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아르센 로스토프
때로는 십몇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지를 무성하게 뻗으며 자라나던 이름 모를 고목과 푸른 이끼들. 거울처럼 고요한 호수에 살그머니 떨어지던 초록 이파리들.
황궁 숲 깊은 곳, 가장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작은 산책로와…….
그 가운데 말을 타고 달리던 그 애의 모습. 길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은 허리 부근에서 찰랑였고, 빛을 담은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애가 내게 달려와 내 이름을 불러 주던 때.
‘아르센!’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고, 무엇보다 행복하던 그 시절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떠올린다.
* * *
알리사 델 이덴베르가 죽었다. 내가 비탄에 잠겨 있는 걸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친구들도, 내가 삼 일째 움직이지도 먹지도 않는 모습을 보자 기어코 나를 일으키고 말았다.
저항할 기력조차 없어서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몸을 씻고, 그리고 일상생활을 해 나갔다.
사람들은 내게 이별을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이별이라서 힘든 것은 이해하겠지만, 너도 언젠가는 받아들일 것이라고. 알리사가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며칠, 몇 주, 몇 달, 심지어는 일 년이 지나도록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알리사는 죽었어야만 할까?
심지어 그녀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았기에, 제대로 된 국장조차 치러지지 않았다. 그녀를 돌보던 시녀들이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서 볕 좋은 곳에 묻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죄목은 ‘황족 살해죄’라고 했다. 황족 살해죄가 그 어떤 것보다 훨씬 엄중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안다. 그것이 평민이든, 귀족이든, 혹은 같은 황족이든 간에 말이다.
알리사는 동생인 마리안느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독을 구하고 그녀의 잔에 독을 넣었다고 했다. 유폐로도 끝날 수 있었던 죄를 일부러 사형시킨 점은, 황제가 마리안느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치밀성도 연관이 있다고 했다.
어째서 알리사가 그 애를 죽이려 했을까? 마리안느는 그 애가 조금 더 어렸을 적, 황궁에 들어온 시녀 소생의 아이였다.
나는 가끔 그 애를 볼 때마다 그저 평범한 소녀라고만 생각했기에, 주의 깊게 살펴볼 생각을 못 했다.
의문들은 내 안에 깊게 자리 잡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일상 속에서 그 의문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와 알리사는 어린 시절부터의 소꿉친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귀족 자제들과 황자, 황녀가 만나 노는 궁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에 흥미가 없어서 구석에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수준은 이미 웬만한 학자들을 능가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래 봐야 어린애들에 불과한 귀족 꼬마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때, 그녀가 다가왔다.
‘물리학과 마법역학의 상관관계?’
나이가 어려 보였는데, 그 애는 또박또박 책 표지의 제목을 읽었다. 하지만 아직 내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했으므로 나는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다.
‘웅…….’
호기롭게 다가온 것치고는, 그 아이는 소심한 성격인 듯했다. 쭈뼛거리면서 내 근처를 돌며 말을 걸려곤 했지만 도무지 말을 걸지 못했다. 책을 읽는데 자꾸 얼쩡거리는 게 짜증 나서 책을 탁 덮어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신지.’
‘아…….’
그 아이는 내가 책을 덮은 게 무척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보통 나와 대화하는 어린아이들은 울거나, 어려워하거나, 피하거나 셋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너도 친구가 없는 거지?’
그녀는 소곤소곤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마 그녀는 내가 친구가 없어서 책을 읽고 있는 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나는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었다. 필요가 없으니까. 재수 없는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진지했다.
‘나랑 친구 하자. 왜냐면 나도 친구가 없거든…….’
그 아이는 쓸쓸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내 아이를 빠르게 내쳐야 할지 부드럽게 내쳐야 할지 고민했다. 빠르게 내쳐 시끄럽게 울면 귀찮아질 것 같았지만, 부드럽게 내치면 말을 못 알아듣고 또 달라붙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윽고 ‘필요 없어’라고 말하기 직전, 한 아이가 다가왔다.
