 공원을 벗어나며 눈가를 눌렀다. 손등이 축축해졌다.

    “아니야. 후회하지 않아.”

    보영은 숨을 들이켰다. 고급 주택가라 그런지 넓은 길에는 쉬이 걸어 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좋았다. 오롯이 전세를 낸 것 같아서.

    “후우.”

    보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막 꺾인 코너 길을 돌았을 때였다.

    보영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뭔가 그녀의 뒤에서 입을 틀어막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의식이 흐려졌다. 몸이 무너졌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 * *

    이현은 근 10년 동안 자신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군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공원을 빠져나가는 보영의 뒷모습에 잠시 머리가 하얘졌던 이현은 마른세수를 하고 옆에 있는 화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였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남들은 관심도 없는 길고양이를 몸을 던져 구하고, 바보 같을 정도로 우직하며 책임감 넘치는 데다가 그가 오랫동안 시달리던 불면의 밤을 한 번에 날려 버린 여자가 고백 비슷한 걸 해 버리곤 도망가 버렸다.

    “하핫……!”

    이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제 마음을 뱉은 보영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작이야 어쨌건 간에, 알고 보니 그와 그녀의 연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혔건 간에 그는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얼마나 속이 깊고, 얼마나 진솔하고, 얼마나 의리 있고 또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알았다.

    그녀를 알아 갈수록 긴 시간 메말라 버린 그의 황량한 가슴에 작은 웃음을 주어 자꾸 눈이 가긴 했었다.

    가끔은 그녀가 예뻐 보이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그러니까 미안함과는 별개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쳐들어 가 다짜고짜 이불을 펴고 누운 거였다. 걱정이 되니까.

    ‘내가 그렇게 마음 쓸 줄 아는 놈인 걸 정보영 때문에 처음 알았지.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마음을 쏟은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오늘, 조부의 자택에서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를 위해 감히 태양에, 태훈에게 그리고 태석준에게 그렇게 대드는 여자는 다신 없을 거다.

    ‘그 구역질나는 집에서 손에 피가 돌았던 건…… 거의 처음이었지…… 아마.’

    이현은 자신의 손을 얽어 매만졌다.

    그 집에 사는 동안, 그리고 그 집을 나와서 이따금씩 방문할 때면 그의 손은 늘 얼음장 같았다.

    남들이 보기엔 볕이 잘 들어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남부럽지 않은 고급 저택이었다. 하루만 살아 봐도 소원이 없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그 집은 이현에겐 무덤 같은 곳이었다.

    배우로서 꽃처럼 피려던 엄마는 그 배경을 등에 업은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로 시들었고, 사업가가 아닌 화가가 꿈이었던 아버지는 정신과 약을 밥 먹듯 먹다가 결국 누명을 쓰고 생을 달리했다.

    ‘복수가 끝나면…… 세상에 의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를 위해 황소처럼 돌진해 과거의 일을 힐책하고 비난하는 보영을 보며 몸에 힘이 다 빠졌다. 그래서 생각보다 늦게 보영을 말려야 했다.

    ‘그런 식으로 감동을 주다니.’

    정말 그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사악한 여자였다.

    내내 보영이 신경 끝에 거슬렸고, 신경이 쓰였고, 놀리고 싶었다. 그래서 계약 연애를 제안했던 걸까. 그도 몰랐던 속마음이 그렇게 시켰을지도 몰랐다.

    “하하…….”

    이현은 입가를 가리며 다시 한번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정철우의 정체를 깨닫고, 보영도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묘한 허탈감이 들었었다.

    필요 이상으로 미안했고, 필요 이상으로 지켜 주고 싶었고, 필요 이상으로 이 일에서 빼고 싶었다. 다칠까 봐.

    그런데 제게 정철우의 일 때문에 미안해할 일 따윈 없다며 그가 지고 있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줬던 여자는 이렇게 앙큼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아, 그만 웃자. 진짜 미친놈 같다.”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보영이 사라진 공원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보영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이 마음을 전해야 했다.

    “정 비서!”

    이현은 공원에서 한남동 고급 주택가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보영을 불렀다.

    조금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도 받지 않았다.

