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7)

01.

48층의 고층 빌딩.

보영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재벌 기업 중 하나인 태양 그룹의 태양 호텔 본사 건물을 뒤로하고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거무죽죽해졌다.

방금 전의 면접 때문이었다.

〈우리 OCC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수의 면접관이 그녀 하나를 앞에 두고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보영은 대부분 그들이 원하는 모범 답안을 들려주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제법 잘 풀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전문 영역으로 질문이 넘어갈 때부터 긴장했던 보영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비어 버렸다.

다시 생각해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OCC. 호텔의 객실 판매율을 묻는 질문이었다.

대학 졸업 후 5년을 비서로 일했지만 호텔 계열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인지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냉랭한 면접관의 얼굴이 그러고도 감히 우리 태양 호텔에 비서 면접을 보러 왔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낙하산이고 뭐고 이건…… 하아…….”

형식적인 면접일 뿐이라고 했지만, 불합격이 된대도 할 말이 없었다.

“야옹!”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추스르던 보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텔 빌딩 앞 광장을 규칙적으로 메우고 있는 정갈한 화단 곁에 어린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둥근 미소를 지었다.

“아가야, 혼자서 뭐 하고 있어. 엄마는?”

그녀가 조심히 다가가, 가는 목소리로 묻자 고양이가 울음을 딱 그쳤다.

“길을 잃은 거야? 어떡해.”

「저리 가!」

고양이가 앙칼지게 우짖으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쉬이. 괜찮아. 엄마 찾아?”

「저리 가! 엄마! 엄마 어디 있어! 엄마!」

보영은 안쓰러워하는 기색으로 손을 살며시 내밀었다.

길고양이들은 경계심이 많기에 거리를 두고 천천히 다가가야 했지만,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이다 보니 조바심이 났다.

「저리 가라고!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도망치랬어!」

“앗!”

보영은 고양이가 반대쪽으로 뛰쳐나가자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고양이가 향한 곳은 차도였다. 그런데 조그만 놈이 날쌔기도 무척 날쌨다.

“위험해! 이리 와! 내가 모르는 사람이긴 해도 해치지 않는다니까?”

하지만 고양이는 이미 차도로 뛰어든 뒤였다. 보영은 주변의 차량을 확인하고 차도로 내려섰다.

“도망을 칠 거면 저 안쪽으로 도망치든가. 위험하게 왜 차도로…….”

빠앙!

돌연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SUV가 곧장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 것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피해야 해!’

보영은 클랙슨 소리에 놀라 굳어 버린 고양이의 몸통을 잡았다.

그리고 얼른 보도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차가 더 빨랐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치일 것 같았다.

‘아, 피하기엔 늦었나?’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허리를 누군가가 강하게 낚아챘다.

시야가 한 바퀴 핑글 돌았다. 나무, 차, 건물이 빛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하, 위험했다.”

잠시 넋이 나갔던 보영이 정신을 차렸다. 머리 위에서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중저음이 들렸다.

눈을 들자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살았네요, 우리 둘 다.”

훤칠한 장신에 화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짧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세련되게 스타일링 했고 진회색 클래식 슈트를 패션지 모델처럼 소화했다.

조금 그을렸지만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단정하고 선명한 눈썹.

얇게 쌍꺼풀이 진 눈매는 서글서글하면서도 반듯했고 높은 콧대 아래 턱선은 섬세했다.

게다가 기분 좋은 듯 살짝 휘어진 붉은 입꼬리가 가뜩이나 잘생긴 이목구비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다친 데 없죠? 그쪽도 그리고 고양이도요.”

보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턱관절의 힘이 풀렸다.

이렇게 그림처럼 생긴 남자는 살면서 처음 봤다.

“아니면…… 어디 다쳤어요? 턱이라거나?”

남자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턱 언저리로 손을 뻗었다.

‘어, 그림이 움직인다.’

멍해 있던 보영은 그의 손끝이 턱 부근에 닿자 놀라 얼굴을 뒤로 뺐다.

그가 조금 머쓱한 듯 손을 내렸다.

“다쳤나 해서. 미안해요. 초면에.”

보영은 얼른 고개부터 숙여 인사했다.

“아, 아뇨. 저기,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고양이를 다시 고쳐 안았다.

그냥 내려 줬다가는 또 엄마를 찾으며 차도로 뛰어들지도 몰랐다.

“그 애도 안 다친 거 같네요. 키우는 고양이예요?”

“아, 키우는 고양이는 아니에요. 길고양이 같아요.”

“그런데 구하려고 했던 거예요?”

보기보다 마디가 굵은 남자의 손이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고양이라고 하면 위생 때문에 만지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고급스러운 외모와 달리 서글서글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대단하네요. 보통은 그렇게 못 하잖아요. 길고양이 구한다고 차도에 내려서는 일 같은 건.”

남자의 칭찬에 보영은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이렇게까지 말할 만큼 거창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뇨. 경솔하게 행동한 탓에 오히려 폐를 끼쳤는데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영이 다시 한번 인사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지금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냥 보였을 뿐이에요.”

“보였어도 행동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런가요?”

“네.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셨습니다.”

말을 잇던 보영은 아차 싶었다.

전 직장 상사가 소심한 편이었기에 무슨 일을 하든 칭찬으로 화답하던 게 버릇이 들었나 보다.

감사하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도 모자란 판에 평가하듯 말해 버렸다.

“칭찬받으니 좋은데요. 감사하다는 말보다 이게 더 좋다. 그럼 조심해요.”

혹시 불쾌해할까 봐 염려한 게 무색할 만큼 기분 좋게 대답한 남자는 이내 눈인사를 하곤 몸을 돌렸다.

“아, 저기…….”

보영이 저도 모르게 그를 재차 불러 세웠다.

“네?”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못 물었네요.”

“아아. 다행히 없어요.”

남자가 산뜻하게 미소 짓곤 다시 등을 돌렸다.

보영은 재차 입을 뻐끔거렸다.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붙잡을 구실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 모델인가?”

슬림하면서도 탄탄한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린 보영이 슬그머니 입에 웃음을 물었다.

생명의 은인 운운하며 질척거려 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찌른다고 찔릴 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한눈에 봐도 자신과는 결이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2억은 되려나?”

작은 중소기업이긴 했지만 5년간 오너의 비서로 일하며 다져 온 눈썰미였다.

남자가 입었던 슈트, 손목시계, 넥타이핀, 커프스, 벨트, 신발까지 명품이 아닌 게 없었다.

그냥 명품도 아니었다. 시계만 해도 R사가 전 세계에 단 열 개만 판매한 한정판이었다.

이것 역시 전 직전 상사가 시계 애호가였기에 쌓인 자투리 지식이었다.

「놔줘! 놓으라고! 엄마! 엄마!」

잠잠하던 고양이가 다시 바르작거리기 시작하자 보영이 고개를 숙였다.

“놓으면 또 차도로 뛰어들 거 아니야.”

「내가 바본 줄 알아! 또 차도로 뛰어들게! 저리 가! 놔! 아악!」

“확실히 안 뛰어들 거지? 바보 아니면?”

「어?」

발로 그녀의 팔을 치며 허우적거리던 고양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보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씨익 웃었다.

「방금 내 말을…….」

“사람이 고양이 말 알아들을 수도 있는 거지. 아직 태어난 지 몇 달 안 돼서 잘 모르나 봐?”

보영은 얄밉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에?」

“엄마 찾아 줄게. 어디서 헤어졌어?”

보영이 걸음을 옮겼다.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바로 이틀 전에 전 직장을 그만두었고, 별다른 준비를 할 새도 없었지만 그녀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맨몸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실제로 면접을 보며 실수한 건 OCC 하나뿐이었다.

최선을 다했고, 모자란 부분은 앞으로 채워 가면 된다.

이미 손에서 떠난 일이다. 보영은 실수를 털어 버리고, 고양이 엄마 찾는 일에 집중했다.

* * *

혹시나 불합격 통지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던 게 무색했다.

다음 날 오전, 경력직 비서 채용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일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출근합니다.]

‘S’에게 간단히 문자를 보낸 보영은 인사과에서 발급된 사원증을 수령하고 사장실이 있는 46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차분한 그레이 베이스에 우드로 포인트를 준 모던한 복도가 이어졌다.

폭이 넓은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탕비실과 접견실·회의실·휴게실이 용도별로 나누어져 있었고, 가장 안쪽에 사장실 입구와 비서실이 보였다.

비서실장 장재일.

비서 정보영.

“두 명…….”

국내 호텔 업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태양 호텔의 사장실 비서진치고는 단출한 머릿수려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 아래에 검은색 가방을 내려 두던 보영은 복도 너머에서 나는 인기척에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시간 오전 7시 30분.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가볍게 숙여 정중하게 인사한 보영은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어?”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단 한 번 본 것뿐이었지만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라?”

상대방도 그녀를 보고 놀란 듯했다.

“어…… 여기…… 는 어떻게? 그때 그 고양이, 맞죠?”

지난 금요일, 그녀를 구해 줬던 ‘찔러 보고 싶은 감’이었다.

오늘도 역시 짙은 감색 슈트에 넥타이핀, 커프스, 슈즈, 헤어스타일까지 완벽한 남자는 그녀가 반가운 듯 환하게 웃었다.

보영은 당황한 것도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최고급 명품 슈트만으로도 여지없이 한 가지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태이현 사장님…… 이십니까?”

“맞아요. 새로 온다던 비서가 그쪽이었나 봐요.”

“안녕하십니까. 정보영입니다.”

보영은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사진을 몇 번이고 찾아봤었는데 지난 금요일에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미디어에 노출되었던 때로부터 10년이나 지났다.

그땐 몸이 더 두꺼웠고, 얼굴에도 살이 통통했다.

아무리 그렇대도 자신의 눈썰미가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았나 싶어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날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천만에요. 이것도 인연인가?”

보영은 고개 숙인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온 남성적인 손에 잠시 머뭇거렸다.

어린 길고양이의 머리를 스스럼없이 쓰다듬는 투박하면서도 다정한 손에 적지 않은 호의를 느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앞으로 그녀가 모실 상사였다.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잘 부탁해요, 정보영 씨.”

‘S’로부터 태이현의 약력을 들었을 때도 자신과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CEO를 모신다는 생각에 적잖이 부담이 됐었다.

또한 이 바닥에 떠듬떠듬 도는 소문으로 들은 재벌가 3세들의 경악스러운 횡포에 각오도 했다.

그런데 모두 기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장님.”

보영은 이현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미소 지었다.

태이현.

앞으로 그녀가 반드시 두둑한 신뢰를 얻어야 하고, 어쩌면 나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를 대상이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보여 줬던 호의와 친절이 양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중소 규모 지역 건설사의 전무 비서였던 그녀가 재계 서열 10위인 태양 그룹 계열사인 태양 호텔 사장실 비서가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거래 때문이었다.

목숨과 뒤바꾼 거래.

반드시 지켜져야 할 거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이제 돌아갈 곳은 없었다.

* * *

“빠른 시간 안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비서 경력이 5년차라도 모시는 상사의 환경이 다르니까요. 일정은 매일, 매시간, 매초 정확하게 체크하세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정돈된 환경을 좋아하시니, 청소도 게을리하지 마세요.”

보영은 직속 상사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대부분의 수행은 내가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경우엔 정 비서가 모셔야 합니다. 이동할 때는 사장님의 동선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준비하세요. 그날의 교통 상황, 날씨, 사장님 컨디션, 혹시 모를 변수에 대한 대처, 미팅 목적, 미팅 장소의 상황까지 완벽해야 합니다.”

보영은 기계처럼 무미건조하게 읊는 재일을 향해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어마어마한 시어머니였다.

장재일은 저 인간미 하나 없는 얼굴로 벌써 똑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사실 전 정보영 씨 채용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보영 씨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충분히 증명해 주면 더없이 좋겠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건 필요 없습니다.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거죠.”

“잘하겠습니다.”

“말은 누구나 잘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낙하산이 그는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이것들만 숙지하도록 해요.”

보영의 품에 백과사전 두께의 자료들과 디지털 자료가 안겨졌다.

