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여느 때처럼 일과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와 이어지는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 보영이 눈을 들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3시였고 오늘 이현에게 예정된 외부 스케줄은 없었다.
설마 착각했나 싶어 보영은 이현의 스케줄이 기록된 파일을 얼른 열어 보았다. 역시 없다.
하필이면 재일도 자리를 비운 차였다. 보영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수상한 사람이라면 이미 데스크에서 연락이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상대를 확인한 순간 보영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태인희 대표님.”
젊은 남자를 대동한 채 검은 스틱을 짚고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온 건 짧은 커트 머리의 여자였다. 그리고 보영이 인터넷이나 TV 뉴스로만 접해 왔던 사람이기도 했다.
하얀 슬랙스와 재킷에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액세서리를 착용한 그녀는 태훈 회장의 유일한 딸이자 유통업계의 신화라고도 불리는 〈하랑 이노베이션〉의 대표 태인희였다.
“태 사장님은 계십니까?”
인희의 뒤에 서 있던 훤칠한 키의 남자가 대신 물었다.
보영은 고민했다. 태양의 계열사임에도 태양이라는 이름보다는 하랑이라는 이름으로 과감한 경영 행보를 이어 가고 있는 인희는 이현의 하나뿐인 고모였다.
하지만 태훈의 딸이자 고모라는 위치에 눌려 상사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현의 비서였으므로.
“접객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장님께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분이 누군지 모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태이현 사장님이십니다.”
보영의 담담한 대답에 남자가 조금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인희를 보았다.
“그 말은 아버지, 태 회장님께서 오셔도 이렇게 할 거란 얘긴가요?”
인희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울림이 깊었다. 듣기만 해도 신뢰가 드는 톤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제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보영이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다시 한번 정중하게 허리를 반쯤 숙였다.
“……일을 제대로 하는 친구네. 마음에 들어. 됐다, 성우야. 이 친구 말대로 해.”
“하지만 대표님.”
“바쁜 일 없잖니.”
예상외로 순순히 수긍한 인희는 이내 몸을 돌려 탕비실 옆쪽에 마련된 접객실로 향했다. 스틱을 짚고 조금은 불편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말이다.
“오래 걸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마지못해 성우라 불린 남자가 부탁을 하고는 인희를 따라갔다. 보영은 얼른 전화를 들고 사장실로 내선을 연결했다.
“사장님, 하랑 이노베이션의 태인희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
― 하랑?
수화기 너머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의뭉스럽게 들려왔다.
― 지금 중요한 전화 중이에요. 10분 뒤에 들여보내요.
“알겠습니다.”
보영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숨을 골랐다.
그러곤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어떤 걸 내가야 무난할까.’
탕비실에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을 고가의 티와 디저트들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보영은 쉽사리 선택하지 못했다.
“정 비서, 자리 안 지키고 뭐 합니까?”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보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재일이 탕비실 문가에 서서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얼굴이 반가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장님, 지금 하랑의 태인희 대표님께서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차를 내면 좋을까요? 알려 주시면 숙지해 두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재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마뜩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저 표정은 무슨 의미야?’
하지만 보영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재일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냥 믹스면 돼요.”
“네?”
“믹스.”
그렇게만 말한 재일은 미간을 찡그리곤 곧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보영이 서둘러 복도로 나왔지만 재일은 이미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믹스……?”
의아했지만 고민은 짧았다. 설마 재일이 그녀를 물 먹일 셈은 아닐 테다. 그녀의 행동이 곧 이현의 얼굴이니 말이다.
보영은 믹스를 타고 커피에 맞는 과자를 몇 가지 챙겨 접객실로 향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보영이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안쪽에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인희가 보였다.
“고마워요.”
성우가 그녀로부터 쟁반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어머니, 드시죠. 마침 커피 드시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래.”
보영은 힐끔 남자를 보았다.
이쪽은 아직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지만 이름이라면 그녀도 들어 본 적 있었다.
아까는 어째서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까.
김성우.
이 남자도 태양가(家)의 일원이었다. 인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사장실에서 비서를 새로 뽑았다고 들었는데…… 일은 할 만해요?”
인희가 돌아서며 물었다. 보영과 인희의 눈이 마주쳤다.
마치 폭풍우가 치기 전, 한껏 쥐 죽은 듯 가라앉아 있는 고요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보영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본인 능력으로 앉은 자리가 아니니 더 열심히 해야 할 텐데 말이죠. 물론 이미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네?”
인희는 입꼬리를 휘어 웃곤 다시 등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보영은 잠시 멍하게 인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설마 ‘S’가 태인희……?’
‘S’는 인희나 석준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본인들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밑에 있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테다.
‘저 남자일까?’
보영은 힐끔 성우를 보았다. 그도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사장님께서 통화 중이십니다. 통화 끝나는 대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꾸며 내곤 접객실을 나왔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 ‘S’였다.
[태이현 사장의 연애 대상이 정보영 씨 맞습니까?]
보영은 아차 싶었다. 생각해 보면 ‘S’는 이현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된 인물일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예의 이현과의 ‘연애’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사장님의 의중이 파악되는 대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저를 의심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그녀가 회신을 마치자 바로 답장이 왔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바로 보고해 주세요. 그리고 오히려 잘됐습니다.]
뒤이어 바로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하지만 채 읽지 못했다.
사장실 안쪽에서 재일이 불쑥 나오는 바람에 보영은 얼른 휴대폰을 넣었다.
재일이 다가오며 뭐냐는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영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재일이 그런 그녀를 지나쳐 접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정보영 씨를 제가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이걸 기회로 활용해 보죠.]
기회라.
보영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었는데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는 성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왜인지 빙긋 웃었다. 보영도 얼결에 마주 빙긋 웃었다.
그건 마치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같았고, 그냥 멋쩍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울렸다.
보영과 재일, 성우는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문을 열자 안에서는 소리와는 달리 고요하게 마주하고 있는 이현과 인희가 보였다. 깨진 찻잔이 인희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이렇게 볼품없이 깨져 버리리란 건 너도 알 거라 생각하는데.”
“깨지는 게 제가 되려나요. 아프겠네요.”
이현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태양에 큰 미련은 없어. 하지만 태양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얼떨결에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보영은 온화하지만 독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인희의 말에 아연해졌다.
‘태양이 잘되어야 계열사인 하랑의 주가도 오르는 게 아니었나?’
“……찻잔이 이렇게 된 건 미안하구나. 네가 주제를 모르는 것 같아서 그만.”
“제 주제는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해요, 고모.”
“그러면 내 눈앞에 나타날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지 않았을까?”
인희의 어투는 매우 고상했고 또한 부드러웠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저도 정리가 좀 필요해서요. 물론 태양의 밥그릇을 가질 자격은 충분하다는 생각도 하고요.”
“유감이구나.”
“저도 유감이에요. 고모가 아직까지 그때 일을 담아 두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게 평생이 간다 한들 지워지겠니.”
자리에서 일어난 인희가 돌아섰다. 그 순간 보영과 인희의 서늘한 눈이 마주쳤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그런 인희의 얼굴이 이현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저 친구는 네게 많이 아깝더구나.”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사이 인희는 스틱을 짚으며 걸음을 뗐다.
“다음 주에 있을 작은오빠 생일 만찬에도 데리고 올 거니?”
“그럴 생각입니다.”
보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인희의 작은오빠라면 태양 그룹의 태석준 부회장을 말했다.
“각오가 필요할 거예요.”
그녀를 향해 짧게 충고한 인희가 이내 스틱을 짚고 천천히 사장실을 나섰다. 재일이 서둘러 인희를 따라가 배웅하는 게 느껴졌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인희의 뒷모습을 보던 이현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이동했다.
“……다음 주에 태석준 사장님의 생신 만찬이 있습니까?”
보영은 테이블 위의 다과와 소파 옆에 깨져 있는 찻잔을 치우기에 앞서 먼저 이현에게 물었다.
“저도 가나요?”
“나랑 연애하니까 가야겠죠.”
연애하는 사이라기엔 전혀 달콤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은 어투로 이현이 대답했다.
“언제 말씀해 주시려 했습니까?”
“곧?”
“미리 말씀해 주실 순 없었을까요?”
서류로 눈을 돌리던 이현이 재차 그녀를 보았다.
“저도 개인 일정이 있어서요. 태석준 사장님의 생신은 따로 스케줄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 일요일 행사인 것 같은데 맞을까요?”
“개인 일정? 그래서 못 간다, 그 말인가? 내가 제대로 이해했어요?”
보영은 사실은 욱했다. 그녀가 일회성 소모품인 것은 안다. 그녀 역시 이 일로 인해 얻으려는 게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한 이상 이현도 그녀를 조금은 존중해 줄 필요가 있지 않나.
그녀는 이렇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의지 없는 꼭두각시 인형은 아니었다.
“그럼 정 비서가 그 일정을 취소해요. 스스로도 뭐가 먼저인지는 알 텐데요.”
“사장님은 절 뭘로 생각하세요?”
보영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곧게 편 채 이현을 보았다.
“글쎄요. 지금 드는 생각을 말하면…… 비서, 스파이, 고양이 애호가, 돈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속물 그리고 머저리.”
그는 서류를 덮고 망설임 없이 나열했다.
보영은 내심 황당했지만 애써 안색을 유지했다.
“……그리고 사람이죠. 비록 제가 불순한 동기로 이직을 했고 사장님 곁에 있지만 존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비서로서 상사의 일을 중심으로 제 생활이 돌아가는 건 맞지만 거기에 제 일과까지 사장님의 의지대로 조정해도 된다는 권리까지 드린 건 아니니까요.”
“본인 입장이 어떤지 알기는 해요?”
이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도 사장님께 제공해 드리기로 한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최선을 다할 거고요. 이건 거래에요. 그러니까 사장님도…….”
보영은 말을 잇다 멈췄다. 이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더니 돌진하듯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압박에 뒷걸음질을 치던 보영은 소파 등을 짚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이건 청소하는 분을 불러서 치워요. 이런 일까지 정 비서가 하지 말고.”
보영의 옆쪽 소파 등받이를 짚고 그녀를 따라 몸을 기울였던 이현이 그녀를 비껴 손을 뻗고는 바닥의 유리잔 파편을 하나 집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보영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이현이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도 하지 말고. 내가 처음부터 말했었잖아요. 난 정 비서가 생각하는 만큼 잘난 사람 아니라고요.”
조금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빛이 스민 얼굴을 보고 무언가를 짐작한 보영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다고 등 뒤의 상황이 보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등 뒤에 누군가 있을 것 같았다.
‘뒤에 누가 있나? 누구지?’
이번엔 이현의 손이 소파를 짚은 그녀의 손을 덮곤 시선을 뒤쪽으로 던졌다.
“무슨 일이야?”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김성우?’
그녀가 곱씹는 사이 이현은 그녀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덮은 손을 힘 있게 잡아 일어나게끔 도와주었다. 몸을 추슬러 바로 선 보영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반쯤 열린 문가에 성우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딱딱하게 사장님이 뭐야. 편하게 해.”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보영은 슬쩍 이현이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태세 전환 하나는 혀를 내두를 만큼 빨랐다.
“어머니가 전해 드리라고 하신 서류가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이현이 고갯짓하자 성우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돌아 나갔다. 곧 문이 닫혔다.
“정 비서가 다음 주 작은아버지 행사에 동행하기 전에 하나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요. 그래야 멸시를 같이 당하고도 그러려니 하겠죠.”
멸시라는 말에 이현의 손을 놓으려던 보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집에서 난 살인자의 아들이에요.”
그 소리에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보영은 그의 말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현은 태훈 회장의 장남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태석훈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살인자라니?
“우리 아버지 때문에…… 가만있자…… 몇 명이더라?”
문득 짓궂으면서도 살벌하게 웃은 이현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세 명이 죽었거든.”
태양 그룹에 대한 일화는 많다. 태훈 회장의 그룹 설립 신화라든가 태석준 부회장의 실적, 그리고 그의 아내인 한 여사의 대외 활동에 대한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태훈 회장의 장자인 태석훈에 대한 이야기는 사망 기사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몇몇 기자나 이슈를 다루는 잡지에서 기사로 다루었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었다.
“특히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고모나 작은어머니 입장에서 나는 괴물인 셈이죠.”
“아버지…… 이지 않나요?”
재벌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국민들이 궁금해한다. 그들의 가족사, 생활, 비사, 스캔들.
하지만 어느 하나 시원하게 드러나거나 밝혀진 건 없다.
태양 그룹뿐만 아니라 그 외의 손에 꼽히는 재벌가를 둘러싸고 결혼, 이혼, 재혼, 유학, 사망 등 많은 일화들이 유언비어처럼 떠돈다.
재벌가는 아니지만 건설사의 전무 비서로 일하며 보영은 실제로 그것들이 모두 진실도, 모두 거짓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진실은 언제나 그 일을 겪은 당사자만 안다. 그러니까 함부로 잣대를 들이댈 수 없었다.
“당사자는 아버지지, 사장님은 아닌 거 아닌가요?”
보영은 그의 말을 하나씩 속으로 다시 되짚곤 입을 열었다.
“아니면 사람, 죽이셨어요?”
“뭐요?”
이현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살인자라고 하셔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장님이 직접 뭔가를 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현이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듯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런 대우는 부당한 게 아닐까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그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문득 차갑게 입술을 비틀었다.
“누가 들으면 내 편인 줄 알겠네.”
“네?”
이현이 무안해질 정도로 차갑게 그녀의 손을 놓곤 책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정말이지 보영은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전 사촌인 태이본이 다녀갔을 때의 행동을 봐도 그가 ‘괴물’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 안 해요?”
그녀가 멀거니 서 있자 이현이 눈짓했다. 보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그의 말에 곧장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사장실 손잡이를 잡기가 무섭게 이현이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깨진 찻잔은 내가 치울까요?”
“네?”
보영이 소파 옆을 보았다.
“아니면 혹시 이것도 내가 정 비서의 권리를 존중해 시키면 안 되는 일이었나요?”
‘비꼬기는.’
“아닙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보영은 돌아서며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이전 직장에서는 이럴 일이 없었는데 어쩐지 자꾸 상사가 얄밉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 *
「정 비서! 정 비서!」
편의점에서 간단한 도시락을 사 와서 먹는 중이었다. 보영이 고개를 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야! 정 비서! 여기!」
사람과 고양이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게 들린다. 고양이가 하는 말은 약간의 메아리가 울렸다. 그걸 평생 들어 온 보영은 단번에 구별이 가능했다.
보영은 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식탁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얀 원목 파티션 너머 창밖으로 키가 큰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비가 보였다.
밖은 어두웠지만 나비가 워낙 하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보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움직여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나무 쪽으로 손을 뻗자 나비가 곧장 그녀의 손으로 떨어지듯 뛰어들었다.
“너…… 여기 어떻게 매달려 있는 거야?”
나비는 태어난 지 이제 3주를 넘어 곧 4주째였다. 발육이 조금 빠른 게 아닌가 싶었다.
「나무로 뛰기는 했는데 내려오는 일이 캄캄했었어. 정 비서가 있어서 다행이야.」
“정 비서?”
「우리 오빠가 널 부를 때마다 정 비서라고 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왜인지 나비의 비서가 된 기분이 들어 떨떠름했다.
「오빠는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왔어. 집에 뭐 좀 있어? 배고파.」
그녀가 베란다 안쪽으로 손을 내려 주자 곧장 뛰어내린 나비가 냉장고로 직행했다.
생각보다 영리한 녀석이었다. 보영은 피식 웃곤 냉장고를 열어 야채 칸을 살폈다. 오이와 당근이 있으니 이걸 주면 될 것 같았다.
