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하루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보영은 곧장 입구에 있는 스위치를 켜 집 안 불을 밝혔다.
그리고 채 두 걸음 더 들어갔을까.
보영이 자리에 우뚝 섰다.
뭐랄까.
집 안 공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보영은 눈으로 집 안 곳곳을 천천히 훑었다.
‘뭐지……?’
침대 옆 간이 화장대 위의 물건도, 주방 식기도 모두 제자리였다.
침대도 그녀가 아침에 정리해 두고 나간 그대로였다.
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어……?”
나름 약간의 정리벽이 있는지라 늘 썼던 물건은 그대로 다시 두는 습관을 가진 그녀다.
한데 서랍 안의 물건들의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가 이걸 이렇게 뒀었…….”
타닥.
중얼거리던 보영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얼굴을 들고 두리번거렸다.
‘잘못 들었나?’
서랍을 닫으려는데 다시 예의 발을 끄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이 집엔 그녀밖에 없어야 했다.
“누구…….”
타닥. 탁!
가슴이 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베란다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누, 누구……!”
모자챙 아래 가려진 매서운 눈이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도, 도둑……!”
반사적으로 막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남자가 덮치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몸이 굳어서 도망칠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대로 그녀를 강하게 밀치고 곧장 현관을 향해 도주했다.
문이 쾅 열렸고 다급하게 멀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보영은 식탁에 강하게 부딪치고 쓰러진 채 현관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서 문을 닫고, 잠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올 초에 뜨뜻미지근하게 지나간 액땜을 뒤늦게 하는 걸까.
‘먼저 살던 투 룸에 도둑이 든 것도 모자라 이젠 여기까지……!’
보영은 놀라서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마주 쥐고 천천히 주물렀다.
그자가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다. 어서 일어나서 문을 닫아야 했다.
다시 막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는 때였다.
“아아아아악!”
현관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또 불쑥 들이쳤다.
보영은 그대로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그 남자가 무기라도 들고 다시 왔을까 싶어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요?”
검은 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검은 그림자는 이현이었다.
보영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런 이현을 멍하게 보았다.
“정 비서, 뭐예요? 문은 왜 열어 놓고…… 무슨 일이에요?”
“아…….”
어쩔 새도 없이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애써 참아 냈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다독였다.
“그게…… 아무것도…….”
“베란다 문은 왜 열어 뒀어요?”
허락도 없이 문을 닫고 들어온 남자는 활짝 열린 베란다에 그녀를 의아하게 보았다.
“더워…… 더워서요.”
이현이 그게 사실이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게 보나 마나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보영은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입가를 늘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혼자 살아온 세월이 10년이다.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집을 엿보는 변태와 싸운 적도 있고 속옷이 없어진 적도 있었다.
고양이들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범인을 찾아 경찰서에 넘기기도 했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다. 별거 아니다.
“무슨 일로…….”
보영은 숨을 크게 들이켜곤 이현을 향해 물었다.
이현은 여전히 그녀를 미심쩍게 보았으나 보영은 눈가를 슬쩍 문질렀다.
“눈이 건조하네요. 사장님은 건조하지 않으세요?”
“난 괜찮은데요.”
“그러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보영은 침착하게 이현을 지나 베란다로 갔다. 슬쩍 밖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고, 흐트러진 것 역시 없었다.
그녀가 갑자기 돌아오는 바람에 급히 여기 숨은 걸지도 몰랐다.
“약이에요.”
베란다 문을 닫고 돌아보던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현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등을 턱짓했다.
“괜찮은데요.”
보영은 손등의 이빨 자국을 슬쩍 가렸다.
엄마가 어찌나 세게 물어뜯었는지 멍이 다 들 참이었다.
“그러고 작은아버지 생신 식사 자리에 가면 구설수에 오를 거예요.”
보영은 손등을 들어 올려 보였다.
확실히 이현이 선택한 여자가 손등에 이런 화려한 상처를 드러내고 있다면 어떤 말이 돌지 알 수 없었다.
“아, 네. 그럼 꼼꼼히 바를게요.”
이현은 알아서 하라는 듯 얼굴로 말하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던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영은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현관문이 열리면 아까 그 도둑이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꼭 저기가 아니더라도 그녀 혼자 있으면 베란다를 통해서 들어올지도 몰랐다.
‘없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돌아올지도 몰라.’
막 이현이 현관 잠금 쇠를 눌렀을 때였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뛰듯이 이현 앞으로 튀어 갔다.
다급한 발소리에 이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기…….”
보영은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굴렸다.
“왜요?”
이현에게 약한 소리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릿속에서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저 뒤로 밀려났다. 공포가 이겼다.
“저, 그러니까, 야, 약을…… 약을 좀 발라 주실래요?”
“내가요?”
이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에 나비가 할퀴었을 때는 제가 발라 드렸잖아요.”
이현이 희한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 * *
이현이 연고를 묻힌 면봉을 들고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머쓱해하는 태도로 깨물린 손등을 식탁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러자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게로 더 가까이 당기더니 고개를 숙였다.
‘미쳤어, 미쳤어. 정말 미쳤어! 미치려면 곱게 미쳐야지! 이게 뭐야!’
보영은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자조했다.
그를 붙잡은 건 자신이었고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를 박고 싶었다.
‘으엇?’
소리 없이 한탄하던 보영은 어깨를 움칫했다. 손등 위로 부는 약한 바람 때문이었다.
이현이 연고를 바르면서 입 바람을 얕게 불고 있었다. 보영은 그런 이현의 정수리를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의 사장님은…… 뭐랄까? 친절하네, 처음처럼.’
그녀가 붙잡는대도 그는 그냥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상사와 비서, 필요에 의한 구두 계약 관계이자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는 사이였다.
“무슨 일이에요?”
이현이 거즈를 그녀의 손등에 덮으며 문득 말했다.
“아까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는 거 알죠?”
“그게…….”
보영은 입을 벙긋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아까의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거 하며, 날 보자마자 놀라서 주저앉는 거하며. 꼭 정 비서가 아니었어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잖아요?”
“아, 감사합니다.”
보영은 그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치료를 마친 이현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그녀의 손을 아프지 않지만 단단하게 잡았다.
“무슨 일이었어요?”
“……절 사장님 곁으로 보낸 쪽과 관련된 일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당연히 이야기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관련 없는 이야기가 뭔데요.”
보영은 의아해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던가 싶었다.
이현의 시선은 곧았다.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녀가 처음에 알았던 ‘좋은 사람’ 버전의 이현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서 놀랍게도 걱정이라는 감정이 읽혔기 때문이다..