호텔 연혁, 조직, 각 부서 상황, 호텔 사업 부분, 태이현의 신변과 관련된 정보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보영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가 질린 얼굴로 자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퇴근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곳은 전국에 여덟 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 태양 호텔의 수장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일의 양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보영은 자리에 앉아 우선 가장 위에 있는 파일부터 열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S’로부터 온 회신이었다.

[퇴근 후, 사택으로 짐 옮기시면 됩니다. T퍼스트우드 401호. 공동 현관 비밀번호와 집 비밀번호 동일 0011.]

사택이라니.

이건 팔자가 핀 건지, 꼬인 건지 모르겠다.

* * *

보영은 기어코 태양 호텔과 태이현에 대한 기본 지식들을 머릿속에 욱여넣고서야 뒤늦게 퇴근을 했다.

귀신같은 상사, 재일의 눈치 때문은 아니었다.

이건 비서라는 직업을 가진 그녀의 프라이드였다.

낙하산으로 꽂혔다고 해도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사택이야?”

보영은 퇴근 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턱관절을 툭 떨어뜨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 후 짐을 챙겨 도착한 곳은 ‘S’ 측에서 지급해 준 사택이었다.

〈지금 사시는 곳은 정리하시죠. 사택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관리비, 세금 등의 부대 비용은 모두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정보영 씨는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저 태양 호텔 근처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이나 원룸 정도일 줄 알았다.

하지만 ‘S’가 준비해 준 사택은 사택이란 말이 무색한 고급 빌라였다.

6층 높이인, 가로로 긴 우드 색상의 건물 1층엔 편의점·음식점 등 편의 시설이 입점해 있었고, 2층부터가 집이었다.

5층과 6층에는 집마다 넓은 테라스가 보였고, 그 외의 층에도 모두 크고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안쪽으로는 빌라 전용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도 있었다.

“……우와.”

입구를 감시하고 있는 CCTV만 네 개인 공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 4층을 눌렀다.

따뜻한 베이지 계열의 포세린 타일로 마감된 4층 복도에는 마치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명화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그 외에도 은은한 간접 조명이며 조화를 통해 건물 곳곳이 각별한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택…….”

401호 문을 열고 들어간 보영이 한숨을 뱉었다.

사택 수준이 이래서야 죽는 그날까지 태양 호텔에서 근무하고 싶을 것 같았다.

크지는 않았지만 우드 파티션으로 분리된 공간에는 모던한 주방과 침실이 자리했다.

단차 위 커다란 반창 앞에 놓인 침대, 작은 협탁과 화장대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심지어 모든 가구가 새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들떠서 둘러보는 것도 잠시였다.

“아니다. 좋아하지 말자. 공짜는 없지.”

이유 없는 베풂은 없다. 그녀에게 이런 환경이 주어진 까닭은 분명했다.

“……일단 밥이나 먹자.”

보영은 짐을 내려 두고 곧장 집을 나왔다. 나쁜 짓을 해도 밥을 먹고 기운이 나야 가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었던 보영은 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떠야 했다.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상사, 이현이 거기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현도 놀란 듯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서둘러 다시 열어 주었다.

“우리 사적으로 자주 보네요. 여기 들어왔어요?”

“네. 사택 배정받았습니다. 사장님이야말로 어째서……?”

“나도 여기 살아요. 우리 회사에서 이 빌라 공실 난 거 몇 개를 사택으로 쓰고 있거든요.”

‘혹시 ‘S’도 이현이 이곳에 산다는 걸 알고 그녀를 이곳에 살도록 한 걸까?’

“우리 이웃사촌 됐네요.”

“아, 네.”

“새삼스럽지만 이웃사촌으로서도 잘 부탁해요. 그런데 어디 가나 봐요?”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나도인데.”

이현의 입매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보영도 습관처럼 따라 미소 지었다.

‘잘된 건가? 잘된 거겠지?’

태이현이라는 뜬구름 위에 있는 존재의 신뢰를 얻고, 무슨 일이든 오픈하는 측근이 되려면 이처럼 유리한 거리는 없었다.

얼떨결에 함께 편의점에 도착하자 이현이 이내 도수 낮은 맥주를 들고 왔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앞에서 같이 한잔할까요?”

간단한 저녁거리로 삼각 김밥을 고르던 보영이 아연하게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저는 사장님의 비서입니다.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게.”

“지금은 이웃사촌으로서 물었어요. 상사와 부하 직원이 아니라. 공과 사 구분은 당연히 해야죠.”

보영은 검은 트레이닝복조차 런웨이 위의 모델처럼 소화하는 멀끔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오히려 환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거라면 좋습니다. 제가 살까요?”

“아니, 내가 살게요. 인연이 인연이니만큼.”

* * *

그는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라고 보영은 생각했다.

이현은 편의점 앞에 비치된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 그렇지.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

“엄마 찾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엄마를 찾았어요? 어떻게?”

이현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어린 고양이에게 물어서 찾았다는 걸로는 당연히 대답이 되지 않을 거였다.

“……근처에 있더라고요. 똑같이 생겨서 엄마구나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상, 고양이와 소통한다는 말 같은 걸 했다가는 미친년 취급만 신나게 당할 게 뻔했다.

단지 남들과는 다른 체질일 뿐인데 부모님조차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영은 이걸 자신의 작은 비밀로 남겨 두는 쪽을 택했다.

“그랬구나. 그러고 보면 정 비서, 첫인상이 어땠는지 알아요?”

이현이 문득 웃음을 삼켰다.

“이상한 사람이구나 했어요.”

“네?”

“갑자기 차도로 뛰어드니까. 하지만 그다음엔 따뜻한 사람이구나 했죠. 고양이를 구한 거였잖아요.”

양심이 콕콕 쑤셨다. 따뜻한 사람은 돈으로 매수당하지 않는다.

“사실 정 비서 보기 전엔 의심했어요.”

괜스레 입이 말라 이현이 건넨 맥주 캔을 홀짝이던 중이었다.

의심이라는 말에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삼켰다.

“의심이라면 어떤.”

“그건 나중에 우리가 조금 더 친해지면 말해 줄게요.”

장난스럽게 말한 이현이 빈 캔을 내려놓고 빙긋 웃었다.

“그럼 이번엔 정 비서가 말해 봐요. 내 첫인상이 어땠어요?”

‘호감 덩어리. 더 알고 싶은 사람. 찔러 보고 싶은 감.’

보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는 그녀의 상사였으니까.

“……아주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차에 치일 뻔한 걸 구해 줄 정도로요.”

“대답이 너무 뻔한데요?”

그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보영은 눈을 굴리다 반죽 좋게 덧붙였다.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너무 잘생기셔서요.”

“그것도 뻔하고.”

이현이 그녀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원래 밑에 두는 직원에게 스스럼없이 대하시는 편인가요?”

“대체적으로 그런 편이죠. 서로 알아서들 잘할 텐데, 쓸데없이 위계질서 잡는다고 분위기 무겁게 만들면 의욕만 저하시킨다고 생각해요. 이건 경험담이에요.”

“예전에 운동하실 때의 경험이세요?”

“어떻게 알아요?”

“워낙 유명한 선수셨으니까요.”

“그렇게 기억해 주니까 고맙네요.”

이현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쌉쌀한 웃음을 머금었다.

보영은 아차 싶었다. 이현은 한때 통상 방어율 2.21의 프로 야구 투수였다.

프로 생활을 하는 4년 동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동의 에이스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스물네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팔꿈치 부상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고 10년이 지난 최근에야 돌아왔다.

그게 그녀가 ‘S’로부터 받은 이현의 프로필이었다. 개인적으로 알아봤다.

그가 태양 그룹의 3세로서,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로서, 실력 좋은 프로 야구 선수로서 얼마나 화려하게 빛났던 사람이었는지는 조금만 찾아봐도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전 야구는 잘 모르지만, 이직하면서 조금 찾아봤어요.”

그녀가 말을 잇자 그가 의외라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모시게 될 상사의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는 게 면접에서도 유리해서요.”

“솔직하네요?”

“비서는 사장님의 공식적인, 때로는 사적인 부분까지도 케어해야 하는 위치예요.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죠.”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난주 전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는 말이다.

“아주 바람직한 직업관이네요.”

“야구를 많이 좋아하셨어요?”

“그랬죠.”

“그렇다면 좋은 추억으로 남았겠네요.”

“좋은 추억이라. 굳이 따지면 아픈 추억이죠. 자의로 그만둔 건 아니니까.”

웃고는 있지만 그 안에 고인 아픔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보영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녀에게 고스란히 속을 드러내 보이는 이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꼭 구단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라도, 워낙 잘하셨으니까 동네 야구팀에서라면 큰소리도 제법 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네 야구팀?”

“네. 사회인 야구팀에도 과거에 프로 선수 생활하셨던 분들 더러 있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내가 사회인 야구팀이라도 들면 좋겠다? 재밌네요.”

“과거엔 이기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으셨을 테니, 이젠 즐기셔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혹시 제가 오버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문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그럴까 싶어 보는 사이, 이현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거 더 마실 거예요?”

“아.”

보영은 자신의 앞에 반 이상 남은 맥주 캔을 내려다보았다.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막 상사가 된 이현의 앞에서 주저 없이 마시기도 애매해 깨작대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이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맥주를 가져가,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거 제가 입…… 댄 건데요…….”

보영의 말은 의미 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김 다 빠졌네. 가죠.”

이현이 쓰레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영은 당황했다. 비서는 그녀였다.

“사장님, 제가 버릴게요.”

“쓰레기에 이름이라도 써 놨어요? 아무나 버리면 어때.”

이현이 서글서글하게 웃곤 빌라를 향해 턱짓했다.

재벌 3세.

매체에서 접한 타이틀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프레임을 씌워 생각했다.

오만하거나 싸가지 없거나, 철이 없거나 사람을 우습게 알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뜬구름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지 너머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맥주도 마시고, 쓰레기도 버리고, 농담도 하고, 과거에 씁쓸해하고 웃기도 했다.

“몇 호 살아요?”

“401호 삽니다.”

“같은 건물에 아는 사람 사니까 신기하고 좋네.”

“이 건물에 호텔 직원 분들이 꽤 사시지 않나요?”

“나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면 눈도 안 마주치던데.”

이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장님께서 너무 잘생기셔서 긴장한 탓 아닐까요?”

습관적으로 전 직장 상사에게 하듯 칭찬한 보영이 아차 싶어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넣었다.

이게 그에게도 통할지 모를 일이었다. 보영은 슬쩍 이현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기분 좋은 이유네요.”

다행히 거슬리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였다.

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보영은 허리를 반쯤 숙여 인사했다.

“나는 501호 살아요.”

보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위일 줄은 몰랐다.

“다닐 때 층간 소음 조심해야겠네.”

보영이 대답 대신 입술 끝을 둥글게 휘었다. 그러자 이현이 문득 중얼거렸다.

“……아니었으면 좋겠네.”

“네?”

“정 비서가 내 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아. 내가 일 잘하나 할아버지가 사람을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네?”

“태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아버지 알아요? 태양 그룹 회장님인데요.”

이현이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제야 그가 농담을 한 거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뭐야…… 깜짝이야.’

그녀가 어색하게 웃자 이현이 눈웃음 짓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럼 잘 자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보영은 닫힌 문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S’로부터 문자가 왔다.

[첫 근무는 어땠습니까?]

생각보다 이현과 거리를 좁히는 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그가 좋은 사람 같다는 게.

게다가 차에 치일 뻔한 걸 구해 줬다.

‘이런 걸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거겠지.’

지이이이잉.

현관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온 보영은 진동하는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삼촌? 응. 주소 알려 줄게. 시간 날 때 짐 좀 옮겨 줘. 집주인한테는 말해 둘게.”

일할 때와는 다르게 다소 털털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보영이 한구석에 놓인 캐리어를 열었다.

몇 벌 안 되는 옷이지만 당분간 지낼 곳이니 정리는 해야 했다.

옷을 붙박이장에 수납하고 화장품도 늘어놓고 세면도구도 있어야 할 곳에 비치해 두었다.

샤워까지 마친 후 침대에 누운 보영이 휴대폰을 들었다.

X튜브를 들어가니 이전에 봤던 재생 목록이 그대로 떴다.

기자 회견이었다.

