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6/21)
  • 외전 1.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황녀 전하, 일어나셨나요?”

    유모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대었다. 어느새 또 아침이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나는 올해로 3살이 되었다.

    ‘앗, 어서 일어나야 해.’

    늘 그랬던 것처럼 또 잠투정을 하려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성대했던 지난 세 번째 생일이 지난 이후로 나는 결심한 게 있었다.

    ‘앞으로는 더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전생까지 치면 나는 이제 17살이 되었다.

    물론 내 실제 나이는 이제 겨우 36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마음만은 그렇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어른에 거의 가까워진 나이이니만큼, 더욱더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로 다짐한 것이다.

    유모가 창문을 열자, 봄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흐드러진 엘미르 꽃과 날아다니는 나비, 천국의 것처럼 달콤한 향기. 내 몸에 한껏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똑바로 걷기 위해 고심하며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 침대는 나 한 명이 눕기에는 너무나 큰 침대였으므로, 단순히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꽤 운동이었다.

    “우리 황녀 전하, 너무 대단하세요!”

    유모가 옆에서 호들갑스럽게 나를 칭찬해 주었다. 유모 딴에는 칭찬을 통해 내 자존감을 높여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건 단순히 유모뿐만이 아니었다. 시녀들도 한목소리가 되어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멋지세요, 황녀 전하!”

    “뭐든 잘해 내시고, 정말 대단하셔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일이 하루이틀도 아니니 나는 나의 길을 갔다.

    시녀들이 가져다주는 세숫물로 찰팍찰팍 세수를 하니 한층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다음은 옷을 입을 차례였다. 익숙하다는 듯이 시녀들이 옷을 가지고 왔다.

    “황녀 전하, 이제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셔야죠?”

    그러나 나는 시녀들의 말에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내가 입을래.”

    “네? 하지만 황녀 전하…….”

    “할 수 이써.”

    나는 힘차게 손을 내뻗었다. 그러곤 천천히 속치마와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오늘의 옷은 붉은 장미꽃이 수놓아진 분홍색 드레스였다. 화사한 빛깔이 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좋아. 할 수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손을 댈 때마다 드레스가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어라?’

    나는 소매에 반쯤 손을 넣었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목에다가 손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옷 안에 파묻혀서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황녀 전하.”

    옷 바깥에서 유모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실, 실수한 거야.”

    다시 한 번 도전이다. 하지만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나는 결국 옷과의 혈투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

    아기의 몸은 쉽게 지쳐 버리기 때문에, 고작 그것만으로도 나는 굉장히 피곤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유모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제가 입혀 드릴게요. 황녀 전하.”

    유모는 단번에 내 옷을 벗겨내더니, 한 번에 내 옷을 다시 입혀 주었다. 마법처럼 옷이 단정해졌다.

    나는 신기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다음 차례는 양말을 신는 순서였다.

    “앗, 그건 할 수 이쏘.”

    나는 얼른 양말을 손에 들어서 내 발에 넣었다.

    꼼지락, 꼼지락.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 손 근육이 모두 발달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훌륭하게 비단 양말을 발에 넣는 데 성공했다. 비록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스스로가 뿌듯해져서 나는 유모에게 ‘어때?’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유모는 얼른 나를 향한 칭찬에 들어갔다.

    “대단하세요. 황녀 전하!”

    “그치?”

    유모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나는 헤헤, 하고 웃고 말았다. 치장까지 마치고 간 곳은 어머니의 궁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즐기고 계셨다.

    “어머, 아이샤!”

    그러다가 나의 방문에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장아장한 발걸음으로 어머니에게 가서 폭 안겼다.

    “어머니,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저 채글 일거 보고 시퍼요.”

    하지만 마음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머니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책을?!”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네, 채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뭐니, 아이샤?”

    어머니는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왜냐하면요…….”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글자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하면, 선생님이라도 한 명 붙여 주시겠지.

    그러면 내 지루함도 많이 해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끙끙, 고민하던 나는 이내 좋은 답변을 생각해냈다.

    “저는 어른이니까여!”

    나는 당당하게, 의젓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살아온 햇수로 따지자면 엄연히 성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한 말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타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른이니까?”

    “네…….”

    나는 슬그머니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그런데 그들의 표정은 이상하다기보단, 음, 뭐랄까…….

