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

02.

출장 일정은 1박 2일이었다. 작은 캐리어에 간단히 짐을 꾸려 출근한 보영은 조금 난감해졌다.

재일이 갑작스럽게 외부 일정으로 출장에 동행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처음이니 재일의 옆에서 많이 배워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운전은 조심해서 하도록 하세요. 멀미는 하지 않으시지만 배가 고프면 조금 예민해지십니다.”

“이건……?”

“사장님께서 좋아하시는 유의 주전부리로 챙겨 뒀으니 차로 이동할 때 항상 챙기세요.”

보영은 재일이 건네는 묵직하고 커다란 직사각형의 보랭 백을 품에 안아 들었다.

“필요한 자료는 여기 담아 뒀습니다. 항시 사장님 컨디션 파악하고, 예정된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의전하세요.”

“네, 실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됩니다. 오늘 일정은 모두 숙지했습니까?”

“네. 오후 2시 강릉 도착 예정으로 곧장 호텔 시찰, 오후 4시에 각 부서 보고 회의가 있습니다. 숙소는 호텔 VIP룸 이용 예정이며, 오후 7시에는 시푸드 레스토랑 〈바다해〉에서 강릉 시장님과 선약이 있으십니다.”

“내일은요?”

“오전 10시, 강릉 지자체 인사들과 골프 라운딩 일정이 있으십니다. 점심 만찬 후 오후 2시 강릉 시립 미술관 개관 초청 참여, 오후 3시 30분 태양 호텔에서 후원하는 초등학교 야구단 방문 후 서울로 돌아오시는 일정입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초리가 여간 살벌한 게 아니었다.

보영은 다소 어색하게 미소 지었으나, 애초에 미운털이 박힌 터라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잘하세요.”

“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대답이라도 야무지게 하는 것뿐이다.

재일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 사이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적당히 했으면 슬슬 출발하죠.”

보영과 재일이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지하 주차장까지 몸소 내려온 이현이 거기 서 있었다.

옅은 그레이 톤의 클래식 슈트를 모델처럼 소화한 이현은 언제나 그랬듯 눈부시게 빛이 났다.

“제가 모시러 간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시간 낭비예요. 장 실장님이 나보다 더 바쁜 사람이잖아요.”

싱긋 미소 지은 이현은 곧장 조수석에 오르며 보영에게 눈짓했다.

“사장님, 뒷좌석에 타는 게 어떠십니까?”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앞 좌석 승차감이 더 좋더라고요.”

재일이 권했지만 이현은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거절했다.

“알겠습니다. 짐은 차에 실어 두었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재일이 세상 깍듯하게 이현에게 인사했다.

보영은 보랭 백을 뒷좌석에 가지런히 놓아둔 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며 곁눈질을 했다.

빈틈없고 날카로워 보이는 재일이 얼음이라면, 늘 유연한 미소에 서글서글한 태도로 무장한 이현은 태양이었다.

“왜 웃어요?”

재일을 뒤로하고 차를 출발시킨 보영은 이현의 물음에 웃음기를 거두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현과 재일을 보니,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하나 떠올랐던 탓이다.

바람과 태양이 나그네의 모자를 벗기는 내기를 했고, 결국에는 태양이 이겼던 단순하지만 지혜가 녹아 있던 이솝 우화였다.

“……그래요? 조금 찝찝하긴 한데, 아무것도 아니면 그런 걸로 쳐요.”

보영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찝찝하다니, 절대적으로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녀로서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북풍과 해라는 이솝 우화를 생각했습니다.”

“북풍과 해?”

“워낙 유명해서 사장님도 아실 것 같아요. 바람과 태양이 길을 가는 나그네를 두고 내기를 했고, 결국 태양이 이겼죠.”

“아! 그거 알아요.”

그녀의 간략한 설명에 그 우화를 떠올린 이현이 곧장 반응했다.

“사장님과 실장님을 보니까 그 우화가 생각났습니다.”

“왜요?”

보영은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러자 머뭇거리는 그녀의 기색을 읽은 이현이 덧붙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나 좋은 사람이라면서요. 두말 안 할게요.”

빨간불에 정차하며 이현을 힐끔 보자, 그가 정말이라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두 분이 바람과 태양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바람이고, 누가 태양이냐고 물어보면 정 비서가 곤란할까요?”

“네. 곤란합니다.”

보영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현은 센스 있게 더는 묻지 않고 납득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태양이면 좋겠네요. 그 우화, 마음에 들어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드십니까?”

“따뜻한 햇볕을 내리쬘 수 있다는 거랄까?”

“네?”

엉뚱한 대답이었다. 보영이 힐끔 이현을 보았다. 늘 그랬듯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정면을 보고 있는 이현의 입꼬리는 휘어 있었지만, 눈이 무섭도록 선득했기 때문이다.

“강릉까지 머니까 운전 힘들면 말해요. 교대해요.”

하지만 그가 그녀를 돌아본 순간,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온기가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사양도 병인 거 알아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이현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가?’

* * *

동해 바다 능선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강릉 태양 호텔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5년 전 세워진 이곳은 마치 푸르른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외관과 내부를 자랑했다.

지중해를 떠다니는 거대한 크루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감각적이고 고급스러운 하얀 건물을 비롯해, 채광을 위해 모든 공용 공간은 통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 객실 스위트룸으로 구성되었으며, 꼭대기 층에는 길이가 2백 미터에 달하는 인피니티풀과 온천이 있었다.

또한 다이닝 레스토랑이 있는 32층에는 이른바 폴리가 명소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폴리는 태양 호텔이 직접 개발하고 도입한 자체적인 탑승 기구였다.

이것은 2인용 쪽배를 타고 통창을 따라 낸 수로를 돌며 먼 바다 수평선을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미흡하게나마 베네치아의 수로를 연상시키는데다가 그 규모 덕분에 태양 호텔 강릉하면 떠올리는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그리고 28층 갑판 모양의 야외 정원에서는 시즌마다 음악회, 전시회, 공연 등이 이루어졌다.

“폴리 시설 점검은 언제 한 거죠?”

“예. 매달 말일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시설 점검 결과입니다.”

보영은 사진으로만 본 화려한 광경에 멍청하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게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지사장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 넘겨 본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에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은 늘 신경 써 주십시오.”

“네, 유의하겠습니다.”

강릉에 도착했을 때, 호텔 앞에는 지사장을 비롯한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서 환대했다.

지사장은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이현을 안내하려고 했지만, 이현은 호텔부터 둘러볼 것을 원했다.

호텔이 워낙 커서 꼼꼼하게 둘러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겨우 회의 시간 20분 전에 일정을 마쳤고, 이현은 그를 위해 마련된 VIP 룸에서 약간이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장 실장님이에요?”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 휴대폰 진동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자 이현이 넌지시 물었다.

“하루 종일 울리던데.”

보영은 머쓱하게 미소를 짓곤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장님 식사는 챙겼습니까? 컨디션은 어떠시죠? 슬슬 회의할 시간인데, 분위기는 우호적입니까? 사장님께서 심기가 불편할 땐 목뒤가 자주 뭉치시니, 혹시 자꾸 목을 만지지는 않으시는지 잘 살피세요.]

그 뒤로도 문자는 이현에 대한 주의 사항으로 길게 이어졌다.

이러한 재일의 문자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오고 있었다. 보영은 옆에 서 있는 이현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장 실장님이 유난이죠?”

“네?”

“그 장문의 문자, 다 내 얘기 같은데.”

보영이 휴대폰 액정을 곤란하게 내려다보았다.

“제가 사장님 출장 동행은 초행이다 보니, 걱정되셔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이현이 그녀를 향해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좋게 포장해서 그렇지, 그거 다 잔소리인데. 게다가 정 비서는 부족한 점 없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보영은 자신과 이현의 캐리어를 양손에 끌고 내리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적잖이 당황해 몸이 굳었다.

이현이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실례할게요.”

코앞에서 방긋 웃은 이현이 굳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캐리어를 가져갔다.

정말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내 짐은 내가 챙겨요. 이런 일까지 할 필요 없어요.”

그는 자신의 캐리어를 직접 끌고 내렸다.

보영은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사, 사장님……!”

보영은 서둘러 그를 따라 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다시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바람에 그의 어깨에 얼굴이 부딪치고 말았다.

“읏……!”

휘청이는 걸 그가 팔을 잡아 지탱해 주었다.

“미안해요.”

“아니…… 요.”

보영이 힐끔 시선을 내렸다. 그가 잡고 있는 팔에 신경이 쏠렸다.

“정 비서?”

보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어제 들었던 예의 ‘호감 가는 여자’라는 말이 떠올라 버렸다.

‘넋 놓고 뭘 하는 거야.’

보영은 그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팔을 빼며 덧붙였다.

“제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이현은 의외로 고집이 셌다.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그는 대부분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어제도 말했을 텐데요. 여기는 호텔이에요. 나는 서른넷의 남자고 정 비서는.”

“농담이……! 과하십니다.”

허튼 생각을 해 버리고 말 것 같아 보영은 성급하게 그의 말을 자르곤 애써 웃었다.

그러자 이현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정 비서 방은 1923호라고 했나요?”

대답도 듣지 않고 19층 버튼을 누른 이현이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정 비서도 조금 쉬고 10분 뒤에 봐요.”

“네? 아……!”

이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보영이 서둘러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이미 문은 닫혔다.

‘배려일까 혹은 습관일까.’

보영은 낮게 한숨을 쉬곤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 18분 전이었다. 짐을 방에 두고 바로 30층으로 올라가야 할 듯했다.

1923호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시를 체크한 후 룸을 다시 나서기까지 정확히 6분이 걸렸다.

“휴우.”

보영은 연노란 블라우스를 당겨 주름이 지지 않도록 펴고 재일에게 당장 대답할 수 있는 답장을 보내며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 * *

회의는 순조로웠다. 재일에게 강릉 태양 호텔은 이현에게 우호적이라는 답장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비서는 강릉에 마지막으로 와 본 게 언제예요?”

강릉 시내에서 차를 타고 해변 도로를 따라 산 위로 한참을 굽이쳐 올라가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시푸드 한옥 레스토랑 〈바다해〉가 보였다.

총 열다섯 개 실로 구성된 바다해는 전실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룸이었고, 방마다 크게 트여 있는 창호 문을 열면 깎아지른 바다가 내다보여 정취와 풍류가 있기로 유명한 고급 음식점이었다.

“아마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나는 20년쯤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되셨습니까?”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여기저기 많이 다니긴 했지만, 경기 뛰고 훈련만 한 탓에 생각보다 가 봤다고 할 만한 곳이 많이 없어요.”