자막에는 ‘TY 투수 태이현, 부상으로 은퇴 결정!’이라고 떠 있었다.

“아…….”

보영은 태양 호텔을 검색하려다 멈칫했다.

“……적당히들 좀 하지. 안 그래도 힘든 사람한테…….”

기자 회견을 하는 이현의 안색은 무척 어두웠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들지 못했다.

편의점 앞에서 야구 이야기를 할 때 씁쓸해하던 그의 얼굴도 떠올랐다.

“진짜 좋아했구나…….”

보영은 화면 속의 이현을 따라 얼굴을 우울하게 가라앉혔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 다행이네.’

보영은 그러고도 이현의 기자 회견 장면을 오래도록 보다가 잠들었다.

* * *

화요일 오전에 열린 경영진 회의에서는 꽤나 과열된 언쟁이 오갔다.

“그러니까 태이현 사장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고수해 온 경영 방침을 모조리 뒤엎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더 진보적인 방법을 시도해 보자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태양 호텔이 지금까지 국내 제일의 호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모두 차별화된 고급 서비스와 럭셔리한 이미지 전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혁신도 좋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고급 서비스와 럭셔리한 이미지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허허, 한계라니요. 태양 호텔이 출범되고 자그마치 26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계 같은 건 모르고 시장을 선도하며 1위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이건 성급히 할 게 아니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 아닐는지요.”

기본적으로 웃는 낯에, 정중하긴 했지만 회의에 참석하는 임원들은 대체적으로 이현의 말에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중얼중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늙은 멧돼지가 사장님이 말씀하시면 입 닥치고 있을 것이지, 어디서 실실 웃으면서 개소리를 하고 있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보영은 깜짝 놀랐지만 가까스로 소리를 죽였다.

문가에 위치한 의자에 나란히 앉은 재일이 누군가 이현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때마다 거친 말을 복화술로 사납게 토해 냈기 때문이다.

바른말, 사무적인 말 말고는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의 입술 사이로 육두문자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실장님, 자중…… 아닙니다.”

소리 낮춰 말을 건넸던 보영이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머리를 앞을 향해 고정했다.

지금 재일의 분위기는 단순히 살벌한 정도가 아니었다. 잘못 걸리면 정말 누군가를 죽일 기세였다. 엄청난 충성심이었다.

“김 전무님, 지금 최고라고 언제까지 최고일 순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지금까지 쌓아 놓은 이미지를 꼭 바꿀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비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시류를 앞서 읽어야 태양 호텔이 미래에도 태양 호텔일 수 있는 겁니다.”

보영은 속으로 박수를 백만 번은 친 것 같았다.

겉으로는 언성 높이는 사람 하나 없이 진지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방에서 한마디씩 하며 이현의 말을 무시하려 들었다.

그 이후로도 결론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말이 연신 돌고 돌았다.

VVIP들만을 위해 조성된 루프톱의 일반인 개방 여부라든가, 소규모의 로열 리조트 부지로 매입해 놓았으나 별다른 진척 없이 놀고 있는 땅의 용도 변경, 심지어 호텔 라운지의 인테리어 개선과 메뉴 선정까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없었다.

두 시간 후,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나이 지긋한 간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데 꽤나 적지 않은 웅성임이 일었다.

“이제 겨우 일선에 뛰어든 녀석이 호텔 경영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렇게 분위기를 뒤집어 놓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혁신? 변화? 말인들 누가 못 합니까?”

“이번 인사는 회장님께서 너무하셨습니다. 그룹의 태석준 부회장님이나 물산의 태인희 대표도 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선례도 무시한 채 다짜고짜 사장이라니요?”

“그러니 호텔 경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줘야지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 않습니까?”

채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점잔을 빼던 회의에서와는 달리 불만스러운 얼굴로 담합하기 바쁜 간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을까?’

다른 용무로 중간에 자리를 비운 재일 대신, 회의실을 정리하던 보영은 상석에 앉은 이현을 힐끔 보곤 문을 끝까지 닫아 소리를 차단했다.

“하아.”

이현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무르고 넥타이를 아래로 당겨 느슨하게 했다.

보영은 조용히 이현의 앞에 생수 뚜껑을 열어 놓아 주곤 다시 자리를 정리했다.

“회의 어땠어요? 꼴사납지 않았어요? 어떻게 다들 하나도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지.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나?”

바닥의 쓰레기를 줍던 보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회의실 문은 닫혀 있었으니, 안에 있는 것은 그녀와 이현 둘뿐이었다.

“정 비서한테 말한 거예요. 말할 사람이 정 비서밖에 없네요.”

“아, 네.”

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직해집시다. 괜찮으니까 느낀 대로 말해 봐요.”

보영은 움찔했다. 비서 짬밥 5년이다.

천지 분간 못 하던 1년차 때 상사가 하란 대로 했다가 눈물 콧물 다 빼며 사죄해야 했던 경험이 아득하게 지나갔다.

“……솔직히는 꼴사납기보다 한심했습니다.”

“그래요? 간부들이 이렇게 나올 건 알고 있었는데 민망하네요.”

이현이 민망한 듯 쓰게 웃곤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뇨. 사장님이 아니라 오히려 꼴사나운 건 간부분들이었어요. 설마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이틀 만에 해고 사유가 생기는 건 아니겠죠?”

보영은 입가를 당겨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이게 여기서도 먹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경험치와 눈치를 믿었다.

“그렇진 않아요. 자유롭고 다각적인 발언이 있어야 발전이란 게 있으니까.”

“어제 실장님께서 태양 호텔에 대한 자료를 보여 주셨습니다. 확실히 태양 호텔은 차별화된 이미지 전략으로 지금의 자리를 일구어 냈습니다. 하지만 호텔 점유율은 해마다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매해 같은 이벤트와 홍보로 답습만 하고 있을 뿐이죠.”

그녀가 잇는 말에 이현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데,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은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하는 데다 새로운 상사에 대한 적개심으로 아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꼴사납다고 생각합니다.”

“……아부예요, 진심이에요?”

“진심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현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상사의 기분을 풀기 위한 그녀의 판단이 맞았다.

보영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회의 자료들을 모았다.

“이상하다.”

“네?”

이현이 그 그림 같은 얼굴 아래, 손등을 받친 채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굉장히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기분이에요.”

“……그러십니까. 전 사장님의 비서니 당연한걸요.”

보영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곤 손을 더 빨리 움직였다.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재일이 돌아왔다.

“정 비서, 그거 먼저 챙겨서 비서실로 돌아가요.”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보영은 이현을 향해서도 인사를 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큰일이네.’

그녀는 그에게 호감을 사고 믿음을 얻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그녀를 향해 긍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겠다.

‘사람이 왜 저렇게 좋냐고!’

보영은 애꿎게 이현 탓을 했다.

* * *

한편, 보영이 나가자 자리에 남은 이현의 얼굴이 시리도록 차갑게 굳었다. 그는 닫힌 문을 지켜보다 재일에게 눈을 돌렸다.

“안치현 전무, 김승호 지원 본부장, 이희준 운영 사업 본부장, 강장우 조정 이사.”

재일이 문득 이름을 네 개 읊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려 둘게.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아예 성한 이 하나 없이 평생 죽만 먹게 만들어 줄까.”

“그거 마음에 드는 계획인데. 뭐,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뭐가 다르겠어. 그저 피 빨아먹고 살 생각만 하는 버러지들.”

인정사정없는 폭언이 그림 같은 입술에서 선득하게 흘러나왔다.

보영이 있을 때와 달랐다. 마치 지킬과 하이드처럼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기회를 봐서 그렇게 할게.”

재일의 대꾸에 이현이 어깨를 으쓱이곤 서늘하게 대꾸했다.

“기대되네. 다들 틀니 할 나이는 아니신데, 턱 밑으로 줄줄 새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꼴.”

“기대해라. 그보다, 네가 볼 때 정 비서는 어떤 것 같아?”

재일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 이현의 태도가 익숙한 듯 태연하게 물었다.

“……그쪽은 아직 뭔지 모르겠어. 굳이 분류하자면 너무 평범하지. 고양이를 구한다고 차도에 뛰어들 만큼 사람 좋고.”

“사람이 좋든 어떻든 저쪽에서 꽂은 건 분명해. 내가 면접관인데도 최종 결정할 때 내 말 따윈 씨도 먹히지 않았어.”

“정보영 조사는?”

“내일 보고할게.”

재일의 말에 얼굴을 사납게 구겼던 이현이 문득 비소를 흘렸다.

“왜 웃어?”

이현이 목을 죄고 있는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서늘하게 말했다.

“퍼스트우드는 호텔 관리자 사택이야. 그런데 한낱 비서가 비집고 들어왔다? 정보영을 꽂은 인간은 뇌가 있긴 한 건가 해서. 내가 이상하게 여길 거란 생각은 못 한 걸까, 아니면 했는데도 들여보낸 걸까? 혹은 상관없는 걸까.”

“글쎄, 그래도 난 네가 그렇게까지 정 비서와 교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요 없어지면 버릴 거야. 일단 어떤 패가 될지 모르니 손에 쥐고는 있어야지.”

이현은 달콤하지만 독이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 패도 아닐 거라는 데 건다.”

“어, 지금 내기하자는 거야?”

재일의 도발에 이현이 흥미를 보였다.

물론 이현은 정보영이 상대방의 ‘어떤 패’일 거라는 데 걸었다.

이렇게까지 그의 옆에 심어 두려고 정성을 다하는 데에는 뭔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슬슬 가자. 너 오후 일정 소화해야 해.”

대회의실을 나서며 이현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비뚤어진 얼굴을 숨겼다.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가장한 그의 뒤를, 재일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충직하게 지켰다.

‘대체 어떤 패일까?’

이현은 그를 향해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화답해 주며 머릿속으로는 다른 궁리를 했다.

‘작정하고 메다꽂았으면 뭐라도 액션이 있어야 할 텐데, 미인계를 쓸 기색도 없고 그렇다고 과하게 달라붙어 뭘 캐내려는 것도 아니고…….’

“표정.”

뒤에서 재일이 문득 낮게 속삭였다.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 인상을 슬쩍 찌푸린 모양이다.

이현은 입가를 문지르는 척하며 표정을 다시 정비했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장기짝으로 여기 놓였는지는 몰라도, 영 짐작이 안 가니까 더 재미있네.’

이현은 봄날의 벚꽃도 울고 갈 만큼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 * *

보영은 오늘도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가 퇴근했다.

원래 어딜 가나 중간에 낀 어중간한 연차가 가장 일이 많은 법이었다.

게다가 도깨비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지켜보는 재일 덕에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를 때는 낙하산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그 입장이 되어 보니 낙하산도 할 짓이 못 되었다.

[퇴근합니다.]

긴장으로 똘똘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S’에게 문자를 송신한 보영이 고개를 들다가 웃었다.

빌라 앞에 보이는 익숙한 택배 트럭 때문이었다.

“뭐야. 바쁘다고 튕기더니 이렇게 바로 올걸. 하여간 말하고 행동이 따로 놀아.”

한달음에 다가가 차창을 두드리려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 안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 뒤로 돌아가 보니, 짐칸의 문이 살짝 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짐 옮기고 있나?”

보영은 곧장 몸을 돌렸다.

공동 현관은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인지 외부로 노출되어 있지 않고 안쪽에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조금 소란했다.

“아니, 그러니까 묻잖아요. 여기 아저씨 같은 사람들 함부로 드나드는 데 아니거든요? 공동 현관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제 조카가 여기 산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조카? 그런 말은 나도 하겠네. 뚫린 입이라고 무슨 말을 못 해. 그리고 봐 봐. 이건 택배가 아니라 무슨……! 라면 박스 덕지덕지. 안에 손수레 끌고 들어가지 말아요! 바닥에 흠집 나. 흠집 나면 아저씨가 물어 줄 거예요?”

공동 현관 안쪽에 반가운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동시에 고성이 더 커졌다.

“아, 그럼 이 많은 짐을 무슨 수로 옮겨요?”

“어머? 이 아저씨 봐? 어디서 눈을 그딴 식으로 부라려요? 이러니 이런 몸 노동하는 사람들이랑은 상종을 말아야……!”

보영은 걸음을 서둘렀다.