    왜인지 길어지는 신호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디로 간 거지?’

    “정보영! 어디 있어!”

    이현은 이내 한남동의 고급 주택가 사이사이를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보영이 나오지 않았다. 불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현은 숨을 헐떡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일에게 전화했다.

    “형, 혹시 정 비서에게 연락 온 거 있어?”

    ― 아니. 왜? 벌써 만찬 끝났어?

    이현은 쥐 죽은 듯 고요한 동네를 인상을 쓴 채 물끄러미 보았다.

    〈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다 있는데. 장부가 있어요.〉

    보영은 작은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작은아버지, 석준이 있었던가.

    떠올리려 해 봤지만 그의 신경은 모두 보영에게 쏠려 있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현은 전화 너머에서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는 재일을 향해 홀린 것처럼 말했다.

    “형, 작은아버지…… 지금 할아버지 집에 있나?”

    ― 갑자기 네 작은아버지는 왜…….

    “형, 정보영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 무슨 말이야?

    보영이 장부에 대해 언급했다. 석준이 들었다면 똥줄이 탔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석준이 정철우를 죽이면서까지 10년 내리 찾은 건 그 장부였다.

    석준의 거래를 받아들임으로써 경찰로서의 자존심을 버렸던 정철우는 원래 선량한 경찰이었다.

    재일이 정철우의 파트너를 찾았던 당시의 말로는 그랬다.

    원래 석준과 거래를 했던 건 그 파트너였다. 그러나 파트너가 사고를 무마하려는 걸 정철우가 알았고, 석준이 정철우에게까지 마수를 뻗은 것이다.

    자신의 상황 때문에 그 손을 잡은 정철우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석준의 비리를 쫓기 시작했다.

    보영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정철우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석준과 거래를 했다. 그리고 석준은 정철우와 한 거래 내역, 그리고 송금받은 이체 영수증 등을 보관했다. 그게 10년간 쌓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장부였다.

    정철우는 석준이 제 꼬리를 밟았다는 걸 깨달았던 건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한 한국에서의 모든 걸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려던 그에게 가타부타 말없이 장부를 넘겼다.

    장부 속에는 미안하다는 쪽지도 있었다. 그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보영과 많이 닮았을 정철우는 끊임없는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건을 덮었을 정철우가 밉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에게 빚을 갚았다.

    “정보영, 찾아야 돼.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모두 동원해 볼게.

    전화를 끊은 이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붙잡지 않았지? 혼자 있고 싶다니. 그냥 안 된다고 지시만 했으면 됐는데!’

    이현은 그 뒤로도 한참을 한남동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부디 엇나가길 바라며 말이다.

    * * *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은 메스꺼웠고 목이 말라서 쩍쩍 붙었다.

    보영은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흐릿한 시야로 지저분한 콘크리트 벽이 보였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빗자루며 빈 드럼통 같은 것도 보였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부회장님.”

    보영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곳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마르고 왜소한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

    보영은 상대를 알아봤다. 태훈 회장의 곁에 앉아 부드러운 얼굴로 선하게 웃던 남자였다.

    “정신이 들었나?”

    “이게, 무슨……! 이게 뭐죠?”

    “내가 역시 너한테 있을 줄 알았거든. 이번 일은 역시 복잡하게 설계할 필요 없이 그냥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을 쓰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겠어.”

    보영은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손은 뒤로 묶였고 발도 묶여 있었다. 오히려 일어나려 바둥거리다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얼굴을 바닥에 찧은 보영은 아픔을 삼키곤 어떻게든 석준을 보려 했다.

    “내가 시간이 없어. 외국 바이어와 미팅이 있거든.”

    석준은 자신의 손목에 무겁게 차인 명품 시계를 힐끔 보곤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빨리 말하고 끝내자. 어디 있어? 장부.”

    보영은 대답 대신 권태로운 얼굴로 미간을 찡그린 석준에게 물었다.

    “‘S’가…… ‘S’가 부회장님이 맞으신가요?”

    “아아. 나 아니야. 저 친구지.”

    그의 손가락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보영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저 친구가 문자도 보내고, 돈도 보내고, 엄마도 보내고.”