‘뭘 잘못 드셨나? 아니면 순전히 내 기분 탓인가?’
보영은 갈등 어린 마음으로 이현을 마주 보다가 문득 스친 생각에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매우 놀라워하는 그녀의 표정에 이현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보았다.
“경찰……!”
보영은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집 안에 숨어 있던 괴한에 대해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이현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송두리째 날아갔다.
“경찰은 왜요?”
이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도둑이…… 들었었어요.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베란다에 숨어 있었어요. 현관문이 열려 있었던 건 그 도둑이 열고 도망쳐서…….”
보영은 말끝을 흐리며 도둑이 밀쳤을 때 식탁에 부딪쳤던 팔뚝을 매만졌다.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멍이라도 들 모양이었다.
“도둑이요?”
보영은 이현에게 대답하는 대신 휴대폰부터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현이 대답하라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로 인해 일어난 반동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식탁을 짚은 보영은 이현을 보았다.
“도둑이라고? 정 비서가 전에 살던 집에도 며칠 전 도둑 들지 않았어요?”
“네?”
어째서인지 이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보영은 눈을 끔뻑였다.
“전에 살던 집과 현재 집. 연달아 도둑이 든 게 설마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죠?”
보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다친 데는 없어요?”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곤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친 데는…….”
보영은 저도 모르게 팔뚝을 감쌌다. 그러자 눈치가 백단인 남자는 곧장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의 팔을 잡아 소매를 걷었다.
“괜찮아요. 밀쳐져서 부딪힌 바람에…… 멍이 들 것 같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담담하게 말을 잇던 보영은 뒷말을 삼켰다. 그녀의 팔을 보는 이현의 눈빛이 매우 매섭고 살벌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러시지?’
그는 명백히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대체 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지 그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잠결에 사장님 목숨이라도 구했나? 갑자기 왜…….’
지이이이이잉.
영문을 알 수 없어 이현을 아리송하게 보던 보영은 시선을 돌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간병하시는 분이에요. 전화 받아야 하는데…….”
이현과 시선이 마주쳐 보영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여전히 이현이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현이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휴대폰을 받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 이를 어떡해! 다른 게 아니라 어머님께서 갑자기……! 세상에나, 이를 어떡해……!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글쎄…… 아이고……! 빨리 와 보세요……!
간병인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과 울음기가 가득했다.
“바로…… 갈게요.”
보영은 휴대 전화를 들고 있던 손을 툭 늘어트렸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셨나 봐요.”
눈앞이 흐려졌다. 바로 앞에 있는 이현이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그저 까맣게 암전됐다.
* * *
약 두 시간 전.
― 〈이현아,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뭔데 그래?〉
병원에서 돌아와 막 현관문을 열려던 때 재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었다.
― 〈정철우.〉
보영의 아빠였다. 이현은 현관문 안으로 들어와 통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 〈당시 정철우가 쫓았던 범죄자를 찾아서 이야기를 해 봤는데…… 돈을 받았다더라. 그쪽으로 정철우를 유인하라고 말이야.〉
분노와 좌절감이 동시에 그를 엄습해 왔다.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대로야?〉
―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 〈정철우는 사망 직전, 비리 경찰로 내사과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어. 무슨 일인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 찍힌 모양이고 제대로 곤욕을 치렀던가 봐. 그 이유는 너도 알겠지만…….〉
〈내게 준 장부 때문이겠지.〉
― 〈그래. 그리고 하나 더. 정철우는 20년 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현장의 초동 수사를 맡았던 형사였어.〉
〈……뭐?〉
필요에 의해서 시작한 조사는 20년 전 ‘그 사건’까지 불러들여 버렸다.
―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려고 당시 정철우의 파트너였던 형사를 찾았어. 내일 찾아가 볼 생각이야. 하지만 분명한 건…… 정철우가 죽은 건 그 사람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증거만 없지 확실할 거야. 왜 하필 정 비서인지…… 알겠네. 장부를 갖고 있었던 정철우의 딸이라서.〉
― 〈아마 그렇겠지.〉
전화를 받았을 때도 너무나 ‘그 사람’ 같은 행태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가장해 정철우도 억울하게 죽었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10년 전 한국을 등지려는 그의 앞에 낮도깨비처럼 나타나서는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안겨 준 남자를.
‘그 사람’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건 자기에게 어떤 해악이 돌아올지 몰라 묻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 정철우는 달랐다.
〈형, 나 정보영한테 진짜 못되게 굴었는데.〉
― 〈……그런데?〉
〈정철우는 장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어야 했을 거야.〉
― 〈그래서?〉
〈정보영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 〈야, 이현아. 그건……!〉
〈형, 정보영은 꿈에도 모를 거야. 아까도 자기 아빠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어. 그립다고. 그런데…… 우리 집안 때문에 죽었어.〉
―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단호하게 자르는 재일의 말에 이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또 누군가 죽었다. 내내 독하게 유지해 왔던 마음이 아주 조금 부스러져 내렸다.
〈형, 그 빌어먹을 인간 때문에 나도 우리 부모님을 잃었어. 정보영 역시…… 자기 아빠가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아픈 엄마를 한평생 등에 업고 언제 고꾸라질까 겨우 버티면서 살아왔어.〉
― 〈뭐?〉
〈하아. 정말…… 지랄 같다.〉
그의 깊은 한숨에 재일도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미국에서의 긴 세월을 버텨 왔는지, 얼마나 기를 썼는지 모두 곁에서 지켜봐 온 재일이다.
〈정보영, 좋은 여자야.〉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미안하면 일이 모두 끝난 후 적당히 보상해 주면 돼.〉
〈보상? 그러면 그 인간이 하는 짓하고 다를 게 없잖아. 돈 몇 푼이면 해결돼?〉
― 〈그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는 알아.〉
재일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마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 뱉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음 편하게 대충 생각하고 말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픈 엄마를 20년이나 등에 업고 있었다는 것,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단단히 성장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족을 책임지려는 것.
〈파트너라는 사람 만나고 나면 내용 바로 보고해 줘.〉
잠시 말 사이에 틈을 뒀던 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눈을 감은 채 현관에 기대서 있다가 문득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최근 얼결에 키우게 된 고양이 나비 때문에 집에 늘 불을 밝혀 두었다. 복도 끝에서 나비가 그를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고양이란 참 신기한 동물이었다. 가끔은 나비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보영은 나비를 정말 사람처럼 대했다.
말을 걸고, 대답을 하고, 마치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눈짓하며 말이다.
