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결전
시간은 흘러, 이윽고 그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맑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고, 봄이 오려는 것처럼 햇살이 퍽 따뜻했다.
전쟁을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잠시 하늘 위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오라버니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출전 준비를 하고 있는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는 나와 룬 님을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아이샤! 그리고 정령왕님께서도 오셨군요.”
룬 님을 정식으로 소환하고 난 이후, 룬 님께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내가 잠을 잘 때나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황궁에서라면 과했겠지만 지금 내가 전쟁터에 있는 만큼 룬 님이 나를 상시 지켜 주는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라버니의 옆에서 갑옷 시중을 들고 있던 시종도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나는 테이블에 있던 오라버니의 검은 투구를 들었다. 시종 대신 오라버니에게 직접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긴장되지는 않으세요?”
큰 전투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라버니의 얼굴은 산뜻했다. 그에 의아해져 묻자 오라버니가 웃으며 말했다.
“승리의 여신이 내 곁에 있는데, 긴장될 리가 없지.”
그 말에 나는 조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오라버니도 참.”
잠깐 웃던 오라버니가 이내 시종을 내보내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명백히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가 할 말을 짐작했기에 먼저 선수를 쳤다.
“미리 말해 두지만 안 돼요.”
“……하지만 아이샤.”
오라버니는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나를 설득하고 싶은 듯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번 전투에서 나 또한 오라버니와 함께 가장 선봉에 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나를 뜯어말렸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뒤에 숨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 곁에는 룬 님이 계실 것이다. 아무리 오라버니가 나를 말리려 한다고 해도 나를 결코 설득할 수는 없으리라.
내 단호한 눈빛에 이시스 오라버니는 포기하고 만 듯했다.
“……그래. 알겠다.”
그래도 눈빛에는 아쉬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나는 오라버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그러자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내가 그에게 투구를 건네자, 그는 마지막으로 투구를 머리 위에 쓰며 룬 님께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룬 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라버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걱정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라버니가 적군의 총사령관과 일대일 결투를 벌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적군의 총사령관을 죽이거나 사로잡는다면 그 어떤 방법보다도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번 전투에서 성을 되찾는다면 더 이상 불안할 것도 없다.
하지만 총사령관을 상대하는 것인 만큼, 우리 군 측에서도 오라버니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를 못 믿는 건 아니야. 분명 승리를 가지고 돌아오시겠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걸.’
나는 오라버니가 쥔 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이전에 그의 출전일에 선물했던 푸른 머리끈이 매여져 있었다.
전쟁터에서 간수하기에 굉장히 어려웠을 텐데. 머리끈을 어찌나 소중하게 다루었던 것인지 그것은 바래거나 흙먼지를 먹지도 않은 채 곱게 묶여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었는지 오라버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쟁을 얼른 끝내고, 집으로 같이 돌아가자꾸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먼 과거도 아닌데, 황궁이 더할 나위 없이 그립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막사 밖으로 나왔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제는 출발할 때였다.
* * *
이덴베르의 유일한 대공이자, 현 황제의 바로 아래에 있는 동생, 황실의 고귀한 피이자 이 전쟁의 총사령관을 맡은 자.
그를 수식할 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그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아마 ‘검의 천재’이리라.
엘미르 제국이 기사의 제국으로 이름높고, 라이벌인 이덴베르가 마법의 제국으로 유명하다지만 어릴 때부터 엘시스는 검에 매료되어 있었다.
검이 자신의 손에 감기는 그 감각. 그리고 그것을 휘두를 때 느끼는 자유로움.
엘시스는 정말로 검이 좋았다. 세간에서는 그가 검에 미쳤기 때문에 혼인조차 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그는 훌륭한 적수를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원래부터 호전적인 성격이기도 한데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와 대등하게 싸울 만한 사람을 도무지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욕심은 더더욱 커져 갔다.
그래서 엘시스는 비록 이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터라고 할지언정, 적군의 총사령관에게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이름이 이시스라고 했던가?’
엘미르의 하나뿐인 황자이자 황태자. 그가 꽤 검을 쓴다고 들었다. 어릴 적엔 동산만 한 곰을 잡아 여동생에게 그 가죽을 선물하고, 나이를 조금 먹자 제국의 내로라하는 검사들을 줄줄이 패배시켰다고 했던가.
그 이야기를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꽤 기대해 볼 법하겠다고 엘시스는 생각했다. 출전 준비를 모두 마친 그는 느긋하게 막사의 푸른 천막을 걷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마 오늘의 결전으로 앞으로 전쟁의 판도가 크게 뒤바뀔 것이다.
지금까지 이덴베르군은 바운드 성을 차지한 것 이외에 큰 쾌거를 이루지 못했다. 엘미르와 이덴베르의 군이 서로 비슷비슷한 수이기도 한데다가 실력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엘미르 군대의 뒤를 칠 작전을 세워 두었다.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그리고 엘시스가 적군의 총사령관을 사로잡기만 한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볼 것도 없으리라.
“흠.”
엘시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새가 날고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오늘은 날씨마저 완벽하군.”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곁에 있던 참모 겸 부관이 재빨리 그의 곁에 붙어 보고했다.
“말씀하신 대로 오늘의 일기는 무척 깨끗합니다. 바람이 거세지 않아 화살을 이용한 작전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그 보고를 들으며 그는 군대가 모인 앞으로 향했다.
엘미르 군은 모르겠지만 바운드 성을 차지하고 있는 군은 전체 이덴베르 군의 3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들의 눈속임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들켰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막사에 있는 군인들 중에서 특히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법사 군단’이었다. 그들은 이덴베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 낸 전력이기도 했다. 한 명 한 명이 흡사 인간 병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엘시스는 도열해 선 마법사 군단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타고난 검사였지만 그렇다고 마법사의 위력을 결코 낮잡아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마법의 제국인 이덴베르의 황자였기 때문도 있었다.
이덴베르의 마법사라고 하면 세계 어딜 가도 대접을 받는다. 그야말로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은 오늘, 엘시스의 손발이 되어 훌륭하게 적들을 섬멸해 줄 것이다.
그들의 작전이란 이랬다. 엘미르 군이 바운드 성을 되찾으러 공성하고 있는 사이에, 이덴베르 군이 그들을 뒤에서 포위해 진을 친다.
그 이후 마법사 군단이 바로 앞으로 나와 포위된 엘미르 군에게 대범위 마법을 날려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엘미르가 엘시스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이 계획은 완벽할 것이다.
그리고 엘시스는 이 계획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들 앞에 섰다. 군기가 딱 잡힌 그들은 엘시스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시스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덴베르의 군인들이여!”
“예, 총사령관님!”
군인들의 우렁찬 목소리는 넓게 울려 퍼졌다. 엘시스는 씩 웃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이야말로 바로 더러운 엘미르 놈들을 쓰러뜨릴 날이다. 준비는 되었나?!”
“예, 총사령관님!”
떠나갈 듯한 기합에는 엘시스와 이덴베르를 향한 충성심이 가득차 있었다.
“그렇담 어서 놈들을 한꺼번에 소탕하러 가자! 더 이상 이 땅에 아무도 엘미르라는 이름을 걸고서 살아남을 수 없게!”
엘시스는 가장 먼저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그의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한순간에 말들이 달려나가자 겨울의 마른 땅에서 뿌연 흙먼지가 어지럽게 대지 위를 부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구를 쓴 엘시스는 그 먼지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엘미르를 정복할 생각에 머리가 꽉 차 있었을 뿐이었다.
‘더러운 엘미르라.’
그는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사실, 적어도 엘시스에게 엘미르에 대한 적의는 없었다. 또한 그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 된 적극적인 이유도 없었다.
엘시스는 그저 이 전쟁을 형님인 라키아스 황제가 바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에 불과했다. 라키아스가 업적을 늘리고,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갈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것이 좋았다. 강한 자들과 검을 섞는 것도 좋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없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기에.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엘시스를 괴롭히는 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세상 끝까지 달려갈 기세로 말을 거세게 몰아도, 죽기 직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휘둘러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공허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왜인지, 무엇인지 엘시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은 마치 아주 중요한 사람을 떠나보낸 것처럼 허전했지만, 그에게 그럴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괴로워할 뿐이었고, 그때마다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 *
전해 들었던 정보대로 엘미르 군사는 바운드 성 앞에서 공성전을 펼치고 있었다. 십만이 넘는 군대의 수 덕분에 바운드 성 앞은 빼곡했다.
이래서야 인간인지 개미떼인지 모를 노릇이다. 엘시스는 싸늘한 비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서로가 보일 만한 거리에 도착하자, 갑작스레 나타난 이덴베르 군에 엘미르 군은 당황하는 듯했다.
그 중간에는 바로 총사령관이 있었다. 검은 투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의 옆에 엘미르의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엘미르의 총사령관은 동요하는 사람들을 애써 격려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크게 소용은 없어 보였다.
엘시스는 상황이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음에 가슴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이 있었다. 당황해서 웅성거리는 것 같던 군대는 금세 진영을 다르게 바꿔나갔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예상했고, 방금 전까지는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엘시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유능한 덕분에 금세 혼란을 가라앉힌 것일까? 아니면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했나?
그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이런저런 셈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지금 와서 진영을 바꾼들, 엘미르 군이 무언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영락없이 이덴베르 군 사이에 갇힌 꼴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서로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덴베르가 빼앗은 바운드 성에서는 수성을 위해 갖은 수를 펼치고 있었다. 보통 수성보다 공성이 어려운 것은 자명한 이치다.
바운드 성에 있는 이덴베르 군이 높은 성벽 아래로 돌을 굴러 떨어뜨리고,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던져 대는 데에는 아무리 엘미르 군이라도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엘미르 군은 패하고 마리라.
그렇게 생각한 엘시스가 돌격하려 할 때였다. 문득 그들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누군가’라고 하는 것이 더 맞았을까? 그것의 위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엘시스의 눈앞에 보이는 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결코 이상하다거나 불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새는 오히려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덴베르에서 황금색은 아주 귀한 색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이덴베르의 국교인 셀레나 여신의 눈 색이기 때문이었다.
엘시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러한 황금을 몸에 두른 것 같은 아름다운 새였다. 깃털 한 올 한 올은 마치 순금을 뽑아내어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마리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하겠군.’
그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나라 제일의 성녀로 불리는 그의 여동생 마리안느에게는 저렇게 아름다운 새가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이다.
물론 그건 그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겠지만 말이다. 그가 그 새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공중에서 사람을 태우고 날고 있던 그 새는 어느새 땅에 내려앉았다.
그 새에서 내려온 것은 한 쌍의 남녀였다. 사뿐한 발걸음으로 내려온 그 두 사람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력이 좋은 엘시스는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긴 백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남자는 고대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아무도 입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양식의 옷이었지만, 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옷을 입고 나온 것처럼 그 옷이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여자는…….
‘아, 그렇군.’
엘시스는 납득했다. 흰 베일을 쓴 그녀는 베일과 잘 구분되지 않는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데다가 태양신의 표식이 그려진 신관복이었다.
멀리에 있었기 때문에 얼굴까지 완벽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엘시스는 그녀의 눈빛이 푸른빛일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엘미르 제국의 유일한 성녀, ‘아이샤 드 엘미르’ 이리라. 실제로 만나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곳에?’
곧바로 그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정령을 꽤 다루고 치유력이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미르는 고작 열몇 살이 되는 소녀를 전쟁터의 선봉에 내세워야 할 만큼 군사력이 비루한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만약 정말로 손이 부족해 그녀를 내세운 것이라면, 엘시스는 이 군대를 한껏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돌려 엘시스를 바라보았다.
‘…….’
엘시스는 알 수 없이 가슴이 덜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왜지?’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저 황녀 또한 성녀이기 때문에, 지금 이덴베르 황궁에 있을 자신의 여동생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는 문득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엘시스는 귀애하는 여동생의 경우를 보아서라도 타국의 성녀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전쟁터에서 서로를 만난 것이 운이 나빴다.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상념을 지운 그는 재빨리 자신의 옆에 있던 궁수 한 명에게 주문했다. 불화살을 만들어 적군에 쏘아 보내라고 말이다. 그 화살이 겨냥한 곳은 엘미르 기수가 든 엘미르 국기였다. 그 국기를 불태움으로써 그들을 도발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꽤나 성공적인 듯했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바람까지 세지 않아서 화살은 저편으로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깃발 근처에 닿기도 전에 그 화살은 금방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엘시스는 눈에 이채를 띠웠다. 이시스. 적의 총사령관이 눈 깜짝할 새에 그 화살을 베어 버리고 만 것이다. 엘시스만 한 무인이 아니라면 대다수는 그 움직임을 눈치채지도 못했으리라.
