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제 나가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보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십니까. 운동…… 다녀오셨습니까?”
“잘 잤어요?”
회사에 있지 않은 이현은 대부분 운동복 차림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뒤로 물러서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보영은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힐끔 보았다.
“난 급한 일 없어요. 약속도 없고.”
“네?”
“엘리베이터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눈빛이라서.”
이현이 한쪽으로 비켜서며 고갯짓했다. 갈 길을 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가 하라는 대로 걸음을 디뎠던 보영은 다시 멈춰야 했다. 이현이 그녀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냥. 배웅할까 해서요.”
“배웅…… 요?”
그녀가 되묻자 넉살 좋게 웃은 이현이 그녀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이내 보영의 손을 가볍게 잡고 나란히 섰다.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이현을 보았다.
“응, 배웅. 마침 마주쳤으니까 얘기도 조금 더 하고 싶고.”
눈빛과 표정에서 그녀에 대한 호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조금은 부담스럽고, 조금은 두근거리고, 조금은 긴장되었으며 조금은 불편했다.
‘이건 대체 다 무슨 감정인지.’
내 마음인데도 모르겠는 게 웃겼다.
‘이대로 손을 잡고 나가야 하나? 사장님 배웅을 받고? 그래도 되나?’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속도 모른 채 이현이 물었다.
“택시 불렀어요?”
“아니…… 아니요. 버스 타고 가려고 하는데요.”
‘에라, 모르겠다.’
보영은 바로 공동 출입문을 나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연히 그가 잡고 있는 손에 신경이 쏠렸다.
‘신경 끄자. 신경 끄자.’
보영은 속으로 주문처럼 읊조리며 신경을 분산하기 위한 다른 화제를 떠올렸다.
“어제 장 실장님은…… 별말씀 없으셨어요?”
“별말? 있었죠.”
얼음장 같은 재일의 얼굴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픈 것 같았다.
“어제는 왜 그러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재일이 형이 나한테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말한 것 같은데. 설명이 필요해요?”
“하지만.”
“어차피 알게 될 거예요. 조금 빨리 아나, 늦게 아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것 같은데. 할아버지 방패막이라는 명분상 쉬쉬할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요.”
충분히 모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했던 생각이 바보 같았다.
이 연애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상기했다. 태훈 회장.
어차피 그에게 노출될 테니 재일이 모를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요.”
“걱정이라기보다는…….”
“걱정인 게 아니면요?”
“장 실장님은…… 아닙니다.”
‘정보영아, 공과 사는 구분하자.’
저도 모르게 재일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말을 불평처럼 뱉을 뻔했다.
이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는 그녀가 그런 말을 뱉으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그 불편함이 해소될 수 있게끔 노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문제였다. 낙하산이고 뭐고 그녀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수면 그만이었다.
“아니에요.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벽이니까요.”
“벽씩이나요?”
“혹시 이게 일종의 계약…… 처럼 성립된 관계라는 건 이야기하셨습니까?”
어느새 빌라에서 4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보자 이현이 드물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사장님?”
“이거 실망인데요. 상처받았고.”
“네?”
“난 정보영 씨한테 충분한 호감을 갖고 있고, 정식으로 사귀자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꼭 계약이란 말로 포장해야 해요? 나한테 사심, 아주 없는 건 아니라면서요.”
“제가요?”
보영이 눈을 굴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잖아.’
솔직히 그를 싫어할 이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제가…… 그러긴 했었죠. 네.”
“걱정하지 마요. 형도 공사 구분은 하는 사람이에요. 정보영 씨가 내 애인이라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게 좋은 거든, 나쁜 거든요?”
표면상 이현의 애인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하거나, 반대로 괴롭힐 일은 없다는 걸까.
속뜻을 알아챘는지 이현이 피식 웃었다.
“좋은 거든, 나쁜 거든요. 재일이 형은 지난 10년간 내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늘 똑같았어요. 한결같이 가차 없고 까칠하고 빡빡하죠.”
“……원래 그러셨다고요?”
“원래 그랬어요.”
그가 확인 사살 해 주었다.
‘늘 한결같이 그랬다고?’
그녀가 곱씹어 보는 사이 이현이 물었다.
“그리고 나 보영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네?”
“고양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키운 적은 없어요?”
“뭔가를 키운다는 건 큰 책임을 필요로 해서요. 그것도 생명이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앞…… 가…… 맞네.”
그리고 그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보영은 버스 카드를 기계에 찍고 올라서 이현이 서 있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좋은 하루 보내고, 너무 늦진 말고요. 위험하니까.”
손을 흔드는 이현을 뒤로하고 버스가 출발했다. 보영은 얼떨결에 마주 흔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앞뒤가 안 맞네? 내가 잘못 들었나?”
보영은 고개를 돌려 이현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그는 이미 돌아서 걸어가고 있었다.
“배웅…… 이라.”
다시 바로 앉아서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다정한 말이었다. 그녀가 저 남자에게 품은 꿍꿍이와는 아주 다른.
* * *
보영은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가슴이 두근거렸다. 데스크에서 간호사가 일러 주길 오늘 엄마, 순아의 컨디션은 해가 쨍쨍한 오후 같다고 했다.
“들어갈게.”
보영은 엄마가 놀라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문을 열었다.
전면의 유리창으로부터 따사롭게 들이치는 햇빛이 병실을 아늑해 보이도록 했다.
이어 TV와 서랍장, 냉장고, 소파까지 모두 갖춰진 쇼룸 형식의 병실 가운데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가 이젤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누구긴. 엄마 딸 보영이지. 또 잊어버렸어?”
보영은 지난 18년간 반복되어 온 일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챙겨 온 주스며 전병을 냉장고와 서랍에 정리했다.
“오늘은 잊어버리지 마. 이순아는 전병을 아주 좋아하고, 주스도 포도 주스만 마셔. 딸 이름은 정보영이고 스물여덟 살이야. 엄마는 쉰아홉이고 세 번의 유산 끝에 날 굉장히 힘들게 낳았어. 그런 금쪽같은 딸이야.”
엄마가 말간 눈으로 신기한 것을 보듯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하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응. 사람들이 엄마하고 나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많이 이야기했었어.”
“어머! 정말 내 딸인가 봐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확실히 기억해.”
그녀가 이젤 옆으로 다가서며 말하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네. 재미있어요.”
보영은 천진하게 눈을 반짝이는 엄마의 옆에 몸을 숙여 이젤 위의 그림을 보았다.
투박한 연필로 굵직하게 그려지고 있는 건 누군가의 초상이었다.
“……이 사람은 기억해?”
“누군지 알아요? 자꾸 생각은 나는데 누군지 모르겠어요.”
“에이, 아빠잖아.”
그림 속의 남자는 거칠게 인상 쓴 얼굴이었다.
“아빠? 우리 아빠예요?”
“아니, 엄마 남편. 엄마가 결혼한 사람.”
“그래요?”
여전히 엄마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영은 쓰게 웃었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더 야위었다. 피부는 샛노랗다 못해 거무죽죽했고 배는 자꾸 동그랗게 불러 왔다. 복수가 찬 탓이다.
“엄마, 소화는 좀 돼? 이뇨제는 먹었어? 복수 천자는 안 좋다던데 이렇게 복수가 안 빠져서 어떡해?”
엄마는 그녀가 보고 있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가예요. 배가 이렇게 동그라면 아가가 있는 건데?”
“……그래? 내가 잘못 알았나 보다. 아가인가 봐.”
남들보다 일찍 치매가 찾아온 엄마는 매일매일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난폭해지기도 했고, 아이처럼 온순하거나 우울해하거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온종일 멍해 있을 때도 있었다.
“……비바람이 부는 바다, 잠잠해져 오면…….”
보영은 동그란 엄마의 배를 보던 눈을 들었다.
엄마는 다시 연필을 쥐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보영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사각이는 연필 소리를 들었고, 단정한 엄마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지 20년이었다. 그중 10년은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 그녀 홀로 버텼다.
지긋지긋하지 않았다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현실이 버거워 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 수시로 그리고 때때로.
하지만 이건 망가지고 부서졌다고 함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엄마였다.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스하게 빛나던 나의 엄마.
그렇게 멍하게 얼마나 있었을까.
“어머, 누구세요?”
그림을 그리다 고개를 돌린 엄마가 물었다. 보영은 목울대가 울컥였다.
왜 이런 순간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을까.
“엄마 딸, 보영이야.”
“저는 딸이 없어요. 나가요. 왜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와요?”
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보영은 둑 터지듯 터지려는 감정을 목구멍 안으로 꾹꾹 밀어 넣곤 애써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집을 잘못 찾았나 봐요.”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경계하는 눈초리는 그녀가 병실을 나설 때까지도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경험상 일단은 물러나는 게 좋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보영 씨 되십니까?”
복도로 나와 벽에 기대 아프게 술렁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던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복도 한쪽엔 쥐색 정장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W대의 서철한입니다.”
보영은 ‘S’가 보냈던 문자를 떠올렸다.
오늘 오후 2시. W대의 서 교수와 요양 병원에서 상담을 할 수 있게 조치하겠다는 게 그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보영입니다.”
보영은 모아 쥔 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 * *
보영은 휠체어에 앉아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나 하는 엄마를 멀찍이 앉아서 지켜보았다.
〈현재 이순아 씨의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간암 말기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요. 간은 침묵의 장기예요. 일찍 알아채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서 교수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수술 성공률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수술이라는 위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최악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수술은 2주 후로 조정됐고, 보영은 조금 망설이던 끝에 물었다.
〈혹시 이 수술은 어떻게 집도하게 되신 건지 물어도 될까요?〉
〈미안합니다. 그 부분은 철저히 함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물론 수술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며칠 내로 병원을 옮기자는 말을 끝으로 서 교수는 자리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그에게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설 텐데도 휴일에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그를 그렇게 하게 만든 ‘S’가 강력한 배경 혹은 지위를 갖고 있다는 말일 테다.
“태양…… 그룹이라.”
보영도 바보는 아니었다.
새우 등이 터질 때 터지더라도 어떤 판에서 터지는지는 알아야겠기에 그녀 나름대로 태양 그룹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 태양 그룹은 세 명의 실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현의 작은아버지인 태석준 부회장과 고모인 태인희 대표.
‘S’가 이들 중 하나이거나 연관이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정말 의외로 엉뚱한 사람이 ‘S’일 수도 있었다.
이현과 개인적인 은원 관계가 있거나…….
「쯧쯧, 저 미친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보영은 옆을 내려다보았다. 낯익은 점박이 무늬 고양이가 발아래로 다가와 앉았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녀가 요양 병원의 산책로에 나올 때마다 모습을 보이는, 이 근방에 터를 잡은 욕쟁이 길고양이였다.
「심하기는. 어제 산책로에서 저 미친년이 무슨 미친 짓을 했는지 알아? 글쎄 나무 밑에 보물이 숨어 있을 거라고 간호사 몰래 도망쳐서는 나무 밑동을 맨손으로 파헤쳐 댔다니까?」
“……네가 좀 말리지 그랬어?”
「싫어. 저번에 저 미친년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일전에 엄마가 이 고양이를 보고 좋아서 꼭 끌어안은 채 병실로 데리고 가겠다고 난리를 피웠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요양 병원 내에 길고양이가 있는 줄 몰랐던 병원 관계자들이 한바탕 난리를 쳤기에 적지 않은 후폭풍까지 맞아야 해서 꽤나 고됐으리라.
