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3. 전쟁 (19/21)

Chapter 13. 전쟁

“겨울이라 전쟁이 더 힘든가 봐.”

그 말을 들은 나는 복도를 걷는 것도 잊고, 멈추어 서고 말았다. 저 멀리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덴베르를 상대하는 거니까, 아무래도 고전할 수밖에 없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시녀는 모퉁이를 돌다 나를 마주했다. 손에는 빨랫감이니 수건이니 하는 것들을 잔뜩 지고 있는 어린 시녀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황급히 인사해 왔다.

“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들은 복도를 지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없었다. 분명히 내 눈치를 본 것이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창문 너머로 밖을 바라보았다. 황궁은 조금씩 날씨가 풀리고 있었지만, 북쪽에서 이덴베르를 상대하고 있는 엘미르 군대는 아직도 추위를 겪고 있을 터였다.

오라버니가 떠난 지도 벌써 몇 주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오라버니의 말대로 식사도 거르지 않고, 푹 쉬었으며, 가끔씩은 나와서 이렇게 운동도 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새로 생긴 버릇이 있다면, 틈날 때마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언제쯤 돌아올까. 그리고 이 전쟁은 언제쯤 끝나게 될까.

시녀들은 나에게 숨기려고 눈치를 보았지만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이상 알고 있었다. 굳이 정보를 알아보려 하진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전쟁의 양상이 좋지 못하다고 말이다.

결코 우리 군의 힘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 차출된 인원으로는 오라버니를 포함하여 벨트모어 공작이나 전국 각지의 소수 정예 기사단 등,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구성원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계속 고전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새삼 의문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적국의 총사령관은 누구지?’

이덴베르에 이만한 전쟁을 이끌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 아르센은 아닐 것이다. 그와 나는 서로 손을 잡기로 했으니, 그가 이번 전쟁에 나섰을 리가 없었다.

‘그럼 누굴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만한 대규모의 전쟁의 선봉에 설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데다가, 군인들을 통솔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자.

그만한 사람들이 흔하게 나오지는 않는 법이니, 어쩌면 내가 알리사였을 때 알았던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에 잠겨서 방 안으로 돌아오던 때였다. 시녀장이 나에게 찾아왔다.

“황녀 전하!”

그녀는 드물게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동안은 물론이고, 그 뒤로도 수심에 잠겨 있던 시녀장이었다.

“무슨 일이야?”

“특별한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특별한 손님?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닐 테고.’

그분들이 시간을 내어 나를 보러 오시긴 하지만, 특별한 손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 몇 주간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만남을 거절했었다. 그걸 아는 시녀장이 굳이 손님의 방문을 허락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라면 약속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을 내켜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오래간만에 사람을 좀 만나 볼 겸 나가기로 했다.

“그래, 손님들은 어디 계시니?”

내 말에 시녀장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가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리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아이샤!”

들뜬 목소리가 응접실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여름날의 장미처럼 화려한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로 쪼르르 다가왔다. 그리고는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무 놀란 나는 입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그러자 내 앞에 있던 소녀, 로즈가 환하게 웃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다시 봐서 너무 기뻐!”

“로, 로즈.”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응접실에는 로즈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년이 밝은 뒤로 처음이구나.”

“오래간만이야, 아이샤!”

클로에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옆에는 환한 낯의 애슐리도 있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여,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어떻게 왔어?”

“아이참. 그것보다 일단 앉아 봐.”

로즈가 내 손을 끌어당겨 의자 앞까지 인도했다. 나는 순순히 로즈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다른 세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다과를 대접받았던 모양인지, 그들의 앞에는 향기로운 차와 먹음직스러운 과자들이 가득했다. 그 형형색색한 디저트들은 정말 오래간만에 접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음인지, 클로에가 옆에 쌓아 두었던 상자들의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이 보였다. 레몬 파이를 비롯해서 내가 좋아하는 각종 간식거리들이었다.

겨울이라 레몬을 구하기 무척 어려웠을 텐데도 일부러 구해 온 모양이었다. 클로에가 웃으며 말했다.

“같이 먹으려고 주방장에게 부탁했어. 레몬 파이 좋아했지?”

“클로에…….”

나는 그녀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하고 말았다. 내가 말을 못 잇고 있는데, 로즈가 냉큼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고 했지? 그게, 사연이 있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어머니께서 너희한테 편지를 보내셨다고?”

“응.”

애슐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께서 네가 요즘 기운이 없다고, 혹시 궁에 들러 줄 수 있느냐고 연통을 보내셨거든.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찬성했지!”

로즈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오라버니를 보내고 쓸쓸해하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이따가 감사 인사를 하러 가야지.’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나를 놀라게 만들기 위함이셨던 모양이다. 나는 세 사람의 밝은 분위기에 전염되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생긋 웃고 있었다.

“다들 와 줘서 고마워.”

아무리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셨다고 한들 나를 위해서 와 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클로에는 수도에 사니까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쳐도, 로즈나 애슐리는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니까 오느라 넉넉잡아도 며칠은 걸렸을 것이다.

내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섭섭하게 무슨. 우린 친구잖아. 당연히 와야지.”

“맞아. 게다가 아이샤를 오래간만에 볼 수 있어서 나야말로 기뻤는걸.”

“못 보는 동안 소식도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보다, 차가 식겠다.”

로즈의 호들갑에 나는 친구들이 권하는 과자를 먹고, 따뜻한 홍차를 양껏 마셨다. 오래간만에 만나서인지 이야깃거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다들 어떻게 살았나부터 시작해서, 겨울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등이 주로 화제가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어느새 아까보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아, 맞다!”

로즈가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박수를 짝, 쳤다.

“봄이 되면 다 같이 꽃놀이를 가지 않을래?”

“꽃놀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봄의 제전이 다가올 때면 꽃이 만발해 있을 테니까. 다 같이 놀러 나가자.”

봄의 제전이라. 아직 날씨가 모두 풀리지 않아서인지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였다. 로즈가 조르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별장에도 다시 놀러오기로 했잖아. 별장에서도 다시 만나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별장. 그것을 생각하자 가슴속에 가느다란 통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별장에 찾아가, 룬 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기억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장미가 넝쿨져 붉은색으로 흐드러졌던 저택과 그 꽃향기, 초여름 밤의 싱그러운 공기와 밤하늘에 총총 떠 있던 별자리까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 그것은 그동안 나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리라.

나는 애써 상념을 지웠다. 그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같이 별장도 가고 꽃놀이도 하자.”

“정말? 정말이지?”

“응, 물론이야.”

그러자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 지었다.

* * *

나와 친구들은 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대화했다. 더 있다가 가면 좋았을 텐데,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그들은 아쉽게 다음을 기약하고 일어섰다.

“황궁에서 자고 가는 건 어때?”

나는 그들이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에 제안했다. 그러자 로즈와 애슐리도 아쉬운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우리도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여기 있는 동안 공작 각하께서 방을 빌려주셨어.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아이샤, 너도 함께 올래?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야.”

나는 클로에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예전에 클로에의 저택에 놀러 가기로 한 것도 그렇고,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나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걱정하실 테고, 나도 오래간만에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외출하기에는 피곤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언제라도 환영이니까 몸이 괜찮아지면 꼭 우리집에 놀러와 줘.”

그러고 나서 나는 그들을 황녀궁 앞까지 배웅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고집부려 가면서 말이다. 나를 위해 와 준 친구들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 봐.”

마차에 올라타는 그들을 향해 나는 손을 흔들었다. 꽤 오랫동안 수도에 머무르기로 했기 때문에 근 시일 내에 그들을 또 볼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친구들이 탄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마차가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봄의 제전이라고 했지.’

그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나는 로즈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봄이 오려면 아직 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제전에 대한 일도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춥다고 한들, 봄은 또 오겠구나. 마치 밤에 해가 지고 아침에 자연스럽게 해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황궁에는 어느새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붉은빛이었다. 하지만 불타는 듯한 그 빛은, 조금 불길해 보이기도 했다. 멍하니 황궁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내 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 뒤를 시녀들과 호위 기사가 따랐다.

얼마쯤 걸었을까. 나는 어느새 내 궁에 거의 다 와 있었다. 그때였다. 또다시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그들은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재잘거렸다.

“북쪽의 엘미르 군이 수도에 지원군을 요청했대. 지금 이덴베르가 점령한 바운드 영지가 수성전에 강한 곳인데, 하필이면 그 영지가 먹혀서…….”

“세상에, 정말?”

시녀들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서, 이덴베르 놈들의 총사령관이 누구래?”

나는 그에 문득 멈추어 섰다. 그래, 과연 누구일까. 나는 줄곧 그것이 궁금했다. 시녀가 말했다.

“엘시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엘시스라는 황족이랬어. 이덴베르의 제 2황자라나.”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이덴베르 사람치고 검술이 꽤 강하다며?”

그들은 황족에 대한 존경심 하나 없이 엘시스의 이름을 막 부르고 있었다. 하긴, 적군의 총사령관이라면 엘미르 제국의 원수이니 그들이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춘 상태로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엘시스 델 이덴베르. 이덴베르의 제 2황자이자, 전생의 내 이복 오라비였던 자.

보통 엘미르 제국이 검의 제국이고, 이덴베르 쪽이 마법의 제국인 데에 반해 엘시스는 검술이 매우 뛰어났다. 이덴베르의 황자인 주제에 말이다.

그는 적어도 시녀들이 ‘꽤 강하다’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그처럼 강한 검사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십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그는 검을 무척 좋아했으니 만약 그가 검술 연습에 게으르지 않았더라면 그의 실력은 더욱 무시무시해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전쟁의 선봉에 선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워 버렸다. 그가 죽어야 이시스 오라버니가 살고, 우리 군이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속으로 읊조리며 걸어나갔다.

그제야 내가 뒤에 있는 줄 알아차린 시녀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에게 인사해 왔다.

“화, 황녀 전하.”

“……죄, 죄송합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황궁은 어느새 검게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궁에 들어왔을 때였다. 내 궁 앞에 낯선 이가 있었다.

그는 궁 앞에 서서 절박한 얼굴로 시녀장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녀장의 얼굴에는 차가운 경멸의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누구지?’

아무래도 오늘은 여러 사람을 만나는 날인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동태를 물끄러미 살폈다.

“제발!”

그가 애원했다.

“황녀 전하를……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뵙고 싶습니다!”

그를 살피던 나는 다음 순간, 그가 검은 망토 아래에 푸른 로브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옷은 무척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푸른 로브는 이덴베르의 마법사의 탑에 소속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그의 서툰 엘미르어 실력도 깨달았다.

이덴베르인.

자연스럽게 내 얼굴은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그런데 그가 때마침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뒤를 돌았다. 뒤에 있던 나를 마주하자, 그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화…… 황녀 전하!!”

그가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호위 기사가 나의 앞을 지키듯이 막았다. 나는 가차없이 시녀장에게 주문했다.

“뭐하고 있지? 내 눈앞에서 이덴베르 사람을 당장 치워 버려라.”

“예, 황녀 전하. 죄송합니다.”

내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시녀장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저……!!”

“뭐하고 있어? 얼른 치우지 않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명령하자, 호위 기사 두 명이 그의 팔을 잡고 끌어내었다. 그러자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휘적거렸다.

“화, 황녀 전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시녀장에게 자초지정을 물었다.

“저자는 누구지? 왜 내 궁 앞까지 있는 것이냐.”

“그게……. 그는 이덴베르에서 문화 교류를 온 마법사라고 합니다.”

나는 그 말에 모든 정황을 알아차렸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엘미르와 이덴베르는 평화 협정 이후로 서로의 교류를 늘렸다. 거기에는 특산물이나 기호품을 비롯하여 각종 상품들의 교역이 활발해진 것은 물론이었고, 사람 간의 이동도 꽤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번에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미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덴베르 사람들이 꽤 있다고 했다.