「이건 뭐야?」
호기심이 많은 아기 고양이 나비는 곧장 화장대 위로 올라가 이것저것 앞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건들지 마. 입에 들어가면 병 걸려.”
「에엑? 거짓말. 못 만지게 하려는 거지?」
고양이란 것들은 대부분 의심이 많다.
“그럼 넣어 보든지. 대신 아파도 나는 몰라.”
「……얼마나 어떻게 아픈데?」
“토하고 장이 꼬이고…… 네가 어제 쐰 뜨거운 바람보다 열 배는 더?”
「이익!」
그냥 내려오면 될 것이지, 화장품을 적으로 간주한 건지 앞발로 밀어 우르르 쓰러뜨린 나비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사이 야채를 나비가 먹기 좋게 자른 보영은 밑이 넓고 얕은 접시에 담아 바닥에 놓아 주었다.
「아아, 살 것 같다.」
나비는 근 1주일 사이에 꽤 커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일찍 떨어진 것에 비해 꽤 씩씩했고 약았고 똑똑했다.
‘주인을 닮아 가는 건가? 안 좋은데.’
보영은 슬쩍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나무로는 어떻게 넘어갔어?”
「베란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막 들어갔는데?」
보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히 처음에 이현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나비는 특히나 몸집이 더 작으니 문단속을 꼼꼼히 해야 한다고 말이다.
보영은 접시에 얼굴을 박고 정신없이 식사를 하는 나비를 보다 문득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사장님은 퇴근 후 다른 스케줄이 없는 걸로 아는데, 개인 약속이라도 있는 건가?’
“지내는 건 어때?”
「어떻긴. 그냥 사는 거지.」
꽤나 제멋대로 대답하는 나비에 보영은 피식 웃곤 눈을 굴렸다.
“너한텐 어떻게 해?”
「뭘?」
“그러니까 사장님 말이야. 차갑다든가…… 쌀쌀맞다든가…….”
이현은 다른 사람의 눈이 있을 때만 특유의 자상한 버전으로 행동했다. 그렇지만 고양이인 나비에게는 특별히 자상하게 굴 이유가 없으리라.
「글쎄? 가끔 깃털 갖고 흔들어 주기도 하고 머리 들이대면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그게 쌀쌀맞은 거야? 웃기는 잘 웃는데?」
“에?”
잘 웃는다는 말에 보영은 의아해졌다. 사람이 아닌 나비에게 구태여 친절히 굴 이유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현의 친절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건 스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고, 회사 내에서는 직원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그런 이미지가 대중이 원하는 CEO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너무 없어. 눈치도 없고 무신경해. 바빠. 집에 없는 시간이 더 많으면서 날 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어. 심심해 죽겠어. 그 오빠는 날 너무 심심하게 한다고!」
생각해 보니 단점이 더 많은 모양이었다. 나비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아기 고양이의 외로움 섞인 투정이었다.
보영은 쓰게 웃으며 달래듯 고양이의 엉덩이를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얼굴을 땅에 박은 나비가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나비야, 츄르라고 알아?”
「응? 츄르?」
“너 같은 고양이들이 열이면 열 아주 좋아하는 간식인데.”
「내가 다른 고양이랑 같은 줄 알아?」
“먹을래?”
보영은 고양이 자존심에 뻗대는 나비는 아랑곳 않고 물었다. 나비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사 줄게. 편의점에 팔거든.”
「나도! 나도 같이 갈래!」
나비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울었다.
줄곧 심심하다고 했다. 어리광 같은 말이었지만 아마 90퍼센트 이상 사실일 거였다. 고양이들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이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다. 심플하게.
약고 이기적이고 도도한 데다 제멋대로였지만 보영은 고양이들의 이런 솔직함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 가자.”
보영은 얇은 외투 하나만 걸치고 나비를 안은 채 집을 나와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고양이는 신이 났는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혹시라도 호기심에 품 안에서 벗어나 사라질까 보영은 나비를 안은 팔에 힘을 준 채 츄르를 쇼핑한 후, 다시 빌라로 향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리던 때였다. 공동 현관 입구가 열렸고 그쪽을 힐끔 보았던 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퇴근할 때 그대로의 차림새인 이현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많이 지쳐 보였다.
이현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잠시 멈춰 섰다.
“뭐야.”
그가 문득 피식 웃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기 중에 옅은 술 내음이 섞여 있었다.
‘술을 드셨나?’
“내 집 비밀번호도 저쪽에서 알려 줬어요?”
“……네?”
보영은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이현이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가서 가지고 나온 게 고작 고양이야?”
그가 다가오니 술 향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조금 풀린 눈과 약간 흐트러진 옷차림을 보니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듯했다.
“3주니, 엄마가 간암이니 어쩌니 하더니…… 진짜 바닥으로 노네.”
“그게 아니…….”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에 멸시가 섞였다. 난데없는 소리에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힌 사이 이현이 말을 이었다.
“권리? 존중? 그것도 그런 걸 받을 만한 사람한테 줄 수 있는 건데 말이야.”
이현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안겨 있던 나비를 데려갔다.
“사실 이건 네 환심 사 보려고 데려온 건데 잘못 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서 이번엔 뭘 가져오래?”
보영은 힘 조절을 못 하고 고양이를 꽉 쥐고 있는 이현의 손짓에 인상을 썼다.
“고양이가 아파해요.”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서 이거 말고 뭘 가져갔어?”
“사장님,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
그러나 이번에도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술기운에 약간 충혈된 눈이 그녀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상황이 그래서 그렇지, 괜찮은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내 시간이 아깝네.”
보영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를 비웃듯 입매를 비튼 이현이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 안에 올랐다.
「아으, 아파파파파……!」
무섭도록 차갑고 냉정한 비소가 그녀에게 꽂혔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매서웠다.
하지만 보영은 그대로 이현을 피하는 대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뭐 하는 거야?”
“취하셨어요. 그리고 고양이가 아파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오늘 밤은 제가 데리고 잘게요.”
보영은 빼앗듯이 이현의 손에서 나비를 다시 데려왔다. 이현의 시선이 살벌해졌다.
“야.”
“정 비서예요. 야, 너 하고 부를 만큼 사장님과 제가 가깝지도 않고 친구도 아니고요. 취하셨으면 그냥 씻고 주무시죠.”
사실 살 떨리도록 무서웠다. 상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내리꽂힌 비난과 오해가 억울했고 화가 났다. 그녀라고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감정 없는 사람은 없다.
그를 속여야 하니 미안해서, 그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약해지려던 마음이 이현의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그만큼 단단하게 반발심으로 솟구쳤다.
“그럼.”
보영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 빨리 걸었다. 혹시라도 이현이 쫓아 내릴까 봐 간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 오늘 여기서 자? 정 비서?」
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문에 기대선 채 바깥을 향해 귀를 세우고 있던 보영이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하아…….”
보영은 나비를 현관에 내려 주곤 안도했다. 당장 문을 쾅쾅 두드리거나 벨이 울리진 않았다.
‘자기 집으로 갔겠지?’
그러고도 보영은 현관 바깥의 기척에 꽤 오래 신경을 곤두세웠다.
* * *
오전 6시 30분.
보영은 발치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나비를 보곤 천장을 불만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밤새 잠을 설쳤다. 생각할수록 억울했기 때문이다.
“하, 어이가 없어서. 하다 하다 좀도둑 취급을 해? 아무리 내가……!”
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나비가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뭐 하는 거야, 정 비서. 아직 한밤인데.」
“아침이야.”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 준비를 했다.
가볍게 화장을 하고 네이비색 슬랙스에 연베이지 블라우스를 입고는 현관에 섰다.
“이리 와.”
「잉?」
그때까지도 침대 위에서 똬리를 뜬 채 뭉그적거리고 있던 나비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여기가 사장님 집보다는 좁잖아. 하루 종일 괜찮겠어? 난 회사 나가야 하는데.”
잠시 눈을 끔벅이며 보영을 보던 나비가 이내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 비서도 오빠처럼 늦게 와?」
“비슷해.”
그녀가 일찍 퇴근한다고 하면 여기 있겠다고 할 태세였다.
하지만 에누리 없는 그녀의 대답에 나비가 군말 않고 그녀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러고 보면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고양이는 대체적으로 접촉을 좋아하는 동물이 아닌데 나비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 손에 길들여져서인지 덥석덥석 잘 안겼다.
“아직 출근하신 건 아니겠지?”
보영은 서둘러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출근을 한대도 이현은 명배우답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녀를 사무적으로 대하겠지만 은근히 뒤끝 있는 그녀로서는 이현을 볼 때마다 억울함이 치밀 것 같았다.
보영은 곧장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보통 이현이 출근하는 시간이 7시 30분 전후니 7시인 지금은 일어나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나 곧 문이 철컥 열렸다.
어제의 취기가 무색하게 이미 샤워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나비를 안고 서 있는 그녀를 본 이현이 차게 입꼬리를 틀었다.
“줘요.”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의 손에 나비를 건네는 대신 보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사장님 자택의 비밀번호도 모를뿐더러, 뭘 훔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말씀하셨듯이 사장님과 전 필요가 분명한 관계일뿐더러 제게 그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요구하라고 말입니다.”
이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비는 아직 몸집이 작기 때문에 문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부탁드렸었습니다. 혹시 베란다나 창문이 열려 있지는 않으셨어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나비가 저희 집 베란다와 가까운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장…… 님이 집에 계시지 않은 것 같아 오실 때까지 맡아 두었을 뿐이고요.”
차마 나비가 그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줬다고는 말하지 못하기에 대충 얼버무린 보영이 나비를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절 못 믿으실 거란 건 압니다. 하지만 전 사장님께 제 패를 전부 보여 드렸고 뒤로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좀도둑 짓은 더더욱 못 하죠. 저쪽에서 뭔가를 요구해 오면 반드시 말씀드리고 정정당당히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제와 같은 억측은 가능하면 자제해 주십시오.”
“그래서, 할 말은 다 했어요?”
이내 나비를 받아 안은 이현에게서 돌아온 건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네. 다 했습니다.”
“알았어요. 가 봐요.”
“네?”
보영은 조금 당황했다. 이 정도 했으면 어제는 오해해서 미안했다거나 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
하지만 그는 건조한 얼굴로 현관문을 코앞에서 쾅 닫았다.
“알면 알수록 참…….”
‘재수 없네.’
그가 자상하고 신사적이며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죄책감에 양심을 쥐어뜯었던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보영은 문을 따갑게 쏘아보다 이내 돌아섰다.
다시 문을 두드려서 사과는 안 하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가 그런 오해를 하게끔 빌미를 만든 게 바로 그녀였으니 말이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꼴이었다.
“으……!”
분한 신음을 작고 소심하게 삼킨 보영은 조금 이른 출근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이현은 나비를 바닥에 내려 주곤 남향으로 나 있는 창문들을 하나씩 확인해 봤다.
“하……?”
보영의 말대로 거실 베란다 문이 사람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열려 있었다.
하지만 너무 좁다.
‘여기로 나가다니 말이 돼?’
“나비, 너 여기 들어갈 수 있어?”
고양이가 말을 알아먹을 리 없지만 이현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나비를 향해 물었다.
“정말 네가 여기로 나가서 나무로 넘어간 거야? 정보영이 문 따고 들어온 게 아니고?”
이현이 몸을 숙여 앉아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비는 그의 손아래서 갸르릉거리다가 도망가듯 빠져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베란다를 향해서였다.
이현은 나비를 따라 눈을 돌리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나비가 머리를 베란다 사이로 쏙 들이밀더니 그 사이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이현은 얼른 문을 열고 베란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베란다 난간과 세 뼘 정도 사이를 두고 가지가 뻗어 있었는데 나비가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
이현은 다시 한번 어이가 없어졌다.
고양이가 점프력이 좋은 동물이란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야옹!”
이현은 나비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보다 나비가 다시 그의 품 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오해…… 라고.”
평소와는 달리 다소 경직된 얼굴로 랩을 하듯 빠르게 말을 쏟아 내던 보영이 떠올랐다. 꽤나 억울해하는 눈치였다.
엊그제 그의 손등 상처를 소독해 줄 때 일부러 소독약을 들이부은 것도 그렇고.
‘마냥 얌전한 줄만 알았는데 저도 성깔이 있다 이건가.’
이현이 피식 웃고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 보영아, 집 나갈 것 같아! 오늘 오전에 집 보러 온 여자가 집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너 빨리 짐 옮겨 놓을 창고 알아봐야겠다?
“정말이야?”
보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동일에게 되물었다. 좀처럼 집이 나가지 않아 걱정했었지만 막상 들으니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현재는 ‘S’ 측의 조치로 돈 한 푼 안 들이고 좋은 집에서 살고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 3주 후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너 많이 바쁘면 내가 알아봐 줄까?
“……아니야. 오늘 퇴근하고 그쪽 가 봐야겠다. 근처 빌라 지하에 있는 창고 세 준다는 종이를 봤었거든.”
― 그러냐?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영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전세금 묶여 있어서 이자도 못 받는다고 불평했었잖아.
“음, 아무것도 아니야.”
―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눈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빨랐다.
하지만 다행히 동일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모양이었다.
― 그런데 보영아, 너 전세금 빼면 어떻게 할 거야? 은행 대출금 빼고 1억 조금 넘지?
“……왜 삼촌이 우리 집 재정 상태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데?”
보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귀로 가져갔다.
― 자세히는 무슨. 그냥 요즘 시세 생각해서 물어본 거지. 그냥 은행에 넣어 놓을 거야?
“왜.”
익숙한 상황에 절로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 요즘 은행, 이자 개미 눈곱보다 못한 거 알지? 있지, 삼촌이 기가 막힌 정보를 들었거든.
“무슨 정보.”
― 있잖아, 얼마 후에 XX 회사가 주식 상장을 한다는데 거기가 대박이라네? 그냥 갖다 넣으면 기본 30프로 먹는대!
“그래서?”
― 그런 기가 막힌 정보를 들었는데 돈이 없어 부자가 될 수 없는 내 마음을 너는 아냐?
“알고 싶지 않은데? 그리고 그건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 아니, 들어 봐. 네가 삼촌 돈 조금만 빌려주면 상장하고 30프로 먹고 바로 갚을게! 내가 설마하니 조카 돈을 떼먹겠냐?
“삼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그런 좋은 정보를 왜 흘리고 다니겠어. 그리고 XX? 나 이전 회사에 있을 때 거래하던 회사인데 거기 지금 상장 심사도 못 들어갔을 거야. 투자 끌어들이려고 소문만 무성한 거지. 왜냐면 그 회사 재정이 부실하거든.”
― 어? 아니야. 네가 잘못 안 거겠지.
“맞아. 그 회사 사장 내연녀가 회삿돈을 자기 사비처럼 물 쓰듯이 하거든.”
― 거짓말!
“삼촌, 나 인생 힘든 애야. 삼촌까지 보태지 말아 주라. 힘든 일 있으면 삼촌한테 말하라고 했지? 삼촌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금처럼 성실히 일만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건데.”
― 보영아, 그렇게 말하면 삼촌 상처받는다?
“상처받아서 그 얇은 귀 두껍게 개조할 수 있으면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 너…….
“아무튼 조카 전세금에 눈독 들이지 말고 이따가 밥이나 잘 챙겨 드세요.”
보영은 동일이 더 이상 흰소리를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별다른 잡음 없이 일만 하나 했더니 한 번에 돈 벌 궁리로 머릿속에 자갈이 굴러다니나 보다.
“그게 비사회적인 정 비서 모습이에요?”