“어머? 고양이네?”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엄마를 데리고 나온 요양 보호사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엄마를 그녀 곁에 데려다주곤 자리를 떴다.
“야옹, 울어 봐. 야옹! 야옹!”
「에이 씨! 이 미친년이? 저리 가! 칵!」
“아이, 이뻐라. 아가씨 고양이에요?”
엄마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우리 딸도 고양이 참 좋아하는데. 올해 다섯 살인데요, 매일 고양이를 서너 마리씩 집에 데려와요. 유치원에서 친구를 잘 못 사귀어서 걱정이지만요.”
“……따님이 매일 고양이를 데려왔어요? 싫으셨겠어요.”
“싫기는요. 우리 딸은 고양이하고 말이 참 잘 통해요. 고양이가 원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맞혀요. 나중에 수의사가 되려나? 아니면 동물 조련사?”
「캭! 손 치워! 물어 버린다! 이 미친년이!」
“아하하! 얘는 성깔이 좀 있네. 우리 보영이 데려다 놓으면 금방 순해질 텐데.”
“따님이…… 고양이하고 너무 어울려서 싫으셨던 적은 없어요?”
보영이 조심스레 묻자 고양이에게 온 신경을 쏟던 엄마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없어요. 동물 좋아하는 사람 치고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없거든요. 우리 보영이는 마음이 참 따뜻해요. 아니었으면 고양이들도 우리 보영이 근처엔 오지도 않았겠죠?”
기어코 엄마는 고양이를 품에 안아 올리려 했다.
“아이고! 만지면 안 돼요! 병균 옮아요. 길고양이가 얼마나 더러운데 그걸 만지려고 해요.”
화장실에서 돌아온 요양 보호사가 고양이를 쫓아내려 하자 보영이 손으로 저지했다.
“제가 내보낼게요. 죄송하지만 엄마가 바람을 오래 맞았는데, 슬슬 병실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병실로 돌아가는 엄마를 지켜보던 보영이 시선을 내렸다.
「너도 나중에 미친년 되니? 미치려면 곱게 미쳐라? 아우, 피곤해.」
“글쎄. 치매도 유전이라고 하긴 하던데.”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한 보영은 혀로 몸을 핥아 대며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를 보다 말했다.
“있지. 그간의 정을 봐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응?」
“내가 오지 않는 날에, 내가 없는 날에 혹시 우리 엄마에게 낯선 사람이 방문하면 알려 줄 수 있을까?”
「낯선 사람?」
“요양 병원 안을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밖에서…… 볼 수 있는 한 말이야.”
「엥? 내가 왜? 나도 바빠.」
“다음에 올 때 네가 제일 좋아하는 츄르 사 올게.”
그녀의 말에 욕쟁이 고양이의 눈이 크게 뜨이며 세로로 긴 눈동자가 반짝였다.
「에잇, 정말! 바쁜데! 내가 그간의 정을 봐서 해 준다.」
고양이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곤 대답했다.
“그래. 좀 해 줘. 내가 그동안 너한테 사다 준 간식과 물을 생각해서라도.”
「이래서 인간은 안 돼. 쯧쯧. 조금 잘해 주면 생색내기 바쁘다니까? 에잉, 치사스러운 년!」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대며 등을 돌렸다.
그녀가 이현의 비서 자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S’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패라는 건 인식하고 있다.
엄마의 병증과 수술이 걸린 마당에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뇌가 없는 것처럼 휩쓸리고 싶진 않았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든 최소한의 정보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손 씻고 깨끗하게 사는 동일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으니,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 * *
“헤븐힐 리조트는 태양 호텔이 평창에 건설한 부지 약 250만 평 규모의 테마파크형 리조트다. 골프, 스키, 동물 농장, 놀이 기구 외에도 쇼핑몰, 워터 파크, 영화관이 모두 입점한 복합 문화 시설로 외국인과 가족 단위의 여행객에게 각광받고 있는…….”
‘S’가 언급한 리조트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어 보던 보영이 목을 뒤로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으, 눈 시려.”
뻑뻑한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두 손으로 덮어 가만히 눌러 주었다.
「엄마 보고 싶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보영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뗐다.
「엄마…… 엄마, 엄마…….」
보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구슬픈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히잉…… 여기 좋은데 엄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히잉…….」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빌라와 인접한 나무 위를 뚫어지게 보다가 사방을 훑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의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 우는 소리가 컸어요?”
갑자기 들려온 굵은 목소리에 보영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작은 놈이 목소리가 크네. 나중에 얼마나 커지려고.”
보영은 몸을 조금 더 밖으로 빼 옆집 테라스를 보려 했다.
하지만 워낙에 프라이버시 보호가 철저한 곳이라 보일 리가 없었다.
“하하. 여기예요, 위에.”
보영이 그제야 고개를 꺾어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위에서 이현의 얼굴이 테라스 밖으로 불쑥 나왔다.
“방금……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맞아요. 그리고 이 녀석도.”
보영이 눈을 부릅떴다. 이현의 커다란 손에 얌전히 안겨 있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그건…….”
“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갔었고, 내가 데려왔어요.”
“네?”
“키워 볼까 해서요.”
보영은 어이가 없었다.
‘저러려고 아까 고양이 키운 적 없냐고 물었던 걸까.’
“……음, 놀란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꺾어 위를 본 채로 가만히 굳어 있자 이현이 콧잔등을 찡그리곤 눈치를 보듯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고양이를 데려오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생각요? 그냥…….”
“그냥이요? 그냥이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날이 섰다. 사람이 진중하고 사려 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벼운 구석도 있었나 싶었다.
고양이는 ‘그냥’ 키워도 되는 게 아니었다.
호기심이 생긴다고, 귀엽다고, 예쁘다고 막 갖다 키우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조금 힘들어지면,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면 쉽게 버려도 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음…… 고양이는 알아서 혼자 잘 크지 않아요?”
“아뇨. 전혀요.”
물론 고양이는 독립성이 강한 동물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혼자 둔다고 알아서 쑥쑥 크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길고양이라는 말이 있고, 집고양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이현이 평소와는 달리 다소 어벙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이현의 손에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이현이 전에도 눈에 밟힌다고 말했던 새끼 고양이였다. 하얀 몸에 장화를 신은 것처럼 까만 발을 가진.
“괜찮으면 올라올래요? 정 비서는 고양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요.”
보영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보영은 테라스 테이블 위에 두었던 노트북을 정리한 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내가 실수했어요?”
“네?”
“아까 밑에서 날 보던 눈빛이 뭐랄까……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달까.”
“……그랬을 리가요. 어두워서 잘못 보신 걸 거예요.”
보영은 시치미를 뗐다. 분명 그녀는 이현을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것을 보듯 0.1초 정도 보긴 했지만 정말 찰나였다.
“고양이는 왜 데려오셨습니까? 정말 키우시려고요? 집에 계신 시간이 많으신 편입니까? 많이 바쁘시고 앞으로도 더 바빠지실 거로 압니다만.”
“아니, 그게…….”
“고양이가 배변은 알아서 가리지만 손이 안 가는 게 아니에요. 털도 강아지보다 더 많이 날리고 스프레이도 하고요. 가만, 이 애가 수컷이었나요?”
“암…….”
“키우려면 캣 타워도 있어야 하고, 고양이는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 같이 놀아 주는 게 좋습니다. 생각보다 얘들이 관심 종자거든요.”
“저기.”
“이 애한테 충분한 공간도 제공해 줘야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 읏!”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쉴 새 없이 말을 잇는 그녀의 이마에 이현이 이마를 콩, 부딪쳐 왔기 때문이다.
“손에 고양이 털이 많이 묻어서 손은 쓸 수가 없었어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나도 말 좀 하자고요.”
코앞에서 이현이 속삭이듯 말했다. 보영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프진 않았죠?”
보영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놀라긴 정말 놀랐다.
“……괜찮습니다.”
이현이 그녀를 살피듯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그녀야말로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겠다.
심장이 묵직하게 쿵, 쿵 울린다. 보영은 일단 심적인 안정을 위해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고양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과했습니다.”
“아니에요. 얘가 걱정돼서 한 말일 테니까요. 솔직히 난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이현이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영은 순간 망설였다. 시간이 꽤 늦었고, 이곳은 그가 혼자 사는 집이었다.
“들어와요. 이것저것 조언 구해야 하니까.”
“……네.”
그가 자꾸 그녀와의 거리를 불쑥불쑥 좁혀 와서 곤란했다.
이게 그녀에게 좋은 일인데도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녀석만 남았더라고요.”
거실 테이블 앞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편하게 앉은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그녀가 앉자 이현이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오후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새끼 고양이들을 한 마리 빼고 다 분양했다고. 남은 한 마리는 어미한테 들려서 길로 돌려보낸다는데…… 어떤 놈이 남았냐고 물으니까 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데려왔어요. 길로 돌아가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이현이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검지로 살짝 쓰다듬곤 덧붙였다.
“나도 찾아봤어요. 길고양이 수명 통계. 얘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태어난 건데……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차에 치여 죽으면 너무 안됐잖아.”
“아…….”
그 고양이가 예쁘다고, 마음에 든다고, 눈에 밟힌다고 호기심에 콕 집어 데려온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자초지종도 모르고 너무 오버했나.’
보영은 멋쩍어져서 입술을 안쪽으로 꾹 말아 넣었다.
“그래서 적당한 입양처를 찾을 때까지만 돌보기로 하고 데려온 거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나도 내 상황이 온전히 동물 키우기에는 힘들다는 거 알아요.”
“아니, 전 그럴 생각은.”
“사람 얘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혼내고. 저 언니 생각보다 무섭지? 나비야.”
이현이 그녀를 놀리듯 고개를 숙여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비요?”
“이름, 나비라고 하려고요.”
고양이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갸르랑거렸다.
「나비는 엄마가 보고 싶어. 그런데 이 오빠도 조금 좋아. 잘생겼어. 히히.」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의 검은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럼 고양이…… 시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고용해야 해요?”
“네?”
망연하게 고양이를 보던 보영이 되물었다.
“고양이 시터요. 집안일 도와주러 오시는 분은 따로 없어서요. 고양이를 키우려면 뭐가 필요해요? 주중에 시간 내서 같이 숍에 가 줘요. 일단은 그냥 같이 침대에서 자도 되나? 잠시 맡는 거라곤 해도 제대로 해야죠.”
이현이 고양이 나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으읏, 추워!」
갑자기 서늘해진 온도에 나비가 굳어서는 몸을 움츠렸다.
“……안아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적응해야 하지 않나?”
“추워하는 것 같아서요.”
이현이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보다 다시 나비를 안아 올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뭐가요?”
“……그냥요.”
그를 꽤나 불손하게 봤던 것을 인정한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줄 알았다.
그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경솔했다.
상사가 고양이를 키우기로 했다면 그걸 보좌하는 것 역시 그녀의 역할이었다.
“아. 나비를 데려온 이유, 하나 더 있어요.”
일단 당장 필요한 고양이 물품부터 사 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질 찰나였다.
엉덩이를 들썩이던 보영은 빙글 웃고 있는 이현을 보았다.