‘제법 하는 모양이군.’
재미있었다. 그와 그의 적은 서로를 탐색하듯이 노려보았다. 더 이상은 망설일 것이 없었다. 엘시스는 손짓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엘미르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엘시스와 이시스는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챙강챙강,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선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엘시스는 꽤 여유로웠다. 작전대로 굴러가지는 않았지만, 전면전을 한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의외의 변수가 나타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이시스에게 신경을 쓰느라 잠깐 간과하고 있었는데, 지금껏 새의 옆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사내가 한 손을 치켜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일견 무척 자연스러웠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어느 한 곳을 꼽을 수는 없으리라. 엘시스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도 거의 본능적인 감각이었으니 말이다.
‘……뭐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내의 손짓 하나에 만물이 숨을 죽인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 착각일 뿐인가?’
곧 그 행동의 의미가 곧 드러났다.
“……세, 세상에…….”
그의 곁에 있던 마법사가 덜덜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그를 옆에서 꽤 많이 보아 왔지만, 그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왜 그러는 거지?”
의아해진 엘시스가 그를 향해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엘시스 또한 이변을 감지했다.
조금씩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뭐지?!”
기겁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서 태양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먹구름이 낀 것도 아니었다.
‘……일식인가?’
엘시스는 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식이라니. 하필이면 지금?
일식은 나라의 역술가가 재고 또 재어야 겨우겨우 예측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하필이면 두 나라가 치고받고 싸우는데 기막히게도 일식이 일어나다니.
엘시스가 조금만 더 독실한 신자였다면 아마도 신이 인간들의 모습에 노해서 빛을 거두어 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 있었다. 일식이 진행됨과 동시에 눈앞에 먹물을 퍼부은 것처럼 주위가 점점 깜깜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덴베르 군인이 모두 당황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잊어버린 와중에, 이상하게 엘미르 군인들만은 침착했다.
마치…… 이것만을 기다려 왔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알겠어. 이건 일식이 아니야.’
엘시스는 혼란한 와중에도 정답을 찾아내었다. 단순히 일식이라면 그저 주위가 밤처럼 까맣게 변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모든 시력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온통 암흑이었다. 이것은 전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동요한 이덴베르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전쟁터인데도 불구하고 지레 두려움에 검을 놓아 버리는 자마저 있는 듯했다. 엘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전원, 당황하지 마라!”
그는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적군의 술수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검을 들어라!!”
하지만 엘시스도 알고는 있었다. 오감 중에서도 특히 시각은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적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싸우란 말인가. 원래부터 시력이 없는 상태였다면 또 모를까, 이제껏 보이는 것에 상당 부분 의존해 왔던 전사들에게 이제 와서 눈 없이도 싸우라고 말한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엘시스처럼 오감을 극한까지 수련한 자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게다가…….
엘시스는 귀를 기울였다. 이쪽 편과는 다르게 엘미르 군은 눈이 보이는 게 확실해 보였다.
“증오스러운 이덴베르를 물리치자!”
“감히 성녀님을 상대로 비열한 납치극을 벌인 이덴베르 놈들!”
“신께서 너희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덴베르 군인들을 향한 엘미르 군인들의 함성 소리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이를 악문 엘시스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동요하지 말라! 검을 들고 싸워라!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적군의 술수에 불과하다!!”
확실히 엘미르가 보여 준 마법은 대단했다. 이만한 대군의 눈을 한순간에 가려 버릴 수 있는 마법이 존재하다니. 마법 제국의 황자로서 수도 없는 마법을 보아 왔던 엘시스로서도 생전 처음 듣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엘시스는 그 기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얼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대군의 눈을 가릴 만한 마법이 오랫동안 지속될 리는 없었다. 길어 봐야 몇 분은 될까? 그는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수련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오감이 더욱 예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는 보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느꼈을 뿐이다. 타고 있는 말의 목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히 말은 어둠 속에 파묻히지 않은 듯했으나, 주인의 동요하는 기색을 읽고 불안해하는 듯했다.
“쉬, 괜찮을 거란다.”
이 말과 함께해 온 시간들이 장장 십 년 가까이 되었다. 그는 이 말을 더할 나위 없이 아꼈다.
어미 말로부터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해 온 말이니, 이 말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 말을 다뤄야 말의 겁을 해소할 수도 있는지 알았다.
말을 달래던 찰나였다. 그다음 순간, 엘시스는 알아차렸다. 그의 앞에 바로 적이 와 있음을.
엘시스는 놀랄 만큼 빠른 동작으로 물러섰다. 잘 달래 준 덕분인지, 말은 아까보다 훨씬 유연하게 움직였다.
휙! 공중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시스의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재빨리 피했는데도 꽤 위험할 뻔했다.
그가 대단한 검사라는 말이 그저 허명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검도 다루고 창도 다룬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그를 상대하기 위함인지 검을 가져온 듯했다.
하지만 동요하는 티는 내지 않았다. 엘시스는 눈을 감고서 여유롭게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시스 드 엘미르인가?”
그의 앞에 선 적군의 총사령관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그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적의가 묻어 있었다.
“너를 죽이러 온 엘미르의 황태자다.”
엘시스는 이 싸움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 * *
어두워진 하늘은 이내 곧 새까맣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나는 내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내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적군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엘미르 군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덴베르 군인은 모두 당황하고 있었지만 나와 나를 포함한 엘미르 사람들은 매우 태연했다.
나는 내 곁에 선 룬 님을 새삼 올려다보았다. 그의 압도적인 능력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는 이러한 초월적 능력을 보여 주면서도 그저 담담한 얼굴이었다.
‘나도 질 수만은 없지.’
룬 님을 소환해 놓고 그가 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다면 나까지 전쟁터의 최전방에 선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가 소환했던 루디온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의 날카로운 부리에 이덴베르 군인들이 하나둘 쓰러져 갔다.
동시에 나는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었다. 룬 님을 소환할 수 있게 된 이후로 나의 정령술도 한층 더 늘어, 나는 정령 마법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게 되었다.
검은 하늘 위에 황금빛 화살이 늘어섰다. 그 금빛의 화살 꼬리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황홀함이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마치 대지에 내려앉는 유성우처럼, 빠르고 가볍게 날아 적의 심장에 꽂혔다. 적을 섬멸한 화살은 그 이후 빛가루로 분해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덕분에 수많은 금빛 가루가 어두운 하늘을 수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은하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내 뒤에서 나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룬 님이 보여 준 정령 마법에는 한계가 없었지만, 그를 소환하는 부담을 받고 있는 나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이 일식이 끝나기 전, 최대한 많이 적들을 해치워야만 했다.
나의 손짓 한 번에 이덴베르 군 수십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그것은 무척이나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이렇게 강해졌다면,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더 많이 지킬 수 있었을까?
그때였다. 마력의 파동이 나를 저격하고 날아왔다. 나는 빛의 방패를 만들어 나에게 쏘아진 마법을 막았다. 그 마법은 방패를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공중에서 스러져 버렸다. 고개를 돌린 나는 마법을 시전한 사람을 찾았다.
그는 푸른 로브를 입은 채 시근덕거리고 있었다. 푸른 로브는 이덴베르 마법사의 상징.
나는 그의 정체를 금세 알아내었다. 엘시스가 끌고 온 마법사 군단의 일원이리라. 조금 더 그를 살피던 나는 그의 로브 옷깃에 은사철 나뭇가지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법사들의 수장이구나.’
은사철의 꽃말은 지혜였다. 그 나뭇가지는 흔히 마법사들의 수장에게 선사하는 문양이었다. 나는 몸을 완전히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그가 적진의 중요한 인물임을 알았으니만큼 그를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가 마법사들의 수장이어도 룬 님의 정령 마법에 저항하지는 못한 듯했다. 두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나에게 마법을 날렸던 것은 그저 내가 만드는 정령 마법의 파동과 거리를 읽고 쏘아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꽤 대단하기는 했다. 한순간에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렸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마력의 흐름을 차분히 읽어 내리다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걸로는 모자랐다. 나는 기도하듯 눈을 감고 내 안에 있는 마력에 집중했다. 그러자 활성화된 마력이 이윽고 내 주위에 수도 없는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었다.
내 앞에 있던 수장은 경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 마력의 파동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으리라.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적에게는 안타깝지만, 강해진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함성 소리가 더더욱 거세졌다. 그 대부분이 엘미르어였기 때문에, 엘시스는 꽤나 초조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는 다르게 그의 앞에 선 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싶었다. 하긴, 그의 군대가 이기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을 만도 했다.
눈을 감은 엘시스는 이시스의 존재를 느꼈다. 전투에 방해되기 때문에 그는 말에서 내려왔다. 이시스 또한 기꺼이 말에서 내려와 그와의 승부를 받아들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엘시스는 이시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경험이 풍부했다.
지금은 그 노련함에 기대어 볼 차례였다. 서로를 탐색하던 둘은 이내 검과 검을 맞붙였다. 상대의 묵직한 힘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제법이군.”
엘시스는 그를 칭찬했지만, 이시스는 아무런 말도 되돌리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였다. 몇 번 더 검을 부딪히던 엘시스는 승패가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호적수를 만난 것에 기뻐하겠지만, 장소가 너무 안 좋았다. 게다가 이곳에는 그가 책임져야 할 십만의 대군이 있다.
‘……이 마법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그는 저도 모르게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명히 몇 분 가지 않아 금방 시야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한 시간이 훨씬 지났어도 마법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엘시스의 초조한 기색을 이시스는 읽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에 가벼운 냉소가 실려 있었다.
“네 군사들이 걱정되나?”
엘미르어였다. 엘시스는 엘미르어에 능통했지만, 쓸모없는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엘시스는 다른 것을 물었다.
“이 마법은 뭐지?”
“글쎄.”
보이지는 않았지만 엘시스는 이시스가 웃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친절한 설명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시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 웃기지도 않는군. 그대들에게 신이 따른다고?”
“물론. 그것도 승리의 여신과 빛의 신이 함께하시지.”
“하. 그래.”
엘미르에 있는 성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시력을 잃어버리기 전에 그도 잠깐 그 성녀를 보았지 않았던가. 확실히 성녀란 신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다. 하지만 엘미르에게 신이 따른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덴베르에도 성녀는 존재한다.’
엘시스는 마리안느를 믿었다. 그녀의 고귀함과 성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니, 엘미르에게만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나. 신이시여?’
그는 기회를 노려 이시스에게 달려나갔다. 검을 휘두른 여파로 거센 바람이 서로를 덮쳤다.
“그대들의 명운은 이미 다했다!”
이시스가 외쳤다. 엘시스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보였다. 서로의 검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싸움의 결판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고 두 사람이 서로 친우였다면 그 둘의 싸움은 그야말로 무한하게 진행되었으리라.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였고, 두 사람은 지독한 악연이었다. 결판은 반드시 나야만 했다. 점차 둘의 전투에 승패의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엘시스는 대단한 검사이고, 뛰어난 천재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시스와는 달리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빈틈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엘시스라고 할지언정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는 없었다. 점점 엘시스는 이시스가 찌르는 검을 피하는 데에 급급해져 가고 있었다.
검을 섞고 잠시 멀어졌을 때, 엘시스는 자신의 턱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이라도 보인다면…….’
하지만 싸움이 시작된 지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시력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기할 수는 없지.’
엘시스는 이시스에게 말을 던졌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도 있었고, 시간을 끌어 볼 얄팍한 계산이었다.
“그대는 확실히 강하군.”
이시스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엘시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가 젊은 나이에 이토록 강한 이유는 뭐지?”
그것은 순수한 궁금증도 함께 섞여 있었다. 엘시스는 이때 동안 이시스처럼 강한 자를 만나지 못했다. 특히나 이시스만 한 나이라면 더더욱. 잠시 말이 없는가 했던 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엘미르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대답하는 이시스의 목소리는 무척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과 모두 맞서 싸우더라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맞바꾸어서라도 지켜 주고 싶은 존재가 있다.”
“…….”
엘시스는 의아한 동시에 조금 동요하고 말았다. 그에게 그렇게 소중한 자가 있다는 것이 뜻밖이기도 했지만, 어딘가 마음속 한구석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엘시스 그도, 어릴 때에는 그런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그 사람을 위해서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가.
‘……그게 누구지?’
엘시스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이시스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엘시스는 간신히 그 검을 막았다.
“물론…….”
이시스가 차갑게 비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번 그 아이를 저버린 너는 절대로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내가 누구를 저버렸다고?’
이시스의 말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까? 그와 엘시스는 이전에 만나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엘시스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무언가,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가…… 손 앞에서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가 누구였더라?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었는데. 어째서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오라버니…….’