“20년 전, 강릉은 어떠셨습니까?”

“그때는…….”

창밖을 보며 말끝을 흐린 이현은 조금은 공허하게 말했다.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지금은 어두워서 모르겠고.”

그의 말은 꽤 쓸쓸하게 느껴졌다.

보영은 레스토랑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별거 없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해 바다는 조금은 시린 파란색이고, 산은 초록색입니다. 파도 소리는 거칠고, 해변의 모래는 곱죠. 해변을 따라서 해물과 관련된 음식점들이 즐비합니다. 그래도 역시 바다면 회죠.”

“하하, 진짜 별거 없네요.”

“네. 산은 산이고 바다는 바다죠.”

주차를 완료한 보영은 곧장 차에서 내려 이현 쪽의 문을 열어 주려 했다. 하지만 또 그녀가 한발 늦었다. 차에서 내린 이현이 옷을 툭툭 털고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회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그럼 정 비서에게 회 사 줘야겠어요.”

“아니, 괜찮습…….”

“돌아가신 부모님과 왔던 곳이 강릉이에요. 일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여행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아, 죄송합니다.”

보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젠 체를 했다. 하지만 이내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놀라서 얼굴을 들자 이현이 조금은 서글픈 얼굴로 웃었다.

“미안해요. 머리. 나도 모르게.”

보영이 굳은 사이 그가 몸을 돌렸다.

“그날도 바다가 파랬어요. 산은 초록이었고, 회는 맛있었죠. 덕분에 조금 생각났어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좋은 기억은 없는 줄 알았는데.”

바람을 타고 흩어진 그의 목소리는 조금 서늘했지만, 보영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

그녀가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 갔던 곳이 어딘지 떠올려 봤다.

놀이동산이었다. 그녀는 8살이었고 양손에는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신나서 토끼처럼 뛰어다녔었다.

‘이 사람도…… 아무도 없구나. 재벌 3세니 뭐니 해도 결국…….’

음식점으로 들어서기 전, 깊은 어둠에 잠긴 수평선 너머를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현의 옆모습에 조금 가슴이 시려 왔다.

* * *

앞으로 도래할 여름을 맞이하여, 강릉시에서는 태양 호텔과 협조해 대대적인 불꽃놀이 축제를 기획 중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의 시장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조금 더워서 그런데 문 좀 열어 주겠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는 둥 마는 둥 침묵을 지키고 있던 보영은 시장의 요청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방 안에 머물러 있던 공기를 밀어냈다.

“태 사장님, 내 딸이 말이요, 올해 꼭 스물일곱인데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음악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순진한지 부모 말이라면 하늘처럼 떠받드는 온순한 아이지요.”

“그러십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온 보영이 이현을 힐끔 보았다.

시장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의 딸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었다.

“태 사장님도 알겠지만, 요즘 제 딸아이 같은 여자아이가 없습니다. 길거리 다녀 봐요. 담배에 술에 말도 못 하지요. 우리 딸은 술도 잘 못 하고 담배 냄새만 맡아도 숨을 못 쉽니다.”

“시장님께서는 금연을 하시는가 봅니다.”

“네? 아, 예, 뭐, 그렇지요. 아무튼 딸애가 지금까지 남자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어디 가서 이상한 놈을 만나지는 않을까 최근에 걱정이 참 많이 늘 정도지요.”

“그러게요. 근심이 크시겠습니다.”

보영은 젓가락을 집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괜스레 이야기의 흐름을 깰 것 같아서였다.

앞에선 아름다운 참치회가 붉은 살을 먹음직스럽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보영은 식탐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이현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는 입가에 그린 것 같은 단정한 미소를 지은 채 약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아시다시피 요즘 세상이 좀 험합니까?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커니, 묻지 마 범죄니…… 어디 마음 편히 밖에 내놓을 수나 있어야지요.”

“그럼요. 위험하죠.”

“정말 마음 같아서는 태 사장님 같은 사윗감이라도 있으면 마음을 탁 놓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시면…….”

이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내내 자신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출중하고, 순수한지 끝없이 늘어놓던 시장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제가 괜찮은 친구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저희 호텔에 인재가 차고 넘칩니다. 그중 제 비서진에 장재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이성적이고 사리 분별 정확합니다. 물론 비전도 있죠. 어떠십니까?”

옆에 있던 물을 마시던 보영은 하마터면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추태를 부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겨우 삼키고 이현과 시장을 번갈아 보았다.

“비…… 서…… 요? 비서라면…… 아니, 그게…… 어, 저기…….”

시장이 당황한 듯 검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다가 난감하게 웃었다.

“그게,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태훈 회장님께서 태이현 사장님 선 자리를 물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아, 그 부분이라면 오해가 있으신 걸 겁니다.”

“오해요?”

“전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이현의 옆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던 보영은 조용히 눈을 굴렸다.

‘마음에 둔 사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 그, 그렇습니까?”

“네. 그 친구와 마음이 통하면, 회장님께도 인사시킬 생각입니다.”

당연히 이현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술술 나오는 이현의 이야기가 쉽게 믿기지 않았다.

‘사실일까?’

처음에 시장이 딸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이현이 시장을 대하는 양상이 묘하게 달라졌다.

맞장구를 치고는 있지만 모두 단답형이었다. 입가의 고요한 미소는 정중했지만 어떻게 보면 성의가 없게도 보였다.

“에…… 그럼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그, 마음에 두셨다던 상대가 어느 댁 따님인지요? 내가 아쉬워서 그럽니다. 비록 정치판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내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우리 집안이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 이 말입니다.”

“시장님 집안이야 저도 잘 알지요. 강릉 자호 장 씨 19대손 아니십니까. 뼈대 있는 명문가에, 이 일대의 유지 집안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강릉은 내 손안에 꽉 틀어쥐고 있어요. 아니, 강릉이 뭐야. 양양도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이현이 기분이 고조된 시장의 잔에 약주를 채워 주자, 말을 잇다 끊은 시장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무튼 궁금해서 그럽니다. 얼마나 대단한 집 여식이길래 우리 태 사장님이 목을 다 맵니까?”

누군가를 마음에 뒀다고 하니 바로 어느 집이냐고 묻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역시 그들만의 세상은 또 다른 거려나.’

이현도 TV나 경제지에 나오는 다른 재벌들의 정략결혼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왜 하고 있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보영은 눈을 내리깔곤 무릎 위에 모아 쥔 손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글쎄요. 어느 집 여식인지는 저도 아직 잘 몰라서요.”

“네?”

보영은 어쩐지 명치가 꽉 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궁금하네요. 그냥 봐서는 화목한 가정에서 귀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 같긴 한데. 이럴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볼까요?”

“예? 지금이요? 어떻게 말입니까?”

보영이 분위기를 살피며 막 물컵을 입가에 가져갔을 때였다.

“정 비서는 어떤 집 여식이에요?”

“풉!”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이현의 고급 슈트에 튀었다. 하지만 황급히 그것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태 사장님, 이…… 이 아가씨는 비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제가 마음에 둔 상대기도 합니다. 차차 알아 가고 있죠.”

보영은 비서로서의 본분을 잊고 말았다. 미친놈 보듯 이현의 옆얼굴을 보았다.

‘괜찮다, 멋지다, 잘났다 했는데 사실은 미친 거였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직은 고백할 생각이 없었는데 시장님 덕분에 말할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아, 어, 그…… 그, 그러셨습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시장이 잔에 약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곤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커헉!”

황망하게 이현을 응시하던 보영은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 감정을 삭이려 사력을 다하던 의원이 목을 부여잡고 상 위에 엎어지며 헐떡거렸다.

“시장님!”

보영은 돌발 상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을 넘어 시장에게 다가갔다.

“시장님, 왜 이러세요? 시장님!”

“커헉! 컥! 윽!”

시장이 검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채 신음 소리만 삼켰다.

곁으로 다가온 이현도 시장의 안색을 살피곤 얼굴이 굳었다.

“제가 구급차 부르겠습니다!”

이현이 룸 문을 열고 사람을 부르는 동안 보영은 119에 신고부터 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설마 사장님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해서 쇼크를 받은 건 아니겠지.’

시장이 갑자기 이렇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보영의 눈에 상 위의 만찬이 들어왔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시장에게는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시장님, 정신 차리세요! 혹시 새우나 게를 드셨습니까?”

“아니…… 새…… 샐러……! 커헉! 헉!”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컥컥거리던 시장이 상 위를 가리켰다.

공처럼 둥근 치즈가 많이 올라간 채소 샐러드를 보영은 얼른 입에 넣어 보았다.

치즈가 아니었다. 새우 살 맛이 났다. 그사이 이현은 시장을 눕게 도왔다.

“사장님, 시장님께서 새우를 드신 것 같습니다. 시장님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으세요.”

보영은 일단 이현에게 보고한 뒤, 곧장 시장의 목을 조르고 있는 넥타이와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목을 뒤로 젖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가 뛰어왔던 직원이 안의 상황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분명히 요청 드렸을 텐데요! 오늘 저녁 식사에 갑각류는 피해 달라고요!”

“네?”

고요했던 레스토랑 내부가 소란해졌다. 직원들이 몰려들었고, 이내 책임자가 뛰어왔다.

“구, 구급…… 구급차!”

“불렀어요!”

“커허허헉!”

보영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레스토랑에 따져 봤자 이미 일은 벌어졌다.

다행히 호흡만 곤란해할 뿐, 의식을 잃을 기미는 없었다. 출동한 구급 요원이 빠르게 도착했다.

시장은 수행하는 인원 없이 혼자였다. 8시쯤, 비서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들었다.

“사장님, 저는 일단 구급차를 타고 가겠습니다. 대리 기사 부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보영은 룸에 남은 이현의 앞에 차 키를 내려놓은 후, 빠르지만 깍듯하게 말하곤 곧장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 * *

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영은 시장의 비서실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 처치를 하자, 시장의 상태도 다소 안정되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길까 졸였던 심장은 알이 밴 것처럼 뻐근할 지경이었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피부에 뭐가 나는 거겠거니 했다.

이렇게 호흡 곤란까지 일으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좀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환자분은 아나필락시스(알레르기로 인한 급격한 전신 반응)로 의심됩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음식이라면, 아주 작은 양에도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네, 안정되셨습니다.”

십년감수했다. 보영은 축 늘어진 시장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소 격앙된 어투가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보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서 달려 나온 듯 면바지에 셔츠 차림의 중년 남자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채 그녀와 시장을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

“아드님 되십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 식사 중에 새우볼을 드셨…….”