“정 비서, 고양이 좋아하죠? 나 이제 고양이 키우는 남자예요.”
“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하지만 이현은 설명하는 대신 그녀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잘 봐 달라는 듯이, 새끼 고양이 나비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말이다.
보영이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서인지 귓바퀴가 화끈거렸다.
“그러면 저는 일단 급한 대로…… 나비에게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겠습니다.”
“지금요?”
이현이 아트 월에 설치된 디지털시계로 눈길을 주었다.
시간이 꽤 늦었다.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보영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이 시간에도 고양이 용품을 살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을 검색했다. 다행히 마땅한 곳이 근처에 있었다.
“근처에 밤 12시까지 영업하는 애완동물 용품점이 있습니다. 그럼 바로…….”
“같이 가요.”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이현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아닙니다. 제가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아뇨. 이 녀석을 키우려고 데려온 건 나예요. 뭐가 필요한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니면 정말로 시터를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
“시터라뇨. 그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뭔가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아, 그러면 되겠다.”
이현이 어째서인지 얼굴 가득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도 몇 번 느꼈던 묘한 기분이 스쳐 갔다.
“정 비서가 도와주면 되겠어요. 아예 같이 키우든가.”
“네?”
“잘 부탁해요.”
이미 그러기로 했다는 양 스스럼없이 웃는 이현에 보영은 거절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위에 뭐 좀 걸치고 나올게요.”
이현은 그녀의 손에 고양이를 넘겨주곤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보영은 입만 달싹거리다가 뜨거운 체온을 전해 오는 아기 고양이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하라면 해야겠지. 내 입장 상.”
「뭘 해?」
세로로 길쭉한 고양이의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
「에에? 설마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말도 안 돼!」
고양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보영이 피식 웃었다.
고양이들의 이런 반응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기 때문이다.
“가죠.”
보영은 고개를 들었다. 얇은 바람막이 재킷을 걸친 이현이 손을 내밀었다.
보영은 다시 나비를 이현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밀어내곤 차 키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 * *
“플라스틱은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어서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유리나 도자기, 스테인리스 재질의 그릇이 좋아요. 아직 어리니까 깊이도 깊지 않은 게 좋을 것 같고요.”
고양이가 쓸 그릇 외에도 집, 사료, 간식, 화장실, 모래, 눈곱 빗, 슬리커, 발톱 깎이, 스크래처, 귀 세정제. 치약. 칫솔, 고양이 장난감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 계산대 위에 눈처럼 쌓여 갔다.
필요한 것만 집는데도 다 들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생기는 양이었다.
“이런 건 안 필요해요?”
매대 옆을 지나던 이현이 기저귀같이 생긴 것을 집었다.
“그건 강아지 배변 패드예요. 우선은 저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건요?”
이번에는 울타리를 가리켰다.
“그것도 고양이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애완동물 용품은 다 비슷비슷하게 쓰는 줄 알았는데 어렵네요.”
이현은 이후에도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 이것저것에 관심을 보였다.
보영이 용도를 알고 있는 물품도 있었고 모르는 물품도 있어서 휴대폰으로 검색을 여러 번 해 보아야 했다.
“……하하, 어마어마한데요?”
놓을 때는 몰랐는데 계산을 하려고 보니, 기가 질린 듯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사람 하나 키우는 거하고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맞나 봐요. 엄청나네.”
이현이 계산을 마치는 동안 보영은 짐을 챙기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빠르게 막았다.
“짐은 내가 챙길게요. 나비를 챙겨 줘요.”
“하지만.”
이현은 난처해하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물건들을 두 손에 가득 나눠 들곤 걸음을 옮겼다.
“아, 손이 없는데 차 문 좀 열어 줄래요?”
차 근처까지 도착하자 이현이 우뚝 서선 말했다.
“어디 있습니까?”
“바지 주머니요.”
“네?”
그녀가 되묻자 이현이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듯 고개를 까닥였다.
보영은 눈을 굴렸다. 그는 그녀와 연애 아닌 연애를 하기로 하자, 당혹스러울 만큼 스스럼이 없어졌다.
“무거워요. 어서요.”
그녀가 망설이자 이현이 다시 한번 채근했다. 보영은 고양이를 한 손에 고쳐 안고는 조심히 손을 뻗었다.
그나마 품이 넉넉한 바지라 다행이었다. 보영은 혹시라도 손이 그의 다리에 닿을까 주의를 하며 차 키를 쥐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현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덕분에 그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보영도 중심이 흔들려 휘청했다.
보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이현의 팔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아, 미안해요.”
손등에 단단한 다리가 느껴졌다. 보영은 화들짝 놀라 손을 빼고, 이현의 팔에서도 손을 놓았다.
보니 이현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씨익 웃고 있었다.
‘장난을 친 거였나?’
“트렁크도 열어 줘요.”
“사장님.”
“계속 잡고 있어도 되는데.”
이현이 팔을 그녀에게 들썩여 보였다. 보영은 그의 팔과 넉살 좋은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트렁크를 열었다.
이현이 들고 있던 짐을 모두 싣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영은 차 키를 그의 손에 올려 두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잡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사사건건 놀라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보영이 눈을 들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눈매에 어쩔 새도 없이 가슴이 달떴다.
* * *
보영은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지는 고요한 복도를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말이 끝나고 시작된 이현의 월요일은 무척이나 정신없이 바빴다.
보영은 홀로 비서실을 지키고 있었고, 이현과 재일은 보고 회의 때문에 앞으로 한 시간 이상은 사장실로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보영은 조용히 사장실 문손잡이를 쥐고 열었다.
들어가면서 문은 일부러 살짝 열어 두었다. 누군가 오거나 전화가 걸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원하게 뚫린 통창과 세련된 회색 그리고 남색 계열로 이루어진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업무 일정 보고 때문에 간간이 들어와 보긴 했지만 이렇게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책상, 책장, 의자, 소파, 테이블. 외에도 벽 한쪽에는 푸른색 계열의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외에는 공간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을 만한 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전에 모셨던 건설사 전무는 골프를 광적으로 좋아했는데, 사무실 한 면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브랜드의 골프채와 트랙 퍼팅 매트가 있었다.
“어쩐지 삭막하네.”
혼잣말로 중얼거린 보영은 곧장 움직였다. ‘S’가 언급한 헤븐힐 리조트와 관련된 서류를 찾기 위해서였다.
책상 위, 서랍, 책장까지 눈에 보이는 건 모두 찾아보았다.
“장 실장님에게 있으려나…….”
이현의 실무는 모두 재일의 손을 거쳐 갔다. 번지수를 잘못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서랍에서 꺼냈던 파일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 두려던 때였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놓쳤다.
그 바람에 안에 들어 있던 서류가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보영은 그대로 굳었다. 귀를 쫑긋 세워 밖을 살폈다. 하지만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보영은 서둘러 몸을 숙여 서류를 주우려 했다. 그리고 서류를 집어 들다가 멈칫했다. 그 안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진과 이름, 출생지 등 신상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력서는 아니었다.
“이게 뭐……?”
뒷장에는 마찬가지로 동일의 사진과 신상이 적혀 있었다.
이런 게 여기 있는 이유가 뭘까.
보영이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멍하게 서류를 내려다볼 때였다.
밖에서 사람 인기척이 들려왔다.
보영은 서둘러 파일에 서류를 다시 끼워 서랍에 넣어 놓은 뒤 사장실을 나왔다.
“정 비서가 왜 거기서 나옵니까?”
재일이 이현과 함께 엘리베이터와 이어진 복도 너머에서 다가오며 물었다.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난 것 같아서 확인했습니다.”
“소리?”
보영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입가를 당겨 미소 지었다.
“네. 하지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재일이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사장실 문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보영은 입 안이 바짝 말라 왔지만 애써 의연하게 굴었다.
“장 실장님, 예민하게 왜 그래요. 어떤 소리가 났으면 확인해 보는 건 당연하죠.”
이현이 재일의 어깨를 짚고는 빙글 웃었다.
“보고가 엉망이라 정비해서 오후에 다시 진행하기로 했어요. 그럼 일 봐요, 정 비서.”
이현과 재일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사장실로 들어갔다.
보영은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후우.”
자리로 돌아와 앉은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원래 하던 업무에 집중하려 했지만, 머릿속에는 이현의 서류철 사이에 끼어 있던 서류가 떠나지 않았다.
“왜……?”
보영은 닫힌 사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서류가 이현의 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의심하고 있는 걸까?’
〈……아니었으면 좋겠네. 정 비서가 내 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요.〉
언젠가 이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보영은 숨을 들이켰다. 재일은 그녀가 낙하산 인사로 채용된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이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는커녕 친절하고 자상했다.
“왜……?”
현재 태양 그룹의 후계 구도는 꽤나 치열했다.
태훈 회장의 차남 태석준 부회장과 사업에 천부적인 능력을 보여 주는 장녀 태인희 대표의 이파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난데없이 태훈 회장이 이현을 미국에서 불러들였고, 호텔을 통째로 맡기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이건 태훈 회장의 심중에 이현을 차기 회장으로 삼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말이 지라시로 조심스럽게 나돌고 있었다.
보영은 미간에 인상을 그었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하며 난데없이 낙하산 비서가 들어왔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당연히 의심할 만했다.
‘그래서 뒷조사를 했나?’
게다가 그녀만이 아니라 엉뚱한 동일까지 그 종이에 올라와 있었다.
보영은 휴대폰을 꺼내 ‘S’에게 문자를 썼다.
[혹시 사장님께서 제가 그쪽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하지만 전송하지는 못했다. ‘S’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이현의 사람이 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S’가 그녀에게 약속한 예의 ‘수술’과 여타 ‘지원’은 끊길지도 몰랐다.
‘그럼 엄마는?’
보영은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사장실 문이 열리고 재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영은 계속 일을 하고 있던 것처럼 허리를 곧추세우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점심 챙겨 먹어요.”
그녀는 점심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온 이현과 재일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아, 그렇지. 뭐 시켜 줄까요?”
몇 걸음 내딛던 이현이 다시 되돌아와 물었다.
“괜찮습니다. 출근할 때 점심 도시락을 사 왔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해요. 들어오는 길에 사 올게.”
이현이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이듯 친근하게 말하곤 다시 돌아섰다.
이현을 기다리느라 복도 중간에 서 있던 재일의 눈빛이 꽤나 살벌했다.
보영은 다시 한번 그들을 배웅하며 생각했다.
‘만약 의심한다면 왜 내게 호감을 표현하고 사귀자고 했을까? 처음엔 의심했지만 결국엔 괜찮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건가?’
보영은 긴장해서 굳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허리를 들었다.
* * *
밤 9시.
보영은 이현의 집 앞에 다소 심란하게 서 있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이 어수선해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S’에게 물어봤다가 약속했던 일이 없던 일이 될까 묻지도 못했다.
‘사장님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걸까?’
“뭐 해요? 왔으면 들어오지.”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보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한 손에 고양이를 안은 이현이 들어오도록 몸을 비켜 주며 안쪽으로 턱짓했다.
“이 녀석, 천재인가 봐요. 알아서 모래에 가서 볼일을 보더라고요.”
“그…… 랬습니까? 아, 밥은 주셨어요?”
“줬어요. 아주 잘 먹던데요.”