‘리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응? 오라버니.’
다가온 아이는 푸른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이 방에서도 무척 귀한 색이었고, 황궁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제국의 제 1황자, 라키아스 델 이덴베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럼 저쪽은 그 황녀겠군.’
새삼 나는 내 앞에 있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키아스에게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황족들의 계보까지 모조리 외운 나다.
내가 감흥 없이 그를 바라보는데, 라키아스가 나를 쓱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들한테 가자.’
‘……웅.’
그녀는 약간 망설이는 듯싶었지만, 오라버니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다른 한쪽 손으로 나를 향해 흔들며 말했다.
‘안녕, 다음에 만날 땐 우리 친구하는 거야.’
‘…….’
‘내 이름은 알리사야. 리스라고 불러도 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헤헤, 웃었다. 이미 이름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떠나가면서 보여 준 미소가 괜스레 기억에 남았다. 불쑥 의문이 들었다.
‘……내 이름은 알고 있을까?’
훗날,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별로였지만 왠지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져 갔다.
그녀의 오라비인 라키아스는 내가 제 동생과 친해지는 게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뻔뻔하게 계속 그녀의 궁을 드나들곤 했다.
같이 숲을 뛰어다니고, 책을 읽고, 놀이를 하면서 우리 둘은 자라났다. 어쩌면 나와 그 애는 더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그 애가 정말 좋았으니까.
그 애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아르센, 아르센. 괜찮으냐?”
나는 두 눈을 떴다. 어느새 황궁 숲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는 연구실의 구석에 누워 있었다. 나의 스승인 델리움이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스승님.”
나는 눈을 여러 번 떴다 감았다. 눈이 뻑뻑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잠깐 잠이 든 모양입니다.”
“잠이 들기는!”
갑작스레 그가 호통하기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외치고 있었다.
“반나절을 기절해 있었다. 몸은 챙겨 가면서 하란 말이다. 알겠느냐?”
“……기절해 있었다고요.”
어쩐지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는 것 같더라니만.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몇 개월 전, 엘미르 제국에서 열린 1황녀의 생일 연회에 다녀온 이후로 나는 알리사의 죽음에 관해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히 실마리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을 잡아내어 그녀의 누명을 벗겨 낼 수만 있다면…….
한때는 이덴베르의 황족들은 정말 사이가 좋았다. 적어도 황자와 황녀들 간의 사이는 그랬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난 이후로 점차 냉랭해지다 못해 거의 교류가 없다시피 한 그들이었다.
그게 안타깝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차피 알리사의 죽음에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알리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캐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하지만 마탑의 최연소 학자로서 모자랄 것도, 부족할 것도 없던 나에게도 이번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것은 알리사가 황족인 탓에, 자료들이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자료들을 뒤지다가 며칠 좀 못 먹고 못 잔 게 원인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스승님은 나에게 잔소리를 계속해 대었다. 몸을 챙겨 가면서 하라는 류의 잔소리가 대부분이었고, 나는 그것을 대충대충 넘겼다.
그때, 스승님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스승님!”
그에 나는 깜짝 놀라 그분을 잡았다.
“감기라도 든 거 아니십니까?”
“이 녀석아. 내 나이가 되면 감기가 아니라 노화 때문이다. 노화.”
스승님의 투덜거림에 나는 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억지에 어울려 주면서 같이 알리사의 죽음을 조사하고 계시지만, 이미 나이로는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스승님은 기침을 하던 와중에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
“됐다. 그보다 진척은 되어 가고 있느냐?”
그 말에 나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직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 내 표정에서 이미 내 말을 알아차린 듯 스승님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너무 초조해하지 말거라.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스승님.”
“나는 걱정되는구나. 네가 너를 잃어버리고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을까…….”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꼭 그러길 바란다.”
