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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습격 (18/21)

Chapter 12. 습격

이덴베르로 가는 길은 아주 순조로웠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벌써 열흘의 일정이 반 이상 지나간 상태였고, 베오른 백작에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딱 반 정도 왔다고 했다.

나는 마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거나 소일거리를 했지만, 마차가 멈추면, 꼭 마차에서 내려 기분 전환을 했다. 첫날 빼고는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날씨가 좋았다.

한자리에 계속 앉아 있거나 누워 있기만 하면 몸이 뻐근해지니 틈틈이 몸을 풀어 주기도 했고 말이다. 요한의 부탁대로 식사도 꼭꼭 챙겨 먹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수확도 있었다. 요한을 비롯해 내 호위 기사들과 꽤 많이 친해졌던 것이다. 내가 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마차 밖에 나가 정령을 소환하면, 그들은 그 모습을 엄청나게 열심히 보곤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정령처럼 아름다운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첫날 스튜를 떨어뜨렸던 기사의 이름은 ‘무이’라고 했다. 약간 독특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자신은 사막 혼혈이라며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추운 곳은 질색이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를 호위하는 길에서 빠지고 싶지 않아서 자원했다나.

그 밖에도 많은 기사들을 알게 되었고, 몇 명의 귀족들과도 친해졌다.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지만, 내가 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눈 상대들은 내 기사들이었다.

내 목숨을 지켜 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했거니와 그들은 생각보다 꽤 웃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나는 점심 식사 시간에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기사들이 반색하고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익숙하게 말을 꺼냈다.

“다들 뭐 하고 있었나요?”

“아, 그게…….”

기사 중 한 명인 에트론은 약간 곤란한 얼굴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또 무이와 요한이 투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어떨 때는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다가도, 때로는 별거 아닌 일에 싸우곤 했다.

“성녀님의 호위 기사에 제일 잘 어울리는 건 바로 나야! 내가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 그래 봤자 머리가 없어서 제대로 써먹질 못하잖아.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 못 들어 봤어?”

“뭐? 리오텐에서 온 촌뜨기 주제에!”

“그러는 너는 사막에서 왔잖아!”

나는 슬그머니 에트론을 향해 물었다.

“……오늘의 싸움 주제는 뭔가요?”

그가 여전히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누가 더 성녀님의 호위 기사에 잘 어울리는지에 대해서 토론하다가…….”

“…….”

토론할 게 없어도 그렇지, 그런 걸 가지고 싸운단 말인가.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아니,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싸운 주제들로 따지자면 차라리 이 이유가 납득갈 정도다. 지난번에는 뭣 때문에 싸웠더라? 그래, 아마 스튜를 빵에 적셔 먹느냐인가 찍어 먹느냐, 였나? 이런 중요하지 않은 주제로 싸웠었다.

다른 기사들은 무이와 요한의 대결을 흥미로운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실력은 거의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그들도 이 대결의 끝이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단순히 투닥거리던 그들의 싸움은 점차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무이도 요한도 서로 만만치 않게 다혈질인 성격이라, 짚에 불붙이듯 화가 확 들끓어 오르는 듯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말릴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황녀나 성녀라는 위치가 결코 기사들 싸움이나 말릴 만큼 한가한 일은 아니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나는 내 어깨에서 루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 애에게 부탁했다.

“루, 저 둘을 말려 줄래?”

“네! 주인님!”

루는 신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순한 얼굴과는 정반대로 아주 거칠게, 그들을 빛의 밧줄로 꽁꽁 묶어 버렸다.

“으악! 이게 뭐야!”

“헉, 황녀 전하. 언제 내려오신…….”

나는 팔짱을 꼈다.

“대체, 기사라는 사람들이 왜 허구한 날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나요?”

“아니, 그게. 성녀님. 억울합니다.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저야말로…….”

그들은 앞다투어 서로에 대한 비방을 했다. 그래도 내 앞이니만큼 최대한 말을 조심해 가면서 말이다.

“둘은 정말 사이가 안 좋군요?”

그렇게 슬쩍 운을 띄워 보니, 그들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런 녀석은 성녀님을 호위할 기사로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저 녀석 때문에 매일 같이 입맛이 떨어진다니까요!”

“저런…….”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러면 어떡하죠? 둘 중 한 명이 엘미르로 돌아가게 해고라도 해야 할까요?”

그러자 그들은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해고요?”

그들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황녀 전하, 그것만큼은 제발…….”

“저는 이 엘미르 기사단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습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더 이상의 난동은 일절 부리지 않겠습니다!”

자신들이 한 것이 난동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들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해 본 소리니까.”

“저, 정말이시지요?”

“그럼요. 둘이 있어서 나는 무척 즐거운걸요. 둘이 싸우지만 않는다면 해고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그러자 무이와 요한은 감동한 듯했다.

“예, 예. 황녀 전하! 절대 다시는 이 녀석과 싸우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 녀석이 정말 밥맛이라 열 받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지만, 성녀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지켜보겠어요.”

기사들과 시종들은 말 몇 마디로 둘의 싸움을 말린 나를 아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이와 요한의 싸움을 말리고 나니, 나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금방 지나 버리고 말았다.

다른 기사들과 몇 마디 나누던 나는 이내 마차에 올라탔다. 다들 식사도 모두 마쳤으니,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곧장 출발할 예정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다. 여행길은 즐거웠고, 이제는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았다. 그건 요한이 해 준 말 덕분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배가 부르고 잠자리가 따뜻하면 많은 고민들이 해결되는 법이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마차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있는 것은 지루하기 때문에, 얼른 이덴베르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공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마치 바람을 가르는 듯한 묘한 소리였다. 처음에 나는 단순히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들린 이후, 바깥이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의아해진 난 마차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마차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급히 창문을 두드렸다.