지금 국내의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덴베르를 향한 적의로 들끓고 있었다. 어딜 가도 이덴베르 사람이라는 것을 들키면 무시당하고 경멸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저 마법사는 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불쌍한 시녀장, 그녀 또한 이덴베르 사람이라면 치를 떠는데. 하지만 이덴베르 사람이라도 마법사라면 대륙의 어딜 가도 준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시녀장은 그를 단번에 내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이덴베르 마법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저 이덴베르 마법사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때 돌아가지 못한 것도 그의 운이야.’

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내가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제 이덴베르 사람들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호위 기사가 그를 내쫓는 것을 뒤로 한 채, 내가 내 방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뒤에서 나를 향해 소리쳐 왔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엄청나게…… 사는 게 힘들 정도로…….”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피곤해서 얼른 방에 가서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그리고 황녀 전하께 말을 전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 윽!”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호위 기사가 마법사의 입을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마법사는 포기하지 않고 몸싸움을 한 듯했다.

물론 강인한 호위 기사의 팔에서 비리비리한 마법사가 빠져나올 수 있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입에서 손을 반쯤 치우는 데에는 성공한 듯했다. 마법사가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리스!”

그 짧은 단어는 내 발을 멎게 하는 데 충분했다. 마법사는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리, 리스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그분이…… 읍, 읍!!!”

나는 몸을 돌렸다. 마법사는 이제 땅바닥 위에 반쯤 눕혀져서 호위 기사의 제압을 받고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에도 그의 얼굴이 거의 시퍼렇게 질린 것이 보였다.

“……리스라고?”

하지만 내가 그 앞에 다가가자, 그의 얼굴이 폈다. 마치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호위 기사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떼자, 마법사는 미친듯이 소리쳤다.

“예, 리스입니다. 리스!”

“…….”

나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리스. 그것은 알리사였던 시절의 내 애칭이었다. 내 어린 시절 애칭을 알고, 내가 알리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시스 오라버니마저도 내 어린 시절 애칭은 모를 것이었다.

이 마법사가 말하는 ‘그분’의 정체가 짐작이 되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호위 기사를 물렸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 게 뭐지?”

내 말에 그는 끝까지 사수하고 있던 품 안의 물체를 나에게 보였다.

“이, 이것을!”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건 영상구 아닌가?”

영상구라면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소리와 그림을 저장해서 여러 번 재생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가 나에게 할 말을 이곳에 녹음해 두기라도 한 걸까?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닙니다!”

마법사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때문에 귀가 아파 왔다. 방금 전까지 덜덜 떨고 있었던 그였으나, 갑자기 그의 눈이 열정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그러니까, 이덴베르 고도의 마법적 기술을 집약해서 만든 마법 용품으로써, 에, 그, 여기서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한데…….”

“빨리 말하지 않으면 다시 내쫓겠어.”

“……곤란하지만, 황녀 전하를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아무럼요. 이것은 바로 ‘통신구’라는 물건입니다!”

‘통신구?’

그 낯선 어감에 나는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겉모습만 보면 그 수정구는 영상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에 마법사가 재빨리 설명해 왔다.

“아직 시범작이지만, 통신구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이 작은 구슬 하나로? 나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의 설명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예! 마법적 원리로 설계된 이 통신구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상대방이 가진 통신구에도 빛이 들어오게 되지요. 그리고 그 상대방이 통신을 허락하면 이 통신구를 매개체로 원거리에서도 소리와 풍경, 즉 대화와 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통신구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이전에는 없던 혁신적인 물건이었다. 나도 여러 번 영상구를 보았지만 그것을 매개로 통신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과연 ‘그’다운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마법사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황녀 전하께 이 통신구를 전달해 달라고 말씀하셨고, 저, 그 대신에 조금이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어딜 가도 요즘은 이덴베르 사람이란 걸 들키면…….”

나는 통신구에 정신이 팔려 마법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마.”

“황녀 전하…….”

그가 간절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로서도 그에게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엘미르 어디를 가든 이덴베르 사람에게 호의적인 곳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황녀인 내가 그를 이덴베르로 돌려보내도록 직접 나설 수도 없고.

그래도 그가 이 물건을 가져온 성의를 보아 나는 호위 기사에게 마법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정중하게 보고 오라고 명했다.

그 뒤에 나는 시녀들을 물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이 통신구를 사용해 봐야 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

결코 시답잖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통신구의 주인이 ‘그’라면 말이다. 방에 돌아온 나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마법사의 말이 맞다면 이걸 가지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력을 불어넣는 것.’

처음 보는 것을 쓰려니 괜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애써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하며, 나는 통신구를 손에 쥐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내가 투명한 수정구슬 안에 마력을 불어넣자, 그것은 낮은 소리로 진동하더니 점점 흰빛을 뿜어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마력은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저쪽에서도 통신을 허락해 온 모양이었다. 통신구의 희뿌옇던 표면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러난 ‘그’의 모습에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통했군.

낮은 목소리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쯤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그가 그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바랜듯한 은회색 눈동자와 밤처럼 깊은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익숙한 이목구비까지. 잘 지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는 한결 표정이 나아 보였다.

“……아르센.”

내 목소리에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모습이 꽤나 놀라웠지만 나는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오래간만이야. 엘미르 황녀.

나는 그의 호칭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샤 드 엘미르라고 제대로 불러 주십시오.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추시고요.”

―그래. 엘미르 황녀.

하지만 아르센은 내 지적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나를 엘미르 황녀라고 부를 뿐이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나에게 연락을 했지요?”

호칭 문제는 그렇다 치자. 그가 어째서 나에게 통신을 시도했을까? 내가 본론에 들어가자 아르센은 오히려 나에게 되물어 왔다.

―어쩐 일로 연락을 했냐고? 이거 서운하군.

“……?”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둘은 손을 잡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의 말에 긴장이 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말이 맞다. 나와 그는 서로 손을 잡고 이덴베르, 정확히는 그 황족들을 파멸시키기로 맹세했다.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겠지?

“……네.”

―좋아. 그러면 말하지. 나는 이번 전쟁에서 엘미르가 이기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있다.

“……당신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그래서 나는 이덴베르군의 정보를 모았다.

아르센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 정보들을 모두 너에게 알려 줄 테니, 이걸 바탕으로 적의 허점을 찌르도록 해.

“……!!!”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군의 정보를 알려 준다니. 이것은 거의 반역에 준하는 대역죄였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그동안 놀고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르센은 나의 경악을 보고도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가까스로 할 말을 찾아내었다.

“하, 하지만 당신은 이덴베르 사람이잖아요. 군인들은 이덴베르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는 정말 상관없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나에게 중요할 것으로 보이나?

“…….”

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긴, 그는 십몇 년간 복수를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속이며 전쟁터에 출전해 온 사람이다. 이제 와서 새삼 이덴베르 사람들의 생사 여부에 상관할 리가 없지. 내 생각이 짧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덴베르 군인들이 망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야. 더군다나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은 황족이니 그가 실패한다면 나에게는 더더욱 이득이지.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내게 물었다.

―이번에 엘시스 대공이 황제의 뜻을 따라 총사령관으로 출전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엘시스 델 이덴베르. 이덴베르의 둘째 황자였던 그는 라키아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대공의 직위를 부여받고 수도를 떠나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쟁의 부름을 받고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의 뛰어난 검술 실력과 혈통은 그가 총사령관이 되는 데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겠지. 아르센이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그는 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게 황제의 명령이니까.

“……알고 있어요.”

굳이 황제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엘시스는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그런 그가 전쟁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니, 결코 이덴베르 군을 만만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라키아스도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는 아예 엘미르 제국을 정복할 생각이야. 아무렴 그만한 포부 없이는 적국의 황녀를 납치해 죽일 생각은 못 할 테니까.

나는 아르센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아르센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일부러 나가지 않았다. 뒤에서 전쟁에 어떻게 되어 가나 가만히 지켜볼 요량으로 말이야.

“……사람들이 의심하지는 않던가요?”

안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었다. 전쟁에 미쳤다는 말이 돌 정도로 전쟁터에 밥 먹듯이 나가던 아르센이다. 혹시라도 그가 전쟁에 나가지 않아 남들에게 의심받지는 않았을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르센은 태연할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리오텐 전쟁 이후의 피로가 쌓여서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지. 그 일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어. 더군다나 이제 와서 나를 의심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를 돕겠다.

“……아르센.”

―말했지.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고.

나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아르센은 이덴베르에 명확한 증오를 안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것을 믿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해 주는 것들을 귀담아들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내 말에 아르센은 쉽게 대답했다.

―간단해. 내가 말해 주는 정보를 엘미르 군에 전달하고 군을 승리로 이끄는 거지.

일은 생각보다도 어렵지 않았다.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이니, 오히려 그가 나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 같은 것을 짜라고 했으면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전령 역할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나는 당차게 말했다.

“말해 주세요.”

아르센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진 정보는 정말로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것들이었다. 이덴베르 군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의 수와 군인의 총 규모, 수뇌부의 능력, 군의 전술 등…….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나는 그의 말을 모두 필기하기 위해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아르센은 다른 종이를 보지도 않고 머릿속의 기억들만으로 십수 장이 되는 정보를 줄줄 읊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과연 천재인 그다웠다.

그것을 모두 들은 나는 아르센에게 물었다.

“이 정보의 출처는 어디지요?”

내가 아무리 아르센을 믿고 있다곤 하지만, 출처도 모르는 정보를 함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대답했다.

―그들은 원래 나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우려고 했다. 처음에는 거절할 요량이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그들이 내민 군인들의 정보를 파악했지. 그 뒤에 그들의 좀 더 내밀한 정보를 파헤치는 데에는 약간의 행정적 능력과 마법이 필요했을 뿐이다.

행정적 능력이라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나는 거기에 뇌물 혹은 그에 상당하는 무언가가 오고갔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내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그가 이렇게까지 발전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르센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래 알고 있던 자들도 있었지. 어차피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한정적인 법이니까.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혹시라도 이 정보가 새어 나가면 당신이 의심받지는 않을까요? 방금 보았던 마법사도 내가 당신과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텐데.”

―아, 그는 내 제자 중 한 명이야.

아르센이 설명해 주었다.

―마침 내가 연구하던 통신구를 가지고 엘미르로 떠난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을 이렇게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몰랐어. 내가 직접 움직이기에는 아무래도 위험이 크니까 잘됐지.

“그렇군요.”

―그에게는 엘미르 황녀와 외교상의 문제로 비밀스럽게 연락하는 거라고 말해 두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우리 둘이 기밀을 나누는 걸 알아차리더라도 그는 사제의 연을 나와 맺었으니 나를 배신할 수는 없을 거다.

마법사들이 맺는 사제의 연은 기사들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가진다고 들었다. 고위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선배인 마법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함부로 배신할 수 없다는 아르센의 말이 납득이 되었다.

―또한 내막을 파악할 시간도 여유도 없을 거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엘미르 군이 이미 승리하고 난 이후겠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군이 이번에 바운드 영지를 점령했다고 들었는데.

“네, 맞아요.”

―그게 제일 중요해. 바운드 영지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걸 이덴베르 군도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이번에 군은 총력을 다할 작정이야.

“총력을 다한다면……?”

그가 말을 이었다.

―엘미르 군이 바운드 성에 공성전을 온 사이에, 숨어 있는 군사들이 엘미르 군을 바깥에서부터 치고 들어올 거야.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엘미르 군이 성에 집중하는 사이에, 바깥에서 전력을 다해 밀고 온다고요?”

그렇게 되면 마치 엘미르 군은 닭장 속에 갇힌 닭 꼴이 되고 만다. 이시스 오라버니를 비롯한 엘미르 군이 이 정보를 알고 있다면 모를까, 모른다면 굉장히 위험해질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군에 크나큰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 저절로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걸 군에 바로 알릴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상황이 나아질 텐데!”