스승님은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에 문득 울컥해질 뻔했으나, 나는 애써 울음을 참아 넘겼다. 하지만 스승님께 죄송하게도, 나는 결국 그의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복수심, 그것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알리사에 대한 황족들의 반응을 조사해 나갔다. 그리고 나는 황족들의 기억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황궁에서 라키아스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황궁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를 만난 나는 고개를 숙였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그를 증오하는 마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조사를 하며 그가 먼저 알리사의 사형을 주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동생과 친했던 그였는데.’
어째서 그는 한순간에 태도를 바꿔 버린 것일까. 고작 마리안느라는 시녀 소생의 황녀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라키아스의 마음속에서 갑작스럽게 마리안느가 애틋해지기라도 한 걸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문득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로스토프가의 후계자이군.”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때의 라키아스는 아직 황태자였다. 조만간 황제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폐위된 황녀가 그의 뒤를 잡았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말이 나오고 있는 편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말을 걸고 말았다.
“……폐위된 황녀 전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 말에 그는 단번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대는 그런 기분 나쁜 날을 세고 있나?”
“……아무리 폐위되었다곤 하나, 황녀는 황녀였습니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황태자 전하의 친동생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내 평생의 오점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친했던 두 사람인데, 그저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냉정히 버려 버리고서 ‘오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게 황족으로서의 마음가짐이라면 정말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두 분은 진심으로 친하시지 않았습니까.”
“뭐라고?”
그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내가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사과를 하려던 찰나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그녀와 친했었다고?”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명예롭지 못하게 죽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단 한 번도 친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황태자 전하?”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머리가 아프군.”
내가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등장한 것은.
“여기 계셨군요. 아스 오라버니.”
복도의 저편에서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신관들이 입는 흰옷을 입고 은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보기만 해도 성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그녀는 황금색 눈을 깜빡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계셨던가요?”
그 말에 나는 가감 없이 말했다. 라키아스의 반응에 이미 의문을 품은 터라, 그녀의 반응도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폐위된 황녀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런가요?”
그녀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은 마치 금속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성녀라고 추앙받는 그녀일진대, 어째서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응? 잠깐만.’
나는 내가 한 생각에 의아해지고 말았다. 언제부터 마리안느가 성녀로서 추앙받았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아파 올 뿐이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녀가 직접 다가와 내 몸에 손을 대었다.
그에 흠칫 놀라자, 그녀가 상냥하게 웃었다.
“몸이 안 좋은 모양이에요.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
내가 그녀를 경계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살짝 멀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이 붉은색으로 빛나는 것을 문득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하지만 그 찰나는 너무 짧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본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에 잠깐 비친 것이었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는 아스 오라버니와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그래, 가자꾸나. 마리.”
마리안느는 라키아스의 손을 잡고 복도 너머로 총총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렇게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나는 그 둘을 만나고 난 뒤, 새로운 가능성에 착수했다.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조사하던 것에서, 이제는 황족들의 생활 중심으로 그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리사가 죽은 이후로도 그들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눈물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을 만큼, 알리사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황궁 안에서 빛나는 존재였다. 사랑스러웠고, 누구라도 그녀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오랜 조사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알리사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조종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저주 중 하나였다.
이제는 거의 소실되고 만 흑마법 중의 하나.
‘하지만,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지?’
용의자는 다양했다. 알리사의 주변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범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자나 황녀가 될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시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범인을 단 한 명으로 압축했다.
‘마리안느 델 이덴베르.’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 내 모든 감이 그녀라고 외치고 있었다. 알리사에게 누명을 씌우고 가장 득을 보았던 것이 바로 마리안느이기에, 만약 범인이 마리안느라면 모든 가능성이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아무리 용의자가 다양한다고 한들 알리사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잠기고 말았다. 내가 그녀를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누군가가 흰 페인트칠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아이의 모습이 내 안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황족들도 이러한 과정을 겪었던 것일까? 나는 마법의 힘을 써서 필사적으로 그 저주를 방어하려고 애썼다. 모든 것을 잃어도,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즈음에, 나는 슬픈 죽음을 하나 더 맞이해야 했다.
“……스승님.”
“……아르, 센.”
그는 몇 년 사이에 무척이나 허약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에 나를 위해서 계속해서 무리하고 계셨으니까 말이다.