“황녀 전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종이 서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습격이…… 컥!!”

시종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내가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화살이었음이 드러났다. 화살은 시종의 옆구리에 꽂혔다.

“……데일?”

나는 멍하니 시종의 이름을 불렀다. 화살에 꽂힌 반동으로 반쯤 고꾸라졌던 시종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탁, 닫았다.

“데일!”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동시에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마차를 보호해라!”

“황녀 전하의 마차를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커튼이 반쯤 걷힌 창문 유리 너머로 기사들이 달려와 내 마차를 빼곡하게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앞에 있는 귀족들의 마차에도 기사들이 달라붙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보이는,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감싼 수많은 사람들.

‘습격?’

나는 그제야 시종의 말을 이해했다. 피가 서늘하게 식어 가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덴베르 제국과 이어진 산맥의 중턱을 넘고 있던 상태였다. 적들은 숲에서 튀어나왔고 화살을 갖고 있었다. 지형이 익숙한 곳도 아닌 데다가, 주위가 나무에 막혀 있으니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창문을 다시 열고 외쳤다.

“나도 싸우겠어요!”

한 번도 실전에서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이제껏 수없이 연습하고 노력해 왔다. 루디온을 부른다면 십수 명의 기사분은 너끈히 싸울 수 있으리라. 그는 상급 정령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향해 기사가 외쳤다.

“황녀 전하! 위험하십니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가 주신 이 마차는 방어 마법도 걸려 있기 때문에 하나의 보호 무구라고 할 수 있었다. 자객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가 마차 바깥으로 나간다면 제발 나를 잡아 달라고 외치는 꼴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루디온이 있다곤 해도 기사들의 크나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는 마차에 남아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현명한 행동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루, 리미에!”

나는 둘을 불렀다. 공중에서 환한 빛을 터뜨리며 나타난 둘은 내 상황을 바로 알아챈 것인지 표정이 심각했다.

“리미에, 너는 기사들을 도와서 자객들을 해치워 주렴. 그리고 루는 다른 귀족들……, 그래, 베오른 백작을 찾아가서 지금 상황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보고 와줘.”

지금 같은 비상 상태에서는 총책임자인 베오른 백작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챙강거리는 검과 날붙이의 소리, 공중을 가르는 화살의 소리. 그리고 고함을 지르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는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역시 내가 합세해야겠어.’

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루디온을 부르려고 할 때였다. 나를 향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재빨리 의자 아래로 엎드렸다.

마차로 불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한 다발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마차가 그 화살을 방어해 내는 듯했다. 화살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차가 방어 마법으로 무장했다고 한들, 날아오는 수십의 화살에는 견딜 수 없었다.

마차가 안전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차라리 그냥 일반 불화살이라면 방어막이 끝까지 견뎠을 텐데, 마법의 힘은 기어코 마차의 방어막을 파훼했다.

화르륵! 방어막이 깨지자 들어온 불의 화살이 마차의 한쪽에 꽂혀서 불을 붙였다. 그것도 마차의 문이 있던 곳에 말이다. 아무리 튼튼한데다 마법이 걸린 마차라고 한들 나무는 나무였다. 출입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성녀님!”

목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창문, 창문을 깨고 나가야 해.’

나는 바로 루디온을 불러 마차의 창문을 깨 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그때, 문이 번쩍 열렸다.

문짝을 떼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게 문을 연 장본인은 바로 요한이었다. 그는 고작 자신의 재킷으로 손을 감고 있었다.

딴에는 불길에 손을 보호하려고 한듯했으나, 이제 날이 풀리고 있어 입은 얇은 재킷으론 불에서 손을 보호하기엔 어림도 없을 듯했다. 최소 손을 데었거나 크게는 화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성녀님! 이리 오십시오!”

머뭇거리던 나는 재빨리 요한의 말에 따라 마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적들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마차 안에만 있는 것은 더 이상 좋은 방법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마차 밖에 나온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데려온 기사들은 개개인 모두가 엘미르 제국에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아 그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이다. 결코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금방 습격자들을 처치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적들과 아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땅바닥에 우리 기사들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모를 피 웅덩이가 흘렀다.

쓰러져 있는 자들 중에는 나와 아까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요한이 그런 나를 보며 어깨를 거세게 잡아왔다.

“성녀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비참한 모습에서 애써 눈을 돌리고, 현재 상황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어 이야기했다.

“나, 나도 싸우겠어요.”

돌아오는 말은 아까와 똑같았다.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손 하나라도 절실했다. 루디온이 있다면 분명 상황은 더 나아질 테고 말이다. 그 점을 말하려고 하는데, 요한이 더 빨랐다.

“잘 들으십시오, 성녀님. 지금은 성녀님께서 싸우는 데에 힘을 낭비하실 여력이 없습니다. 다행히 성녀님께는 정령이 있으시니 귀족분들과 함께 숲으로 도망가십시오.”

“……!!”

“저희 기사들도 상황을 정리한 뒤에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힘을 아끼시면서, 최대한 멀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적들이 따라잡지 못할 곳까지요.”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기사들을 놔두고 도망치라고? 그때, 아까 베오른 백작에게 갔던 루가 돌아왔다.

“주인님!”

“……루!”

“베오른 백작과 귀족들은 지금 한곳에 모여서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요. 다행히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없지만…… 다친 사람들도 몇몇 있어요.”

“……어, 얼마나 다쳤는데?”

“무척 위험해 보여요.”

나는 눈을 떨었다. 루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치료에 지체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나와 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한이 끼어들었다.

“성녀님, 들으셨지요. 귀족분들께 가십시오.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입이 바짝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귀족들을 치료하는 것도 급했고, 기사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요한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웃어 보였다.

“저희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나는…….”