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아르센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 정보를 알려 준 게 아닌가? 이 정보를 그들에게 전하라고 말이다.

“말은 쉽지만…….”

나는 답답해지고 말았다.

“당신 말대로라면 작전의 개시일이 5일 뒤라는 거잖아요. 그때까지 대륙을 횡단해서 전쟁터로 향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말로 가도 일주일은 꼬박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엘미르 군도 전략을 세울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아.

나의 말에 아르센이 반대로 허점을 찔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전령을 보낸다고 해도 5일 안에 전쟁터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겠군.

“당연하지요!”

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던가?

“네?”

―이것저것 조사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

“…….”

일견 시무룩하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문득 옛날의 아르센을 떠올렸다. 연구에 집착해서 한번 연구실에 틀어박히면 시간 감각도 없이 며칠이건 빛도 안 보고 살았던 아르센을 말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아르센이 언제가 되어야 연구실에서 나올까 기다리곤 했었다.

그때와 변하지 않은 구석도 있구나.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상념을 지워 버리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이걸 전해 주러 갈 사람을 찾아야…….”

―아, 정령을 이용하면 어떤가?

아르센이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네 정령, 루디온이라고 했던가? 너는 상급 정령사라고 들었다. 그리고 그 정령이 무척 빠르다는 것도.

물론 내가 상급 정령사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나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아무리 상급 정령이라고 해도 말을 타고 일주일 이상 걸리는 거리를 혼자서 가기에는 힘들어요. 게다가 저는 상급 정령사가 된 지 오래된 게 아니라서 더더욱 옆에서 정령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돼요. 정령이 혼자 갔다가 적군의 눈에 발각되어서 공격이라도 당하면 더 통제하기 힘들어지고요.”

―그럼 네가 같이 가는 건 어떤가?

그의 말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 밥 먹듯이 왔다갔다하던 과거 때문에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15살인 저를 전쟁터에 흔쾌히 보내 주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군.

아르센은 그제서야 또 깨달은 듯했다. 방금 전의 천재는 어디 갔는지, 숫제 맹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기세를 몰아 허리에 팔짱을 끼고 그를 몰아붙였다.

“정보는 감사해요. 그걸 전할 방법은 앞으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에게 말을 걸 때는 황녀에 대한 예의를 좀 더 갖추도록 하세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나도 말 놓을 거니까.”

나의 선언에 아르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 통신을 마쳤다.

‘……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센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사실 마음이 복잡했다. 그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나도 ‘내가 전쟁터로 향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이기에.

믿을 만한 전령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텐데, 차라리 내가 루디온을 타고 날아가서 정보를 전달한다면 모든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려면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 게다가 아무리 지난번에 리오텐에 다녀온 나라지만, 진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도무지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고민하던 나는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궁을 나섰다. 황궁 정원에 가서 잠시나마 산책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나의 뒤에는 시녀들과 호위 기사가 따라붙었다.

저 앞에서 황궁 숲이 보였다. 겨울밤이라 풀벌레도 없는 황궁 숲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반쯤 녹은 땅은 축축했고, 밤공기는 싸늘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강해서 나는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초승달만이 떠 있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한때에는 이 정원에서 오라버니와 뛰놀기도 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고 싶어.’

마음 같아서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돕기 위해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가장 중요한 일인 ‘부모님을 설득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 무리한 부탁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떠나야만 했다. 이시스 오라버니와, 엘미르 군 전체를 위해서라도.

‘무언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한 방법이 말이다. 그 누구라도, 심지어는 제국의 황제와 황후라도 절대 반대할 수 없는…….

고민하던 와중, 나는 문득 공기 중에서 청량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싸한 그 냄새는 한번 맡으면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듯이 독특했다.

나는 그 향기를 맡자마자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고 말았다.

‘……이건.’

누구의 향기인지 두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깨닫자마자 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모두.”

“네, 황녀 전하.”

나는 나의 뒤를 따라온 시녀들과 호위 기사에게 명령했다.

“잠깐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정원 밖으로 물러나 있으렴.”

“하지만 안전이…….”

“나에게는 정령이 있으니까 괜찮단다.”

사람들은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나의 정령 실력을 믿거니와, 실제로도 나에게 고민거리가 있어 보이니 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물러나고 난 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이넨 님.”

나무 뒤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향기의 주인공이었다.

신비로운 물색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지며 웃음기를 담뿍 담았다.

“……오래간만입니다. 하이넨 님.”

“그래, 그간 잘 지냈어?”

하이넨 님은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마치 어제 보고 헤어지거나, 오랫동안 알아 온 친구 사이처럼 말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뭇거리던 나는 하이넨 님에게 물었다. 여러 가지 감정들로 가슴이 복잡했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저. 루미나스 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나요?”

내 질문에 하이넨 님은 그림같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평온한 얼굴에는 균열 하나 없었다.

“궁금해?”

“……네.”

나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룬 님은 나를 지키다가 정령계에 억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를 돌아가게 한 원인이 나인데다가, 그가 이전에 치러야 한다고 말했던 ‘대가’라는 것도 무척 걱정이 되었다.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지만 하이넨 님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리듯 다른 말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보다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해야 할 일이요?”

“그래. 전쟁터로 당장 떠나도 시간이 모자를 판에, 여기서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지 궁금하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

그에 하이넨 님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나는 정령왕인걸. 정령계에서 인간계를 지켜보는 것쯤은 너무나도 쉽지.”

“……그렇구나…….”

나는 그의 말에 납득했다. 정령계에서라면 그가 마음만 먹어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할 테다.

“……그렇다면 모두 알고 계시겠군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그럼.”

내 말에 하이넨 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룬 님도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켜보셨을까. 그가 떠나가고 나서 내가 힘들어했던 모습은 도무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룬 님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찰나였다. 하이넨 님은 뜬금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도와줄까?”

“……?”

하이넨 님의 말투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마치 무척 즐거운 일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가볍다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네가 전쟁터에 떠날 수 있도록.”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망설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하이넨 님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그, 그건…….”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의 말이 맞다. 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떻게 해야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호의를 함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새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지금은 웃고 있지만, 원래 그가 나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전에 만났을 때 그는 나를 거의 죽이려고 위협했었으니까 말이다.

아르센의 정보를 믿었던 것과는 다르다. 그와는 다르게 하이넨 님에겐 나를 굳이 도와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저를 왜…… 도와주시려고 하는 건가요?”

“글쎄.”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 가지 말해 줄 수 있는 건, 내가 네 생각보다 자비로운 정령왕이라는 거야.”

“…….”

“굳이 내 호의를 의심하려 들지 마.”

내가 망설이고 있자, 그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의 의도보다는 네가 지금 처한 현실이 더욱 중요할 테니.”

그의 말도 맞았다. 어차피 정령왕인 그의 의중을 떠본들, 내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이 차라리 이득이리라.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입으로 말해 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계속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강력한 계기가 필요해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로?”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만한 정도로.”

“그래.”

하이넨 님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너를 위해 신탁이라도 내려 줄까?”

나는 두 눈이 커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시, 신탁이라고요?”

“루미나스의 권한을 대행해서 신관들에게 신탁을 내리는 것쯤은 나도 가능한 일이야. 그들에게 이 나라의 황녀가 전쟁터로 향해야 한다고 말해 줄게.”

나는 멍하니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왜…….”

“왜 너를 도와주냐고? 말했잖아. 나는 네 생각보다 꽤 자비로운 정령왕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하이넨 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소환되지 않은 정령왕이 인간을 도와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그의 말에 나는 가슴 한구석이 또다시 불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로 네 오라비를 돕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네게 힘이 필요해.”

“……힘?”

나는 홀린 것처럼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나는 네가 루미나스를 소환할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어.”

“…….”

“만약 그렇게 되면 너는 바라던 것을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거야. 무려 정령왕을 소환하는 거니까. 대신 그건 네 생명력을 필요로 하지.”

나의 생명력.

그 이전에도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인지, 처음보다는 훨씬 충격이 덜했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은 오라버니를 돕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복수하는 것.’

가슴이 떨려 왔다. 만약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면, 이 모든 바람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는 떠올렸다. 옛날에, 지금보다도 어렸을 때…….

복수를 이루게 된다면 나는 그 뒤에 무얼 하려 했더라?

‘……그래.’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평화롭게만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라고.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내 미래를 바쳐야 하는구나.

그 모순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이넨 님은 자신의 호의를 의심하려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의 의중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하이넨 님은……, 내가 룬 님을 소환하기를 바라시는 걸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를 소환할 결심이 선다면 말하렴.”

그리고 그는 나를 떠나갔다.

* * *

그 이후에도 나는 생각에 줄곧 잠겨 있었다. 룬 님과 헤어지고 난 이후 나는 내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작 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은 생 동안 룬 님을 잊을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아르센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단순히 루디온을 타고 날아가 정보만 전해 주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넨 님의 말이 맞다. 그의 말대로 룬 님의 힘이 있다면 오라버니를 돕고 전쟁을 빠르게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토록 염원해 왔던 것, 다시 말해 복수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보고 싶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룬 님이 보고 싶었다. 그것만은 너무나 강력한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호위 기사와 시녀들을 모아서 다시 방 안에 돌아왔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 *

그다음 날, 황궁은 새벽부터 들썩거렸다. 몇십 년 만에 신관들에게 새로운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대신관에게 내려온 그 신탁은 곧바로 황궁에도 전달되어 황궁 회의를 열게 했다.

신탁의 요지란 바로 이랬다.

‘아이샤 성녀를 한시의 지체도 없이 전쟁터에 보내 승리의 여신이 되게 할 것.’

본디 신탁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신탁은 달랐다. 하이넨 님께서는 해석하는 데 들어갈 일말의 시간조차 줄여 주시기 위해 이렇게 명확한 신탁을 내리신 듯했다.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지만, 신탁을 받아든 부모님께는 아니었다.

두 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신탁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국의 가장 지존이라 할지언정, 신탁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우리 제국처럼 국교가 있는데다가, 심지어 그 국교에서 몇십 년 만에 내려온 신탁이라면 더더욱.

결국 아침부터 끝없이 회의를 하던 부모님은 나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결론이 난 것에는 아마 ‘한시의 지체도 없이’라는 말 덕분도 있을 것이다. 나를 불러온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참 동안 나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이샤…….”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왜 하필이면 네가…….”

“아이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신탁을 거부해서라도 가지 않게 해 주마.”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까지 충분히 성녀로서의 역할을 해 왔지 않느냐. 설령 신이시라도 너에게 이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실 수는 없다. 게다가 위험한 전쟁터에 향하기엔 너는 너무 어려.”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빛에선 끝없는 걱정과 염려, 사랑, 불안이 느껴졌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나도 이시스 오라버니가 전쟁터에 가는 것을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전쟁에 나가야만 했다. 내가 직접 가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최대한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신탁에서 말했잖아요. ‘승리의 여신’이 되게 하라고.”

“……아이샤.”

“신께서 절 지켜봐 주실 거예요. 그렇기에 이런 신탁을 내리신 거겠죠. 저는 믿어요.”

내 말에 어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를 꼭 안으면서, 루디온을 타고 북쪽으로 날아가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호위 기사들을 뽑아 붙여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호위 기사들이 없는 것이 더 나았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끝낸 후 나는 바로 전쟁터로 향하기 위해 준비했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쫓기는 거지만, 두 분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은 나로서도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오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신탁으로 인해 다행인 점은 있었다. 황궁과 신전이 공식으로 신탁을 발표하자 엘미르 사람들의 사기가 어마어마하게 끓어올랐다.

신탁을 민간인들에게 발표한 정오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수도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전쟁터에 가 승리의 여신이 될 것이라고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법이, 몇십 년 만에 내려온 신탁인데다가 나는 성녀였다. 그들이 나에게 기대를 걸 만했다.