    석준이 노래하듯 하는 말끝에 보영은 움칫 굳었다.

    “네 주변을 아무리 뒤져도 장부가 안 나오길래 네 엄마가 정신 들었을 때 물으려고 했는데…… 정철우가 생각보다 입이 쌌던 모양이야. 나에 대해 알더라고.”

    보영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간병인 말에 의하면 화장실 때문에 병실을 비웠다고 했다.

    그날 엄마의 컨디션은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고 했다.

    ‘그날, 정신이 돌아왔던 거였나? 그래서 지금 어떤 상태인 건지 생각한 거였나?’

    엄마가 만약 정신이 돌아왔던 거라면 자신이 간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거였다.

    “당신이…… 당신이 엄마한테 뭔가…… 한 거예요?”

    석준은 대답 대신 안타깝다는 얼굴로 눈썹을 까닥이곤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정보영 씨, 나는 약간의 통제병이 있어. 모든 상황이 내가 설계한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좀 짜증이 나거든. 그런데 오늘 그건 뭐였어? ‘S’가 이현이 애인으로서 그런 짓을 하라고 시키진 않았잖아?”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장기짝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장기짝이었던 건 몰랐다.

    게다가 석준은 처음부터 ‘장부’ 때문에 그녀를 이용했다는 뉘앙스였다. 엄마를 살리고 싶어 ‘S’의 손을 잡았는데 그게 도리어 엄마를 일찍 죽이는 일이 되고 말았다.

    보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석준의 말간 얼굴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디 있어? 장부.”

    보영은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사람은 대체 뭐야?’

    석준의 얼굴에 사람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보다 원초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를 마치 벌레보다도 못한 것처럼 보고 있었다. 그냥 무기물로 보는 것 같았다.

    “어디 있냐니까?”

    양심의 가책이라곤 쥐뿔도 없는 석준의 얼굴을 보며 보영은 숨이 다 막혔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이 구역질 나는 인간은 대체 뭐야?’

    “아아, 나 바쁘다니까? 장부 어디 있냐고!”

    석준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다소 섞었다. 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엄마……! 사장님……!’

    석준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보영은 인간 같지 않은 석준의 얼굴을 보며 예감했다.

    어쩌면 자신은 다시는 사장님도, 동일도 볼 수 없을지 몰랐다. 그럴 생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보영 씨, 이따가 있을 바이어 미팅이 자그마치 160억짜리거든?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

    “없…… 어요. 없어요, 그런 거…….”

    “장부라고 했잖아.”

    “없어요. 대체 왜 그랬어요? 왜…… 왜 우리 아빠를…… 엄마를……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보영은 결국 울부짖었다. 정말이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아빠를 억울하게 죽이고 아픈 엄마도 죽게 만든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소리를 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미칠 것 같았다.

    “네 아빠? 정철우? 그건 어떻게 알았어?”

    하지만 석준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희한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음…… 장부를 알긴 아는 모양인데.”

    석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병풍처럼 묵묵히 서 있던 남자가 석준에게 장갑을 내밀었다. 그는 붉은색 가죽 장갑을 손에 천천히 끼곤 그녀에게 다가왔다.

    “장부 어디 있어? 내가 말이야, 참 좋은 사람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벌인 판이 틀어지는 건 못 참거든?”

    “이 살인자……! 당신이 사장님 아버지도 죽였지! 사고로 가장해 죽인 거지! 맞지! 이 살인자아아아!”

    “어라?”

    석준이 정말 신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러곤 그녀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소름 끼치는 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혹시……?”

    보영이 석준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석준의 손이 와락 그녀의 머리채를 쥐고 끌어 올렸다.

    “혹시 너 이현이 정말 좋아해?”

    무섭다. 태석준은 자신의 형을, 자신의 아이를, 조카를. 그리고 제 부모님을 죽인 남자였다.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했다.

    그런 사람이 이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보영은 절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맞는데?”

    불시에 석준이 그녀의 머리를 집어 던지듯 놓았다. 머리를 부딪쳤지만 보영은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아, 그럼 혹시 그건가? 이현이가 알아?”