저 멀리에서 아련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척이나 그리운 음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복부에 검이 꽂혔다. 때를 맞추듯, 거짓말처럼 눈앞이 트였다.
시력을 되찾고 바라본 세계는 눈이 너무나 부셨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이시스의 눈은 여름의 녹음처럼 새파란 초록색이었다.
‘이런 얼굴이었군.’
꽂힌 검으로 인해 아픔을 느끼면서도 엘시스는 별 감흥 없이 생각했다. 생각보다도 더 젊은 얼굴이어서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를 죽여라.”
적군의 총사령관에게 사로잡힌 이상, 이제 엘시스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아니, 거기에 굳이 무언가를 더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자백과 모진 고문 정도일까.
당연히 엘시스는 그런 것을 바라는 이상한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므로,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이시스는 코끝으로 그를 비웃었다. 시력이 돌아오자 이시스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비웃었는지 엘시스는 더욱 잘 알 수가 있었다.
“당연히 나는 널 죽일 것이다.”
“그러면 뭘 망설이고 있지?”
“죽기 전에 네가 봐야 할 사람이 한 명 있거든.”
엘시스는 정말로, 이시스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적군의 총사령관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부분 적국에게서 몸값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엘시스는 굳이 이시스가 몸값을 노리고 자신을 데려가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봐야 할 사람이라니.’
엘시스는 아픈 복부 때문에 표정을 찡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충 피라도 지혈해 준 것은 다행이었지만 지금 그는 두 손이 꽁꽁 묶여서 끌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꼴로 황제의 동생이라고 우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코웃음만 살고 마리라.
하긴, 이제 명줄이 간당간당하게 생겼는데 무슨 상관이겠냐만 말이다. 엘미르의 이름 모를 마법사가 암흑을 만들어 버린 마법을 걷었을 때, 이미 엘시스의 부대는 거의 전멸해 있었다.
볼 것도 없는 완벽한 엘미르의 승리였다. 이번 전투로 기세를 몰아 승리를 차지하리라고 생각했던 이덴베르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바운드 성안에 있던 군인들마저 모두 거의 사로잡히거나 죽고 말았다. 덕분에 총사령관을 비롯한 엘미르 군은 초원을 벗어나 바운드 성안으로 당당히 입성하는 중이었다.
대패한 이덴베르와는 다르게, 대승리를 거둔 엘미르 측의 사기는 거의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았다. 사람들은 엘미르의 국가를 불러 대었고, 모든 곳에서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시스의 뒤에는 엘시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엘미르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따가워 엘시스는 고개를 숙이고 싶을 정도였다.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게 이것 때문인가.’
적군의 총사령관을 잡았음을 광고해서 사기를 더욱 증폭시키려는 의도일까?
하지만 초원에서의 결투로 이미 이덴베르는 대부분의 군사를 잃었다.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피해도 더더욱 컸다.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오합지졸도 되지 않는 잔당들뿐이다.
예상컨대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금방 모두 소탕되리라. 가슴이 쓰려 올 따름이었다. 엘시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저편에서 소녀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시스가 자리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돌렸다. 엘시스 또한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 앞으로 한 소녀가 달려왔다.
‘아까 보았던…….’
엘시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분명…….
“아이샤!”
그때 이시스가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엘시스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었나?’
아까까지만 해도 냉정하거나 무표정하기만 하던 이시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겨울 대지에 흰 꽃이 핀 것처럼 극적인 변화였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물론이지.”
그 상냥한 목소리를 듣고 엘시스는 깨달았다. 그가 아까 말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그의 여동생인 모양이었다.
‘여동생을 더할 나위 없이 아끼는 모양이군.’
엘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아이샤의 모습을 살폈다. 아까는 멀리 있어서 인상착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이제 알겠다.
소녀는 마치 물망초, 혹은 은방울꽃처럼 어딘가 청초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단순히 외모를 떠나서 어딘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게 만드는 분위기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옷은 처음 보는 종류였는데, 곳곳에 황금 실로 태양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보아 성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옷인 듯싶었다.
특히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눈동자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을 때, 엘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왜인지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 아이샤는 못 박힌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엘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엘시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샤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몇 번 달싹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엘시스는 하마터면 그녀의 말에 대답할 뻔했다.
“……오라버니.”
그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어릴 적에 들었던 그 목소리와, 아이샤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은 왜였을까?
하지만 그 목소리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아이샤는 엘미르어로 그의 오라버니를 불렀다. 그러자 그의 오라버니인 이시스가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이시스가 다정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래, 아이샤.”
“……많이 힘드셨지요?”
그녀가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일견 그 웃음에는 싸늘한 기색도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이렇듯 적국의 총사령관이 잡혔으니, 더 이상 이덴베르 사람들이 감히 엘미르의 권위에 도전할 수는 없겠지요.”
이내 아이샤는 똑바로 엘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있으리라고 확신한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목숨을 끊을 생각은 없나요?”
“…….”
생각보다도 그 당돌한 질문에 엘시스는 말이 막히고 말았다. 아이샤는 부연 설명했다.
“우리 군이 총사령관인 당신을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곤란하거든요. 그러니 물어보는 거예요.”
“글쎄.”
엘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생각은 없다고 말해 두지. 네 말대로 내가 이용당한다고 해도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 아니겠어?”
비굴하더라도 지금은 살아남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엘시스는 덧붙였다.
“만약 당장 죽일 생각이 없다면, 내 상처를 좀 치료해 주는 건 어때? 이러다가 죽을 것 같거든.”
너스레를 떨어 보았지만 눈앞의 소녀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는 작전인 듯싶었다. 아이샤는 가라앉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이내 그녀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자살할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했으니까요.”
왜였을까? 그의 뒤에서 이시스가 조금 안타까운 얼굴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알 수는 없지만, 이시스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소녀와 만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엘시스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 * *
그 뒤로 엘시스는 바운드 성의 지하 감옥에 곧장 처박혔다. 보통 아무리 적국의 사람이라도 황족쯤 되면 그 피의 고귀함을 보아서라도 적잖이 대우해 주는 법인데도 말이다.
‘전쟁터에서 자비는 없다는 건가.’
엘시스는 쓰게 웃었다. 벌써 3일째였다. 빛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3일 밤낮을 갇혀 있었던 게 말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엘미르 놈들의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받아 가면서 눈칫밥을 먹을 바에는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시스가 그를 향해 식량은 물론이고 물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라고 했더라, ‘썩은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말아라.’라고 했던가? 정말 대단한 총사령관님이었다.
그래서 엘시스는 하루에 한 번 배급되는 썩은 물 이외에는 3일째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고 있었다. 지혈만 간신히 한 복부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부디 덧나거나 썩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긴, 이 겨울에 이 싸늘한 지하 감옥에서 무언가가 썩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후.’
엘시스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마르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혹은 아프다거나.
그런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차피 오래가지 않아 적군에 의하여 죽을 것 같았으므로, 이러한 감각을 느끼는 것조차 죽음에 비하면 사치 아니겠는가.
하지만 진정으로 힘든 것은 정신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3일째 견디고 있다 보니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나마 자신이 정신력이 강한데다가, 오랫동안 육체 수련을 반복해 온 검사였기 때문에 사정이 나았던 것이다. 만약 일반인이 이런 꼴을 당했더라면 진작에 정신이 나가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엘시스는 저멀리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에게 물을 배급하러 하루 한 번씩 찾아오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간수의 모습을 쫓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천천히 지하 감옥의 배식구가 열렸다. 그 사이로 간수의 손이 들어와 썩은 물을 밀어넣었다. 엘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간수의 손을 민첩하게 잡아챘다.
촤악!!!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간수가 당황해서 물을 쏟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엘시스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먹을 수도 없는 썩은 물이다. 그런 것을 자신에게 보낸 것은 조롱의 의미밖에 없을 것이다.
“열쇠는 어디 있지?”
“노, 놓아라!!”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안 그러면 죽을 테니.”
엘시스가 간수의 손을 잡은 힘은 어마어마했다. 흡사 인간이 아니라 괴물의 악력인 것 같았다. 비록 배식 구멍이 팔 두어 개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엘시스는 이대로 간수를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먼저 팔을 부러뜨리고, 연결된 목을 잡아서…….’
너무나도 쉽게, 마치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간수를 금세 죽일 수 있으리라. 엘시스의 그러한 태도에 간수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여기!!!! 죄인이!!!!!!”
엘시스의 손을 풀기 위해 발버둥치는 가운데, 지하 감옥 바깥을 향해 소리쳤으니까 말이다. 엘시스는 혀를 찼다. 괜히 사람이 와서 이곳을 둘러본다면 귀찮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죽일까?’
생각을 마친 그가 당장 간수의 목을 비틀려고 할 때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놓으세요.”
“……!!!”
엘시스는 꽤나 당황하고 말았다. 그 목소리가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여기에 왔지?’
간수의 부름을 듣고 왔다고 하기엔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아마 그녀는 원래 감옥을 들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상황이 나빴군.’
엘미르의 황녀인 그녀가 이 모습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샤 황녀.”
아이샤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 손을 놓으세요.”
‘…….’
이미 들켜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엘시스는 간수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간수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지하 감옥의 문은 아래에는 배식 구멍이, 위에는 간수들이 죄인을 감시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이 있는 구조였다.
아이샤가 그 구멍을 통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어느새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빛인지 모르겠다.
마법인가 생각했는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던 엘시스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그녀의 근처에 요정 같은 것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법은 본 적이 없다.
엘시스는 호기심에 물었다.
“그건 뭐지?”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이샤는 순순히 대답했다.
“정령.”
‘아.’
그러고 보니 엘미르의 황녀가 정령사인 것은 전 대륙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정령일 거라고 진작 생각을 못 하다니, 아무래도 계속 굶은데다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엘시스는 속으로 스스로를 향해 혀를 찼다.
아이샤는 그런 그를 계속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엘시스는 농담을 섞어 물었다.
“비참한 모습을 구경하러 온 건가?”
아이샤가 살며시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입은 살아 있군요.”
“먹을 게 없으니 입을 푹 쉬어 줬거든.”
“아직 기운이 있는 걸 보아 며칠은 더 굶어도 괜찮을 것 같네요.”
“환자인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을 건 주는 게 어때?”
엘시스는 불쌍한 척이라도 해 보려고 했지만, 이내 그녀가 전혀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고 관두었다.
“탈출 시도도 멀쩡히 했으면서, 이제 와서 환자인 척 하지 마세요.”
“흠.”
“게다가 당신, 간수를 죽이려고 했지요?”
모두 맞는 말이었으므로 엘시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깨를 으쓱할밖에.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천천히 엘미르의 황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섬세하고 연약해 보였다. 마치 조금만 힘을 줘도 툭, 부러질 장미 줄기처럼 그녀를 상처 입히기란 매우 쉬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부러지거나 꺾여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듯한 그런 느낌이 말이다. 그것은 이시스나 엘시스가 가진 강함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바닥 끝까지 절망을 경험해 보고, 그리고 다시 올라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의 눈빛. 엘시스는 그런 눈빛을 아주 가끔가다 보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눈을 가진 자들은 세상에 무엇인가 하나쯤 대단한 것을 남겨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급 정령술사라고 했던가?’
열다섯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에 그렇게 훌륭한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강함 덕분이 아닐까. 엘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간 엘시스는 아쉬웠다. 아이샤가 적당히 겁을 주어서 쫓아낼 수 있을 만한 열다섯의 어린 여자애였다면 차라리 구슬리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처럼 강인한 눈빛을 가진 사람은 엘시스도 다루기 어려웠다.
엘시스는 그 대신 아이샤에게 정보나 캐내기로 마음먹었다.
“네 오라버니는 어쩔 생각이지?”
그녀의 오라버니를 들먹이자, 확실히 아이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이덴베르를 정복할 생각인가?”
“…….”
“나도 제법 대단한 검사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더군. 다음에는 창을 쓰는 모습도 보고 싶어.”
다음이 있다면 말이다. 그의 말이 우스웠는지, 줄곧 대답이 없던 아이샤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엘시스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계속 차갑게 웃기만 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했지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시스는 그녀의 말을 뒤늦게 알아들었다. 아이샤는 웃음을 거둔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빚을 갚아 줄 뿐입니다.”
“…….”
“다만…….”
그녀는 심판을 내리는 잔인한 여신처럼 선언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당한 만큼의 몇 배로 갚아 주는 건 기본 상식이지요.”
“……그렇군.”
아무래도 이덴베르는 더 이상 그 이름을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엘시스는 쓰게 웃었다. 아이샤는 몸을 돌렸다. 이제 가려는 모양이었다.