나는 빠르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황궁 정원에 나왔다. 귀를 기울이면 이곳, 황궁까지도 수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어마어마한 환영이군.

비단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통신구로부터 아르센이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주머니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아르센이 말하길 이 통신구에는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쉽게 깨지거나 망가질 일이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에게는 이미 내가 전쟁터에 혼자 떠날 것이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신탁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정말 출발해야 할 때였다. 나는 루디온을 타고 날아오르기 전, 엘미르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황궁 너머의 하늘은 너무나도 광활해 보였다.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저곳을 날아가야 한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을 저편으로.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나를 배웅하기 위해 정원 앞에 나온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시녀장과 유모, 내 궁의 시녀와 시종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활짝 웃어 보였다. 어머니는 불안함을 애써 숨기는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빛의 신께서 저를 지켜봐 주실 테니까요.”

부디 이 결정이 옳은 일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니, 믿자.’

나의 결정을.

나는 루디온의 등 뒤에 올라타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아무런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바람이 날려 나의 은색 머리카락을 흩쳤다.

* * *

루디온은 구름 위를 날아갔기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먹먹할 정도로 넓은 하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그런 나와 말 상대를 해 줄 아르센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때때로 내 상태를 물어가며 나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조금 의아해지기도 했다. 공작쯤 되면 하루가 무척 바쁠 텐데, 그가 나와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를 하고 있어도 되나 싶어서였다.

“바쁘지 않아?”

내가 그에게 묻자 그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안 바쁘다만.

“공작이 하루 종일 일도 안 하고 놀고 있으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그럼 공작님이 며칠쯤 휴가를 내셨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

본인이 그렇다는데 나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가 나를 신경 써 주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마웠다.

―그보다…….

“……?”

―정말 괜찮겠나? 내가 말하긴 했지만 정말 전쟁터로 향할 줄은 몰랐는데.

“이게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나는 약간 씁쓸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아르센도 그렇지만, 나 또한 그 누구보다도 이덴베르에 대한 복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래.

그는 내 마음을 알았음인지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밤이 되자 루디온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천천히 비행했다. 나는 모포를 둘러쓴 채로 루디온의 깃털에 몸을 묻었다. 그가 빛의 정령이기 때문인지, 그와 닿는 부분이 따뜻했다.

그 뒤로 나는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전쟁터의 근처에 와 있는 상태였다. 저멀리 초원에 세워진 엘미르의 진영이 보였다.

공터에 내리기 전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엘미르의 깃발을 꺼내 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몇몇은 나의 루디온을 보고 이미 나를 짐작한 듯했다. 내가 루디온의 등 뒤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층 거세졌다.

“황녀 전하?!”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신탁을 받고 전쟁터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수도 언저리에나 겨우 퍼졌으니 그럴만했다. 나는 그들의 경악한 얼굴에 조금 웃고 말았다.

오늘은 전투가 없던 날이었는지, 다행히 오라버니가 막사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 아이샤!”

나는 오라버니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다곤 하나, 어쨌거나 오라버니를 다시 본 것은 무척 반가웠다.

그는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프거나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걱정이 한결 덜어지는 기분에 내가 살며시 미소를 짓자, 오라버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게 환영이나 마법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좀 힘들 것 같아요.”

그제서야 오라버니는 우리를 바라보는 눈을 깨달은 듯했다. 혼란에서 조금 벗어난 그는 나를 그의 막사로 이끌었다.

총사령관의 막사이기 때문인지 그의 막사는 생각보다도 넓고 쾌적했다. 내가 막사를 둘러보며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자마자, 오라버니는 나를 숨가쁘게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나에게 할 말이라는 건 뭐니? 게다가 어떻게 여기에…….”

“오라버니, 이것을 읽어 주세요.”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내 품에서 문서를 꺼냈다. 그것을 보자 오라버니의 얼굴은 금세 심각해졌다. 황제의 직인과 신전의 문장이 찍혀 있는 문서였다.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알아보았으리라. 평범한 일이었으면 굳이 내가 여기까지 왔을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걸 읽으시면 다 알게 될 거예요.”

잠시 나를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문서를 펼쳐서 가만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문서를 다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은 더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를 전쟁터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상념들이 복잡하게 얽힌 듯했다.

“그걸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아들이셨단 말이냐?”

“신탁은 신탁인걸요. 신의 의지를 인간이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오라버니는 한참이나 입을 달싹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아직 이렇게나 어린데……!”

“저에게는 다행이었어요.”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에게 따로 전달해야 할 것도 있었거든요.”

나는 품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내가 아르센에게서 들은 군사 기밀이 그대로 적혀 있는 종이였다. 오라버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이건, 어떻게…….”

“오라버니.”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덴베르에 믿을 만한 사람을 두었습니다. 군의 기밀한 협력자가 알려 준 정보이니, 믿을 만 할거예요.”

“네가 이덴베르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오라버니는 이내 해답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전생과 관련된 사람이에요. 그와 저는 이덴베르에 복수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아이샤…….”

나는 아르센이 나에게 주었던 통신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것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정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면, 제 정령으로 미리 탐색해 보고 올 수도 있어요.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정령의 기척은 잘 느끼지 못하니까요.”

“……신탁은? 어떻게 때맞추어 이런 신탁이 내려온 거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하이넨 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 룬 님의 정체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

“다만 그 신탁이 거짓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릴게요.”

“……아이샤.”

그는 매우 복잡한 얼굴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막사의 구석으로 가서 물을 한잔 들이켰다. 그러고도 한참 뒤에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와 주어서 고맙다. 정보를 전해 주기 위해서 이곳까지 날아오다니, 정말 힘들었겠구나.”

“……아니에요.”

“덕분에 군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덴베르 군의 전략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그에 맞춰 대응할 준비를 해야겠지.”

오라버니의 말은 침착했고, 이성적이었다. 나는 그의 감사 인사를 들으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곤 하나 오라버니가 나를 걱정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에 그가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오라버니와 군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이덴베르 군의 전략을 몰랐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 옴으로서 인해 나는 수많은 엘미르 군의 목숨을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나 오라버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단호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렴.”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표정이었다.

“오, 오라버니?”

“올 때도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니 다행이구나. 막사를 내어 줄 테니 내일을 대비해서 오늘은 푹 쉬렴.”

“……오라버니!”

“아이샤. 나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단다.”

그의 강경한 태도에 나는 발끈해서 일어났다.

“저야말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요. 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몇 번이나 말했지, 아이샤. 위험하다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이 죽어 나가는 게 전쟁터야. 나가서 싸우기라도 할 셈이야?”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샤!”

“어차피 신탁은 내려졌어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제 와선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신께서 저에게 막사에서 잠이나 자고 가라고 신탁을 내리신 건 아니겠죠.”

오라버니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막사 안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그의 말이 들려왔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돌아가라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라버니의 마음은 알겠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아무리 명목상의 신탁이라지만 싫든 좋든 이곳에 머물러 신탁에서 말했던 것처럼 ‘승리의 여신’이 되는 수밖에.

‘……하이넨 님은 이것까지 염두해 두셨던 걸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단순히 내가 오라버니에게 정보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전쟁터에서 활약을 하도록 신탁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이넨 님을 생각하니 동시에, 룬 님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라면 내 결정을 이해해 줬을까? 혹은 위험하니 그도 나에게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했을까.

‘……룬 님.’

나는 오라버니의 막사 근처를 벗어나기 위해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의무관이 있는 천막에 멈추어 섰다.

마침 그곳에서는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의무관이 환자에게 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전쟁에 몇몇 신관들이 자원해서 왔다곤 들었지만, 병자가 항상 넘쳐나는게 전쟁터다. 신성력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막사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안 좋았다. 아무래도 아직 혹독한 겨울인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겨울에는 약초가 잘 수급도 되지 않는데다가, 물자도 부족하니까 말이다.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천막으로 다가갔다.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의무관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화, 황녀 전하?”

“도와줄게요.”

나는 루를 소환했다. 공중에서 밝은 빛이 퍼져 나가고, 그 안에서 루가 튀어나왔다.

“주인님! 너무 오래간만이에요!”

루는 소환되자마자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루의 모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나도 다시 봐서 너무 기뻐.”

나는 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루는 좋은 듯 헤헤, 웃었다.

‘진작 루를 소환했으면 좋았을걸.’

이제껏 룬 님이 생각나는 것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었지만, 루는 나의 오랜 친구였다. 그 애의 얼굴을 보자 몇 달 동안 그 애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새삼 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루의 온기를 만끽했다. 루는 마냥 좋은 듯 생글생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루에게 부탁했다.

“루, 저 군인을 치료해 줄래?”

“네!”

루는 포르르 날아가 다친 군인의 곁에 내려앉았다. 검에 베인 상처에 황금색 빛 가루가 떨어지자 그 상처가 조금씩 나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런 루의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환자의 환부가 그럭저럭 아물었을 즈음에 나는 루를 다시 불렀다.

“루, 돌아오렴.”

마음 같아서는 모든 상처를 다 낫게 해 주고 싶었지만, 환자가 너무 많아서 개인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지혈과 봉합을 끝냈으면 앞으로 상처가 아물어 가는 데에 큰 지장은 없으리라. 나는 의무관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환자들을 돕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얼떨떨해하고 있던 의무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무, 물론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요!”

내가 치료해 주었던 군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상처 부위를 바라보더니, 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해 왔다.

“가,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감사합니, 윽……!”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까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나는 그에게 가볍게 충고를 한 뒤 일어섰다. 그 뒤로는 나는 의무관과 함께 치료를 도왔다. 오늘은 전투가 없었기 때문인지 다행히 아주 심각한 상처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계속해서 일을 했더니 겨울인데도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예 머리를 묶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아지경으로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샤 황녀 전하!”

누군가가 내 이름을 뒤에서 불러왔다. 의아해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검푸른 투구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방금까지 순찰이라도 다녀왔던 모양이었다.

“누구……?”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소리가 낯익은 것 같기도 했지만,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투구를 벗었다.

맨 처음 보인 것은 제법 길어진,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다. 그 강렬한 색은 한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반은 놀라고, 반은 반가워서 외쳤다.

“비온 공자!”

“……전하!”

그는 그 특유의 푸른 눈동자로 못 박힌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온 공자가 벨트모어 공작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지만, 막상 낯선 곳에서 그를 마주하니 무척 놀라웠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가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가 오셨다는 걸 이시스 총사령관님께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저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겠죠?”

“……전쟁터는 위험하니까 어쩔 수 없지요. 이시스 총사령관님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럴 생각은 없어요.”

내 단호한 대답에 비온 공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뚝뚝한 그였지만, 오랫동안 그를 봐 온 경험으로 나는 그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녀 전하.”

이윽고 그가 어렵게 다시 말을 꺼냈을 때에도, 나는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또 같은 말을 한다면 듣지 않겠어요.”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적어도 제가 전달받은 황녀 전하의 막사를 안내하게 해주십시오. 시간도 늦은데다가 하루 동안 날아오셨다니, 황녀 전하께는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나는 새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침에 도착했는데, 벌써 늦은 오후 때였다. 그의 말을 듣자 잊고 있었던 피로가 모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이만 가 볼게요.”

의무관에게 인사를 하자, 그는 고개를 연거푸 흔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나는 천막에서 벗어나 비온과 함께 진영을 걸었다. 비온이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 총사령관님께서는 회의 중이십니다. 식사는 아무래도 혼자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관없어요.”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 밥을 못 먹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의 말 속에서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많이 바쁘신가요?”

오라버니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에 있을 공성전에 대비해서 새롭게 전략을 짜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저도 곧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온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오라버니가 내가 전달해 준 정보를 활용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다는 것이 짐작되었다. 비온은 막사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한 후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병자를 위한 막사라던 이곳은 전쟁터에서 드물게도 깨끗하고 쾌적한 곳이었다. 한쪽에는 침대도 놓여 있었고, 넓진 않아도 웬만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로 가만히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피곤하긴 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도 비온 공자도 나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

수도의 황성에 계실 부모님의 얼굴과, 나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더 이상 물러날 길은 없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오기로 결심했던 순간부터 이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생명력을 깎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룬 님을 소환하고 싶었다. 소환해야 했다.