짜악!

인사를 하고 차분하게 설명을 하려던 보영의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충격에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대체 접대를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런 것도 신경 못 썼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어?”

보영은 얼얼한 볼을 움켜쥐었다. 다짜고짜 뺨을 맞은 것이다.

앞에 선 중년 남자는 눈을 뒤집은 채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어떻게 책임졌을 거야! 아주 작은 양이라도 호흡 곤란 와서 돌아가실 수도 있는 분이라고! 제정신이야! 일을 이따위로 해! 너 어디 회사야! 아버지한테 무슨 청탁을 하려고 만난 거야! 어?”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 보……!”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보영이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부딪쳤다.

“듣긴 뭘 들어! 상황이 이런데! 이건 엄연한 살인 미수야! 살인 미수! 다 필요 없고, 명함 내놔. 이거 내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야! 고소할 거야! 알아들어?”

남자가 보영의 이마를 툭툭 밀치다가 멱을 쥐어흔들더니 침대 바깥쪽으로 밀쳤다.

보영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섰다. 응급실이다 보니, 사방에서 사람들의 이목이 쏟아졌다.

“뭐 해! 명함 내놓고 썩 꺼져!”

남자가 다시 한 대 때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보영은 침대 위, 해쓱한 시장을 보곤 턱에 힘을 꽉 주었다.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상황이 아니었다. 보영은 일단 명함을 꺼내 침대 옆에 놓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휴대폰을 주워 나왔다.

하지만 가랬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불똥이 이현에게까지 튈지도 몰랐다.

응급실 입구를 서성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여러 명의 발소리가 연이어 울렸고, 보영은 그들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막아섰다.

“혹시 시장님 비서실에서 나오셨습니까?”

“아, 네. 아! 정보영 비서님?”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한 번 더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음식 중 샐러드에 새우볼이 섞여 있었고, 그걸 드셨습니다. 급히 이송했고, 지금은 안정되셨습니다.”

보영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상황을 차분하지만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하아…… 그렇다면 다행, 아……? 볼이…… 괜찮으십니까?”

시장이 안정되었다는 말에 안도하던 비서가 문득 그녀의 볼을 가리켰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안에 아드님이 먼저 오셨습니다. 일단 상황을 말씀드렸으니 더 궁금하신 게 있으면 저한테…….”

“아, 네, 알겠습니다.”

아들이 먼저 와 있다는 말에 사색이 된 비서가 그녀의 명함을 받곤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응급실 문이 열리자, 안으로 얼핏 시장과 아들이 보였다.

비서가 다가가자 아들이 비서의 정강이를 세차게 걷어찼다.

“……아무한테나 나쁜 놈이네.”

보영은 볼을 어루만졌다. 안 아픈 게 아니었고, 무작정 그녀를 거칠게 다룬 사실이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리의 환경을 통제하에 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그녀의 실책이 맞았다.

보영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이곤 휴대폰을 들었다.

구급차를 타고 오며 레스토랑으로 보낸 대리 기사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되는 일이 없네.”

보영은 탄식했다. 쩍쩍 실선이 가 깨진 액정이 먹통이었다.

“시장님은 괜찮아요?”

급한 대로 원무과에 전화를 부탁하려던 보영은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병원 입구에 이현이 서 있었다.

“……사장님? 어떻게…… 호텔로 가라고 대리 기사님에게 말…….”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 혼자 호텔로 가서 발 뻗고 누워요.”

“아…….”

상사의 돌발 행동에 보영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 저기, 시장님은 일단 진정되셨습니다. 알레르기 반응 때문이셨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음식을 다시 한번 체크했어야 했……!”

보영은 말을 삼켰다. 다가온 이현이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볼에 손끝을 살짝 댔다.

“얼굴이 왜 이래요?”

“아…… 무것도 아닙니다.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보영은 뒤로 물러나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손자국인데.”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떠나지 않았다. 보영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꾸 선을 넘어오려는 그의 언행에 발밑이 어지러웠다.

“괜찮습니다.”

결국 손으로 볼을 가렸다. 제대로 맞은 탓에 볼이 얼얼했지만, 지금만큼은 앞에 버티고 있는 이현의 시선이 더 따끔거렸다.

“제가 혹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시장님 비서실에…….”

“아뇨. 나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생긴 문제니, 내가 직접 상황을 보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채 말리기도 전이었다. 이현이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영은 서둘러 이현을 쫓아갔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가자마자 시장의 비서가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보니, 그의 귀와 목덜미가 일부 울긋불긋했다.

그는 다시 나가라는 듯 그녀를 향해 눈짓했다. 하지만 보영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현 때문이었다.

“뭐야! 또 왜 왔어! 안 꺼……!”

그녀를 본 의원의 아들이 다시 목청을 높였을 때였다. 이현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무척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야, 당신은?”

“태양 호텔의 태이현이라고 합니다.”

“태…… 태양? 태이……!”

“비서로부터 시장님이 안정 상태를 찾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이현이 정중하게 말을 잇는 사이, 시장의 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태 사장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장영철이라고 합니다. 시장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죠.”

보영은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폈다. 시장의 아들은 손부터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현을 향해 그럴 조짐이 보이면 온몸으로 막아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곧장 병원에 얘기해 시장님을 상급 병실로 옮길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 사장님께서 그렇게 안 하셔도…… 아버지가 원래 예민하신 편이라서…… 어…… 이제 괜찮으시기도 하고…….”

어째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사과를 하는 게 이현이 아니라 마치 시장의 아들인 듯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아뇨, 제가 오히려…… 어…… 사, 사장님을 뵙게 된 게 참…….”

“그런데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잠시간 사이를 둔 이현이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가 다시 시장 아들을 보았다.

“병원에 오기 전까진 제 비서의 얼굴이 매우 깔끔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누구한테 맞기라도 한 것처럼 볼이 부어서요.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십니까?”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시장 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현은 태양 호텔의 사장일 뿐만 아니라, 강릉에 다수의 계열사를 가진 태양 그룹의 장손이었다. 그 사실을 시장의 아들도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시장은 자신의 한마디면 강릉뿐 아니라 양양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현의 한마디엔 강릉의 경제·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힘이 있었다.

“그게…… 저도 잘…… 얼굴이 갑자기 왜 그럴까요? 비서분께서 말씀 안 하십니까?”

“네. 그냥 괜찮다고만 하네요. 마음 쓰이게.”

보영은 커다란 이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웃고 있을 거라 생각되었다.

“그나저나 모르신다니, 희한한 일이네요. 아주.”

‘저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다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어째서 내 얼굴이 이런 건지…….’

“이런 걸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현은 다시 한번 시장의 아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무튼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조치는 확실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 사장님!”

이현이 돌아서 걸음을 옮겼고, 그의 등에 대고 시장의 아들이 연신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보영 역시 시장의 아들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그, 저기……!”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장의 아들이 그녀를 붙잡았고, 보영은 그가 하려는 말을 알아챘다.

그녀 역시 괜스레 분란을 조장할 생각은 없었다. 조용히 묻고 가야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현은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시장의 아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당황해서 자기 혀라도 깨물 것 같은 표정이었던 시장의 아들을 생각하면 아주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았다.

* * *

그가 만나고자 하면 못 만날 사람은 없겠구나 싶었다.

원무과에 명함을 내밀자, 10분도 되지 않아 병원 밖에서 사복을 입은 원장이라는 사람이 날듯이 뛰어와 읍소했다.

“바로 VIP 병실로 옮기겠습니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의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수완이 꽤 좋아 보이는 원장이 빠릿하게 대답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당연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현과 보영은 나이 지긋한 원장의 지극한 배웅을 받으며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나오자 한쪽에 주차되어 있는 회사 차량이 보였다.

“차 키, 주시면 운전하겠습니다.”

“수고했어요.”

이현이 차 키를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고요.”

곧장 차로 가려던 보영이 이현을 돌아보았다.

“잠시 깜빡했어요. 장 시장 아들처럼 핏줄의 돈과 권력이 자기 힘이고, 자기가 당연히 누려야 할 특권인 것처럼 휘두르는 사람이 썩어 나는 게 이 바닥인걸.”

“안 그런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현이 바로 ‘안 그런’ 사람이었다.

“사장님께서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과하셨습니다.”

“난 과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힘에 눈치 보고 굴복하는 사람은 똑같이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야.’

보영은 등을 곧추세웠다. 시종일관 입가를 둥글게 휜 이현의 말에서 다소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특권은 이렇게 쓰는 거예요. 터무니없이 손을 올리고 힘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조금 의외였다. 이런 때 아주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만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 비서에게 많이 미안해요.”

“사장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정 비서, 내 사람이에요. 내 사람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이 정도로 물러나서 미안해요.”

자기 사람을 아낄 줄 알고,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보영은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이 사람에게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조금 괴로워졌다. 그리고 코끝이 약간 시큰거렸다.

동일 외에 누군가가 그녀를 이렇게 걱정해 주고, 보호해 주려 하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 * *

병원을 나와 해안 도로를 타고 호텔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내 창밖을 보았고, 보영은 운전에 집중했다.

시간이 꽤 늦은 탓인지 도로에는 차가 적었고, 가로등도 듬성듬성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호텔까지는 앞으로 12분을 더 가야 했다.

피곤하시지 않을까, 슬쩍 곁눈질을 할 때였다.

펑!

뭔가 터지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핸들이 흔들렸다. 보영이 급하게 핸들을 꽉 잡아 고정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익!

노면과 타이어의 마찰음과 함께 차가 겨우 정차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모양이었다.

정말 더럽게 운수 좋은 날이었다. 보영은 아찔한 기분으로 옆을 보았다.

이현이 오른손으로는 대시 보드를, 왼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사장님은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없어요.”

이현은 곧장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보영도 비상등을 켜고, 트렁크를 연 채, 바로 차에서 내렸다. 1차선에 다소 비딱하게 선 차량을 천천히 돌았다.

“뭘 밟은 건지 완전히 주저앉았는데요?”

오른편 뒷바퀴 앞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이현이 타이어를 가리켰다.

“……바로 레커차 부르겠습니다. 우선 차에 타 계시…….”

보영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이현이 트렁크에서 비상 삼각대를 꺼내 붉은 불이 들어오게 한 후 차 뒤에 세웠다.

“난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요. 정 비서는요?”

휴대폰을 확인한 이현이 물었다.

보영은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가 낭패감 어린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 그 시장의 아들 때문에 액정이 깨진 걸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휴대폰 액정을 본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아, 음, 여기가…….”