“삼촌!”

보영은 택배 회사 유니폼을 입고 손수레에 라면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를 가득 실은 삼촌, 동일의 옆에 가서 섰다.

“무슨 일이세요?”

보영은 동일을 뒤에 숨기듯 세우곤 눈초리를 사납게 뜬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와 마주 섰다.

“아가씨가 이 아저씨 조카예요? 여기 사는 거 맞아?”

“네. 맞습니다.”

“그래요?”

여자의 눈초리가 그녀의 위아래를 못마땅해하는 눈초리로 훑었다.

“……아가씨는 눈이 없어요?”

“네?”

“여기 집값이 얼만지나 알아요? 손수레 끌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바닥에 흠집이 나겠어, 안 나겠어. 게다가 아무리 삼촌이래도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막 가르쳐 주면 어떡해요?”

보영은 감탄스러웠다. 재벌 3세인 이현도 하지 않는 갑질을 전혀 엉뚱하고 생각지 못한 데서 접했기 때문이다.

“도둑이라도 들면 아가씨가 책임질 거야?”

“외람되지만 하나 여쭤도 될까요?”

“뭘요!”

“혹시 이 빌라의 건물주세요?”

“……?”

“아니면 혹시 빌라 내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나요? 외부인은 출입 금지라든가요. 제가 어제 이사를 와서 무지합니다만, 이번 기회에 알려 주신다면 잘 배우겠습니다.”

여자가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만약 그런 규정이 없는데, 제 삼촌을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런 식으로 매도하셨다면 그건 명예 훼손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 명예 훼손? 젊은 아가씨가 어른한테 무슨 말을 이렇게 되바라지게 해?”

“제가 오해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단지, 빌라 입구에 서서 이렇게 소리를 빽빽 지르는 게 이 빌라의 품위를 더 손상시키는 일이 아닐까 해서요.”

입구를 오가던 사람 서넛이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와 아줌마를 구경하듯 보고 있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겠습니다.”

보영은 곧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아줌마가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취소하며 검지로 비상계단을 가리켰다.

“꽉 막힌 공간에 그런 짐 옮기면 먼지 날리니까 계단으로 가요!”

“그럼 아줌마가 도와주시든가요.”

보영은 눈을 내리깔아 손수레 위에 가득 실린 상자에 눈길을 주었다가 여자를 싸늘하게 보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사실 보영은 어떻게든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이었다.

“보시다시피 짐이 많아서요.”

보영은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여자가 기가 막힌 듯 가슴을 탁탁 두드렸지만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마주 선 여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저래?’

“그럼 내가 도와줄까요?”

등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이어 누군가 허리를 숙여 손수레 위의 상자를 하나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렸던 보영은 당황했다.

“사장님?”

운동이라도 다녀온 듯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이현이 라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사님.”

‘여사님?’

보영은 그 단어가 정녕 이현의 입에서 나온 게 맞나 싶었다.

그리고 인사를 받은 ‘갑질’의 얼굴에 난색이 스몄다.

“어머, 이게 누구야. 이현 씨 아니에요? 음…… 이쪽 아가씨하고 아는 사이……?”

“네. 아는 사이요. 그런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 무슨 일은…… 아이고, 내 정신 봐. 차에서 뭐 가져올 게 있었는데…… 나중에 봐요, 이현 씨.”

여자는 허둥지둥 공동 현관 밖으로 나갔다.

이현이 나타나자 그들을 멀뚱멀뚱 보고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보영아, 누구냐?”

“우리 회사 사장님이셔.”

뒤에 서 있던 동일이 묻자, 그녀가 대답하기 무섭게 이현이 스스럼없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저는 보영이 삼촌 서동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게 다 정 비서 짐인가 봐요? 옮기는 거 도와줄까요?”

서글서글하게 묻는 이현의 태도에 보영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요. 제가 하겠습니다. 올라가서 쉬세요.”

보영은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동일이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곤 빙글 웃었다.

“왜 그러냐. 도와주신다는데. 하도 박스를 옮겼더니 허리가 다 빠지려고 한다.”

“진짜 왜 그래……!”

보영이 이를 사리물고 동일에게 인상을 썼다.

“정 비서, 도와줄게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아니, 괜찮…….”

그러나 그녀가 어쩔 새도 없이 이현이 손수레를 끌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이시면 이러실 필요 없을 텐데 됨됨이가 참 바람직하시네!”

동일이 호탕하게 웃으며 넙죽 이현을 칭찬했다.

보영은 동일을 향해 표정으로 열렬히 분노했다.

‘삼촌, 미쳤어!’

“갑자기 직장을 이직한다기에 걱정했는데 이렇게 멋지고 좋은 분이시면 걱정이 없겠어요. 우리 보영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웃음기 어린 이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보영은 어색하게 미소 짓곤 슬쩍 손을 뻗어 주책이 바가지인 동일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악! 왜 꼬집고 그러냐!”

“내, 내가 언제…… 그랬어?”

“아오, 아파.”

동일이 옆구리를 문지르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이현 쪽으로 붙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큭큭큭. 걱정 마세요. 잘 챙기겠습니다.”

이현이 그녀와 동일을 보곤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삼켰다.

보영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름 회사에서 단정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고수했는데, 지금 이 시간부로 말아먹은 것 같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도 많네요.”

이어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보영은 동일의 팔을 잡아 거세게 당겨 내리게 하곤 이현이 잡고 있던 손수레 손잡이를 앗아 잡았다.

“어?”

“사장님도 피곤하실 테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보영이 손수레를 끌어 서둘러 내렸다.

동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집에 가면 죽었어.’

이현이 내리려 했지만 보영은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입장도 좀 생각해 주세요. 사장님.”

보영은 내리려는 그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곤 닫힘 버튼을 누른 후 몸을 쏙 뺐다.

이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피식 웃었다.

‘왜 자꾸 웃는 거야. 저 얼굴로 웃으면 어쩌라고.’

보영은 애써 웃곤 닫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아.”

“보영아, 여기 사택이라며. 엄청 좋은데?”

등 뒤에서 들리는 발랄한 목소리에 보영은 뿔이 난 얼굴로 돌아보았다.

“값 꽤나 나가겠다? 출세했네, 우리 보영이?”

보영은 아랑곳 않고 복도를 둘러보던 동일이 인디언 보조개를 장난스럽게 패며 씨익 웃었다.

사실 아까 그 ‘갑질’이 도둑질이 어쩌고 했을 때 양심이 콕 찔렸었다.

지금은 손을 씻고 개과천선했다지만 동일은 과거 전과 12범의 사기꾼이었기 때문이다.

“딴청 피우지 말고 말해 봐. 왜 그랬어?”

“뭐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냐고.”

“왜기는. 하나뿐인 조카가 못된 사장 밑에서 달달 볶이고 있나 그냥 떠본 거지.”

“……그런 식으로?”

보영이 싸늘하게 되묻자 동일은 눈치를 보다 히쭉 웃었다.

“에이, 결과만 좋으면 됐지. 어쨌든 네 사장님, 무시무시하게 생겼던데. 괜히 정분나는 거 아니냐?”

동일이 놀리듯 간사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럴 일 없어. 공과 사는 구분해.”

“공과 사 구분하기엔 너무 혹하게 생겼던데? 삼촌 눈치, 아직 안 죽었다? 너도 알지? 사기꾼들 촉이 말이야, 어떨 때는 신내림 받은 무당보다 더 좋다?”

보영은 실없는 소리를 연달아 늘어놓는 동일을 메마른 시선으로 보았다.

‘앓느니 죽지.’

그녀는 손을 털레털레 흔들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 * *

짐을 모두 옮긴 후, 보영과 동일은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보영아, 그런데 새로 옮겼다는 회사는 어디냐?”

보영은 카레를 비비던 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냥 회사지 뭐.”

“그래? 이상한 데는 아니지?”

“아니야. 크고 좋은 데야.”

보영은 시선을 카레에 못 박은 채 대답했다.

“삼촌이 다 걱정돼서 묻는 거야. 누누이 말했었지? 정 계장님, 어? 형님이 나한테 너 부탁했다고.”

“그 소리는 백 번을 들어도 안 믿기는데, 삼촌?”

“왜!”

“아빠가 정말 그랬을까 싶네. 사기꾼한테?”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누가 사기꾼이야. 다 옛날얘기야! 이거 안 보이냐? 로또 택배!”

동일이 목에 힘을 잔뜩 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삼촌, 현역이었지 않나? 아빠 돌아가시고 1년 후에 큰집 갔다가 5년 전에 출소했잖아.”

“……기억력 좋네? 보영이?”

보영은 동일을 향해 히쭉 웃어 보였다.

멋쩍게 얼굴을 긁적인 동일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나 주중에 너희 엄마한테 다녀왔다. 형수님은 갈수록 얼굴이 반짝반짝 피더라. 걱정도, 고민도 없어서 그런가? 그렇게 보면 사람이 정신이 꼭 맑을 필요는 없어. 행복하면 됐지.”

보영은 대답 대신 동일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아니, 내 말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지. 형수님 그렇게 되신 지 벌써 몇 년이야. 20년이잖아.”

“벌써 20년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 것도 없네.”

보영은 카레를 크게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동일은 수다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힘든 일 있으면 삼촌한테 말해. 혼자 아등바등하지 말고. 회사 옮긴 것도 조건이 좋아서라며. 돈 필요하면 말해.”

“내가 벼룩의 간을 빼먹지. 원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랬어. 삼촌하고 내 사이에 평생, 절대 돈거래는 없어.”

“에엑! 한 푼도? 내가 급전이 필요할 수도 있…….”

보영은 동일을 지그시 째려보았다. 그러자 동일이 입을 삐죽이곤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

아이 같은 그 모습을 보며 보영은 피식 웃었다.

새벽부터 종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택배를 배달했을 텐데, 그 와중에 이전 집에서 그녀의 물건까지 챙겨 왔을 동일이 사실은 고맙고 짠했다.

때론 철없이, 때론 듬직하게,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곁에 있어 주는 동일은 피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그녀에겐 매우 소중한 가족이었다.

* * *

“삼촌, 운전 조심해. 집도 잘 부탁하고.”

“그래. 방 빨리 빠지게 부동산에도 말해 둘게.”

보영은 떠나는 동일의 택배 차를 배웅했다.

갑자기 이직을 한 탓에 먼저 살던 집을 하루빨리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

집주인은 다른 임차인이 구해져야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해,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동일에게 집 처리를 부탁했다.

「아으, 몸이 무거워 죽겠네. 대체 몇 마리나 들어 있는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부스럭거림과 함께 다소 지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총각은 또 있네. 고맙긴 하다만,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보영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흐미, 요즘은 물이 제일 달콤하다니까. 이제야 살겠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지?’

「얼굴이 잘생겨서 봐주려고 했더니, 이 총각 참 센스 없네. 저번에 그렇게 남겼으면 다른 걸 좀 가져 오지. 눈치 없기는. 임신했을 땐 내가 좋아하는 걸 먹어야 하는데.」

보영은 천천히 빌라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아아, 노랗고 고소한 치즈 먹고 싶다. 아니면 딱 한 번 먹어 봤지만 잊을 수 없었던 그 풍미! 파스타도 좋은데…….」

불만이 많은 고양이었다.

누군가 음식을 챙겨 준 모양인데, 본인 입장에선 영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공동 현관 옆의 필로티를 지나 뒤로 돌아가자, 빌라 전용으로 조성된 공원과 은은한 조명 그리고 벤치가 보였다.

「일단 먹자. 먹어야 배 속에 있는 애들, 하나라도 건강하게 낳지.」

그곳에는 바닥에 놓인 그릇에 코를 박은 얼룩무늬 고양이가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와 거리를 두고 화단에 걸터앉아 있는 길고 커다란 실루엣도.

“……!”

모를 수가 없는 실루엣이다.

한쪽 무릎 위에 반대쪽 발목을 걸치고 손바닥 위에 턱을 괸 채 고양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건 이현이었다.

‘사장님이 음식을 챙겨 준 건가?’

「아, 파스타…….」

임신한 탓에 푸짐한 몸매를 자랑하는 고양이가 다시 한번 탄식했다.