    보영은 움찔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자기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이야. 그래서 네 빚도 갚아 주고, 엄마 수술도 시켜 주려고 한 ‘S’ 엿 먹이고 이현이랑 손을 잡았어?”

    보영은 눈을 굴려 석준을 보았다.

    “이야, 이현이 그놈이 생각보다 똘똘한 모양이네? 재미있는데?”

    50대 초반의 나이에 맞지 않게,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천진하게 말한 석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현이도 아는구나? 장부?”

    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은 몰라요……!”

    “에이, 아는데. 그래야 앞뒤가 맞지.”

    보영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다.

    석준은 이현을 견제는 하되, 어떻게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을 거다. 이현은 그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떠한 티도 내지 않았다.

    “전말은 알았으니 됐어.”

    오싹하게 웃은 석준이 그녀의 머리채를 다시 한번 쥐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보영 씨,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네?”

    그가 그녀를 질질 끌었다. 보영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사실은 머리털이 송두리째 뽑혀 나갈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끌고 어딜 가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될지는 알 것 같았다.

    석준은 그녀를 질질 끌었고 그가 멈춘 것은 폐건물에서도 밖이 훤하게 뚫린 가장자리였다. 그대로 밀면 그녀는 추락사하고 말 것 같은.

    “야옹!”

    “아오, 깜짝이야.”

    「또 저러고 있네?」

    “아, 여기는 다 좋은데 고양이가 들끓어서. 쯧.”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저러고 있어?”

    “뭐?”

    보영이 중얼거리는 말에 석준이 반응했다. 하지만 보영은 고양이만 보았다.

    “무슨 말이야? 말해 봐.”

    「잉? 나한테 말하는 건가?」

    “그래! 너! 나 네 말이 들려! 어? 도와줘! 살려 줘! 아니, 살려 주지 않아도 돼! 지금 그 말……!”

    그때였다. 차 엔진음이 들렸다. 그녀를 낑낑거리며 밖으로 밀어내려던 석준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어? 이현이네? 여기는 어떻게 알았지?”

    보영은 눈을 부릅떴다. 석준이 손짓하자 그녀가 당하는 걸 불구경하듯 보고 있던 남자 둘이 숨듯이 움직였다.

    “안 돼! 사장님! 오지 마세요! 여기……! 읍!”

    입이 틀어막혔다. 석준이 뒤에서 그녀의 목을 조르듯 하고는 싱긋 웃었다.

    “여기 있으면 딱 잘 보일 거야. 있지. 이현이 그놈이 제 아빠 닮아서 생각보다 정이 많거든. 좋아하는 여자가 죽는 걸 보면 자기도 죽겠다고 하지 않을까? 물론 정보영 씨를 정말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준의 목소리는 다소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이 계단가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와 석준을 보곤 우뚝 섰다.

    “이현아, 장부가 너한테 있니?”

    “작은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다는 건…… 다 알았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보영은 눈을 부릅떴다. 이현의 뒤로 숨었던 남자 둘이 접근하고 있었다. 보영은 발작적으로 몸을 뒤척였다. 그녀의 몸을 죄는 석준의 힘이 강해졌다.

    “으으읍!”

    다행히 이현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남자 둘의 공격을 피한 이현이 길고 단단한 몸을 이용해 그들에게 반격했다.

    “재미있지? 원래 구경 중에서도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거든.”

    이현이 몸을 좀 쓸 줄 안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었다. 석준이 저 남자 둘만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점점 이현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며 몸에 상처가 늘어 가는 게 보였다.

    보영은 마구 몸을 뒤척였다. 석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입을 크게 벌려 석준의 손을 아프도록 깨물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끼고 있는 장갑 때문에 통증의 수위가 생각보다 약한 모양이었다.

    석준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옆으로 패대기치곤 혀를 찼다.

    그 순간이었다. 계단 끝에서 재일이 나타났고 뒤를 이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석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장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었다.

    “태이현!”

    그리고 재일의 화려했다던 과거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재일은 남자들 둘과 비등하게 싸웠고 이현이 그녀에게 다가오려 했다.

    “이현아, 하극상인 거냐?”