“다시 또 간수를 죽이려고 하거나, 탈출하려고 난동을 피워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세 번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이샤는 점점 감옥에서 멀어져 갔다. 홀로 남겨진 엘시스는 투덜거렸다.
“탈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첫 번째는 뭘 말하는 거야?”
그나저나 그녀는 왜 자신을 보러 왔던 것일까. 와서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간 것도 아니었다. 이시스도 그랬지만, 아이샤라는 저 황녀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고 엘시스는 생각했다.
* * *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벗어 나오자, 지상에는 빛이 가득했다. 유독 그 빛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군이 승리하고 있어서일까.
‘탈출하려고 하다니. 어리석기도 하지.’
나는 지하 감옥에 갇힌 적군의 총사령관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을 더 붙여서 그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감시해야겠다. 아니면 아예 몸을 꽁꽁 묶어 놓아도 좋으리라.
그가 다쳤다곤 하지만, 어차피 오래 살려 두지 않을 목숨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면서 걷는데, 근처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서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그 소리가 나를 찬양하는 소리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아이샤 황녀 전하!!!!”
“승리의 여신이시여!!!!”
엘미르 군인들이 부담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엘미르 군인들이 내가 정령왕을 소환했고, 그로 인해 그 말도 안 되는 일식을 펼쳐 보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뚝뚝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찌할까 하다가 그냥 피식 웃어 보였다.
“좋은 하루예요.”
그들은 그 말이 마치 성스러운 축복인 것처럼 감격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우리 군이 지금 주둔하고 있는 곳은 원래 우리 엘미르의 영지였던 ‘바운드’성이었다. 기어코 우리 군이 공성에 승리해 바운드 성을 다시 되찾아 낸 것이다.
듣기로는 오늘 저녁에 약식으로나마 가벼운 축하 연회 자리가 있다고 했다. 아직 이덴베르 땅을 밟기도 전인데 연회라니,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려 이덴베르의 군을 거의 전멸시킨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몇몇 잔당들밖에 없으니, 우리 군이 이 대승리를 충분히 즐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앞으로는…….’
나는 멍하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이대로 우리는 군을 재정비한 뒤에 북쪽을 타고 올라가 이덴베르의 수도까지 올라가 그들을 칠 계획이었다.
황성까지 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이덴베르의 이름을 자처할 곳은 어디도 없겠지.
어차피 수도에 있는 주둔군이라고 해 봤자 큰 수가 아니다. 엘미르는 확실하게 이덴베르를 발밑 아래에 무릎 꿇리리라.
‘그리고 나는 황족들을 만나겠지.’
그렇게 되면 나의 진정한 복수가 완성될 것이다.
* * *
감옥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저녁에 있을 승전 연회를 준비했다. 이곳에 오는 데에 드레스 같은 것을 챙겨 왔을 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신관복을 그대로 입고 가려고 했다.
바운드 성의 성주가 나를 위해 시종과 옷을 보내 주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의 자식은 아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옷을 빌려줄 또래의 딸은 없었다.
대신 얼마나 빠르게 일을 한 건지, 성주의 디자이너가 나를 위해 상점에 있던 옷을 몸에 맞춰 새로 가봉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옷을 입고 연회에 갈 수 있었다. 옷은 흰 바탕에 푸른 실로 자수가 놓여져 있었다. 약간 이국적인 분위기를 주는 옷이었다.
승전 연회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얼마 없던 물자를 닥닥 긁어모아서 제법 그럴듯한 연회 음식을 만들어 내었고, 몇몇이 홀에서 현악기를 연주했다.
무엇보다 연회장에는 웃음이 있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앞으로의 희망찬 미래를 향한 밝은 웃음이 말이다.
나는 연회장 입구에 들어서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저 밝은 조명의 세계와 내가 멀게 느껴진다면, 내가 이상한 것일까? 분명히 우리 군은 승리했고, 이제 나에게도 밝은 미래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다.
‘……후.’
룬 님이 일식을 일으킨 이후로 내가 그를 소환하는 것이 조금 힘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그를 정령계에 다시 되돌려 보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약간 후회가 된다.
‘룬 님을 지금이라도 다시 부르는 게 나을까?’
그도 엄연히 연회의 주역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리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는 이 연회를 즐길 마땅한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그가 있다면 훨씬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아니, 아이샤 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의아해진 나는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바운드 성의 영주가 서 있었다.
“들어가시지 않고 뭐하십니까? 하하.”
그리고 그의 곁에는 영주를 쏙 닮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저, 만나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아마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영주의 아들이리라.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판에 찍은 듯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닮았네.’
그에 비해서 그 옆에 선 영주 부인은 길고 늘씬했다. 바운드 영주가 동그라미라면, 이쪽은 직사각형이라는 느낌? 영주의 아들은 나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은근슬쩍 내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늘 황녀 전하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길란드라고 합니다. 부디 황녀 전하의 손에 입을 맞출 행운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높은 사람을 향해 존경의 의미로 손등에 키스를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아직까지 내가 그런 의식을 받아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음…….’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나를 만나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낯선 이에게 내 손을 맡긴다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게 그 나름대로의 호의 표현이겠지.
나는 손을 내밀려고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내 뒤에서 나를 불러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이샤 황녀 전하.”
‘오늘은 나를 부르는 사람이 많네.’
나는 뒤를 돌기도 전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비온 공자였다. 뒤를 돌아보니 감청색 의장을 차려입고 선 그가 보였다. 그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멋졌다.
조만간 그가 이번 전쟁에 대해서 훈장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머지않아 그의 의장에는 훈장이 줄줄이 걸리리라.
길란드는 그를 보자 절로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일단 그의 훤칠한 키가 한몫했던 것 같다. 길란드는 동글동글하게 옆으로 자란 모양새였는데, 비온 공자는 그의 머리 하나만큼은 더 컸기 때문이다.
“반가워요. 비온 공자.”
그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비온 공자? 설마 그 벨트모어 공작가의?’
길란드의 눈빛은 이렇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는 완전히 기죽은 상태였다. 다만 바운드 영주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재빨리 비온에게 알랑거리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아, 아니. 이렇게 귀하신 분을 만나게 되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비온 벨트모어입니다.”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바운드 영주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비온 공자가 나에게 말했다.
“그보다 황녀 전하. 총사령관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이시스 오라버니께서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저는 다만 말을 전하려고 왔을 뿐입니다.”
“그럼 어서 같이 가봐요. 아,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나는 바운드 가족에게 재빠르게 인사하고 비온 공자를 따라 연회장 안으로 따라 걸었다.
그런데 연회장 안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의아해지고 말았다. 나를 급하게 찾고 있다던 이시스 오라버니는 연회장 한쪽에서 즐겁게 웃으며 참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시스 오라버니가 절 찾던 게 맞나요?”
의심스러워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저는…….”
그 모습에서 나는 모든 사건의 전모를 파악했다.
“내가 곤란해 보여서, 구해 주려고 했다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싱긋 웃고 말았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 봄의 제전에서 그가 나를 수다쟁이 영애로부터 구해 주었던 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짐작이 틀렸다. 나는 그다지 곤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한 손가락을 들고 그 점을 말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다지 곤란하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그가 그 푸른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비온 공자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제가 괜한 짓을 했군요.”
“…….”
나는 그 말을 듣자 괜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색한 마음에 내가 입고 온 드레스 자락만 매만졌다.
비온 공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정령왕님께서는 오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괜히 번거롭게 해드리기 싫어서요.”
그러자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나는 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읽어 내었다.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분은 몰라요.”
“…….”
“내가…….”
나는 쓰게 웃었다. 확실히 룬 님은 아직 내가 치른 댓가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진작 나에게 무슨 말이든 했겠지. 지금까지 조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그저 내가 나의 온전한 능력으로 그를 소환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착각하게 된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내가 룬 님을 소환하는 것을 누구보다 바라던 하이넨 님이 미리 손을 써 놨을 수도 있고…….
자세한 것은 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물어 의심을 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룬 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영원히. 나는 조용히 말했다.
“……비온 공자, 부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
그는 무척이나 복잡한 얼굴이었다. 내 수명이 이제 십 년쯤 남았던가.
‘괜찮아.’
이제 와서 전전긍긍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나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나를 보는 비온 공자의 얼굴이 매우 슬퍼 보였기에 나는 쓰게 웃었다.
“웃어요, 비온 공자.”
“……황녀 전하.”
“전쟁에서 이겼잖아요. 잘되어 가고 있는걸요.”
그래, 웃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에스코트해 줄래요? 오늘 나는 파트너가 없거든요.”
아무 말이 없던 그는 정중히 내 손을 잡아왔다.
“영광입니다.”
나는 생긋 웃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라버니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이샤, 어서 오렴.”
그가 나에게 건넨 것은 오렌지 주스였다. 기쁜 날이니, 독한 술은 아니어도 적어도 샴페인 정도는 건네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는 아직도 주스네요.”
오라버니는 빙그레 웃었다.
“데뷔탕트 때처럼 쓰러지면 안 되잖니.”
그 말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때 일은 앞으로 말 안 하는 걸로 해요.”
“그래, 그래.”
그는 마냥 좋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오라버니에게서 얼른 주스 잔을 받아들었다.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창피하다.
“건배.”
서로 부딪힌 오라버니의 잔과 내 잔이 청명한 소리를 내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똑같이 건배했다.
“작은 태양이신 이시스 총사령관님 만세!”
“아이샤 황녀 전하 만세!”
나는 빙긋 웃었다. 주스를 들이켜며 바라본 오라버니는 샹들리에의 가장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었다. 그런 오라버니 주위에서는 환한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앞으로 오라버니는 이덴베르를 정복하겠지. 그리고 황제가 되고, 아마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지지 않을까? 오라버니의 옆에 설 분은 누구일지, 그리고 태어날 아이는 누구를 닮았을지 궁금했다.
너무 멀리 나간 상상일까? 하지만 그리 먼 미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 보고 가고 싶으니까 말이다.
“……아이샤?”
오라버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오라버니의 눈에는 나를 향한 염려가 가득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가장해 보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역시 오라버니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나를 테라스로 이끌었다. 환한 홀과는 다르게 테라스는 어둡고 조용했다. 겨울이라서 굳이 나와 있는 사람도 없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조금 추워하는 것 같자, 오라버니는 직접 겉옷을 벗어 나에게 덮어 주었다.
“춥니?”
“괜찮아요.”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망설이는가 싶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내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눈짓하자,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우선 기쁘구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
“이덴베르를 네 앞에 무릎 꿇려 주겠다는 것 말이다. 내가 능력이 없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심지어는 너를 위험에 빠뜨릴 뻔하기도 했지. 게다가 이 승리도 나의 온전한 힘으로 이루어낸 게 아니야. 너와 네 정령왕님의 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거다.”
“……오라버니…….”
“미안하고 고맙구나. 아이샤.”
오라버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런 말씀은 마세요.”
“…….”
“오라버니라면 제가 없었어도 분명히, 승리를 가져와 주셨을 걸 알아요. 그리고 언제 어느 때나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도.”
테라스 너머 저 멀리에서 이덴베르와 엘미르 사이의 국경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짐짓 밝게 웃어 보였다.
“저기 보세요. 이덴베르의 수도에 들어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렇죠?”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외할아버지께서도 전쟁에서 영지를 훌륭하게 방어해 내셨다고 했어요. 그걸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마음의 짐이 한결 줄어든 기분이었어요.”
“다행이구나.”
오라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나는 이것저것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이룬 큰 승리가 얼마나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지, 앞으로가 얼마나 기대되는지.
심지어는 아까 길란드 공자가 나에게 말을 걸고, 비온 공자가 나를 구해 줬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했다.
나는 말을 멈추었다간 큰일이 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 대었다. 그동안 오라버니는 고요한 눈으로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이야기를 했을까. 이윽고 할 말이 모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적이 싫었다. 뭐라도 얼른 더 이야기해야 했다. 그래야 오라버니가 나의 비밀과 불안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
“그래서…….”
나는 입을 열어 무엇이든 말해 보려 했다. 하지만 벙긋거리는 입에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오라버니가 상냥하게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샤.”
“……네.”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말했다.
“고민이 있지?”
“…….”
그는 마치 내 마음을 모두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널 보면 알 수 있단다.”
“……그냥 불안해서요. 뭐든지 잘되어 가니까…….”
“단지 그것뿐이니?”
오라버니는 상냥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물어보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오라버니는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 줬다. 나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어째서 적군의 총사령관과 저를 만나게 하신 건가요?”
“……그건.”
“오라버니가 저에게 그를 보여 주기 위해서 데려왔음을 알고 있어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침묵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에게 그러하듯, 나도 그에 대한 것이라면 훤했다. 그의 눈빛이나 움직임만 보아도 그가 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가 나 때문에 총사령관을 살려 데려온 것만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지 않았어도, 나에겐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가 슬퍼할까 봐 그랬던 거죠?”