입술을 너무 강하게 깨물어서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루디온을 불러서 기사들을 도우면 귀족들을 치료하며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고 귀족들만 신경 쓰기에는 기사들이 위태로워 보인다. 갈등하던 나는 리미에를 불렀다.

“리미에!”

“네, 주인님.”

몇 발자국 너머에서 기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던 리미에가 내게 날아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리미에, 귀족들이 있는 곳에 가서 다친 자들을 치료해 줘. 그리고 루는 내 곁에 남아서 나를 지켜 줘.”

“성녀님!”

요한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루디온을 불렀다. 내 앞에 거대한 황금 새가 소환되었다.

“루디온, 기사들을 도와 자객들을 처치해 줘.”

“알겠다.”

세 정령에게 모두 명령을 마친 나는 요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요한, 지금은 따로따로 찢어질 때가 아니에요.”

“……!”

“아무리 내가 귀족들과 함께 숲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적을 끝까지 처리하지 못하면 분명히 적들은 다시 따라올 거예요. 귀족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니 꼬리를 잡히는 것은 쉽겠죠. 어차피 그때가 되면 또다시 위험해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지금은 겨울이라 도망 다니면서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워요.”

그렇다면 끝까지 맞서 싸워 뿌리를 뽑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일 현명한 방법은, 힘을 합쳐 적들과 싸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합세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모두와 함께 싸우겠어요.”

아무리 루디온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상급 정령이라지만 그가 제 실력을 내기 위해서는 정령사가 옆에 붙어서 정령력을 불어넣어 주고, 원하는 바를 명령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다친 기사들을 바로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전투의 효율이 훨씬 높아지리라.

요한은 내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저는 이곳에서 성녀님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말로만 하지 않고 그는 내 옆에 섰다. 난전 속에서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제야 깨달았다. 검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물집이 잡혀 있다는 것을. 깜짝 놀라 요한을 추궁했다.

“요한! 아까 화상을 입은 거죠!”

“괜찮습니다. 성녀님.”

그렇게 말은 했어도 요한의 손은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때, 그가 갑작스레 검을 들고 내 등 뒤에 내질렀다. 푹! 하고 무언가가 검에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니 요한의 검에 꽂힌 자객이 바닥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직 멀쩡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고집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잠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루를 불렀다.

“루!”

루는 말하기도 전에 내 의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빛의 화살이 생성되어서, 등 뒤에서 요한을 치려던 자객의 가슴에 박혔다. 그 일련의 동작은 무척 능숙했다. 계속해서 정령들과 훈련을 해 온 덕분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요한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말 할 시간이 있으면 주위를 더 둘러봐요.”

아직도 적들은 한참 남아 있었다. 나는 루를 통해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는 한편, 치료를 하고 있는 리미에에게는 정령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기사들과 함께 있는 루디온이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요한은 귀족들과 함께 도망치라고 했지만 마차를 지키는 것도 무척 중요했다. 식량이 모두 거기에 들어 있으니까. 나는 최대한 마차들과 기사들을 보호하면서 적들을 해치우려고 노력했다.

물론 쉬운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여러 번 머릿속으로 적들을 해치우는 상상을 하고, 정령들과 훈련을 해 보았다지만 실제로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벅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루디온이 합세하자 기사들의 전력이 한결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곳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버티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못 이룬 일들도 너무 많았고, 여기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이를 악물 때였다.

키가 큰 자객 한 명이 내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내 앞에 던져진 암기를 요한이 가까스로 쳐 내주었을 때, 나는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

나는 헛숨을 들이쉬었다. 요한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자객은 긴장감에 바르르 떠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었군. 황녀.”

그는 얼굴 전체를 덮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웃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목소리에서는 희열이 묻어나 있었던 것이다.

‘……뭔가…….’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주,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 상념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재빨리 루의 힘으로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려던 찰나였다. 자객이 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 검에 씌워진 것은 푸른 오러였다.

오러란 검의 극한에 달한 자들만이 쓸 수 있는 궁극의 기술이었다. 보통의 공격으로는 정령에게 타격을 줄 수 없지만, 오러만큼에는 루도 당할 수가 없었다.

공격당한 루는 허공의 빛가루로 사라져 갔다. 정령계로 역소환당한 것이다.

“……!!!”

억지로 나의 정령이 역소환당하자, 내 몸 안에 있던 마력의 흐름이 꼬이기 시작했다. 진탕이 된 마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공격해 왔다.

울컥하고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옷깃으로 입가를 닦아보니 새빨간 피였다.

마력의 흐름이 완전히 꼬여 버리자, 나는 더 이상 소환해 두었던 정령들을 유지할 힘이 없어졌다. 결국 루디온은 서서히 빛무리로 스러지고 말았다. 시야에 보이지는 않지만 리미에도 정령계에 돌아갔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심하게 속이 어지러웠다.

“……이 자식, 감히 성녀님께!”

그런 나를 대신해 요한은 자객에게 달려들었다. 챙강! 검이 서로 합을 주고받았다. 시끄러운 주위의 소리 속에서 유독 그것만이 선명했다.

‘……이상해.’

나는 가물거리는 시야로 자객이 내뻗는 검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아까 자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생각했지만, 자객의 검술이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습격한 자들이 단순한 도적단이 아니라는 건 안다. 정예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도적단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도 못했으니까.

‘……아마 우리가 이곳을 지나가는 것을 알고 조직적으로 습격해 온 것이 틀림없겠지.’

그 배후가 누구일까, 사실 이것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안한 예감에 나는 몸서리쳤다. 요한은 무척 뛰어난 검사였다. 몸을 아끼지 않고 자객에게 달려드는 그 기세에 자객도 초반에는 꽤 고전한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 차를 모두 메꿀 수는 없었다. 자객의 검술 실력은 월등했던 것이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듯했다.

‘……안 돼…….’

