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이시스 드 엘미르 (7/21)
  • 외전 2. 이시스 드 엘미르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날을.

    그날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어둑한 하늘과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눅눅한 공기. 어의와 신관들이 다 같이 합세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늦추려고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하셨던 분이라고 들었다. 그러다가 나를 낳고 더더욱 몸이 약화되었다고도 말이다. 시종도, 유모도 모두 나의 탓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결국 최초의 원인은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그날이 가기 전에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튿날은 곡소리와 빗소리가 끊임없이 땅을 두드렸다. 어리지만 이 제국의 황자라는 이유로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슬픈 울음이 떠나가질 않는 가운데,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를 껴안고 한참을 놓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이시스 님.”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위는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

    나는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죽음이란 무얼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일곱 살의 머리에 죽음이란 너무 피상적이었고, 다만 내가 이해한 건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걸 이해하고 나서는 회의감이 들었다. 어머니가 이제 없는데, 돌아올 수 없다는데 고작 황위에 연연하는 외가의 행동이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알 수 있었다. 황궁의 유일한 적자라곤 하나 어머니인 황후를 잃어버린 나의 입지는 꽤나 불안정했다.

    이제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음 대 황후가 들어와서 혹시라도 황자를 또 낳는다면 어떻게 될지, 혹시라도 외할아버지의 공작가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어른들의 사정들은 복잡했고, 그야말로 나는 어둠 속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버지는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나 이외의 황태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전대 황후셨던 나의 어머니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나를 향한 위로였다. 그 말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했다.

    황위나 황태자나 그런 건 다 지긋지긋하기만 할 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조언했다. 황태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고.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마음을 주어선 안 된다고 말이다.

    가슴속이 답답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저 따뜻한 온기였다. 하지만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속은 공허했고, 나는 영원히 장례식의 잿빛 풍경과 빗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에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고, ‘황자’나 ‘황태자’가 아닌 ‘이시스’ 그 자체만으로 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면 천금을 주어도, 아니, 이 나의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텐데. 하지만 영영 그런 사람은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 그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아이리스 드 엘미르.’ 새로운 황후가 이 엘미르 제국의 황후로 등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 * *

    그녀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에, 붓꽃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선명한 보라색 눈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곁으로 다가가면 꽃향기가 났고, 나를 향해 말을 거는 목소리와 지어 보이는 표정은 항상 부드러웠다.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항상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하지만 나의 외할아버지, 페이튼 공작은 아이리스 황후를 경계하라고 항상 속삭였다. 사람 속은 언제나 모를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 당시의 외할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모두를 멀리해라. 아무도 믿지 마라. 자신을 갈고닦아라.

    나도 그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른들의 권력 싸움에 끼여 죽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죽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녀가 말을 걸 때면 항상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보내오는 초대장이나 연통은 모조리 무시했다.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나는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고 황후는 적대해야 할 인물이었다. 만약 그녀가 새로운 동생, 그러니까 황자라도 낳게 되는 날에는 내 자리가 위험하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어서 황태자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안달이 났었고, 죽음이 무서웠던 7살의 나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완벽해야 하며, 눈물도 웃음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설령 그게 같은 혈육이고 가족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마치 인형 같은 삶이었지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져 갔다. 황제인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 또한 나에게 어떻게 다가와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 일은 결국 찾아오고 말았다. 그녀가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드디어 황후가 회임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경사라고 말했다. 비어 있던 궁을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했다. 그곳이 황자궁이 될지, 황녀궁이 될지 내기하는 것은 시종들의 소소한 취미가 되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단장되는 궁을 보면서 외할아버지는 펄펄 뛰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지만 동시에 아이리스 황후도 무척이나 아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하는 세력이 있다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르고 말 것이었다.

    그 일련의 아수라장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저 조금의 아쉬움이었다. 왜냐하면 그 비워진 궁 근처에 있는 동산에 홀로 올라가 있는 것이 그때 나의 몇 없는 취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워진 궁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더 이상 몰래 숨어 들어갈 수 없음을 느낀 나는 마지막으로 그 동산에 안녕을 고하기 위해 올랐다.