한숨을 쉬며 얼굴을 구기던 보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개인적인 전화이기에 탕비실에서 통화 중이었다. 그런데 이현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삼촌이라면 그때 그 택배 기사님?”
보영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에 정 비서가 한 질문 그대로 돌려주고 싶네.”
“네?”
“어떤 게 진짜 정 비서예요?”
이현이 말해 보라는 듯 심술궂은 웃음을 지었다.
“……제 경우는 그저 행동과 말을 조심할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요?”
“네.”
“나는 크게 달라지고?”
보영은 대답 대신 그냥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자 이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뭐 필요한 게 있는 건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찾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가 그녀를 찾은 줄 알고 따라서 탕비실을 나가려 했던 보영은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어제는 내가 오해한 게 맞았어요. 거실 베란다 문이 이만큼 열려 있더라고.”
그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어제는 확실히 미안했어요.”
보영은 움찔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특별히 친절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워졌다.
“그리고 이제 보니 알겠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 비서 말이에요. 저쪽에서 뭔가를 요구해 오면 내게 당당하게 말할 거라고 했잖아요. 그럴 사람이라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이현이 몸을 돌려 복도를 지나 사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보영은 이현을 따라 탕비실을 나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놈인 거야, 아닌 거야.’
종잡을 수가 없다. 알수록 어려운 남자다.
* * *
“진척이 있다. 그 당시 공항 CCTV를 찾았어.”
이현이 서류를 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재일이 그의 앞으로 황색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현은 곧장 그것을 열어 꺼내 보았다.
“네가 찾는 사람 맞아?”
이현은 화질이 저조한 A4 용지 속의 이미지를 들여다보았다.
배경은 공항 로비였다. 거기엔 10년 전, 이현이 한국을 떠날 때 단 한 번 봤을 뿐인 남자가 서 있었다.
“……맞는 것 같아.”
다음 장에는 CCTV 이미지를 확대해 따로 빼낸 남자의 옆얼굴이 흐릿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어디 사는 사람인지도 몰라. 저쪽이 모르게 찾느라 1년이 넘게 걸렸다.”
재일이 맞는다는 이현의 말에 긴장이 풀린 듯 평소답지 않게 슬쩍 웃었다.
“고생했어, 형.”
“10년 전에는 아무 말도 않다가 왜 갑자기 그 사람을 찾겠다는 건지 물어도 되냐?”
“증거니까.”
“그 사람이 네게 그걸 줘서?”
재일이 다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현은 대답 대신 종이 속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제 이름은 알아?”
“가능한 모든 라인 동원해서 찾고 있어. 그날 그 남자가 공항에 타고 온 차 번호는 알아냈어. 도난 신고당한 차라는 게 문제지만.”
“도난 신고?”
이현은 뜻밖의 말에 고개를 올려 재일을 바라봤다.
“그 남자는 네게 그걸 꼭 전해야 했을 거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도난 신고된 차를 이용했을 거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야. 하지만 꼬리를 잡았으니 곧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이현은 종이를 다시 황색 봉투에 넣어 재일에게 건넸다.
자신보다는 재일이 보관하는 게 여러모로 안전했기 때문이다.
“형.”
서류 봉투를 받아 들고 돌아서던 재일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 꼭 찾아야 돼.”
“알아.”
그 말을 끝으로 재일이 문을 닫고 나갔다. 이현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향해 앉았다.
자그마치 10년 전이었다. 스치듯이 보았을 뿐인 남자로 인해 심증만 있던 모든 일들이 확실해졌었다.
〈태이현 씨.〉
〈이게 뭡니까?〉
〈보면 알아요.〉
그 남자와 나눈 말은 그게 다였다.
무뚝뚝하고 피로한 얼굴로 검은 비닐봉지를 건넨 그 남자는 곧 누군가 볼세라 인파 속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남자가 건넨 검은 비닐봉지 덕분에 미국에서도 이를 갈며 버틸 수 있었다.
똑똑.
이현은 무섭도록 사납게 일그러졌던 얼굴을 반듯하게 펴며 다시 돌아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보영이 들어와 단정한 태도로 보고했다.
“곧 3층 대회의장에서 정기 보고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알겠어요. 정 비서도 동행합니까?”
“네. 장 실장님께서는 다른 용무가 있으셔서요.”
재일에게는 미리 말해 놨다. 앞으로 대외적인 스케줄은 보영이 맡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러니 재일은 예의 ‘그 남자’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말이다.
“가죠.”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그리고 막 보영의 곁을 스치는 때였다.
“저기.”
그가 서서 내려다보자 보영이 그를 한 번,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한 번 본다.
“할 말 있으면 해요.”
“고양이 털이…… 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현은 고개를 내렸다. 평소와는 달리 내내 옆을 맴도는 나비 덕에 출근 전에 나비를 한 번 안아 줬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많지는 않았지만 털이 먼지처럼 조금 묻어 있었다.
이현이 손을 올려 고양이 털을 떼려 했으나 손톱이 짧은 탓에 쉽지 않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임시방편으로 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를 가만히 보던 보영이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실을 나간 그녀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보영의 손에는 덕트 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걸 찍 소리가 나게 뜯더니 털이 묻은 자리에 길게 붙였다가 시원하게 뗐다.
“다음엔 돌돌이를 구비해 놓겠습니다.”
습관처럼 이로 덕트 테이프를 끊어 내던 보영이 문득 흠칫하곤 다시 손을 내렸다.
“가시죠.”
먼지가 묻은 테이프를 어정쩡하게 쥔 보영은 그가 먼저 앞서기를 기다렸다.
“어느 쪽이 진짜든…… 임기응변이 강하네요. 강릉에서의 일도 그렇고 자신이 스파이란 걸 들켰을 때도 그렇고.”
“네?”
“칭찬하는 거예요. 회장님 앞에 데려다 놔도 괜찮을 것 같네.”
이현이 앞서 걸었다. 힐끔 보니 보영이 그가 시선을 돌린 사이 이로 테이프를 끊어 냈다.
단정한 정보영도 정보영이지만 저런 모습도 꽤 눈이 갔다.
‘스파이가 밉지 않다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꽤 즐겁게 같이 일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한 달에 5만 원요?”
보영은 창고 크기를 확인하곤 만족했다.
그녀가 살았던 투 룸 건물과 약 2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약 3평의 크기였지만 짐을 모두 보관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보영은 건물 주인 할머니에게 자신이 그 창고를 쓰겠다고 말한 후 바로 걸음을 옮겨 옆에 있는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어, 202호 아가씨네?”
“오늘 집 보러 온 사람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들었는데요.”
보영이 인사를 하곤 싹싹하게 말을 건네자 부동산 사장이 곧장 눈길을 돌렸다.
보영도 따라서 눈을 돌렸다. 이제 보니 부동산 안에 있는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이 아가씨예요. 안 그래도 가계약한다고 다시 왔는데.”
“아, 그래요? 안녕하세요.”
보영의 인사에 상대도 고개를 까닥였다.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미인이었다.
“제가 몇 주간 비워서 집이 좀 지저분했죠?”
“네, 그렇더라고요. 하지만 어차피 리모델링할 거니까.”
보영은 내심 당황했다.
“결혼하거든요. 건물주에게 말했더니 마음대로 뜯어고치라고 해서요. 위치도 그럭저럭 괜찮고…… 너무 낡긴 했는데 여기 오래 살 건 아니라서요. 분양받아 놓은 아파트가 1년 정도 입주 기간이 남았는데 잠시 살 데가 필요해서 절약할 겸 이 동네로 왔어요.”
“아…… 네.”
구태여 묻지 않은 정보까지 술술 말한 여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쨌든 집이 나가니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어색하게 웃던 보영이 움찔했다.
자신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다.
“혹시…… 표원 중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네?”
“3학년 1반?”
“네?”
뜬금없는 호구 조사에 보영이 눈을 깜빡거리는데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몰라? 나 심윤희!”
보영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정보영 맞지? 어쩜 그때 얼굴이 이렇게 그대로 남아 있니? 네가 살던 집이야?”
윤희가 다가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보영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 집에 귀신이라도 들린 거 아니야? 네가 살던 집이면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너도…… 하나도 안 변했네.”
“그래? 예뻐지지 않았어? 그때는 촌스러웠지.”
아무렇지 않게 발랄하게 대답한 여자는 저가 하고 싶은 말만 이어 갔다.
“어쩐지 동네 보니까 고양이가 많더라. 아직도 고양이 몰고 다니니? 학교에서도 유명했잖아. 교실 안까지 고양이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다들 기겁해 가지고…… 애들이 뒤에서 네 걱정 많이 했어. 저렇게 겉도는 애가 나중에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고.”
보영은 손이 차갑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기억나?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뻤던 선미. 걔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다가 고양이 때문에 크게 다쳤었지? 애들이 다 네 짓이라고, 소름 끼친다고 무섭다고 수군거렸어도 나는 안 그랬다? 알지? 그런데 너 정신 질환도 있었잖아. 그건 나은 거야?”
“……친구?”
“응? 아무튼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다. 옛날에는 네 아빠가 경찰이니까 다들 네가 싫고 무서워도 말도 못 했잖아. 너는 몰랐지?”
보영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녀의 학창 시절은 단 한 번도 유쾌하거나 즐거웠던 기억이 없었다.
“나는 그때 이야기 하나도 재미없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왜? 원래 옛날 친구들끼리 만나면 옛날이야기도 하고…….”
“미안. 나는 너랑 친구였던 기억이 없어서. 그럼 가계약 잘해. 그 집, 귀신 들린 것도 아니고 고양이가 살지도 않았으니까 가위눌릴 일은 없을 거야.”
보영은 담담하게 말하며 빙긋 웃곤 부동산 사장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차피 저는 세입자니까 집주인과 이야기 잘해서 계약 성사해 주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영은 그대로 돌아서 그곳을 나왔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사실 속은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부글부글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윤희는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웃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학창 시절은 그런 수준의 추억이 아니었다.
귀신이 들렸네, 저주를 퍼부을 줄 아네, 쟤네 엄마가 무당이라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그녀는 늘 혼자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숨만 쉬고 있어도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누군가는 그녀와 눈만 마주쳐도 욕을 했고, 또 누군가는 그녀와 몸만 스쳐도 그 자리를 툭툭 털어 내기 바빴다.
고양이와 대화할 줄 안다는 비밀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가 정신 질환이 있다고 몰리기도 했었다.
“하아, 진짜.”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녀가 고양이와 거리를 두고, 정상적인 척 행동하자 그런 일은 적어졌지만 그래도 한 번 깊게 새겨진 상처는 덮어진 뿐 아문 것은 아니었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기분을 해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털어 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보영은 집으로 가는 길에 방향을 조금 틀었다.
호텔과는 몇 정거장 떨어진 실개천 쪽이었는데 공원 옆쪽으로 꽤 깔끔한 포장마차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영업하세요?”
“네. 뭐 드릴까요?”
“우선 어묵 세 개 하고 닭똥집…… 소주 한 병요.”
보영은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고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았다. 포차 주인이 곧 어묵과 소주를 가져다주었다.
“후우.”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동시에 기분이 미친 듯이 저조해졌다.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연거푸 들이켜기를 반복했다.
뒤늦게 닭똥집이 나왔을 때는 이미 소주 한 병이 거의 바닥이 났다.
“한 병 더 줘?”
“아, 네. 부탁드립니다.”
포차 주인이 또 한 병을 가져다줬다.
보영은 이번엔 잔을 채워 놓고 그 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실 어렸을 때의 일은 누구의 탓을 할 게 아니었다. 다들 어렸으니까.
‘그래도 머리가 이만큼 컸으면. 그때 그 일의 가해자 중 하나였으면. 반성을 해야 하지 않나? 내가 이상한 걸까, 그 애가 이상한 걸까?’
“……짜증 나.”
동일이라도 부를까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혼자 이러고 있으니 청승맞고 기분이 더 처지기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일이라면 뭐 그런 것 가지고 혼술이냐면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그녀를 웃게 할 것 같았다.
“……아직 배달 중이겠다. 톡이나…….”
오후 8시였다. 최근에는 택배 물량이 많이 늘었다고 밤 10시까지 배달하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들었었다.
보영은 톡을 보내 놓고 닭똥집을 입에 물었다.
「배고프다.」
옆에서 들린 소리에 보영이 길가를 바라보았다. 길고양이 하나가 포차 가장자리에서 얼굴만 내민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장은 이 포차에 손님이라곤 그녀뿐이었기 때문이다.
“줄까?”
보영은 닭똥집 옆에 함께 나온 오이 하나를 들었다.
「바닥에 누가 흘리는 거라도 없나?」
“이리 와. 줄게. 누렁아.”
「……잉?」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보영은 씨익 웃으며 오이를 살짝 흔들었다.
고양이가 미심쩍어하는 눈치로 가만히 있기만 하자, 보영은 고양이 쪽으로 오이를 가볍게 던졌다.
「엇!」
고양이가 놀라서 뒤로 도망갔다가 오이를 향해 조심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오이를 먹기 시작했다.
보영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보았다. 참 열심히도 먹는다.
‘저 아이에겐 이게 곧 생존의 문제겠지.’
보영이 쓰게 웃고는 다시 바로 앉았다가 앞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데서 혼자 술도 마실 줄 알아요?”
어째서인지 트레이닝복 차림의 이현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네요.”
“다니는 클럽이 저 건너라서.”
이현이 실개천 너머에 있는 신식 빌딩을 가리켰다.
“그냥 정 비서 닮은 사람인가 했네. 술 세나 봐요? 벌써 한 병 비웠네.”
이현이 빈 병을 들어 보이고 곧바로 두 번째 병을 가리켰다. 이미 반이 비어져 있었다.
보영은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술이 센 편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취기가 올라 머릿속이 얼얼했다.
다만 이따가 동일이 올 거라는 생각에 편하게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보영은 그가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자 부러 발음을 명확히 하려 애쓰며 물었다.
“글쎄요. 가길 바라는 눈치라 그냥 있어 볼까 하는데.”
“네?”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했어요?”
보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취기가 오르니 평소 잘 통제되던 얼굴 근육이 제 맘 같지 않았다.
“아뇨. 생각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저쪽이라면 연락처밖에 모르거든요.”
“연락처?”
“문자로만 연락합니다.”
보영은 입술을 꽉 물었지만 한 번 터진 웃음기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아, 나 취했구나.’
그녀는 취기가 오르면 실실 웃는 주사가 있었다.
동일이 사람을 꼭 비웃는 것 같다며 기분 나쁘다고 하기도 했었다.
보영은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 앞으로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보영은 눈을 들었다.
“내 라인으로 타기로 했으면 보여 줄 수 있죠, 그 문자.”
보영은 그를 멀거니 보았다. 얼얼한 머릿속으로 보여 줘야 하나 고민을 해 보려 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망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네.”
이현이 이죽거렸다. 보영은 짙은 한숨을 쉬곤 휴대폰 잠금을 풀어 내밀었다.
“보세요. 별거 없으니까요.”
보영은 언제 웃음이 터질지 몰라 볼 안쪽을 이로 꽉 문 채 이현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휴대폰을 받아 들곤 액정을 보았다.
“이걸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요?”
“네.”
“그럼 정 비서 어머니 병원비는요?”
딱히 할 일이 없어 저도 모르게 또 잔을 비우던 보영이 멈칫, 잔을 내려놓았다.
“그쪽이 알아서 처리했더라고요.”
“정 비서, 생각보다 순진하네. 딱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고작 문자. 이걸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요?”
이현이 그녀를 딱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보영은 어쩔 새도 없이 또다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게 문제였다. 술을 마시면 모든 감정 표현이 웃음으로 나왔다.