‘……하이넨 님께 부탁하자.’

나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아쥐고 하이넨 님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그가 정령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으니, 이렇게 하면 들을 것 같아서였다.

나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청록색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 목이 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심한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하이넨 님.”

“마음은 정했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을.

* * *

하이넨 님은 나에게 마법진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 나는 그가 돌아간 이후로 멍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오늘 새벽,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정령왕 소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심장 위쪽이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인내했다.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던 나에게 비온이 다시 찾아온 것은 뜻밖이었다.

“황녀 전하.”

나는 비온의 목소리에 침대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요?”

내 지친 목소리에 비온은 잠깐 주저한 듯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막사를 젖히고 비온이 들어왔다. 어느새 바깥은 깜깜해진 상태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지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침에 도착한 이후부터 시간이 꽤 지난듯싶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비온의 표정은 조금 곤란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서 나는 금방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 내었다.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또 말씀하셨나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줘요.”

“하지만 황녀 전하.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기에 계시면 황녀 전하께서도 위험해질 겁니다.”

그는 이성적으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여기에 남아서 치료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황녀 전하의 치료술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황녀 전하를 여기에 둘 만큼 신관이나 치료사가 절박한 건 아닙니다.”

“…….”

“그렇다고 전쟁터에 나가실 작정이라면, 저는 물론이고 총사령관님께서도 황녀 전하를 뜯어말릴 겁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이다’라는 말을 할까 했지만, 참았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딱 3일, 3일만 있게 해 줘요.”

“……황녀 전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오라버니를 두고 그냥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비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있게 해 주세요.”

비온은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정말 3일만입니까?”

“네.”

나는 마음속으로 비온에게 사과했다. 3일이라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었다. 나는 오늘 새벽 정령왕을 소환할 생각이었다. 내가 정령왕을 소환하게 되면 그들도 나를 돌려보낼 수는 없으리라. 어마어마한 전력상의 손실이 될 테니까 말이다.

내 마음속을 모르는 비온은 오랜 시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총사령관님께는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비온 공자.”

나는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내가 고집을 꺾었다고 생각한 덕분일까, 아까보다는 막사의 공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비온 공자는 약간 겸연쩍은 듯, 막사의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의 눈길이 내려앉은 곳은 바로 책상 위였다.

이전에 막사를 쓰던 사람이 놓고 간 것인지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책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마 그것들이 내 것인 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셔도 공부를 하고 계십니까?”

“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다음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책상 위에는 내가 올려놓은 종이도 하나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종이였다면 전혀 문제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종이는…….

‘……하이넨 님께 받은, 마법진.’

바로 생명력을 대가로 마력을 얻는 마법진이었다. 다른 사람이 올 줄 몰랐기 때문에 숨기는 것을 잊고 말았다. 심장의 통증 때문에 정신이 없던 탓도 있으리라.

아니, 애초에 그것을 숨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이넨 님은 이 마법진이 이미 거의 소실된 지 오래되었다고 했으니 웬만한 사람은 그걸 보고도 전혀 읽지 못할 것이었다. 만약 그 사람이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 종이를 들어 올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마검사로 이름 높은 ‘그’ 비온 공자였다. 나는 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그건…….”

내가 그를 말리기도 전, 그는 그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 마법진을 읽을 수 있을까, 없을까. 나는 제발 그가 그것을 읽지 못하기를 기원했다.

‘오래된 마법진이라고 했잖아. 절대 읽지 못할 거야. 그럴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숨막히는 침묵이 지속되었다. 나는 차마 그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때, 비온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왜, 그러시나요?”

숨기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비온이 그 종이를 치켜들었다.

“이건 어떤 마법진인가요?”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비온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마법진을 읽을 줄 알면서도 나를 떠보기 위해 굳이 물어보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나에게 묻는 것일까?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건…….”

이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잃을 것이 없는 도박이기도 했다. 어차피 비온이 이것을 알고 있다면 숨기는 것은 무용지물일 테니까.

“……그건.”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간신히 웃어 보였다. 그가 일말의 이상함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태연한 척을 해야만 했다.

“정령 소환에 관련된 마법진이에요.”

“그렇습니까? 마법사들이 쓰는 것과도 꽤 비슷하군요.”

“그런가요? 저는 마법에 대해 전혀 몰라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그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바짝 조여 와서, 숫제 심장을 토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물론, 가족들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생명력을 희생할 작정이라는 것을.

그러니 그는 몰라야 했다. 모를 것이다. 그의 침묵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라도, 정말 만약에 그가 이 마법진을 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이넨 님께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그는 최면과 환영의 대가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하이넨 님이 나를 또 도와줄지는 미지수였다.

한참 동안 막사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 말 없는 비온을 초조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그가 아무것도 모르길.’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러다 침묵에 질식해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팔랑.

가벼운 소리와 함께 종이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

마치 그 순간은 억겁과도 같았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비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의 얼굴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모르는 걸까?’

만약 그가 마법진의 술식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걸 거야.’

그런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나마 환희했다. 비온이 나에게 말했다.

“제가 황녀 전하를 너무 방해한 것 같군요.”

“아, 아니에요.”

하지만 비온 때문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푹 쉬시길.”

나는 떠나가는 그를 예의상으로나마 붙잡지 않았다. 긴장의 끈은 그가 막사를 나서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재빨리 책상에 다가갔다. 그리곤 종이를 접어서 품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운이 나빴다. 아니, 좋은 걸까? 비온 공자에게 들키고도 무사히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들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 마법진을 올려놓다니.’

나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침대에 다시 걸터앉았다. 더 이상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새벽이 얼른 왔으면 좋겠어.’

나는 몸을 웅크리며 앉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도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어서 새벽이 와서, 이 모든 일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 * *

깜빡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눈을 뜨니 어느새 사위는 고요해진 채였다. 경비를 서는 불침번이 아니라면 깨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바깥이 추웠기 때문에 나는 모포를 몸에 둘렀다. 그다지 우아한 꼴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온 옷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모포를 두른 나는 막사의 막을 살짝 걷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불침번들은 대개 습격에 대비하기 가장 좋은,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법이다. 진영 가운데에 위치한 내 막사 근처에는 없었다.

나는 막사에서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잠이 오지 않아 밤 산책을 나왔다고 할 요량이었다. 가는 길에 순찰을 돌고 있는 몇몇의 군인들을 보긴 했지만, 요령껏 피해 다녔다.

이윽고 내가 도착한 곳은 진영의 끄트머리에 있던 넓은 공터였다. 룬 님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일부러 밖에 나왔다. 탁 트인 공터에는 달빛만이 나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정령왕 소환진은 이미 수십 번이나 보아서 눈을 감은 채로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후련한 한편, 심장 위쪽이 아픈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늘 나는 그토록 염원해 왔던 정령왕을 소환한다.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정령진을 새겼다. 나는 하이넨 님이 주었던 그 마법진을 떠올렸다.

마력과 생명력을 등가 교환 하는 그 마법진.

그 마법진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황녀 전하.”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등 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를 따라온 것인지, 그곳에는 비온 공자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온 공자의 머리카락은 어두운 적색으로 보였다.

“……비온 공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기척도 없이 그가 나를 따라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거침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요.”

“……비온 공자!”

그는 나의 지척으로 다가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평소에는 그의 머리카락이 타는 듯한 붉은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처럼 맑은 푸른 눈이 끓어오르는 불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정령을 소환하시려는 겁니까? 생명력을 교환해서?”

나는 주춤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 * *

나의 목소리는 풍랑 앞의 등불처럼 연약하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나요?”

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제 막사에 돌아가 책을 찾아보고서야 깨달았지요.”

“……비온.”

“황녀 전하께서 설마 그 마법진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고대에 거의 소실되다시피 한 마법진이니까요. 만약 제가 제국 건국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벨트모어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짐작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는 괴로운 표정이었다.

“황녀 전하,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냥 모르는 체하고 있어 줘요.”

나는 그에게 사정했다. 그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절망의 깊이가 유독 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저는……. 전…….”

한참이나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포기한 듯했다. 대신 그는 오라버니를 입에 담았다.

“……총사령관님에 대해서도 생각해 주십시오. 만약 그분께서 황녀 전하가 목숨을 걸고 정령을 소환하는 걸 아신다면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그가 오라버니에 대해 말하자, 나는 심장이 덜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일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나는 그를 향해 호소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싶지 않나요?”

내 말에 비온은 움찔했다. 그가 옛날부터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 줄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라버니의 오래된 친우이기도 한만큼, 하나뿐인 동생인 나에게 신경이 쓰였겠지.

나는 그가 전쟁을 무척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작은 동물마저도 아끼는 그에게 적군이라 할지언정 사람을 베는 일은 무척 힘들것이다.

그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한다. 나라고 해서 나의 생명력을 바치는 일이 기꺼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더 많은 피해가 생기기 전에, 그리고 나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는 것이다.

“정령왕을 소환할 거예요.”

나는 그에게 못 박듯 이야기했다.

“……황녀 전하.”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나는 충분히 각오했으니까.”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비온은 입을 달싹거렸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비온의 말에 나는 대단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정령왕은 혹시, 룬이라던 그 신관님입니까?”

“……!!!!”

나는 대답하는 것도, 평정을 가장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떨리는 눈으로 비온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비온은 씁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그랬군요.”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 언제부터 그걸 짐작했던 거지? 너무 많은 물음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본 비온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짐작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래부터 수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불쑥 나타났는데, 신성력은 대신관님에 필적할 만한데다가 평민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모습과 행동거지를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

“……더군다나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인데도 세간에선 그를 아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아마 그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던 사람은 저 말고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종교에 귀의한 사람의 과거는 묻지 않는 것이 관례이니, 저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그 일이라고 한다면……?”

“지난번 이덴베르로 가는 길에서 습격이 있었을 때, 같이 있었던 귀족들이 말했습니다. ‘룬’이라는 사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들과 황녀 전하를 돕고 사라졌다고 말입니다.”

“…….”

“그 전날까지만 해도 그는 황궁 사제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레 대륙을 그렇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마력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마법사가 아닌, 새로운 인물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었지요.”

“……그래서?”

“황녀 전하와 관련된 인물로서 가장 타당한 추리는 ‘정령’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가문의 고대 문헌들을 뒤지다가 정령왕들의 생김새와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중에서 저는 짐작한 것입니다. 그의 정체가…….”

“…….”

“빛의 정령왕이라는 것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추리는 정확했다. 이덴베르로 가는 길에 습격을 받고 난 이후에는 그 충격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다. 정신이 없어서 주위의 일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능력을 보고 그 정체를 짐작하는 사람이 한둘쯤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비온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도 이 사실에 대해 짐작하고 있을까요?”

그렇다면 다른 부분이 걸렸다. 부모님이나 이시스 오라버니도 룬 님의 정체를 알고 계셨을까, 라는 것이 말이다. 만약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 그분들은 그냥 나를 위해 못 본 채 넘겨 주셨던 것일까?

나의 말에 비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물론 황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자이신 황제 폐하께서는 황궁 사제가 사라진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조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정체를 알아내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비온 공자는 알아내지 않았나요.”

“……집요하게 조사했으니까요. 더불어 황녀 전하께서는 정령의 사랑을 받고 계신 분이니 믿기는 어려워도 루미나스 님께서 직접 황녀 전하의 곁을 지키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지요.”

그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그는 지고지순한 정령왕. 다만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잠깐 머물러 계시고자 하셨던 거지요.”