    그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 가을 단풍이 든 곳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항상 내가 사랑하던 그대로였다. 단 한 사람, 그곳에 서 있는 존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녀 또한 날씨가 좋아서 잠깐 산책을 나온 듯싶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나를 보자 늘 그랬듯이 반가운 얼굴로 외첬다.

    “이시스 님!”

    “……아이리스 황후님.”

    그녀는 내 딱딱한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스스럼없는 모습에, 나는 무심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8살, 나는 정에 굶주린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참았다. 경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등을 돌렸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는 그녀의 정적이었다.

    피해야 마땅한 것이다.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황후님이 계시니,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앗, 이시스 님……!”

    그녀가 놀란 듯이 나를 향해 말을 거는 것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것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황제도, 황태자도, 황후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까지도 모두 다 싫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였다.

    “……시스, 이시스, 이시스 황자님!”

    그녀가 참으로 나를 끈질기게 부른다고 느낄 때였다. 다음 순간, 나는 그녀가 왜 나를 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큰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진 것이다. 거기서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으리라만, 8살의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언덕길을 빙글빙글 구르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굴렀을까, 나는 겨우겨우 멈출 수 있었다. 온몸은 생채기투성이였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든 옷은 해져 있었고, 그 사이에 피가 배어 있었다. 멈추기 위해 근처의 질긴 풀들을 한껏 쥐어 챘던 덕분에 손가락에는 풀에 베인 상처로 손은 엉망이었다.

    거기다 무릎 부근은 완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쓰라렸다.

    ‘……아프다. 엄청 다쳤구나.’

    태어나서 이렇게 크게 다쳐 본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검술 수업을 할 때에도 몇 번 넘어져 본 적은 있었지만, 언덕에서 구른 건 이번이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아이리스 황후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도 임산부여서 몸을 무척이나 소중히 여겨야 할 텐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걱정하던 나는 속으로 고개를 휘젓고 말았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마치 자기가 다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내 머리를 확인하고, 그다음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무릎의 상태를 살폈다.

    “어, 어떡해…… 이렇게 크게 다쳐서……이시스 님……”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그렁그렁, 거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왜 저렇게 나를 걱정하는 거지?’

    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물론 아프기는 무척이나 아팠다. 하지만 아픔과는 별개로 나는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무릎이 깨지면 약을 바르면 되고, 상처가 남는 대도 그깟 무릎 상처쯤 하나둘 있으면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무릎보다는 바지가 걱정이었다.

    옷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다만 이 옷을 입고 황태자 궁까지 돌아갈 때 사람들이 목격할 것이 두려워서였다.

    나는 항상 완벽하고, 완벽해야 했으니까.

    아이리스 황후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적이지 않은가? 그녀가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매몰차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피가 흐르는데……!”

    “저는 제 옷이 더 걱정되는군요.”

    냉정한 내 말에 그녀는 반쯤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어라.’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문득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내가 왜 이제까지 이 생각을 못 했지?’

    나는 항상 그녀를 밀어내고 외면할 생각만 했지, 일부러 상처를 줘서 떠나보낼 생각은 못 했다. 그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계속 걱정한다지만, 나에게는 그런 걱정 따위 필요 없다.

    ‘좋은 방법이야.’

    나는 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렇게 자신의 아픔에 둔감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인 걸 알게 되면, 그녀도 나에게 질려 떠나겠지.

    그러면 나는 마음 놓고, 그녀를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혹시라도, 내 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이치에도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때의 나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나를 향한 정을 뚝 끊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무릎 좀 다친 게 뭐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하지만, 상처가 남을 수도 있고…….”

    나는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 냈다.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화났을 거야.’

    나는 조금 신이 나기 시작했다. 내 의도대로 그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화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아팠지만.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만 하자.’

    나는 입을 열어 술술 이야기했다.

    “제가 다치든 말든 그저 내버려 두십시오. 황후님께서 신경 써 주셔 봤자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

    “게다가 임신하신 몸으로 그렇게 뛰시다니요.”

    나는 차갑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황후는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황자님.”

    ‘좋아!’

    나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은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검술 수련을 하루 종일 했던 날보다도 훨씬 더 무릎이 아팠기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로 굴복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황후님께서는 제 신경은 쓰지 마시고 자신의 할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걷는 것도 어설펐고, 피는 바짓단 아래로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그래도 걷고 또 걸었다. 이걸로 그녀를 떼어 낼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수지맞는 장사였다. 뒤에서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시스 님.”