보영은 길 좌우를 살폈다. 해안 도로 어디쯤이었다. 민가나 상가는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선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거센 파도 소리가 들려왔고, 또 한쪽에는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보영은 도롯가로 나가 양손을 높이 들어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차 없는 도로를 신나게 질주하는 차는 그녀를 못 본 듯 쌩하니 지나쳤다.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정 비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여기서 조금만 가면 시내가 나옵니다. 날이 쌀쌀하니까 잠시 차에 계시면 제가 빨리 가서…….”

“여기 혼자요? 무서운데.”

“네?”

“가려면 같이 가자고요.”

이현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빙긋 웃었다.

“하지만.”

“10시가……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어둑어둑한 길을 혼자 걷게 할 만큼 이른 시간도 아니죠.”

이현이 손목시계를 보고 덧붙였다. 보영은 어둑한 도롯가를 보았다.

아까 내비게이션을 봤을 때 3킬로미터 앞에 시내가 있었다. 보영은 우선 다시 차로 가 지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콘솔 박스에 비치해 둔 명함에 적힌 긴급 출동 콜 번호를 외웠다.

“사장님, 3킬로 거리면 거의 한 시간 정도 걸으셔야 합니다. 제가 중간에 사람을 만나면, 휴대폰을 빌려 바로 차를 보내겠습니다.”

“정 비서, 보기보다 생각이 짧네요.”

그녀가 다시 한번 만류하자 이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인적 없는 도로에서, 이렇게 젊은 여자가 혼자서 아무에게나 말 걸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보영은 머뭇거렸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여자가 아니라, 비서였고 상사를 안전하게 모실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피력하기도 전에 이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죠.”

보영은 차와 이현을 번갈아 보았다. 비상 삼각대를 두고, 비상등에 트렁크도 열어 두었으니 2차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 미치겠네. 왜 자꾸 일이 꼬이는 거야.’

보영은 이미 저만치 걸어간 이현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파도 소리 좋네요.”

“죄송합니다.”

“별도 많고.”

“정말 죄송합니다.”

“날도 선선하니 걷기 좋고.”

“죄송합니다.”

보영은 초조함에 연신 입술 안쪽을 질겅질겅 씹어 댔다.

아마 이 상황을 재일이 보았더라면 그녀는 멱이 잡혀서 짤짤 흔들릴지도 몰랐다.

“어디서 고라니라도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현이 실소를 흘렸다.

“알았으니까 그만 죄송하죠. 난 대화를 하고 싶은 거지, 앵무새 같은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보영은 나란히 걷고 있는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모두 그녀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사고뿐이었지만 못내 속이 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거 불빛 아니에요?”

앞서 걷던 이현이 문득 손으로 해변을 가리켰다. 보영이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한 시간을 내리 걷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보영은 곧장 도로 아래로 내려갈 만한 길을 찾았다.

조금 더 길을 따라 걷자, 해안가와 이어지는 풀이 무성한 공간이 보였고, 곧장 그쪽으로 발을 디뎠다.

그러자 발이 뭔가에 꽂히듯 쑤욱 빠졌다. 모래사장 같았다. 구두가 벗겨졌다.

보영은 다급한 마음에 양손에 구두를 한 짝씩 들고 모래사장 위를 뛰듯이 걸었다.

그러곤 다 꺼져 가는 등 아래 비치는 작은 가게로 가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계십니까? 죄송합니다만, 문 좀 열어 주세요!”

보영은 굳게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일까 싶어 불안해질 참이었다.

안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곧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전화 좀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에?”

자다 일어났는지, 게슴츠레한 눈을 손으로 비빈 노인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차가 펑크가 나서요. 시내까진 한참을 걸어가야 할 것 같은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휴대폰도 없어요?”

“휴대폰이 먹통이라……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영은 허리를 꾸벅 숙여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녀를 경계하듯 보던 노인이 다시 문을 닫았다. 거절일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오래된 구식 휴대폰을 내밀었다.

“얼른 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음료라도 사 먹든가. 가뜩이나 장사도 안 돼서 속상한데.”

“아…… 네.”

어두운 내부에는 쇼케이스에 소량 진열된 각종 음료들이 보였다.

해변에서 이따금씩 볼 수 있는 작은 구멍가게였다.

“어떻게 됐어요?”

“아, 네. 휴대 전화를 빌려주셨습니다. 바로 긴급 출동 부르겠습니다.”

어느새 이현도 그녀의 뒤에 와서 섰다. 보영은 곧장 긴급 출동 번호를 부르고 경위를 설명했다.

다시 차가 있는 자리로 돌아가야 하니, 구멍가게 간판을 읊어 준 후, 이쪽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마실래요?”

그녀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보자, 어느새 이현이 양손에 콜라와 사이다를 들고 서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이현이 그녀에게 콜라를 건넸다. 그리고 그의 뒤에선 할머니가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 썼으면 싸게 싸게 줘요.”

“네. 감사합니다. 저기 차가 올 때까지 잠시 평상에 앉아 있어도 될까요?”

보영은 가게 앞의 평상을 가리켰다. 노인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이 맞나 봐요.”

이현의 말에 보영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콜라 캔을 따려 하자 이현이 덥석 캔을 가져갔다.

줬다 뺏는 건 뭔가 싶어 당황했을 때였다.

“마시기 전에 잠깐 대고 있어요.”

찬 콜라가 볼에 닿았다. 보영은 쓰라린 감각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점점 더 붓는 거 같은데.”

그가 조금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진지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눈길에 보영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멀리서 조용히 일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너무 비현실적이야.’

세이렌이 떠올랐다. 매우 아름답고 치명적인 마력을 가진 신화 속의 님프 말이다.

방심하면 그대로 유혹당해 파멸해 버리고 말 것 같다.

“많이 아프죠?”

볼에 이현의 손이 닿았다. 보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열이 올랐어요. 멍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안타까운 듯 그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보영은 볼을 더듬는 손길에 황급히 이현의 손을 잡아 떨어뜨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열이 오른 건 아마 부어서가 아닐지도 몰랐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선을 지키지 못한 건 그녀였다. 그가 이성으로 보였고, 갖고 싶다는 생각이 찰나지만 스쳐 갔다.

“……제가 하겠습니다.”

보영은 얼결에 잡은 이현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모래 때문에 발을 딛는 자리가 단단하지 않았다.

그녀가 뒤로 넘어질 것처럼 휘청이자 이현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흐읍!”

그의 가슴팍 바로 앞에 바짝 붙어 서게 된 보영이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멀어지려던 게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이현에게서 나는 시원한 오드콜로뉴 향이 그녀에게도 옮겨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죄송…….”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게 맞죠.”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보영은 눈을 들었다.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웃지 마세요. 꿈에서도 나올 것 같으니까.’

숨소리마저 확연히 들리는 이 거리로부터 멀어지고 싶기도 했고, 그냥 있고 싶기도 했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게다가 이현은 아직까지 그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안 해요?”

“네?”

“고마워요.”

그 소리에 보영이 입을 벙긋거렸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이현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눈앞에 캔을 들어 보였다.

“식혀요. 정말 멍이라도 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고맙습니다.”

보영은 그의 손에서 캔을 가져와 볼에 대며 슬그머니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운 건 이성을 유지하는데 좋지 않았다. 자꾸만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그런데 왜 안 물어봐요?”

평상으로 가 가볍게 걸터앉은 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현이 문득 물었다.

“아까 내가 한 말, 담아 두진 않았어요?”

“네?”

“정 비서 집은 어떤 집이냐고 물었던 거요.”

〈정 비서는 어떤 집 여식이에요?〉

〈제가 마음에 둔 상대기도 합니다. 차차 알아 가고 있죠.〉

〈바다해〉에서 의원과 오갔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건…… 그 상황이 곤란해서 잘 넘어가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이현이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채 의뭉스레 웃었다.

“내 몸 보신하려고 비서를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 정 비서, 나 되게 형편없게 봤나 봐요. 아무리 그래도 부하 직원을 나 좋을 대로 그렇게 함부로 끌어들이면 안 되는 거죠.”

무슨 뜻일까.

“솔직히 말하면 반은 그 자리를 무마하기 위해서였고, 반은 진심이었어요.”

“……네?”

보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현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과, 귓전엔 파도 소리가 부서지는 낡은 평상 위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정 비서한테 내가 정말로 그런 호감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아주 약간은 쑥스러운 듯 미간을 긁적인 이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곤란할까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거친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정신없이 헝클였고, 붉은 심장 역시 엉망으로 휩쓸었다.

“농…… 담이 지나치세요.”

“농담 아닌데.”

그의 시선은 곧았고, 그래서 보영은 도망갈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생각해 본 적 없다면, 이제부터 생각해 봐도 돼요.”

그가 부드럽게 권했다. 보영은 말라 오는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녀가 처한 수많은 생각과 입장과 상황이 어지럽게 얽혔다.

“그리고 생각해 보는 동안, 조금 무리한 부탁도 하나 하고 싶어요.”

관자놀이를 긁적인 이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아까 봤다시피 집에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네?”

“할아버지가 마음을 정말 단단히 먹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난 결혼이든 비혼이든 내 인생은 내 뜻대로 하고 싶거든요. 내 입장이 정 비서에게 부담이 될 건 알지만, 도와줄 수 있어요?”

“도와 달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동안 연애하는 척하자고 하면, 어때요? 이를테면 계약 연애죠.”

‘이 남자는 내게 자꾸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누군지, 어떻게 그의 비서가 됐는지 알면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그녀가 생각을 잇는 동안에도 이현은 멋쩍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뭐, 이러나저러나 결국 핑계인 게 티가 나려나.”

보영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이현이 조금 무안한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면서 정 비서에 대해 조금 더 알아 가고 싶어요. 궁금한 게 많은데, 직장 상사로서는 한계가 있어요. 나 별로예요?”

현실에 발을 붙이려 애썼다. 하지만 어딘가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왜…… 사장님께선 절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

“사람이 사람을 궁금해하는데 알게 된 기간이 중요해요?”

이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

“첫 느낌이 좋았어요. 길고양이 구한다고 차도에 뛰어들었던 게 내겐 꽤나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런 희생은 좀처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이 여자는 뭘까 고민하다 보니까 궁금해졌어요. 그걸로는 호감의 이유가 부족해요?”

“아니…… 아니요.”

호감이란 기실 별스러운 게 아니었다.

타인이든 사물이든 다른 대상에게 갖는 좋은 감정일 뿐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도 아니었다. 유난을 떠는 것도 우스웠다.

“나 비겁하죠?”