〈아. 손등.〉
이현은 보영이 제 엄마에게 손등을 깨물렸던 것을 떠올렸다. 피가 났던 것 같았다.
장식장에 둔 구급상자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었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보영을 발견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돌아섰다. 하지만 겁에 질린 보영은 결국 그를 붙잡았고, 대화가 이어지던 와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자꾸……!’
그들은 보영의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현은 넋을 놓은 채 텅 빈 인형처럼 앉아 있는 조수석의 보영을 힐끔 보곤 이를 사리물었다.
병원에 다녀온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날아온 비보는 무척이나 갑작스럽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정 비서.”
그가 불렀으나 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 비서, 정신 차려요.”
이번에도 보영은 응답하지 않았다.
“정 비…… 아니, 정보영!”
이현은 손으로 보영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보영이 그를 보았다.
집에서는 눈물이라도 흘렸지, 지금은 메마른 눈으로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젠장……!’
이제 보영을 보면 그 남자가 떠올랐다. 정철우.
좋아하던 야구도 그만두고 미국으로 쫓겨나 유배 아닌 유배를 가야 했던 그에게 살 의지를 심어 넣어 준 그 남자.
지금의 보영은 실이 끊어진 연 같았다. 가끔 예쁘게 웃기도 하고, 그를 은근슬쩍 먹이기도 했지만 고양이를 돌볼 때는 아이 몇은 키워 본 사람처럼 너그럽고 생기 있는 모습이었던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상조는 있어요?”
“……네?”
“상조요.”
그가 데려다준다고 나서는 동안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간호사실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보영 엄마의 부고를 알려 왔다.
“장례요. 정신 차려요.”
“아…… 상조…… 상조 번호가…….”
다행히 상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터치하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보영의 손을 꽉 쥐었다.
“우선 가입한 상조가 있으면 상조에 전화해서 부고를 알려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릴 만한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도 연락해요.”
그는 마치 보영에게 힘을 실어 주듯 천천히, 부드럽게 말했다. 보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상조, 그리고 동일에게 연락을 했다.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병원에 도착하자 보영이 차에서 내려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짧은 사이에 보영의 얼굴은 지나치게 핼쑥해져 있었다.
‘우리 집안만 아니었으면 지금 이 순간의 무게를 나누어 질 아버지가 여전히 정보영 옆에 있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현은 차에서 내렸다. 그도 20년 전, 18년 전에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었다.
그는 그래도 할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이었고,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지만 일사천리로 장례를 진행했으며 손자의 곁을 지켜 주었다.
“사장님?”
그는 차체를 돌아 보영의 앞에 마주 섰다.
“같이 가요.”
“네?”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보영의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영은 급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현은 그런 보영의 뒤를 따라갔다. 그동안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한편 한 가지 사실을 냉정하게 떠올렸다.
‘정보영이 이 일에 뛰어든 건 자기 엄마 수술을 위해서였어. 이젠 그럴 이유가 없겠지.’
‘그 사람’과 엮이면 좋을 일이 없었다. 정철우는 그에게 비밀리에 장부를 건넸고, 엉뚱한 곳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보영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건 정보영에 대한 부채 의식일까 아니면…….’
이현은 하얀 천이 덮인 엄마의 시신을 확인하고 어지러운 듯 휘청이는 보영의 어깨를 뒤에서 잡아 지탱해 주었다.
보영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보영이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는 보영의 어깨를 단단하게 잡으며 그녀를 지탱하듯 가까이 다가섰다.
“지금은 울어도 돼요. 필요한 연락은 취했으니까. 지금 울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엔 버텨요.”
보영이 그를 향해 왜 자꾸 이러냐는 얼굴로 본다. 이현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어제까지 저를 제멋대로 휘두르려던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으니까.’
“나는 지금 정 비서 남자 친구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지금은 그들을 지켜보는 눈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이현은 모른 척하며 뻔뻔하게 굴었다.
사실 무슨 이유든 상관없었다. 지금만큼은 여기 없는 정철우 대신 보영을 지탱해 주고 싶었다.
“정보영, 울라니까.”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보영은 끝까지 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지만 몸의 떨림으로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숨죽인 그녀가 기나긴 시간 동안 아등바등 붙잡고 있던 책임감이란 끈을 내려놓았음을.
* * *
사인은 심정지로 밝혀졌다.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외동딸이었던 엄마에게는 먼 친척도 없었을뿐더러, 긴 시간을 투병해야 했기에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해 온 지인 역시 별로 없었다.
“보영 씨, 상심이 크겠지만 잘 추슬러야 해.”
보영은 조문을 온 전 직장 동료들과 마주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복도 건너편 접객실에 지난 이틀 내내 얼굴을 비치고 있는 이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는 재일과 함께였는데 오늘은 혼자였다.
‘언제 온 거지?’
이현이 달라졌다. 이틀 전을 기점으로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날카로움과 까칠함이 사라졌다.
눈이 마주치자 이현이 마치 밥은 먹었냐는 듯 자신의 앞에 있던 종이 밥그릇을 들어 보였다.
보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묘한 기분에 양손 끝을 얽어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저러는 건가?’
그녀가 그의 이중성을 알기 전처럼 조금은 다정하고,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친절한 모습이 그녀로 하여금 혼란을 야기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나? 이유 없이 저럴 사람은 아닌데.’
생각을 잇던 보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몇 시간 뒤에는 발인이었고, 그러고 나면 엄마를 화장해 아빠가 있는 납골당에 모실 것이다.
보영은 고개를 돌려 빈소의 영정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초상화로 대체했다.
‘S’로부터 그림 도구를 선물받았을 때, 엄마는 곧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초상을 몇 장 그렸다고 요양 병원 간호사가 전해 왔다.
‘갔네…… 이렇게 갑자기.’
솔직히 엄마가 ‘엄마’로 존재했던 건 보영의 여덟 살 겨울 무렵이 마지막이었다. 그해가 지나며 엄마는 ‘엄마’이기보다 꼭 챙기고 돌봐야 하는 ‘아이’ 같아졌다. 보영만 절대적으로 양보하고 이해해야 했다.
이따금 엄마의 정신이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드물었던 기억이 좋았다.
언제 중학생이 되었냐며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를 슬프게 바라보았던 엄마.
또 어떤 날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자신을 꼭 닮아 예쁘다고 기뻐했던 엄마.
그녀가 없는 사이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땐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정성 가득 적어 주었던 손 편지.
또 그다음엔 갑자기 사라진 아빠의 자리에 슬퍼하기보다 그녀를 안아 주며 울어도 된다고,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던 목소리.