“믿을 수밖에요. 생각해 보세요. 제 스펙으로 어떻게 사장님 비서가 될 수 있었겠어요? 저쪽에서 낙하산으로 꽂아 줬으니 가능한 겁니다.”
“……취했어요?”
“그럴걸요.”
“술 센 거 아니었어요?”
“제 입으로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하?”
이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영은 또다시 소주를 반 잔 따라 들이켰다.
그때였다. 보영의 휴대폰이 지이잉, 울렸다.
“문자가…….”
“그렇군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데?”
이현이 액정을 보고 그녀에게 다시 건네려다 멈췄다.
닭똥집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보영은 그가 휴대폰을 주지 않자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옛날엔 지금 같지 않았나 봐요.”
이현이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문자를 봤어요.”
보영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모르는 번호였다.
[중학교 때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니 유감이다. 난 그저 반가워서 그런 건데. 그래도 없는 말은 아니잖아. 네가 겉돌았고, 고양이와 말을 할 줄 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선미가 고양이 때문에 다친 것도 없는 일은 아니었잖아. 그러니 애들이 다 널 꺼렸지. 날 비난하기 전에 너 스스로 반성을 해 보는 건 어떠니?]
보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화가 나서였다. 겨우 길고양이와 이현으로 인해 그 생각에서 벗어났는데 말이다.
보영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뒤집었다.
“학생 때 놀았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소위 노는 학생이었냐고. 아니면 다들 꺼릴 만큼 굉장히 잘났다거나.”
“네?”
“여자들이 이렇게 헐뜯고 깎아 내리는 건 질투…… 일 경우가 대다수라던데.”
보영은 조금 어지러운 시야로 눈앞의 이현을 보았다.
그는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긴, 어렸을 때 상처가 오래가긴 하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고 때론 독이 되기도 하고.”
그의 말이 웅웅 울려서 들렸다. 보영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연거푸 마셔 댄 술이 뒤늦게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자꾸 웃지?”
“제 마음입니다.”
보영은 자신의 입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표정도.
“할 말 다 하셨으면 가 보십시오. 저는 닭똥집 마저 먹고 갈 겁니다.”
“닭똥집?”
이 남자는 닭똥집을 분명히 먹어 본 적 없을 거다.
훗. 그녀는 닭똥집도 먹는다.
괜히 으스대는 기분이 들어 더 짙게 웃은 보영은 닭똥집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왕따당해 보셨습니까?”
오물거리던 보영이 툭 뱉었다.
“안 당해 보셨으면 말을 하지 마십시오. 아는 척하기는.”
“뭐?”
“모쪼록 이해해 주십시오, 사장님. 제가 지금 취해서 간덩이가 이만해졌고 눈에 뵈는 것도 없거든요.”
두 손을 크게 벌려 보인 보영이 다시 술잔을 잡았다.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먼저 가십시오.”
보영은 비서로서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실낱같은 이성을 붙들고 이현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난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은 까맣게 꺼졌다.
* * *
타는 것 같은 갈증이 느껴졌다.
끄응.
보영은 손으로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눈을 떴다. 사방이 컴컴했다.
“……으음.”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짚고 상체를 세우던 보영이 흠칫했다.
손에 닿은 감촉이 침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죽 질감이었다.
그녀의 방에는 가죽 질감의 가구가 없다. 그걸 깨닫는 순간 잠이 홀딱 깼다.
소파에서 구르듯 내려온 보영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야옹!”
“아…….”
어둠 속 한편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탁 풀렸다.
눈에 익은 집이었다.
검은 가죽 소파, 모던한 회색 테이블, 스크린에 버금가는 대형 TV와 수납장에 꽂혀 있는 야구 잡지들.
이현의 집이었다.
‘맙소사.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보영은 패닉에 빠졌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 보자. 어제 포차에서 사장님이 앞에 있었고…….’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이현에게 잘 가라고 인사한 후의 기억이 없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보니 이렇게 기억이 끊긴 적이 없었다.
‘두 병…… 가까이 마셨었지.’
그녀의 주량은 소주 한 병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동일을 불렀기에 안심했나 보다.
스스로 절제해야 했는데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았던 터라 넘어가는 대로 마셨더니 이 사달이었다.
「이제 괜찮은가 보네. 막 욱욱거리더니.」
발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보영이 몸을 숙였다.
“어떻게 된 건지…… 봤어?”
「우리 오빠가 정 비서를 업고 왔어. 진짜 웃겼다?」
“하아…….”
보영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전 직장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를 여기서는 왜 자꾸 하게 될까.’
「정 비서는 우리 오빠한테 고마워해야 돼. 나 같으면 길에 버렸을 거야.」
보영이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라 그런지 어둠 속에서 눈이 더 반짝거리며 빛났다.
「사이코, 다중 인격자, 얼굴만 잘나면 뭐 하냐, 인성이 폭탄인데…… 세상에! 그런 말을 듣고도 우리 오빠는 정 비서를 때리지도 않았다? 착하지?」
“뭐라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나비는 너무 솔직해서 잔인했다.
「정 비서가 우리 오빠한테 막 손가락 콕! 찍고 소리 질렀어. 이 사이코! 다중 인격자! 얼굴만 잘나면 뭐 해! 얼굴 뜯어먹고 사냐! 인성이 폭탄이야!」
그리고 나비는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
「잘해 주든가 못되게 굴든가 하나만 해!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나비가 한쪽 앞발을 들고 장난치듯 휘저었다.
보영은 정말 혀를 콱 깨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거짓말…….”
「내가 거짓말을 왜 해?」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대답하는 모양은 충분히 앙증맞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이 원수다.
보영이 망연하게 이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 지금 몇 시……?”
보영은 벽시계를 찾았다. 디지털시계라 한눈에 들어왔다. 새벽 3시였다.
‘집에 가야 하나,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감사 인사를 해야 하나.’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더 자. 인간들은 해가 밝아야 움직이잖아. 우리 오빠는 야행성이지만.」
“뭐?”
보영은 소파 밑에 몸을 말고 있는 나비를 돌아보았다.
“야행성이라니? 지금 깨 있어?”
혹시 몰라 소리를 한껏 죽이고 물었다. 나비는 안방 문을 물끄러미 보다 다시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글쎄, 숨소리는 규칙적인데 자려나?」
“자면 자는 거지, 자려나는 뭐야?”
「잠을 잘 못 자.」
“무슨 말이야?”
「자려고 눕기는 하는데 엄청 오래 뒤척여.」
“불면증…… 이라도 있다는 거야?”
「불면증이 뭐야?」
나비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보영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담요를 끌어 무릎에 덮으며 안방을 보았다.
“말 그대로 잠을 잘 못 자는 거야.”
「그런가? 내가 봤을 땐 밤부터 아침까지 쭉 자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어. 아주 늦게 자고 아주 일찍 일어나. 우리 오빠는 엄청 부지런해.」
‘일부러든 아니든 충분히 잠을 못 자면 피곤할 텐데.’
이현에게서는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갈 거야?」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자 나비가 물었다.
보영은 난처한 얼굴로 나비를 보다 마음을 정했다.
이대로 집에 가기도 애매했다. 꼭 도망치는 것 같은 꼬락서니다.
‘술도 먹었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
“아니. 일단 잘 거야. 출근해야 하니까.”
보영은 다시 소파에 누우며 담요를 끌어 덮었다.
「응? 정 비서, 보기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네?」
“어쩌다 한 번씩 그런 구석이 있다고는 하더라.”
「누가?」
“삼촌이. 가끔 포기하면 편한 일도 있어. 절대 포기하면 안 될 일도 있지만.”
「그래?」
보영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비의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곤 눈을 감았다.
* * *
보영은 눈을 반짝 떴다. 안방 쪽에서 문소리가 났다.
거실에 쳐진 블라인드 틈 사이로 햇살이 따갑게 들이치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나비가 몸을 말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아침 6시였다.
‘일찍도 일어나시네.’
보영은 담요를 개서 소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앉아 있을지, 서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안방 문이 열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사장님.”
마치 말을 걸면 응답하는 AI처럼 보영이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연회색 셔츠에 검은 면 파자마 바지를 입은 이현이 입매를 삐딱하게 비틀었다.
“잘 잤어요?”
“네. 어제는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억은 나요?”
주방으로 이동한 이현이 물을 꺼내 마시며 물었다.
보영은 뜨끔했다. 꿍꿍이가 가득 담긴 어투였다.
“전혀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일이라.”
“제가 과음을 했습니다. 포차에서 사장님께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한 것 이후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컵을 아일랜드 바에 올려놓은 이현의 시선이 그녀와 마주쳤다.
“기억이란 게, 사람이 이용해 먹기에 따라서 굉장히 편리한 거였죠.”
“네?”
이현이 문득 보란 듯이 빙긋 웃었다. 보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살면서 어떤 사건을 겪은 적이 있어요. 그 일 후로 증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고요.”
이현이 파자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만지작거리더니 그녀에게 내보였다.
보영은 움찔했다. 동영상이었다.
볼이 살짝 붉을 뿐, 다소 멀쩡해 보이는 안색의 그녀가 피식피식 웃으며 휴대폰 쪽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이걸 왜…….’
소파에 앉아 이현을 향해 사이코니, 다중 인격자니 주절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비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었다.
“제가…… 음, 죄송합니다. 이 말밖에는…….”
“그게 다예요?”
그는 고약하면서도 반듯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빤히 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게 있으시면…….”
“그다지. 어떻게 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생각보다 반응이 싱겁네.”
‘지금은 제정신이니까요.’
보영은 다시는 이 인간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그 영상은…….”
이현이 액정을 끄고 다시 휴대폰을 넣으려 하기에 보영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현이 휴대폰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아, 미안해요.”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삭제하고 확인시키듯 보여 주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사람 놀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었나? 약점을 잡고 흔든다든가?’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행동하면 속으로 욕을 다발로 퍼부은 게 민망해질 참이다.
“그런데 정 비서, 주사가 특이해요.”
“네?”
무슨 의도인지 알쏭달쏭해 눈을 굴릴 때였다.
이현이 찬장에서 부스럭거리며 즉석식품을 꺼내 들었다. 모 회사의 해장국이었다.
“아, 아침은 괜찮습…….”
“정 비서 줄 거 아닌데. 내가 먹을 거예요. 정 비서 숙취에 찌든 얼굴을 보니 해장국이 당겨서요.”
“아…… 그렇…… 습니까.”
다정하고 자상하며 젠틀한 것뿐 아니라 사람 무안 주고 골리고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도 도가 튼 남자였다.
‘어쩌면 이렇게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할까.’
보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현관 방향을 힐끔 보았다.
“술로 사람 인성 180도 변하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고양이하고 대화하는 주사는 흔한 건 아니잖아요.”
슬슬 가서 출근 준비를 할까 하던 보영은 또 한 번 뜨끔했다.
“새벽 내내 나비는 야옹거리고 정 비서는 맞장구치듯 속닥거리던데요.”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잠귀가 밝아서요.”
냄비에 올린 맛깔스러운 해장국 냄새가 주방 가득 퍼졌다.
“아…… 제가 원래 술에 취하면 앞에 있는 게 뭐든 대화……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전에는 현관문을 앞에 두고 몇 시간씩 떠든 적도 있으니까요. 하하…….”
어색하게 웃은 보영은 뒷말은 괜히 했나 싶어 약간 후회했다.
“그러면 전 이만 가서 출근 준비하겠습니다. 밤새 죄송합니다.”
보영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현관으로 향했다. 나비가 그 뒤를 따랐다.
「정 비서, 가려고? 또 종일 혼자네. 에이.」
“보면 고양이가 참 잘 따라요, 정 비서.”
“……아, 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현이 아일랜드 바 옆으로 나와 복도 끝 현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보영은 나비의 몸을 쓸어 주곤 다시 한번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신고 이현의 집을 나왔다.
“하아.”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보영은 진이 빠진 얼굴로 이현의 집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미쳤지. 돌았지.’
보영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 * *
― 야! 어떻게 된 거야! 가니까 너는 없고! 포차 아줌마도 모른다고 하고! 헛걸음했잖아!
“미안해, 삼촌. 내가 어제 과음을 좀 해서…… 집에 일찍 왔어.”
― 그러면 연락이라도 줘야지! 걱정했잖아! 다 큰 게 술은 마셨다지, 가니까 없지, 전화도 안 받지!
보영은 뷰러로 속눈썹을 올리다 휴대폰을 힐끔 보았다.
출근 준비를 하느라 스피커폰이었는데 귀가 다 쨍하도록 동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왜 생전 마시지도 않는 술을 마시고 사람을 불러! 무슨 일 있었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나중에 형님 얼굴을 어떻게 보냐!
“아니, 그냥…… 아무튼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주말에 삼촌 좋아하는 회라도 쏴야겠다. 그렇지?”
― 회?
순식간에 반색하는 동일의 목소리에 보영이 피식 웃었다.
“응, 연락할게. 삼촌, 나 지금 출근 준비하거든? 미안해. 오늘도 안전 운전하고!”
보영은 동일의 잔소리가 길어질까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일정 알람이었다.
“아…… 벌써 날짜가…….”
수술 때문에 엄마가 요양 병원에서 서 교수가 있는 W대학 병원으로 옮기기로 한 날이었다. 오후 반차는 이미 내 두었다.
“하루가 길겠네.”
중얼거린 보영이 가방을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지만 조금 늑장을 부릴 걸 하고 곧장 후회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안에 이현이 먼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영은 당황한 티를 내는 대신, 입가를 당기며 인사하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아침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이현보다 조금 뒤쪽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던 보영은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먼저 운을 뗐다.
“그럭저럭요.”
그러나 성의 없는 대답에 보영은 억지로 빙긋 웃곤 다시 엘리베이터 숫자를 올려다보았다.
다행이 층수가 높지 않아 곧장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보영은 이현이 먼저 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내리는 대신 손을 그녀에게로 뻗었다.
그리고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이현의 손가락이 그녀의 오른편 머리카락을 가볍게 훑었다.
“뭐 하시는……!”
그녀가 거의 경기하듯 반응하자 손을 다시 가져간 이현이 미간을 살짝 좁히곤 입매를 비틀었다.
“엉켰는지 옆머리가 삐죽 튀어나와서.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갑자기 다가오시니까……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처리했을 텐데요.”
보영은 그와 거리를 조금 벌리곤 손가락으로 정수리 쪽부터 머리카락을 머쓱하게 훑어 내렸다.
“내가 어제 정 비서 업고 왔을 때 맨정신이었으면 비명부터 질렀겠어요.”
“네?”
“어제는 괜찮고 오늘은 이런 취급이니까 해 본 말이에요.”
“그게…….”
“당장 다음 주말에 작은아버지 생신 겸 식사 자리에 가야 하는데 이래서 되겠어요? 나하고 연애하는 사이라는 건 잊지 않았죠?”
“네.”
“그날도 이렇게 닿았다고 경기하듯 반응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보영은 납득했다. 그녀가 과민하게 반응했다.
입을 열려던 보영은 이현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자 얼른 다시 열려 했다.
하지만 그 앞을 이현이 막아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보영이 눈을 크게 떴다. 반보 정도 앞에 있던 그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코앞에 이현이 입은 쥐색 슈트의 체스트 포켓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앞으로 이 정도 거리는 괜찮아야 해요.”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말끝에 압박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가볍게 만지는 것도.”
이현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쥐었다.
놀라 올려다보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과하게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손 정도는 줘야 할 거예요. 이건 애들 소꿉놀이가 아니니까.”