“네?”

“정 비서가 내게 별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사귀는 척해 달라고 수 쓰잖아요. 내 나름 어필할 시간을 벌려고. 그것도 일거양득으로.”

이현의 담담한 말에 보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니 비겁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싫진 않죠?”

싫지 않아서 곤란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호감이 있다는 말에도 그냥 그랬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심장이 뛰었고, 조금은 설렜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이현의 곁에 존재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들여다볼 입장도 아니었고, 여유도 없었다.

그 외에도 아니어야 할 이유를 찾자면 수없이 나열해 놓을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보영은 이현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얼마나요?”

“1주일이면 될 것 같아요.”

그가 제안한 일은 ‘S’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이현이 신뢰하고, 믿는 최측근이 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토록이나 속이 어수선했다.

“1주일이라. 피가 마르겠네요.”

이현이 낮게 웃었다.

* * *

당장 타이어 교체를 맡길 수 있는 센터를 수배해 차를 맡기고 호텔로 돌아오자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씻고 나온 보영은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간 통화음이 이어지다 곧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유성 요양 병원 4층 간호사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이순아 환자 보호자인데요.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엄마는 좀 어떤가 해서요.”

― 아! 보영 씨?

“네. 곧 큰 수술을 하실 텐데,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주말에 가긴 할 건데 혹시나 해서요.”

― 그럼요. 오늘은 그림을 그리셨어요. 저희가 일하는 모습을 그리셨는데, 어디 전시해 놔도 좋을 정도로 잘 그리신 거 있죠?

“그림요?”

― 순아 님 병실로 그림 도구가 잔뜩 배달됐어요. 보영 씨가 보낸 거죠? 아이처럼 좋아하시던데요. 1인실로 옮겨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림도 마음껏 그리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시고요.

보영은 이어지는 간호사의 말에 당황했다.

‘난데없이 무슨 그림 도구가 배달됐다는 거지?’

그녀는 그런 걸 보낸 적이 없었다.

‘삼촌인가?’

이제 이 세상에 엄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녀와 동일뿐이었다.

보영은 일단 순아를 잘 부탁한다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어 곧바로 동일에게 전화했지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반응만 돌아왔다.

“……누구지?”

그녀는 정말 그림 도구를 주문한 적이 없었다.

엄마는 아프기 전엔 미술 학원 강사였다. 그러나 조기 치매를 앓은 이후 매일매일을 다른 시간에 살고 있었다.

투병이 길어져 이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낸다.

가끔 정신이 맑은 날에는 젊었을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 ‘현재’를 살곤 했다.

‘그래도 갑자기 그림 도구라니.’

보영은 눈을 굴렸다. 엄마에게 그림 도구를 보냈을 만한 사람이 문득 한 명 떠올랐다.

‘‘S’일까.’

‘S’와의 접선은 오로지 문자로만 이루어졌다. ‘S’는 유령 같았다.

가끔은 그녀와 거래를 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일방적으로 시작된 문자는 그녀를 태양 호텔 사장의 비서실까지 데려다 놓았다.

‘S’가 그녀를 찾아냈고 거래도 먼저 제시했다. 당연히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영은 곧바로 ‘S’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림 도구 고맙습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답장이 왔다.

[별것 아닙니다. 수술 일정이 곧 픽스 될 것 같습니다. W대학 병원 서 교수님이 집도하실 예정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요양 병원에서 상담 받아 보실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보영은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쥐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였다.

W대 서 교수라면 간담췌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의로 유명했다.

일반적인 루트로 서 교수의 수술을 받으려면 순번 표를 받고 1년 넘게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바로 가능해졌다.

[감사합니다.]

보영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가 여기 있는 이유는 확실했다.

속이 어지럽다느니, 그가 좋은 사람이니 하는 사실을 떠올리며 의무를 방기하는 건 모두 사치였다.

“사장님, 주무세요?”

보영은 곧바로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하신 제안에 대한 대답, 지금 해도 될까요?”

전화 너머에서 이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노래처럼 흘러들어 왔다.

“다름이 아니라…… 말씀하신 계약 연애요. 하겠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이현의 곁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직원으로든 여자로든 말이다. 각오는 했다.

* * *

“그럼 밖에서 봐요. 바로 나갈게요. 정 비서는 5분 뒤에 나와요.”

‘무슨 심경의 변화지? 어떻게 1주일이 단 한 시간으로 변해?’

전화를 끊은 이현이 입가를 심술궂게 휘었다.

보영에게 연애를 제안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재일이 알면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며 입에 게 거품을 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두고 지켜볼 바에야 어떤 식으로든 써먹는 게 수지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부 태 회장이 몰아붙일 정략결혼의 덫을 막아 줄 방패막이와 더불어, 그와 특수한 관계가 되면 저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입질이 올 것이다.

그게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의 용도를 확인할 가장 빠른 방법이 되지 않을까.

“재미있네, 정보영.”

곧장 입고 있던 옷 위에 바닷바람을 막아 줄 점퍼를 걸친 이현은 카드 키를 챙겨 방을 나왔다.

1층에 내려 로비 밖으로 나가자 낮과는 달리 면바지에 품이 넉넉한 맨투맨 차림새의 보영이 몸을 숙여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발밑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울어 대다가, 그를 보곤 곧장 도망가 버렸다.

“5분 뒤에 나오랬는데 왜 벌써 나와 있어요? 혼자 나와 있기엔 밤이 너무 늦었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귀에 걸며 보영이 그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사장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지금은 그런 관계를 따질 시간이 아니잖아요. 일 이야기를 하려고 보자고 한 것도 아니고.”

이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텔 앞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거셌다.

“바람이 너무 부네. 아까 보니 저쪽으로 돌아가면 카페 거리가 있는 것 같았는데 거기로 갈까요?”

“그쪽은 시간이 늦어서 문을 다 닫았대요. 이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이 하나 있고요. 이 시간에는 사람이 적어서 조용한 편이라던데 괜찮으시면.”

“어떻게 알았어요?”

이현은 보영이 말하는 빠삭한 주변 정보에 조금 놀랐다.

보영이 가리키는 방향은 가로등만 간간이 밝혀졌을 뿐 문을 닫은 가게들 사이로 나 있는 어두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사이 검색해 봤어요?”

이현의 물음에 눈꺼풀을 깜빡이던 보영이 어딘지 어색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으시면.”

“호텔 안에 있는 라운지도 새벽 1시까지는 할 텐데요.”

“사장님 얼굴을 모르는 직원이 없을 것 같아서요.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네. 그럼 거기로 가죠. 24시 패스트푸드점.”

이현은 보영을 보도 안쪽에 세우고 자신이 바깥쪽에서 걷기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들어 보영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날카롭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검색을 해 봤대도 이 몇 분 사이에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을까.

확실히 저쪽에서 이 여자를 고집해 곁에 세운 걸 보면 뭐가 달라도 다른 게 있는 걸까.

“그런데 겉옷은 안 챙겼어요? 안 추워요?”

“네. 괜찮아요.”

보영이 단정하게 대답했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니 볼이 여전히 부어올라 있었다.

“얼음찜질 꼭 하고 자요.”

그가 걱정하자 보영이 반듯하게 미소 지었다.

보영은 객관적으로 꽤 괜찮은 비서였다. 업무 습득력도 좋은 편이었고, 센스 있었으며, 눈치도 있는 데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 역시 있었다.

말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선을 정확하게 지키려고 했다.

그러니까 너무 제대로 된 비서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선을 넘어 보게끔 만들었다.

“하루가 길죠?”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읽었는지 보영이 낮게 웃었다.

“네, 여러 가지로 죄송한 일만 가득했던 하루예요.”

“정 비서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어쩌다 보니 생긴 일들이었잖아요.”

말을 잇는 사이, 보영이 말했던 패스트푸드점에 도착했다.

그가 익숙하게 자동 주문대를 이용하자, 보영이 조금 당황했다.

마치 그걸 사용할 줄 알고 있냐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얼굴을 보인 적이 몇 번 있었다.

가만히 보면 이 여자는 자신에 관해 꽤 이상한 선입견을 몇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에 있을 때 마트, 펍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 했었던 걸 알면 자지러지는 거 아니야?’

이현은 속으로 비릿하게 생각했다.

“정 비서는 뭐 먹을래요?”

“저는 커피로 할게요.”

“잘 밤인데?”

“카페인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는 편이에요. 결제는 제가.”

이현은 보영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결제 버튼을 터치하고 자신의 카드로 결제했다.

“이 정도는 나도 사요. 돈 잘 벌거든요.”

그가 부러 장난을 치자 보영이 피식 웃었다.

“그럼 2층에 올라가서 자리 좀 잡아 줄래요? 내가 픽업해서 갈게요.”

“아뇨, 제가 가져갈 테니 사장님께서 먼저 앉아 계세요.”

“싫은데요.”

그가 히쭉 웃자 보영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걸음을 옮겨 2층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보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현은 얼굴 위로 부러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무조건적으로 잘해 주는 것도 그렇다고 관심을 끌자고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이현은 자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고,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도 무서울 만큼 잘 알았으며 그걸 연기하는 것 역시 능숙했다.

실제의 그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야옹.”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던 이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지 낯이 익은 검은 고양이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텔 앞에서 봤던 그 고양이 같았다.

“설마.”

이현은 고개를 가로젓곤 메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보영이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다시 계단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어디 가게요?”

그를 본 보영이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덧붙였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현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보영의 뒷모습을 보다 2층 구석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화장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거짓말이 어설프네.”

차게 조소한 그는 곧장 창가 자리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보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도 보았던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보영은 이내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생수와 일회용기 그리고 작지 않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이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영은 길 한구석으로 가 일회용기에 물과 봉지 안에 든 것을 부어 놓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고양이가 거기에 얼굴을 박고 먹기 시작했다.

“……?”

보영은 봉지를 고양이 옆에 내려놓은 채 서둘러 뛰듯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은 얼른 창가가 아닌 벽 쪽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계단으로 보영이 올라왔다.

“화장실은 잘 다녀왔어요?”

“네.”

“여기도 있던데, 어디까지 갔다 온 거예요?”

그가 의아하게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키자 보영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하지만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는 없는 줄 알고 다른 건물 화장실을 사용했어요.”

뻔뻔도 하지. 이 여자도 연기를 꽤나 한다. 이현은 그렇냐며 씨익 웃었다.

* * *

보영은 커피를 마시며 눈을 굴려 힐끔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자리가 안쪽이었기에 보일 리 만무했다.

‘잘 먹고 갔을까?’