「어제 그 언니네?」
보영은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어?”
「뭐 하긴. 심심해서 혼났지.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오빠랑 놀았어. 더 놀고 싶은데 금방 그만두더라고.」
거실로 들어서자 어제 사 온 고양이 장난감 몇 개가 나와 있었다.
이현이 바닥에 앉자 고양이가 내려와 하루 사이에 익숙해진 집 안 어디론가 들어가 버렸다.
“은신처를 찾은 모양이네요.”
“은신처?”
보영의 말에 이현이 고양이가 사라진 안방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침대 밑에 있을 거예요. 잠시 있는 거라도 조만간 새로 은신처를 마련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영은 말을 하며 고양이에게 위험할 만한 물건이 없나 살폈다.
하지만 집 자체가 워낙 깔끔하고 자잘한 물건들이 적은 편이었기에 생각보다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다.
고양이가 삼킬 만한 물건들을 치우고, 전선을 정리하고 캣 타워를 설치할 만한 공간도 봐 두었다.
이현 또한 고양이가 지내기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나비는 자네요. 차 한잔할래요?”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나비를 찾으러 들어갔던 이현이 나와서 하는 말에 보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정 비서가 손님인데 내가 해야죠. 앉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근무 외 시간이잖아요.”
“그래도.”
“우리 사귀는 사이인 거 잊었어요?”
이현이 찬장을 열어 컵을 꺼내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그렇다 치는데, 사석에서는 좀 편하게 대해요. 군대도 아닌데 말끝마다 다나까에 꼭 어르신 모시는 것처럼 깍듯하니까 이게 무슨 사이인가 싶거든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것까진 없고요. 믹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이내 커피 믹스를 타 온 이현이 그녀의 앞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테이블 앞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편하게 앉았다.
“감사합니다.”
“하하, 못 말리겠네. 매사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친구한테도 그렇게 해요?”
“아…… 뇨.”
보영은 조금 전, 편하게 대하라고 했던 이현의 말을 상기하곤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이현을 보았다. 그는 늘 그랬듯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설마 의심하고 있는데도 사귀자고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음흉한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생각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그런 거 없는데요.”
“그래요? 없어요?”
이현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팔을 뒤로 짚어 비스듬히 앉아서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점심에 사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고 했었죠?”
딱히 할 말이 없어 눈을 굴리며 커피를 마시던 보영이 움칫했다.
“아니, 나중에 보니까 그때 누가 정말 있긴 있었던 것 같아요.”
“네? 제가…… 확인했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요.”
“아니. 누가 있었어요. 확실해요.”
고개를 가로저은 이현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덧붙였다.
“내 서랍 안에 있던 서류를 누가 건드린 흔적이 있었어요.”
“네?”
보영은 머그잔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가 서류를 제대로 돌려놓지 않았었나?’
어깨가 뻣뻣해졌다. 다급하게 뒤진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보고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찾았던 거라 눈에 띌 만큼 흐트러지진 않았다.
이현이 정말 모든 물건의 위치를 기계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럴 리가요. 아무도 없었는데…… 요.”
“정 비서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보영은 혹시라도 목소리가 떨려 나올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이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해 봐요.”
“하고 싶은 이야기요?”
“있을 텐데. 하고 싶은 이야기.”
보영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현은 언제나 그랬듯 미소 짓고 있었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온기가 어려 있던 눈빛이 왜인지 차갑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있잖아요.”
“내가 정 비서 입장이면 반드시 묻고 싶을 텐데. ‘왜 내 뒷조사를 하셨어요?’ 하고요.”
보영이 굳었다. 그의 말이 시사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었다.
“네?”
“이름 정보영, J대 졸업 직후 곧장 W 건설 전무 비서로 취직, 5년 동안 근무 직후 태양 호텔로 이직. 아버지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서 20년째 몸을 의탁하고 있고 호적상 다른 가족은 없음.”
어느새 이현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지워졌다. 무미건조한 음성이 넓은 거실을 고요히 울렸다.
뒤통수가 오싹하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알고 있는 태이현이 아닌 거 같았다.
날카롭고 차가웠으며 자못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부드럽고 온유한 미소를 트레이드마크처럼 입가에 머금고 있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모른 척할까 했는데 정 비서가 그럴 수 없게 만드네요.”
뒤로 반쯤 기울어져 있던 몸을 다시 바로 세운 이현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
“아까부터 날 대하는 게 무지 어색하다는 건 알고 있나? 정말 이해가 안 가네. 왜 저쪽에선 정보영 씨 같은 사람을 쓴 거죠?”
눈빛, 말투, 분위기 그리고 그가 풍기는 존재감마저 바뀌었다.
“아무리 애써서 모른 척, 속는 척해 보려고 해도 이래서는 텄지. 그러니까 이쯤 할까요?”
보영은 정신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은 누구지?’
이현이 휴대폰을 만지더니 이내 그녀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보영이 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보았다. 액정에는 동영상이 하나 재생되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도 없는 사장실에서 뭔가를 뒤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CCTV가 있었나?’
육안으로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찍힌 각도를 보니 사장실 안, 방향은 액자다. 액자가 있는 위치였다.
그 추상화 어딘가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뭘 찾고 있었어요?”
이현과 눈이 마주쳤다. 걸렸다. 꼼짝없이.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엄마, 수술, 병원비, 빚, 그녀의 커리어…….’
“그건…….”
그때였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현의 시선이 그녀의 옆에 닿았다.
보영은 옆에 놓아둔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동일이었다.
“서동일, 나이 쉰셋, 전과 12범의 사기꾼, 잡범. 그쪽이 삼촌이라고는 부르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
그의 서류철에는 동일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받지 그래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보영은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 보영아! 집에 도둑 들었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기도 전에 동일이 전화 너머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 도둑 말이야! 오늘 누가 방 보러 온대서 갔는데 집 안이 난리가 났어! 내가 누구야. 도둑인지, 그냥 더러운 건지는 한눈에 알아본다고.
보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택으로 오기 전 살던 곳은 노후한 연립 빌라의 작은 투 룸이었다.
급하게 이직을 한 데다, 이곳과는 집이 멀어서 비교적 시간 운용이 쉬운 동일에게 집을 보여 주는 일을 부탁해 뒀었다.
“도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가져갈 것도 없는 다 스러져 가는 집에 도둑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 온 집 안이 난장판이야! 시간 늦은 건 아는데 와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도 해. 너도 알다시피 내가 경찰은 좀…….
“알았어.”
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이후 이야기는.”
“그래요.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면야.”
이현이 입매를 슬쩍 비틀며 그녀로부터 시선을 뗐다.
마치 뱀 앞의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누구지? 이게 사장님의 민낯일까?’
일단 이 자리를 피하게 된 걸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이건 피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었다.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하곤 돌아섰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 * *
없어진 물건도 없고, 파손된 기물도 없다. 집은 그냥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신고로 방문한 경찰들도 이런 경우 주변에 CCTV도 없어서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피해 상황이 없기 때문에 사건 처리를 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결국 경찰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방범 벨을 달아 주는 것뿐이었다.
Rrrrr…….
타인에 의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집을 속상하게 바라보던 보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이현이었다.
〈사실 모른 척할까 했는데 정 비서가 그럴 수 없게 만드네요.〉
여기 오기 전 그와 나누었던 살 떨리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네, 사장님.”
― 상황이 어때요?
“네?”
― 도둑 들었다면서요. 아까 통화 소리가 다 들렸거든요. 이것 역시 모른 척할까 하다가 전화 했어요.
보영은 휴대폰을 꽉 거머쥐었다.
“괜찮아요. 도둑맞은 것 역시 없고요.”
― 다행이네요.
“네.”
오늘 낮과는 다른 기이한 정적이 그녀와 이현 사이에 깔렸다.
보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던 이현과 오늘 저녁의 이현은 판이하게 달랐다.
― 그럼 일 잘 마무리하고 조심해서 와요. 우린 아직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다정하지만 차가웠고, 자상하지만 살벌했다.
“……저기.”
보영은 끊기려는 전화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 말해요.
“제가 지금 이 상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질문 좀 할게요, 사장님.”
보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른 척을 하려고 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는 소리죠?”
― 그래요.
‘역시.’
보영은 파르르 떨리는 속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왜…… 제게 계약 연애를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 필요해서요.
“제게 호감이 있으시다고 한 건요?”
― 호감 있어요. 많이.
말이 뜻하는 단어와 달리 어투는 건조했다.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헛헛해졌다.
“제가…… 낙하산이기 때문에 갖게 된 호감이신가요?”
이현은 대답 대신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럼 고백은 왜 해? 왜 날 진짜로 좋아하는 척 연기를 해? 왜 사람 마음을……!’
속으로 부아가 치밀던 보영이 멈칫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녀도 할 말은 없었다.
그녀 역시 이현에게 순수한 마음인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현관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오자마자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동일일 터였다.
현관 쪽을 흘끔 본 보영은 씁쓸하게 웃음을 흘리곤 전화 너머 이현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파악이 좀 된 것 같네요.”
― 그래요? 궁금하네. 어떤 식으로 파악했을지.
“처음부터…… 절 갖고 노신 거네요.”
― 그것보다는 나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했다고 봐야겠죠.
탁탁탁!
그녀가 문을 열지 않자 두드리는 소리가 더 크게 났다. 그리고는 그새를 못 참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영의 입가에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조금 설렜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힘들었고 그가 좋아질 것 같아 초조했다.
하지만 다 바보짓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출근해서 뵙겠습니다.”
현관문이 열리는 동시에 보영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저릿한 가슴을 모른 척하며 동일을 향해 눈을 흘겼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영아, 갔지?”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경찰 오니까 꽁지가 빠지게 그렇게 도망가?”
“누가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동일이 멋쩍게 입을 삐죽였다.
“너도 알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범죄 현장을 지나만 가도 용의자로 몰린다고.”
“알긴 아네. 안 그래도 나 말고 집 드나드는 사람 없냐고 묻더라.”
“설마…… 경찰한테 나에 대해 말한 건 아니지?”
보영은 제 몸부터 사리는 동일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말했는데?”
“진짜? 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그동안 널 딸처럼 아끼고 보살피고…….”
동일이 펄쩍 뛰었다. 삿대질을 하며 목청을 돋우길래 보영은 한숨을 흘렸다.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물에 젖은 솜처럼 기분이 축축 늘어졌다.
“에휴, 안 했어.”
“……아, 그러냐?”
금세 꼬리를 내린 동일이 그녀 곁으로 와 쪼그려 앉았다.
“같이 치울까?”
“응.”
보영의 대답에 동일도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책이며 소품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보니까 현관에 누가 억지로 문을 딴 흔적도 없고 창문도 깨끗하던데 어떻게 들어온 건가 몰라. 비밀번호가 너무 쉬웠나?”
동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보영은 작은방으로 이동했다.
작은방에는 엄마와 아빠의 물품을 두었는데 이곳은 안방보다 더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이야, 이게 언제 적 사진이야.”
작은방으로 따라 들어온 동일이 보영의 눈앞에 불쑥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부모님의 결혼사진이었다.
“먼지 케케묵은 거 봐라. 아니, 이 도둑놈은 딱 봐도 고물 천지인 방에서 뭘 가져가겠다고 여기까지 이렇게 뒤져?”