비온은 잠깐 말이 없었다. 아무리 짐작했다곤 하나 진실로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충격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비온이 룬 님의 정체를 미리 알아내었던 것이 놀랍긴 했으나, 생각해 보면 어차피 모두 밝혔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를 소환하게 된다면 그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테니까.

그때, 비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나를 설득할 셈이라면…….”

“그게 아닙니다.”

그는 나를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은 깊은 바다처럼 고요했고, 흔들림 하나 없었다. 나는 문득 그 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예.”

“……무슨 부탁인가요?”

그의 고요한 눈은 여전히 나를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직감적으로 그가 앞으로 할 말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 말에 대답하기 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그를 말릴 틈도 없었다. 달빛이 그의 등을 희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서도 포기하실 생각이 없다면.”

“……비, 비온 공자?”

“차라리 저를 써 주십시오.”

그의 눈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말에 눈을 떤 것은 나였다.

“……그게 무슨…….”

“진심을 다해 부탁드립니다.”

그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지 않냐고 물으셨지요. 예, 승리하고 싶습니다.”

“……그럼……?”

“다만 황녀 전하의 희생만큼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다행히 저에게는 마력이 충분하니, 차라리 저에게서 마력을 거두어 가 주시고 황녀 전하께서는 그대로 남아 주십시오.”

나는 내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마법을 쓸 수가 없을 거예요.”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은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마법사라곤 하나 정령왕 소환에 들어가는 마력은 어마어마하다.

그가 나에게 마력을 넘겨준다면 그는 앞으로 절대 마법을 쓸 수가 없으리라. 하지만 비온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각오했습니다.”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법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마법사가 아니므로 그 마음을 모두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추측해 볼 수는 있었다.

만약 내가 정령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으리라.

정령은 어릴 때부터 나의 곁을 지켜 주었던 친구이자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거의 손발을 잃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 것이다.

그것은 마검사로 이름 높은 비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 고위 마법사이면 고위 마법사일수록 자신의 마법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자신의 마력을 거두어 가라고 말하는가?

“……어째서?”

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마법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나요?”

그의 마음을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나를 안타까워하기 때문만은 아닌,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비온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깜깜한 와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전쟁에서 간절하게 승리하고 싶으니까요.”

“……그런…….”

“만약 전하께서 정령왕을 소환한다면, 제가 마법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전력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세상 만물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하께서 이토록 간절히 정령왕을 소환하시고자 하니까요. 저는 전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째서?”

아무리 그가 나를 신경 쓴다고 해도, 그가 마법까지 잃으면서까지 나를 도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그에게 묻자 그는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를 오랫동안 보아 왔으니까요.”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그건 그가 나에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일까? 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기 때문에?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오랫동안…… 계속 보아 왔으니까요.”

그는 그 심해처럼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

나는 문득 그의 마음의 깊이에 첨벙 빠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깊었다. 이제껏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나는…….”

그가 그런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의 마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내가 입술을 깨물자, 그는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비온 공자.”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는 나에게 다시 한 번 호소했다.

“부탁입니다. 굳이 전하께서 모든 것을 희생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의 마력을 대신 가져가 주시고, 황녀 전하께서는…….”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제 와서 알게 된 그의 마음도 무거웠고, 내 마음속도 복잡했다.

그의 말대로, 나라고 해서 희생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비온이 나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미 선택을 했어요.”

나는 내 손을 들어 가슴께 위에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쿵쿵 뛰는 심장의 맥박 소리와 더불어,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심장 위에 새겨 놓은 마법진의 감촉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하이넨 님과의 계약 이후, 나의 몸에선 이미 생명력과 교환하여 정령왕을 소환할 마력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끊임없이 심장께가 지끈거렸던 것은 그 이유였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마력을 생명력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랬다면 마력을 가진 마법사들은 몇백 년을 거뜬히 살고도 남았으리라.

“이곳에는 이미 마법진이 새겨졌어요.”

나는 비온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내 말을 들은 비온의 얼굴이 처참해졌다.

“……황녀 전하…….”

어찌나 그의 얼굴이 비통해 보였던지, 나는 황급히 그를 달래야 했다.

“비온 공자, 나는 괜찮아요.”

그의 말이 맞다.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는 없고,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생명을 희생하고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대신, 기꺼이 웃으며 받아들이고 싶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생명력을 희생한다고 해도,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아주 드물 것이다.

나에게 그런 행운이 있었다는 것에 차라리 감사하고 싶었다. 그리고 염원해 왔던 대로, 나의 복수를 나의 힘으로 끝마치리라.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비온 공자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없었다. 나는 비온에게 몸을 돌려서 정령왕 소환진 앞에 섰다. 비온은 감히 나를 더 말리지 못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땅에 그려진 정령진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들었다.

“……이 땅과 하늘과 바람과 불과 물을 이루는 정령들이여.”

소환하기 위한 주문을 외우자, 내 심장께에 새겨진 마법진이 불타는 듯이 아려 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작열감을 참았다.

“그리고 그 가장 정점에 선 위대한 존재이시여.”

몸안에서 나의 생명력과 뒤섞인 마력이 점차 바깥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피가 모조리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감각에 정신이 온통 멍해질 것 같았지만 애써 정신을 부여잡았다. 여기에서 쓰러지면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가 없다.

“여기, 그대를 간절히 부르는 내가 있으니…….”

땅 위의 정령진이 이윽고 흰빛을 뿜어내며 작동했다. 나는 크게 외쳤다.

“이 땅에 내려와, 나에게 힘이 되어다오!”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폭사했다. 분명히 깊은 밤이었는데 한낮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빛의 중심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눈부셨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눈부신 가운데에, ‘그’가 있음을.

‘……아.’

나는 환희했다. 드디어 내가,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어서 나는 이대로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내 그 새하얀 빛 가운데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맨 처음에 그가 나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밝아진 주변 때문인지 막사에서 사람들이 몇몇 나오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는 빛 속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백금발이 허리 근처에서 나부끼고, 그의 황금색 눈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루미나스, 이 세계의 모든 빛을 관장하는 빛의 정령왕이다.

그의 목소리에 한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소환한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의 이름은 아이샤 드 엘미르.”

나는 그를 향해 힘껏 웃어 보였다.

“당신과 계약하고자 합니다.”

그가 나를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왔다. 신의 현신이라면 바로 이런 느낌일까. 존재감을 전혀 숨기지 않은 그에게서는 빛이 넘쳐흘렀다.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신성한 빛이었다.

―그대는 세상에서 나를 처음으로 불러낸 유일한 인간.

그의 손가락이 나의 뺨에 닿았다.

―정령과 인간 간의 오래된 율법에 따라, 나 루미나스는 그대와 기꺼이 계약하겠다.

동시에 그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와 계약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예감했기 때문이다.

나의 수명이 길어도 10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그것은 짐승이 자신의 죽을 날을 아는 것과 비슷한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생명력을 잃은 나의 영혼은 나를 허전하게 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을 계약의 기쁨이 채웠다.

‘……이걸로 된 거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나스와 계약함에 따라 나의 몸에서는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힘이었다.

―나는 계약자인 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너를 수호하겠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루미나스 님에게 살며시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안심되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이 모두 풀려 버렸던 탓일까, 아니면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데에 대한 반동일까. 혹은 내 육신이 아직 어린 탓일까.

다음 순간, 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 *

잘 서 있는 것 같았던 아이샤는 종이 인형처럼 옆으로 허물어졌다. 루미나스는 그런 그녀가 땅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자신의 품에 그녀를 단단하게 안아 들었다.

동시에 루미나스는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말았다.

‘……후.’

그녀의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던 탓이다. 그럴 수밖에. 그녀는 아직 15살의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루미나스는 자신의 계약자가 튼튼한 인물이기를 굳이 바란 적은 없지만, 이번만큼은 아이샤가 어리고 약한 존재라는 것이 유독 안타까웠다.

잠깐 상념에 빠져 있는 루미나스 앞에 나선 인물이 있었다.

“……다, 당신은…….”

짙은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와 익숙한 생김새. 루미나스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이샤의 하나뿐인 오라비, 이시스였다.

루미나스는 눈에 이채를 띄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꽤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루미나스의 존재감에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함에 비교하면 이시스의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뭐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루미나스는 냉막한 목소리로 이시스에게 짧게 물었다. 아까 아이샤에게 대하던 따뜻한 모습과는 딴판이었지만, 그것을 지적할 아이샤는 지금 기절해 있었다.

이시스는 그의 힘이 버거운 듯이 이를 악물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그의 동생을 유달리 귀애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전에는 분명 신전에서 신관으로 계시지 않았습니까?”

간신히 그가 입을 열어 루미나스에게 질문했다. 루미나스는 답변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제 그가 온전히 아이샤의 계약자가 된 만큼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빛의 정령왕이자 그대들이 빛의 신이라 칭하는 루미나스다. 그대가 말한 것은 내가 인간 세상에서 지낼 때 잠시 눈속임으로 가장하던 신분이었지.”

“……빛의 정령왕!? 루미나스 님?!”

이시스는 크게 경악한 얼굴이었다.

“하, 하지만 어째서……?!”

루미나스는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거나, 그의 존재감을 버거워하는 가운데 그나마 멀쩡한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온이었다. 루미나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천천히 줄이며, 그를 지목했다.

“너는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것 같군.”

“……!!”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몰리자 비온은 긴장한 듯했다. 루미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주문했다.

“네가 말해 보아라.”

“……예. 정령왕님.”

비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령왕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흥미가 있어서 잠시 지상에 계시고자 하셨고, 그때 동안 신관으로서 엘미르에 머무르셨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엘미르’가 아니라 ‘아이샤’의 곁이었지만, 루미나스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비온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정령계로 돌아가셨지만, 아이샤 황녀 전하가 정령왕님을 정식으로 소환하셔서 이곳에 재림하게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 그대로다.”

“아, 아이샤가……?”

이시스는 밝혀지는 진실들에 더할 나위 없이 놀란 듯했다. 하지만 루미나스는 이시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대충 설명이 끝났으니 자신의 계약자를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눕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애초에 그가 그다지 친절한 성격의 정령왕이 아닌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인간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 그렇다면 아이샤 님께서 무려 정령왕을 소환하셨다는……?!”

“세, 세상에……!!!”

물론 그들이 놀라는 이유도 납득은 갔다. 이제껏 역사 속에서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아이샤가 뛰어난 정령사라는 사실을 반증했다.

사람들이 아이샤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그들은 크게 환호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계약자가 계약을 하는 사이, 대지는 어느새 밝아 아침이 되었다. 그 찬란한 빛과, 그들을 수호하는 신을 향해 사람들은 연거푸 감사 기도를 올렸다.

“위대하신 정령왕님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정령왕의 계약자, 황녀 전하께 만세!”

“만세!!!!”

그 함성이 어찌나 센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막사의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울 정도였다. 이윽고 깨어난 사람들이 사정을 듣고 합세한 그 함성은 더욱더 드높아져만 갔다.

그 가운데에서, 이시스는 루미나스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기절해 있는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루미나스는 그의 손을 무시했다. 이시스가 말했다.

“제 동생입니다.”

“내 계약자다.”

루미나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샤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시스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시스는 한참 그를 보다가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루미나스는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했다. 원래라면 대답해 줄 생각이 없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계약자인 아이샤가 무척 아끼는 혈육이니 조금 너그러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루미나스 님께서는 신분을 가장해 가면서까지 인간계에 머무르셨던 겁니까?”

그 당돌한 질문에 루미나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품에 안긴 계약자를 바라보았다.

“소중한 존재를 지켜보기 위해서.”

이시스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의 햇살이 그들을 비추었다.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알리사였고, 내 옆에는 라키아스 오라버니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었던 것은, 바로 마리안느.