    나는 말 없이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말이다.

    “이시스 황자님!!!”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분노를 담았다. 됐다. 이겼다. 나는 미소 지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나에게, 그녀도 이제 질렸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도, 웃음을 보여 주는 일도, 그녀에게 방해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로 된 거야.’

    외할아버지의 말을 지켰다. 그녀는 우리들의 적.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그녀와 가까워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시스!”

    순간적으로, 내 몸이 허공에 반짝 들렸다.

    “……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버리고 만 것은, 이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아이리스 황후가 나를 소중하게 안아 올렸던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겉모습으로 보았을 때 황후는 티스푼 이외의 아무것도 들지 못할 것처럼 가녀린데, 의외로 힘이 센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까지 나한테 단 한 번도 스킨십을 한 적이 없었다. 있더라도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어깨의 먼지를 털어 준다거나, 삐뚤어진 리본을 정리해 주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단 한 번도 살과 살이 맞닿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만히 계세요!”

    그리고 그녀가 나를 풀밭에 내려놓더니, 직접 무릎을 꿇고 내 무릎에 천을 동여매 주었다. 그 천은 아마도 그녀의 손수건인 모양이었다.

    비단에 잔꽃 무늬가 수놓아진 그 연보라색 손수건은 그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가 그 손수건을 열심히 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수건에서는 그녀와 비슷한 향기가 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시스 님.”

    그녀의 목소리는 피곤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가라면 누구라도 화폭에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환한 은발. 누구라도 동경할 만한 온화하고 상냥한 황후님.

    그런 그녀가 지금은 나 때문에 굉장히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에게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황태자임을 알려서 그녀를 질리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녀에게 오히려 동정심만 안겨준 모양이었다.

    ‘이 작전은 실패군.’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데, 그녀가 말을 걸었다.

    “이시스 님. 어째서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는 건가요?”

    “…….”

    차마 당신의 정을 뚝 떼어 버리기 위함이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저는, 당신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자님이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데. 제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인데. 왜 신경도 쓰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요.”

    나는 새삼 찔려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그녀는 말을 계속 이었다.

    “제가 당신의 친어머니가 아니어서?”

    그 말에는 물기마저 서려 있었다. 나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가 그녀를 거부하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만 가요.”

    그녀는 내가 머뭇거리는데도 끝끝내 나를 내 궁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말은 이랬다.

    “이시스 님.”

    그녀의 진지한 얼굴에 나는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황자님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다시 얘기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스스로에게 무심하지 말아 주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슬픈 얼굴로 떠나갔다. 그 뒤로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더 이상 동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나는 가끔 그녀가 준 손수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과연 나의 적일까?

    * * *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머지않아 나의 황태자 즉위식을 거행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아이리스 황후의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내 위치를 단단하게 해 주려는 것이겠지.

    감사했지만, 마음속 깊이 와닿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앞에서는 기쁜 척, 착한 아들인 척 위장했다. 그런 나를 그는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해라.”

    “예.”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를 대할 때면 항상 아버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드디어 내가 황태자가 된다고 한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이랬다.

    ‘외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구나.’

    그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고작 그것뿐인가?’

    스스로가 한 생각에 나 자신도 놀라고 말았다. 그저 외할아버지가 기뻐할 뿐인 황태자 즉위식.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영영 외할아버지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복도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말았다. 푸른 하늘 너머로는 흰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였다.

    ‘……날아가고 싶다.’

    이 황궁은 너무나도 답답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란 하나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시스 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곳에는 아이리스 황후가 서 있었다.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동산의 일 이후로 그녀를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조금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점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녀의 배는 볼록하게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그것은 그녀의 배에 나의 동생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리스 황후님.”

    내 건조한 목소리에도 그녀는 뭐가 좋은지 생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

    “아, 이제는 황태자 전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비꼬는 걸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순수한 웃음만이 가득했다.

    “축하드려요. 저도 폐하에게 들었답니다. 황태자가 되신다는 것을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축하 인사는 낯설기만 했다. 그야, 그녀가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축하해 주리라고는 전혀, 그야말로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딜 가시던 길이셨나요?”

    “……아.”