나는 내 손을 세게 잡았다. 주먹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지만, 정말 피가 흐르는 것 같은 것은 찢긴 마음이었다.
“아르센…….”
이대로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나 버리는 걸까?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스승님을 잃고…….
소중한 사람들은 아무도 지키지 못한 채로?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스승님이 주름진 손으로 내 뺨을 잡았다.
“아르센…… 내가 늘 말했었지.”
“……예, 스승님.”
“복수심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라고.”
“…….”
나는 과연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이제는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구나…….”
그 말에 나는 문득 외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를 잊고서 도저히 어떤 식으로 행복해져야 할지…….”
스승님은 나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시간이 허락되어 그것을 네 옆에서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승님.”
“네 마음대로 해 보거라, 아르센.”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항상 네 편이었단다.”
“스승님.”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지 마세요.”
하지만 스승님의 호흡은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느다래져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아르센…….”
“예…….”
그의 얼굴에는 슬며시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웃을 수 있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다음 생에도 너와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장례식을 준비했다.
머릿속에서는 그의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스승님과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으리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안느를 심판하는 일.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그것만이 오직 절실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모든 황족에게 비호받고, 성녀로서 추앙받는 그녀를 심판하기 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증거와 그 심판을 위한 입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알리사와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동시에, 전쟁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공작 위를 물려받았다. 그저, 이미 죽어 버린 비운의 황녀 알리사 델 이덴베르를 위해서.
그녀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을 듯했다.
그래,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우고, 심지어는 전쟁을 일으키는 일일지라도.
점점 사교계와 모든 귀족 사회에서 나의 이름이 높아져 갔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내가 드디어 멀쩡한 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믿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점차 냉소에 젖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피를 보아서였을까, 혹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내 안에 잠들어 있어서였을까.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점차 내 안에 고립되어 갔다.
복수를 시작하려 했던 동기도 이제는 까마득했다. 그게 기억이 잊혀 가는 탓인지, 아니면 내가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항상 머릿속에서 꺼내 보려 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억은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나 자신의 상상일 뿐, 어쩌면 그때 그 순간과 아주 많이 다를지도 몰랐다.
알리사는 손을 뻗고 있었던가? 상냥하게 웃고 있었던가? 말을 달리면서,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던가?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그 아이의 눈빛.
빛을 머금은 듯이 은은하게 빛나던 그 아이의 다정한 눈.
기억이 사라져도 그때 느꼈던 것들은 남아 있었다. 언젠가 그것마저 바래진다고 해도 좋았다.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이므로.
* * *
“총사령관님.”
잠깐 눈을 감고 있었던 나는 부하의 말에 눈을 떴다. 그는 공손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곧 정상 회담이 시작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을 챙겨 입었다. 리오텐을 치기 위한 전쟁에서 나는 총사령관으로 출전했다. 어려울 것 없이 리오텐을 무찌르던 우리에게 꽤 골치 아픈 적이 나타난 것은 며칠 전이었다.
엘미르의 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
그녀는 성녀로서 추앙받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치료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리오텐과의 정상 회담에 참여하겠다고 말해 왔다.
무시할 수도 있었던 것을 굳이 받아들인 것은, 글쎄, 변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미르의 황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옛날 그녀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엘미르에 사절단으로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자신을 보면서 울음을 터뜨렸었지. 나중에 시녀들에게 듣기로는 낯선 이를 보아도 거의 울지 않는 조용하고 순한 아기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아주 먼 얘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시간뿐만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변해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막사를 나서니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그러고 보니, 엘미르의 황녀도 비슷한 눈 색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잠시간, 나는 감상에 빠져들었다.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나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알리사도, 스승님도. 남은 나는 그저 그들을 추억할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나도 만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환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아주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래서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는 문득 알리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미 희미해져 버린 얼굴이다. 옆에서 부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이덴베르 제국의 로스토프 공작, 아르센이니까.
이제는 엘미르의 황녀, 아이샤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