낮게 뇌까렸지만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를 어르듯 말한다.
‘이건 또 뭘까.’
그녀가 처음 알았던 부드럽고 자상한 태이현과 가면을 벗은 후의 차가운 태이현이 뒤섞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익숙해지도록 해요. 그게 내가 정 비서를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이유니까.”
이현의 박력에 다소 위축되었던 보영은 이어진 그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일회용 소모품이었고, 어쩌다 고래 싸움에 등판한 불쌍한 새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녀의 인생이 있고, 의지가 있고,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여기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알겠습니다. 손이면 되겠습니까?”
반발심이 든 보영은 담담한 기색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쥔 이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깍지라도 끼면 더 연인처럼 보일 겁니다.”
입가를 싱긋 당긴 보영은 그와 눈을 맞췄다.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어머!”
낯이 익은 아줌마였다. 일전에 동일과 택배 기사 운운하며 설전을 벌였던 이현의 이웃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엘리베이터에서 이게 뭐 하는……! 에? 이게 누구야? 이현 씨?”
친근하게 그의 이름이 불리자 그녀를 보고 있던 이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정말이지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안녕하세요.”
“이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거야……? 우리 애가 봤으면 어쩔 뻔했어. 세상에, 망측해라!”
여자가 차마 막무가내로 화는 내지 못하고 못마땅한 태도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이현이 무슨 대답을 하기 전에 보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제 머리에 뭐가 묻어서 사장님께서 털어 주시느라고요. 생각하시는 망측한 일은 없었습니다.”
“아니, 위계질서가 뭐 그렇대? 뭐가 묻었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가깝잖아. 둘이 사장, 직원 사이 맞아요? 게다가 이현 씨가 그냥 사장도 아니고 자그마치……!”
“아뇨.”
보영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빙긋 웃었다.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장소 가리며 조심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보영이 옆으로 비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현을 향해 말했다.
“가시죠, 사장님.”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이현은 내내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감쪽같이 속았던 예의 젠틀하고 자상하며 서글서글한 그 미소 말이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여사님.”
여자를 향해 가볍게 인사한 이현이 걸음을 디뎠다. 보영도 곧장 그를 따라갔다.
“무슨 생각이에요?”
공동 출입구를 지나 나오자 이현이 물었다.
“사장님과 제 관계에 대해 회장님께서 따로 알아보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주변에 넌지시 알려 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이건 애들 소꿉장난이 아니니까요.”
“그래요? 다행히 제대로 해 볼 마음이 있긴 한가 봐요.”
“네.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까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장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웠던 때 동급생의 노골적인 따돌림도 버텨 냈던 그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찌들고 타협해서 그렇지 마냥 온순하고 수동적이지는 않았다.
“다행이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되네요.”
보영은 빙긋, 사회적인 얼굴로 웃었다.
* * *
“어떻게…… 둘이 같이 출근하십니까?”
그를 보고 인사를 하려던 재일이 뒤따라 들어서는 보영을 보곤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재일은 그에 관해서라면 평소 냉철한 가면이 쉽게 깨졌다.
‘내 일이라면 얼굴색부터 달라져서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건 어쩌면 형보다 정보영이 조금 나을 수도 있겠네.’
이현은 고소를 삼켰다.
‘너무 좋아해도 탈이야.’
재일의 절대적인 충성과 애정은 고마웠지만 저 형, 저래서 연애는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장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같은 사택에 살잖아요. 출근길이 겹쳤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죠. 오늘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현은 자신의 자리로 가 가방을 내려놓는 보영을 힐끔 보았다.
드러내지 않을 뿐, 때때로 발끈하는 걸 봐서 성깔이 있다는 건 알았다.
〈알겠습니다. 손이면 되겠습니까? 깍지라도 끼면 더 연인처럼 보일 겁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얌전한 척하면서 살살 반응하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정 비서.”
“네?”
이현은 사장실로 들어가기 전 문득 떠올랐다는 양 운을 뗐다.
“우리 집에 두고 간 건 없어요? 아침에 정신없이 나갔으니까 흘린 게 없나 해서요.”
보영이 입을 멍청하게 벌리곤 경악스러운 얼굴로 굳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이게 무슨 말이죠? 정 비서!”
“아니, 이건…… 그러니까…….”
재일이 다그치자 보영이 그와 재일을 번갈아 보며 입을 더듬더듬 벌렸다.
“별거 아니에요. 어제 정 비서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거든요.”
이현이 나긋하게 웃으며 사장실 문고리를 잡았다.
“두고 간 게 없다니 다행이에요. 아침도 같이 먹을 걸 그랬나 나중에 생각나서 미안했어요.”
보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제 술 마셨을 때처럼 말이다.
이현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곤 사장실로 들어왔다. 질세라 재일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무슨 말이야? 자고 가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따라 들어와.”
“말해 봐. 정 비서하고 무슨 일 있었어? 잊었어? 정 비서가 누군지? 애초에 연애니 뭐니 하는 설정도 마음에 안 들었어.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어때?”
“형, 나 아직 앉지도 못했다.”
“누가 앉지 말래?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희 집에서 정 비서 재웠어? 설마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난 건 아니지?”
“아, 정말.”
이현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재일을 향해 실소를 흘리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상에 기대섰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그래.”
“그럼…… 조금 전에 그 대화는 뭔데?”
“정 비서가 술에 취했길래 사택까지 데려왔는데 집 비밀번호를 몰라서 거실에서 재운 것뿐이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그럼 길에 버려?”
그가 웃으며 묻자 재일이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사용하기 가장 편리한 말이야. 일일이 열 올리지 마.”
사실 이현으로서는 일타이피의 상황이었다. 보영도 놀리고 재일도 골리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입가에 핀 의뭉스러운 웃음의 뜻을 모를 리 없는 재일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래도 적당히 해. 정 비서와 선은 분명히 지키고.”
“당연히 그럴 거야.”
정밀 믿어도 되겠냐는 얼굴로 그를 빤히 보던 재일이 다시 돌아 나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아, 그리고 그 남자 말이야.”
“어?”
이현은 자리로 돌아가려다 멈칫했다.
“꼬리를 잡았다.”
“……어디 있어?”
“경찰이더라.”
“경찰? 어디 서? 서울에 있어?”
이현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앞으로 디뎠다. 하지만 재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경찰이었지. 죽었어.”
“뭐?”
“자세한 건 알아보고 있어. 정리되는 대로 바로 보고할게. 이렇게 돼서 유감이다.”
재일이 어두운 얼굴로 몸을 돌려 나갔다.
‘죽었다고…….’
이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평생을 미국에서 죽은 듯이 살았을 거다.
살인자의 아들로 태씨 일가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하지만 그 남자가 준 검은 비닐봉지 속 물건을 시작으로 여기까지 왔다.
‘경찰이라서 그 모든 일에 관여했던 걸까? 아니면 경찰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있을 수 있었던 걸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가장 확실한 인적 증거를 잃은 셈이다.
똑똑!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사장실 문이 다시 열렸다. 재일이었다.
“아까 깜빡하고 묻지 못했는데, 돌아오는 태석준 사장님 생신에 선물로 뭘 준비할까?”
“청심환.”
“뭐?”
“할아버지하고 고모 것도 같이.”
이현이 냉랭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핏줄 간에 한바탕 골육상잔(骨肉相殘)이 일어날 텐데, 다들 나이가 있으시니 심장은 조심해야 하잖아.”
재일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정 비서, 오늘 오후에 반차 냈어.”
“반차?”
“개인적인 이유라던데.”
재일의 성격이라면 시시콜콜 묻진 않았을 거다. 이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점박아?”
보영은 요양원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점박이 무늬 고양이를 찾았다.
일전에 엄마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봐 달라고 한 부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찾지 않아도 먼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고양이는 오늘따라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영 씨! 어머님 짐 좀 확인해 주세요!”
“아, 네.”
요양원 측에서 전원 서류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나온 차였기에 보영은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이제 비워야 하는 엄마의 방은 다소 어수선했다.
“저희가 정리해 놓을 걸 그랬나 봐요.”
“아뇨. 괜찮아요. 금방 하는데요.”
보영은 방에 있는 4자짜리 장을 열었다.
안에는 옷이 몇 벌 걸려 있고 그 아래 기초 화장품과 책 두어 권, 세면 용품 같은 것들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을 준비해 온 쇼퍼백에 담고 이어 서랍도 열었다.
“어…… 선생님. 죄송한데 혹시 손님이 오신 적 있나요?”
“아니요. 최근엔 그 넉살 좋은 삼촌도 안 왔었는데요?”
간호사의 대답에 보영은 의아하게 3단 서랍 안을 보았다.
순아는 아프고 난 후에도 몸에 밴 습관만큼은 쉽게 잊지 않았다.
정리벽이 있었기에 늘 주변이 깔끔했다. 한데 서랍 안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세 칸 모두 그랬다.
“왜 그래요?”
간호사가 곁으로 와 서랍을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엄마가…… 최근에는 정리를 못 할 만큼 컨디션이 안 좋았나 봐요.”
“음. 그럴지도요. 큰 병원으로 가실 걸 알았는지 잠을 잘 못 주무셨거든요.”
“그래요?”
보영은 침대에 앉아 창밖만 멍하게 보고 있는 순아의 옆모습을 보았다.
오늘은 무슨 말을 붙여도 한마디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영은 이내 서랍 안의 물건들도 정리해서 다른 쇼퍼백에 담았다.
오랜 병원 생활 탓에 짐이 꽤 되었다.
“수술 잘 받고 다시 올게요. 그때도 잘 부탁드려요.”
그동안 엄마를 잘 보살펴 준 간호사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작은 디퓨저를 전달한 보영이 이내 대학 병원 앰뷸런스에 올랐다.
* * *
“안녕하세요.”
입원 수속을 마친 보영은 드넓은 1인실에서 한숨을 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
“간병인 고용하셨죠? 김성아라고 해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녀에게 명함과 이력서를 내밀었다.
그녀도 들어 본 적 있는 유명 간병 업체였다. 하루 간병비를 듣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었다.
병원 측에 간병인을 구한다는 부탁은 해 두었지만 이런 고급 업체에서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지이이이잉.
“잠시만요.”
보영은 문자를 확인했다. ‘S’였다.
[병실은 마음에 드십니까?]
‘아. ‘S’ 쪽에서 보낸 거였나…….’
보영이 다시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사실은 돌려보내고 싶었다.
서 교수의 수술과 빚 변제만으로도 이미 넘쳤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그녀의 숨통을 옥죄는 사슬처럼 느껴졌다.
“어머님 걱정은 마시고 가서 일 보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입원 직후 이리저리 오가며 검사란 검사는 모두 받은 탓인지 순아는 지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어머님 일과는 제가 사진 찍어서 수시로 보고할 테니 안심하세요.”
고민은 잠시였다. 보영은 일단 간호 데스크로 가 간병인 신청을 취소하고 병원을 나왔다.
간병인을 구할 때까지 병원에서 출퇴근을 해냐 하나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병원을 나온 보영은 한동안 정문 앞에서 멍하게 서 있었다.
몸이 지쳐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평소 생활 습관 탓에 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앞에 검은 SUV가 미끄러지듯 섰고 조수석 차창이 내려갔다.
“타요.”
“사장님?”
어쩐지 차가 낯익다 했다.
“여기 불법 주정차 구역이에요. 딱지 날아오니까 빨리 타요.”
‘왜 이 남자가 난데없이 여기 나타난 거지?’
그 순간 이현의 뒤에서 다른 차가 클랙슨을 울려 대기에 보영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반차 냈다고 들었어요. 우연히 정 비서 어머님이 이 병원으로 옮긴다는 걸 알게 돼서 지나가던 길이에요.”
“우연히…… 요?”
‘그럴 리가. 뒤를 캤든 어쨌든 알아봤겠지.’
보영은 때깔만큼은 좋게 말하는 이현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 판에 끼어 있는 이상 사생활 같은 건 없는 걸까?’
“간병인은 마음에 들어요?”
생각을 잇던 보영이 움칫했다.
“간병인요?”
“나름 신경 썼는데.”
보영은 자신을 김성아라고 소개했던 40대 중반의 여자를 떠올렸다.
어깨에 겨우 닿는 중단발을 하나로 질끈 묶은 그녀는 통통한 체구에 다부진 인상이었다.
‘‘S’가 아니었어?’
“왜…….”
이현은 운전을 하며 그녀를 눈 끝으로 힐끔 보았다.
“저쪽에선 어머님 병원비와 수술, 그리고 의료진까지 해결해 줬죠? 나도 뭔가 내놓아야 정 비서가 저쪽과 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것 같아서랄까.”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제가 한 말은 지킵니다.”
“나한테 들켰기 때문에 저쪽과의 약속은 안 지키게 된 셈이잖아요. 상황에 따라서 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뇌물을 먹이시는 겁니까?”
“뇌물이란 단어는 너무 자극적이지 않아요?”
“그럼 달리 무슨 단어를 쓰겠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죠. 대외적으로 정 비서는 내 연인이에요. 연인의 어머니가 수술을 하신다는데 이 정도는 하는 게 내 위치와 입장상 당연한 연출이 아닐까 하는데.”
“그 말씀은.”
“내가 정 비서와 하는 모든 행동은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 거예요. 사람이 붙었거든요.”
“네?”
보영은 사이드 미러를 통해 괜스레 뒤차나 옆 차를 유심히 보았다.
그렇다면 그녀도 항시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그렇게 눈에 띄게는 안 붙죠.”
이현이 입매를 삐딱하게 휘었다.
“할아버지 수행진 쪽을 통해 들은 거예요. 말만 연애한다고 하면 뭐 해. 데이트 한 번을 안 하는데.”
“네?”
“저녁 먹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보여 주기 위한 사적인 시간을 갖겠다는 건가?’
보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좋아해요.”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남자다. 보영은 대답 대신 턱에 힘을 바짝 주곤 실소를 삼켰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면 좋겠습니다. 원래 집에 가서 하려던 일이 있어서요. 한 시간 정도 내 드리면 될까요?”
이현이 어쭈, 하는 얼굴로 그녀를 본다. 보영은 부러 단정한 미소를 짓곤 정중하게 대답했다.
“평소 사장님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만큼, 사적인 시간에는 제 사생활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연기여도요. 저도 책임져야 할 일이 많은 만큼 바빠서요.”
“아, 그래요?”
“네. 죄송합니다.”
자신이 그가 부리는 직원이어도 마냥 만만해지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재워 두었던 성미를 자꾸 건드렸다. 고깝게 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이현이 제안했다.
“정 비서 집으로 가요.”
“네?”
“한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이현이 의뭉스럽지만 불건전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집에 왕래가 있으면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겠죠.”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괜스레 가슴이 덜그럭거리며 요란해졌다.
“집이 좁아서…….”
“상관없어요. 정 비서는 정 비서 할 일 해요.”
그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 * *
동일 말고 그녀의 공간에 가족이 아닌 남자를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현관문을 연 보영은 바로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찾았다.
하지만 스위치를 찾는 그녀의 손끝을 그가 뒤에서 잡아 내렸다.
“커튼은 쳐져 있어요?”
마치 제집인 것처럼 어두운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간 그는 곧장 거실 겸 방이 있는 공간으로 가 커튼을 더욱 꼼꼼하게 쳤다.
“무드 등 같은 건?”
“그건…….”
보영은 침대 옆 협탁에 꽂아 둔 초승달 모양의 무드 등 스위치를 찾아 켰다.
할인 숍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플라스틱 등이었다.
“해야 한다는 일이 이 정도 밝기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네?”