“…….”
“총사령관이 전쟁터에서 죽은 걸 알게 되면, 제가 홀로 슬퍼할까 봐.”
“…….”
“이제 와서 그럴 리도 없는데…….”
나는 쓰게 웃었다. 이미 옛날 인연이 되어 버린 적국의 총사령관에게 내가 새삼 슬픔을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나의 오라버니는 너무나 다정하다.
“아이샤.”
그때, 그가 내 손을 잡아왔다.
“괜찮단다.”
“……?”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오라버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괜찮죠. 저는 하나도 슬프지 않으니까요.”
“…….”
“지금 당장 오라버니가 그를 죽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
“심지어는…… 아, 그래요. 제가 그를 직접 죽이고 올 수도 있어요. 정령의 힘이면 금방인걸요.”
오라버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는 정말 괜찮은데…….”
나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데도, 그는 어째서 나를 저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그리고 그 눈동자에 비치는 나는 이토록 혼란하고 불안해 보이는 걸까.
“……괜찮아야 하는데.”
이제는 나도 더이상 스스로를 가장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나는 줄곧 슬펐던 걸지도 모른다. 지하 감옥에서 나와 똑같은 꼴로 갇혀 있었던 엘시스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어릴 적의 모습은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자꾸만 생각났다.
“아이샤.”
오라버니는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단다.”
그의 다정한 위로에,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오라버니의 말이 이어졌다.
“힘들면 쉬어 갈 수도 있어.”
“……그럴 수는 없지요.”
내가 힘들다고 해서, 이 많은 군대가 나 때문에 쉬어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진지했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 상처 받지 않는 거란다. 그걸 위해서라면 조금 쉬었다 가는 게 뭐가 어렵겠니.”
“…….”
나는 하염없이 오라버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그가 고마웠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할 만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쉬어 갈 필요는 없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아이샤, 무리할 필요 없단다.”
“정말이에요. 다만…….”
망설이던 나는 말을 이었다.
“……다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어떤 거니?”
오라버니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결코 저를……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비단 이덴베르의 일이 아니라, 그가 나중에 나 스스로 수명을 깎은 것을 알게 되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널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잖니.”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물론이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그저 슬쩍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손에 들고 있었던 비단 주머니에서 빛과 진동이 나기 시작한 것은.
깜짝 놀라서 그 안을 살펴보니, 넣어 두었던 통신구가 나의 응답을 바라고 있었다. 아르센이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앞이었기 때문에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곧 나는 오라버니에게 그를 소개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저, 오라버니. 소개해드릴 게 있어요.”
통신구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것은 이내 은은한 빛을 뿜으며 영상을 보여 주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저와 협력하고 있는 이덴베르의 인물이에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보인 나와 이시스 오라버니의 모습에, 아르센은 금세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아르센, 이쪽은 내 오라버니인 이시스 드 엘미르 황태자 전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르센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아르센 로스토프입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꽤 놀란 듯했다.
“……아르센 로스토프? ‘그’ 이덴베르의 로스토프 공작?”
―로스토프에 다른 아르센이 없으니, ‘그’ 가 아마 저일 겁니다.
“아르센.”
그가 비꼬듯 말했기에 나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아르센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연락을 했는데.
“어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우선 축하해. 이덴베르의 군대를 격퇴시키고, 엘시스 총사령관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이 이곳까지 들려오더군. 덕분에 수도는 지금 난리가 났지.
“그거 잘됐네.”
―이제 남은 건 수도 입성밖에 없겠지. 좋은 소식을 알려 주자면, 아직 황족들은 수도에 남아 있다.
“……!”
나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족들이 모두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도망쳐 버리면 진정한 내 복수는 이룰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수정구에 내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네가 한 거야?”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황족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으니까.
나는 내 얼굴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나만큼이나 오래 복수를 생각해 왔던 만큼, 아르센에겐 이미 계획이 다 있었던 모양이다.
“……저어, 오라버니.”
나는 조심스럽게 이시스 오라버니를 불렀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어 내 말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오라버니?”
나는 그를 재차 불렀다. 그제야 그는 내 말에 대답했다.
“응? 아, 미안하다. 아이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지?’
수도에 입성할 작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오라버니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오라버니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가 가장 먼저 무엇을 물어볼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아르센이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물어볼까? 아니면 어떻게 그가 황족들에게 신임을 얻었는지 물어볼까?
물어볼 만한 것은 많다고 생각했다. 나도 아르센을 전생부터 알지 못했더라면, 그를 결코 신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르센은 너무나 훌륭한 우리의 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것은 꽤나 의외의 것이었다.
“공작, 그대가 왜 아이샤에게 말을 놓나?”
“……?”
“서로 합의된 사항인가?”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합의가 되었던가? 생각해 보니 아르센은 처음부터 나에게 무례해서, 아무렇게나 말을 놓았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이 전쟁터 한복판이라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상호 반말을 하게 되었고…….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보던 이시스 오라버니는 싸늘하게 웃었다.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감히 황녀에게 반말을 해서는 안 되지.”
―…….
아르센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이샤에게 걸맞는 예의를 갖추도록. 로스토프 공작.”
하지만 오라버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적국의 황족이고 그와 나의 나이 차이가 난다곤 해도 그는 공작, 나는 엄연히 황녀인 것이다. 아르센이 긴 침묵 끝에 말했다.
―……예, 황녀 전하. 황태자 전하.
오라버니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 뒤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아르센이 먼저 황궁에 길을 닦아 놓으면 엘미르 군이 입성해서 수도를 칠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황족들을 상대할 것.
‘……수도 입성이 정말 머지않았구나.’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달은 이곳, 엘미르와 이덴베르 하늘에 공평하게 떠올라 있었다. 십몇 년간 나를 괴롭혀 왔던 의문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 * *
사실상 수도 입성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운드 성에서 출발했던 우리 군은 국경을 넘어가 이덴베르의 수도까지 그대로 진격했다. 국경군과 수도 근위대를 격퇴하는 데에 약간의 잡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큰 문제는 없었다. 군인 수의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수도에 들어갈 때에는 마차를 타고 가는 여유까지 누렸다.
‘……너무나 오랜만이야.’
마차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창문 바깥을 기웃거렸다. 날씨가 풀려서 눈이 녹았기 때문에 땅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 웅덩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차나 말이 가기에는 질척거려서 애물단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러한 일상의 풍경이 어쩐지 마음을 깊게 잡아끄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군인들이 대열을 맞추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덴베르 사람들은 감히 가까이 올 생각을 못 했다. 나는 그래서 더욱 거리낌 없이 바깥을 관찰했다.
눈에 익은 이덴베르의 건축물과 수도의 분수대, 시장, 도로, 나무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바뀐 것들은 그다지 없었다. 수도의 상가가 몇몇 바뀐 것을 알아보는 것은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아릿한 마음의 고통을 동시에 주었다.
그리고 저멀리에선 황성이 보이고 있었다.
‘아.’
나는 입속으로 자그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적어도 모든 것이 세월 속에 변해도,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 당당히 선 흰 성.
나는 한참이나 못 박힌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룬 님이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반가운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반갑다? 처음엔 그 단어가 거부감이 들었으나, 이내 찬찬히 생각해 보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몇 년 만에 다시 본 모습이니까.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커튼으로 바깥을 가려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남남인데, 괜히 들떴네요.”
룬 님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매만졌다.
군인들의 대열 가장 앞에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을 것이다. 이덴베르 사람들은 무모한 전쟁을 벌인 라키아스 황제를 욕하고, 우리 군을 체념으로 맞이하겠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마리안느’의 존재였다.
아르센도 마지막까지 그녀가 가진 붉은 눈의 정체를 밝혀 내지 못했다. 그녀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시녀 소생인 만큼, 모계로 이어지는 마법이 없을까 조사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오라버니에게 미리 말을 해 놓기는 했다. 황족들 중에서 사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이 한 명 있다고.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아르센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미 황족들에게 수를 써둔 뒤였다. 설마하니 그 로스토프 공작이 자신들을 배신할 줄 몰랐던 황족들은 지금 포로가 되어 황성에 묶여 있다나.
이제 그들을 만나는 게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커튼을 다시 걷고 성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나 말을 달렸을까. 드디어 우리 군은 성 앞에 도달했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를 비롯한 수뇌부는 아르센을 먼저 만났다.
말에 타 검은 갑옷을 입고 서늘한 눈빛으로 무장한 그였지만, 바랜 듯한 은회색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조금은 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나와 오라버니, 그리고 룬 님을 향해 인사했다. 그에게 내가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걸 알린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룬 님에 대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한 아르센에게 오라버니가 말했다.
“그대가 수도를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전부 성녀님의 가르침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무익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끝내고 이덴베르의 야욕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앞에 서기 전에 우리는 이미 말을 맞춰 둔 상태였다. 아마 앞으로도 나와 아르센은 전쟁에서 만나, 성녀에게 깊게 감화된 관계로 알려지리라.
“그러면 들어가시지요.”
아르센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덴베르의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이덴베르의 성이 이제 바로 앞이다.
그때, 룬 님이 옆에서 속삭였다.
“이곳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군.”
“……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시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독한 냄새라니? 내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보고 룬 님이 말을 이었다.
“저 너머에서 어둠 속에서 썩어 가는 냄새가 난다.”
그렇게만 말하고 룬 님은 더이상 부연 설명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썩어 가는 냄새.’
냄새를 아무리 맡으려고 해 봤자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령왕인 룬 님이 말하는 것이니만큼 무언가 이유는 있겠지.
나는 저절로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가장 먼저 첫발을 내딛었다. 나는 불이 꺼져 어두운 황궁의 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 * *
한 여성이 씨근덕대며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곱게 틀어 올려진 머리카락은 적포도주빛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색인데다가 무척 관리가 잘되어 매끄러웠다.
그녀는 이덴베르의 제 3황녀이자, 결혼하여 출가한 이후 데비우트가의 공작 부인이 된 아드린느였다.
그녀가 갇혀 있는 방에는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라버니이자, 이 나라의 가장 지고지순한 존재인 황제 라키아스도 있었다. 또한 그녀의 여동생인 마리안느와 남동생 를르스도 함께했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듯 기대고 있었지만, 아드린느는 아까부터 분에 차올라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노려보고 있는 곳은 바로 섬세한 금장 장식이 되어 있는 대영접실의 문이었다. 그녀는 갇힌 이후로 그곳에 도자기, 의자, 심지어는 테이블까지 던져 보았다.
하지만 문은 꼼짝하기는커녕, 그 위에 자그마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강력한 마법에 의해 문이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드린느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로스토프 공작…….’
설마 그가 황가를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단순히 그녀가 생각이 짧아서도, 쉽게 사람을 믿어서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십 년이 넘도록 황가에 충성해 왔고, 황족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에 출전해 왔다. 선대 로스토프 공작이 그러했듯,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그를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다. 비단 아드린느뿐만이 아니라, 다른 황족들도 그를 무척 신임했던 것이다.
‘그런데 배신이라니!’
아드린느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거라, 아린.”
“……하지만…….”
그녀를 부른 것은 바로 오라버니인 황제였다. 라키아스는 매우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족들을 치러 엘미르 군인이 들이닥친다. 심지어는 도망가지도 못하게 한 방에 모두 모아 마법으로 결계를 쳐 두기까지 했다.
적군의 총사령관은 사로잡은 엘시스를 포함하여, 바로 이곳에서 그들의 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아드린느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라키아스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당연히 이덴베르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현 황제이자 오라버니인 그를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곳, 여기에서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로잡혀 있는 것은 바로 그녀와 그녀의 남매들이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돌아 버릴 것 같았기에 아드린느는 다시 던질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방 한구석에 있는 를르스는 그런 그녀를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에 그녀를 말린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오라버니 말씀이 맞아요. 그만하셔요, 언니.”
기어코 꽃병을 들었던 아드린느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뒤에서 마리안느가 말을 걸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마리안느가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이 그녀의 머리에는 하얀 면사포가 씌워져 있었고, 황금색 두 눈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아드린느의 동생, 마리안느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성녀이기 때문일까.
마리안느는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엘미르 군이 찾아온다고 한들, 설마 저희를 모두 죽이기라도 할까요.”
“……하지만 마리…….”
“걱정 마세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눈이 문득 붉은색으로 보였던 것은? 아드린느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마리안느는 말을 이었다.
“마침 총사령관의 여동생인 아이샤 황녀도 성녀로 이름이 높다고 하지요. 신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분명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마리안느의 말은 꿈길을 걷는 것처럼 이상적이기만 했다. 하지만 아드린느는 어느새 그녀의 말에 조금씩 설득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들었던 꽃병을 내려놓았다.