지금처럼 늦은 시간에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준 게 고마워 깨끗한 물과 마른 사료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현이 나오는 바람에 그냥 와 버렸다.

그리고 고양이는 호텔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왔다. 주린 배를 불려 줄 음식을 기대하고.

“미안해요,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하지만 직접 듣고 싶었어요.”

보영은 다시 신경을 이현에게로 돌렸다.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낮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내려온 머리가 이현의 이마를 살짝 덮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와 그런 관계가 되어도.”

“먼저 제안하신 건 사장님이셨는데요.”

“하지만 덜컥 허락하고 보니까 걱정이 먼저 들어서. 할아버지 성격 코앞에서 봤잖아요. 물론 정 비서에게까지 그러시지는 않겠지만요. 그 불같은 성격도 핏줄이 아닌 사람은 가리시거든요.”

보영은 수긍했다.

태훈 회장의 불같은 성격으로 보았을 때, 그가 정말 손버릇이 험하고 사람을 거칠게 다루었다면 이미 증권가에 수많은 지라시가 돌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훈 회장에 대해 그런 소문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만큼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누울 자리인지 아닌지는 가리시죠. 용의주도한 분이죠. 얄밉다니까요.”

얄밉다는 말로 조부의 거친 손버릇을 순화한 이현이 덧붙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때문에 나만 미운털 박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 생각에 정 비서를 어지간히 들들 볶을 수도 있어요. 아까는 마음이 급해서 이 생각까진 못했거든요.”

말을 마치고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음, 역시 무를까요?”

“아니요. 그리고 저는 솔직히 제가 제대로 된 방패막이가 될까 싶은데요.”

“무슨 말이에요?”

“오히려 있어도 없는 것처럼 무시하시지 않을까요? 저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특출한 배경도 없습니다. 그러니 절 갖고 왈가왈부한다는 것 역시 회장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요.”

이현이 묘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오히려 사장님이야말로 방패막이가 필요하신 거면, 비슷한 배경과 위치의 여성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까 전화로 연애하자고 한 거 맞죠?”

이현의 항의에 보영이 입가를 슬쩍 당겼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방법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알긴 알겠는데 기분이 좋진 않네요. 내가 연애해 보자고 한 건 정 비서예요.”

보영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손에 쥐고 있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설령 그녀가 이 남자를 정말로,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생각을 해 봤어요. 저는 비서로서 사장님이 곤란하시다면 돕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요.”

“그 결정에 나에 대한 아주 조금의 사심도 없어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보영은 애써 입꼬리를 휘었다. 이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회장님께서 제가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액수를 제시하시면서 내 손자와 헤어져라, 하면 넘어갈지도요.”

“정말요?”

보영이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정말 그럴 거냐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었습니다.”

이현도 그녀를 따라 웃다가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곤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재일이 형한테 하는 것처럼 전보다 편하게 대해도 돼요?”

“아, 네. 편하게 하세요.”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보영은 생각지 못한 세심한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해요, 보영 씨.”

이현이 그림처럼 미소 지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다정하게 휘었다.

보영은 자신의 이름이 이성으로 하여금 이토록 따사롭게 불릴 수 있다는 걸 아주 오래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럼 세부 사항을 정해야 할 것 같네요.”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내리누른 보영이 화제를 돌렸다.

“세부 사항이라면?”

“계약 연애의 기한이라든가 서로에게 지켜야 할 선이라든가 그런 구체적인.”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정말 연애를 할 생각이라서. 물론 보영 씨가 싫다는 건 안 해요.”

이현이 대수롭지 않게, 하지만 반죽 좋게 싱긋 웃었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거나, 내가 진저리 나게 싫다거나 하면 그땐 끝낼게요. 다른 일반적인 연인들이 그런 것처럼.”

“그럼 굳이 계약 연애일 필요가 있나요?”

“내 필요에 의해서 시작된 관계니까. 대외적인 자리에 동석을 요구할 거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요.”

“아.”

그의 말이 맞았다. 보통 연애는 서로가 좋아서,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기에 시작되지만 그들은 조건부였다.

“일방적으로 내게 유리하네. 계약이라는 건 기브 앤 테이크인데. 혹시 내게 바라는 건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보영은 이현을 멍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를 상처 줄 것이다.

계획적으로 접근했고, 그를 다치게 할지도 몰랐다.

“……내년 연봉 협상을 기대해도 될까요?”

그녀의 반쯤 농담 섞인 말에 이현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보영은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어쩐지 처음 마셨을 때보다 썼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 * *

출장 이튿날도 이현의 일정은 빡빡했다.

오전에는 강릉 지자체 인사들과 라운딩을 했고, 오후에는 강릉 시립 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보영은 힐끔 조수석을 보았다.

이현은 다음 일정 소화를 위해서 검은색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야구는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되는데.”

줄곧 앞을 보는 것 같던 이현이 다소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처음에 야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건지 여쭤도 될까요?”

“외람될 거 없는데. 얼마든지 물어도 돼요. 우리 사귀잖아.”

“네?”

불쑥 튀어나온 화제에 보영은 잠깐 당황했다.

“수시로, 때때로, 자주, 많이 우리가 그런 사이라는 거 생각하면 좋고.”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분은 해야죠. 하지만 가끔 헷갈려 해도 돼요. 예를 들면 지금 같은 때는.”

말을 잠시 끊은 이현이 의뭉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둘 뿐이잖아요?”

‘넉살이 이렇게 좋았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보영이 궁리하는 사이 이현이 덧붙였다.

“그렇게 웃는 얼굴도 자주 보여 주고요. 비서로서 보영 씨도 매력은 있는데 난 사적인 정보영을 알고 싶어요. 말투부터 힘 좀 빼요.”

“말투요?”

“다나까 체를 자주 쓰더라고. 군대 같잖아요.”

“하지만 회사에서는 조직 체계를 생각하면 그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있을 때요.”

이현은 바로 반박했다. 보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이현이 갑자기 낮게 웃기 시작했다.

“왜 웃으세요?”

“나한테 말대답하니까 좋아서?”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 그에게 정중한 사람들만 곁에 있기 때문일까.

“그게 좋으세요?”

‘취향 이상하네.’

“그게 취향이라기보다는 정 비서가 날 편하게 생각하는 게 좋은 거죠.”

‘속으로 꽁알거린 말을 입 밖으로 뱉었었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전방을 보았다.

“야구는 아홉 살 때 시작했어요. 감기에 자주 걸려서 체력을 키운다는 핑계였고. 그런데 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 어깨가 좋아서 공을 잘 던졌어요. 감독님이 투수를 할지, 포수를 할지 정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투수를 하겠다고 했어요.”

“이유가 있으셨어요?”

“포수는 어떤 공도 받아 내야 하잖아요. 잘못해서 공에 맞으면 아플 것 같아서?”

“네?”

생각지 못한 이유였다. 보니 이현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오늘 가면 야구공을 만지게 되려나. 그럼 10년 만인데.”

보영은 자신의 손을 펴 보는 이현을 보며 그의 집에서 보았던 각종 야구 잡지들을 떠올렸다.

“야구공을 만지고 싶으신 거예요, 만지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직설적인 질문에 이현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물어 온 사람은 없었는데. 다들 내 앞에서 야구 이야기는 잘 안 꺼내. 정 비서가 보기엔 어떤데요?”

“기대하고 계신 것 같아요.”

보영은 강릉 해변이 내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초등학교 앞에 차를 세웠다.

“그래요?”

“네. 조금 들떠 보이시거든요.”

“그랬구나. 그렇게 보였어.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는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오너는 위태롭잖아.”

실소를 흘린 이현은 이내 차에서 내렸다.

운동장 한편에 남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선생님의 지도하에 움찔거리는 몸을 누르느라 고역인 게 빤히 보였다.

“그럼 일단은 여과 없이 들킨 마당에 즐겨 볼까.”

이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아이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우와! 태이현이다! 나 경기 본 적 있어! 아빠가 녹화한 거 보여 줬어!”

“나도 인터넷에서 봤어! 우리 고모가 잘생겼다고 난리였어.”

“이 바보들아! 태이현 몰라? TY 투수였어! 공이 엄청 빨라! 던지는 건 다 스트라이크였다고!”

보영은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들의 나이로 보아 이현이 활동했을 시기를 알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방문한 건 태양 호텔의 사장으로서인데, 아이들은 그를 전 야구 선수였던 태이현으로 인식했다.

“이거 모처럼 오셨으니, 사장님께서 아이들에게 지도를 조금 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초등학교의 야구단은 벌써 근 20년 동안 태양 호텔이 후원하고 있었다.

재일의 말로는 이현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기업의 사회 기부 형태 중 하나였다고 했다.

“가르쳐 주세요!”

“아빠가 태이현한테 야구 배우는 건 영광이랬어요!”

“야구 잘해요? 진짜 잘해요? 나보다는 못할 것 같은데! 10년이나 안 했잖아요!”

보영은 반짝이는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현이 한 아이가 건네는 야구공과 글러브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그녀를 돌아보고 물었다.

“이후에 일정이 어떻게 되죠?”

“이후 다른 일정은 없으십니다. 서울 자택으로 귀가하시면 됩니다.”

이현은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고 있던 저지를 벗었다.

속에는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옷 위로 늘씬하고 탄탄한 근육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럼 끝나고 밥 먹어요, 우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 놓고.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해요.”

이현은 곧장 아이들 속으로 뛰어갔다.

“야구화가 아니라 불편하실 텐데, 어떻게 하나. 창고에 있는 거라도 갖다 드려야 하나? 하지만 많이 낡고 해져서 버리려고 둔 건데…….”

“야구화요?”

보영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현의 발을 보았다. 일반 러닝화였다.

그는 벌써 아이들과 뒤섞여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회사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 활기가 가득 번져 있었다.

“혹시 주변에 야구화 파는 곳이 있을까요?”

보영은 이현과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학교 관계자에게 물었다.

* * *

아쉽게도 야구화는 살 수 없었다. 야구화를 파는 오프라인 매장이 근처에 없을뿐더러, 이현만 두고 자리를 비울 순 없었기 때문이다.

“발은 괜찮으세요?”

아이들과 약 40여 분을 섞여서 가볍게 공을 던져 주기도 하고, 자세를 봐주기도 하던 이현이 돌아오자 보영은 우선 그의 발 컨디션부터 물었다.

땀을 약간 흘린 이현을 위해 수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

“관계자분들이 야구화가 아니라 불편하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아아.”