“함께 집에 들어갔고, 어두워야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니까요.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해요? 피차 낯부끄러울 것 같은데.”
끄응.
보영은 대답 대신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물이면 돼요.”
이현은 침대 아래 무릎을 세우고 앉아 목을 이리저리 돌려 풀었다.
보영은 유리잔에 물을 따라 이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불편하실 텐데 식탁에…….”
“난 신경 쓰지 마요. 적당히 시간 때울 테니까.”
그는 정말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집을 구경하듯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녀의 눈길을 끌지도 않았다.
거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다.
‘아, 모르겠다. 신경 끄자.’
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은 보영은 처음엔 한동안 이현을 힐끔거리다 이내 화면에 집중했다.
간암 환자 수술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며, 간암 관련 카페에 가입해 정보도 검색했다.
“후우.”
한참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던 보영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주방과 방을 분리하는 파티션 사이로 침대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괸 이현이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자나?’
보영은 미동 없는 이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곧 눈을 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었지.’
나비가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장직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태양 호텔의 사업 영역은 비단 관리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임원진들과의 신경전과 제휴 업체와의 관계 유지, 끝도 없이 잡혀 있는 선약과 회의, 보고, 대외적인 공식 활동까지.
그의 업무량은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 자도 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예의 서글서글한 경영가의 얼굴로 소화하고 있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거기다가 대놓고 스파이인 비서도 괴롭혀야 하니까.’
입을 비죽인 보영은 고개를 모로 틀어 보란 듯이 이현을 보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대놓고 볼 일은 없으니 말이다.
‘생긴 건 정말 흠잡을 데 없네. 얄미워라.’
긴 장신과 탄탄해 보이는 몸, 진한 눈썹과 높은 콧대, 시원하고 서글서글한 눈매, 잡티 없는 피부와 남성적이지만 섬세한 얼굴선.
어느새 보영은 저도 모르게 이현의 얼굴을 멍하게 보았다.
‘많이 피곤한가? 불편해 보이는데 엄청 잘 자네. 불면증 의심 가는 사람 맞아?’
이제 그녀는 손 위에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이현을 구경했다.
‘재벌에, 사장에, 잘생긴 것도 모자라 일도 잘하는 저 남자와 연애? 내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백일몽이지만.’
보영은 의자 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 이현을 지나친 후에 붙박이장에 넣어 둔 얇은 담요를 꺼냈다.
그러곤 다시 살금살금 이현의 앞으로 가 담요를 펼쳐 덮어 줬다.
“음.”
그 순간 이현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눈을 떴다. 피곤한지 얇은 쌍꺼풀이 여러 겹으로 늘어나 있었다.
“죄송…… 합니다.”
그녀가 담요를 덮는 바람에 깬 것 같아 사과를 했을 때였다.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이현이 덥석 쥐었다.
“아…….”
보영은 숨을 들이켰다. 다소 몽롱해 보이는 이현의 눈자위가 마치 곧이라도 울 것처럼 붉었다.
“……몇 시예요?”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이현이 손을 떼곤 마른세수를 하며 그녀에게 시간을 물었다.
그가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땐 그저 피로감에 눈이 충혈된 것처럼 보였다.
“50분 정도 지났습니다. 9시 40분이에요.”
이미 미지근해져 버린 물을 한입에 털어 넣은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쓸게요.”
그가 화장실 문을 닫았고 잠시 후 나온 그는 얼굴이 젖어 있었다.
“졸았네요. 시간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가 볼게요.”
이현은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보영도 그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아까 그건 뭐였지?’
머릿속이 소란했다.
“어디까지 따라오려고. 이번엔 정 비서가 우리 집 가게요?”
“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보영은 이현을 따라 복도까지 나와 있었다.
부스럭. 그 순간 비상계단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 보영이 그쪽을 돌아보려는 때였다.
이현이 그녀의 팔을 당겼다. 어라, 하는 사이에 그녀는 이현의 품에 있었다.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쉬이.”
얼른 떨어지려 하는데 머리 위에서 이현의 잔잔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나 때문에 피곤했겠네. 잘 자.”
세상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눈을 들자 마주친 얼굴에 보영은 속절없이 심장이 내려앉았다.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온기를 머금은 눈빛이 오롯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얼른 들어가.”
‘저기 누가 있었던가? 예의 붙었다던 그 사람인가?’
보영은 이현이 이끄는 대로 어느새 현관문 안쪽에 서 있었다.
“하하…….”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보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을까.’
그의 이중적인 면을 이미 겪을 대로 겪은 후였다. 그는 생각보다 고약했고, 심술궂었고, 야비했으며 냉정했다.
‘그런데도 이런다고?’
보영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 * *
“태이현 사장님께서 생각하시는 태양 호텔의 미래는요?”
“현재에 안주하면 안 되겠죠. 지금까지 태양 호텔은 태양 그룹의 계열사라는 이름 덕을 본 것도 사실이니까요.”
“신랄하시네요.”
“발전하기 위해서 자기 평가는 가혹해야죠.”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기 전 몇 가지 더 물어도 될까요?”
이현은 한 경제지 매체와 인터뷰 중이었고 보영은 그를 보좌하기 위해 같은 공간에 있었다.
기자는 사장실의 소파에 이현과 마주 앉아 편한 분위기로 인터뷰를 이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운동선수 시절에 대한 미련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보영은 힐끔 이현의 뒤통수를 보았다.
기억하고 있다. 강릉에서 소년 야구단 후원을 위해 방문했던 당시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던 얼굴을 말이다.
‘거짓말.’
“꽤 미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한창 활약을 시작할 때 부상으로 그만두신 거니까요.”
“역설적으로는 어린 나이에 몸이 망가질 만큼 열중했기에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현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반쯤 농담처럼 말했다.
꽤 노련해 보였던 기자는 어색한 웃음을 삼켰다.
“혹시 연예계 진출 생각은 없으시고요? 정말 그 피지컬과 얼굴이 아까운데요.”
“칭찬 감사하지만 제가 끼는 모자라서요. 요즘은 외모보다 개성과 재능으로 어필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만.”
“한마디를 그냥 넘어오시질 않네요.”
“아, 넘어가 드려요?”
기자와 부드럽지만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인데, 이건 원하시면 오프 더 레코드로 묻어 두겠습니다.”
기자는 정말이라는 태도로 테이블 위에서 돌아가던 녹음기를 중지했다.
“무슨 질문인지 모르지만 조금 겁나는데요.”
“저보다는 태이현 사장님을 아는 대부분의 여성분들이 궁금해할 질문이죠.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에게 재벌의 연애사는 쉽게 흥분하는 가십거리이기도 하고요.”
“아아, 그쪽인가요?”
“사장님도 이제 슬슬 적령기이신데 진지하게 만나고 계신 여성분이 있으십니까?”
있는 듯 없는 듯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던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있습니다.”
‘설마! 그걸 이런 데서도 얘기하고 다녀야 하는 거야?’
태훈 회장에게만 들어가면 될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공식적인 매체와의 인터뷰였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범국민적인 화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머리에 피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정말요? 아, 이렇게 바로 대답해 주실 줄은 미처 생각 못 해서, 음.”
기자도 당황했는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을 골랐다.
“어…… 그러면 혹시 어느 집 자제분이신지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어느 집 자제요?”
“태 회장님도 무척 기뻐하시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회장님께서 안배해 주신 자립니까?”
“전혀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 살짝만 말해 주십시오. 사장님처럼 ‘그들이 사는 세상’에 속해 있는 분들은 그룹끼리 혹은 정·재계로 묶여 인맥 유지하는 게 흔한 얘기 아닙니까.”
“‘그들이 사는 세상’요? 전혀 연관 없는데요.”
“에?”
보영은 저도 모르게 아래로 모아 쥐고 있던 손을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이 가짜 연애가 진실처럼 보여야 하는 거야?’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할지도 미지수고요.”
이현은 안달이 난 기자와는 달리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의외네요.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니요. 요즘에도 그런 말을 씁니까? 이래서는 있지도 않은 ‘계급’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꼴 같은데요.”
이현은 평온하고 태연한 얼굴로 기자를 향해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기자가 어색한 얼굴로 웃고는 녹음기를 챙겨 집어넣었다.
“인터뷰 즐거웠습니다, 박 기자님.”
“저야말로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영은 조용히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난 박 기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정보영 비서님이라고 했었나요?”
“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박 기자가 문득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태이현 사장, 모시기 까다롭진 않습니까?”
“아뇨. 오히려 배려를 많이 해 주십니다. 늘 직원의 입장에서 헤아려 주시고요.”
“그래요? 그래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니 닮은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보이는 것만으로는 너무 완벽해서 사람 같지 않은 게 흠이라고 해야 하나.”
아쉽다는 얼굴로 박 기자가 중얼거렸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요?”
보영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분명히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했었지.’
“아, 뭐 업계에서 태 회장 눈치 봐서 다들 쉬쉬할 뿐이지 유명한 얘기인데…….”
박 기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그녀에게 몸을 살짝 기울여 소리를 낮췄다.
“상종 못 할 망나니라는 소문이 자자했어요. 난폭하고 다혈질적이고…… 태 회장이 소송 갈 뻔한 것도 여러 번 막았답디다.”
“……네?”
“하기야 모를 노릇이죠. 그 망나니 밑에서 저런 아들이라니. 말이 돼요? 태이현 사장이 사실은 태씨 핏줄이 아니라는 뒷말도 많아요. 태이현 사장 엄마가 유명하진 않았지만 배우 출신이잖아요. 예쁘긴 오지게 예뻤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 기자는 재미있지 않냐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데 다 지라시일 뿐이에요. 진실은 그들만이 알고 있겠죠.”
보영은 박 기자의 말에 어느 하나도 대꾸하지 못했다.
‘망나니? 핏줄이 아니라고?’
보영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사장실로 돌아왔다.
취재하는 동안 냈던 다과를 치우기 위해서였다.
“갔어요?”
“네.”
보영은 대답하며 이현을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태 씨 일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설마. 태석준 사장이 어떻게 생겼었지? 태인희 대표와는 조금 닮은 것 같은데.’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녀가 멍하게 보고 있자 이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닙니다.”
보영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혹시 내가 연애한다고 말한 것 때문에 그래요?”
“네?”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내가 정 비서와의 관계에 얼마나 진지한지 회장님께 보여 주기 위한 거였어요.”
“어디까지…… 속이는 겁니까?”
“어디까지?”
“이게 기사로 나가고 혹시 저와 관련된 소문이 퍼지면 시집가긴 그른 것 같아서요.”
“시집가려고요?”
“아직 계획은 없지만 혹시 모르죠.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래요? 그런 미래까지 생각하는지는 몰랐네. 나한테 하도 3주, 3주 노래를 불러서. 그 기간만 지나면 인생 끝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얘기했었잖아요.”
“그건…… 그랬습니다만.”
이현이 입매를 삐딱하게 비틀곤 웃음을 흘렸다.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긴 소문이 믿을 법한 건 못 되죠. 저에 관한 소문이 퍼져도 유언비어처럼 떠돌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그 기자님이 한 이상한 이야기처럼요.”
“이상한 얘기?”
빈 찻잔과 접시를 쟁반에 모으고 들어 올린 보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장님에 대한 지라시였습니다.”
“그래요?”
“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던데요.”
“아아.”
뭔지 짐작되는지 이현이 태연하게 웃었다.
“내 아버지가 망나니라는 얘길 하던가요?”
보영은 조금 후회했다. 경솔했다.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정말이에요.”
“네?”
“내 아버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망나니였어요.”
자신의 아버지가 망나니였다고 말하는 이현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가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치 온몸을 불살라 버릴 것 같은 분노가 그 밑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는…….”
“지라시에 실렸다고 해도 다 지어낸 말은 아니에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요?”
이현은 그 말을 끝으로 문가를 보았다. 나가라는 축객령이었다.
“죄송합니다.”
보영은 조용히 사장실을 나왔다. 맞은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온 재일이 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터뷰는 잘 끝났습니까?”
“……네.”
“사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후우.”
곧장 탕비실로 향하던 보영은 재일의 깊은 한숨에 힐끔 돌아보았다. 재일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는 곧 몸을 돌려 사장실로 들어갔다.
* * *
“이름은 정철우. 서대문 경찰서에서 강력반 계장으로 있었어.”
이현은 재일이 내민 서류를 훑었다.
“10년 전에 죽었어? 3월 7일이면…….”
“그래. 네가 미국으로 떠나고 2주 정도 됐을 때야.”
“사인은 교통사고…… 네. 순직이고.”
이현은 서류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서류에는 정철우가 수배된 범죄자를 쫓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되어 있었다.
“……시기가 너무 절묘한데.”
“그래.”
무려 형사계장이었다. 실적도 좋았다. 형사로서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 같았다.
‘경찰이기 때문에 내게 주었던 물건을 입수할 수 있었던 건가?’
한참 정철우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를 훑던 이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뭐야?”
이현이 턱짓하자 재일이 움찔하며 손에 쥐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곤 그것 역시 그에게 내밀었다.
“뭔데 표정이 그래?”
언뜻 보면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이현만은 재일이 퍽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재일과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16년이었다.
“보면 알아.”
이현은 재일로부터 서류를 받아 입구를 개봉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종이를 훑었다.
“이건…….”
“의아해했었지. 왜 하필 정보영인지. 이쪽 관련 전문 인력도 아니고 내놓을 만한 특별한 스펙도 없는데 왜 난데없이 정보영인지. 내 생각에 그게 그 이유 같다.”
이현은 재일을 힐끔 보곤 다시 종이에 시선을 꽂았다.
정철우의 가족 관계 증명서였다.
[배우자 이순아. 자녀 정보영.]
그 뒷장에는 이순아와 보영의 사진과 프로필이 간략하게 나와 있었다.
그도 매일, 매 순간 보고 있는 얼굴이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정철우가 우리가 쫓는 그 사람을 쫓았고, 그 과정에서 네게 준 물건을 입수했다면…….”
재일이 조심스레 자신의 추측을 피력했다.
“……정보영이 여기 있는 이유가 생각보다 단순하진 않을 것 같네.”
이현이 중얼거렸다.
“본인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고.”
10년 전 정철우라는 남자는 막 한국을 떠나려는 그를 찾아와 ‘어떤 물건’을 건넸다.
그건 한 권의 다이어리였고, 그 안에는 그가 반드시 자립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당시에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그런 걸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인생을 걸었던 야구를 포기해야 했고, 쫓기듯 한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무너져 버린 삶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물건’ 속에 적힌 일들에 대해 조금씩 파악해 갔고 모든 일에 확신이 생겼을 때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다.
대신 그 남자가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금은 죽었으며 그 딸은 어째서인지 ‘스파이’로 제 곁에 있었다.
“……재미있네.”
이현은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건 왜…….”
정철우의 교통사고 보고서였다. 내용을 읽어 내린 이현은 턱에 힘을 잔뜩 준 채 재일을 올려다보았다.
“뺑소니 차량이 대포차였다. 당시 정철우가 쫓던 범인은 묻지 마 폭행으로 수배된 자였고, 홍서동에서부터 사고가 일어난 강신동까지 일직선으로 도망갔지. 마치 거기 뭐가 있는 것처럼.”
재일이 보고서 위에 표시된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사를 맡긴 정보원의 말로는 경찰에 검거되기 직전의 범인이라면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를 택하는 게 유리하다는 거야. 하지만 범인은 택지 개발로 공사 차량만 다니는 인적 없는 곳으로 도망갔어.”
“정철우의 교통사고가…… 우연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내게 건넨 그 물건 때문에?”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고 2주 후 일어난 사고였다.