“……그래, 너를 믿는다. 마리.”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드린느는 마음속 한구석이 이상하게 복잡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과연 엘미르 군이 그들의 말을 들어 줄까, 같은 고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한데 모아 놓은 것을 보면 분명히 황족들을 일시에 죽이거나, 인질로 만들어 이덴베르의 혈통을 빼앗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마리를 믿어.’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단단한 믿음이었다. 마리가 한 말이라면 뭐든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큰 죄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스스로에게 혼란을 느끼고 있는 사이, 마리안느는 그저 하얗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마리안느에게는 지금 생사가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긴장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미르 군이 성으로 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에서부터 증오스러운 엘미르의 국가가 들리고,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성에 남은 사람들은 목숨이라도 부지해 보고자 이미 엘미르 군의 편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은 아드린느처럼 갇혀 있거나, 이미 로스토프 공작의 손에 죽었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아드린느의 긴장감은 점점 강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문 앞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찢어 죽이고 싶은 로스토프 공작의 태연한 목소리도 함께 말이다. 아드린느는 다시 꽃병을 손에 들었다. 문이 열리면 그에게 던져 보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창백한 얼굴로 구석에 서 있는 를르스를 보자 바뀌었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여기 있는 황족들, 그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해서 새 가정을 꾸렸지만, 그래도 자신의 남매가 무척이나 소중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무력하게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드린느는 냉철한 시선으로 들어온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가장 먼저 앞에 있는 금발의 사내가 아마 적국의 총사령관, 이시스 황태자이리라. 그리고 그 옆에는 목을 베어도 시원찮을 로스토프 공작이 태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소녀잖아?’
아드린느는 냉정을 가장하는 것도 잊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마리안느보다도 어린, 말 그대로 소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이런 곳에는 왜?’
이제 막 열몇 살쯤이나 되었을까? 전쟁터와 다름없는 이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던 아드린느는 이내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열몇 살쯤 된 나이에, 은발과 푸른 눈. 그리고 총사령관과 가까워 보이는 태도. 그녀가 바로 엘미르 제국의 성녀, 아이샤이리라. 그녀라면 이곳에 있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했던 것은 그녀의 반응이었다. 아드린느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새하얗게 변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보호하듯 슬쩍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드린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보았다가 그의 외모에 순간 흔들리고 말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순금을 녹인 듯한 진한 황금색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금색을 귀하게 여기는 이덴베르 제국에서 그의 아름다움은 더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드린느는 다음 순간에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비단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은 그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그녀가 완전히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적군이 데려온 포로를 보았을 때였다.
보통 때라면 한데 묶여서 가지런하게 정리되었을 연초록색 머리카락은 엉켜서 훨씬 지저분해 보였다.
몸이 온통 꽁꽁 묶인 것은 물론, 배에는 커다란 자상이 있었다. 치료조차 하지 않고 방치했던 것일까? 아드린느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시!”
그러자 엘시스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 아린.”
그렇게 커다란 상처인데도 그는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드린느는 그 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엘시스는 그녀의 배다른 오라버니로, 생일이 고작 몇 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내왔다. 사소한 것에 투닥투닥거리면서도 결코 서로를 마음 깊이 미워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다 무엇인가. 저절로 아드린느의 입에서 날카로운 말이 나왔다.
“우리를 모두 죽일 생각인 거지요?”
적군의 총사령관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드린느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을 죽일 셈이라면 빨리 죽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자기는 죽더라도, 가족들만은 살리고 싶었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리안느가 나섰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현실을 잊은 듯이 몽롱했다.
“제 이름은 마리안느 델 이덴베르. 부족하지만 이덴베르에서 성녀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그녀가 환하게 웃자, 마치 흰 작약이 만개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예요.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보아요.”
‘마리안느.’
아드린느는 홀린 듯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리의 말이다. 누구라도 들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당연히 엘미르 사람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서기 전에는 말이다.
“그 전에 정리해야 할 게 있지 않은가?”
말을 꺼낸 것은 아까 보았던 백금발의 미남이었다. 아드린느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그는 굉장히 독특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엘미르에서도, 이덴베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오래된 옷이다.
“룬 님……?”
적국의 황녀, 아이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도 의아해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이름이 룬이구나. 아드린느가 생각하는 가운데, 룬이라 불린 사내는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담았다.
“아까부터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
“……?”
“게다가 남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남의 행세를 하고 있군.”
적어도 이 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리안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남의 거죽이라니……?”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인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마리안느의 말이 맞다. 아드린느는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냄새라니, 이곳에서는 희미한 향수 향기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룬이라는 사내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여 줬을’ 뿐이다.
그가 손을 들자 아드린느는 이상한 감각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기운이 그의 손에 집결되어 있는 기분.
그 어떠한 존재도 그의 앞에서 감히 나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손에선 환한 빛무리가 어려 있었다. 아드린느는 경악하고 말았다.
‘마법?!’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저 룬이란 사람 또한 고위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 손은 아드린느의 소중한 동생, 마리안느를 향하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안돼!’
아드린느는 자신도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중한 동생을 위해서, 그녀는 모든 힘을 짜내 마리안느를 밀치고 자신이 대신 그 빛을 받았다. 마리안느에게도 그 빛이 닿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이었다.
자신은 분명히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되리라. 그만큼 그 손에 서려 있던 기운은 어마어마해 보였으니까.
‘괜찮아.’
아드린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안느를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때쯤이면 아픔이 몰려올 법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몸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마리안느와 아드린느를 주목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아드린느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다친 곳이 없잖아?’
그렇다면 그녀가 받았던 빛은 무엇이었을까. 아드린느는 저도 모르게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드린느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린느가 그녀를 밀쳤기 때문에 마리안느는 바닥에 반쯤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겉모습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리, 마리?”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드린느는 그녀에게 무릎걸음으로 기어가려 했다. 마리안느의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천천히, 검은색으로 변해 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마치 그것은 흰 도화지가 검은 먹물을 흡수해 가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었다. 커다랗게 뜨여진 마리안느의 황금 눈은 마치 녹이 낀 듯이 초록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꺽꺽거렸다.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는 어떠한 힘에 사로잡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드린느는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마리안느의 얼굴은 조금씩 변해 갔다. 모든 변화가 끝났을 때, 아드린느는 그 얼굴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나이를 먹고 자랐더라면 저런 얼굴이 아니었을까. 아드린느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리사?”
* * *
홀은 경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은발과 황금 눈을 가졌던 마리안느가, 순식간에 까마귀처럼 새까만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지만, 그 모습이 나에게 더욱 경악을 가져다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건…….’
나는 내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나잖아…….”
황족들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까마귀처럼 검고 푸석한 머리카락과 녹이 낀 듯한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그 생김새까지.
그것은 모두 내가 전생에 ‘알리사’라고 생각했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그녀가 나와 똑같은 얼굴을 갖고 있는 거지? 나는 이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룬 님이 선언하듯 말했다.
“방금까지 그녀가 갖고 있던 얼굴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
사람들은 모두 룬 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을 흉내내어, 그 거죽을 뒤집어쓴 것에 불과하지.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흉내내기 쉬웠을 거다.”
“……죽은 사람이라면?”
떨리는 목소리로 아드린느가 룬 님을 향해 물었다.
“뻔하지 않은가?”
룬 님은 차갑게 비웃었다.
“이곳에서 죽었던, 알리사 델 이덴베르를 말하는 것이지.”
아, 그 순간 나는 커다란 두통이 머리를 습격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저절로 영상이 재생되었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곳은…….’
영상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크게 떨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았던 그 큰 홀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나를 보며 내게 ‘사형’을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라키아스는 내 뺨을 때렸고, 황제는 나에게 썩은 물을 내리라고 명했으며, 엘시스는 내가 자살하지도 못하게 나를 막았다.
오직 내가 마리안느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알량한 증거를 가지고 내가 그녀를 독살하려 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었어.’
그때에도 지금도 맹세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마리안느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시녀의 말은 단순한 오해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내 말을 들어 주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하게도 내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이상한 점은 그 외에도 산재해 있었다. 애초부터 마리안느는 어떤 아이였는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 모두가 그 애를 돌아보았고, 그 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애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금빛 눈동자, 다정한 성격을 가졌었다.
나와는 다르게…….
‘……정말?’
예전 같았다면 이 생각에 한 치의 의문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생각에는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치 껍데기가 깨진 것처럼 바깥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과연 그러한가? 마리안느는 그런 아이였는가?
‘아니.’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이 트인 것처럼, 이제서야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영상 속에는 내가 재판을 받았던 날의 모습이 보였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일주일 동안의 감옥 생활로 몸이 상했지만, 황금색 눈만큼은 변함없이 빛을 내고 있었다.
‘알리사’의 모습이었다. 알리사는 황후의 딸로서, 어릴 적부터 신심이 깊었다. 그 황금색 눈과 다정한 성격 때문이라도 그녀는 성녀로서 추앙받곤 했다.
그에 비해 마리안느는 조용하고 속을 알 수가 없는 아이였다. 시녀 소생의 그 아이는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호감을 잘 사지 못했다.
그런데 그 둘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알리사의 모습을 마리안느로, 그리고 마리안느의 모습을 알리사의 것으로 착각했다. 모습뿐만이 아니다. 대우도 마찬가지였다.
알리사는 감히 성녀인 마리안느를 독살하려 했던 죄로 재판받고 있었다. 황족들은 그녀에게 차가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마리안느가 감히 알리사에게 죽을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정작 그들이 마음 깊이 사랑하고, 둘도 없는 보물처럼 대했던 아이가 바로 알리사였음을.
알리사는 그녀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면서 ‘무섭다’며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달래 주었다. 심지어는 알리사조차에게 무심했던 그인데 말이다. 점점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알리사는 다시 한 번 그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사형에 처해지리라.
이렇게 쉬웠다. 모두를 기만하고, 알리사를 죽이고, 마리안느 자신이 성녀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지하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는 알리사의 모습을 보며 마리안느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독약 같은 초록색이었다. 아무도,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헉.”
나는 간신히 그 영상에서 벗어 나왔다. 마치 만화경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난 이후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속은 메슥거렸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 홀에 있던 사람이라면 모두 그 모습을 보았으리라. 마리안느가 알리사의 겉껍데기를 차지하고, 그녀를 모함하여 결국 사형까지 이르게 한 모습을.
“……이게 다 뭔가요?”
나는 룬 님께 직접 물었다. 그가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음을 알았다.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대체 무어란 말인가. 룬 님은 나에게 설명했다.
“보았던 대로다. 이곳에서 일어났던 기억을 읽어 너희들에게 보여 준 것이지.”
“그럼…….”
“이 기억이 진짜고, 너희들이 보았던 것은 세뇌당한 가짜 기억에 불과하다. 어찌나 지독했는지 몇 십년이 되도록 계속 이어지고 있었군.”
세뇌당했다고. 가슴이 덜그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강한 세뇌였기에 이토록이나 오래 작용했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홀을 살폈다. 마리안느를 제외한 황족들은 울거나 신음성을 흘리며 바닥에 거의 쓰러져 있었다. 나도 심한 두통을 느꼈지만 그들 정도는 아니었고, 엘미르 측의 사람들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아마도 세뇌를 당했던 기간이 오래되었을수록 벗어 나오기 힘들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드린느였다. 머리의 심한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그녀는 얼굴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모두가 세뇌를 당했었다니……. 윽……. 차, 차라리 당신이 보여 주었던 영상이 가짜라는 것이 더…….”
그녀는 속이 울렁거리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황족들, 심지어 강인한 검사인 엘시스까지도 고통스러워 바닥을 구르고 있는데 그녀만이 입을 열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내 그녀가 결혼을 해서 출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마 황궁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녀만이 마리안느의 세뇌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으리라.
아드린느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룬 님은 그녀의 말을 하나로 일축해 버렸다.
“그렇다면 너희들 앞에 있는 이 모습은 뭐지?”
그가 가리킨 것은 마리안느였다. 그녀는 이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모습을 가릴 수 있는 것처럼.
아드린느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안 그래도 새하얗던 얼굴이 더욱 하얘졌을 뿐이다. 룬 님이 말했다.
“세뇌를 당했음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은 알겠지만, 네 앞에 놓인 것이 진실이다.”
“……다, 당신이 뭐기에?”
그녀는 이제 숫제 억지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당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
“그, 그래. 당신은…… 마법사지요? 그래서 이런 환상을 보여 준 거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룬 님은 아드린느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아드린느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룬 님은 여상하게, 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게 말했다.
“나의 이름은 루미나스.”