    “작은아버지, 그만하세요. 끝났어요.”

    “끝나긴 뭘 끝나.”

    “장부, 저한테 있습니다.”

    “역시.”

    “경찰한테 넘길 거예요.”

    “그래?”

    어째서인지 석준은 여유가 있었다. 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석준이 그녀를 잡고 있는 팔을 그대로 밖으로 휘두르면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째서인지 이현은 그녀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그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심지어 이현은 슬그머니 입가를 휘기까지 했다.

    “다가오지 마라. 정말 이 친구가 죽어도 괜찮은 거니?”

    석준이 재차 이현을 협박했다. 보영은 고개를 돌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크게 떴다.

    하얀 에어 매트가 보였다.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에어 매트에 바람을 주입하고 있었다. 아직 많이 빵빵하진 않았다. 하지만.

    보영은 이현 그리고 석준을 번갈아 보았다.

    “어어? 죽는다니까? 우리 생각을 좀 해 보자, 이현아.”

    그녀는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죽지는 않을 거다. 어디 하나 부러지긴 해도 죽지는 않을 거다. 다시 이현을 볼 수 있을 거다.

    보영은 결심했다. 이현이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 그리고 웃은 이유.

    “네가 장부를 믿고 이러는 모양인데, 나는 태석준이야. 태양 그룹 부회장. 내가 계속해서 잡혀 있을 것 같니?”

    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석준을 어깨로 밀쳤다. 석준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다리가 묶여 있기에 움직일 수 없어 보영은 그대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힘을 뺐다. 시야에 하얀 매트가 들어왔다.

    공중에서 맞닥뜨린 석준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보영은 웃었다. 그 식겁한 얼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으로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졌다.

    “받았어! 여기!”

    “빨리 체포해!”

    “어서어서! 여자분! 담요!”

    충분하게 바람이 채워지지 않아 꿀렁거리는 매트 위로 사람들이 올라왔다.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석준을 연행하고 그녀를 일으켜 앉혀 묶인 팔다리를 풀어 주었다.

    보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온몸이 아파 왔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매트에서 내려와 겨우 걸터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정보영!”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영은 이미 이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사장님…….”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꼭 그러다 터질 것처럼 말이다.

    “사장……!”

    보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를 안은 힘이 풀리는가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 이현이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다. 보영은 눈을 깜빡였다. 바로 앞에 이현의 감은 눈꺼풀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찰나였다. 보영은 어안이 벙벙해 멍하게 이현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그러라고 했지만…… 진짜 십년감수했어.”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이현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보영은 멍하게 이현을 보았다. 서글서글해서 보면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던 눈이 울 것처럼 아래로 휘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술 위로 선연한 감각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네…… 이게 뭐……?’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있고 싶다고 가 버리니까 이런 일이 생겼잖아.”

    “네?”

    “하아…… 정말……!”

    이현이 다시 그녀를 깊이 껴안았다. 여전히 터질 것처럼 달음박질치는 이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보영은 이게 뭐지 싶어 눈을 굴리다가 이내 몸에 힘을 뺐다. 너무 피곤했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꿈일까 봐.

    보영은 눈을 감았다. 제 몸을 단단하게 안아 주는 손 안에서 그제야 안도했다.

    * * *

    ― 다음 뉴스입니다. 대한민국을 경제 대국으로 만든 대기업 중 하나인 태양 그룹의 부회장, 태석준 게이트 소식입니다. 나흘 전, 태석준 부회장은 태양 호텔의 정 모 비서를 납치, 폭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요. 오늘 아침 경찰 앞으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김현진 기자.

    ― 네, 김현진입니다. 오늘 아침 경찰 앞으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일명 ‘S’파일이라고 불리는데요, 그동안 태석준 부회장이 일삼은 모든 악행이 기록되어 있는 장부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데요…….

    보영은 답답함에 TV를 껐다. 그녀는 그날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간단한 검사들을 거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고 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증거가 없다…… 면…….”