“그 고양이는 파스타가 먹고 싶은 모양인데요.”

보영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자, 이현이 그녀를 보았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사장님.”

보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뭘요. 진짜 짐 옮기는 거 도와주려고 했는데 거절이 너무 단호해서 아쉬웠죠.”

이현이 부러 웃으며 대답했다.

“그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도와주셨던 거였어요. 일이 더 커질 뻔했는데 사장님 덕분에 부드럽게 넘어갔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요.”

이현은 다시 시선을 고양이에게로 돌렸다.

몸에 딱 맞는 명품 슈트를 모델처럼 소화한 낮의 모습과,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인 지금의 모습은 매우 다른 분위기였지만 별다른 위화감은 없었다.

옷이 날개라는데, 옷걸이가 이 정도로 좋으면 의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파스타라고! 저 여자가 내 마음을 조금 아네. 이 총각도 저만큼 눈치코치 좀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아는 게 아니라, 알아들은 거다.

하지만 이현의 앞에서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보영은 모른 척했다.

대신 그녀가 이 사택에, 태양 호텔에 있는 이유를 상기했다.

‘태양 호텔의 새로운 신임 사장 태이현의 비서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을 것.’

“사장님, 괜찮으시다면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그래요.”

보영은 이현의 앞에 두 걸음 정도 사이를 두고 섰다.

고양이는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도 식사에 열중했다.

길고양이 중에는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는 간덩이 큰 것들이 간혹 있었다.

이 고양이도 그런 부류인가 보았다.

“고양이 밥을 챙겨 주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저 고양이, 임신한 것 같아서요.”

이현이 그녀를 힐끔 보곤 말했다. 늘 그랬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옛말에 동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했다.

“늘 주고 계신 거예요?”

그가 고양이 밥을 주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이 고양이를 한 달쯤 전에 운동 다녀오는 길에 봤어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더라고. 딱 봐도 임신한 것 같은데 안됐잖아. 자주는 아니어도 생각날 땐 챙겨 주려고 해요.”

‘그래서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안고 있던 길고양이를 만진 거구나.’

“그런데 쟤도 습관이 들었나 봐요. 이 시간이면 여기 있더라고.”

“고양이도 사람처럼 사고를 하니까요.”

“글쎄요. 단순한 동물이잖아. 그냥 길들여진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보영은 반박하고 싶었다. 고양이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똑똑하고 영리한 동물이었다.

게다가 고양이도 사람과 같다.

개체마다 성격, 사고, 생김새 심지어 말투까지도 달랐다. 착한 애들도 있었고 나쁜 애들도 있었으며 취향이란 것 역시 존재했다.

“누가 그러더라고. 식물은 햇빛으로 길들이고, 동물은 먹이로 길들이고, 사람은 돈으로 길들이는 거라고.”

“……네?”

보영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나직하게 말하는 이현의 음성이 무척이나 소슬하게 들려왔다.

‘사람을 돈으로 길들여?’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본 이현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치 그녀를 안심시키듯 이현이 덧붙였다.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사이, 음식을 다 먹어 치운 고양이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화단 너머로 사라졌다.

“……갔네요. 아무리 봄이어도 아직은 날이 쌀쌀한데 이만 올라가시는 게……?”

“시원해서 좋은데요. 정 비서는 추워요?”

“아뇨, 괜찮습니다.”

보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이전에 모셨던 전무님처럼 나이 지긋하고 소심한 애처가와의 대화는 도가 텄기에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상황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그는 젊고 잘생기고 사람 좋아 보이는 재벌이었고, 그녀는 작정하고 그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그…… 아까 그 여자분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세요?”

“누구……? 아, 아까 그 여사님 말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이현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글쎄요. 나는 안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저쪽은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쌓고 있는 것 같아요.”

“네?”

“정 비서하고 내 사이 정도는 되어야 친한 거라고 할 수 있죠.”

보영은 이현의 말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아이고! 어떡해! 애가 나오려나? 어머어머!」

비명 같은 곡소리에 보영은 아담한 규모의 화단과 수풀을 휘둘러보았다.

“왜 그래요?”

「양수가 터졌어! 어떡해!」

보영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나는 곳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여기서 낳으면 안 되는데! 마련해 둔 자리가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정 비서?”

“고…… 고양이요.”

길고양이다. 이렇게 낳아 버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새끼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적합한 환경도 아니었다.

“조금 전에 사장님께서 밥을 줬던 그 고양이요!”

보영은 화단 위로 몸을 숙여 이리저리 헤쳐 보았다.

고양이란 게 워낙에 숨기도 잘했기에 찾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 고양이가 왜? 울음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새끼를 낳으려는 것 같아요.”

「끙끙. 아으. 아이고.」

보영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저쪽에서 소리가 났다. 그새 또 이동한 모양이었다.

‘찾았다!’

조금 더 옆으로 가니 바닥에 늘어진 채 숨을 할딱거리는 고양이가 보였다.

어떻게든 출산을 위해 마련해 둔 장소로 가려 했던 것 같은데 힘이 다 빠져 버린 모양이다.

“도와줄게. 새끼가 나오려는 거지? 초산이면 바로 나오진 않을 거야.”

보영은 우선 고양이의 머리부터 등까지 부드럽게 쓸어 준 뒤 조심히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정 비서, 그 고양이……?”

안아 올리자마자, 양수가 터진 탓에 보영의 배 부근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거 피예요?”

보영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 양수예요. 피 색이면 좋은 건 아닌데…… 사장님, 제가 아직 이 부근 지리는 잘 몰라서요. 혹시 근처에 동물 병원이 있나요? 지금 시간이 늦었으니까 24시간 하는 병원이면 좋아요.”

이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곤 그녀를 빤히 보았다.

“사장님, 지금 시간이 없어요. 급…….”

“걸어갈 거리는 아니에요. 차로 가죠.”

보영은 앞장서는 이현의 뒤를 얼른 따랐다. 양수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아이고, 나 죽네…….」

“안 죽어. 병원 갈 거야. 거기서 안전하게 낳을 거야.”

「어……?」

“괜찮을 거야. 안 죽어. 너도, 새끼들도 다 괜찮을 거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보영은 이현이 열어 준 보조석에 얼른 올라탔다. 이현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 고양이, 괜찮은 겁니까?”

“아마도요. 병원에서 낳는 게 안전할 거예요.”

10분 정도 지나자 간판 불이 환하게 켜진 24시간 하는 동물 병원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자, 보영은 이현을 챙길 틈도 없이 차에서 내려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와주세요, 고양이 양수가 터졌어요!”

번을 서고 있던 간호사가 보영으로부터 고양이를 건네받아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수의사도 진료실에서 나와 처치실로 향했다.

“하아…….”

그제야 보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스크에 남아 있는 간호사와 눈이 마주쳐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아…… 사장님……!”

잠시 멍했던 보영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본의 아니게 이현을 운전기사처럼 부린 꼴이 되었다.

보영은 당황해서 어서 이현을 찾으러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기가 무섭게 이현이 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괜찮을 것 같아요. 방금 처치실로 들어갔어요.”

“다행이네요.”

이현이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안도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려 이현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건 이것대로 낭패였다.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보니 정 비서, 동물 구호가였나 봐요?”

“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게 되게 멋있네.”

이현이 씨익 웃고는 병원 로비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난데없는 칭찬에 순간 당황한 보영은 목뒤를 멋쩍게 쓸어내리곤 이현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그래도 그 고양이가 새끼를 잘 낳았는지 확인은 하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요?”

“그건…….”

“정 비서도 앉아요.”

이현이 스스럼없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그의 옆에 앉은 보영이 가만히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그가 스스럼없이 잡았다 놓은 자신의 팔 위를 손으로 슬그머니 감싸 덮었다. 감촉이 선명했다.

“오래 걸릴까요?”

이번에는 이현의 어깨가 스치듯 닿아 왔다. 보영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째서 몸이 자꾸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그, 글쎄요.”

보영은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 슬그머니 이현과의 거리를 벌렸다.

왜인지 속이 술렁거렸다.

“아, 잠깐만요.”

그녀가 까닭 없이 흔들리는 마음에 의아해하는데,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로 갔다.

그는 간호사에게 몇 마디 하더니 이내 뭔가를 받아 와서는 그녀에게 건넸다. 마른 수건이었다.

“닦는 걸로는 어떻게 안 되겠지만, 그래도.”

보영이 받을 생각을 않자, 그녀의 앞에 몸을 굽혀 앉은 이현이 수건으로 그녀의 팔목을 가볍게 잡아 옆으로 치우고, 옷을 닦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몸이 굳었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자신이 느껴졌다.

‘사람이 한낱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신 차려, 이 사람은 태이현이야. 네가 속여야 할 사람이라고.’

그가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흔들리면 안 된다.

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현실을 직시해.’

그녀는 손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현이 쥔 수건을 잡았다.

피 색을 띠는 양수 때문에 얼룩덜룩했다.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이현이 그러라는 듯 수건을 쥔 손을 놓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았다.

“고양이 좋아해요?”

“네. 사장님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싫어하진 않으시는 것 같아요. 밥도 챙겨 주실 정도면. 그거 아세요? 동물 좋아하는 사람 중엔 나쁜 사람은 없대요.”

“그럼 난 좋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수건으로 젖은 배 부근을 누르던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이현의 눈빛이 평소처럼 온화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요즘 한국에서는 사람 좋다는 말이, 꼭 좋은 뜻은 아니라던데요. 착하다는 말이 곧 바보라는 말과 이음동의어인 것처럼요.”

어째서인지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문틈으로 바람이 드는 걸까.

보영은 저도 모르게 병원 입구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정 비서 말은 순수한 칭찬이겠죠?”

“네. 칭찬이었습니다.”

보영의 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이현이 조금 더 짙게 웃었다.

보영도 입가를 당기곤 다시 고개를 숙여 옷을 닦았다.

검은 꿍꿍이가 있는 바에야, 그녀도 그처럼 솔직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이후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처치실로부터 수의사가 나왔다.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모양이었다.

“모두 네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암놈 하나, 수놈 셋이요. 어미가 길고양이 같던데…… 집으로 데려가실 겁니까?”

보영은 나이 지긋한 수의사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렸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바에야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우선은 병원에서 돌봐 주십시오.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보영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현이 나섰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네. 잠시 고양이 좀 봐도 되겠습니까?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는 처음이라 궁금한데요.”

이현이 서글서글한 태도로 수의사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보영도 이현의 뒤를 따라가, 세상에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과 만났다.

축 늘어져 있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이야, 정말 조그만데요?”

이현이 몸을 숙이고 신기한 듯 고양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늦지 않아 다행이에요. 정 비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현이 그녀를 보며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보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고양이를 보고 있는 이현의 모습이 꽤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 * *

병원을 뒤로하고 나오던 보영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야 했다.

워낙 정신이 없던 탓에 자신이 탄 이현의 차종이 뭔지도, 그가 직접 운전을 했었다는 사실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타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날렵한 몸체를 자랑하는 승용차 앞에서 보영은 목소리를 키웠다.

“내 차인데 정 비서가 왜 운전을 해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한 이현이 차체를 돌아 운전석에 올랐고, 몸을 기울여 조수석 문도 열어 밀어 주었다.

“지금 업무 시간 아니잖아요.”

그녀가 다소 불편해하는 얼굴로 눈치를 살피자 이현이 덧붙였다.

“하지만.”

“이웃사촌끼리 따지지 말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 배려하는 티가 역력했다.

보영은 계속 이렇게 실랑이하고 있을 수도 없어 일단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현이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고양이가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네?”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 건 어떻게 알았고?”

보영은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마음이 급해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머릿속에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고양이와 대화하는 소름 끼치는 아이.

뇌 어딘가가 단단히 고장 났다는 이유로 병원을 전전해야 했던 아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고양이가 주변에 맴도는 불길한 아이.

고양이가 울면, 직접 보지 않은 일들도 귀신처럼 아는 아이.

“……리가, 울음소리가 들려서요. 울음소리가 이상해서…….”

어설픈 변명이란 건 알았다. 하지만 고양이의 말이 들린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울음소리?”

“네.”

“그래요? 정 비서가 촉이 좋은가 봐요. 아니면 귀가 좋든가.”