그녀의 대답에 이현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상관없어요. 현역일 때만큼의 운동량을 소화한 게 아니니까.”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야구에 대해서 잘은 몰랐지만 그는 프로 선수였던 만큼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훈련을 매일 소화해야 했을 것이다.

일전에 TV에서 한 유명한 축구 선수가 자신의 자식은 절대로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하루하루 소화해야 하는 운동량과 식단 조절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때 보이십니까?”

눈치를 보며 다가온 40대로 보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야구부 감독이 이현에게 물었다.

“다들 야구를 잘하네요. 특히 저기 5번 단 녀석이랑 16번 녀석. 센스가 좋아요. 그리고 야구 머신이 추가로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일부 배트도.”

“하하. 세심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바쁘신 건 알지만 자주 방문해 주시면 더없이 영광이겠습니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건 물론 전 프로 야구 선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 말입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또 뵙죠.”

야구부 감독 외에도 학교 관계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현은 이내 몸을 돌렸다.

“저녁은 뭐 먹을까요?”

이현의 뒤를 따르며 머신과 배트 구입, 새 유니폼 제작 등 추후 신경 써야 할 사항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던 보영은 차 문을 열다 이현을 보았다.

“배고픈데 밥 먹죠. 뭐 좋아해요?”

“네?”

“출장 일정 끝났잖아요. 이젠 사적인 시간을 보내자고.”

수건을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친 이현이 빙글 웃었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아요. 다 잘 먹습니다.”

“그래요? 난 지금 먹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거 먹을까요?”

“좋습니다.”

그녀가 대답하자 이현이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왔다.

“내가 운전할게요.”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정 비서야말로 공사 구분 잘해야겠어요. 내가 운전해요. 사적인 시간이잖아. 게다가 출장길 내내 정보영 씨가 운전했고.”

“아.”

보영이 얼떨결에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이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조수석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타요. 배고프다.”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보영이 차에 올라 묻자, 이현 역시 운전석에 오르며 대답했다.

“있어요, 분식집. 아까 야구단 녀석 중 하나가 엄청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하도 자랑을 해서 그게 먹고 싶어지더라고. 떡볶이 좋아해요?”

“네?”

“튀김은 기본이고 순대는 먹어요? 간, 허파, 염통, 오소리 같은 건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국내 제일가는 호텔의 사장인데다 재벌 3세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근사한 외모에 고상한 행동거지를 보여 주는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식 이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표정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마치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는 듯 이현이 웃으며 물었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정보영 씨는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예요? 뭐랄까. 꼭 못 볼 걸 본 것 같은 눈빛이 될 때가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조금 무례할지도 몰라서요.”

“궁금한데요? 해 봐요.”

“사장님께서는 제가 가진 선입견을 쭉, 꾸준히 무너트려 오셨습니다만 아직도 제 안에 사장님에 대한 선입견이 남아 있던 모양이에요.”

“선입견? 어떤?”

그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뉴스를 통한 재벌가 인사들의 갑질 보도를 저 역시 일반화해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 뜻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실 줄 알았어요. 아니어서 적잖이 놀랐고요.”

“칭찬인가?”

“네. 제가 본 어떤 특정 직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비할 곳 없이 섬세하고 다정하시고 소탈하시거든요.”

“……그래서 내가 좋아질 것 같아요?”

보영은 대답 대신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현이 불쑥 몸을 숙여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보영이 눈을 굴렸다. 그는 한 손으론 보조석 헤드를,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대시 보드를 짚고 있었다.

몸을 까딱 잘못 움직였다간 예를 들어 그의 얼굴에 입술이 스친다든지 하는 엄청난 사고가 생길 것 같았다.

보영은 바짝 굳었다. 그렇다고 그를 밀쳐 버릴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눈꺼풀을 깜빡이던 보영이 겨우 한 음절을 뱉었다.

“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재수 없는 재벌가이지만 이렇게 장점투성이니까 좋아질 것 같냐고요.”

그가 장난기 어린 어투로 덧붙였다. 그러고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만족스러운지 입가를 둥글게 늘이곤 대시 보드에 있던 손을 떼 그녀의 얼굴 옆으로 가져왔다.

‘아무리 사귀기로 했고 사적인 시간을 갖자고는 했지만 갑자기 이건 아니잖아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창피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이현이 그녀의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당겨 매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러니까…… 음, 어…… 비꼰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나도 장난이에요.”

씨익 웃은 이현은 기울였던 몸을 다시 운전석 쪽으로 가져갔다.

“그럼 출발할게요. 배고프다.”

보영이 놀라서 요동치는 심장을 다독이는 사이, 이현이 시동을 걸고 핸들을 틀었다.

“장 실장님이 준 자료에는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만 좀 요동쳐.’

보영은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다가 이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더라?’

“……어, 음식이요? 한정식을 좋아하시고 특히 소갈비구이와 전복 요리를 좋아하신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래요? 그런데 그것보단 떡볶이를 더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없어서 못 먹다니요?”

“운동할 땐 식단 관리하느라 못 먹었고, 그 후에는 장 실장님이 옆에 딱 붙어서 내 생활을 관리하니까 눈치 보고요.”

보영이 이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머릿속에 흥분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던 태훈 회장의 얼굴이 스쳐 갔다.

“적어도 제가 지난 1주일간 본 사장님은 다른 사람이 하지 말랬다고 안 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정곡을 찔렸네.”

이현이 그녀를 힐끔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때론 신사적이었고 또 때로는 개구쟁이 같았다.

‘웃지 말라니까요!’

왜 저렇게 잘 웃는지 모르겠다. 가라앉는 듯했던 가슴 속의 술렁거림이 또다시 물결을 쳤다.

‘화제를 돌려야겠어.’

보영이 눈을 굴리며 고심하다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장 실장님과의 인연은 오래되셨나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형이에요.”

평소에도 둘 사이가 편해 보인다 했는데 생각보다 더 오래된 인연이었다.

“첫 만남이 강렬했어요. 정 비서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네?”

“재일이 형, 불량 청소년이었거든요.”

“헉!”

비서의 정석처럼 보이는 재일이 불량 청소년이었다는 말에 보영은 적잖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신음처럼 내질렀다. 그러자 이현이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정말 손쓸 수 없이 거칠었어요, 재일이 형. 그땐 세상의 모든 게 적인 사람이었죠. 아, 머리도 탈색해서 연보라색이었어요.”

“그 장 실장님이요?”

까다롭고 차가운 데다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일 처리를 하는 통에 이따금씩은 기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안 믿겨요?”

보영은 대답 대신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믿어 버리기에 지금의 장 실장님이 너무 완벽하시네요.”

“그래도 완벽한 장 실장 말고 오늘은 우리 이야기 하죠.”

이현이 차 시동을 끄며 내렸고, 보영도 따라 내렸다.

“맛있는 집이 있대요. 치즈떡볶이 먹어요?”

“좋아해요.”

“튀김 유는? 고구마? 오징어? 김말이? 고추?”

“국물에 김말이 찍어 먹는 걸 좋아합니다.”

“난 고구마요.”

보영은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녀는 늘 반걸음 뒤에서 이현의 뒤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인 듯 이현이 그녀와 나란히 맞춰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도보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했고,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면서도 그녀와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신경 썼다.

“아, 여기네요.”

이현이 문을 열었고, 안으로부터 떡볶이와 튀김 냄새가 맛깔스럽게 흘러나왔다.

“맛있겠네요.”

보영은 입가를 반듯하게 당겨 웃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그랬듯 이현은 낡고 오래된 분식집에서도 이질감 없이 녹아들었다. 신기한 남자였다.

* * *

평창 휴게소에서 보영과 이현은 운전을 교대했다.

조금 늦은 저녁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빌라까지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보영이 헤드라이트를 끄는 순간, 주차장 기둥 옆에서 사람 모습이 유령처럼 불쑥 나타났다.

“……장 실장님?”

보영은 차에서 내려 상대를 확인하곤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재일이 그녀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이현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서 뭐 해…… 요? 장 실장님.”

“기다렸습니다. 출장은 무탈하셨습니까. 작은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재일의 차가운 눈초리가 마치 질타하듯 그녀를 향했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릿속에 강릉 시장이 떠올랐다.

“의원님께서는 진정 후, 오늘 저녁 퇴원하셨습니다.”

“오면서 정 비서한테 보고받았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동행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정 비서도 잘했어요.”

“그렇습니까? 시장님뿐만 아니라 돌아오시는 차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것도 우리 둘이 잘 해결했어요. 그렇죠?”

이현이 그녀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즐거우셨나 봅니다. 혹시 다치셨는데 말을 안 하신 걸까 봐 확인해 보려고 왔습니다만.”

“에이, 다쳤으면 다쳤다고 하죠.”

“다쳐도 안 다쳤다고 하신 전적이 많으셔서 말입니다.”

보영은 재일과 이현의 눈치를 보았다. 재일의 눈에서는 진심 어린 걱정이 읽혔고, 반면 이현은 평온하게 웃고만 있었다.

“정말 안 다쳤어요. 정 비서가 운전을 잘했어요.”

하지만 재일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한동안 이현의 모습을 위아래로 찬찬히, 샅샅이 살핀 재일은 이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올라가시죠.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래요.”

이현이 문득 그녀를 돌아보곤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어쩐지 까닭도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이런 반응이 내심 의아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장 실장님한테 미리 말해 둘 사항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어제부터 정 비서하고 나, 만나 보기로 했어요.”

“……네?”

‘맙소사,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보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일은 가뜩이나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

“……무슨 헛소리십니까? 시장님은 알레르기 음식을 드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지만…… 사장님께서는 상한 음식이라도 드신 겁니까?”

“하하, 아니야. 헛소리 아니고 상한 음식도 안 먹었어, 형. 진짜야. 정보영 씨하고 나 연애하기로 했어.”

이현의 솔직담백함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치 없고 바보 같아 보였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하자.”

어안이 벙벙한 재일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던 이현이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은 뭐 해요?”

“내일은 선약이 있습니다.”

보영은 재일을 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재일은 마치 그녀를 사악한 마녀 보듯 적의가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음, 그래요? 일단은 알겠어요.”

보영과 이현, 재일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그럼 쉬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잘 자요.”

이현이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보영은 재일을 힐끔 보았다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이현이 누굴 만나든 태훈 회장보다 더 무섭고 험한 산은 재일이 아닐까.

* * *

집으로 돌아온 보영은 캐리어를 식탁 옆에 끌어 둔 후 냉장고에서 냉수부터 찾아 마셨다.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랐다.

“후우.”

‘돈만 생각하자, 돈만.’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현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수런거렸지만 그것뿐이다. 익숙해지면 된다.