    “내가 찾은 증거도 모두 정황 증거일 뿐 강한 한 방이 없어. 그걸 찾기 전에 일이 터져서. 그래서 그룹에서 붙여 준 유능한 변호사들이 대거 붙어 싸우게 된다면 오래 살진 않을 거야. 그래서 재일이 형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

    옆에서 답하는 소리에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이현이었다.

    “오셨…… 어요. 전 이제 괜찮은데요.”

    가까이 다가온 이현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문득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통을 이곳저곳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런 것 같네. 머리가 꽤 많이 뽑혀서 잔머리가 많아지겠어.”

    “……괜찮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싸 놓은 가방을 들었다.

    “제가 들게요.”

    “됐어.”

    보영은 한발 앞서 병실 문을 열고 나가는 이현을 멀거니 보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척이나 친절했고 자상했다. 그렇다고 처음의 태이현이 돌아온 것은 아니고, 적당히 까칠하면서 자상했다.

    매일 병문안을 왔고, 일이 바빠 오지 못하면 새벽에라도 왔다. 한번은 자다가 눈을 떴는데 그가 간이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었다.

    〈잘 자고 있었는데 깼잖아.〉

    이현은 인상을 쓰며 그녀의 손을 제 것처럼 가져가 잡고는 다시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는 없었다.

    ‘그건 뭐였지?’

    보영은 그의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행동만 보자면 마치 연인처럼 굴었다. 하지만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먼저 말을 꺼내자니 그녀가 태훈 회장의 자택에서 한 짓이 있고, 태훈 회장의 반응을 생각하니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집으로?”

    “병원비는 얼마나 나왔어요? 제가…….”

    “하아.”

    보영의 말에 이현이 매우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곤 그녀를 쏘아보았다.

    “산재. 됐지?”

    “네?”

    이처럼 마냥 자상하지만은 않았다. 보영은 눈을 굴렸다. 이현이 차의 시동을 걸자 라디오가 켜졌다.

    ― 그럼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태석준 부회장에 대한 의혹은 모두 미제로 남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 일단 정황 증거는 확실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죠. 하지만 본인이 지은 죄에 비해 죗값을 덜 치를 가능성이 높겠죠.

    보영이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자, 이현이 라디오 전원을 껐다.

    “죗값 치르게 할 거야. 반드시. 감옥에서 평생 썩어 나오지 못하도록.”

    “병원 CCTV에서 나온 건 태석준이 아니라고 했었죠?”

    알고 보니 이현도 엄마의 죽음을 의심했었다. 그녀가 엄마의 짐을 가지러 병원에 왔던 날, 이현은 CCTV를 확인하러 왔던 것이었다.

    “응. 다른 남자였고, 그들은 태석준과의 연결점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야.”

    “……자기 손을 더럽히진 않았다는 거네요.”

    “그게 뭐든 확실히 엮어 넣을 수 있는 증거가 곧 나올 거야. 찾을 거야. 반드시.”

    보영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는 이현을 보다 문득 입을 벌렸다.

    〈또 저러고 있네?〉

    그날, 그들을 지켜보던 검은 고양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또 저러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보영은 운전하고 있는 이현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사장님, 집 말고 먼저 갈 데가 있어요.”

    “어디?”

    “거기요.”

    “거기?”

    “그 폐건물이요.”

    이현이 그 재수 없는 데는 왜 가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찾을 게 있어요.”

    “하지만.”

    “사장님! 가야 해요. 아니면 전 택시라도 타고 갈 테니까.”

    “알겠어.”

    그녀가 내려 달라는 듯 문에 매달리자 이현이 그녀의 손을 끌어와 잡고는 운전했다.

    보영은 차머리를 돌리는 이현을 힐끔 보곤 그가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가짜 연인이 필요한 건가?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나쁜 놈.’

    하지만 웃긴 건 그녀도 이현에게 잡힌 손을 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거다.

    보영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 * *

    보영은 폐건물을 네 번쯤 돌았다. 이현도 그녀가 고양이를 찾는다는 이야기에 다소 황당해하긴 했지만 일단 도와주기는 했다.

    ‘어째 점점 사장님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고 있는 것 같다는 건 기분 탓이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그는 사장이고 그녀는 비서였으니까.

    “야옹!”

    「또 뭐야?」

    ‘찾았다!’