“그 사람은 정말…… 인간이기를 포기한 건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가 왈칵 일그러졌다.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며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셔츠 단추도 하나 풀어 내렸다.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서울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 범인. 당시 정철우가 쫓던 범인이라는 작자를 찾아. 어디에 있든 반드시.”
재일을 다시 돌아봤을 때, 이현은 평소의 안색을 되찾았다.
“정말 그 사람과 같은 핏줄이라는 거에 신물이 올라오네.”
농담처럼 말한 이현은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 * *
보영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었다.
“가면 7시 반쯤 되려나.”
보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수술이 이틀 후 토요일 아침으로 잡혔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대학 병원에서 주말 수술이 잦은 일은 아니란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보영은 아직 업무 중인 재일에게 인사를 하고 곧장 바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간병인이 틈틈이 사진과 문자를 함께 보내 주고 있었다.
오늘 진행한 검사와 식사를 얼마큼 했는지, 엄마의 기분이 어땠고 무슨 이야기를 주로 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고맙네.”
“나한테요 아니면 간병인한테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보영은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어느새 이현이 서 있었다.
“아까 퇴근하신 게 아니셨습니까……?”
“맞는데 깜빡 잊은 게 있어서요.”
‘왜 못 봤지?’
보영은 저도 모르게 복도 끝에 있는 비서실과 사장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다시 왔다면 그녀도 당연히 알아야 했다.
“잊은 게 사무실에 있는 건 아니에요.”
“아, 네.”
뭘 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보영은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곤 이현을 곁눈질했다.
나란히 선 그도 보영처럼 눈만 굴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늘도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있어요?”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현이 지하 1층을 누르고 물었다.
보영은 이어 1층을 누르며 대답했다.
“네. 엄마 수술이 며칠 안 남아서요. 병원에 가려고 합니다.”
“그럼 같이 가죠.”
이현이 1층을 눌러 취소했다. 보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현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장님이 왜 병원을…… 혹시 데려다주신다는 의미라면 괜찮습니다. 택시 탈 겁니다.”
보영은 다시 1층을 눌렀다. 하지만 이현이 곧장 다시 취소했다.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보영은 다시 1층을 눌렀다. 하지만 이현이 또다시 취소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사람이!’
보영은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물고 저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짜증을 꾹 내리눌렀다.
“사장님께서도 하루 종일 업무 보시느라 힘드셨을 텐데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보영이 다시 1층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현이 그녀의 손을 감싸 잡아 꾹 내렸기 때문이다.
“고집 진짜 세네요. 이쯤 하죠. 정 비서가 적당히 맞춰 줘야 그림이 아름답지 않겠어요?”
이현이 다정하고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야에 엘리베이터 모퉁이에 설치된 CCTV가 들어왔다.
‘설마 여기서도 연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보영은 부릅뜬 눈으로 열렬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이현은 여전히 그린 듯 반듯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꽉 덮어 잡은 손의 악력이 그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 CCTV가 말소리까지 녹화가 됐었나?’
그래도 특급 호텔 본사인데 설치된 장비가 어련히 좋을까.
보영은 일단 다시 앞을 보고 섰다. 이현의 손을 떨치려 슬그머니 팔에 힘을 줘 뒤로 뺐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사장님, 누가 보겠습니다.”
“이런 게 사내 연애의 맛 아니겠어요.”
이현이 장난스럽지만 달콤하게 웃는다. 보영은 그에 빙긋, 마주 웃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어떤 버전이라고 예고라도 하든가.’
보영은 층을 표기하는 디스플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시설이 좋은 만큼 엘리베이터는 벌써 1층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그가 원한대로 지하 1층에서 문이 열렸다.
“사장……!”
“차는 저쪽에 있어요.”
이현은 그녀에게 말을 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쥔 채 성큼성큼 걸어서 차에 다다르기가 무섭게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를 인도했다.
“사장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영은 혹시 몰라 목소리 볼륨을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답답해 죽겠다.
“……다음 주말에 있을 작은아버지 생신 식사 자리에 같이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네? 그야…….”
“생각해 보니까 내가 정 비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더라고. 예를 들면 가족사 같은.”
이현이 그녀의 손을 그제야 놓아주었다.
“누가 물으면 할 말이 너무 없잖아요. 그러니까 가는 동안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 하는데.”
“제 이야기를요?”
‘그런 거라면 적당히 입을 맞춰도 되지 않나?’
보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장님 아니야?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낯이 익은데…….”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보영은 저도 모르게 차 문 안쪽에 숨듯 허리를 숙이고 몸을 움츠렸다.
“뭐 해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현이 물었다.
보영은 눈꺼풀을 끔뻑이다 소리가 난 곳을 눈을 굴려 슬쩍 보았다.
호텔 직원인 듯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괜히 이상한 소문 돌면 안 되는데. 아까 기자한테도 나라고 콕 집어 말한 것도 아니었잖아.’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보영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허리를 곧게 펴며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제가 비서니까요. 수행하겠습니다.”
보영은 말을 이으며 열렬히 한쪽 방향을 눈짓했다.
그녀의 눈짓을 따라 돌아보았던 이현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요.”
이현이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빼 그녀의 손에 올려 두곤 조수석에 올라탔다.
보영은 정말이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사이 머릿수가 많아진 것 같다.
‘소문이 뭉게뭉게 몸집을 부풀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사장님, 뒤에 타시는 게…….”
보영이 이현을 향해 정중히 말했지만 이현은 좀처럼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왜요?”
“보통 사장님들은 뒤에 타시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그거 편견이에요. 난 앞자리가 좋아요.”
이현이 빙긋 웃었다.
‘그래, 네가 언제 내 말 들었니. 본색 드러내고 나선 더하면 더했지.’
보영은 부러 더 방긋 웃곤 보닛을 돌아 운전석 문을 열었다.
* * *
“정 비서에 대해 아무거나 말해 봐요.”
보영은 조수석을 힐끔 보았다.
‘왜 이래? 갑자기.’
이현은 대놓고 차창에 등을 비스듬하게 붙이곤 그녀를 향해 몸을 틀고 빤히 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뭘 말해 볼까요?”
보영은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말 그대로 아무거나요.”
“너무 포괄적이라서 뭘 말씀드려야 할지…….”
“내가 정 비서 뒷조사를 한 건 알잖아요. 봤으니까.”
직구가 날아왔다. 보영은 핸들을 꽉 틀어쥐었다.
대놓고 뒷조사를 했다니까 이건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종이 위에 없는 거면 좋겠죠.”
“거기 대부분 다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제 가족 관계라든지 이전 직장, 다녔던 학교와 전공은 아실 텐데요.”
“그건 알죠. 하지만 정 비서가 살아온 시간이 고작 종이 몇 장으로 서술이 될 정도로 단조롭고 별거 없었어요?”
보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남자라면 일부러 ‘단조롭다’라거나 ‘별거 없다’라는 말을 골라 쓴 것이리라.
이현은 가끔 기분을 나쁘게 해 발끈해서라도 본심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이상한 화법을 구사했다.
약삭빠른 여우인 건지, 영악한 뱀인 건지 모르겠다.
“당연히 인생이 단 몇 줄로 서술되는 단조롭고 별거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현이 장난치듯 빙글 웃었다. 따라서 어째서인지 그녀의 속이 괜스레 부글부글해졌다.
“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보영은 애초에 이현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곧바로 말을 이었다.
“사장님께서는 어떤 타입의 비서를 선호하십니까?”
“어떤 의미에서요? 능력? 성실? 충성심? 센스? 노력?”
말을 잇던 이현이 문득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고 충성심은 정 비서가 논할 건 아니지 않아요?”
보영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슬쩍 보니 이전에도 몇 번 그랬듯 골리려는 작태였다.
‘성격 나빠.’
보영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재차 떠올렸다.
“제가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무조건 복종하는 부하 직원이 좋으십니까,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무조건적인 칭찬과 아부로 표현하는 부하 직원이 좋으십니까?”
“하?”
“아니면 말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섬세하게 챙겨 주는 부하 직원이 좋으십니까?”
“보기가 너무 극단적인데.”
“혹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소신과 강단이 있는 부하 직원이 좋으십니까?”
“내가 대답하면 맞추려고요?”
“노력하겠습니다.”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요?”
“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요. 사장님과 제 관계가 여러모로 특수하다 보니 선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내가 원하는 방식에 맞추겠다?”
“네.”
“그게 가능해요?”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렇죠.”
신호등이 바뀌어 빨간불일 때에 맞춰 차를 세운 보영이 힐끔 이현을 보곤 의식적으로 또 한 번 입꼬리를 당겼다.
“그리고 이쯤에서 선을 그어 주시지 않으면 언젠가 하극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고요.”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서 이현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렸나?’
보영은 뜨끔했으나 모른 척 앞만 보았다.
“굳이 그중에 고르라면 소신과 강단이 있는 부하 직원 쪽이 좋겠어요. 꼭 부하 직원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그쪽이 더 좋고.”
“그럼 가끔 말대답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직언과 조언이면 더 좋겠죠.”
“그 직언이 사장님 인성에 대한 것이라도요?”
“내 인성? 아, 이중인격자? 그때 술 먹고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죠?”
보영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역시 성격이 나빴다.
‘그걸 걸고 넘어지냐. 좀생이.’
“죄송합니다.”
“사과 받아들이죠. 그리고 편한 대로 해요. 들이받아도 좋고, 하극상을 일으켜도 좋고.”
이현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재밌네, 웃기네 하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내 나름대로 조치하면 되니까.”
보영은 미간을 슬쩍 굳혔다. 나름대로 하겠다는 조치가 꼭 협박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역시나 힐끔 보니 웃고 있다.
‘성격 나빠. 어째서 처음에 그렇게 좋게 봤을까. 이 남자가 연기를 잘하는 거거나, 내가 아직도 세상 때가 덜 탔거나.’
“……알겠습니다.”
퇴근 시각이 겹쳐 꽉꽉 막히는 교통 사정 탓에 아직도 병원은 멀기만 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 비서 이야기를 해 보죠.”
내비게이션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쉰 보영은 이제 반쯤 포기했다.
뭘 그렇게 듣고 싶은지는 몰라도 물으면 묻는 대로 이야기할 참이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그런 웃긴 말도 있잖아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 웃긴 말이야?’
보영은 가시가 느껴지는 이현의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어머니는 아프시고……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요? 보고서에는…… ‘부(父), 사망’이라고만 적혀 있어서.”
아빠.
보영은 이제 까마득하기만 한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이 굵은 얼굴에 험상궂은 표정.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웃으면 입가에 팔자 보조개가 예쁘게 파였었다.
두껍고 다부진 몸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게 아빠의 매력이라고 했다.
“아빠는…….”
보영은 잠시 말을 삼켰다. 아빠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제게 인생 통틀어 딱 하나만 지키고 살라고 하셨어요.”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반장하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사는 거. 그거 딱 하나 바란다. 보영아,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보영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미세하게 휘었다.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요. 물론 틀려먹었죠.”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이현은 이번만큼은 이죽거리거나 비꼬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아빠는 경찰이었어요. 강력반 형사셨죠.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날도 적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아빠를 존경했고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아빠는 아주 바빴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은 만큼 한 번 놀 때 제대로 놀아 주셨어요. 목마도 태워 주고 공기놀이도 하고 숙제도 봐주셨죠.”
“…….”
“엄마가 아프고부터는 제 머리도 묶어 주시고 도시락도 싸 주셨어요. 간이 맞는 반찬은 하나도 없었지만요.”
어떻게 하면 계란말이가 그렇게 매울 수 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어요. 엄마의 남편으로, 제 아빠로 그리고 한 명의 경찰로도요.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한밤 혹은 새벽에 울리는 전화가 아니라 한낮에 울리는 전화도 불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믿기지 않았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왜 하필 나야? 왜 아빠야? 왜? 이렇게 착하게 열심히 가족을 위해 희생해 온 사람한테 왜? 뭐 그런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요.”
“정 비서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가 몇 살…… 이었죠?”
“고등학교 3학년이 막 됐을 때에요. 그래서 그해 수능은 망했습니다. 이력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재수했어요.”
보영은 괜스레 분위기가 칙칙하게 가라앉은 것 같아 덧붙였다.
“……어머니는 언제부터 아프셨죠?”
“엄마는…… 제가 열 살 때요.”
“그럼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어떻게 했어요?”
“물론 제가 돌봤죠. 그래서 빚이 많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돈 때문이고요.”
보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이었고 이현이 모르는 것 역시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의 다 왔습니다.”
보영은 길 끝에 보이는 병원의 모습에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아빠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말 한마디보다는 몸으로 놀아 주고, 행동으로 표현해 주는 분이었다. 너무 많이 사랑했고, 여전히 그리웠다.
“사장님 덕분에 병원 편하게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 보영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택으로 가실 겁니까?”
“아뇨.”
짧게 대답한 이현은 차에서 내리고 그녀를 보았다.
“괜찮으면 정 비서 어머님께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요.”
“네? 왜요?”
보영은 생각지도 못한 이현의 말에 당황해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사람 부모님을 뵙는 건 관계의 진전에 따른 당연한 절차니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주워 삼킨 이현이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잠시만요. 사장님이 저희 엄마를 볼 이유는…….”
그때였다. 이현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깍지를 껴 왔다. 그러곤 그녀에게 몸을 살짝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4시 방향에 검은색 SUV, 차 번호 1234 보이죠.”
보영은 그가 말한 방향을 따라 눈을 돌렸다. 짙게 선팅 된 차 옆에서 한 남자가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보자 슬그머니 몸을 돌려 차 뒤로 돌아갔다.
“설마.”
이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 회장이 붙였다는 사람인가?’
보영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곤 그가 깍지 껴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하고 단단했다. 낯설고 생소한 감각에 심장이 불편해졌다.
보영은 소극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 * *
병실은 12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나서야 손이 놓였다.
보영은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이현의 뒤를 따라갔다.
긴장을 한 탓에 손이 뻣뻣해졌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잘 알까.’
보영은 마치 제집 안방 드나들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이현이 조금 의아해졌다.
‘간병인도 구해 줬으니 몇 호실인 건 알고 있다고 쳐도 너무 잘 아는데……?’
똑똑!
“오셨어요?”
문을 열자 간병인 성아가 엄마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고생하시네요. 저녁은 드셨어요?”
“고생은요. 저녁은 간단히 먹었어요. 그렇지, 마침 잘됐네. 잠깐 지하에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그러세요.”
종일 엄마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보영은 성아가 병실을 나가고 나자 곧장 엄마에게 눈을 돌렸다.
오늘은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녀를 돌아보는 얼굴에 드물게 웃음이 환하게 피었다.
‘설마 오늘은 알아보려나……?’
괜스러운 기대에 보영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엄……!”
“왜 이제 왔어. 한참 기다렸잖아.”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내려온 엄마는 곧장 다가와 그녀를 지나쳤다.
‘뭐지?’
보영은 뒤를 돌아보곤 순간 당황해서 굳었다.
“일이 늦게 끝난 거야? 이게 뭐야. 결혼하면 늘 같이 있어 주겠다더니.”
엄마는 그녀보다 두어 걸음 뒤에 서 있던 이현에게 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보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현을 보았다.
이현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는지 그녀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 엄마……!”
보영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엄마 곁으로 가 어깨를 잡았다.
“나 아픈 데도 없는데 병원에 왜 있는 거야? 오빠.”
‘맙소사. 설마 지금 사장님이 아빠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빠’는 엄마가 아빠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엄마, 이분은 아빠가 아니…….”
“누구세요?”
엄마는 늘 그랬듯 그녀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보영은 억지로 입가를 당기며 다시 한번 차분히 말했다.
