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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의심과 균열 (5/21)
  • 번외. 의심과 균열

    아름다운 남청색 머리카락과 세상을 오만하게 굽어보는 금빛 눈동자. 더없이 고귀한 얼굴을 하늘에 둔 채로, 왕홀을 들고 옥좌에 앉아 있는 그녀.

    ‘달과 복수의 신’ 셀레나.

    그녀는 무척이나 냉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신들 중에서 가장 공정한데다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는 그녀를 의지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다.

    그랬기에 이덴베르 사람들은 그녀를 제일신으로 추앙하며, 불공평한 일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셀레나의 신전으로 달려가 기도했다.

    그녀가 반드시 자신을 도와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덴베르는 이러한 속담이 있었다.

    ‘셀레나의 신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원수의 시체가 쓸려 올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믿음일지라도. 믿음은 곧 국민성이 되었다. 속담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런 말이 되기도 한다.

    ‘불의를 저지르면, 셀레나의 복수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어째서 이런 말이 생각나는 걸까. 셀레나의 신전 앞에서 그녀의 조각상을 올려다보던 한 명의 사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두침침한 하늘에선 곧 비라도 내릴 듯했다. 그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푸른색 머리카락은 무척 독특한 빛깔이었다.

    이덴베르 제국에서 흔치 않은 색상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고귀한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색상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라키아스 델 이벤데르.

    이 이덴베르 제국의 첫 번째 황자이자, 올해 막 황태자 즉위식을 치른 자이기도 했다.

    ‘……후.’

    걸어가는 동안, 그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몇 주 전, 엘미르 제국의 황태자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더불어, 첩자로 심어 두었던 엘미르 제국의 백작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라키아스에게 있어서 크나큰 손실임과 동시에 뼈아픈 실패이기도 했다. 그는 깊게 생각했다.

    ‘독살의 증거가 어디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

    엘미르 제국의 황제는 결코 만만한 성정의 사내가 아니라고 들었다. 만약 이 일이 이덴베르 제국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엘미르 제국과 이덴베르 제국 간의 사이의 가장된 평화가 깨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것조차 예상 범위기는 했지만, 아직 준비가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라키아스는 독살을 성공시킴으로써 엘미르 제국에 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여유롭게 세력을 모으고자 했다.

    명분도 간단했다. 이렇게 국내외 정세가 혼란스러운데 같은 이덴베르 제국인들끼리 싸우고 있을 틈이 없다고 말이다. 그로 인해 라키아스의 결점은 자연히 덮어졌으리라.

    후일 황제가 된 그가 후계자를 잃고 혼란에 빠진 엘미르 제국을 집어삼키는 일은 더욱더 쉬웠을 것이고.

    그는 혀를 쯧, 찼다. 그의 눈앞에는 엘미르 제국의 올해 15살이라는 황태자의 얼굴과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연결 고리를 찾았다는 것을 가정하고 움직여야겠군.’

    그는 황태자였다. 남들의 가장 위에서 남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항상 냉정하게, 가장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최선의 수를 짜내야 했다.

    라키아스는 푸른 눈을 들어 눈앞을 강렬히 쏘아보았다. 바로 자신의 앞에, 이시스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전쟁을 준비해야겠어.’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발을 머뭇거리고 있으면 늦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라키아스는 신전 깊은 곳으로 계속 들어갔다.

    셀레나의 신전 안에는 큰 기도실이 하나 있었다. 보통 때에는 다 같이 미사를 보는 곳을, 오늘은 한 사람이 독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명성에 다들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새하얀 면사포를 머리에 쓰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신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 라키아스는 그것을 어쩐지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또 여기에서 기도하고 있었구나.”

    “오라버니.”

    라키아스의 목소리에, 숙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면사포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은발과 제국에서 제일로 치는 황금색의 눈동자.

    그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어디로 보나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로 라키아스의 이복누이 마리안느였다.

    뭇 사람들에게 성녀로 추앙받는 그녀는 가끔 이렇게 수도의 본 신전에 찾아와 기도를 드리곤 했다.

    “……황궁에도 기도실이 있으니 그곳에서 기도하면 될 것을.”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셀레나 님의 자취가 좀 더 잘 느껴지는 것만 같은걸요.”

    마리안느는 천천히 눈을 감고,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녀는 눈초리를 접어 웃으며 라키아스에게 물었다.

    “오늘도 저를 보러 일부러 찾아오신 건가요?”

    “그래.”

    “어머, 감사해요.”

    마리안느는 즐거운 얼굴이었다. 이복 오라버니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이 정말 기쁜 듯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라키아스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요즘 들어 그는 이상한 상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 지금도.