눈앞이 핑핑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핏덩이를 토하고 말았다.

“……녀님! 성녀님! 정신 차리십시오!”

어쩌면 그사이에 정신이 반쯤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어깨를 잡은 요한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히 요한과 자객이 싸우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무이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이 자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마 루디온이 역소환된 것을 보고 다른 기사들이 나를 도와주러 달려온 듯싶었다.

“……요, 요한.”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성녀님!”

그가 나를 부축했다.

“성녀님, 다른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성녀님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윽…….”

내가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도 요한은 나를 자꾸 재촉했다. 속이 끓는 것 같아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요한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시간이 없습니다. 얼른!”

머릿속이 새하얬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요한에게 겨우겨우 호소했다.

“조, 조금만 천천히…….”

“죄송합니다. 성녀님. 마음이 너무 급해서…….”

비상시니까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어지러움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며 심호흡했다. 요한은 나를 그대로 부축하며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는 문득 그의 걸음걸이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요한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짓에서는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에게서 강한 피 냄새가 났다.

결코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진한 피 냄새.

나는 어지러움을 이기고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어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복부 쪽 옷이 심하게 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중심으로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커다란 상처였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마 그것은 요한이 너무나 멀쩡히 행동하는데다가, 짙은 남청색 옷을 입고 있어 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요한!!”

나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옮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발 한발 걸었을 뿐이다.

“다, 다쳤잖아요!”

“……괜찮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복부의 자상이 너무 컸다.

이 정도라면 치료하는 데에 엄청난 힘이 들어갈 것이다. 정령들이 모두 역소환당하고 마력이 폭주한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그를 치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한은 정말 놀랄 정도로 침착했다. 나는 그 침착한 모습에 오히려 말을 더듬고 말았다.

“어, 어떻게든 치료를…….”

“성녀님의 정령이 모두 역소환된 것을 보았습니다.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신 집중을 하며 애써 마력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그 와중에 피가 다시 울컥 올라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마음처럼 마력이 잘 가라앉지는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

할 수만 있다면 요한을,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그만한 힘이 나에게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힘은 너무나도 작았다. 요한은 내가 정령 소환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가 나를 말렸다.

“괜찮습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성녀님의 몸을 신경 써 주십시오.”

“거, 걱정될 수밖에 없잖아요……!”

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는 상황인데, 요한은 어째서 저렇게까지 침착한 것일까. 그도 살고 싶을 텐데 어째서. 나는 마음속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차라리 그가 살고 싶다고 나를 향해 빌었으면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를 필사적으로 옮기려 하면서.

“정말로 괜찮습니다. 성녀님.”

“……요한!”

“오히려, 저는 기쁘기까지 합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요한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가 담담히 말을 잇는 것이 들려왔다.

“전장에서 죽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게 죽을 수 있으니까요.”

“……!!”

내 얼굴은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주,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성녀님. 한낱 미물들도 때가 오면 자신이 죽을 장소를 아는 법이지요.”

그가 심호흡을 하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도 저의 무덤이 이 자리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가 잡아끄는 손에선 점점 힘이 빠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만이 그의 사명인 것처럼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을 치료해 줬어야 하는데. 화상의 물집 때문에 무척 아플 텐데. 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요한이 말을 이었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목숨은 아깝지 않습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성녀님께서 찾아 주셨던 목숨을, 다시 드리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의 말은 마치 유언 같았다. 점점 느려지고 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바짝 고개를 들어 요한에게 사정했다.

“요, 요한. 제발 힘을 내요…….”

저 앞에 귀족들의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무사해 보였다. 내가 리미에를 보낸 덕분인지, 그쪽에도 기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일지도.

그들은 이미 자객을 거의 처리한 듯 보였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가졌다. 지금 당장은 정령을 소환할 수 없지만,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마력을 가라앉힌다면. 그리고 요한을 치료한다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거야. 분명히.’

요한을 잃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난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성녀인 나를 숭배할 때마다 부끄러워지긴 했다. 은혜를 입었다고 리오텐에서 엘미르까지 찾아오지 않나, 기사단을 이적하지 않나, 아무리 말려도 매일 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 않나…….

하지만 그 각종 기행의 밑바탕에는 나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었다. 나는 그저 그를 치료해 준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이만큼이나 큰 신뢰를 받아도 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낸다면 아마 요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론입니다!’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런 그가 고마웠다. 요한은 그가 나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지만, 실은 마찬가지다. 나도 그에게서 구해진 것이다.

누군가를 치료할 때마다 나는 정말로 뿌듯했다. 그저 죽음을 바라고 태어났던 내가, 어느새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도와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빛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치료한 사람들 중에서도 요한은 특별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믿고 따라 주고, 지켜 주었다. 식사를 항상 챙겨 먹으라고 나에게 조언해 주었다. 언제 어느 때나 내가 다가갈 때마다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씩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술에 취해 힘겨워하던 때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도 모든 과거를 훌훌 털어 버리고 언젠가 그처럼 밝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곤 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요한을 죽게 하지 않겠어.’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여기에서 요한을 지키고, 귀족들을 구하고, 자객들을 물리칠 것이다.

‘할 수 있을 거야.’

속은 얼얼하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결코 물러날 수는 없었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요한을 다시 한 번 부르려던 찰나였다. 그가 갑작스레 나를 밀었다. 그에 나는 손쓸 새도 없이 땅바닥에 굴렀다. 갑자기 밀쳐진 탓에 나 자신을 방어할 틈도 없었다.

‘어째서?’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일 찰나였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에 시퍼런 검이 휘둘러진 것이 보였다.

“……헉…….”

나는 눈을 떨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루를 역소환시키고 우리를 위협하던 자객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급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무이는? 다른 기사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들이 이 자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눈으로 다른 기사들을 좇던 나는 다음 순간,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마치 등골에 차가운 얼음을 댄 듯했다.