    보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활짝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어?”

    「아까부터 봤는데 뭐 하는 거야?」

    “물어볼 게 있어!”

    고양이가 폐건물 기둥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자 보영이 성급히 다가갔다. 그러자 고양이가 도망치듯 모습을 감췄다.

    ‘아, 그렇지.’

    “미안해! 정말 물어볼 게 있어서…….”

    보영은 오는 길에 사 온 생수 뚜껑을 열어 바닥에 가만히 세워 두곤 뒤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야?」

    “응. 깨끗한 물.”

    고양이가 노란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원하는 게 뭐야? 인간들은 절대 공짜로 이런 걸 주지 않아.」

    “그건…… 미안해. 나도 이번엔 원하는 게 있어. 하지만 평소엔 뭔가를 바라고 그러진 않아.”

    「흥!」

    고양이는 그녀를 지그시 쏘아보곤 생수로 가 좁은 구멍 안으로 혀를 내밀었다.

    「으음!」

    고양이가 맑은 물맛에 행복한지 갸르릉거렸다. 보영은 그런 고양이를 따라 엷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뭐야?」

    “아! 그렇지. 그날…… 네가 그랬지. 「또 저러고 있네?」라고.”

    「내가? 그랬나 보지?」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는 반응이었지만 보영이 믿을 거라곤 이 고양이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

    「그 인간? 가끔 여기 사람을 데리고 왔어. 몇 명은 죽기도 했고.」

    “……뭐?”

    「정밀 사이코라니까. 옆에 항상 같이 다니는 남자들 힘이 더 세 보이는데도 늘 마지막은 그 사이코가 하더라니까?」

    보영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만약 석준이 살인을 즐겼다면 사이코패스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그 인간이 여기저기 묻은 시체 때문에 코가 문드러지겠어. 정말. 아! 인간! 네가 그 시체들 좀 치워 줘. 그럼 네가 원하는 거 더 이야기해 줄게.」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녀가 짐작만 했을 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줬고 시체까지 치워 달라고 했다.

    시체.

    그건 곧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어? 고양이 찾았어?”

    갑작스런 이현의 목소리에 목을 축이던 검은 고양이가 후다닥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곧 나타날 거다. 경계심이 짙긴 했지만 그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사장님! 하나 물을게요. 만약에…… 시체가 있다면요? 태석준이 죽였을지도 모르는 시체가…….”

    “그야 증거가…… 그런데 갑자기 시체 이야기는 왜 해?”

    “아뇨.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보영은 대답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 기둥 뒤로 고양이의 검은 꼬리가 보였다.

    “고양이 더 찾아야 해?”

    “……일단 지금은 아니요.”

    그녀가 고양이와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걸 어떻게 해야 고양이로 하여금 시체를 찾았다는 걸 자연스럽게 보이게 할까.

    “그럼 가자. 배고프다. 뭐라도 먹자.”

    고양이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보영의 손을 이현이 거침없이 잡고는 그녀를 이끌었다.

    보영은 한 발 앞서 걷는 이현과 그가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물어볼까?’

    고민은 짧았다. 태석준은 구속되었고 시체를 찾으면 확실한 증거도 확보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와 그녀의 가짜 연애가 지속될 이유는 없지 않을까.

    물론 태훈 회장의 결혼 압박이 남아 있었지만 왠지 이현이라면 꼭 이 가짜 연애가 아니더라도 무마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사장님!”

    보영은 그의 손을 꾹 잡아 멈춰 세웠다. 이현이 그녀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보영은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손을 놓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현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뭔데? 왜?”

    “우리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이현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언제까지…… 가짜 연애를, 이 연극을 하는 건가 해서요.”

    금방이라도 그의 입에서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이제 필요 없지. 그동안 수고했어.’ 같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보영은 눈을 들지 못했다.

    “태석준 일도 곧 정리될 것 같고 애초에 태훈 회장님 때문에 시작했지만……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사장님이라면 태훈 회장님이 들고 올 혼담도 얼마든지 물릴 수 있지 않으신가…… 요……?”

    “정보영.”