“……!!!”
“인간들이 빛의 신이라 추앙하는 자이며, 이 세계의 빛을 관리하는 빛의 정령왕이다.”
이 말에는 아드린느는 경악한 것 같았다. 신의 이름을 사칭하면 신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치지 않았다면 루미나스의 이름을 사칭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룬 님은 그의 초월적 능력을 보여 준 뒤였다. 이제야 아드린느는 그의 말을 조금이나마 믿는 듯했다.
“다, 당신이……?”
아드린느는 하염없이 룬 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룬 님은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거대한 존재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녀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사실이라고……?”
“그래. 앞으로 세뇌당했던 기억들은 천천히 돌아올 것이다.”
간간이 들리는 황족들의 신음성을 제외하고, 죽음 같은 침묵이 홀을 지배했다. 마리안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아드린느는 한참이나 그런 마리안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리사가?”
그녀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마리안느, 마리. 제발 뭐라도 좋으니 말해 보렴. 그런 일이 없었다고,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마리안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드린느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아드린느의 얼굴은 점점 더 새하얗게 변해 갔다.
“……왜,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어째서……?”
여전히 마리안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아드린느의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한 마디라도 좋다. 단 한 마디라도. 마리, 제발…….”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제서야 아드린느는 서서히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그릴 리 없어……. 마리가, 아, 알리사가…….”
나는 그저 침묵하며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그녀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마리안느에게 손을 뻗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니야! 거짓말일 거야! 마리, 말을 해 봐! 아니라고, 이게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그전에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 것처럼 마리안느에게 지극하던 아드린느였으나, 세뇌에서 풀린 그녀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마리안느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난, 나는, 우리는, 대체……!!!”
나는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방 안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한순간에 변해 버리고, 내 말을 전혀 들어 주지 않았던 가족들을 나는 그토록 원망해 왔었다. 그런데 그때,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마리안느가 아드린느의 손을 뿌리쳤다.
그 사정없는 손속에 아드린느의 손은 금세 빨개졌다. 아드린느는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마, 리…….”
“시끄러워.”
지금까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리안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놀랍게도 다소 차분했다.
“그래서?”
“……!!”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그녀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와서 진실을 알아봤자 무언가가 달라지나?”
“……너!!!”
“그때는 정당한 벌을 내리자고 그렇게 분노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그래?”
아드린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는데, 마리안느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후회되는 거구나. 언니.”
“너, 너는 대체…….”
마리안느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아드린느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땅바닥을 기고 있는 자신의 형제자매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는 그런 그들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것처럼, 마리안느는 희게 웃었다.
“하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마.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
“그래 봤자 너희들이 알리사를 사형장으로 떠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기괴한 웃음에,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리안느의 붉은 눈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일.’
나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마리안느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래, 과거는 지나갔다. 나는 더 이상 알리사가 아니고, 이덴베르 황족들은 나를 앞에 두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아이샤니까.’
나는 그저 이곳에 복수를 하러 왔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일을 저질렀던, 그러지 않았던.
그녀의 말처럼, 이미 알리사는 죽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이덴베르의 황족들을 모두 죽이고, 과거의 일에 마무리를 짓는 것뿐이었다.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왜 발을 내딛을 수가 없는 걸까? 적들이 저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데. 원한다면 칼도 내리꽂을 수 있고, 그들에게 독약을 먹일 수도, 혹은 빛도 보이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도록 만들 수도 있는데.
왜 나는.
그때였다. 내 등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었다.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이 온전히 나를 응시했다. 그 색은 마리안느의 녹이 낀 듯한, 질투로 일그러진 초록색이 아니라 여름날의 녹음처럼 무척이나 맑은 종류의 것이었다.
“……오라버니?”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이샤.”
그가 나를 다정하게 불렀다.
“네, 오라버니.”
그래. 나의 하나뿐인 오라버니. 이시스 드 엘미르. 그는 내가 엘미르 제국에 다시 태어난 이후로, 항상 나의 삶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릴 적에 진작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절망하고, 모든 것에 슬픔을 느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오라버니는 온 세상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본보기를 보여 주려는 것처럼 매일같이 나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었다.
허구한 날이면 놀러와서 나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말을 걸어 주었다. 얼마나 많이 보았던지 심지어는 어머니보다 더욱 자주 그를 보았을 정도였다.
그가 없었으면, 정말로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렴.”
처음에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그러한데,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깨달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만약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너에게는 기회가 있단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룬 님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았다. 나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라키아스, 엘시스, 아드린느, 그리고 를르스.”
그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부르자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새겨진 것은 세뇌의 고통과…… ‘알리사’를 향한 아픔.
나의 옛 가족들.
그들의 이름을 좀 더 다정하게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들과 함께 웃으며 내일 보자, 라고 인사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한때, 이 이덴베르 제국의 황녀였습니다.”
“……?”
사람들의 눈빛이 멍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라키아스의 동복 남매이자, 제 4황녀이기도 했지요.”
“…….”
“……열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어 버렸던 나를 가엽게 여겨 신께서 다시 기회를 준 것처럼,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경악이 번져 올랐다.
“엘미르의 황녀로 태어났던 나는 나를 죽였던 가족에게 복수하고자 했고, 힘을 쌓아 왔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15년의 세월이 천천히 머릿속으로 재생되었다. 그 전의 14년의 기억들도 말이다. 잠깐 숨을 골랐던 나는, 입을 열었다.
“알리사 델 이덴베르. 내가 바로 그녀였습니다.”
“……뭐, 라고?”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나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언제였을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던 나의 진실.
“나는…… 마리안느를 죽이려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말할 수 있었다.
* * *
기억한다. 내 말을 듣고 분노하던 그들의 모습이.
감히, 뻔뻔하게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나를 죄인으로, 거짓말쟁이로 몰아 갔다. 나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장에 세우고, 나에게 침을 뱉었다. 나는 천천히 이덴베르 황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것만이 진실입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15살이 많아진 얼굴들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과거의 편린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거짓말하지 마!”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나를 향한 것은.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정체를 밝힌다면, 가장 먼저 반응하리라고 여겼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은 나를 씹어 삼키기라도 하고 싶다는 것처럼 흉흉했다. 아까 자신의 본모습이 들켰을 때조차 침착하던 그녀였는데 말이다.
“당신이 알리사 언니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나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원한다면 뭐라도 증명해 보일 수 있어.”
그녀의 눈이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 하나하나씩 말했다.
“마리안느, 내가 너에게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주었던 선물은 곰 인형 한 쌍이었지. 인형을 가지고 있으면 낯선 황궁에서도 잠이 잘 올 거라고 말이야.”
“……!!”
“아드린느 언니는 어릴 적 꿈이 검사였고, 엘시스 오라버니는 블루밍 백작 영애를 남몰래 좋아했었지. 라키아스 오라버니가 나에게 9살 생일 선물로 주었던 생일 선물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책이었고 하나는 푸른 드레스였어. 나는 그걸 너무 아끼다가 키가 커 버려서 결국 몇 번 입지 못했었지. 그리고 를르스는…….”
마음을 먹으니 모든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손가락을 꼽던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말해야 할까?”
마리안느는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래,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났다는 일을 믿기는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그때 아드린느가 입을 열었다.
“……다, 당신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믿는 건가요?”
아드린느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자신이 이제껏 세뇌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도 힘든 이야기다. 그런데 이제는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니. 그녀의 혼란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고른 상대가 잘못되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룬 님도 당연했다. 아드린느는 더욱더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또다시 태어나다니…….”
그에 룬 님이 말했다.
“죽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기억을 하는 것이 특별한 일일 뿐이지.”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정령왕인 그의 말인데, 믿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그렇다면…….”
이덴베르 황족들은 나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마리안느는 악을 쓰고 있었다.
“기억들을 모두 읽고 거짓말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여도 난 속일 수 없어!”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흡사 증오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까지…….”
처음부터, 이 사건의 아주 처음부터 가장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날 미워한 거지?”
내 말에 마리안느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마리안느는 그토록 나를 미워하는가?’
그 어떠한 기억 속에서도 내가 마리안느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군 적이 없었다. 마리안느는 내 동생이었으니까. 잘 대해 주려고 했을 뿐이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평범한 악의로는 언니의 탈을 뒤집어쓰고, 다른 가족들을 세뇌하며, 그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내 말에 마리안느는 눈을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얼굴이, 광기가 흐르는 눈이, 나를 뿌리부터 증오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왜 내가 알리사 언니를 미워했냐고?”
그녀는 이내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내가 왜, 내가 왜?!”
조용한 홀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것은 심지어 악마적이기까지 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첫 번째가 아니면 싫다고.”
그 순간, 홀의 창문이 깨졌다. 아르센이 경악했다.
“……결계를 쳐 두었는데!”
이 홀에 황족들을 가둘 때, 아르센은 직접 자신이 마법으로 수도 없는 결계를 쳐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황족들이라면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그 결계를 깨고, 창문까지 깨 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그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게다가 혼자만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유달리 집착하던 라키아스를 눈 깜짝할 새 채어 들고 도망친 것이다.
“……!!!”
사람들이 새하얀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어지간한 힘을 가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쫓아가요.”
마리안느를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그녀를 놔두었다간, 언젠가 다시 나의 자리를 탐내어 쫓아오리라.
* * *
마리안느의 기척이 향한 곳은 황궁의 동쪽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어찌나 재빨랐는지 그녀는 이미 시계탑의 가장 위층에 도달해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끝도 없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참에 어지럽기도 잠시, 저 멀리에서 마리안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나부끼고 있었고, 초록색 눈은 검은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그 붉은 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 누구도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마리안느는 힘을 쓸 때마다 눈이 붉어졌던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앞에는 지금 마족이 있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가진 자였다. 추악하게 생긴 그 마족에게서는 구역질나는 냄새가 풍겼다. 나는 깨달았다.
‘룬 님이 말했던 냄새의 정체가 저것이었구나.’
그 시계탑 위에서 마리안느는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알겠어?!”
나는 그녀를 보며 내 손을 꽉 쥐었다.
‘첫 번째가 아니면 싫다.’
그것은 그녀가 첫 번째로 사랑받지 않으면, 그녀가 첫 번째가 아니면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었으리라. 이제서야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안느는 미친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다가, 다시 무표정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언니처럼 되고 싶었어. 이렇게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초록 눈동자가 아니라!”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내가 언니처럼 타고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언니처럼 모두에게 처음부터 사랑받았더라면. 만약에 모두가 나를 사랑해 줬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미친듯이 중얼거렸다.
“고작 열 살에 홀로 낯선 황궁에 버려졌어.”
마리안느의 높은 목소리가 시계탑 안에서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천국인 줄 알았지. 시녀 주제에, 나를 버러지라며 때리고 괴롭히던 어머니와 멀어졌으니. 하지만 그건 모두 내 착각이었어…….”
마리안느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국은 천사들을 위한 곳이야. 나 같은 까마귀는 있을 곳이 없었지. 나는 언니 같은 천사를 질투했던 거야. 맞아, 나는 언니를 질투했어.”
과거를 고백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악의가 서려 있었다. 이내 그녀가 손짓하자, 그녀의 앞에 있던 검은 마족이 몸을 일으켰다. 룬 님이 짧게 말했다.
“……질투와 분노를 먹고 사는 마족, 베히모스군.”
그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보통 하급 마물들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다. 이름을 가질 정도의 자아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가지는 것들은 오직 상급 마족들뿐. 그것만으로도 이 마족을 상대하는 것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거 알아? 내가 언니에게서 단 한 가지 빼앗지 않은 것이 있었다는 걸.”
마리안느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바로 성녀라는 이름이야.”
“……!!!”
“매일 셀레나 여신님께 기도했어.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제발 제가, 언니를 대신해서 사랑받게 해 주세요!”
마리안느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랬더니 내게 계시가 내려왔지! 셀레나 님께서는 과연 불화의 신. 온갖 방법을 다 써서라도 투쟁하고자 한 나를 위해서 마족을 소환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일까!”
마족의 역겨운 냄새가 탑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베히모스를 소환하기 위한 조건은 더할 나위 없는 질투심이었지. 나한테는 숨쉬는 것보다도 간단했어. 그리고 그를 처음 소환했을 때, 정말, 정말 기뻤어.”
하지만 마리안느는 그 냄새조차 맡지 못하는 듯했다. 너무 흥분한 탓에 그녀의 얼굴은 반쯤 상기되어 있었다.
“다들 내가 먹었다고 믿은 독도 사실은 내가 직접 만들었던 거야. 정말 우습지 않아?”
전혀 우습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구나.”
“그래, 언니 자리를 뺏기 위해서.”
마리안느는 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들어 봐, 내가 언니 자리를 뺏은 게 뭐가 나빠?”