기사들은 모두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몸을 덜덜 떨고 말았다.

요한은 내 앞을 막고 자객의 앞에 섰다. 배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물집이 가득한 손으로 검을 잡았다. 죽을 만큼 아플 텐데.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요한이 짧게 말했다.

“……성녀님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그런 그를 자객이 비웃었다. 내 눈으로 보아도 요한은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저 푸른 오러를 상대로 단 일 분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이리라.

나에게서 등을 보인 요한이 크게 외쳤다.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너덜너덜해졌던 요한의 몸에 다시 한 번 검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던 것은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피가 터져 올랐다. 그 뒤에 요한은 휘청거렸고, 마치 무게를 가지지 못한 종이 인형처럼 땅바닥에 스르르 무너졌다.

“……!!!”

숨이 턱 막혀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도망치라고 했는데.’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옷에 흙이 묻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무릎에 돌이 박히는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요, 요한, 요한……!”

나의 기사가 죽어 가고 있었다. 내가 가까스로 그의 곁에 다가가자, 그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성…… 녀님……. 도망치십시오.”

“요한, 나는…….”

“도망치십시오…….”

“…….”

“……도망쳐서, 살아남아야…….”

그는 마치 고장난 것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손을 잡았다. 물집이 터진 그의 손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요한…….”

내가 그를 부르자 그가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맑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고 있었다.

아, 마지막이구나.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 순간 나는 한 사람의 유언을 듣고 있는 한 명에 불과했다.

그는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인데도 그랬다.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간신히 그러모으듯, 그가 말했다.

“……아이샤 님…… 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가 나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영광,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숨소리가 끊겼다.

* * *

요한이 죽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죽었다. 어쩌면,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 자객은 천천히,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왔다. 내 앞에 다가오는 선득한 칼날이 보였다. 그것은 차가운 은빛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그 은빛의 칼날이, 전생에 나를 베었던 처형장의 검과 겹쳐졌다. 나는 이대로 죽는 걸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복수도 해내지 못한 채로.

더 이상은 정령을 소환할 수도 없었고, 그를 상대할 만한 기사도 없었으며, 나는 내 손으로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쓰러지고 싶었다. 더 이상은 다시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안 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도망칠 것이다.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해도 좋았다.

‘살아남으라고 했어.’

요한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흘려 넘겨 보내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을 것이다. 다리가 풀려서 축축 처졌고 거의 기는 것처럼 속도가 느릿했지만, 나는 간신히 걸어갔다. 물론 자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아악!!”

그가 검등으로 내 등을 후려쳤다. 금세 나는 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등이 미친 듯이 아파 왔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발로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갈 것이다. 황녀의 품위 따위는 상관없었다. 손톱이 땅에 박히고, 팔이 시려 왔지만 상관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을 것이다.

‘제발 도와줘.’

여기서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그때였다. 뒤에서 자객이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목을 잡혔기에 숨이 막혀 왔다.

“더 이상은 도망쳐도 소용없다.”

나는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살고 싶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어…….’

숨이 막히자 자연스럽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발버둥치려고 했지만 그의 손아귀 힘은 더할 나위 없이 거셌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에서, 나는 문득 ‘그’를 떠올렸다. 하이넨 님이 말했었지. 정령왕이 인간계에 간섭하면 안 된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니까.

내가 죽으면 그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갈 테니, 아마 더 이상 그가 규칙을 깰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살아 있는 지금 그가 보고 싶었다.

‘……룬, 님.’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내 눈앞에 환한 빛이 폭사했다.

* * *

그가 섬광처럼 번쩍였던가? 아니면 그보다도 더 빨랐던가?

눈을 깜빡,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내 목을 조르던 자객은 날 놓고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빛의 칼날이 박혀 있었다. 끓는 피거품을 흘리던 그는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아.’

그리고 자객의 손에서 벗어난 나는 차가운 땅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푹신한 무언가에 받쳐졌다. 나는 이 감촉을 이미 알았다.

“……루디온…….”

매끄러운 황금색의 깃털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뒤에는 루디온이 있었다. 내가 소환한 것이 아닌 빛의 정령을 보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잠시 루디온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밭은기침을 했다.

“켁, 켁…….”

자객이 세게 목을 졸랐기 때문에 목이 무척이나 아파 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시퍼런 멍이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쓰러져 있는 사이에도, 내 앞에서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적, 그래. 그것 이외에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있을까. 겨울바람이 룬 님의 백금발을 흐트러트렸다. 빛의 활을 쏘고 있는 룬 님의 옆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다. 그의 화살에 적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발버둥은 고사하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아마 그들은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며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화살을 쏜 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빨랐으니까.

“크, 크억……!”

“대체……!!!”

그 모습을 보면서 룬 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을 행하는 듯 담담할 뿐이었다.

나는 뛰어난 기사들과 마법사들, 궁수들을 숱하게 보았지만 그만큼 강한 존재를 일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 다시금 절절하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몇 분 걸리지도 않아 적들은 모두 쓰러졌다. 적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질척한 피가 숫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에 어쩌면 나는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죽이려고 하던 자들이 모두 쓰러졌는데에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저 모든 일이 꿈처럼 멀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눈을 맞춰 오는 룬 님을 보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가?”

“저, 저는…….”

그의 금빛 눈에는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 눈빛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함에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제야 조금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룬…… 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시체 냄새가 났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강렬하고, 지독한 냄새였다. 그에 내가 다시금 몸을 떨 때였다.

“화, 황녀 전하!”

저 멀리에서 다른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와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룬 님의 인간 같지 않은 무위를 충분히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빛과 함께 허공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겠지.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다른 일행들을 보고 있자, 룬 님은 손을 들어 직접 나를 일으켜 주셨다. 그에 내가 주춤하고 있는 찰나였다. 룬 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야 한다.”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 일행들에게 돌아가라.”