    보영이 말끝을 흐리며 끝맺자, 이현이 곧장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말을 할 거면 내 얼굴을 보고 해. 거기 내 얼굴 있어?”

    왜 사람은 이런 감정 앞에선 이렇게 작아지고야 말까.

    “정보영.”

    “……네, ……읍!”

    어차피 오고야 말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보영은 또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보영의 뒤통수를 감아 잡은 이현은 그녀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술을 뗀 그가 눈을 맞추고 물었다.

    “넌 이게 뭐 같아.”

    “네?”

    “내가 방금 뭐 한 거 같냐고.”

    보영은 대답 대신 입술을 멍하게 매만졌다.

    “이거…….”

    “그러고 보니 깜빡했네.”

    이현이 코앞에서 빙글 웃었다. 보영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언젠가 그랬듯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나랑 진짜 연애하자고.”

    “네?”

    “가짜 말고, 계약 말고 진짜.”

    보영은 멍하게 이현을 보았다.

    “저…… 좋아하세요?”

    “좋아…… 아니, 사랑하나 봐. 그런 마음 아니었으면 키스도 안 했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보영은 머리가 멍해졌다. 잠시 후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현을 보았다.

    이현은 웃으며 그런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보영은 인상을 살짝 쓰곤 다시 이현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뒤통수를 다시 감아 당겨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진짜인가? 말도 안 돼. 태이현이 날?’

    그녀가 살면서 이토록 완벽한 남자는 없다고 생각한 게 그였다.

    물론 알수록 성격에 약간의 에러 사항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걷잡을 수 없이 그가 좋아졌다. 그런데 그 마음을 화답해 줬다.

    보영은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그를 보다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광대가 말려 올라갔다. 입술도 느슨하게 말렸다.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소리 없이 웃자 이현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입가를 가리고 웃는 그녀의 손을 잡아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진짜예요?”

    보영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 물었다. 그러자 이현이 대뜸 몸을 돌렸다. 다시 둘의 입술이 닿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갑자기 떨어지진 않았다.

    입술 위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진짜야.”

    「휘이익! 그림 좋다!」

    그 순간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보영은 소리 내서 웃었다.

    그날 입을 맞췄던 것도 그가 미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연기에 너무 몰입해서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병원에 매일 찾아와 밤을 새우기도 했던 것들 모두.

    ‘그래, 그렇게까지 경솔한 사람은 아니지. 조금 꼬이긴 했어도 그런 사람은 아니야. 다 나한테 마음이 있던 거였어.’

    “왜 자꾸 웃어?”

    “웃으면 안 돼요?”

    “아니. 돼.”

    이현이 미소 지으며 얼굴을 떼려다가 갑자기 다시 붙여 왔다. 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장난스러운 입맞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레 더듬어 왔다. 그가 그녀의 목을 받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진짜다.’

    보영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또 주체하지 못했다.

    “키스하는데 웃지 마. 진지하게 해.”

    결국 그가 나무라서 웃음을 멈추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보영이 연신 웃자 이현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곤 입술을 뗐다.

    그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보영도 연신 웃으며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둘이 함께 차에 올랐을 때였다.

    “아!”

    그녀가 탄성을 지르자 이현이 왜 그러냐는 듯 보였다.

    “그…… 장 실장님께는 뭐라고…….”

    “이미 다 얘기했는데?”

    “네? 뭐라고 하세요?”

    그녀에게 제일 무서운 시어머니는 태훈 회장이 아닌 재일이었다. 그가 이현을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뭐라 하기는 뭘 뭐라고 해. 내가 좋다는데.”

    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걱정 마. 공사 구분하는 형이야.”

    보영은 쓰게 웃었다.

    ‘경험상 공사 구분 못 하던데…….’

    하지만 그것 역시 그녀의 직장 생활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해결할 문제였다.

    아마 그녀가 아닌 누구라도 이현의 옆에 있었다면 재일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영.”

    생각을 잇던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이현의 입술이 들이쳤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게 재미있다는 듯 이현이 웃었다.

    그 얼굴에 재일에 관한 걱정이 다 날아가 버렸다. 보영이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이제 그와 그녀는 진짜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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