‘엄마와의 기억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보영은 시큰거리는 코끝을 훌쩍이곤 감정을 가라앉히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벼랑 끝에 선 그녀에게 ‘S’가 손을 내밀고, 서 교수의 수술도 확실시되었을 때는 엄마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엄마 때문에 힘든 날도 많았지만, 엄마 때문에 힘을 내서 살 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S’가 내민 지푸라기의 정체가 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절박하게 잡았다.
‘신호라도 주지. 일을 해야 먹고산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네. 미안해서 어떡해?’
어느새 흐릿해진 시야에서 물이 투둑, 떨어졌다.
‘엄마한테 못한 것만 생각이 나.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게 나쁘게 굴었던 것만 떠올라. 조금 더 잘할걸. 조금 더 자주 찾아갈걸. 조금 더…….’
그때였다.
“야! 정보영!”
보영은 그녀의 이름을 험악하게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부고를 전한 이후 내내 빈소에 함께 머무르며 장례를 진행했던 동일이 얼굴이 검붉어져서는 빈소 안으로 깡패처럼 들이쳤다.
“삼촌,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소란에 접객실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시선도 우르르 쏠렸다.
“사실이야?”
어쩐지 동일은 매우 화가 난 듯 보였다. 보영은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동일을 보았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동일이 화를 내는 걸 보지 못한 탓이었다.
“삼촌, 뭐가……. 왜 이래? 여기 어딘지 몰라서 이래?”
보영은 일단 동일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동일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동일이 마치 욕이라도 퍼부을 것처럼 그녀를 살벌하게 쏘아보았다.
“삼촌, 나가서 얘기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직한 직장!”
“어?”
“태양 그룹 계열사라고 왜 이야기 안 했어! 저 새끼가 태이현이라고 왜 말을 안 했냐고!”
보영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가 어떻게 거기서 일을 해!”
보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동일이 마치 발작하는 것처럼 목에 핏줄을 세워 소리를 버럭 질렀기 때문이다.
“네가 어떻게 그래!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네가……!”
“삼촌……?”
물론 그녀는 동일에게 자신이 이직한 직장이 태양 호텔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평소 동일이 태양 그룹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S’의 일 때문에 지레 찔려서였다.
“네가 지금 어디서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이 멍청아!”
동일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눈자위가 붉게 충혈된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긴 빈소입니다. 진정하시고 나가서 얘기를……!”
퍽!
“꺄악!”
접객실에서 상황을 보고 넘어온 이현이 동일을 말리려는데, 이현을 본 동일이 대뜸 주먹을 날렸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보영은 놀라서 얼른 이현에게 다가갔다. 불시의 습격을 당한 이현이 동일에게 맞은 턱을 손으로 살짝 누른 채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이 와!”
“삼촌, 정말 미쳤어?”
보영은 턱을 돌리며 괜찮은지 확인하는 이현을 보곤, 그를 보호하듯 동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야, 정보영…… 이 새끼가…… 이 새끼가!”
동일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곤 가타부타하지 않고 보영의 손목을 낚아채 빈소를 나갔다.
등 뒤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보영은 평소 같지 않게 힘을 행사하는 동일을 따라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로 이현이 보였다.
‘괜찮으신 건가?’
유독 붉게 변해 버린 볼 때문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 * *
동일은 그녀를 데리고 장례식장 뒤편, 인적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보영은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머리끝까지 솟은 화를 어찌할 줄 몰라 제 머리를 쥐어뜯듯 쓸며 열을 식히는 동일을 멀거니 보았다.
“삼촌, 왜 이래?”
동일은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열 일 제치고 달려와 그녀와 함께 밤을 새우며 빈소를 지켰다.
그녀처럼 빈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접객실에서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문객들을 접대하며 그녀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자리를 메워 주었다.
고맙다는 마음으로는 절대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그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말이다.
“후우……! 아아악!”
보영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를 거칠게 쏘아본 동일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기 때문이다.
“삼촌, 진짜 미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어.”
동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보영,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피하지 말고, 말 돌리지 말고 사실 그대로.”
“삼촌.”
“형수님, 대학 병원으로 옮겨서 서 교수 수술 받게 된 거. 네가 옛날부터 줄 서서 그럴 수 있었다고, 운이 좋았다고 얼버무렸던 거 다 사실이야?”
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네가 대한민국에 있는 그 많고 많은 기업들 중에 하필이면 태양 그룹 계열사인 태양 호텔로 이직하고, 그렇게 좋은 사택에 살 수 있게 된 것도 운이 좋아서냐?”
“삼촌.”
“너 나 모르게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동일이 그녀를 힐책하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몰리니 보영으로선 조금 억울해졌다.
동일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동일이 그녀를 돌봐 주고, 엄마의 병원비도 일부 도와주었었다. 그럴 의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과거는 청산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인데 속이 시커먼 일에 관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일에겐 비밀로 했다.
“네가 이러면…… 내가 나중에 죽어서 대체 형님을 어떻게 보냐?”
동일이 얼굴을 이지러뜨렸다. 보영은 말문이 막혔다.
동일은 그녀가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정보원으로서 여러 가지 형사 사건에 대한 정보를 물어다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몇 번, 아빠가 동일의 사정을 헤아려 눈을 감아 주기도 하고 온정을 베풀면서 범죄자와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늘 동일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사람은 아빠였다.
〈형님은 이번에 또 내 덕분에 실적 좀 올리겠습니다?〉
〈너 같은 피라미가 무슨 실적이야. 잔챙이 짓 좀 그만해. 교도소 들락거리는 것도 힘들지 않냐?〉
서로 그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허물없었고 가까웠다.
나고 자라며 배운 짓이 사기라고, 그 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일을 늘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제 손으로 잡아넣고도 동일이 출소하는 날이면 두부를 사 들고 마중을 나가는 게 아빠였다.
“내가 대체 형님 얼굴을 어떻게……! 봐!”
동일이 몸부림을 치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보영은 이를 악물었다.
동일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가 이성을 찾고 이유를 말하길 기다렸지만 그녀도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내 이직에 아빠 이야기가 나와? 왜 삼촌이 아빠 얼굴을 못 보는데?”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다른 데도 아니고 태양이니까!”
“그러니까 왜? 아빠도 태양 그룹 싫어했어? 삼촌처럼?”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 이유를 말해!”
“네 아빠가 어쩌다 죽었는데! 왜 죽었는데!”
보영은 난데없는 말에 황당해졌다.
“지금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사고로 돌아가셨잖아, 공무 중에!”
“넌 그걸 믿어? 정철우가 공무 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정철우가?”