    나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어디로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서 있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으시다면, 혹시 제 궁에 와서 차를 들지 않으시겠어요?”

    그녀의 제안은 따뜻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나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녀의 궁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들이게 되었다.

    * * *

    그녀의 궁은 무척이나 그녀다웠다. 뭐랄까, 한쪽에 놓여 있는 뜨개 용품도, 싱싱한 생화나 포근한 아기 이불 같은 것들이 모두 모여서 ‘아이리스 황후’라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접 나에게 허브차를 따라 주었다. 그 향기로운 향이 꽤 괜찮다고 무심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사실은, 이시스 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었답니다.”

    이 낯선 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던 나는 그 말을 뒤늦게 듣게 되었다.

    “……네?”

    나에게 그녀가 부탁할 일이라면, 과연 무엇일까? 순식간에 다시 몸에 긴장이 돌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의 가르침 대로였다. 낯선 곳에 와서는 항상 경계할 것.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나의 경계를 모조리 부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동생이 무사히 잘 태어난다면, 좋은 오라버니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라버니요?”

    “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아마 여자아이일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태어난다면 꼭 이시스 황태자 전하와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처음이었다. 나에게 ‘황태자’ 혹은 ‘황자’로서의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요구한 사람은.

    “아마 그렇게 되면, 이시스 님도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나는 얼굴을 확 붉히고 말았다. 내가 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 어쩐지 창피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황후는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 듯했다.

    “어려운 부탁이었을까요?”

    황후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

    “……아니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다시 웃었다.

    * * *

    어디로도 갈 곳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궁은 너무나도 포근했다.

    궁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오라버니’라는 역할을 주었다.

    나는 점점 그녀의 궁에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갈 때마다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를 보는 것도, 손을 대고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모두 경이로웠고, 행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 책봉식이 선포되었다. 아버지께서는 한 달간이나 연회를 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를 찾아온 외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신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의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가만히 말을 이었다.

    “외할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이시스 님?”

    그는 아마 이제 내가 황태자가 되어 아무런 거칠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나는 오늘 저녁에 황태자가 되는 예식을 치르기 위해 흰 정장에 황금색 금줄을 두른 예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반쯤 짐작하고 있었다. 분명 그가 나에게 크게 실망하리라. 하지만 실망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이 말이 꼭 하고 싶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이제껏 줄곧 해 오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저는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말에, 그의 얼굴이 놀랍도록 굳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예?”

    “단 한 번도.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황태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이, 이시스 님.”

    “그런데도 외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저에게 그 역할을 강요하셨지요.”

    나는 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게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에게 내 속내를 말한 것이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들이 이용할 패가 되기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괜찮아.’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용기 내어 말했으니까, 괜찮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들은 것은 뜻밖의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시스 님께서 황태자 자리에 크게 미련이 없으셨다는 사실을.”

    “……!!”

    나는 그 순간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을 알면서, 어째서 나를 그렇게 조종하려 했단 말인가. 어째서 나를 오랫동안, 원하지도 않는 정치 싸움 속에 내버려뒀던 것인가.

    내가 그에게 화를 내려 했을 때, 그가 입을 먼저 열었다.

    “이시스 님께는 변명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절박했습니다.”

    절박했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 아이…… 그러니까 테티스가 일찍 떠나 버리고…….”

    말을 잇는 외할아버지의 얼굴은 텅 비어 보였다. 테티스, 나의 어머니의 이름을 꺼내는 그의 얼굴은 왜 그토록 힘겨워 보였을까.

    “그 아이가 남긴 것은 황태자 전하 혼자뿐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그의 갈색 머리카락에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나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도 좀 더 많이 웃고, 행복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오직 전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이 늙은이의 욕심이었던 것 같군요.”

    “…….”

    그는 한참 동안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시스 님의 초록색 눈은 테티스의 눈을 쏙 빼다 박았지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다시는 이시스 님을, 테티스처럼 먼저 떠나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거짓은 없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그토록 황태자로 만들고자 했다는 그의 마음에도, 아마 거짓은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방식이 모두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께서도 틀리신 부분은 있었습니다.”

    “…….”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분이 항상 적이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아이리스 님은, 좋은 분이세요.”

    처음으로 그녀를 황후라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데, 외할아버지가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우리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의 정적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아마 궁에 계실 겁니다. 아직 식을 준비하는 중이시겠지요.”