“값비싼 골동품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야, 그게 말이 되냐? 이 동네가 부촌도 아니고 이 집도 이 근처에서 제일 오래된 낡은 건물인데, 도둑놈도 눈치라는 게 있지. 아니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동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아. 초보였나? 연습?”
“뭐?”
“모든 범죄가 한 번에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줄 알아? 다 과정이 있는 거라고.”
동일이 턱 아래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보영은 바닥에 흩어진 아빠의 유품을 상자 안에 정리해 넣고는 엄마의 소지품을 모아 둔 상자를 열었다. 가장 먼저 엄마가 쓴 그녀의 성장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건 다 언제까지 들고 있으려고? 너 이번에 들어간 사택에는 이거 다 놓을 데도 없어 보이던데. 이참에 정리하는 건 어때?”
멍하게 이것저것 들쳐 보던 보영에게 동일이 말했다.
“집 나가면 이거 다 어떡하려고?”
“방 나가면 바로 창고 하나 빌릴 거야.”
“어디에? 짐은 다 거기 갖다 놓으려고?”
“응. 바로 이 앞 건물에 딸려 있는 작은 창고도 한 달 임대에 3만 원이래. 괜찮을 것 같아.”
보영은 상자 뚜껑을 덮고 화제를 돌렸다.
“저녁은 먹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먹었지. 넌 안 먹었어? 뭐 사 줘?”
동일이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다 물었다. 보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출근해야지. 일단 정리는 됐으니까 집으로 갈게. 그냥 좀도둑이었나 봐. 가져갈 게 없으니 그냥 간 걸 테고.”
“그런 거면 좋겠지만…….”
동일이 말끝을 흐리곤 이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밀었다.
“그래! 뭐 별거였겠냐. 너 출근해야지.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
“삼촌도 고생했어.”
“응. 야, 그런데 정말 경찰한테 내 이야기 안 했지?”
“안 했어. 그러게 진즉에 죄짓지 말고 착하게…….”
말을 잇던 보영이 주춤했다.
〈아빠는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반장하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사는 거. 그거 딱 하나 바란다. 보영아.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늘 당부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은 죄는 안 짓고 살잖아. 잔소리는 그만. 가기나 하자. 많이 늦었다. 데려다줄게.”
“……응, 삼촌.”
바르게 살고 있지 않다. 이유가 있다고는 해도 바르지 않은 길로 가려 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걸까? 알게 된 이상 날 그냥 두지는 않겠지? 그러면 이제 엄마는 어떡하지?’
동일이 사택 앞에서 내려 주었고 보영은 공동 출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5층 이현의 집 쪽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보영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혹여 물러나라고 해도 그저 손 놓고 물러날 수는 없어.’
하지만 장기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 * *
“정 비서, 오늘 지원 본부장 미팅이 몇 시였죠?”
막 응대 전화를 끊은 보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일과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오던 이현이 갑자기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보영은 아연해졌다. 그는 그녀에겐 아주 익숙한 서글서글한 웃음을 물고 있었다.
“……아닙니다. 미팅은 오후 1시 반입니다.”
“그래요? 미안한데 조정 좀 해 주겠어요? 2시로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멍해 보이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어디가 아프다거나?”
걱정스러운 표정과 어투였다. 동시에 어제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건 뭐였지? 꿈이었나?’
이현은 출근 직후 그녀에게 어제 일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 도둑 든 일 때문에 그래요?”
“네?”
“어제요. 나랑 대화하다가 갔잖아요.”
“아…….”
“나한테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피해가 컸던 거예요?”
“그…… 건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보영은 혼란스러워졌다. 이현의 태도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 어려운 일 있거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요.”
이현이 뒤에 서 있는 재일의 눈치를 보곤 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한 후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영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살짝 숙여 이현의 등 뒤에 대고 인사를 했다.
“……뭐지?”
아직도 머릿속엔 이현의 차갑고 매서웠던 모습이 서늘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현은 그녀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위화감 따윈 없었다.
그때였다. 함께 이현을 따라 들어갔던 재일이 사장실을 나왔다.
보영은 얼른 내선 번호를 누르고 지원 부서를 연결해 이현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적대적인 재일의 시선이 내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장님께서 정 비서에게 고양이에 대해 조언을 구할 게 있다고 퇴근길 동석을 하자고 하십니다.”
“네?”
“선약이 있어도 비워 두세요. 우리에겐 상사의 일이 우선이니까요.”
제 할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재일의 시선이 떨어졌다.
보영은 다소 불안한 눈으로 사장실 문을 힐끔 보았다.
이현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초조함만 가중되었다.
* * *
보영은 눈을 굴려 조수석에 탄 이현을 힐끔 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로서는 이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이야기는 언제 할까요?”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보영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어제는 급한 일이 있었고 끝마쳤으면, 오늘쯤은 먼저 이야기를 할까 싶었는데.”
보영은 사택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옆을 보았다.
어제 그의 집에서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표정의 이현이 그녀를 건조하게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 밑은 선득해졌다.
“무…… 슨 말을 더 해야 하는지…….”
그녀를 보는 이현의 입꼬리가 차갑게 삐뚤어졌다.
“그건 정 비서가 더 잘 알겠죠. 찾으려던 게 뭔지는 알고 내 사무실을 뒤진 걸 거 아니야.”
보영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그쪽도 도둑이 들었다고 했죠? 아는 사람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거예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거든. 도둑은.”
그녀를 겨냥한 말이었다.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뭘…….”
보영은 가까스로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시는 건지……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이현이 피식 웃었다.
“사실 재일이 형은 내켜 하지 않았어요. 저쪽에서 겨우 장기짝으로 쓰는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한 사람을 왜 이렇게까지 지켜보려고 하는지.”
보영은 턱에 힘을 꽉 주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그는 모두 알고 있다.
그녀가 낙하산인 것부터 시작해 어떤 꿍꿍이로 이곳으로 이직을 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녀도 모르는 ‘S’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 이제 절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여전히 이현의 얼굴에선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 비서가 하는 말에 따라서 생각을 달리해 볼 순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말하는 거요?”
“아는 건 뭐든 말해요. 내 비서로 오게 된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은 모두 다.”
보영은 이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난 정말 어째서 그런 착각을 했을까. 자상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라고.’
오늘 낮까지만 해도 여전한 부드러운 미소와 서글서글한 태도에 헷갈렸는데, 아니었다.
보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S’와의 거래가 틀어지면 둑 터지듯 몰려올 일들이 잇따라 떠올랐다.
평생을 벌어도 다 갚을 수 있을까 싶은 빚과 엄마의 수술, 그리고 그 후 처치까지.
이렇게 나가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입을 다문다면, ‘S’의 존재에 대해 함구한다면 일부나마 삭감되지 않을까.
“……제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없는 걸로 하겠다?”
이현이 다시금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돈 때문인 것 같은데. 엄마 병원비 그리고 빚. 아니에요?”
보영은 어제 보았던 자신의 신상 명세서를 떠올렸다.
‘거기에 그런 것도 적혀 있었나? 조금 더 자세히 봐 둘걸.’
“……아신다면 더더욱 예상하셨을 겁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다는걸요.”
“그래요?”
잠시 그녀를 보던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 문을 열었다. 보영은 당황해서 차에서 내리는 이현을 따라서 서둘러 내렸다.
그는 이미 차를 등지고 공동 출입구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사, 사장님?”
그녀가 부르자 이현이 돌아보았다. 하지만 보영은 입만 빠끔거릴 뿐 별다른 말을 잇지는 못했다.
뭔가 이 자리에서 끝이 나도 날 것 같았는데 너무 싱거운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요.”
“이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러니까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 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
‘그럼 그쪽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요?’
욱한 보영은 마음속에서 사장님이라는 직함을 집어치웠다.
그녀는 그저 장기짝일 뿐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어제 내 사무실에서 그쪽이 찾던 게 뭐였는지. 그게 뭔지 얘기할 생각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이제 잘리…… 나요?”
이현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다소 짜증스럽게 보았다.
‘아, 저 남자.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천의 얼굴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사람 함부로 자르면 안 되는 거 몰라요? 그래서 정년퇴직할 때 되면 알아서 네 발로 나가라고 힘들고 엉뚱한 부서로 발령 내는 게 이 업계 관례야. 내가 자를 거였으면 정 비서를 객실 팀으로 발령 내서 뺑이 치게 했겠죠.”
이현은 그 말만 뱉고는 곧장 돌아서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보영은 멍하게 그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알아서 결정하라는 건가? 스스로 나갈지, 어떻게든 살얼음판 위에서 버텨 볼지.’
보영은 진이 빠졌다. 사람을 너무 쉽게 봤다.
여느 뉴스에서 접했던 재벌 3세 같지 않아서, 잘 웃어서, 마음 씀씀이가 다정해서 방심했고 정을 줄 뻔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S’였다.
[헤븐힐 리조트 관련 서류는 어떻게 됐습니까?]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녀가 뭘 어떻게 하건 아무 소용도 없었으리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현은 내숭 백단의 여우였다. 속이 검었다.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가 차에 치일 뻔한 걸 구해 주었다. 그 첫 만남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며 조금은 진중하고 조금은 쑥스럽게 뱉었던 그 고백 역시.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었겠지.’
지금 상황을 보면 물론 거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와 그녀가 알고 있던 이현의 모습이 너무 달랐다.
‘어떤 게 진짜 태이현이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보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후 휴대폰 액정을 다시 켰다.
[아직입니다.]
망설이다가 문자를 회신했다. 수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버텨 볼 수 없을까?’
아니, 버텨야 했다. 그 뒤의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판에 뛰어든 순간 그녀는 자신의 미래는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보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 * *
“좋은 아침이에요.”
이현은 어제와 같지만 다른 얼굴로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보영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얼굴을 드는 순간 눈앞에 작은 3단 우산이 하나 내밀어졌다.
“오늘 오후부터 비 온대요. 나는 외부 일정이 있어서 바로 퇴근할 거예요. 안 챙겼을 것 같아서요.”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야?’
그는 또다시 어제 퇴근길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는 재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장실로 들어갔고 자리에 남은 보영은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밤새 생각했고, 그녀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했다.
야심 차게 집까지 내놓고, 7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온 것치고는 너무 허탈한 결말이다.
“정 비서,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가방을 움켜쥐고 가만히 서 있던 보영이 재일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잊으신 당부가 있다고 하니 들어가 보세요.”
사무적으로 용건을 전한 재일이 자리로 돌아갔다. 보영은 천천히 가방을 열고 그 안의 하얀 봉투를 집어 들곤 사장실 앞으로 갔다.
똑똑똑.
“사장님, 정보영입니다.”
보영은 이내 문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선 이현이 책상이 아닌 소파에 기대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로 문을 닫은 보영이 손에 든 봉투를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앉아요.”
보영은 이현의 맞은편 자리에 앉다가 멈칫했다. 테이블 위에 마치 보란 듯이 놓여 있는 세 개의 파일 때문이었다.
“골라 봐요.”
“네?”
느닷없는 말에 단단히 각오했던 보영은 다소 당황했다.
“그쪽이 주인 없는 사무실에 들어와 이곳저곳 뒤질 만큼 필요했던 서류가 이 중에 있을 것 같아서.”