“그게 사실인데 뭘 믿고 말고 해!”
“야! 이……!”
동일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을 삼켰다. 보영은 눈을 부릅뜨고 동일을 보았다.
평소에도 동일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는 했지만 그래도 삼촌이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내가 태양에서 일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
“네 아빠가 그 빌어먹을 태양 때문에 죽었으니까! 거기서 네 아빠를 죽였으니까! 네가 상사로 모시고 챙기는 그 태이현 새끼가 태양가 핏줄이니까! 그게 문제야! 이 멍청아!”
보영은 자신의 앞에서 핏대를 세우며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동일에게 더 이상 반박할 핑계를 찾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지금 뭘 들었는지 다시 한번 천천히 곱씹었다.
“……뭐?”
“네 아빠가……! 정 계장님이! 철우 형님이…… 빌어먹을 태양가 비리 캐다가 죽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벌써 10년이 지났어. 그랬으면 경찰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멍청아, 생각을 해! 겉보기에 네 아빠는 순직한 거였어! 그런데 네 아빠가 있던 그 서의 서장은 왜 연금이든 뭐든 아무런 보상도 안 해 줘? 왜 네 아빠 죽음에 대해 조사를 안 해? 왜 그냥 덮었을까? 너, 형님이 죽기 전에 내사과에서 비리 수사 받았던 건 알아?”
“뭐……?”
“다…… 다 그 태양가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을 잇는 동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억울했는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보영은 멍하니 동일을 보았다. 지금 동일의 이야기가 사실처럼 들리지 않았다.
‘태양’이라는 기업 이야기만 나오면 재수 없다며 채널을 돌려 버리고, 홀로 ‘태양’ 제조의 물건을 모두 불매 운동 하며 유난을 떨었던 동일이다.
“……왜 그때는 아무 말도 없었다가…… 왜 이제야…… 해?”
“남은 평생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너한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냥 최대한 멀리 하는 게 맞다고…… 나도 형수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엄마도…… 알아?”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얘기했었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보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넋을 놓고 동일의 얼굴을 보았다.
“태양가는 범이야. 호랑이라고. 우리 같은 하찮은 게 덤벼 봤자 그냥 꿈틀도 못 한다고. 짓밟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그게 현실이니까……!”
동일이 결국 팔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곤 그녀를 등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이 깊었다. 마치 보영의 머릿속처럼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걸 믿으라고?”
보영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동일의 이야기는 막장으로 쓰인 한 편의 삼류 영화 같았다.
동일은 대답 대신 짙은 한숨만 쉬었다. 보영은 멍하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S’라는 사람이 있어…….”
보영은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한층 감정을 가라앉힌 동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 내게 먼저 연락을 했어. 내가 필요한 걸 알고 있다고, 도와줄 수 있으니까…… 이직을 해서…… 사장님 밑에서 일을…….”
“‘S’? ‘S’가 누군데?”
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하아, 누군지 모른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이렇게 대책 없는 애였어? 생각 없는 애였어? 어?”
동일이 또다시 흥분하려 했다. 하지만 보영은 더 이상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삼촌…… 아빠에게 대체 무슨 일이…… 왜…… 어째서…… 사고가 아니었다고?”
보영은 두 손을 모아 올려 입을 가렸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지난 10년 내내 사고인 줄로만 알았다. 경찰 내부 사정으로 일이 꼬여 아무런 보상도 해 주지 못한다 했을 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그 처리 과정을 도와줄 만한 어른도 주변에 없었다.
“어쩌다가…… 왜……?”
눈앞이 그렁그렁했다. 동일은 차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나는 말 못 해. 이건 네 아빠가 죽을 때까지도 너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한 거야.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삼촌,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지.”
보영은 다그쳤다. 하지만 동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을 회피했다.
“삼촌……!”
보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 준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날아들었다.
“정 비서 아버지가 내사과에서 조사를 받은 혐의가 뇌물 수수였기 때문이에요.”
보영은 고개를 돌렸다. 이현이 거기 서 있었다.
* * *
“……뭐라고요?”
“정 비서 아버지는 20년 전에 한 교통사고의 초동 수사를 맡았어요. 그리고 곧 그 교통사고가 고의적으로 일어났다는 증거를 찾았죠. 하지만 입을 다무는 대가로 돈을 받았어요.”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인지 모르겠다고 보영이 생각했다.
“……네?”
“20년 전…… 정 비서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요양 병원에 가야 했을 때와 시기가 겹치죠.”
보영은 동일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동일은 마치 이현의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정 비서 아버지는 돈이 필요했고, 결국 익명의 인물에게 뇌물을 받고 사건이 단순 음주 운전으로 남도록 조작했죠.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그 일로 정 비서 아버지는 내사과 조사를 받은 겁니다.”
“삼촌.”
이현이 말하고 있었지만 보영은 동일을 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빠가 사건을 덮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 아빠가? 말도 안 돼……!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인데. 그건 말도 안 돼!’
하지만 부정하는 그녀의 속내와 달리 동일은 이현의 말을 인정했다.
“……그걸 어떻게 안 거요?”
“오늘 오후에 보고받은 사항입니다. 그 당시 정 비서 아버님의 파트너를 찾아 사실 확인을 했습니다.”
이현의 담담한 말에 동일이 환멸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도 여길 와? 낯짝 한번 두껍기는. 누가 태양가 아니랄까 봐. 됐으니까 썩 꺼져!”
“아니요. 정 비서도 이미 발을 뺄 수 없어요.”
“이 새끼가……!”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S’가 스쳤다.
“서동일 씨도 절 적대하는 건 그만두시죠.”
“너 미쳤어? 나는 당연히 널 적대하지! 너도 그 빌어먹을 태양가의……!”
흥분해서 말을 잇던 동일의 입이 문득 다물렸다. 이현으로부터 느껴지는 짙은 살기 때문이었다.
“20년 전, 정 비서 아버지가 덮은 그 사고가 정확히 어떤 사고인지는 아십니까?”
“그건……! 그쪽 아버지가 음주로……!”
“조금 전에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정철우 씨의 과오 말입니다. 그 사건은 조작됐죠.”
이현의 목소리에는 깊고도 섬뜩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건 평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좋은 사람’인 이현도 아니었고, 가면을 벗은 ‘성격 나쁜’ 이현도 아니었다. 보영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이현을 보았다.
너무 많은 사실들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감고 싶었지만, 반드시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들이기도 했다. 피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가해자는 내 아버지인 태석훈이었고, 피해자는 겨우 아홉 살이었던 사촌 동생과 고모…… 그리고 채 태어나지도 못하고 세상을 등져야 했던 고모의 아이와 고모부였습니다.”