    아, 그래. 웃음을 참는 표정처럼 보였다.

    ‘웃음을 참아?’

    저기, 저기에서 유모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설마 갑자기 아픈 건 아닐 테고…….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순간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나, 어쨌거나 지금은 3살이었지.’

    3살인 아기가 대뜸 책을 읽고 싶다고 하지 않나, 왜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저는 어른이니까여’라고 대답하다니.

    사람들이 웃겨 죽을 만도 했다. 마음속으로 계속 나는 ‘어른이니까, 어른이니까’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더니 그만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이의 몸은 이래서 불편하다. 금방 생각한 대로 말해 버리고 마니까.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머니도 웃음기가 진하게 배어 나오는 말투로 겨우겨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아이샤는 어른이니까 책을 읽고 싶은 거니?”

    “……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참고 있던 유모가 옆에서 첨언했다.

    “요즘은 뭐든 혼자 하시려고 하세요. 오늘도 양말을 혼자 신으셨는걸요.”

    “어머, 그랬어? 우리 아이샤. 뭐든 할 수 있구나?”

    아예 아기 대하는 듯한 어머니의 말투에 나는 더이상 얼굴이 붉어질 수 없을 만큼 붉어지고 말았다.

    “……돼써요, 어머니.”

    나는 결국 창피함에 못 이겨서 얼굴을 폭 가리고 말았다. 그러자 참고 있었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 귀로 들려왔다.

    ‘괜한 말을 했어.’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 *

    하지만 그래도 나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나에게 붙여진 선생을 깜짝 놀라게 함으로써, 나를 어리게만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해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자, 황녀 전하. 오늘은 ‘가, 나, 다’를 배워 볼까요?”

    내 앞에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 붙여 준 글자 선생이 있었다. 듣기로는 아동 교육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선생님이라던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나의 앞에 글자 블록을 놓아주는 선생님의 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 다, 가.”

    나는 그녀가 흩뜨려 놓은 블록의 명칭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화, 황녀 전하. 벌써 기억하셨나요?”

    “웅.”

    그렇게 말하며 나는 다른 블록들도 바라보았다. 그녀의 교구 상자 안에는 블록들이 가득했다.

    “대, 대단하세요. 황녀 전하!”

    나는 그녀의 칭찬에 으쓱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가 내 앞에 두었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펼쳐진 흰 도화지 앞에 나는 크게 적었다.

    ‘엄마.’

    엘미르어로 똑똑하게 적혀진 ‘엄마’라는 단어.

    물론 글자를 처음 적어 보는 나의 어린 손으로는 당연히 삐뚤빼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황녀 전하!”

    선생님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이어 하나씩, 하나씩 글자를 적었다.

    ‘아빠.’

    ‘개.’

    ‘집.’

    ‘이시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것들의 뜻을 모두 알고 적으신 건가요?”

    “당욘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내가 적은 단어들의 설명을 해주었다. 내 거침없는 대답에 그녀는 한참 동안 경악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던 그녀는 이내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자, 잠시 저는 황후 폐하와 함께 말씀을 나누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웅. 그래.”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거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뭐든 할 수 있다니까.’

    속이 시원했다.

    * * *

    결국, 그날은 어마어마한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정도까지 큰 소동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선생님이 호들갑을 떨며 ‘황녀 전하는 천재세요!’라고 황궁 전체에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가 글자를 쓴 스케치북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곤 심각하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심각해 보여서, 속으로 조금 후회할 즈음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의 궁에 이시스 오라버니가 방문하고 말았다.

    “아이샤, 놀러 왔어!”

    이제 12살이 된 그는 점점 키도 자라고, 검과 창술도 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버릇은 여전했다. 황태자로서 바쁜 일들도 쌓여 가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황태자 전하!”

    유모는 그런 그를 밝은 얼굴로 환영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수선한 궁 안이 조금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궁이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가 나에게 묻길래, 나는 조금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여…….”

    내가 끙끙거리고 있자 옆에서 유모가 끼어들었다.

    “이것 좀 보세요!”

    그녀가 손에 든 것은 아까 내가 글자를 썼던 스케치북이었다.

    “응? 이게 뭔데?”