그 날은 마리안느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때마침 그녀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던 나는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그녀를 나의 궁으로 초대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라버니인 라키아스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마리안느는 시녀 소생의 황녀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만, 시녀인 어머니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외척이 전무한 그녀의 궁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황궁의 가장 구석이 되었고, 황궁 사람들에게 그녀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굳이 나에게 마리안느에게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 애는 이제 내 가족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좋은 언니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이제 막 황궁에 들어오게 되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그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안타까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언제쯤 마리안느가 도착할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마리안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쯤 그 아이를 기다렸을까. 내가 라키아스 오라버니와 정원에 마련된 티테이블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멀리 그 아이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아이에게 인사해 보였다.

“마리안느! 여기야!”

그러자 마리안느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런 그녀를 수행하는 시녀는 고작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다가, 그마저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나는 마리안느를 만난 것이 기뻐서 그 애에게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그 아이의 눈동자는 이내 티테이블에 못 박힌 듯이 고정되었다.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던 나는 그 아이가 디저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리 와, 같이 차를 마시자.”

나는 마리안느를 데려와 내 앞에 앉혔다. 내 시녀가 그녀의 무릎에 냅킨을 깔아 주고, 향기 좋은 차를 그녀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라키아스 오라버니는 마리안느를 보고도 심드렁한 표정이기에, 나는 재빨리 오라버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오라버니는 꽤 아픈 표정을 했다.

“……만나서 반갑군.”

마치 태엽 인형처럼, 라키아스 오라버니가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라키아스 오라버니는 원래부터가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오라버니를 흘겨보다가, 나는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마리안느에게 건네었다.

“마리안느!”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네 생일 선물이야.”

“……생일 선물?”

“응! 어서 풀어 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리안느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엉성한 손놀림으로 상자의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고 기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상자 안에서 드러난 것은 한 쌍의 인형이었다. 파란색과 분홍색의 한 쌍으로 만들어진 귀여운 곰 인형 두 마리. 마리안느는 그 선물을 보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인형을 껴안으면 잠이 잘 오더라고.”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황궁에 와서 힘들지? 아마 나였으면 잠도 잘 못 잤을 거야.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상담해도 돼.”

마리안느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응?”

나의 재촉에, 마리안느가 눈을 내리깔았다.

“……감사합니다. 알리사 황녀 전하.”

“황녀 전하라니, 이제 우리는 가족이잖아. 언니라고 편하게 불러 줘.”

내 웃음에 마리안느가 내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언니,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뭔데?!”

마리안느는 그녀의 몫으로 주어진 찻잔을 어색하게 가리켰다.

“이거,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것도…….”

이어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디저트들을 가리켰다.

“……전부 낯선 것들뿐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혼날 것을 염려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나는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 이 아이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는 것이 가슴 아팠다. 더불어 그 아이의 주눅든 태도도.

나는 하나하나 그것들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그건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루비 차야. 향기가 좋은 차를 마실 때에는…….”

테이블에 올려진 것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보니, 그녀가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언니는 뭐든지 다 잘 아시네요.”

나는 수줍게 웃었다.

“뭐든지 물어봐도 괜찮아. 내가 아는 거면 다 알려 줄게.”

여동생이 생겨서 나는 무척 기뻤다. 지금까지 다른 가족들과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앞으로 마리안느와도 재미나게 놀 생각에 들떴다. 그때였다.

“여기, 생크림이 묻었구나.”

내내 잠자코 있던 라키아스 오라버니가 냅킨을 들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언니랍시고 멋진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생크림을 묻히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케이크를 먹다가 묻은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부끄러워서 뭐라도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던 때였다. 때마침 저 멀리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리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 있었다.

“……엘시스 오라버니, 아드린느 언니. 를르스?”

오래간만에 보는 가족들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남매가 여럿이다 보니, 모두가 한곳에 모이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는데…….

“다들 어쩐 일이야?”

내가 묻자 엘시스 오라버니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 머리에 턱, 손을 올렸다.

“오래간만에 시간이 나서 다 같이 네 궁에 놀러오기로 했지.”

“정말?!”

나는 기뻐서 활짝 웃고 말았다. 잠자코 있던 아드린느 언니가 물었다.

“여기서 티타임을 하고 있었구나?”

“응! 아……, 다들 라키아스 오라버니랑 마리안느한테 인사해.”

라키아스 오라버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긴장한 것은 마리안느뿐이었다. 호기심이 가득 섞인 가족들의 눈동자에 마리안느는 다시금 어깨를 움츠렸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리안느는 우리 동생이니까, 앞으로 잘 지내자!”

내 말에 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리안느에게 인사를 하거나 했다. 눈치를 살피던 마리안느는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한입 가져다가 먹었다.

“……맛있어요.”

그 애는 그 케이크의 맛이 무척 마음에 든 듯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 애에게 뺨을 가리켰다.

“볼에 생크림이 묻었어.”

아까 나와 같은 실수를 했던 것이다. 그 애도 무척 민망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냅킨을 건네주었다. 마리안느는 그 냅킨을 빤히 바라보다가, 받아들였다.

그런데 착각이었을까? 마리안느가 잠깐 라키아스 오라버니를 곁눈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키아스 오라버니는 그저 무표정하게 있었을 뿐이었다.

‘착각인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손뼉을 짝 부딪혔다.

“왜 그러세요. 누님?”

를르스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있잖아. 마리안느한테도 애칭을 붙여 주는 건 어떨까?”

“애칭을?”

“그거 좋은데.”

마리안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마리안느를 향해 말했다.

“나는 보통 리스라고 불리거든. 음, 마리안느는……. 마리라고 하는 건 어때?”

“……마리?”

“응.”

그녀는 그 이름을 잠자코 곱씹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리…….”

나는 활짝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마리.”

* * *

정말로 즐거운 티타임이었다. 오래간만에 가족들을 봐서 기뻤고, 이제는 새로운 가족이 된 마리도 있었다.

나는 티타임을 끝낸 뒤 마리의 궁에 마리를 바래다주러 갔다. 나의 뒤에는 여러 명의 호위 기사와 시녀가 뒤따랐다. 마리의 궁이 아주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꽤 먼 길을 가야 했다. 그동안 마리는 그다지 말이 없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에서 마리의 궁이 보였다.

“있잖아, 마리.”

나는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예전부터 나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거든.”

마리가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와 줘서 정말 기뻐.”

그것은 나의 순수한 진심이었다. 나는 그 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뿐만이 아니야. 모두 널 좋아하게 될 거야.”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내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리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 대신 나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언니.”

“……?”

마리는 침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약간 달라진 마리의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왜?”

문득, 마리가 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그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지만…….

어쩐지 나는 마리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까까지 푸르던 하늘은 어느새 붉은 노을이 들어 있었다. 그 붉은색은 아름다운 반면,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띠고 있었다. 그 붉은빛은 마리의 옆얼굴에도 내려앉았다.

“그거 아세요?”

그녀가 천천히 나를 향해서 말했다. 나는 마리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저는 두 번째는 싫어요.”

두 번째. 그녀의 말에서 어쩐지 강한 힘이 느껴졌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필요 없어요.”

그녀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오직 첫 번째만이 좋아요.”

문득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더운 날씨였는데도 말이다. 마리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 그래?”

그저 그 아이가 ‘첫 번째’를 좋아한다기에,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이다. 마리는 아리송해하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궁까지 바래다줄…….”

“저 앞인걸요.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마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궁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손질되지 않은 마리의 궁 담벼락에는 가시덩굴이 엉켜 있었다.

노을의 붉은빛과 뾰족한 가시덩굴, 그리고 마리의 뒷모습까지. 그 모습은 무척 기묘한 느낌으로 나에게 남았던 기억이 든다.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마리는 이후에 라키아스 오라버니를 무척 따랐다는 것이다.

시녀 소생이라 궁에 들어오지 못한 어머니,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아마 쓸쓸했던 마리는 라키아스 오라버니에게 보듬어지고 싶었던 것이리라.

라키아스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사실 자신의 사람들을 무척 소중하게 아꼈으니까. 그와 마리의 나이 차이가 꽤 나니 마리로서는 더더욱 부모님처럼 의지했겠지.

그렇다면 왜였을까? 왜 마리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걸까…….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 애를 직접 만나, 그 애의 입으로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잠에서 깨었다. 눈앞에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게 뭘까.’

나는 멍하니 그 천장의 무늬를 관찰했다. 아직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이 몽롱했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나는 그것이 막사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머리가 조금 아팠다. 마리안느에 대한 꿈을 꾸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이마를 짚어 주었다. 꽤나 서슴없는 동작이었다.

“어디가 아픈가?”

그리고 눈앞에서 빛이 환하게 빛나더니, 아프던 머리가 씻은 듯이 나아졌다.

“……?”

이게 뭐지?

또다시 생겨난 의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 치료 방식은 내가 아주 잘 아는 것이었다. 내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쓰는 빛의 힘이 아닌가.

‘신관이 와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옆에는 신관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사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말이다.

그는 룬 님이었으니까.

“……아?”

처음에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게 뭐야!!!!!’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런지, 아니면 룬 님을 보아서인지 심장이 거세게 뛰어 왔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룬 님께 들릴까 겁날 정도였다.

“루, 루…… 룬 님?!”

“그래.”

남은 이렇게나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데, 룬 님은 태연하게 내 말에 긍정했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마치 언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바보같이 보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아직도 꿈?”

아니, 꿈은 아닌데. 나는 내 뺨을 강하게 꼬집어 보았다. 뺨이 얼얼하게 저려 왔다. 이 느낌으로 보아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닌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아니면 환상?’

그 와중에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내가 그를 많이 그리워했다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한 환상이 있을 수 있는가?

‘설마…… 진짜?’

룬 님은 내가 어버버하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볼이 화끈 달아올라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게 현실이라면 무척 민망한 일이다. 나는 우선 그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

나는 눈을 슬쩍 들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틀림없는 그였다.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도,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까지도 모두, 룬 님이었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 어째서 오신 건가요?”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분명히 정령계로 돌아갔었던 그이다.

‘설마 나 때문에 룬 님이 다시 정령계에서 돌아온 걸까?’

나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대가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가 내 곁에 다시 옴으로 인해 또 다른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룬 님이 와 주신 건 정말 좋지만…….’

내가 안절부절못해하고 있자, 그가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시나요?”

그의 눈빛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절로 움츠러들어 있는데,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나를 소환하지 않았나.”

“……네?”

“몸은 좀 어떤가?”

나는 또다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제가…… 룬 님을요?”

나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 하이넨 님과 계약을 했었지.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꾸는 마법진을 내 심장 위에 새겨서…….

‘…….’

몸의 기운을 살펴보니 마법진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아마 룬 님을 소환할 만한 마력을 모두 만들고 나서 자동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그 마법진이 남아 있었다면 계약할 때 룬 님이 분명 눈치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그것도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를 소환하고, 빛 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갔던 그 기억이…….

‘전부 진짜라고?’

이제서야 기억들이 어렴풋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혼란한 마력과 생명력의 부재로 인한 공허, 정령왕을 소환하는 긴장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룬 님을 소환했다고? 내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정령왕 소환자?’

나는 정말로 믿기지 않아서 또 뺨을 꼬집으려다가 룬 님의 앞인 것을 알고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기뻤다.

‘……내가 정말로 해냈어.’

절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온몸에 기쁨이 차올랐다. 그리고 기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룬 님이 나에게 살짝 웃어보였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알 수 있다. 나를 소환하기까지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을 테지.”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기쁨도 잠시, 역시 룬 님께서는 내가 어떤 마법을 썼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계신 게 분명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마력이 충만해진 대신에 나는 어딘가 몸의 그릇 한구석이 이상하게 텅 빈 것 같았다.

“……정말로 간절했거든요.”

그래, 내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괜찮아.’

나는 억지로 상념을 털어 버리고 룬 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궁금한 것도 있었다.

“……정령계에서 받으셨던 대가는 어떤 것이었나요?”