보영은 이 모든 소리가 섞여 먼 데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임신 중이었던 고모의 차를 일부러 박은 것도 아니고요. 물론…… 작은아버지는 생각 못 했겠죠.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 차 뒷좌석에 숨어 있는 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보영은 멍하게 생각했다.
‘내가 본 그 어떤 모습도 진짜 태이현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저게 사장님의 맨얼굴일지도.’
이현의 서늘한 말투에서 채 삼키지 못한 상처가 드러났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쪽 집안싸움 때문에 애꿎은 우리 형님만……! 그 이후로 평생 죄책감에 사셨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하셨다고!”
“압니다.”
이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뭘 안다는 걸까?’
보영은 애써 자신에게 던져진 ‘사실’이라는 조각들을 하나씩 잘 맞추어 그림을 완성해 보려고 했다.
“그때 그 사건은 결국 음주 운전으로 마무리됐고, 아버지는 그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사촌 동생도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고 고모 역시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이를 잃었죠. 우리 아버지는 최악의 살인자가 됐어요.”
“그러니까 그건 그쪽 사정……!”
욱한 동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이, 보영이 중얼거렸다.
“……조작?”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아빠는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경찰이었다. 말이 안 됐다.
“정 비서 아버지의 파트너 말로는 당시 정철우 씨는 돈이 정말 절박하게 필요했다고…… 하던데요.”
‘돈?’
20년 전 그녀는 여덟 살이었다. 경제 상황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렵게 살았던 기억은 없었다.
나중에 크고 나서야 경찰의 월급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과 엄마의 요양 병원비가 보험 수급이 안 되어서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감당했었지?’
보영은 이현을 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돈’이라면 설명이 가능했다.
“혹시…… 혹시 제게 접선한 ‘S’가…… 사장님 작은아버지인…… 태석준 부회장님인가요?”
“나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 소리에 보영이 잠시 휘청였다. 발밑이 어지러웠다.
궁금했었다. 왜 ‘S’는 하필이면 그녀를 선택한 건지.
하지만 이제 알았다. 이현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녀의 아빠가 정철우였기 때문이다.
‘태석준 부회장이 사건을 덮으라며 아빠에게 돈을 줬고, 아빠는 그 돈을 받고 적당히 음주 운전으로 마무리해 무마했다? 그럼 아빠가 그렇게 된 건 태석준 부회장을 추락시킬 산 증인이었기 때문인 건가?’
보영이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정보영 상주님! 계십니까! 어디 계세요!”
그 순간 멀리서 보영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장례식장 뒤편에 나타났다.
“아, 여기 계셨네요. 몇 시간 뒤 있을 발인 때문에요. 지금 잠시 같이 가 주셔야 해요.”
상조 회사 직원이었다. 보영은 서둘러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다행히 상조 직원은 그녀가 엄마의 부고로 인해 얼굴이 엉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삼촌분도 같이 가실 건가요?”
“아니요.”
보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보영은 걸음을 서둘러 이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우뚝 멈춰 섰다.
“삼촌.”
보영이 상복 치마를 꽉 부여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에 애써 힘을 실어 말했다.
“예, 아니오 둘 중에 하나만 말해 줘. 사실만.”
그녀는 동일을 돌아보지 않았다.
“태이현 사장님 말이 맞아?”
“보영아.”
“예, 아니오. 하나만 해.”
등 뒤에서 동일이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순간 대답을 직감했다. 보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아.”
보영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그러곤 이를 악문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상주였고, 지금 당장은 엄마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러니 버텨야 했다.
* * *
보영은 가슴 앞에 엄마의 영정 초상화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아빠를 모신 납골당에 엄마를 나란히 모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차였다.
버스 중간쯤에 앉은 이현이 야속하게도 한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이며 가슴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저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그녀의 인생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지 몰랐다.
〈……널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어. 형수님도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그냥 찍어 누르는 대로 찍소리 말고 살자. 발끈하지도 말자. 능력도 없는데 죽자고 물어뜯는 건 결국…… 나만 죽는 꼴이다. 그랬다.〉
화장터에서 엄마의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동일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금 전에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자기 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정철우 씨의 과오 말입니다. 그 사건은 조작됐죠.〉
‘아빠가 사고를 조작했다. 돈 때문에.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사장님의 아버지는 음주 운전으로 자신의 핏줄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자가 되었다…… 그래서 사장님은 살인자의 아들로 집안에서 멸시를 받는다……?’
아귀가 들어맞았다. 더불어 일전에 사장실을 찾았던 하랑 이노베이션의 대표 태인희가 어째서 그렇게 이현에게 독한 말을 퍼부었는지 납득이 됐다.
경찰 조사 결과를 받아들였다면 인희는 이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큰오빠 때문에 평생의 배우자와 배 속의 아이를 잃은 것이다.
언젠가 기사를 읽은 적 있었다. 태인희 대표는 젊었을 때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에 장애가 생겼다는 기사였다.
태양 그룹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얼추 그쯤이었던 것 같다.
‘그 사고였던 걸까?’
보영은 가슴에 안은 영정 초상화를 꽉 틀어쥐었다.
“보영아, 미안하다.”
멍하게 생각을 잇던 보영이 눈을 돌렸다. 버스는 이미 출발해 달리고 있었다.
“뭐가?”
“형수님 영정 앞에서 그렇게 개차반으로 군 거, 그리고 너한테 소리 지르고 또…… 지금까지 입 다물어서…….”
“……날 보호하려고 했다며.”
보영이 다소 헛헛하게 대답했다. 동일은 잘못이 없다. 그저 아빠의 부탁으로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었던 것뿐이다.
“이렇게 알게 할 생각은 없었어.”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지.”
“지금이라도?”
보영은 공허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더 이상 꼭두각시 인형 놀이는 안 할 거야. 이제는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S’는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연락해 왔지만 보영은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럴 경황이 없었고, 그다음엔 사실을 알게 됐기에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태양 그룹은……?”
“우리는 지렁이도 못 되는 거지?”
“어?”
“억울해도 꿈틀할 수조차 없는 거잖아. 상대가 상대인 만큼.”
“보영아.”
“그런데…… 삼촌, 그래도 너무 억울해……!”
보영은 알았다. 10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뭔가 대단한 재주가 있어서 혹은 엄청난 천재라서 그녀가 세상의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뭐가 달라도 달랐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였다. 억울해도 상대가 태양 같은 거대한 하늘이라면 제 살을 뜯어 먹으며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물도 아까웠다. 보영은 메마른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의 부고를 안타까워하며 장례를 도울 사람을 보내겠다는 ‘S’의 마지막 문자에 답장을 하려 했다. 모두 그만두겠다고.