이현이 파일을 턱짓했다. 보영은 눈을 깜빡이며 세 개의 파일을 번갈아 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필요한 걸로 가져가요.”
보영은 얼굴을 들었다. 이현은 사장실 밖에서와는 달리 건조하고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 남자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가 하면, 필요한 정보까지 알아서 제공해 주려 했다.
보영은 잠시 제 앞에 진수성찬처럼 차려진 파일을 보다가 눈을 들었다.
그러곤 너무 힘주어 잡은 탓에 옆면이 약간 우그러진 하얀 봉투를 이현의 앞에 내밀었다.
이현이 눈을 힐끔 내려 봉투를 보았다.
“……사직서? 뭐 하자는 겁니까?”
또다시 예의 비릿한 웃음을 문다.
“들켰으니 도망가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시하네.”
보영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이 진짜였다.
“아뇨.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럼 이건 뭔데?”
“이 사표는 앞으로 3주…… 3주만 보류해 주십시오.”
이현이 설명을 요구하듯 그녀를 따갑게 보았다.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붙어 나는 놈이 있습니다. 제가 걷는 놈이면 사장님은 붙어 나는 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욕같이 들리는데?”
“비유일 뿐이에요. 애초에 제 수작은 사장님께는 통하지 않았다는 뜻이고요.”
이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인정에 사정할까요, 아니면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설득을 할까요?”
“뭐가 다르죠?”
“사장님이 인정에 움직이시는 분이라면 제 개인사를 여지없이 고백하려 하고, 논리적인 설득을 원하시면 제 쓸모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직서를 내놓고?”
“3주의 유예 기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보영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이현은 자못 무서울 만큼 차갑고 쌀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입도 못 뗄 만큼 그녀도 어리숙하진 않았다.
“그럼 쓸모에 대해 말하는 게 좋겠는데.”
“인정과 쓸모를 섞어 설득하겠습니다.”
“그쪽 마음대로? 그럴 거면 왜 물어봐요?”
이현이 피식 웃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어쩌면 도박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의 말처럼 일회성 소모품일지라도 그녀는 ‘S’와 이현의 번외 부속품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사유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으며, 의지가 있었다.
“3주. 3주 후에는 절 고용한 사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녀도 ‘S’가 누군지 몰랐다. 단지 짐작만 할 뿐.
그러니 3주 뒤 그녀가 말해 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고,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저쪽의 일 역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역으로 스파이 짓을 하겠다는 건가요?”
“네. 필요하다면요.”
“알게 되면 저쪽에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가 솔깃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생각보다 더 태연했다.
‘혹시 사장님도 ‘저쪽’이 누구인지 짐작은 하는 걸까? 아마 그렇겠지?’
“정 비야말로 모르는 거 같은데. 정확히 어떤 인물이 정 비서를 이 자리에 꽂았는지.”
정곡을 찔린 탓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쪽에서 알게 되면 할 짓, 내가 말해 줘요?”
이현으로부터 언뜻 냉점보다 더 차갑고, 온점보다 더 뜨거운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평생 불구 혹은 세상 하직.”
“……네?”
“모르고 뛰어든 건 아닐 텐데. 돈이 그렇게 좋았어요?”
냉담하게 조소하던 이현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떠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다 덧붙였다.
“아니면 돈보다 목숨이 귀한 건 아니까 3주로 정한 거예요? 몸을 안전하게 빼낼 시간?”
“아니…… 아닙니다.”
저쪽에서 알게 되면 그녀에게 생길지도 모를 일이 너무 극단적이라 보영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그녀도 뭔가는 얻어야 했다. 그래야 수지가 맞았다.
게다가 상대가 이렇게 속이 시커먼 남자이니 이젠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었다.
“엄마가 간암입니다. 3주면 수술을 끝내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됐을 때입니다.”
“간암?”
“국내에서 간담췌의 권위자라는 교수님께 수술을 받으려니 수술비 외에도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절 여기에 꽂으신 분이 그걸 도와주셨고요.”
“……단물만 빼먹고 내빼겠다?”
“사장님 말마따나 저 따위가 내빼는 게 되겠습니까? 일회성 소모품일 뿐인데요.”
이현이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척이나 감동적인 효심이네요.”
“효심…… 이라기보다 저는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게 다른가?”
“엄마가 벌써 20년째 병 때문에 요양 병원에서 생활 중이십니다. 가족 중 누가 아프다는 건, 다른 나머지 가족들의 삶도 함께 깎여 나가는 겁니다. 함께 병들고 함께 그늘지고, 함께 투병해야 하죠. 그래서 제가 살려고 엄마가 합병증이라도 생겨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말 효심이 있는 사람은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겠죠.”
보영은 이를 사리물었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울컥이고 목이 메어 왔다. 정말 느닷없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으나 애써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래서 3주가 필요하다?”
잠시간 그녀를 말없이 보던 이현이 되물었다. 보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3주 뒤에 내게 모든 걸 말하고, 그쪽 엄마 수술도 잘 끝났다고 쳐요. 그럼 그 뒤엔?”
“저도 모릅니다.”
보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뱉고 나니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몰라요?”
“모릅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평생 불구 혹은 세상 하직할지도 모르겠죠. 다행히 사망 보험은 든든히 들어 놨으니…… 엄마 병원비는 문제없을 거고요.”
이현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에 꽂힌 거야?”
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대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S’는 하필이면 왜 그녀를 골랐냐는 질문에 그저 행운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었다.
“아니면 지금 나한테 말하는 것도 연기예요? 그 삼촌인지 뭔지 하는 작자랑 짜고 벌이는 연극인 건가?”
“삼촌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제가 태양 호텔에 다니는 것도 모릅니다.”
“하……? 정 비서, 생각보다 대책 없고 골 때리는 사람이었네?”
이현이 머리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는 3주가 꼭 필요합니다. 정보가 필요하시면 이 조건을 받아 주세요.”
보영은 눈썹을 내리깔았다. 정말 골 때리는 건 이현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에 눈빛, 태도, 말하는 습관까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다중 인격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중 인격자들은 다른 인격일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이현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다중 인격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가 보일 수 있는 패는 모두 보였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보영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확률이 낮은 도박이긴 했지만 막상 확답을 듣고 나니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부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요?”
“네?”
이현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누른 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보영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발신인은 ‘조성하 비서실장’이었다. 그녀도 기억했다. 태훈 회장의 수행 비서였다.
[회장님께서 소문을 하나 들으셨습니다. 조만간 한남동에 방문해 주십시오.]
‘소문?’
어째서 이걸 그녀에게 보여 주는 건지 의아했다.
“강릉에서 소문을 하나 만들었죠, 우리가.”
이현이 말을 잇자, 보영은 휴대폰을 다시 그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강릉 시장 앞에서 날 좋아한다고 말한 일을 가리키는 건가?’
“나는 3주 갖고는 안 돼요.”
강릉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시 의원과 있었던 작은 소동과 차 펑크, 깨인 휴대 전화 액정, 그리고 근처 해변까지 꽤 걸어야 했던 일까지 모두.
그곳에서 이현은 고백 아닌 고백을 했었다.
“그때 그 일은…… 사장님이야말로 연기 아니셨나요?”
“부정은 못 하겠네.”
이현이 그의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 비서는 쓸모의 논점을 잘못 짚었어요. 내게 정 비서가 필요한 이유. 그래서 앞으로 지금 이 상황을 현상 유지해야 하는 이유 말이에요.”
보영은 이현과 그의 휴대폰을 번갈아 보았다.
“여전히 방패막이가 필요하신 거란 말인가요?”
“맞아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요?”
“이미 상대가 정 비서라고 이야기가 들어갔어요.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내게 다른 생각도, 기대도 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내 입장에선 편하죠.”
“……그리고 절 이곳에 이직시킨 쪽에서 원하는 일도 다이렉트로 알 수 있으실 테고요.”
그녀의 말에 이현이 입매를 삐딱하게 비틀었다.
“그리고 이건 제안이 아니에요. 무조건 해야 하는 거지. 3주가 지난 후에도 계속.”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습니다.”
보영은 앞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서류 중 헤븐힐 리조트에 관한 서류를 집었다.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엄마의 수술을 가장 우선에 두기로 했다.
“……제가 찾던 건 헤븐힐 리조트 내 입점되어 있는 업체 중 몇 곳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해지된 것과 관련하여, 어떤 업체가 그 자리로 들어가는지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이현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이 서류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앞으로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냥 사장님께 말씀드리면 되는 건가요?”
이현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요. 상황 판단이 빠르네.”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요.”
“생각한 대로 살아지면 그만큼 쉬운 게 없겠지. 어쨌든 그건 유효한 걸로 하죠.”
“그거라면.”
“정보영 씨를 여기 꽂은 ‘저쪽’에 대한 정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그게 거래의 기본이지.”
이현의 말에 보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류를 열어 차분히 업체명을 찾았다. 입점 업체를 심사 중이었기에 리스트가 꽤 길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요. 기밀은 아니니까.”
보영은 곧장 사진을 찍은 후 다시 서류를 덮어 자리로 돌려놓았다.
“더 하실 말씀은요?”
“글쎄. 처신 잘해라, 배신하지 마라 어쩌고저쩌고해도 결국 뒤통수칠 놈은 치니까요. 정 비서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을 보면 사이즈가 나오지.”
순간 보영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뒤통수칠 놈 같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호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업무는 이대로 지속하겠습니다.”
이현이 그러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게 길인지 흉인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보영은 이현에게 묵례한 후 사장실을 나왔다.
그녀가 나오자 재일이 잠시간 그녀를 차갑게 보다 눈을 돌렸다.
이래서는 야비한 박쥐 신세하고 다를 게 없었다. 필요에 따라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보영은 우선 자리로 돌아와 입점 리스트를 작성해 ‘S’에게 전송하고 사진은 삭제했다.
“정 비서, 점심에 근처 이탈리아 레스토랑 예약 좀 해 줘요.”
의자를 당겨 앉던 보영이 옆을 올려다보았다. 사장실에서 불쑥 나온 이현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고 있다.
보영은 망연하게 그 변화무쌍한 얼굴을 응시했다.
“사촌 동생이 밥을 먹으러 온다네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해하고.”
“……네?”
“소문요. 아마 회장님이 정탐이라도 해 보라고 시켰을지도요.”
그가 조금 장난스럽게 웃는다. 방금 전에 그녀가 문 안쪽에서 만났던 사람과는 결이 달랐다.
‘이제 내게 이렇게 살갑게 굴 필요는 없는데 계속 이런다는 건…… 내가 그냥 적응해야 하는 거겠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죠? 잘 부탁해요.”
그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보영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남자의 또 다른 가면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 * *
이현이 사촌 동생의 방문을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한 바다색 슬랙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세련되게 소화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태이본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을 방문한 손님에게 인사를 하던 보영은 입가에 단정한 미소를 띠었다.
태이본.
올해 스물아홉 살로 태양 그룹 내 음료 사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이사였다.
“안녕하십니까, 태이본 이사님.”
“어머, 날 알아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조금은 이현과 닮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시원하게 화답한 이본이 힐끔 그녀의 명패를 보았다.
“아! 그 말로만 듣던 정보영 비서님이셨군요? 반가워요.”
이본이 악수를 청하자 보영도 그 악수에 응했다.
“오빠, 아니 태 사장님은 안에 계시죠?”