    이시스 오라버니는 의아한 듯 그것을 받아 들면서도 천천히 그것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겨질 때마다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엄마, 아빠, 개, 집…….”

    “……이시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그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나를 향해 물었다.

    “……설마 이게 다 네가 쓴 거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은 엄청나게 환해지고 말았다.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끌어안고 싶어 못 배길 것 같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샤!”

    “네, 네?”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대답하자, 이시스는 내가 대견해 죽겠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 아이샤는 천재구나!!!!”

    그의 말에,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 * *

    그리고 바로 그 시각, 아이리스 황후는 아이샤에게 붙여 주었던 선생과 심각한 토의를 마친 상태였다.

    ‘……휴우.’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흥분이 가득했다. 달아오른 두 뺨은 그녀가 이 이야기에 무척 기뻐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 아이샤가, 천재라니…….”

    사실 짐작하긴 했었다. 아이샤야 뭐, 어릴 적부터 보채지도 않고, 항상 어른스럽고, 말도 잘 알아듣고, 하여간 뭐든 뛰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당연히 천재일 수밖에 없지!

    콩깍지가 잔뜩 낀 아이리스 황후는 아이샤가 천재라는 이야기를 금방 받아들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는 천재 아이샤가 대륙의 발전을 주도하는 상상도 있었다.

    “……휴.”

    그러던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천재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지? 그녀는 자신의 서재를 한 바퀴 거닐었다. 그곳에는 갖은 육아 서적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선물해 준 책도 있었지만, 아이리스 자신이 직접 산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을 한참 둘러보던 그녀는 한 권을 꺼냈다.

    ‘발달이 빠른 아이.’

    거기에서 살펴보니, 둘째의 경우는 첫째를 모방하기 위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빠른 행동 양식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이리스는 깊게 생각했다.

    ‘이시스의 모습을 보고 배운 걸까?’

    그런데 이시스의 모습을 보고 배운 거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큰일이다. 왜냐, 이시스는 9살에 곰을 때려잡은 훌륭한 무술가 아니던가. 아이샤도 나중에 이시스처럼 곰을 때려잡겠다고 나서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며 아이리스는 육아서를 한참 더 들여다보았다. 한 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을 함께 참고하면서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아이리스가 얻은 결론이란 이랬다.

    ‘어렵구나.’

    어떤 식으로 천재를 대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아이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아이샤를 교육할지.

    천재들의 감성은 유별나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이를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자신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괜찮을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이샤를 어떻게 교육시켜야 그 아이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줄 수 있을지, 그것도 걱정이었다.

    ‘일단, 지금쯤 아이샤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찾아가 봐야겠어.’

    그런 복잡한 생각을 안으면서 응접실로 향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약간 황당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푹신한 쿠션 위에는 아이샤에게 놀러 온 이시스와 아이샤가 앉아 있었다.

    아이샤는 작은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서 열심히 동화책을 읽고 있었고, 이시스는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보통은 오빠가 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게 아니던가? 당황한 아이리스는 헛기침을 했다.

    “이시스 님, 그리고 아이샤?”

    “어므니!”

    “아이리스 님!”

    두 아이는 환하게 얼굴을 밝히고 아이리스를 반겼다.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아이리스는 짐짓 웃으며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아이샤가 저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어요.”

    이시스는 엄청나게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이샤는 천재예요. 얼마나 글을 잘 읽는데요.”

    “그런가요?”

    아이리스는 애써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좀 역할이 뒤바뀌었으면 어떻단 말인가. 아이샤가 동화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인데.

    ‘기뻐해야지.’

    아이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래요, 두 사람 모두 즐겁게 놀고 있었군요.”

    “어므니, 어므니.”

    아이샤는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보여 줄까, 말까, 라는 듯이 수줍게 스케치북을 꼬옥 안고 있던 아이샤는 이내 그 스케치북을 펼쳐 보였다.

    아이샤의 손으로 삐뚤빼뚤하게 쓰인 듯한 그 스케치북 안에는 ‘어머니’라는 단어도 있었다. 아이리스는 순식간에 감동에 차오르고 말았다.

    “어머, 이건 정말…….”

    그 감동의 순간에, 이시스도 냉큼 끼어들었다.

    “저기에 제 이름도 있어요.”

    “정말이네요. 이시스.”