    “…….”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응접실로부터 걸어 나왔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썼다던 황자궁, 아니. 이제는 황태자궁이 되어 버린 곳을 벗어나 정원을 건넜다.

    눈부실 정도로 강한 오후의 빛이 나를 내리쬐고 있었다. 점점 나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빨라지고, 빨라지다가, 어느새 나는 황후궁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헉, 헉…….”

    궁과의 사이는 꽤나 멀었기 때문에 땀이 조금 흘렀다. 지나가는 시종들이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나는 황태자 즉위식을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예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뛰고, 뛰어, 뛴 다음에…….

    이윽고, 그녀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이시스 황태자 전하?”

    나를 본 그녀는 매우 놀란 눈을 했다. 그녀는 볕이 잘 드는 응접실에서 잠깐 백일몽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저녁에 있을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차림새가 평소보다 훨씬 근사했다. 넓게 펼쳐지는 은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와 흰 가디건이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쩐 일로…… 아, 앉으세요. 이시스 전하.”

    나는 앉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곁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섰다.

    “……이걸…….”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몇 번이고 그녀의 궁에 왔다 갔었으면서도, 용기가 없어 그녀의 손수건을 돌려주지 못했다. 손수건을 본 그녀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이걸 돌려주려고 오신 건가요?”

    동시에, 기뻐 보이기도 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순수하게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조근조근,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잠깐 꿈을 꾸고 있었답니다.”

    “……꿈이요?”

    “네.”

    그녀는 마치 꿈을 이어 꾸는 것처럼, 눈을 감고 몽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하늘에 흰 새가 날고 있었어요. 그리고…….”

    “…….”

    “그 위에는 환한 무지개(이시스)가 걸려 있었지요.”

    눈을 뜬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서, 이 아이의 이름은 아이샤(흰 새)로 지으려고 해요.”

    “…….”

    “정말 멋진 꿈이었답니다. 아이샤와 이시스 전하, 두 분의 사이가 좋다면 좋겠…… 이, 이시스 님?!”

    어째서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그녀의 동그란 뱃속에서 새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머지않아서, 새로운 봄도 올 것이다. 비가 오던 장례식장의 풍경도, 곡소리도, 차가운 빗줄기의 감각도.

    완전히 잊히지는 않아도 언젠가는 조금씩 흐려질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은 오라버니, 황태자…… 뭐든 좋아요. 될게요.”

    “……이시스 님.”

    “그러니…….”

    나는 눈을 감았다.

    “……저의 새로운 어머니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리스 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나는 모든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나처럼. 그녀도 울고 있었다.

    “…….”

    “……네.”

    그녀가 울면서, 환하게 웃었다.

    “좋은 어머니가 될게요. 이시스 님도, 아이샤도.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할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를 천천히 껴안았다. 무척이나 따뜻했다. 곧 태어날 동생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웃고, 어떻게 움직일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황태자 즉위식이 끝나고, 그 뒤로도 나는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언제쯤 태어날까요?”

    배를 쓰다듬을 때마다 아이샤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시녀장이 웃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그렇게 기대되세요?”

    아이리스 님도 이어 말했다.

    “후후, 이시스. 그러지 않아도 몇 달 뒤에는 꼭 태어날 거예요.”

    “하지만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걸요.”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도 부려 보았다. 따뜻한 햇살에 감겨 나의 새로운 어머니, 아이리스 님과 아이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온 세상의 행복이 나를 향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어서 오렴, 소중한 내 동생.”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이 동그란 뱃속에 들어 있는 내 동생은 우리의 말을 이미 듣고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사랑한단다.”

    아이샤.

    나의 구원, 나의 천사, 하나뿐인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난 아이샤는 나를 멀리했다. 마치 내가 예전에 아이리스 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쏟아부을 사랑이라면 넘치고 넘쳤다. 그러니까, 나는 자신이 있었던 거다. 아이샤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자신이 말이다.

    “너를 지켜 줄게.”

    은빛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

    나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이샤. 너는 알까?

    나는 살짝 웃었다. 그 언제까지라도, 설령 내 목숨이 다하는 날이 있더라도.

    ―내 영광과 신념과 힘, 그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지키리라고 맹세합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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