“……!!!”

나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룬 님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루디온을 몇 마리 더 붙여 주지. 그의 등에는 십수 명이 거뜬히 탈 수 있으니, 그를 타고 날아간다면 모두 내일 안으로 충분히 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룬 님.”

내가 억눌린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는 손을 들어 내 목과 몸에 있는 생채기를 치료해 주었다. 그 빛은 무척이나 따뜻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얼른 가라.”

나는 나도 모르게 룬 님의 옷자락을 잡고 말았다. 목소리가 덜덜 떨려 왔다.

“루, 룬 님은…… 저와 가지 않으시나요?”

나는 절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 일행’이라고 했다. 마치, 더 이상 나와 그는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제발. 마음속에서부터 간절한 소원이 올라왔다. 말하지 말아 줘. 나를, 떠난다고…….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잔인한 법이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룬 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덜컹거렸다.

“……거, 거짓말…….”

“…….”

“……같이, 가 주세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숫제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쓴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나는 계약되지 않은 정령으로서, 인간계에 너무 크게 관여해 버렸다.”

“……!!!”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정령계로 돌아가서 그 대가를 받는 수밖에 없지.”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들은 말이 정말일까? 나는 덜덜 떨면서도, 애써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을 강하게 먹지 않으면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고 나면…… 다시, 오실 거죠?”

“…….”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나는 남은 모든 힘을 그러모아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내가 이기적인 것은 안다. 그가 대가를 치루게 될 걸 알고서도 그를 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 언젠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가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룬 님은 대답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나의 시선을 회피하는 그를 본 것은.

어쩌면 나는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온 그를 보았을 때. 아니, 그 이전 하이넨 님이 나에게 경고했을 때.

아니, 아니…….

맨 처음 그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와 함께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랬기 때문에 더 간절했다. 절박했다. 풋내나는 마음이라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뿐인 마음이었다.

전부였다.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던 룬 님은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아까 나를 위협하던 자객이 쓰던 검이었다.

“……이 검은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보이더군.”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검을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나는 숨조차 멈추고 말았다. 그 검의 손잡이 끝에는 하나의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복수의 신인 셀레나의 상징인 초승달과, 마법 제국임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새겨져 있는 동그란 문양.

그것은 이덴베르 제국의 문양이었다. 아까의 그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자객에게 다가가, 그의 복면을 벗겨 버렸다.

“……!!!”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자객의 목소리가, 그의 검술이 익숙했던 이유를.

이덴베르 근위대 제1 기사단장, 보르딘 자작. 그게 그의 정체였다.

내가 이덴베르의 황녀였을 때 나는 황궁의 치안을 담당하는 그를 자주 보았었다. 나이가 들어 과거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아예 못 알아볼 것도 없었다.

이덴베르였구나. 나는 손을 꽉 쥐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평화 회담을 할 생각이 없었으리라. 그들이 성녀랍시고 나를 부른 이유도, 엘미르의 황녀인 나를 유인하기 위해서였겠지.

“……이덴, 베르…….”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증오스러운 이덴베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덴베르!

나는 끓어오르는 증오에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덴베르 제국을 향해 저주를 내지르고 싶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는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이덴베르와의 문화 교류를 기대하며 들떠 있던 젊은 귀족들도, 하루하루 맡은 일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시종들도, 충성스럽기 그지없던 나의 기사들까지도.

모두 저기에서 피 웅덩이에 구르고 있었다. 바로 이덴베르 놈들 때문에. 그들은 이전에도 나와 이시스 오라버니를 죽이고자 한 적이 있었다.

미리 알았어야 했다. 더 조심하고, 더 경계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더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정신 차려야 한다.”

증오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 룬 님이 나를 세게 잡아 왔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습격해 온 규모로 봐서 그들은 이미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미리 그들의 속내를 알았더라고 해도, 이덴베르와 칼을 겨누게 되는 건 똑같았을 거다.”

그는 마치 내 마음을 모두 읽은 듯했다.

“……룬, 님.”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죽었어요.”

“…….”

“저는 그들이……, 이덴베르가, 증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룬 님은 쓸쓸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나를 보는가 싶던 그가 내 뺨에 한 손을 대었다. 그대로 내 뺨을 쓰다듬을 것 같던 그 손은, 자그만 틈새를 남긴 채로 허공에 멈추었다.

“……내가.”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네 곁에 머무르면서, 네 소원을 들어주고…….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룬 님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차마 내 뺨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과, 나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룬 님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를 수 없다.

내가 무력하기에.

그가 나를 향해 짧게 말했다.

“가야 한다.”

그의 옆에서 루디온이 여러 마리 소환되었다. 나와 룬 님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것이 얼핏 들렸다.

그는 인간계에 간섭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챙기려고 하는 그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분명 가슴은 찢어질 것 같은데도 말이다. 그가 자신의 옷자락으로 직접 내 뺨을 닦아 주었다. 몰랐는데, 내 뺨은 다른 사람들의 피가 튀어서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줄곧 신경 쓰이더군.”

“……룬 님…….”

룬 님의 옷자락은 내 뺨 대신 붉게 물들었다.

“잘할 수 있을 거다.”

그가 다시 한 번 내게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식량과 꼭 필요한 생필품만 챙기고 정령의 뒤에 올라타세요. 한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내가 다시 한 번 재촉하자 얼른 식량과 겉옷 등을 챙긴 후에 루디온에 올라탔다. 나는 루디온에 올라타기 전, 요한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모습을 내 기억에 아로새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를 보았다. 그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영광이라고 했었지.’

어떻게 죽음 앞에서조차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 있어서 나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구나. 하나뿐인 성녀님이었구나.

“요한.”