    그 둘의 말을 듣던 아이샤는 손을 들어 스케치북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더 적었다.

    ‘모두 사랑해요.’

    그 말에 사람들은 말문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아이샤.”

    아이리스는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

    그녀는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천재인지 아니인지 떠드는 게 아니야.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아이샤지.’

    아이샤의 교육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면, 아이샤와 함께 그 답을 찾아 나가면 된다. 책 속의 케케묵은 이야기만 보고 있어 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는 이렇게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천재를 키우는 방법은 모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 아이샤의 옆에서 그녀의 미래를 염려해주고 사랑해 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그녀는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아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샤, 오랜만에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가질까? 이시스도 함께. 우리 넷이서 말이야.”

    “조아여!”

    “저도 좋아요!”

    냉큼 둘이 대답했다. 아이리스는 무심코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 둘이 마치 귀여운 아기 새가 짹짹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다 같이 가자.”

    아이리스는 무릎을 약간 굽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폐하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무척 좋아하시겠지.’

    자신과 아이샤를 항상 더없이 사랑해 주는 분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리라.

    “스케치북도 보여 드리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네!”

    아이샤가 스케치북을 챙기는 것을 보며, 이시스가 끼어들었다.

    “저, 앞으로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응? 어째서?”

    아이리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천재인 아이샤를 지켜 주기 위해서죠!”

    이시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처럼 자신의 오른팔을 가슴에 대었다.

    “게다가, 저는 이제 어른이니까요!”

    “…….”

    다시 한 번, 정적이 흘렀다. 아이리스는 참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아이샤도 미묘한 얼굴이었다. 아이샤도 그렇고, 이시스도 그렇고. 벌써 자기가 어른이라고 주장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리스는 그런 이시스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렇지요. 우리 이시스는 어른이지요. 그럼 어른인 이시스가 동생인 아이샤를 잘 부탁해요.”

    “네!”

    이시스는 활짝 웃었다.

    “저만 믿으세요!”

    아이리스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셋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황제궁으로 향했다. 봄볕의 따뜻한 햇살이 그들에게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나도 즐거운 오후의 이야기였다.

    * * *

    ‘……흐아암.’

    퍼뜩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지금 시간은 밤이었다. 나는 내 방 속, 유모가 정리해 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던 중이었다.

    ‘나 왜 일어났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려 봤지만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갑작스레 잠이 깼나 보구나, 할 수밖에.

    잠을 한번 깼더니 정신이 말똥해졌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일을 회상했다.

    ‘잘한 걸까?’

    나는 이번 생을 잘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는 천재 소리를 들어가면서 열심히 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샤를 지켜 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던 이시스 오라버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했다.

    ‘……오늘 정말 웃겼지.’

    나는 새삼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어른이니까요!’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나는 그제야 내가 ‘저도 어른이에요!’라고 했을 때의 내 주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오늘 저녁에는 아버지와 함께 식사도 했다. 아버지는 내 스케치북을 보시고 환하게 웃으셨다. 항상 황제로서의 힘든 일에 지쳐 있는 아버지인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너무 기뻤다.

    음식들은 맛있었고, 분위기는 즐거웠고, 또…….

    이것저것 생각하던 나는 조금씩 잠이 다시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만이 아니라. 어서 정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나는 잠이 오는 것을 참으면서 어른이 되면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생각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방 안에는 아이샤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잠들고 나자, 방 안에서는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름달에 비친 백금발이 매끄럽게 빛났다. 달보다도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는 천천히 깜빡여졌다. 황궁에는 수많은 보안 시설이 있었지만, 이 사내에게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바로 그는 빛의 정령왕, 루미나스였으니까.

    그는 아이샤의 침대 가까이 와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 얼굴에는 세상 근심 따위 하나도 없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한참 지켜보던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신께서 첫새벽, 가장 심혈을 기울여 조형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이 번지자 가히 그것은 숨이 막히는 광경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아직 그녀에게는 정령의 기운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떠한 정령과도 계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루미나스는 그녀에게 꽤 흥미가 있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 동안 무뎌졌던 그에게 있어 아주 오래간만에 생겨난 ‘감정’이었다.

    ‘어른이 되는 것이 기대되는군.’

    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어린 아이샤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보름달이 둘만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동상이몽의 깊은 밤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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