하지만 채 한 글자도 치지 못하고 휴대폰만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이제 나 혼자뿐이야. 이젠 지켜야 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어. 태양 같은 거물에게 대들었다가는, 꿈틀하다가는 그대로 죽는다고? 그럼 그냥 죽지 뭐.’
보영은 생각했던 말과는 다른 답장을 ‘S’에게 보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일은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빚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 * *
따로 정리할 짐도 없었다. 보영은 장례를 끝낸 저녁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병실에 두고 간 엄마의 짐을 찾기 위해서였다. 간호사들이 챙겨 둔 짐을 데스크에서 넘겨받은 보영은 몸을 돌리다 움칫했다.
병실 복도 너머에서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를 대동한 채 걸어오는 이현 때문이었다.
‘여기는 왜…….’
안 그래도 곧 이현을 찾아갈 생각이기는 했지만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현도 그녀를 보았는지 잠깐 멈칫 섰다가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는 곧장 보영에게 걸어왔다.
“짐을, 가지러 왔나 보네요.”
“네.”
어색한 기류가 그와 그녀 사이에 흘렀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요.”
간결하게 대답한 이현은 뭔가를 말하려다 삼키고는 그녀가 손에 든 묵직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혹시 나한테 화났어요?”
“네?”
“내가 빌어먹을 태양가의 태이현이라서 화가 났냐고요.”
보영이 그 말에 당황한 사이, 이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가져갔다. 그러곤 그녀의 팔목을 가볍게 잡고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갈 거죠?”
이현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버튼을 눌렀다. 보영은 그런 이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제가…… 화를 내도 되나요?”
“화를 내도 되냐니?”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장님도 피해자니까요.”
보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현의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빠는…… 가해자겠고요.”
“정 비서. 지나치게 객관적인 거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우리 아빠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었어요.”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사람이 많이 타고 있었다. 그녀와 그의 대화는 자연히 끊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침묵은 병원 밖으로 나와 그의 차로 갈 때까지 이어졌다.
“사장님이야말로 제게 화가 나셨나요?”
이현이 그녀를 조수석 앞에 세웠다. 하지만 보영은 좌석에 앉는 대신 이현에게 물었다.
“……내가 화를 내도 돼요?”
그는 그녀가 물었던 것처럼 물어 왔다.
“정 비서 아버지는 빌어먹을 태 씨 일가 때문에 돌아가신 거고 나도 빌어먹을 태 씨니까요. 정 비서도 피해자예요.”
그녀는 이현의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웃고 있지도 그렇다고 감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고요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말이다.
“그리고 정 비서 아버지는 내게 빚을 갚았어요.”
“네?”
“10년 전에 갚았어요. 정 비서 아버지가 내 아버지 사건을 무마했었다는 걸 알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결국 그 일로 인해 돌아가셨으니까…….”
이현은 그답지 않게 곤란한 듯 보였다.
“이미 내 인생이 너무 거지 같아서요. 안 그래도 삼류 막장보다 못한 피곤한 인생인데 거기에 또 다른 사연을 끼여 넣고 싶진 않은데.”
그들 사이로 바람이 한차례 불어 왔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며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보영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잠시 그녀의 시야 밖으로 벗어났던 이현의 미간이 조금 아프게 찡그려져 있다.
“서로 화를 내기도 애매한 상황이고,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할 철천지원수가 될 마음이 아니면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요.”
“그건…….”
이상한 논리였다. 그의 말은 맞는 것 같기도 했고 또 틀린 것 같기도 했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난 정 비서가 밉지 않아요. 정 비서는 어떤데요.”
“저는…….”
그녀도 그가 밉지 않았다. 때때로 그의 언행이 얄미운 적은 있었지만 사람으로선 정말 싫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조금 설렜었고, 약간 두근거렸으며, 그의 민낯을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가 남자로 의식되어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일어난 일 역시 사장님 잘못은 아니야. 그냥…….’
상황이 안 좋았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팠고, 돈이 없었고, 어린 딸이 있었고, 마침 누군가 돈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박자가 맞아 들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아빠가 한 선택은 옳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를 비난할 수도 없어. 엄마를 건사하고 날 키우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누가 잘못한 거고, 누가 잘한 거라고 해야 해?’
사람이 사는 일은 흑과 백을 명료하게 가를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었다. 어떤 삶이든 다들 사유가 있었다.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아빠에게 사건을 조작하게 한 사람 그리고 아빠를 죽게 만든 사람이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보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현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이현은 그녀의 무언을 긍정으로 판단하고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앗아 간 엄마의 짐 가방을 대신 싣고 조수석도 열어 주었다.
보영은 조수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현이 이미 엄마의 짐을 차 뒷좌석에 실었다.
“타요.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자 이현이 재차 말했다. 보영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곤 그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운전석에 탄 이현이 차를 출발하자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빠가 공무 중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어요. 삼촌은 그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고 하고요. 저한테 해 주실 수 있는 말이 있으세요?”
이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돌려 이현을 보았다.
“‘S’죠? ‘S’가 그래서 제게 접근한 거죠? 단순한 도둑이 아닐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빠가 10년 전에 어떤 물건을 사장님께 드렸다는 건 뭐예요?”
“정 비서.”
“제가 이 차를 탄 이유는 저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들어 보려고요.”
“들으면 뭘 어쩔 건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 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이현이 달리던 차를 갓길에 세웠다.
“정 비서.”
“저는 이제 혼자에요. 더 이상 지킬 것도 무서울 것도 없어요. 잘잘못을 따지자면 아빠가 잘한 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딸이잖아요.”
“하. 예전에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었지? 지킬 거 없고 무서울 것도 없으면 자기 목숨은 안 귀한가?”
이현이 답답한 듯 말했다.
“해 줄 말씀이 없으신 건가요?”
“그런 이유라면요.”
“……알겠습니다.”
보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긴 차 고리를 열고 문을 열어 도보로 내렸다. 밤이 늦은 탓에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이현이 급히 그녀를 따라 내렸다. 그러나 보영은 그는 아랑곳 않은 채 평상시처럼 걸었다.
“정 비서!”
이현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보영은 턱에 힘을 꽉 준 채 돌아보지 않았다.
“정 비서! 정보영 씨!”
그가 부르면 그녀가 돌아볼 줄 알았나 보다.
“정보영!”