“네.”
“장 실장님도 오랜만이에요. 미국에서보다 인상이 한결 더 딱딱해지셨네요?”
한쪽에 서 있던 재일이 묵묵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말 없는 것도 여전하고요. 보영 씨, 장 실장님하고 일하는 거 재미없죠?”
보영에게 장난스러운 동의를 구한 이본은 곧장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에너지가 밝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아니면 이현처럼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장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일 없게 행동하세요.”
“네?”
다과라도 준비하기 위해 탕비실로 움직이던 보영이 재일을 돌아보았다.
“회장님께서 태 이사님을 보내신 겁니다. 정 아무개라는 비서와 사장님의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요.”
아까 이현의 말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태 이사님은 어떤 차로 준비해 드리는 게 좋을까요?”
“아일레스 애플티로 준비하고 디저트는 피칸 쿠키로 내 가세요.”
재일은 정말 비서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일 처리 방식은 물론 모시는 상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호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로 잰 듯 정확한 사람이 옛날에는 불량 청소년이었다고?’
다과를 준비하던 보영은 옆길로 새려는 생각을 다잡고 서둘러 쟁반을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손님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이현과 이본이 보였다.
“아일레스 애플티입니다.”
보영이 조용히 차를 내려놓고 알려 주자 이본이 기쁜 듯 꽃처럼 활짝 미소 지었다.
“어머, 고마워요.”
보영은 인사를 하고 다시 사장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본 때문이었다.
“보영 씨, 괜찮으면 잠시 앉을래요?”
“네?”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요.”
보영은 이현을 힐끔 보았다. 그러자 태연하게 있던 이현이 그녀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옆으로 당겼다.
“앉아요, 정 비서. 5분 있으면 점심시간이네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이현이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이본을 힐끔 보았다.
“오빠한테 방금 들었어요. 오빠가 먼저 치근댔다고요?”
“치근댔다니.”
이본의 말에 이현이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반응했다.
가까운 사람에겐 이중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생각이나 했겠어요. 미국에서 10년 만에 막 돌아온 사람이 오자마자 연애라니. 할아버지는 믿는 놈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며 방방 떴다니까요. 게다가 오빠 좋다는 여자는 많이 봤어도 오빠가 좋다는 여자는 처음이거든요.”
이본의 눈에는 호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보영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현의 팔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처음?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든 10분 컷일 것 같은 남자가?’
물론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초면에 이런 거 묻기는 조심스러운데, 나름 맡은 임무가 있어서요. 사실 할아버지 등쌀에 이렇게 다급하게 왔거든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
“얼마 전에도 할아버지가 오빠 집에 쳐들어갔다며. 미국에서 돌아와 코빼기도 안 보인 것도 모자라 호텔 임원진까지 뒤집어 놓고도 모자라? 또 한바탕하고 싶어?”
이본의 으름장에 이현이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보영 씨는 에, 어디부터 물어봐야 하지. 부모님은 뭐 하세요? 학교는 어디 나왔고 집은요?”
“야, 태이본.”
이본의 질문에 이현이 제지하려 했지만 이본이 검지를 세워 이현의 말을 막았다.
“당혹스럽겠지만 이 정도는 가뿐하게 넘기셔야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도 상대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전 그 새 발의 피도 못 되거든요.”
보영이 이현과 이본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안색이 무척 어두워졌지만 이제 보영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안에 또 다른 진짜 태이현이 냉랭하게 그녀와 이본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빠는 10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현재 요양 병원에 계십니다. 학교는 G대 비서학과를 나왔고 집은 현재 호텔 근처 사택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음, 그게 다예요?”
“네, 다입니다.”
보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보고 있는 이본의 표정이 처음으로 곤란해졌다.
“G대……? 그런데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요?”
한국에는 수많은 대학들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상위로 쳐주는 대학은 모두 서울 안에 있다.
대한민국은 신분 따윈 없는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몇몇 일부 사람들은 대학 졸업장 혹은 집안이 가진 재산으로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곤 했다.
“일을 아주 잘해.”
보영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이현이 대꾸했다.
“토익도…… 얼마였지? 만점에서 조금 빠지는 정도였고. 재일이 형도 같이 일하면서 업무적으로 매우 만족해해.”
“어머, 그래? 장 실장님 까다롭잖아.”
“학교 이름이 그 사람의 능력까지 좌우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기는 해. 이번에 교육 관련해서 발표한 정책 보니, 딱 그 소리긴 하더라. 전부 다 잘하면 좋겠지만 좋아하는 것, 재능이 있는 것 하나만 제대로 잘하면 된다.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보영 씨.”
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잘못된 편견이 있었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빙긋 웃은 이본이 머리카락을 귀에 걸며 보영이 내온 차를 들어 한 입 머금었다.
“그런데 오빠는 무슨 생각이야?”
“뭐가?”
“연애, 조용히 할 수도 있었잖아. 할아버지가 아셨어. 내 생각에 일부러 흘린 것 같아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집안, 인맥 따지면서 관계 맺는 건 다 옛날이야기야. 내가 물꼬를 잘 터야 너하고 이호, 성우도 후에 편해지지.”
“그래서 총대를 메셨다? 말이나 못 하면.”
이본이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는 운동을 몸으로 했던 게 아니라 입으로 했지?”
“칭찬으로 들을게.”
이현의 너스레에 이본의 눈이 보영을 향했다.
“많이 힘들 거예요. 알겠지만…… 오빠 옆자리가 보통 자리는 아니잖아요. 행운을 빌어요.”
“……응원 감사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본이 크게 웃음을 터뜨려서 낯이 조금 뜨거워졌다.
‘응원’이라는 말은 뺄 걸 그랬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현이 그녀의 손을 불쑥 잡아 왔다.
놀라서 눈을 드니 이현이 다정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힘주어 잡고는 놓았다.
잠깐 굳었던 보영은 그제야 이본의 시선을 의식했다. 반달처럼 휘어진 이본의 눈이 그녀와 이현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보란 듯이…… 인가.’
이 남자는 야구 선수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 했다.
“점심 먹고 가. 식당 예약해 놨어.”
“그래? 그럼 먹고 가야지. 보영 씨는요? 같이 가요.”
이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아 있어서요. 그럼 즐거운 점심 식사 하십시오.”
보영은 이현과 이본을 배웅하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그리고 이현이 잡았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잡았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그가 닿으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손끝이 조금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이중성을 알았다. 기분 탓이다. 조금 지나면 별것 아니게 될 거다.
* * *
보영이 찾으려고 한 서류는 헤븐힐 리조트에 입점해 있는 업체 리스트였다.
이현은 헤븐힐 리조트 관련 서류를 덮어 바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작은아버지 석준이나 고모 인희 둘 다 이쪽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어느 쪽이려나?’
석준은 헤븐힐 리조트를 직접 지휘해 지었고, 인희는 그 안에 쇼핑센터를 구축했다.
그가 이번 개편을 통해 입점 몰을 싹 갈아엎은 건 그 물이 너무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장 관리도 제대로 안 되고, 직원 교육도 부족했으며 리조트의 이름을 등에 업고 타 매장보다 값비싼 가격에 물건을 판매하기도 했다.
주말마다 만실을 기록하는 헤븐힐 안에서도 쇼핑센터만은 자연히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을씨년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장으로 부임하기까지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뒷배가 있다는 소리였다.
“야옹!”
이현이 시선을 내렸다. 의자 발치에 새끼 고양이 나비가 다가와 몸을 비볐다.
“놀아 달라고?”
이현은 몸을 숙여 나비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비가 혀를 내밀어 그의 손끝을 핥고는 빤히 올려다보았다.
근래에는 고양이를 보면 이상하게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보영.
‘처음 만났을 때도 고양이와 함께 있었지.’
물론 이 고양이를 데려온 이유 중 일부도 보영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보영의 호감을 살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채 홀로 남은 이 녀석은 꼭 언젠가의 그를 떠올리게 했다.
이렇게 빨리 판도가 바뀔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이 사표는 앞으로 3주…… 3주만 보류해 주십시오.〉
기가 막혔다. 제 손으로 사표를 들고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간이 작나 싶었다. 들켰다고 바로 내빼려고 하다니.
하지만 자신의 엄마 수술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뒷일은 모르겠다며 말이다.
〈평생 불구 혹은 세상 하직할지도 모르겠죠. 다행히 사망 보험은 든든히 들어 놨으니…… 엄마 병원비는 문제없을 거고요.〉
어조나 표정은 담담했지만 보영은 주먹을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효심’이라고 비아냥거린 단어를 그녀는 ‘책임감’이라는 말로 정정했다.
“……왜지?”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 ‘저쪽’에서 정보영 같은 여자를 꽂은 이유를 모르겠다.
‘왜 하필 책임감으로 똘똘 뭉치고 자기 할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던 걸까? 왜 이런 상황에 적합한 ‘전문 인력’이 아닌 거지?’
이건 석준이나 인희의 방식이 아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나비를 쓰다듬던 이현이 나비를 들어 올렸다. 코를 찌르는 기묘한 냄새 때문이었다.
이현은 나비의 배와 등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배설물 냄새인가?’
이현은 나비의 발바닥도 번갈아 살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목욕시킨 적이 없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현은 파란 홍채가 선명한 고양이를 지그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캬아아악!”
역시나 물을 틀고 담그자 고양이가 마구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그래도 사람 힘을 이길 순 없는 터라 그가 씻기는 대로 얌전히 씻겨야 했다.
하지만 고양이가 바동거린 만큼 이현의 옷도 푹 젖었다.
“하아……!”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고양이를 수건으로 감싼 이현이 헤어드라이어를 들었다.
고양이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수축했다. 조그만 게 이까지 갸르릉 드러냈다.
하지만 이현은 그걸 무시하고 헤어드라이어의 전원 버튼을 켰다.
위이이잉.
* * *
보영은 헤븐힐 리조트와 관련된 기사며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S’가 헤븐힐 리조트와 관련된 서류를 원한 건, 그쪽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어찌 됐든 그녀는 3주 후까지 이현에게 말할 만한 ‘S’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알아내야 했다.
“후우, 관여를 안 한 사람이 없네.”
헤븐힐 리조트는 태석준 사장의 주도로 설립됐고, 그 안의 쇼핑센터는 태인희 대표가 주도했다.
물론 둘 다 지금은 헤븐힐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S’가 원한 자료가 쇼핑센터 입점 업체 관련이니 아무래도 태인희 대표에게 무게를 싣는 게 설득력이 높았다.
한참을 생각에 골몰해 있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서 휴대폰이 진동음을 드르륵 토해 냈다.
액정에는 ‘태이현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떴다.
손을 뻗던 보영은 멈칫했다가 이내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정보영입니다.”
― 잠깐 올라와요.
“네?”
― 도움이 필요해.
보영이 다소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 나비가 날 공격하곤 침대 밑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아요. 그런데 숨소리도 거칠고 날이 잔뜩 서 있어요.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보영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기 전 망설였다.
이제 그와 그녀는 평범한 상사와 비서 관계가 아니었다.
복잡한 사연과 각자의 상황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절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후우, 모르겠다.”
보영은 복잡하게 꼬인 상황을 머릿속에서 일단 거두어 냈다. 그가 불렀고, 고양이의 상태가 좋지 않다.