이현이 웃었다. 보영은 적잖이 안도했다.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밀이 타인에게는 절대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것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 없는데 기피되고 별종 취급당하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차를 다시 빌라에 세우기까지, 돌아가는 길이 아까보다 조금 더 짧게 느껴졌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사장님. 저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죠?”

“아니. 즐거웠어요. 사람이건 고양이건 그런 탄생의 순간 곁에 있다는 건 뭐랄까. 기쁘잖아요. 경이롭달까.”

차에서 내린 보영이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자 이현이 손을 저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가죠.”

이현의 뒤를 따르며 보영은 그 곧은 뒷모습을 조심스레 눈에 담았다.

태이현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줄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임신 중인 길고양이의 밥을 챙겨 줄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쓰레기도 아니었다.

다정하고 자상하며 허물없다.

그리고 그를 알아 갈수록 보영은 가슴이 조금 갑갑해졌다.

평생 선하게, 옳은 일만 하며 정의롭게 산 건 아니었지만 그랬다.

“오늘 좋은 기억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이현이 불쑥 말했다.

“네? 아……!”

‘고양이가 새끼들을 낳은 걸 말하는 건가?’

보영은 입꼬리를 당겨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정보영 씨는 태이현 사장의 비서로서 어디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그쪽에서 원하시는 게 뭐죠?〉

〈원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죠. 정보영 씨의 온 생을 통째로 내놓아야 할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예요. 일이 틀어지면 상상 가능한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일이 잘돼도 좋은 끝은 기대하기 힘들지도요. 그래도 뛰어드시겠습니까?〉

〈……왜 하필 저죠?〉

〈왜 하필 정보영 씨인 건 중요하지 않죠.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우리가 다행히 정보영 씨를 골랐다는 게 중요하죠.〉

어느 날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이거나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무시했다.

하지만 ‘S’는 그녀가 원하는 걸 무척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도움이 뭔지 직접 보여 주었다.

그녀 앞으로 쌓여 있던 채무가 하루아침에 모두 변제되었다.

결국 보영은 ‘S’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이후 케어에 들어가는 병원비 역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가능한 한 오래 살아 계시도록요.〉

머릿속으로 불과 몇 주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 그 고양이가 낳은 새끼들 중 눈에 밟히는 녀석은 없었어요? 나는 특히 발 부위가 신발 신은 것처럼 검었던 놈이 계속 생각나는데.”

보영은 이어지는 이현의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예뻤던 것 같아요. 다행히 건강해 보였고요.”

보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일을 받아들였을 때 철저히 자신만 생각하기로 했다.

‘S’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상, 이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는 상관없었다.

“오늘 고생했어요.”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자 이현이 눈인사를 했다.

“저야말로 오늘 고마웠습니다, 사장님.”

“잘 자요.”

이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보영은 단정하게 묵례했다.

이후에도 바로 돌아서지 못하고 닫힌 문을 한동안 멀거니 보았다.

‘내겐 이 일이 꼭 필요해.’

집으로 돌아온 보영은 내일 있을 이현의 세부 일정을 ‘S’에게 전송했다.

[오전 10시 각 부서 회의, 오후 13시 식음지원 부장 면담, 14시 30분 태양 호텔 경주 김서운 운영 본부장 내방, 16시 ㈜크린 설비 장철민 사장 내방]

* * *

나이 : 28세

학력 : J대 졸업 (학점 4.3/4.5)

경력 : W건설 전무 비서(5년 4개월)

가족 사항: …….

이현은 재일이 건넨 자료를 쭉 훑고는 데스크 위로 던졌다.

“겨우 이게 다야?”

“우리 쪽에 입사할 때 낸 이력서하고 크게 다른 건 없어.”

보영에 대해 뒷조사한 자료였다.

“아버지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조기 치매로 요양 병원에서 18년째 몸을 의탁하고 있고 최근에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어. 호적상 다른 가족은 없고.”

“삼촌이 있던데.”

“삼촌?”

이현은 그에게 넉살 좋게 인사하던 중년 남자를 떠올렸다.

“피는 안 섞였는데 가족 같은 사이라는 건가? 이름 서동일. 로또 택배.”

재일은 들고 있던 태블릿 PC에 이현이 읊조린 말을 메모했다.

“저쪽에서 정보영한테 달리 접선한 흔적은?”

“아직.”

“형이 헤맬 정도면 꽤나 꼼꼼하게 설계했나 봐?”

재일의 대답에 이현은 사납게 웃음을 흘렸다.

재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정보영은 저쪽이 판 위에서 굴리는 말일 뿐이야.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현은 눈을 가늘게 내리떴다. 첫 만남은 일부러 의도한 만남이었다.

그와 재일이 내정한 인재들을 모두 밀어내고 최종 면접에 갑자기 땅에서 불쑥 솟듯 나타난 여자가 얼마나 영악하고, 잘났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양이를 구하겠다고 차도에 뛰어들 정도로 사람이 좋았다.

선이 가는 예쁜 외모에 단정한 매무새, 수수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거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신의 일을 했고, 상사를 유연하게 감쌀 줄 알았으며, 제법 당찬 구석도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느 모로 보아도 그에게 어떤 해코지를 하기 위해 밑으로 들어온 사람 같지 않았다.

“형, 내가 계속 생각해 봤거든. 그런데 답을 모르겠어. 왜 정보영일까?”

이현이 고개를 돌려 재일을 보았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어느 집안 망나니를 들이대면 같이 골로 보내려고 이러는구나, 생각이라도 하지.”

이현은 다시 보영의 신상 정보가 들어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내일 출장, 정보영도 동행시켜.”

“뭐?”

“적일수록 가까이 둬야지. 어느 순간 수틀렸을 때, 목덜미라도 물어뜯어 버리려면 곁에 둬야지 않겠어? 저쪽과 연결된 산 증인이잖아. 정보영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겠어.”

“조금 더 알아볼까?”

“아니.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 직접 부딪쳐야 파악할 수 있는 것들.”

재일이 보영이 있을 문밖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형, 그 사람은?”

이현이 다짜고짜 툭 뱉었다. 재일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짚이는 게 있는지 미간을 좁혔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아직 별 진전이 없다.”

“……그래? 진전이 없어도 포기하지는 말아 줘. 꼭 찾아야 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그 사람’을 찾기로 결정했다.

“알고 있어.”

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책상 모서리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이현은 이내 의자를 돌리더니 삐딱한 미소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맞다. 오늘이 그날이었지? 점심은 정 비서와 먹어야겠는데. 형은 적당히 빠져 줘.”

온기 따윈 없는, 마치 한 마리의 야생 짐승 같은 얼굴로 이현이 포악하게 웃었다.

“……재미있냐?”

재일이 기가 질린 듯 물었다.

“아아. 꼭 수수께끼 같잖아.”

이현은 어서 보영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 수수께끼를 하루라도 빨리 풀고 싶었다.

* * *

“안녕하세요, 태양 호텔 비서실입니다. 내일 저녁 식사 예약 건으로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보영은 전화 너머에서 예약 내역을 확인해 주는 직원의 말을 하나씩 체크했다.

“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갑각류 음식은 피해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저녁 선약이 있는 강릉시 시장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시장의 비서실에서도 미리 확인하겠지만, 이중 삼중으로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다음으로 태양 호텔 강릉 지점의 운영 본부장 번호를 누르던 보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에서 업무 보고를 마치고 나오던 재일이 그녀의 책상을 탁탁 두드렸기 때문이다.

“내일 오후 2시, 태양 호텔 강릉 지점 1박 2일 출장에 정 비서도 동행합니다. 준비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딱딱한 얼굴로 제 할 말만을 전한 재일은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출장 수행이라니.

“그리고 사장님께서는 주에 한 번, 일정이 없는 날에 식사 시 구내식당을 이용하십니다. 오늘은 정 비서가 의전하도록 하세요.”

재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실에서 이현이 나왔다.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이현이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보영은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까닭도 없이 긴장이 되었다.

‘정말이지 자꾸 웃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 들겠어.’

가뜩이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화보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심장이 반응해 버리는 건 통제가 안 됐다.

“밥 먹으러 가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보영은 책상을 돌아 나와 이현의 반보 뒤에 섰다.

“장 실장님은 같이 안 가고요?”

“비서실을 비울 수는 없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재일의 깍듯한 배웅을 뒤로하고 보영은 이현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잘됐네요. 밥 먹으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취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이 없긴 한데, 정리되는 대로 정 비서 환영회도 한번 하죠.”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보영은 이현보다 한발 앞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또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아랫사람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하는 상사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녀가 이전에 모셨던 전무님도 좋은 분이었지만, 그런 겸손함은 없었다.

비서로부터 받는 신변의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일이니 불만은 없었지만 이현을 보고 있으면 새삼스럽게 그 사실이 다가왔다.

“사장님, 매주 이렇게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비서로서 자신이 모시는 상사를 파악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사전에 재일에게 받은 이현의 정보 외에도 이 사람의 기분이 어떨 때 좋은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하다못해 선호하는 날씨 취향까지도 모두 알아 두면 도움이 되었다.

“호텔은 서비스업이죠. 고객에게 늘 웃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친절해야 해요. 구내식당을 오가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이 자신의 일에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일부 알 수는 있어요.”

“아.”

“최대의 이익, 최고의 서비스, 고품격 호텔도 좋지만, 그 전에 안부터 돌봐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겠죠.”

태양 호텔은 이미 업계의 정점에 있었다.

모체인 태양 그룹 자체가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인 이유도 있지만, 리조트·골프·레저까지 아우르는 꾸준한 영역 확장으로 누구나 호텔 하면 태양 호텔부터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해물탕이라는데. 해물탕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3층에 내리자, 고객들이 이용하는 라운지나 다이닝 뷔페에 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구내식당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식사하시러 오셨나 봐요. 해물탕 맛있어요.”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직원들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환대와 친근감에 보영이 움칫했다.

이 호텔에 부임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이현이 직원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단번에 알게 됐다.

배식을 받고 테이블에 이현과 마주 앉은 보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정말 사택에서 직원들이 사장님 보면 눈도 안 마주치는 거 맞습니까?”

“글쎄요?”

장난스럽게 웃은 이현이 해물탕 국물을 크게 떠 넣었다.

보영도 이내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해물탕도 좋았지만 반찬으로 나온 음식 중 미역 줄기에 자꾸 손이 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영은 아차 싶었다.

물은 셀프였다. 그녀가 먼저 챙겼어야 했다.

한데 물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한 이현이 향한 곳은 배식구였다.

“잘 먹길래.”

작은 접시에 미역 줄기를 더 받아 온 이현이 그녀의 식판 앞에 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물…… 떠 오겠습니다.”

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혹스러웠다.

매너가 좋다는 건 이미 알았지만 저 얼굴로 이렇게까지 배려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도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녀가 물을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이현이 물었다.

“고양이는 어떻게 할 거예요? 생각해 봤어요?”

보영은 생각지 못했던 물음에 눈을 깜빡였다.

“혹시 이따가 병원 가 볼 거예요?”

보영은 의아해졌다.

‘왜 신경 쓰시지?’

“네. 가 볼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잘 됐네. 그러면 8시, 1층 로비에서 봐요.”

“네?”

“조금 찾아보니까, 고양이가 길에서 살아남는 수명은 길어야 3년 정도라면서요. 그 전에 로드킬이든 뭐든 당해서 생존하기가 힘들다고.”

“……그렇습니다.”

“병원에 새끼 고양이들, 분양 맡기는 방법도 있다던데 어떻게 생각해요?”

이현은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보영은 진심으로 의뭉스러워졌다.

그가 고양이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고 고양이 외에도 신경 쓸 일이 아주 많았다.

“우리가 같이 구한 고양이잖아. 아, 구했다는 표현은 좀 그런가?”

“……그 고양이들에게 마음이 쓰이세요?”

“그럼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보영은 그가 또 다르게 보였다.

‘뭐야. 조금 감동이네.’

그냥 우연히 고양이의 출산을 도운 데에서 끝내지 않고 그 후까지 마음을 쓰는 모습에서 책임감이 느껴졌다.