눈물은 여전히 흐르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아팠을 게 틀림없었다. 배는 칼로 관통당했고, 온몸이 베인 상처로 너덜너덜했다. 그런데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요한.”

나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루디온의 등에는 죽은 사람들까지 모두 태울 여유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나의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 주었다.

내 흰옷은 그에게 전하는 수의 같았다. 고개를 들자 룬 님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마 정령계로 돌아갔으리라.

어느새 내 곁에 베오른 백작이 와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황녀 전하를 지키다가 죽은 것입니까?”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베오른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는 아마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어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행복했을 것이라. 나는 울 수가 없어서 웃었다.

“아니, 아마 그도 살고 싶었을 거예요.”

그 어떠한 생명체에게도 살고 싶은 의지는 깃들어 있다. 문득 요한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제 이름은 요한 디오스라고 합니다! 디오스 가문의 장남으로,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성녀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다시 찾은 목숨, 성녀님을 위해 평생 바치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의 말을 지켰다. 그런 것 따위, 지킬 필요 없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잠깐 깨물었던 나는, 사람들에게 소리 높여 말했다.

“지금부터, 엘미르 제국으로 다시 향합니다.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모두 루디온을 꽉 잡으세요!”

나는 루디온에게 다가가서 가장 앞에 올라탔다. 남은 사람들을 다시 엘미르 제국에 데려다줄 때까지, 내가 그들을 이끌어야 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 것이 들려왔다.

“……아까, 그 백금발의 청년은 누구였습니까?”

“그, 룬 님이라고 부르셨던 것 같은데, 황궁 사제인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또다시 물어 왔다.

“……그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습니까?”

문득 시야가 흐려질 것 같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는, 너무 큰 힘을 써서…….”

“황녀 전하……?”

“……그는…….”

나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어쩌면 까무룩 잠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루디온은 단조롭게 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도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구름 위에 떠오른 우리를 향해 불어왔다. 겨울인데다 겉옷이 없으니 무척 추울 만도 했지만, 이상하게 춥다는 것은 알아도 그게 피부로 체감되지가 않았다. 나는 그저 일행의 가장 앞에 앉아서 멍하니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예전에 룬 님과 함께 바다에서 해돋이를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더 이상 그와 같이 해돋이를 볼 수 없겠지. 아니, 아마 그를 다시는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뻥 뚫린 가슴에 점점 차오르는 것은 이덴베르를 향한 증오였다.

엘미르 황궁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디온은 무척이나 빨랐기 때문에, 점심나절이 되자 우리 일행은 황궁에 내려앉을 수 있었다.

황궁에서는 이미 하늘에서 황금색 새를 관찰하고, 대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내려앉은 황궁 공터에는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앞에 앉아 있던 내가 루디온의 등에서 훌쩍 내려오자, 그들의 긴장은 의아함과 당황으로 변했다.

“황녀 전하?!”

“다른 일행들은 어쩌시고…….”

“이덴베르로 향하시던 길이 아니셨습니까?”

나는 그들의 웅성거림을 모두 무시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를 불러오도록 해라. 긴급 사항이다.”

새벽을 간신히 견딘 내 목소리는 마치 모래사장처럼 버석버석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자꾸 뭔가를 물어 왔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인형처럼 아무 대꾸도 없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가족들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다리가 축축 쳐져서 지금 당장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아직 쉴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가족들은 갑작스러운 나와 귀족들의 방문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짐작한 듯했다. 내 얼굴을 본 어머니는 얼굴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만큼 내가 힘들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이샤! 대체 이게…….”

“안색이 창백하구나, 당장 의원과 신관을 불러오겠다.”

나는 그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

나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이덴베르의 검을 보여 주었다. 손잡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덴베르의 문양에, 가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산길을 건너던 도중, 이덴베르가 사신단의 마차를 습격했습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죽이려 했습니다. 저를.”

자객들의 목표는 명백했다. 황녀이자 성녀인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입을 막는 것.

“간신히 도망쳐 여기에 왔습니다.”

“아, 아이샤.”

“원래부터…… 화친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거예요.”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나의 것 같지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는 조금씩 떨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이 턱 막혀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확실한 것은, 나를 보던 가족들의 얼굴이 서서히 분노로 일그러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게 가슴 아파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때였다.

“됐다. 아이샤.”

발걸음 소리와 함께, 따뜻한 겉옷이 내 어깨에 둘러졌다. 나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내 앞에는 오라버니가 다가와 있었다.

“……이시스 오라버니.”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나를 꼭 안아 줬다. 평소 같았으면 그 따뜻한 온기가 무척 반가웠으리라.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 감각이 멀기만 했다.

다만 이 멍한 정신 가운데에도 또렷하게 빛났던 것은, 이시스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동자.

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너무나도 지쳐 보이는 나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쉬렴, 아이샤.”

그는 싸늘해진 내 몸 위로 꼼꼼하게 겉옷을 여며 주었다. 그런 뒤 그는 아버지의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드넓은 엘미르 제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뿐인 제국의 태양이시여.”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덴베르와의 전쟁을 원합니다.”

“……!!!”

그제서야 나는 오라버니가 여기 있는 그 어느 사람보다도 가장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향한 다정한 태도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라버니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전쟁에 나가겠습니다.”

그가 이전에 말했었지.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기게 된다면, 절대 나를 보내지 않겠다고. 자신이 대신 나서서 나를 지키겠다고.

나는 그 말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악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허락해 주시지 않을 거라면, 이 자리에서 황태자의 직위를 거두어 가십시오.”

“이, 이시스 황태자 전하!”

“어찌 그런!!!!”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황태자의 직위를 거두어 가라니. 그만큼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시스 오라버니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아버지는 주위의 소란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시스 오라버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오라버니를 말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하나뿐인 제국의 황태자이다. 그를 대신할 만한 후계자도 없었고, 그만큼 뛰어난 자도 없었다. 그런 그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복수를 원하느냐?”