그녀의 손짓에 시계탑의 횃불이 모두 꺼졌다. 동시에 붉은 안광을 가진 박쥐들이 암흑에 잠긴 시계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리안느가 굳이 이곳으로 왜 찾아왔는지 알겠다. 아마 이 박쥐들은 그녀가 직접 길러 낸 것이리라. 이것들은 일반 동물이 아니라, 사람들을 먹이로 삼는 흡혈 마물이었다. 나는 박쥐를 상대하기 위해 루디온을 소환했다.
루디온은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날아드는 박쥐들을 하나둘씩 처치해 나갔지만, 수가 워낙 많아 쉽지 않았다. 아르센이 루디온을 도와 마법을 펼쳐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마력이 훨씬 늘어나 루미나스 님과 동시에 루디온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시에 쉴 틈도 없이 마족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 이시스 오라버니는 가만있지 않았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검이 어둠 속에서도 시퍼렇게 빛났다.
나와 룬 님은 그녀를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움직이고 싶었지만, 좁은 시계탑 안에서는 누구도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마법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에 시계탑의 난간이 파괴되어 커다란 소음과 함께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돌가루와 흙먼지가 피부를 따갑게 때렸다. 이 싸움을 뒤에서 조종하는 마리안느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절박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팔다리를 칼로 찢고, 베고, 파면서 기도드렸어. 설령 마족들에게 영혼을 팔아넘기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고. 나는 노력했어. 그래, 정말로 노력했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붉은색 구슬로 엮어진 로사리오였다. 신의 문장이 달려 있어야 할 중간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하나 있었다.
“언니도 아무 노력 없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은 거잖아. 그런 언니가 할 말은 없어.”
그녀의 붉은 안광은 어둠 속에서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언니의 탈을 쓰니까 모두 나를 사랑해 줬는걸.”
그녀의 목소리가 즐거워 보인다고 문득 느꼈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사로잡은 라키아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키아스는 간신히 두통에서 벗어난 듯했지만, 그녀의 곁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어쩌면 아직도 세뇌가 다 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리안느는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난 운이 나빴던 거고.”
“……너…….”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녀의 입술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흡혈박쥐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옷을 뚫고 내 팔에 달라붙어 피를 빨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룬 님이 나를 지키기 위해 뛰쳐나갔다. 마리안느는 그런 그를 향해 정면으로 비수를 휘둘렀다. 룬 님은 그 어설픈 동작을 가볍게 피해 냈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분명히 피했을 텐데도, 룬 님의 볼에 생채기가 난 것이었다. 그녀가 든 비수에는 암흑의 기운이 둘려 있었다. 마리안느가 웃으며 말했다.
“저 또한 셀레나 님이 총애하는 아이. 한 명뿐인 성녀인데 설마 마족을 제외하곤 아무런 능력도 없었을까요?”
정신체인 정령들은 물리적인 공격에 약한 대신, 마력이나 오러 같은 기에 속수무책이다. 달의 신인 셀레나의 힘이기에 룬 님의 힘은 상극인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이 시계탑은 그녀가 그 이전부터 마련해 둔 곳이었고, 셀레나 님의 힘으로 가득찬 이곳에선 룬 님의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우리를 몰아넣을 가장 최적의 함정을 만들어 둔 셈이었다.
이내 마리안느와 룬 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챙강,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이기도 하고, 피가 튀기도 했다. 한편 박쥐들을 상대하고 있던 루디온은 점점 힘이 다해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내가 루미나스 님과 루디온을 한꺼번에 소환해 낼 수 있다곤 해도, 그 둘은 지금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의 피로가 모두 풀리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얼마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때였다. 가물거리는 시야로 마리안느가 점점 뒷걸음치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의 범위였다. 룬 님께는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리라. 나는 희망의 싹을 느꼈다.
마리안느는 낭패한 얼굴이었다. 룬 님의 공격이 그녀를 더욱더 압박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녀는 결국 룬 님의 강한 힘을 버텨 내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심하게 경련하며, 비수를 어둠 속으로 떨어뜨렸다.
비수의 방어막이 사라지자, 빛의 화살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큭!!”
이제 그녀를 지켜 주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도 베히모스를 거의 처치해 가는 중이었고, 아르센이 처치하고 있던 흡혈박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르센을 돕고 있던 루디온도…….
……루디온도?
“……!!!”
나는 비명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다. 피를 토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아이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머리가 온통 멍멍해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해 낼 수 없었다. 마리안느의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한 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그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기뻐 보였다.
희열이 차오른 붉은 눈은 번뜩거렸다.
‘……역소환.’
그녀는 비수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러 놓아준 것이 틀림없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비수는 그녀가 의도한 대로, 그녀의 마력에 따라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래, 루디온의 심장을 말이다.
‘……속이 메스꺼워.’
결국 나는 피를 토하고 말았다. 루디온은 허공에서 빛가루로 스러져 갔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룬 님의 낭패한 얼굴도 보였다. 루디온이 역소환된 충격으로 내가 마력을 유지하지 못하자, 그 또한 정령계로 역소환되는 것이리라.
정령왕들은 하급 정령들과는 다르게 계약자가 없어도 실체를 가지고 인간계에 머무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대신 함부로 인간계에 간섭할 수 없는 것이 정령계의 규칙이다.
지난번에 룬 님은 위험에 빠진 나를 도왔기 때문에 정령계에 돌아가 그 대가를 받아야 했다. 그의 대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또다시 대가를 받게 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전력의 반이 사라지자, 남아 있던 아르센과 오라버니는 꽤 당황한 듯했다. 침착하게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긴 했지만, 나를 뒤돌아보며 이곳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그들을 마물들이 가만히 놔두었을 리는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지 않으면 정신을 잃고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괴로워, 언니?”
마리안느는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서 참을 수 없는 듯했다.
“그래, 그 모습이 보고 싶었어.”
“……윽…….”
“언니가 다시 태어난 덕분에 언니가 죽는 모습을 두 번이나 볼 수 있게 되었네. 너무 기쁘다. 꼭 나를 위한 선물 같아.”
그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근사근한 그 목소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녀가 아주 옛날, 감옥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소리 높여 웃었던 때처럼 말이다.
그녀가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 다시 죽을 때야.”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비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루디온을 찔렀던 단도였다. 나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역소환의 충격으로 어지러움을 간신히 참고 있는 나에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마저 버거웠다.
그저 나는 나를 향한 비수를 바라보아야 했을 뿐이다. 허공으로 높이 올라갔던 비수는 이윽고 나를 향해 내려앉았다. 그 기세는 아주 무시무시했다.
‘나는 또다시 죽게 되는 걸까?’
그것도 같은 사람의 술수에 의해서.
그녀는 내가 단순히 운이 좋은 것뿐이라고 했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나는 확실히 운이 좋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 고귀하다는 황녀로 두 번이나 태어났고, 배를 곯거나 학대당할 일도 없었다. 좋은 가족들과 친구들, 소중한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부럽다고 말하리라. 그것이 같은 동생이었다고 해도, 그 마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나도 다른 형제자매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권리가 있는가? 단순히 그녀가 운이 나빴다고 해서?
‘아니, 그럴 순 없어.’
나는 강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타고난 행운은 있었지만 삶 속에서 선택은 모두 내 몫이었다. 항상 기쁘거나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슬픈 일도, 괴롭거나 힘든 일도 있었다.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로 내 삶의 모든 것을 정의 내릴 수는 없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눈을 감을 생각은 없었다.
‘살아가며 있었던 그 모든 일들, 그게 내 인생이야.’
만약 그녀가 나를 찢어 내 삶을 끝낸다고 해도, 그게 내 마지막 순간이라면 나는 끝까지 내 인생을 정면으로 마주하리라.
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째서일까, 내 눈을 바라본 마리안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내 앞에 푸른색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 언젠가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아름다운 바다의 색이었다. 그 아름다운 색이 이윽고 붉은 피에 젖고 말았다. 막을 새조차 없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 *
내 앞에는 라키아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 대신 마리안느의 비수에 찔렸다.
“……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안느도 마찬가지였다.
“……라, 라키아스 오라버니……?”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그를 찌른 비수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피는 조금씩 복부를 물들여 가며 넓게 퍼지고 있었다. 예리한 검에 관통당한 라키아스는 고통스러운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기에 그 비수에는 강한 힘이 담겨져 있었다. 무척이나 깊은 상처라는 것을 딱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그는 내가 그토록 복수하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침묵 속에서 이시스 오라버니와 아르센이 싸우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마리안느가 손을 떨고 있는 가운데, 라키아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네 생각은 모두 틀렸다.”
“……!!!”
마리안느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지는 것이 보였다.
“너는 남의 겉가죽을 뒤집어쓰고, 남의 자리를 빼앗으면 스스로가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오, 오라버니…….”
“내가 사랑했던 건 결코 너 같은 추악한 인간이 아니었어.”
라키아스의 목소리는 피를 철철 흘리는 이 순간에도 침착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제서야 깨닫는다. 내가 오직 사랑했던 것은…….”
“……아…….”
나는 라키아스의 얼굴을 황망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동생 알리사.”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의 말이 내 안에서 파문을 그려 나갔다. 역소환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나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내 애정은 모두 그 아이를 위한 거였다.”
그의 말은 단단한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선언 같았다.
“그러니 네가 받은 건 모조리 거짓에 불과해.”
마리안느는 뒷걸음질쳤다.
“……아.”
그녀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
마리안느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당신만은……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왜지?”
“나는…… 나는 당신이 가장 소중했단 말야.”
그녀는 미친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리안느는 예전부터 라키아스에 집착해 왔다. 무심한 황제와 없는 것만도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 대신 라키아스에게서 부모의 모습을 찾으려 했기 때문일까.
세뇌로 황제가 자신을 귀애하도록 만든 이후에도, 그녀는 라키아스에 대한 처음의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라키아스는 싸늘하게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너를 동정한다. 끝까지 남의 탓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너를.”
“……닥쳐!!!”
그 말이 화근이었을까. 덜덜 떨던 마리안느는 라키아스의 몸에 검을 다시 한 번 내리꽂았다. 한 번, 두 번……. 피가 솟았다.
이미 쓰러진 라키아스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원래도 그렇게 무술에 뛰어나던 이가 아니었다. 마리안느의 칼질에 그의 몸은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흐, 허, 허억……!”
하지만 그러고 난 이후에 그녀는 스스로에게 오히려 경악한 듯했다. 그녀는 뒷걸음질로 걷다가 난간에 부딪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소음과 함께, 가뜩이나 불안하던 난간이 그녀의 몸에 와르르 쏟아졌다.
그녀는 미친 듯이 불안해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처치하려면 지금이 가장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라키아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의 숨소리는 아주 옅었고,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만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의 몸은 조금씩 떨려 왔다. 라키아스의 몸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고 있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아.”
나는 얼빠진 것처럼 신음성을 내었다. 그의 푸른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샤’로서, 그와 이렇게 똑바로 눈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입은 달싹거렸다.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 말을 듣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할까 무서워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기어코 열리고 말았다.
“……알, 리사.”
그의 목소리가 꺼져 가고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약해 보였던 탓에.
“아니, 이제는 아이샤인가…….”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관두고 말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마치 영원인 듯했다. 아니, 영원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라키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
나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미안하다, 고작 그 한 마디에 모든 말문이 막혀 버렸다.
‘미안하다고.’
그 말이 어째서 그리도 사무치는 것일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키, 아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하지만 그 말이 고작 마지막이었다.
“……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고작 그 한 마디를 마친 채 그는 눈을 조용히 감고 있었다.
“……라키아스…….”
나는 속삭였다. 입을 몇 번이나 뻐끔거렸다. 망설였지만 나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하지만 그의 푸른 눈이 다시 떠지는 일은 없었다.
* * *
그의 몸을 흔들어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이샤!”
그때,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향해 황급히 달려왔다. 마족은 어느새 검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아르센이 주저앉은 마리안느를 마법으로 포박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미친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르센은 냉정했다. 그녀를 곧바로 기절시켰던 것이다.
나에게 다가온 이시스 오라버니는 내 몸을 샅샅이 살폈다.
“어,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제발, 뭐라도 말해 주렴.”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이시스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그도 조금 다친 것 같았지만, 다행히 심한 상처는 아닌 듯했다. 나는 겨우겨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
나는 손가락으로 라키아스를 가리켰다.
“……죽었, 나요?”
차마 내가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를 바라보던 이시스 오라버니의 시선이 라키아스에게로 향했다.
라키아스는 미동도 없었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에서 나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시계탑 창문 너머의 하늘이 점점 하얗게 밝아지고 있었다. 동이 트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