“엄마, 잘 봐봐. 아빠가 아니야. 아빠는…… 아빠는 회사 갔잖아.”
보영은 엄마의 어깨를 잡아 이현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엄마의 눈이 매서워지는가 싶더니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이로 손등을 세게 꽉 물었다.
“아으읏……! 엄마, 그만……!”
엄습하는 통증에 보영이 얼굴을 찌푸리고 몸을 움츠리자 그제야 이를 떼곤 이현의 팔에 찰싹 붙었다.
“끄응…….”
보영은 손등을 감쌌다가 뗀 후 다시 한번 엄마를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마치 이현이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뒤에 숨었다.
“엄마, 아니라니까? 이리……!”
“됐어요. 괜찮아요.”
보영이 엄마를 잡아당기려 하자 이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 가만히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리고 엄마를 향해 미소 지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오빠, 저 여자는 누구야?”
그녀를 보는 엄마의 눈에 경계심이 짙었다. 보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의 증상은 더 심해졌다. 10년 내내 그랬다.
그 긴 시간 동안 엄마가 그녀를 알아본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화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쳐서 맥이 풀리기도 했다.
“그냥…… 간호사인가 봐.”
“간호사?”
이현이 그녀를 힐끔 보곤 적당히 둘러대자 그제야 엄마도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사장님…….”
그녀가 이현을 불렀지만 그는 그녀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를 침대로 이끌어 걸터앉게 하곤 자신은 엄마의 맞은편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엄마가 두서없이 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때였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간병인 성아가 다시 들어왔다.
성아가 그녀와 이현을 번갈아 보곤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저기, 잠깐 이야기 좀…….”
보영은 엄마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이현을 힐끔 보곤 성아를 데리고 문 앞으로 나왔다.
“엄마는…… 엄마는 좀 어떻던가요?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보영은 병실 문을 반쯤 열어 놓고는 성아에게 물었다.
“아니요. 괜찮았어요. 오늘 몇 가지 검사를 추가로 진행했는데 좀 힘들어 하시긴 했죠.”
“그게 아니라…… 엄마가 치매가…….”
“아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상황에 따라 잘 받아 주면 되니까요. 어머, 손이…….”
성아의 눈길이 그녀의 손등에 멎었다.
엄마가 물어뜯은 탓에 잇자국과 함께 피도 조금 배어 나왔다.
“아, 괜찮아요. 엄마가 혹시 공격적으로 변하지는…….”
“아이고, 전혀요. 말씀드렸듯이 그때그때 상황에 잘 맞추면 되니까요. 회사에 의뢰하실 때 치매 환자를 주로 다루었던 간병인으로 특별히 부탁하셨잖아요.”
성아의 말에 보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가 간병인 경력만 8년인데 그중 6년은 치매 환자만 돌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정도면 귀여운 정도니까요.”
별거 아니라는 투라서 더 믿음이 갔다.
보영은 둥글게 웃는 성아를 향해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실 먹을 것 좀 사 오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요.”
보영은 들고 있던 가방에서 미리 챙겨 두었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성아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주머니도 영양 있는 걸로 챙겨 드시고, 혹시 엄마도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부탁드릴게요.”
“복수가 차서 소화가 잘 안 되니 먹을 걸 찾지도 않으세요. 정말 괜찮아요.”
“제가 이래야 마음이 편해서요. 아무리 이쪽 경력이 많으셔도 힘드실 거예요. 잘 좀 부탁드릴게요.”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속이 참 깊네요. 고마워요. 그럼 이건 받아 둘게요.”
민망한 얼굴로 봉투를 받은 성아가 이내 손뼉을 마주쳤다.
“어머님이 아까 복숭아 드시고 싶다 했는데 사 와야겠네요. 한 번만 더 나갔다 와도 될까요?”
“아, 네. 그럼요.”
막 몸을 돌리려던 성아가 멈칫하며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혹시 같이 온 분은 남자 친구예요?”
“네?”
“아니, 인물이 워낙 훤칠하고 번듯해서…… 연예인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보니까 어머니한테도 사근사근 대하는 게 참 좋은 사람 같아요.”
“그게…….”
“내가 원래 이런 주책은 안 떠는데 아까 병실에서 얼핏 보니 너무 좋아 보여서…… 미안해요. 그럼 얼른 갔다 올게요.”
성아는 그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보영은 입만 더듬거리다가 포기했다. 그러곤 다시 병실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내가 왜 오빠랑 결혼했는지 알아?”
“왜?”
“의리 있어서.”
“의리?”
“그리고 정의로워서.”
보영은 벽 한쪽에 기대서서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아 조곤조곤 말을 나누고 있는 엄마와 이현을 보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까 좋은 건 아니더라. 몸을 사리지 않아서 허구한 날 다쳐 오잖아.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
“……그래?”
“응, 이제 오빠는 혼자가 아니잖아. 나도 있고 나중에 태어날 우리 아이도 생각해야지.”
“그렇지.”
보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했던 시절에 가장 오래 머물곤 했다.
‘그때의 기억이 가장 행복해서일까.’
어쩌면 그래서 더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지도 몰랐다.
현실에 아빠는 더 이상 없으니까.
“졸려.”
“그럼 누울까?”
엄마의 투정 같은 말에 이현은 곧바로 엄마가 침대에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 잘 때까지 있어 줘.”
“……알았어.”
이현이 조용히 웃으며 엄마의 손목을 가만히 토닥였다.
보영은 그런 이현을 멍하게 보았다.
이현이 엄마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사장님은 왜 저렇게 당황하거나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저러고 있는 걸까.’
그는 엄마와 어떤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보영은 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해 준 행동이 고마운 한편,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의 숨이 골라지자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주무시네요.”
그가 소리를 낮춰 말하며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때를 맞추듯 간병인 성아가 들어왔다.
“어머, 주무세요?”
“네.”
성아는 바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보영은 성아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이현도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 * *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현과 나란히 병원 주차장으로 나오던 보영은 한 발 앞서 걷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뭐가요?”
“엄마에게 해 주신 일들이요.”
“아아.”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차에 다다른 이현이 우뚝 서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랬냐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빤히 보던 이현이 덧붙였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았겠어요? 왜 이러시냐고 밀어내고 무안 주고.”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필요요?”
“아니면 제게 뭔가 원하는 게 있으세요? 그래서 그러셨어요?”
이현이 문득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원하는 거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최근에 제게 잘해 주는 사람들한테는 이유가 있어서요.”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엄마의 수술은 할 수 있게 됐다.
그녀가 선택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속이 뒤집어졌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정 비서한테는 내가 어떤 사람이에요?”
보영은 이현의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꽤 못됐나 봐요?”
“……제가 낙하산인 걸 드러내고 나서는…… 그다지 착하진 않으셨죠.”
“직구네.”
이현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솔직히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병실에서의 그는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태이현 같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 모습도 그이고, 파르라니 날을 세우고 독설을 뱉는 그도 그일까.’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네?”
“정 비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살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늘 들여다보고 정의해요? 아니잖아.”
“그…….”
또 비꼰 거였나.
이현의 얼굴에 예의 성격 나쁜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힘들었겠어요.”
운전석 문을 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수석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보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가족 중 누가 아프면 그걸 함께 겪는 가족 역시 병이 들죠.”
“네?”
“꼭 몸에 드는 병만 병이 아니잖아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 병이 들죠.”
무슨 의미일까 눈을 깜빡이는데, 그 순간 초여름 치고 강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왔다.
옥외 주차장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이 우수수 흔들렸다.
곧 차에 오를 것 같던 이현은 문을 다시 닫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그녀의 머리 위로 뻗었다. 보영은 움찔했다.
“나뭇잎.”
그녀에게 나뭇잎을 보여 준 이현이 아스라이 입매를 휘었다.
“특별히 VIP 클래스의 간병인을 구해 준 건 물론 정 비서가 저쪽과 내 사이에서 허튼짓을 하지 않길 바라서였어요.”
“…….”
“이유가 있는 게 편하면, 아까 그 일도 이유를 만들까요?”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오늘의 이현이 조금 달라 보였다.
그런데 어디가 어떻게 왜 달라 보이는지는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가 좋을까. 아, 그렇지. 내가 정 비서 약점을 잡을 수 있게 우리 좀 더 친해지죠.”
“약점을 잡아요?”
“그래야 내 손에서 옴짝달싹을 못 하죠.”
“이미 옴짝달싹 못 하는데요.”
“그래도 저쪽 펀치가 아직 더 강하잖아요. 수술이 걸려 있는데.”
“그건.”
“농담이에요.”
이현이 입꼬리를 당기고는 돌아섰다.
보영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보영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이현이 평소처럼 얄밉게 말했다.
“타요. 여기서 밤새울 거예요?”
꼬였다. 저 남자는 단단히 꼬였다.
그녀를 나무라는 듯한 어투에 보영은 이를 사려 물고 조수석을 열었다.
“오늘은 운전한다는 소리 안 해요?”
“네. 사장님도 운전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양보할게요.”
무뚝뚝하게 대답한 보영이 안전벨트를 매고 앞을 보았다.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힐끔 보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다.
‘뭐야, 진짜. 갑자기 왜 이래.’
여전히 조금은 심술궂고 까칠하다. 그런데 미묘하게 달랐다.
‘뭐지?’
“어머님은 아프기 전에 무슨 일 하셨어요?”
“네?”
“직업요.”
“아. 그건…… 제 서류에 안 나와 있었나요?”
“교사라고만 되어 있던데.”
“예술 고등학교 미술 교사셨어요. 전시회도 몇 번 하셨었고요.”
“아, 미술. 정 비서도 그림 잘 그려요?”
아주 어렸을 땐 주변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대답하곤 했다.
“아뇨. 저는 아빠를 많이 닮아서 엄마 재능은 물려받지 못했어요.”
엄마가 가르쳐 준 대답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른들도 아무 말도 못 할 거라고 말이다.
어렸을 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을 들은 어른들은 퍽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재능보다 노력이 부족했던 거 아닌가.”
밉살스러운 대답에 보영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신 다른 재능이 있죠.’
보영은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녀가 아는 한 이 대한민국에서는 유일무이한 재주일 것이다.
“아버님하고 금슬이 무척 좋았던 모양인데, 아버님 소식 알았을 때 많이 슬퍼하셨겠어요.”
“아뇨. 불행 중 다행인지…… 대부분은 모르죠. 엄마는 지금을 살지 않으니까요. 아까도 사장님을 아빠로 착각했잖아요.”
“내가 아버님이랑 닮았어요?”
“전혀요.”
보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이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은 의미예요, 나쁜 의미예요?”
“솔직히요?”
“솔직히.”
“아빠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앞과 뒤가 같은 분이었죠. 그리고 사장님보다는…… 남자다운 풍채였죠.”
“…….”
“전체적으로 선이 굵었고 목소리도 걸걸했고 주먹도 복싱을 오래 해서 돌 같았어요.”
“지금 돌려 까는 거 같은데.”
이현이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썼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다른데요. 사장님은 선이 섬세하고 세련됐다는 의미예요.”
“그래도 기분이 찝찝한데.”
“글쎄요.”
보영은 슬그머니 웃음을 사리물며 창가로 눈을 돌렸다.
‘괜찮은 건가?’
그가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기보다는 들이받아도 되고 하극상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가 눈치를 살펴도 이현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괜찮은가 보지?’
보영은 긴장을 조금 풀었다. 그때였다.
지이이이잉.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S’였다.
[병실 간병인을 태이현 사장이 붙여 준 겁니까?]
보영은 문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차가 신호등에 맞춰 정차하자, 휴대폰을 이현 쪽으로 내밀었다.
“사장님이 보시기에 제가 여기 붙었다 저기 붙는 박쥐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누군지 모르는 저쪽보다는 사장님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메시지를 본 이현이 그녀를 빤히 보다가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누가 뭐랬나?”
“네?”
“난 박쥐라고 한 적 없어요. 혼자 찔렸나 봐.”
이현의 무안한 대꾸에 보영은 입술을 안쪽으로 꾹 말아 넣었다.
“문자 답장은 그렇다고 보내요. 정 비서를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네?”
“물론 저쪽도 100프로 믿지는 않겠지만.”
“믿지 않는다고요?”
“그 문자의 ‘S’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다면 열심히 주판알 굴리고 있겠죠.”
보영은 휴대폰을 다시 한번 보았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아신다는 이야기예요?”
“그건 서로 마지막에 까기로 했잖아요. 정 비서도 알지 않나? ‘S’가 누군지.”
보영은 입을 벙긋거렸다.
분명히 엄마의 수술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이현에게 그녀를 사주한 이가 누구인지 말하기로 했다.
“왜 누군지 모른다는 투로 들리지?”
“아뇨! 압니다. 알아요.”
보영은 지레 찔려 부정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조만간 ‘S’를 만날 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얼굴을 보면 범위는 좁혀지지 않을까.’
“출출한데 잠깐 편의점 좀 들르죠.”
어느덧 둘은 사택에 도착했다.
‘같이 가자는 건가?’
차에서 내린 이현이 앞장섰고 보영은 망설이다 그를 따라갔다.
그는 컵라면과 김밥을 샀고, 보영은 딸기 우유 하나만 집었다.
“먹고 가요.”
가만히 보면 이현은 은근히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만드는 데 도가 텄다.
편의점의 간이 테이블에 나란히 서서 그는 컵라면을 먹고 그녀는 딸기 우유를 마셨다.
“아버지가 경찰이었으면…… 파출소에 근무하셨어요? 아니면.”
“서대문 경찰서 강력반 계장이셨어요. 10년 전 이야기지만요.”
“……진급이 빨랐던 것 같은데.”
“형사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감이라는 게 생겼나 봐요. 나중에는 정말 굴비처럼 범죄자들을 줄줄이 엮어 잡아들이셨거든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정의감이 투철하셨다던데.”
“네. 요즘에는 밤늦게 놀이터에 모여 있는 학생들 보면 괜히 피하게 되잖아요. 아빠는 가서 설교하는 타입이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 아빠는 동네에서 소위 말하는 노는 청소년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며 어깨 인사까지 받고 다닐 정도였다.
“혹시 집에서 일 얘기는 자주 안 하셨죠?”
“어린애가 들을 만한 일은 아니니까 전혀 안 하셨죠.”
이현이 묻는 말에 아빠를 추억하며 다소 즐겁게 대답하던 보영은 문득 움칫했다.
“그런데…… 저희 아빠에 대해서 왜 자꾸 물어보세요?”
“그냥요. 스파이 아버지가 경찰이라니까 아이러니해서.”
보영은 순간 저도 모르게 이현을 살짝 쏘아보았다.
하지만 얼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곤 표정을 관리했다.
“잠시만요.”
보영은 돌아서며 얼굴을 구기곤 음료 코너로 갔다.
뒤늦게 봤지만 이현이 음료를 사지 않은 탓이다.
이현의 기호에 따라 그가 좋아하는 음료와 초콜릿을 구매한 보영은 다시 테이블로 가 그의 앞으로 구매한 물건을 내밀었다.
“뭐예요?”
“엄마한테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얄미운 건 얄미운 거고, 인사는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이현이 피식 웃으며 음료와 초콜릿을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내가 좋아하는 거네요.”
“네. 사장님 기호를 외우는 건 기본이니까요.”
“꼭 뒷조사라도 당한 기분인데.”
“제 기분 아시겠네요.”
막 음료 뚜껑을 열던 이현이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단정하고 반듯하게 미소 짓곤 딸기 우유에 꽂힌 빨대를 다시 물었다.
조금 속이 시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