‘그래. 불렀는데 안 가면 어쩔 건데?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보영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 벨을 눌렀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인……?”
보영은 말을 삼켰다. 현관문을 연 이현의 옷도 배 부근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고양이가 저기다가 실례라도 한 건가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이현을 따라가며 보영이 눈을 굴렸다.
고양이가 이현을 공격하고 숨었다면 뭔가를 자극했다는 소리인데, 거실이며 복도, 주방 부근도 깔끔했다.
이현은 곧장 가장 안쪽에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있어요, 이 아래.”
방 앞에서 잠시 망설였던 보영이 이내 안에 발을 디뎠다.
방 안은 주방처럼 전체적으로 회색 톤이었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는 연한 회색 시트가 깔려 있었고 안쪽으로 드레스 룸과 화장실이 언뜻 보였다.
꽤나 건조한 방이었다. 침대와 침대 옆의 장 스탠드 말고는 별다른 물품이 없었다.
“하아악.”
침대 아래쪽에서 가래가 낀 것 같은 고양이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보영은 이현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잠시만요.”
보영은 이현에게 양해를 구했다. 비켜 달라는 소리였다. 이현이 한쪽으로 비켜나자 보영은 침대 밑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몸을 바닥에 붙여 엎드렸다.
“하악, 하아악.”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의 하얀 몸이 보였다. 불안정한 호흡과 날카롭게 세운 신경이 느껴졌다.
「저리 가!」
“나비야, 왜 그래?”
보영은 침착하게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고양이는 세로로 길게 수축한 눈을 빛내며 경계할 뿐이었다.
보영은 조심히 고양이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일 있었어? 언니한테 말해 봐.”
「말하면 알아들어?」
“그럼. 당연하지. 이리 와 봐.”
「웃기시네! 오라면 내가 갈 줄 알고? 저 오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날 죽일 작정이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모르지. 응? 이리 나와 봐.”
「내 몸에 물을 끼얹는 것도 모자라 나한테 미친바람을 들이댔다고! 하악! 그것도 뜨거운 바람을!」
“아…….”
보영은 나비의 앞뒤 없는 설명만으로도 상황이 예측되었다.
엎드려 있던 몸을 살짝 세운 보영은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화장대 위에 나와 있는 검은 헤어드라이어가 보였다.
“혹시…… 목욕시키시고 나비에게 헤어드라이어로 바람 쐬어 주셨어요?”
이현이 그녀를 따라 화장대 위를 보았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고양이는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예민해요. 갑자기 듣게 된 헤어드라이어 소리에 많이 놀랐을 거예요. 나비는 아직 새끼라 소음 적응이 안 돼서…….”
“헤어드라이어?”
“네, 잠시만요.”
보영은 다시 침대 아래 엎드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나비를 보았다.
“나비야, 헤어드라이어는 무서운 게 아니야. 네 털을 말려 주려고 한 거지.”
「거짓말!」
“정말이야. 사장님이 잘 몰라서 널 너무 놀라게 했네.”
나비의 눈엔 여전히 경계심이 엿보였다.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야. 넌 안전해. 그건 너도 알잖아?”
조곤조곤 이르는 어투에 나비의 수축된 동공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나랑 말을 하지?」
나비가 문득 의아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보영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이현이 옆에 있는 마당에 순순히 답할 순 없었다.
“안전해. 내 말 믿어. 이 집에서, 사장님 옆에서 너는 안전해.”
다시금 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경계심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보영은 나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한숨을 쉬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대로 굳었다. 바로 곁에 그녀처럼 엎드려 누워서 침대 밑을 보고 있는 이현 때문이었다.
“이건 내 기분 탓이겠지만…… 정 비서 혹시 고양이하고 말이라도 해요?”
“네?”
“꼭…… 대화를 한 것 같아서.”
“그럴 리가요.”
“뭘 정색까지. 농담이었는데.”
다소 장난스러운 표정과 달리 눈빛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어쨌든 신기하네. 나비가 꼭 말귀를 알아들은 것 같은 느낌이라.”
“그런…… 가요.”
30센티미터는 될까 싶은 거리에서 이현이 나란히 엎드려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시원한 보디 워시 향이 물씬 풍겼다. 머리카락도 회사에서와는 달리 앞머리가 내려와 인상도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아, 네, 그럼…….”
저도 모르게 이현을 망연히 보던 보영이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눈을 돌리다 이현의 손등을 보았다.
“다치…… 셨어요?”
이현도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아. 저 녀석이 할퀴었어요. 뭐 인과응보려니 생각해야지.”
이현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영은 그의 손등을 빤히 보았다.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꽤 깊이 할퀴어진 모양이었다.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은데요.”
“됐어요.”
다소 냉랭하게 대꾸한 이현은 침대 가를 빤히 보았다.
“그럼 나비는 그냥 저렇게 둬도 되는 건가?”
“네. 안정되면…… 나올 거예요. 쟤도 알아요, 이 집이 안전한 건.”
그러냐는 얼굴로 이현이 방을 나가 문 앞에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해요?”
“네?”
“볼일 끝났으니까 나와야죠.”
다소 까칠한 그의 말에 보영은 서둘러 발을 뗐다. 그리고 등을 보인 이현의 뒤통수를 슬쩍 째려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른 게 누군데 또 안면 싹 바꾸기는!’
이현은 곧장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정말 약 안 바르셔도…….”
사적인 건 사적인 거였고, 어쨌건 이현은 그녀가 모시는 상사였다. 상사의 신변은 비서가 신경 써야 할 우선순위였다.
“약?”
마치 통증의 크기를 가늠하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손등을 내려다보던 이현이 눈만 들어 그녀를 보았다.
“대외적인 스케줄을 생각해서라도 약을 바르시는 게 좋아요. 제가 싫으시다면 장 실장님께…….”
“됐어요. 정 비서가 약 발라요.”
이현이 손을 젓곤 거실로 나와 복도 장식장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보영은 얼른 그것을 받았고, 소파에 앉는 이현을 따라가 소파 테이블 위에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소독부터 할게요.”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을 찾은 보영이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이현이 손을 내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리 위에 팔을 걸치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그녀를 빤히 보았다.
“싫어하진 않아요.”
“네?”
“제가 싫으시다면, 이라고 했잖아. 싫은 건 아니라고. 싫어하고 말고 할 정도로 원수진 건 없잖아. 아직은.”
표정 없이 말을 뱉은 이현이 그녀 쪽으로 손등을 내밀었다. 잠시간 그를 멀거니 보던 보영이 정신을 차렸다.
“싫어하셔도 할 말은 없죠.”
“그렇긴 하겠지.”
‘꼭 말을 저 따위로 해야 하나? 얄미워라.’
이현의 손등 위에 소독액을 떨어뜨리자 손등이 움찔했다. 보영은 힐끔 이현을 보았다가 소독액을 일부러 더 많이 부었다. 그러곤 입가를 슬쩍 당겼다.
“아, 쏟아졌네요. 죄송합니다.”
“쏟아졌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보영은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연고와 면봉을 꺼내 이현의 손등 위에 천천히 펴 발랐다.
그러는 동안 생각지도 못하게 이현의 손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세련되고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이현의 손은 얼굴을 따라가지 못했다.
손가락이 길긴 했지만 마디가 굵었고 솥뚜껑처럼 큰 손이었다.
핏줄이 불거졌고 조금은 거친 인상을 주었다.
‘야구를 해서 그런가? 이 손으로 매일 볼을 던졌겠지. 투수였으니까.’
단정한 손톱 끝까지 시선을 주었던 보영은 이내 거즈를 꺼내 이현의 손등에 덧댔다.
“할아버지는 얼핏 호방하고 시원시원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섬세하고 눈썰미가 좋아요.”
거즈를 고정할 반창고를 뜯던 보영이 눈을 들었다.
“나와 소문이 난 정 아무개 비서가 금세 꼬투리를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에요.”
“꼬투리요?”
“정 비서를 가만히 보다 보면 사실은 아무 사이 아니고 오히려 꽤 불편한 사이라는 티가 날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하겠습니다. 저도 반드시 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3주.
수술까지 버텨야 했다. 그때까진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연기 못하는데?”
“물론 사장님만큼은 못하겠죠.”
저도 모르게 욱해서 뱉었던 보영은 얼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내가 연기를 잘해요?”
보영은 이현의 손등 위에 자른 반창고를 붙여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대답 좀 해 보죠, 정 비서?”
이현이 그녀의 관심을 끌려는 듯 시야 끝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보영은 사실 속으로 인상을 구기는 중이었다. 왜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선.
“묻잖아요?”
그가 손가락을 딱딱 부딪쳤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대놓고 묻고 싶기는 했다.
“……그 전에 저도 하나 물어도 될까요?”
“뭘?”
“어떤 게 진짜 사장님이에요?”
보영이 눈을 들어 이현을 보았다. 그의 얼굴엔 웃음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가 이중성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땐 내내 그랬듯 차가웠고 건조했다.
“그게 무슨 뜻이려나?”
“자상하고 관대한 대외적인 태이현 사장님과 지금 제게 보여 주는 사장님의 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어느 장단에 제가 템포를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어서요.”
보영은 최대한 담담하고 사무적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현이 문득 삐딱하게 입매를 틀었다.
“정 비서는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데? 물론 자상하고 관대한 대외적인 태이현 사장이겠죠?”
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둘 다 나라면?”
“네?”
“지금도, 그쪽이 마음에 들어 하는 나도 둘 다 나라면?”
“……그렇군요.”
보영은 구급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 두었다. 등 뒤에 이현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따갑게 느껴졌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양이는 스트레스에 민감해요. 헤어드라이어, 청소기 같은 소리나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공격성을 드러내게 할 수 있어요.”
보영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이현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렇군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데?”
걸음을 딛던 보영이 다시 이현을 보았다. 그가 다소 모호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써요. 상황과 입장과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죠. 그냥 그런 맥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정 비서에게도 다른 얼굴이 있나?”
“있습니다.”
비서로서의 그녀는 다소 딱딱하고, 말은 가능한 아끼되 단정한 태도와 바른 몸가짐을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동일 앞에서는 쉽게 욱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며 소리 내서 웃기도 했다.
늘 한결같을 순 없는 노릇이다. 사회적인 얼굴과 비사회적인 얼굴이 있으니까.
‘사장님의 경우엔 그 격차가 다소 심했지만 제가 그렇다는데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나.’
“궁금하네, 그 얼굴.”
“별로 재미는 없으실 겁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고.”
이현이 서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차차 알아 가기로 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말에 보영이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또 다른 얼굴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차갑고, 무기적이며 조금은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문득 가슴이 선득해졌다.
“……더 시키실 일이 없으면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려던 보영이 문득 안방 문가를 보았다. 순간 나비의 꼬리가 언뜻 스쳐 갔다. 다행히 은신처를 벗어나기로 생각을 바꾼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던 보영은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굳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시선을 피한 보영이 인사를 했지만 이현은 대꾸 없이 그녀가 보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보영은 이현의 집을 나왔다.
“하아…….”
‘어쩌다 커다란 고래 싸움에 끼어들어 안전장치도 없이 이리저리 치이게 됐을까.’
현관문에 등을 기댄 보영은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던 비서로서의 가면을 벗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3주만 버티자. 3주만.”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