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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루미나스 (11/21)
  • 외전 3. 루미나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어느 하급 정령이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한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그게 거짓인가, 진실인가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거짓말이라곤 할 줄 몰랐으니까.

    놀라운 이야기긴 했지만 구태여 그 인간을 찾아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인간이라도, 어차피 백 년도 되지 않아 죽을 테니.

    삶이란 지루함의 영원한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죽지 못한 채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정령왕들은 그 이야기에 꽤 흥미를 가진 것 같았다. 정령들의 원소는 물, 불, 바람, 땅, 그리고 빛과 어둠으로 나뉜다. 그들이 그 인간에 대해서 토론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 인간이 꽤 재미있는 탐구거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아주 잠깐의 여흥일지라도 그 인간에게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 것은.

    * * *

    인간은 아주 작고, 또 작았다. 보통 이것을 아기라고 부르던가.

    인간이란 종족에 관심이 없어서 꽤 오랜 시간 까먹고 있었던 단어였다.

    ‘정말 작군.’

    그렇게 생각하며 그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잘 자고 있는 것 같던 아기가 눈을 떴다. 그러면서 그 아기가 바라본 것은 공중에 떠 있는 자연의 정령들이었다.

    그 모습에 호기심이 더욱 생긴 것은 물론이었다. 지금까지의 정령의 역사에서, 자연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존재했던가? 적어도 그의 기억으로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아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 아기는 푸른 하늘같이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입을 열어 말했다.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이었군.

    그러자 그 아기가 나를 보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것들로도 모자라, 심지어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겁을 먹은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낯선 이를 보아 무서운 걸까? 어렴풋하게, 아기들은 경계가 심하다는 지식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그래. 그랬지.

    ‘쉿.’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나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아기였지만, 어쩐지 이 아기라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있는 아이군.’

    내가 입을 다시 열자, 그 아기의 곁에 있던 정령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 인사했다. 개중에는 나의 아이인 빛의 하급 정령도 있었다.

    ‘왕을 뵙습니다.’

    아기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아기를 조금 더 관찰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는 이미 내 존재가 벅찬 듯했다. 몸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너무 이르게 찾아온 모양이군.’

    ‘자아.’

    ‘오늘 일은 잊어도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의 힘으로 주술을 걸었다. 어차피 어린 아기이니 성인이 되어서는 기억을 못 할 게 틀림없지만, 혹시나 몰라서 행한 조치였다.

    아기는 잠을 자기 싫다는 것처럼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용은 없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짧은 첫 만남의 끝이었다.

    * * *

    나는 그 뒤로도 아기를 관찰했다. 아기는 엘미르 제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황녀라고 했다. 인간 중에서는 가장 고귀한 축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왜였을까? 이따금 아기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무척 슬픈 얼굴을 했다. 그럴 때면 근처에 있는 정령들도 그녀의 기운에 감응해서 시무룩해지곤 했다.

    얼마나 그녀의 정령 친화력이 깊은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나는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저렇게 깊은 슬픔을 느낄 일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때때로, 어른이 되면 그녀가 얼마만큼 대단한 정령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그녀에 대한 내 호기심은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어차피 그녀는 수억의 인간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그 아기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아기가 아니었다. 어린 숙녀처럼 보이는 그 아이는 눈을 반짝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색의 눈동자는 아기였을 때보다 더욱 푸르러졌고, 정령과 계약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령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처의 영지에 있던 별장이 새로 건축되었다는 소식을 하급 정령들로부터 들었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이 제국의 황녀라는 것도.

    어째서 이곳까지 올라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호위도 없이, 이 새벽에 온 것으로 보아 몰래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인간들은 정말로 빠르게 자라는군.’

    그리고, 빠르게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래간만의 호의를 베풀어 절벽에서 비틀거리는 그녀를 잡아 주고, 루디온을 빌려주었다.

    관심이 끊겼다곤 하지만, 흥미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나러 절벽 밑으로 내려가 속세에 어울리곤 했다. 이것은 분명히 변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발휘한 변덕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나는 인간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실체를 뒤집어쓰고, 신관인척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황제라는 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기도 했고, 사람들의 감정과 부딪치며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신기하고, 흥미롭고, 알 수 없는 인간.

    아이샤 드 엘미르와 춤을 추거나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이샤라는 인간은 정말 신기한 이였다. 절벽 위에 있던 자신을 어떻게 찾아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꾸었던 꿈도 이유를 모르겠다.

    아주 어렸던 시절,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무언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세월에 풍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신기한 이유는 단지 정령을 볼 수 있거나 하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의 한 부분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인간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인 줄로 알았는데 말이다.

    인간 틈에서 인간과 섞이지 않는 이상 결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던가? 그 아이를 따라 인간답게 행동해 보기 시작하니 나에게도 감정이란 것이 천천히 깃들기 시작했다. 정말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처음에는 희미하던 탐구심, 호기심을 넘어 기쁨, 우스움, 불쾌함, 즐거움, 그리고…….

    행복까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요.”

    밤하늘 너머,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아이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들의 파편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 제 마음속에서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 있어요.”

    아이샤는 자조하듯 말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 안에 어둠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더욱더 호기심을 가졌던 걸지도 모른다. 빛은 어둠이 존재할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샤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지 않았다.

    “……저.”

    그녀는 무척이나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 열심히 노력할게요. 매일같이 공부도 하고, 정령술도 갈고닦을게요.”

    “…….”

    “그, 그러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루미나스 님을 꼭 소환하고 싶어요!”

    그녀의 결심이, 내 안에서 마치 동그란 파문처럼 물결쳤다. 그래서 변덕이지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열심히 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도 정말 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변해 가고 있었다. ‘루미나스다움’ 에 대한 정의까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복도를 떠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정원은 고요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신기한 인간.’

    왠지 그녀를 볼 때면, 맞춰져 있던 조각 하나가 맞추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 마치 완전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태어나길 완벽하게 태어난 내가 이 이상 더 완전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녀와 닿으면 다른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어쩌면 이것을 인간들은 즐거움, 혹은 행복이라고 정의 내릴 것이다. 아직 잘 와닿지는 않지만 말이다.

    감정이란 정말 대단한 것 같았다. 감정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질리지도 않고 계속계속 더 알아 가고 싶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와 함께 수도에 나가기도 했다. 뚝뚝 떨어지는 여름비는 마치 물의 정령왕의 심술 같았다.

    그녀에게 향해 여름비를 멈추어 줄까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신 우산을 사 들고 와 함께 걸어가자고 말했다.

    평소 재수 없다고만 느꼈던 비가 처음으로 조금은 즐거워졌다.

    ‘아.’

    그렇다. 이미 그녀는 그의 삶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이 기분이 싫지 않다고 한다면,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름날의 모험이 무척이나 즐거웠다는 것이다.

    아이샤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도 그녀와 계속해서 함께 있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이야기다. 아직은, 그녀가 나를 소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진정한 자격은 그녀가 나를 정령왕으로서 온전히 소환할 때에 성립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라스에 내려앉았다.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었지만, 아이샤는 오늘도 고대어를 읽고, 정령술 훈련을 하느라 지쳤던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그는 아주 처음, 이곳에서 만났었다.

    그때는 정말로 작은 아기였지만 말이다. 그 아기가 자신을 이렇게 뒤흔들 줄 알았다면, 자신은 과연 순순히 그녀를 만나러 왔었을까?

    지금에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을 뿐이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때였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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