    마리안느가 자신을 향해 웃어 주고 있는 지금도…….

    ‘아스 오라버니.’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것이다.

    기억 속의 목소리는 조근조근하고 따뜻했다. 특유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사람들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너무나도 마음씨가 고운, 초록 눈의 그녀를.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키아스는 문득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이상해.’

    그래, 이상한 일은 하나 더 있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 오곤 했던 것이다. 라키아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한 목소리로 마리안느가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오라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대답했지만, 라키아스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다.

    ‘아프세요?’

    자기가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은 기색을 보이면 ‘그녀’는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후회 한 점 없었는데, 이제야 조금씩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은.

    라키아스는 쓸데없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그것보다, 엘미르 제국에 대한 건 말인데.”

    곧이어 라키아스는 엘미르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건을 줄줄 이야기했다.

    그 배후에는 마리안느도 있었기 때문에, 라키아스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가 라키아스를 돕고 싶다며 먼저 자원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마리안느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저도 그 일이 실패했다고 들었어요.”

    마리안느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 안타깝네요…….”

    성녀라 불리는 그녀가 남이 죽지 않은 것에 안타까워한다. 그 아이러니에 라키아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쪽에 대단한 신관이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더불어 기껏 열심히 키워놨던 첩자까지 잡혀 죽음을 당했으니…… 손실이 너무 커.”

    라키아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여러모로 이 계획에는 무리가 많았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가 엘미르 제국에 승부수를 던진 이유는 바로 이랬다.

    ‘그녀.’

    그러니까, ‘알리사 델 이덴베르.’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그녀가 마리안느를 독살하려 해서 사형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황궁 안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와 라키아스는 동복 남매였다. 즉, 마리안느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는 의혹에서 라키아스 또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는 뜻이다.

    어머니였던 황후는 필사적으로 무죄를 주장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하기 위해 딸을 참수대에 내몬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된 라키아스는 조금 경우가 달랐다. 만인지상이라 불리우는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흠결도 없어야 한다.

    다행히 그의 남매들은 모두 라키아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큰 문제가 없는 이상 라키아스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은 한 발자국 물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그들의 이익 다툼은 마치 아귀 싸움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은근슬쩍 그 이야기를 들고 와 라키아스를 공격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법한 황자나 황녀를 지지하고자 했다.

    비단 지지하는 황족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황권이 낮을수록 귀족들이 배를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자 곤란한 라키아스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엘미르 황족 암살 시도였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국내가 혼란할 때면 그 불안함을 국외로 돌려 해소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라키아스에게 흠결이 있다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공을 세우면 된다.

    예를 들어 이시스 황태자를 죽이고 엘미르 제국을 정복해 보이는 것과 같은.

    엘미르 제국에 불만을 가진 늙은 귀족들은 아직도 많았다. 라키아스의 푸른 눈에서는 위험스러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어떠한 희생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면, 절대.

    ‘하여간, 죽어서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군.’

    라키아스는 속으로 ‘그녀’에 대해서 생각했다.

    감히 그의 소중한 동생, 마리안느를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자신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

    ‘……정말로, 질리기 짝이 없어.’

    라키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스 오라버니!’

    기억 속의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서 햇살이 부서질 때면, 마치 무지개라도 만들어 낼 것 같았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그 둘은 자주 이곳저곳 같이 다니곤 했었다. 유일한 동복 남매이기도 했기에, 그들은 꽤나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아니, 사이가 좋았던가?’

    라키아스는 새삼스레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치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와의 기억이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머리가 아파 왔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해 봤자 소용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마리안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도를 마쳤으면,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오라버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도실의 긴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라키아스는 순간 조금 흠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너무나도 차가웠던 탓이다. 그 냉기와 흰 얼굴이 어우러져서, 마치 마리안느는 밀랍인형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 있나요?”

    마리안느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아니.”

    라키아스는 애써 자신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했다.

    ‘아스 오라버니.’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기억 속의 그 손은, 무척 따뜻했던 것 같다. 라키아스는 갑자기 심장이 너무나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면서 했던 생각이,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불의를 저지르면, 셀레나의 복수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아니.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했던 것은 모두 공정한 판결이었어.’

    라키아스는 마치 동의를 구하듯 셀레나의 석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에게 대답을 내려 주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이명이 떠오른다. 그녀는 복수의 신이자 달의 신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복수를 위해 투쟁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약탈조차 망설이지 않는 냉혹함.

    그 이름은 불화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마리안느는 의미 모를 기괴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셀레나의 석상을 바라보고 있던 라키아스는 그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곧 라키아스가 고개를 돌리자, 마리안느는 환하게, 아주 아름답게 웃었다. 마치 화려한 독 나비 같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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