“말이라도 통하면 그 엄마 고양이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앞으로 새끼들 데리고 어떻게 살아남을 작정이냐고. 병원 문밖을 나가면 매 순간 매초가 생존일 텐데,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잖아요.”

이현이 눈을 내리뜨며 조금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가능하면 오래 살아남는 게 좋으니까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죠.”

“왜 그렇게 마음을 쓰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이현이 눈을 들었다. 보영은 숨을 삼켰다.

그는 내내 그랬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동질감을 느낄 이유가 있나?’

갈 곳 없이 길가를 전전하는 길고양이와 태양 그룹 3세인 그는 처지부터가 달랐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보영은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도, 오늘도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그녀의 신경을 은근하게 건드렸다.

“그럼 갈까요?”

“네. 잘 먹었습니다.”

보영은 서둘러 이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조심해요.”

다른 사람과 부딪쳐 식판을 쏟을 뻔한 걸 이현이 팔을 잡아 주었다.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온유하게 응시했다. 상냥했고, 배려 넘쳤다.

근 2주간, 너무 많은 변화가 있던 탓에 괜히 예민해진 탓일까.

위화감이라니.

쓸데없는 기우다.

* * *

8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보영은 구제 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 옷차림이 상사와의 사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데 과연 적절한가 고민되었다.

“……상관없나. 처음도 아니고.”

어제 고양이 출산 소동을 겪을 때도 그녀는 내추럴한 홈 웨어 차림이었다.

고민을 잇던 보영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위에서 뭔가 쿠당탕 하는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뭐지?”

잠시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했다. 보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장대 앞에서 일어났다.

띵동! 탕탕탕!

현관에서 벨 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안 그래도 나가려던 참이었기에 보영은 바로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다.

인터폰 너머에는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냉막한 인상의 남자가 있었는데 초면이었다.

“태양 그룹 회장실의 조성하 비서실장입니다. 정보영 씨 맞으십니까. 문 좀 여시죠.”

남자가 인터폰을 향해 자신의 명함을 비춰 보였다.

보영은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차분하게 물었다.

“맞습니다만, 비서실장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태이현 사장님 관련해서 지시할 사항이 있습니다.”

“네. 잠시만요.”

상사인 이현의 이름이 언급된 이상에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조성하라고 소개한 남자는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제가 여기 사는지는 어떻게……?”

“회장님의 지시로 인사 기록을 열람했습니다.”

보영은 수긍했다. 이현의 조부이자 태양 그룹의 신화인 태훈이 알고자 하는데 모를 것은 없으리라.

“지금 바로 사장님 댁으로 이동하죠. 움직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네?”

“앞으로 보고 들은 것들은 외부에 일절 발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여 그런 실수가 있을 경우, 반드시 그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 명심하세요.”

제 할 말만 마친 남자가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영문을 몰라 망설이던 보영은 일단 조성하의 뒤를 따라갔다.

급한지 곧장 비상계단으로 이동하기에, 보영 역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이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조금 전에 위층에서 났던 작지 않은 소음과 관련이 있는 걸까.

조성하를 따라 501호 앞에 선 보영은 그의 어깨 너머, 열리는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태산 같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일 배우라고 미국에서 불러들였더니, 어디서 분란이 일 짓거리를 만들고 있어! 네 아비처럼 고분고분하게 굴란 말이야!”

보영은 움찔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집 안을 흔들었다.

“그치들 다 나한테 충성하는 사람들이야! 우리 그룹이 굴러가게 하는 주주들이야! 네 편으로 둬도 모자랄 판에 잘하고 있는 사람들 심기를 건드려 등을 돌리게 만들어? 제정신이야? 대체 미국에서 뭘 배우고 온 거야! 그 머릿속에 뭘 집어넣고 온 거냐 이 말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는 신문 경제면을 펼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태양 그룹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태훈 회장이었다.

횃불처럼 형형한 눈과 커다란 풍채, 잿빛 머리카락은 그의 불같다 소문난 성정을 대변해 주듯 강렬했다.

일흔다섯이 넘은 나이에도 저만한 기운을 가졌다.

괜히 노호(老虎)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 돌아가는 상황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태양 호텔이 이대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변화? 지금까지도 호텔은 늘 톱이었어! 어중간한 변화를 꾀하다가 그간 쌓은 이미지를 추락시킬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은 거냐! 지금 체제 유지해! 임원들 말 곱게 들어!”

“말 잘 듣는 인형이 필요하신 거면, 저 말고 이호를 이 자리에 앉히지 그러셨습니까.”

“뭐야? 네가 내 장손이다! 그룹은 장손이 이어받는 거야!”

“작은아버지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선 본인의 경영권을 방어할 명분 있는 방패가 필요하신 것뿐이 아닙니까.”

“말 다 했어? 이 빌어먹을 자식이! 네 아비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조성하의 뒤에 숨을 죽이고 서 있던 보영은 비명을 삼켰다.

어쩔 새도 없었다. 태 회장이 옆에 잡히는 접시를 들어 이현을 향해 던졌다.

맞힐 의도는 없었는지 그건 이현의 옆을 스쳐 벽에 내리꽂혀 쨍그랑 깨졌다.

그 와중에도 이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건조한 표정으로 태 회장을 응시했다.

“아버지는 제가 열네 살 때 돌아가셔서 뭘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다 회장님께 배운 거죠.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말 것, 옳다고 생각한 건 밀고 나갈 것, 사람 위에 서는 법을 배울 것, 개인보다 기업을 우선할 것.”

이현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차가웠고, 날카로웠고 삭막했다.

“그런데도 그딴 소리를 해!”

“제게 태양 호텔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아 주신 건 회장님입니다.”

“네 마음대로 휘두르라고 준 자리가 아니야!”

“그럼 다시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이번엔 태 회장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날아갔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이현의 옆에 패대기쳐졌다.

“누가 네 아비 아들 아니랄까 봐 말하는 짓거리마저 똑같아! 닮아도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닮아!”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은 끌어들이지 말죠. 적어도 제가 아버지보다는 나을 텐데요. 이렇게 옳다고 생각한 건 밀고 나가잖아요. 이런 뚝심은 회장님을 빼다 박았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팽팽하고 살벌한 공기 안에서 보영은 겨우 숨만 쉬었다.

“썩을 놈! 다시 한번 내 귀에 회사 방침을 뜯어고친다느니 하는 헛소리만 들려와 봐! 네가 누리고 가진 것들을 두 번 다신 구경도 못 하게 빈털터리로 내쫓아 버릴 테니까!”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요. 말 잘 들으면 주고, 안 들으면 뺏고.”

“웃어? 감히 웃어? 이 자식이!”

태 회장과 마주한 이현은 그녀가 알고 있던 태이현이 아닌 것 같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태양 그룹 안에선 태훈 회장이 법이고, 신이다. 그런데 자꾸만 그 다혈질적인 성격을 벅벅 긁어 댄다.

“어지간히 하셨으면 화 그만 내세요. 쓰러지시겠어요.”

“아무튼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호텔도, 결혼도, 그룹도 다! 내 말 들어서 탈 날 일 없어! 다 잘됐어!”

“나이 드시더니 점점 떼가 느시네요.”

“떼? 지금 떼라고 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바닥의 지팡이를 주운 이현은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태연하게 가로질러 태 회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돌려세웠다.

보영은 등줄기를 곧추세웠다. 이현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내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조성하에게로 향했다.

“회장님 잘 모시고 가세요, 실장님.”

“이익……!”

“저를 미국에서 불러들이신 이유 알아요. 제 역할은 할 겁니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제 살 깎아 먹는 짓은 안 해요. 전 아버지하고는 다르니까요.”

이현은 비서실장에게 지팡이를 건넨 후, 태 회장의 어깨를 감싸 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태 회장이 코앞을 지나칠 때, 보영은 허리를 깊이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정 비서는 남아서 정리 좀 해 주세요. 사장님께서는 따로 도우미도 고용하지 않은 상태라 치울 손이 당장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아래층 사는 그녀를 그렇게 다급하게 찾은 모양이다.

조성하 비서실장이 그녀에게 지시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진회색의 데이븐포트 소파와 책꽂이 테이블,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프로젝터, 98인치는 될법한 TV, 진회색 톤으로 통일된 모던한 주방까지.

잠시간 주위를 둘러본 보영은 정신을 차리고 곧장 움직였다.

거실 겸 방, 주방, 화장실이 전부인 그녀의 숙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집은 충분히 아수라장이었다.

보영은 우선 바닥에 흩어진 각종 주간지를 탁탁 털며 주워 모았다.

혹시 깨진 접시 파편이 튀었을까 봐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잡지를 모으던 보영이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경제지가 섞여 있긴 했지만 압도적으로 야구 전문 잡지가 많았다.

“내가 할게요. 그냥 둬요.”

보영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회사에서나 직원이지, 퇴근하면 아니잖아요.”

“하지만.”

멋쩍은 얼굴로 들어온 이현이 뒷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거 좀 창피한데요. 바닥까지 보인 것 같네. 지금까지 정 비서한테 나 이미지 꽤 괜찮았을 텐데.”

이현이 난처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어느 집이나 형태만 다를 뿐, 사정은 다들 있기 마련입니다.”

보영은 적어도 겉으로는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도저 같은 면은 있어도 사업을 키운 만큼 시원시원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

그녀가 가지고 있던 태훈 회장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났다.

“정 비서도 뭔가 사정이 있나 봐요?”

“없지는 않습니다.”

보영은 가능한 이현이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일이 민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뭔지 물어봐도 돼요?”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기 위해 몸을 숙인 보영이 입가를 슬쩍 휘었다.

“저한테는 대단한 일이지만, 사장님한테는 뉴스거리도 되지 못할 겁니다.”

그녀의 대답에 이현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는 조금 편하게 풀어졌다.

더불어 장난스런 기색으로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음, 회장님.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 봤죠? 세간에는 태양의 신화니, 직관적인 통찰이니, 뚝심이니, 죽지 않은 노장이니 이런저런 말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똥고집에, 아집에, 독선에, 욕심에, 말 안 듣는 놈은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옛날 분이에요.”

“아…….”

보영이 잡지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설명에 조금 전 보았던 태훈 회장의 모습이 찰떡같이 겹쳐졌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굉장히 다혈질이시기도 하고요. 불도저 같은 분이고 그래서 이 나이를 먹어서도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혼나고 앉아 있죠. 사실 지금 매우 민망하고 창피해요.”

“……잊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바닥에 패대기쳐진 소파 쿠션을 줍던 보영은 확실하게 못 박았다. 상사를 불편하게 할 마음은 없었다.

“잊어버린다고요? 그냥 그거면 돼요. 정 비서의 사정.”

이현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쿠션을 가져가 소파에 올려놓았다.

“어쩔 도리 없이 나도 내가 가진 바닥 중 하나를 내보였잖아요. 정 비서도 그 민망함에 동참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이런 건 좀 치사한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묻는 물음에 보영은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제 이야기를 신파로 듣습니다. 물론 전 신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부담스러우시지 않을까요?”

“내가 왜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해요?”

“제 연봉은 이미 책정되어 있는데, 혹시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제 연봉을 더 올려 주고 싶으실까 봐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공과 사는 칼처럼 구분해서.”

농담으로 넘기려 했으나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정 비서는 안쓰럽게 여겨지는 게 싫어요?”

보영은 적잖이 놀랐다. 그의 짧은 말이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녀가 바닥을 보인 기분이었다.

동정이란 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날카로운 송곳이 되기도 했다.

“……그럴 리가요. 사실은 다른 누구에게도 있을 법한 사연입니다. 제가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에이. 우리 아버지는 내가 열네 살 때 돌아가셨는데.”

“엄마는 오랜 기간 투병 중이시고요.”

“엄마도 돌아가셨어요. 내가 중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에. 연달아 부모님을 모두 잃은 셈이죠.”

“의지할 일가친척 하나 없습니다.”

“일가친척은 많지만 상부상조하는 가풍은 아니라.”

일일이 되받아치는 이현의 말이 가관이라 보영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외람되지만, 혹시 지금 불행 배틀이라도 하시자는 겁니까?”

“그렇게 되나요?”

보영은 장난기가 잔뜩 묻은 이현의 얼굴을 빤히 보다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이거엔 못 이기실 것 같습니다.”

“이거?”