누구라도 그를 안다면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그 남자를 대체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보영은 한동안 물컵을 든 채 멍하게 서 있었다.

머릿속에 이현과 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얼결에 잡았던 손, 해변의 파도 소리 그리고 그의 고백.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식집에서 이현은 참 많이 웃었고, 그들은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대부분은 그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재일의 자료로는 알 수 없었던 이현에 대한 작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입 안의 음식을 삼킬 때마다 혀로 입술을 살짝 핥는 버릇이 있었다.

대답을 요구할 땐 머리가 비스듬하게 살짝 기울어졌고, 얼굴을 찡그릴 땐 왼손의 검지를 가볍게 까닥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드르륵.

식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몸을 떨며 진동하는 소리에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S’로부터 온 긴 장문 메시지였다.

아직 ‘S’에게는 이현과의 관계를 보고하지 않았다.

[정보영 씨가 하나 알아봐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최근 평창의 헤븐힐 리조트 내 입점되어 있는 업체 중 몇 곳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해지되었습니다. 관련해서 어떤 업체가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지 파악해 주십시오.]

문자를 읽어 내린 보영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헤븐힐은 태양 호텔에서 운영하는 계열사 중 하나로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을 겨냥한 테마파크형 리조트 단지였다. 지난 본사 회의에서도 언급됐었다.

회의에 참여했던 임원진 중 몇몇이 이현의 일방적인 업체 계약 해지에 대해 건의를 했고, 이현은 언급된 업체들의 불량 운영으로 인해 헤븐힐에서의 운영을 중단시키겠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시작인가?”

보영이 낮게 뇌까렸다. 어쩐지 손끝에 힘이 빠졌다.

* * *

“무슨 생각이야? 연애? 그러려고 나는 빠지고 둘만 간다고 한 거야? 어?”

재일을 꼬리처럼 달고 집 안으로 들어온 이현은 대답 대신 입고 있던 저지를 벗어 소파에 던져 놓았다.

그러자 재일이 그 자리로 가 이현의 저지를 정리하면서도 잔소리를 이었다.

“여자가 필요했어? 왜 그래? 사춘기야?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하던 짓을 왜 이제 와서 하는데?”

이현이 물을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담가 놓자, 조르르 따라온 재일이 물컵을 씻어 엎어 놓았다.

“설마 정보영이 정말 좋아져서 그런 건 아니지? 걔가 어디서 굴러 들어온 애인지 알잖아. 아니면 혹시 적과의 동침이라는 이 상황이 네 그 삐뚤어진 심보를 막 짜릿하게 자극해?”

이현이 셔츠를 벗어 침대 위에 두자, 재일이 그것도 치웠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냐고. 가기 전에는 정보영 어떻게 할 거라는 말, 한마디도 없었잖아.”

“형.”

내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제가 할 일을 태연하게 하던 이현이 문득 진지하고 무겁게 재일을 불렀다.

이현의 엉덩이를 쫓아 재게 움직이던 재일이 우뚝 멈췄다.

“나 씻을 건데. 같이 들어와서 등이라도 밀어 주려고?”

재일이 냉막한 얼굴을 가차 없이 구겼다.

“아무리 우리가 친형제 같은 사이여도 그건 아니지 않아?”

이현이 실실 웃으며 이죽대자 입술을 삐죽대던 재일이 다시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네가 등 밀어 달라고 하면 밀어 줄 수 있다. 볼일 보고 난 후 뒤처리도 가능해. 증명해?”

“……대체 날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재일의 한없이 진지한 대답에 결국은 이현이 한발 물러났다.

“넌 내 은인이야.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해.”

“그래, 그래. 그러든지.”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이현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 나머지 옷을 탈의한 후 샤워기 아래 섰다.

“문 앞에 속옷 뒀다.”

문밖에서 재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배우자가 있어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다. 저 형은 뭘 하든 과해.”

씁쓸하게 중얼거린 이현은 차가운 냉수를 틀었다. 머리 위로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현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도 냉수를 온수로 바꾸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무뎌졌을지 모르는 이성에 더욱 파르라니 날을 세웠다. 마음을 갈았다. 정신을 무장했다.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 * *

“할아버지가 내 선 자리를 두고 모집 공고라도 낸 모양이야.”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온 이현이 주방의 바 테이블에 앉으며 하는 말에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던 재일이 눈을 들었다.

“미국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던 손자를 불러들여 대뜸 호텔을 안겨 주더니 한다는 게 고작 짝짓기라고.”

“회장님이?”

“그 문제의 시 의원이 보란 듯이 자기 딸을 들이밀길래 옆에 앉아 있는 정보영이 눈에 들어왔고, 스파이인 걸 알고도 그냥 두고 보기엔 배가 아프니 쓸 수 있는 대로 써먹어 보자 싶어서 툭 던진 말이 씨가 됐어. 어쨌건 바람막이로 제격이잖아?”

“……그런 거였냐?”

“플러스 정보영과 내가 그런 관계가 되었다고 하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난 꽤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이현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입꼬리를 삐딱하게 휘었다.

보영과 있을 때와는 달리 다소 포악한 냉기가 사납게 감돌았다.

“그런 이유로 하자고 했어, 연애.”

“정보영이 하자고 해?”

“처음엔 거절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한 시간 만에 마음을 바꾸던데.”

“왜?”

“나도 모르지. 저쪽이랑 무슨 연락을 주고받았는지도. 어쨌건 이쪽에서 마냥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

“정보영이 상대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회장님이겠네.”

재일의 말에 이현이 낮게 웃었다. 재일의 말 속에 숨은 의중이 읽힌 탓이다.

“할아버지 상대하는 동안 그 애는 아마 온 정신이 북북 찢어진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겠지. 우리 할아버지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분이니까. 공사판 막노동에서 시작한 전설이 괜히 전설이 된 게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재일이 다소 찝찝한 얼굴로 눈썹을 내리깔았다.

“아까는 뭐 여자가 필요했냐, 무슨 생각이냐, 사춘기냐 난리 치더니 왜? 갑자기 정보영이 불쌍해?”

이현은 고요하게 물었다. 재일은 생각을 털어 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보고할 게 뭐야?”

대개 재일을 아는 사람들은 재일이 차갑고, 인정 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년기에 불우한 환경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란 재일은 겉만 그럴 뿐 생각보다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현은 재일을 좋아했다. 재일은 그가 본 사람 중 앞뒤가 가장 같은 사람이었다.

“서동일 말이야.”

“아, 알아봤어?”

이현은 보영의 삼촌이라며 넉살 좋게 웃던 남자를 떠올렸다.

재일은 노트북 위로 화면을 띄워 이현에게 보여 주었다.

“이름 서동일. 나이 쉰셋. 전과 12범의 사기꾼이야.”

“사기꾼?”

“5년 전 여주 교도소에서 퇴소하고 나서도 몇 건 자잘한 사기 치다가 1년 전부터 택배 회사에서 택배 일 해.”

화면에 띄워 둔 동일의 프로필을 간단히 읊은 재일이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이현이 소슬하게 웃은 탓이다.

“재미있냐? 왜 웃어?”

“이제야 이야기가 되잖아. 왜 하필 정보영일까. 나는 그게 계속 걸렸거든. 그런데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다고 하면 말이 달라지지.”

“그래서 말인데 정보영 어머니가 현재 유성 요양 병원이라는 곳에 8년째 입원 중이야. 그 전에도 각각 2년, 3년, 5년씩 요양 병원을 옮겨 다녔고. 그리고 최근 유성 요양 병원을 통해 꽤 밀려 있던 입원비가 한 번에 입금됐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이 반짝이는 눈으로 재일을 보았다.

“그거네!”

“그거일 가능성이 높아.”

“돈 때문이야. 별거 없네, 정보영. 시시해라.”

모처럼 재미있어질까 했는데 조금 김이 빠졌다.

“전과 12범이라는 사기꾼하고 작당하고 뭘 해 보려는 것 같진 않아? 이 둘이 혈연이야?”

“아니야.”

“그럼?”

“아직 그것까진. 그냥 길에서 만난 것도 아닐 텐데 확실하게 드러난 인과가 없어. 정보영도 회사하고 사생활은 엄격하게 구분해서 생활했기 때문에 전 직장 동료들은 아는 게 없었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지인은?”

“있지만 이쪽은 대놓고 접근하기는 어려워. 바로 정보영이 알게 될 테니까.”

이현은 손 위에 턱을 괸 채 검지로 식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네. 정보영, 그 여자. 그냥 장기짝인 것 같기는 한데 왜 이렇게 거슬리지?”

“거슬려?”

이현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어, 묘하게 거슬려. 정보영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더 알아봐 줘.”

돈 때문에 이 일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거의 백 퍼센트였지만 그 여자는 이런 일을 하기에 적지 않게 바르고 온정 있는 성품이었다.

그도 눈이 달려 있었다. 조금만 빤히 봐도 알 수 있었다.

‘저쪽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왜 하필이면 골라도 이런 여자를 골랐을까. 조금은 비도덕적이고, 조금은 속물적인 게 더 유리했을 텐데.’

고민하던 이현은 이내 생각을 걷어 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파다 보면 결국 알게 될 일이었다.

“아무튼 요양 병원 쪽 입금 출처만 찾아내면 그건 알겠네. 이 미묘한 스파이를 심은 게 큰 놈일지, 작은 놈일지 말이야. 조카 환영회가 너무들 거하셔. 아직 꿈틀거릴 힘도 없는데.”

이현이 서늘하게 중얼거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재일을 빤히 보았다.

“왜?”

“내가 찾으라고 했던 그 사람은?”

그가 묻자 재일이 분한 듯 미간을 구겼다.

“아직 못 찾았어. 인상착의와 나이대만 가지고 사람 찾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우선 공항 CCTV부터 확보해 보려고.”

“난 형이면 또 쉬울 줄 알았지.”

이현이 장난스럽게 웃자 재일이 낮게 혀를 찼다.

“너 같으면 10년 전 공항에서 스치듯 마주쳤던 사람을 찾는 게 쉽겠냐?”

“쉽진 않겠지만 해낼 거라고 믿어.”

이현이 주먹을 들어 내밀었다. 재일이 그를 얄밉게 보다 자신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쉬어라.”

재일이 늘어놓았던 일거리를 챙겨 정리하는 동안 이현은 냉장고에서 탄산수 하나를 꺼내 들이켰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현관으로 향하는 재일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 툭 뱉었다.

“고마워, 형.”

재일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이 여닫혔고 늘 그랬듯 이현은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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