다시 그녀의 이름이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영은 또 그의 외침을 무시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 알았든 똑같았겠지.’
“정보영! 사람이 부르면 말을……!”
보폭이 넓은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잡은 이현이 손을 뻗어 보영을 돌려세웠다가 말을 삼켰다. 그가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와락 잡았던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보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현을 보았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욱하고 치미는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했다.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깨문 보영은 이현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다 알면서 알려 주지 않는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미웠다.
“꼭 날 때려죽이고 싶은 얼굴이네.”
“맞습니다.”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보영은 그런 자신이 짜증이 나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훔치곤 그를 피해 다시 걸었다.
“그렇게 알고 싶어요?”
이현이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스스로 알아볼 테니 신경 끄세요.”
마음에 날이 서니, 말투도 신경질적이 되었다. 자중하자, 네 위치를 생각해라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더 이상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에서 튀어 나갔다.
“알아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제가 뭘 할 수나 있겠어요. 말씀드렸잖아요. 꿈틀할 뿐이라고. 저도 제 주제는 압니다.”
“뭐?”
보영은 다시 그를 피해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재차 그녀의 팔을 잡아 제 앞으로 당겨 왔다.
“정보영.”
“저한테 왜 이러세요?”
보영은 그의 손을 떨치려 하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성적으로 참으려 꾹꾹 눌러 뒀던 감정이 둑 터지듯 터져 나왔다.
“친절했다가 심술궂게 굴었다가 다시 잘해 주고 지금은 왜요? 뭐요! 왜 걱정하는 척하세요!”
이현이 그녀의 외침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보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을 거칠게 들썩였다.
“다 했어요?”
“아니요!”
그 말에 보영이 또 욱해서 소리를 질렀다. 미약한 이성이 눈앞의 남자는 그녀의 상사라고 브레이크를 걸어 왔지만, 가슴은 좀처럼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았다.
“사람 갖고 노는 게 재미있으세요? 왜 자꾸 들었다 놨다 하세요? 헷갈리니까 태도를 좀 통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어요.”
“아빠 일은 왜 이야기 안 해 주세요? 제가 칼이라도 들고 쫓아갈 것 같으세요? 아직 그렇게까지 정신 줄 놓진 않았어요. 난 그저! 난 그저……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빠가 한 일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나는……!”
보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복받쳤다.
엄마를 잃었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과거의 일도 알게 됐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으니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현에게 말한 대로 어떻게든 알아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써서라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소리 내서 운 적 있어요?”
보영이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이현을 쏘아보았다.
“태도 통일하시라고요.”
“한 건데.”
“그게 한 거예요?”
보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순간만큼은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는 밥 말아 먹었다. 그녀의 심사가 단단히 꼬였다.
“하!”
어이가 없어 빈정대듯 실소를 흘렸다.
“걱정이 돼요.”
“사장님.”
“신경이 쓰여요.”
“태이현 사장님!”
“그래서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거야. 그게 친절인지, 아니면 본래 비비 꼬인 내 방식대로일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보영은 다시 그를 피해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이번엔 잡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울라고 했잖아.”
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을 당긴 이현이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마음껏 운 적 없지.”
길고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사람이 가슴에 담고 살면 이렇게 한순간에 미친다니까?”
‘뭐야. 이건 새로운 버전의 괴롭히기야? 까는 거야, 마는 거야?’
보영은 손을 올려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에 힘이 더 강해졌다. 보영이 숨을 들이켰다. 폐부 가득 이현이 즐겨 쓰는 시원한 오드콜로뉴 향이 밀려들었다.
그제야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안고 있다는 것이.
“지금 뭐 하는……!”
“정보영, 지금 보니까 네가 나 같아서. 나는 좀 더 어렸을 때 일이고, 지금의 너보단 더 의젓했지만.”
‘지금 애 같다고 돌려 까는 거야? 이게 위로야, 욕이야?’
보영은 짜증이 울컥 일어 그의 허리 부근 재킷을 꽉 틀어쥐어 당겼다.
“미안해.”
그러나 불쑥 던져진 한마디에 손가락에 힘이 쑥 빠진다.
“네 아버지가 내게 그걸 건네지 않았으면 죽는 일까지는 없었을지도 몰라. 그때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너도 지금 혼자는 아니었겠지. 돈 때문에 내 일에 얽히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지금 저 동정하세요?”
“그래.”
보영은 실소를 흘렸다.
“동정할 사람이 동정을 해야죠.”
보영은 웅얼거렸다.
“제가 보기에 사장님이 더 불쌍한 사람이에요.”
“지금 나 동정해?”
“네.”
“왜?”
그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물었다.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삼류 막장보다 못한 피곤한 인생 사신다고. 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
이현이 낮게 웃었다.
‘정말 이 남자가 미쳤나 보다. 그녀를 안지를 않나, 웃지를 않나.’
보영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울면.”
“눈물도 안 나는데 왜 자꾸 울라고 하세요?”
“아까부터 계속 울고 있었는데. 정 비서.”
그가 갑작스럽게 안은 탓에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 장례식에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어. 사람들이 울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욕했거든.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너무 초라하게 보내 드렸어야 했기 때문에 못 울었어. 염치가 없어서. 그러니까 정 비서는 울어. 안 운다고 달라지는 일도 없으니까 솔직하게 슬퍼해.”
그 말에서 그의 후회가 느껴졌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울지 못했고, 초라한 장례에 염치가 없어 울지 못했다. 그게 후회가 된다는 말로 들렸다.
보영은 위로 눈을 굴렸다. 하지만 이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말을 늘이는 대신 가만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사장님. 정말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나도 몰라. 그냥 정 비서 아버지 일로 미안한 줄만 알았는데, 걱정도 되네. 그래도 명색이 애인이라고 정들었나 보지, 뭐.”
이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보영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애인이니 어쩌니 해도 그와 그런 연기를 한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만큼은 진실로 느껴졌다. 보영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런데 다시 뱉는 순간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서서히 배어 나왔다.
‘왜 이래, 정보영!’
보영은 시선을 위로 향했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밤하늘이 너무 검었다. 그래서 마음이 시렸다. 보영은 눈을 꾹 감았다. 입술을 짓깨물며 이현의 재킷을 꽉 틀어쥐었다.
“그동안 어머니 모시느라 수고했어. 정보영.”
이현이 그녀의 스위치를 건드렸다. 보영은 그대로 얼굴을 이현의 어깨에 파묻었다.
이곳이 길거리고,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가 그녀의 상사라는 것도 모두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몸과 따뜻한 손이 그녀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아프고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보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