“빚더미에 앉아 있습니다.”

이현이 허를 찔린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앞으로 또 얼마만큼의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고요.”

“음, 사채라도 쓸 계획이에요?”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뇨.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흙수저 물고 태어나 서울에서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라도 마련하고, 노후 준비하고, 소소한 취미 생활 영위하다가 혹시나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죽을 때 남기는 건 빚뿐이 아닐까 합니다.”

이현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되물었다.

“정 비서한테는 신파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게는 신파 아닙니다. 목적의식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있어 꽤 큰 원동력이 되거든요. 그리고 그 목표를 하나씩 완수해 가는 건 꽤 큰 성취감을 주거든요. 도장 깨기 같아서요.”

그녀가 당차게 대답하자, 이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곤 물었다.

“내가 졌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 할래요?”

“네?”

“비서라는 건 내 스케줄을 관리하고, 업무를 보좌해 주는 일 아니에요? 가사 도우미가 아니잖아요. 아니면 9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긴 했어도 고양이, 보러 갈까요?”

보영은 바지 뒷주머니에 대충 찔러 놓았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출장 가시잖아요. 무리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나 체력 좋아요. 무리 아닌데. 갈까요?”

보영이 채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이현이 고갯짓하곤 현관을 나섰다.

“사장님?”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요. 어제 갓 태어난 그 고양이 새끼들 보면.”

“하지만.”

“혼나서 기죽은 어린애한테 사탕 하나 물려 준다고 생각해도 좋고.”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배려라는 이유로 그를 집에 머물게 하는 것도 올바른 보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정할 게 있었다. 그는 전혀 기죽어 보이지 않았다.

* * *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보영은 운전석 앞에 선 이현에게 재빠르게 말했다.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상사가 모는 차에 타는 것만큼 불편한 게 없었다.

“그래요?”

이현이 다소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차 키를 내밀었다. 보영은 차 키를 받은 후 차체를 돌아 뒷좌석 문을 열고 이현을 보았다.

“타라고요?”

“네, 타십시오.”

한동안 그녀를 빤히 보던 이현은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가 열어 준 뒷좌석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랐다. 보영 역시 신속하게 운전석에 올랐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막 시동을 걸던 보영이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어딘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덧붙였다.

“이 차, 법인이 아니라 내 개인차라서 운전자 등록을 나 한정으로 했는데. 혹시 사고라도 나면…….”

말끝을 흐리더니 씨익 웃었다.

앞에서 미소 짓는 그림 같은 얼굴에 심장이 철렁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 차가 국산 차이기는 해도 꽤나 고가의 신차라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보영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운전 좋아하십니까?”

“좋아해요.”

이현이 웃으며 대답하곤 조수석 문을 열어 내렸다.

보영은 낭패 어린 얼굴로 운전석에서 내렸다.

“운전자 범위를 넓히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 밑에서 오래 일할 거예요?”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그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타요.”

보영은 일단 차체를 돌아 조수석에 올랐다.

“혹시 목마르시면 편의점에서 음료라도 사 올까요?”

“음료?”

“X레X로 사 올까요?”

그녀가 특정 음료를 묻자, 이현이 그녀를 힐끔 보았다.

“음료는 괜찮아요. 그보다 내가 그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실장님께서 준 자료를 외웠습니다. 혹시 목이 마르실까 해서요.”

“아. 그랬지. 자료. 깜빡했네. 비서실에서는 나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죠?”

“외적인 부분은요. 직접적으로 부딪쳐서 알아 가야 할 부분이 더 많죠. 자료는 자료일 뿐이고요.”

“그런가? 나는 정 비서에 대한 건 잘 모르는데. 뭔가 불공평하네요.”

“제가 사장님에 대해 많이 알아야 사장님 일을 보다 수월하게 도울 수 있어요.”

“가만 보면 정 비서, 사람 마음 편하게 하는 데 재주 있어. 알아요?”

“그런가요?”

“언제, 어느 때든 정말 내가 잘한 것처럼 칭찬해서 자존감 높여 줘요. 지난 회의에서도 느꼈지만 내 편이라는 믿음을 줘요. 난 그런 데는 재주가 없어서.”

이현이 입매를 둥글게 휘었다.

“그런 점도 비서로서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저도 모르게 멍하게 이현을 보던 보영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기습당하듯 들어 버린 칭찬에 가슴 언저리가 까닭 없이 달구어졌다.

정말이지, 태이현은 존재 자체가 사기였다.

이렇게까지 완벽한 남자가 있을 수 있을까.

못 먹는 감이라도 이성 따윈 내려놓고 한 번쯤은 푹 찔러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 * *

“한번 안아 봐도 됩니까?”

이현이 수의사의 손에서 꼬물거리는 아기 고양이를 받아 안았다.

그러고는 눈가 가득 웃음 지으며 조심스레 고양이를 어루만졌다.

“이거 봐요. 눈 감는 거. 너무 귀엽지 않아요?”

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그녀에게 동의를 구한다.

「손이 따뜻하네? 무서운 사람은 아닌가?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네.」

아기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갸르릉 울었다.

「산전까지 물 줬으니까 내 새끼, 그렇게 만져 대도 봐준다. 성질내고 싶어도 기운이 없어. 에휴. 얘들을 다 어떻게 먹여 살린담?」

보영은 넓은 케이지 안에서 기운 없이 중얼거리는 어미 고양이를 보다 앞에 몸을 쪼그려 앉았다.

“네가 괜찮으면 선생님께 부탁해서 네 새끼들을 분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분양? 다른 집에 보낸다고? 내 새끼들을? 말도 안 돼! 인간들이 얼마나 못됐는데……! 나만 보면 겁줘서 쫓아내고, 발로 차고……!」

“좋은 사람도 있어. 너한테 밥을 준 우리 사장님처럼. 좋은 곳에 분양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할게.”

「……뭐야? 왜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길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뭐야. 설득하는 거예요? 어미 고양이를?”

보영이 고개를 돌렸다. 새끼 고양이를 안은 이현이 상체를 숙여 어미 고양이를 보았다.

“어미한테 새끼들을 데리고 길에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 물어보고 싶다고 해서 진짜 물어보는 거예요?”

“네. 혹시 대답을 해 줄까 봐서요.”

보영이 어색하지 않게 넘기자 어미 고양이가 야옹 했다.

「내 새끼들이야. 내가 키워야…….」

“이야, 진짜 대답을 하네? 좋다는 걸까요?”

보영은 다소 슬퍼 보이는 어미 고양이를 물끄러미 보다 대답했다.

“글쎄요. 고민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진짜 내 말을 듣나? 너 뭐니? 어떻게?」

“잘 생각해 봐. 매일 배불리 먹고, 깨끗한 물 마시고, 아프면 병원 가고…… 네 새끼들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거니까.”

이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보았다.

설득하듯 조곤조곤 말하던 보영은 움찔하며 머리를 뒤로 뺐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이현이 문득 씨익 웃었다.

“이 고양이가 정말로 말귀를 알아들었으면 좋겠네요.”

이현이 안고 있던 고양이의 발로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듯 툭툭, 쳤다.

“야옹!”

그 몸짓이 무척 귀여워 보영은 낮게 웃었다. 그러다 이현과 또 눈이 마주쳤다.

보영은 급급하게 눈을 돌렸다. 그녀를 보는 이현의 눈에 어린 온기에 가슴께가 자꾸만 화끈거렸다.

* * *

“바로 정리해 드릴게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엘리베이터에 오른 보영이 5층을 누르고 이현에게 말했다.

“뭘요?”

“쉬셔야 하는데 집이 너무 어지러우니까요.”

“정 비서는 안 쉬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나 청소 잘해요.”

“저도 청소 잘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사장님께서 업무를 보시는 데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게 제 몫인걸요.”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보영은 한발 앞서 내렸다.

“10시가 다 됐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보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현이 501호 앞으로 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지그시 보고 있을 뿐,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사장님?”

보영이 걸음을 떼려다 다시 발을 붙이고 섰다.

하지만 이현은 어딘가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 비서, 직업의식이 투철한 건 좋은데 내 생각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네?”

“지금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에요. 내가 몇 살인지는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올해 서른넷이시지 않습니까?”

“맞아요. 서른넷의 성인 남자죠.”

보영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저 집은 그 서른넷의 성인 남자가 혼자 사는 집이에요. 그리고 정 비서는 부하 직원이기 이전에 여자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나쁜 놈이면 어떡하려고 이 야심한 시간에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겠다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네?”

보영은 그제야 이현의 태도를 이해했다. 하지만 어이가 없기도 했다.

“사장님이 남자기는 하지만, 직장 상사이십니다. 나쁜…… 분도 아니시고요.”

“나쁜 놈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해요?”

“그야…… 제가 본 바로는 아닙니다.”

말하다가 보영은 피식 웃었다.

지난 며칠간 이현이 보인 태도로 그가 어떤 인품을 지닌 사람인지는 막연하게 알아차렸다.

“모르죠. 호감 가는 여자한테는 나쁜 놈이 될 수도 있어요.”

‘호감 가는 여자……?’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에 보영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리는 그녀를 두고 이현은 말을 이었다.

“혹시 알아요? 이성을 잃을지. 그러면 나쁜 놈 되는 건 한순간이고. 나쁜 놈과 아닌 놈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네?”

“그러니까 정 비서는 집에 가서 쉬어요. 내 집에는 나 혼자 들어갈 겁니다.”

보영은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싶어 이현의 잘난 얼굴을 멀거니 보았다.

그는 그녀의 옆으로 몸을 숙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4층 버튼을 눌러 준 이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잘 자요.”

문이 닫혔다. 보영은 멍청하게 눈꺼풀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방금 뭐라 그랬더라……?’

그냥 눈을 뜬 채로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모르죠. 호감 가는 여자한테는 나쁜 놈이 될 수도 있어요.〉

그건 꼭 그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투로 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보영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자신에게 망상증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에이, 말도 안 돼.”

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저 그녀에게 청소를 시키기가 미안해 토 달지 못할 핑계를 댄 것일 테다.

‘그렇겠지. 말이 안 되잖아.’

보영은 다시 속으로 곱씹었다.

한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왜인지 얼굴로는 열이 몰렸다.

“후우.”

보영은 냉장고로 가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봄이 끝물에 드니, 날이 슬슬 더워지는가 보았다.

* * *

[사장님 집에 태훈 회장님이 다녀가셨어요. 앞으로의 호텔 운영 방침 때문에 분위기가 팽팽했었습니다. 직후 사장님과 고양이를 입원시킨 병원에.]

침대에 엎드려 문자를 입력하던 보영이 멈칫했다.

매일 ‘S’에게 이현의 일과를 보고했고, 이튿날 이어질 스케줄도 보고했다.

〈그런 점도 비서로서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어떤 꿍꿍이도 없이 올곧아 보였던 이현의 웃음이 떠올랐다.

보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문자를 지우고 다시 타이핑했다.

[회사에는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슬슬 알려 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제가 태이현 사장님 비서가 되어 해야 할 일이 뭔가요?]

‘S’는 사전에 이 일로 그녀의 인생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제 코가 석 자라 이 일의 정확한 목적도, 도달 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시작해 버렸다.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후우.”

보영은 일단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신이 돌아왔다.

[지금처럼 적응하며 태이현 사장과의 거리를 좁히세요.]

‘아마 해가 되면 해가 됐지, 득이 될 일은 아니겠지……?’

손톱을 세워 휴대폰 액정을 긁어내리는 사이,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특이 사항이 있으면 지금처럼 보고하십시오.]

보영은 손톱으로 액정을 탁탁, 두드렸다.

동일에게 ‘S’가 누구인지 캐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다.

손을 씻었다고는 하지만 그 바닥에서 오랜 시간 생활했던 정보력이 단칼에 죽었을 리는 없었다.

‘정말 부탁을 해 볼까……?’

생각을 잇던 보영은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말자.’

동일은 겨우 음지에서 걸어 나와 양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다시 범법적인 일에 발을 담그게 할 순 없었다. 그게 겨우 뒷조사라도.

보영은 휴대폰을 옆에 놓아두고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웠다.

면접을 봤던 날, 그녀를 구해 주었던 이현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그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치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울걱울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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