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신경 쓰였다. 그가 나를 지켜 주다가 정령계에 돌아갔던 만큼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는 걸로 봐서, 인간계를 지켜볼 수 없었던 걸까? 설마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거나…….

내 질문을 받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중에 얘기해 주지.”

그가 대답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그저 그렇게 말을 돌려 버릴 뿐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더 캐묻지는 못하고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가 되풀이해서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몸이요……?”

나는 그제서야 내 몸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어딘가 한구석이 허전하긴 했지만, 그것을 빼고 몸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거의 상쾌하기까지 했다.

설마 룬 님이 치료해 주셔서 나은 걸까?

아니, 어쩌면…….

“……제가 나을 때까지 계속 저를 돌봐 주신 건가요?”

내 말에 룬 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싫은가?”

그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내가 계속 붙어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면 사과하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아니에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를 신경 써 주는 것이 기쁘고 좋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따뜻한 것이 번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룬 님과 계약했구나.’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룬 님이 있어서 너무 기뻐요.”

나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미소를 보였다. 돌아온 그가 자주 웃어주는 것에 너무나도 가슴이 설렜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막사의 천막이 휙, 열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역광 때문에 처음에는 천막을 걷고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가 이시스 오라버니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깨어 있는 줄 몰랐던 것 같다. 나를 보자 눈을 커다랗게 떴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룬 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켰으니.

“아, 오, 오라버니.”

나는 어떻게 그에게 변명해야 하나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실종되었던 황궁 사제가 왜 여기에, 그것도 내 곁에 있는지에 대해서 변명하려니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가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굳이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음이 곧 드러났다. 그는 룬 님에게 먼저 인사했다.

“정령왕님을 뵙습니다.”

‘정령왕님이라고?’

나는 깜짝 놀라 룬 님과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네가 기절해 있던 동안 정령왕님께서 설명을 해 주셨단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룬 님을 바라볼 때에는 날카롭게 굳어 있던 얼굴이 나를 바라보자 부드럽게 풀렸다.

“몸은 좀 괜찮니?”

그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전해지는 온기가 무척 따뜻했다.

“네가 쓰러져서 무척 걱정했단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정령왕을 소환하고, 쓰러졌었다. 그가 무척 걱정할 만도 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내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다. 아이샤. 그보다 축하한단다. 정령왕님을 소환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오라버니…….”

“무척 힘들었지? 네가 자랑스럽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에게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의 따뜻한 웃음에 나는 따라 웃고 말았다.

“저도 무척 기뻐요.”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오라버니의 축하를 받으니 정말로 내가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실감이 조금 들 것 같았다. 그것을 오라버니에게 말하니, 오라버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더 멋진 것을 보여 줄까? 같이 나가 볼래?”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버니가 고개를 돌려 룬 님께 물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그 정중한 요청에 룬 님은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나의 의사를 묻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나는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라버니는 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막사에서 나가기 전에 그의 겉옷을 내 어깨에 둘러 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자, 나가자.”

그가 막사의 천을 걷었다. 눈이 조금 부셨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천막 밖으로 몇 걸음 움직였을 때였다.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샤 님!”

“아이샤 님!”

그 수많은 함성은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나를 줄곧 기다려 왔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살피고 말았다. 나의 천막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엘미르 군인들이었다.

“정령왕의 계약자이시어!”

“승리의 여신!!!”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중 몇몇은 내가 계약하던 장면을 보았으리라. 그 대상이 정령왕이었다는 것도.

사정을 보아하니 오라버니는 내가 신탁을 받고 이곳에 왔음을 이미 선언한 모양이었다.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실제로도 사람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한 마디라도 붙여 보기 위해서 열성적이었다. 너무나 열성적인 나머지, 약간 부담스러웠을 정도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나와 룬 님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조금 기운이 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리 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들의 함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혹시라도 룬 님이 이렇게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까 해서 슬쩍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한낮의 햇살처럼 눈부셔서, 가슴이 쿵, 쿵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

이시스 오라버니는 우리를 자신의 막사로 인도했다. 그의 막사로 가는 동안 함성은 끊이질 않았다. 이윽고 막사에 도달했을 때, 이시스 오라버니는 붉은 천막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걷었다.

안에는 엘미르 군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벨트모어 공작과 비온 공자, 그리고 몇몇의 장군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해 왔다.

“정령왕님과 총사령관님, 그리고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어느 군인이 우리를 위해 의자를 몇 개 더 가져왔다. 그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명백히 회의를 위해 모인 듯한 자리였다. 그곳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은…….

“오라버니?”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나를 향해 눈을 맞추어 왔다.

“아이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마음과 같아서는 너를 지금이라도 황궁에 되돌려 보내고 싶단다.”

그의 눈이 씁쓸함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기까지 한 너를 더 이상 막을 방법도, 명분도 없구나. 이대로 너를 돌려보내서 네 날개를 묶기보다는, 차라리 너를 내 가장 근처에 두고 지키는 것이 낫겠지.”

“오라버니…….”

“많이 고민했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말을 이해했다. 더 이상 나를 강제로 막을 수는 없으니, 차라리 모든 정보를 함께 공유함으로써 같이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내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기뻤다.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라버니가 나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룬 님께도 같은 권유를 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신 그는 나를 지키듯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렇게 내가 참여한 첫 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다. 책사 한 명이 테이블 위에 깔린 지도의 한 부분을 막대로 가리켰다.

“정보대로라면 바운드 성을 공격하러 갈 때, 이덴베르의 군사가 이쪽 산 근처에 모인다고 했습니다. 원래처럼 공성에만 군사를 집중하면 오히려 뒤쪽의 이덴베르 군사들에게 공격당하고 말 겁니다. 앞뒤에 갇혀서 이도 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지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우리 군도 두 파로 나뉘어서 각개 격파를 하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그의 말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우리 쪽과 이덴베르 군사의 수는 비슷하다. 그렇다면 두 파로 나뉘어서 양쪽을 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계획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의견이 나왔다. 바운드 성을 공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성 무기라든가, 이덴베르 군의 방어선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이라든가.

사람들은 바쁘게 토론했다. 처음에 룬 님이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 저어하던 그들이었는데, 그래도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틀이 잡혀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굳이 군사를 두 편으로 나눌 필요가 있나?”

내 뒤에 있던 룬 님이 사람들을 향해 질문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굳었다. 처음으로 룬 님이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숨길 수 없는 존재감 때문일까. 나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처음으로 그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떨 만도 했다.

그중에서 그나마 담력이 센 벨트모어 공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씀하신 의도가……?”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굳이 허점을 찌를 필요가 없지.”

룬 님은 쉽게 말했다. 그 말도 맞았다. 만약 앞뒤로 공격해 오는 이덴베르 군을 진압할 탁월한 무력이 있다면 굳이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이덴베르를 기습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모여 있는 군인들을 한꺼번에 소탕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을 도대체 누가 소탕할 것인가? 아무리 검의 천재라고 부르는 이시스 오라버니라도 혼자서 군인들을 모두 상대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었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총사령관으로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하,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만이나 되는 군사들을 압도할 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군인의 말에 룬 님이 가볍게 답했다.

“내가 앞장서지.”

“……!!!”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정령왕님께서……?!”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이제야 새삼 깨달은 것 같았다. 하기야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해도, 정령을 잘 모르는 그들로서는 정령왕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룬 님은 십만이나 되는 군대의 숫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군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 되었다.

“저, 정령왕님……!!!”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새삼 내 뒤에 선 룬 님의 존재를 느꼈다. 이제 우리에게는 룬 님이 있었다. 십만의 대군이던, 백만의 대군이던 두렵지 않다.

보통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를 인간이 상대하기란 더없이 어려운 법이다.

자연 그 자체인 룬 님의 힘을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단언컨대 세상에 아무도 없으리라.

나는 저절로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의 뒤에 룬 님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속에서 희망이 싹터 오르는 기분이었다.

* * *

회의를 끝마쳤을 때였다. 내가 내 막사로 돌아가기 전,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불러세웠다.

“……아이샤. 잠깐 둘이서 얘기할 수 있을까?”

나는 룬 님을 돌아보았다. 그가 나를 보더니 막사 바깥으로 나가 주었다. 아마 둘이서 편하게 대화하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막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가고 이윽고 나와 오라버니 둘만이 남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이샤.”

그는 조금 망설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이 말이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단다.”

그토록 그가 뜸들이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어 나온 말에 나는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너는 이덴베르의 황족들을 어떻게 하고 싶니?”

오라버니의 고요한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이번 작전대로라면 분명히 나와 적국의 총사령관…… 그러니까 엘시스 대공과 부딪히게 되겠지.”

“…….”

“그가 총사령관인 만큼 그와 내가 맞붙게 되면 누구 한 명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단다.”

나는 내 손을 꽉 쥐었다.

“……저는.”

이시스 오라버니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에게 오라버니는 단 한 명뿐이에요.”

나는 오라버니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리고 제 오라버니가 무엇보다 다치지 않기를 바라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말이 맞다. 만약 복수한다면 이덴베르의 황족들을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한다. 먼저 쳐들어오기까지 한 그들에게 자비를 보여 줄 수는 없었고, 특히나 적국의 황제인 라키아스는 절대 살려 둘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엉켜 버린 실이었다. 더 이상은 되돌릴 수 없어서 끊어 버릴 수밖에 없는.

나의 단호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오라버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겠다.”

“…….”

“이만 들어가서 쉬렴.”

나는 그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를 맡을 수가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룬 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 그냥 포기해 버렸다.

“……잠깐만 걸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복잡해서 조금은 걷고 싶었다. 군인들이 우리를 보고 또 인사하거나 함성을 지르지 않도록, 우리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마음속의 짐은 덜어지질 않았다. 며칠 뒤가 바로 작전 시행일이다. 그날이 되면 수많은 이덴베르 군과 싸워야 하리라. 그리고 그 끝에는 이덴베르 황족들이 있겠지.

나의 전 가족이었던 그들이.

그들을 무릎 꿇리고 내가 당했던 만큼을 되돌려 주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주하지도 않고 그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머리를 사로잡은 것은, 두려움이었다. 걷던 나는 결국 멈추어 섰다. 어느새 어둑해진 겨울 하늘이었다. 주변은 놀랄 만큼 고요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룬 님…….”

“왜 그러지?”

“……저는 무서워요.”

그것은 이시스 오라버니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심이었다.

아르센이 말했었다. 마리안느가 나의 죽음을 조종했다고 말이다. 그 아이가 어떠한 사술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센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조사하고 연구한 부분인데다가 나에게도 심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운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어쩌면 사정이 있었을까 봐.”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게 될까 봐. 나는 그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그들에게 당했던 아픔이 어젯밤 일처럼 생생한데, 그들에게도 어쩌면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곤 상상하고 싶지조차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딜레마였다.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시스 오라버니가 엘시스를 죽이고, 우리 군이 이덴베르까지 진격해서 황궁을 사로잡는다면. 그다음에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 앞에 서야만 할 것이다. 그토록 바라 왔던 장면인데 어쩐지 지금은 무섭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어서 더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겨울바람이 시리게 내 몸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네 마음은 알겠다.”

그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컹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이니까.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굳이 용서할 필요는 없다.”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였다.

“다만…….”

그가 내 앞에 섰다. 몸을 숙여 내 눈과 눈을 맞추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너를 지키겠다.”

“…….”

나는 마법에 홀린 것처럼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그의 말은 다정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코를 조금 훌쩍이고 말았다.

“……룬 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너에게만 그렇다.”

“저에게만요?”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코를 훌쩍이다가도 못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감사해요.”

내 뭉그러진 발음에도 불구하고 룬 님은 그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지지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는 두려움을 덜어 낼 수 있었다.

내가 그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존재. 그가 있기에 나는 마음속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어둡다고만 생각했는데, 밤하늘에는 별도 달도 떠 있었다. 빛나는 별들은 마치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전의 날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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