“제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자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아버지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매달았다.

“나 또한 그러하다.”

“……!!!”

“너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마.”

이시스 오라버니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기 이곳에.”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리를 가져오겠습니다.”

* * *

쉬고 싶었다. 이제는 모든 일에 해방되어, 그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달려온 의원과 신관은 신체에는 큰 무리가 없지만,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으셨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위해 모든 편의를 봐주셨다. 오랜만에 본 시녀장과 유모, 그리고 시녀들은 나를 보고 기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상관하고 싶지가 않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침대에 가서 한참 동안 잠을 잤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죽은 것처럼 잠만 잤다. 그 와중에 간간이 정보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곧 출전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사이에 루셀 영지를 포함한 북부 지방에 이덴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습격해 왔다는 것. 습격한 군대의 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나를 죽이려고 하고 평화 사절단을 죽인 이덴베르에 대한 엘미르 제국민들의 반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사병이 빠르게 모이고 있었다.

결국 이덴베르와 지속해 왔던 평화는 산산이 부수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누구 하나가 파멸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온 땅에 증오와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도 나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늘 부르던 정령들도 이제는 내 곁에 없었다. 그들이 역소환당한 이후 제법 오랫동안 쉬었기 때문에 이제 다시 소환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랬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도저히 빛의 정령들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들을 본다면 분명히 룬 님이 떠오르게 될 테니까. 공중에 떠도는 자연체 정령들도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고독과 증오, 그리고 허망함이 내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만 있었을 뿐이었다. 자도 자도 피곤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가끔씩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출전 준비에 바쁜 오라버니마저 나를 보러 온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 *

“황녀 전하…….”

유모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뭐라도 드셔야 해요. 제발요……. 오늘만큼이라도 부디…….”

식사 시간이었다. 유모는 나를 향해 수프를 들고 제발 한 스푼이라도 먹어 달라며 사정하고 있었다.

나는 유모가 내미는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흰 그릇 안에는 소화가 잘 되는 묽은 야채수프가 담겨 있었다. 주홍색 색감과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모습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식욕은 없었다.

몸속에서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먹지 않고 물조차 마시지 않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유모가 나를 또다시 불렀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창문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

봄이 곧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년과 다르게 바깥은 도무지 날씨가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모두 꽁꽁 얼어 있었다. 겨울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다.

“……황녀 전하…….”

유모는 이제 울고 있었다. 그녀를 달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에게 방문자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을 거절하라고 미리 말해 두었는데도 유모는 기어이 내가 너무나도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내 방 앞까지 그를 들였기 때문이다.

“아이샤.”

창문을 바라보던 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시스 오라버니, 그였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그를 쳐다만 보는 것이 한계였다. 모든 것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오라버니는 그에 개의치 않고 내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많이…….”

그의 눈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야위었구나.”

오라버니는 슬프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에는 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처음 보는 검은 갑옷을 입고, 옆구리에는 검은색 투구를 끼고 있었다.

내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내 마음속을 짐작한듯했다. 그는 멋쩍은 듯이 볼을 긁적였다.

“새로 맞춘 갑옷이란다. 낯설지? 이상하지만 않으면 좋겠구나.”

“…….”

“오늘 출전하게 되었다. 아마 당분간은 못 보게 될 거야.”

“…….”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으마. 약속할게.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거라고.”

그는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데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니 그동안…….”

그가 입을 달싹거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목이 콱 막힌 듯한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간신히 웃어 보였다. 눈가가 붉었다.

“……푹 쉬고 있으렴.”

“…….”

“식사도 거르지 말고. 지금은 너무 말랐구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아.”

그는 나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라는데 그가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잘 다녀올게.”

인사를 마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은 듯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탓인지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방 안은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나간 문 너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출전한다고.’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다. 나는 오라버니의 말을 느릿하게 되짚어 보았다.

‘……오늘.’

그러던 나는 문득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오늘, 전쟁터로 떠난다.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자, 내려앉았던 심장은 이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리 뛰는지 숫제 어지러울 정도였다. 나는 손을 떨었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오라버니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전쟁터이니까.

다칠지도 모른다.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생각을 했을 때, 나는 어느새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며칠 만에 침대 밖으로 나섰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느릿하지만 그래도 걸을 수는 있었다.

“……오라, 버니…….”

그에게 가야 했다.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 * *

방 밖을 나서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실내용 신발과 얇은 카디건은 추운 바깥에 나서기엔 마땅한 옷차림이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시녀장이나 유모를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이 봤더라면 기겁하며 나를 잡았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시녀들은 깜짝 놀라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모조리 무시하고 걸어나갔다. 다행히 조금씩 속도가 빨라졌다.

몇 번이나 다리가 휘청거렸다. 실제로 한 번은 넘어지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정원의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부딪히니 놀랄 만큼 몸이 시큰거렸다.

‘가야 해.’

아팠지만 나는 다시 일어났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전쟁터로 가기 전에 그를 다시 한 번 만나야 했다. 정령을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나는 걷는 것을 넘어 황궁을 달려나가고 있었다. 폐에 산소가 부족했다. 자꾸만 발이 땅에 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황궁의 공터 앞에서 오라버니가 보였다.

그곳에는 정예군들이 몰려 있었고, 수뇌부들이 있는 한쪽의 천막 아래에는 오라버니의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오라버니에게 가야 했다.

나는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리면서 오라버니를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에게 부딪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기겁했지만 나는 오직 오라버니만을 보고 있었다.

“……오라…… 버니.”

며칠 만에 낸 목소리는 찢어질 듯한 쇳소리였다.

“……오라버니……!”

쇳소리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다시 한 번 불렀다.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의아해하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게 보였다.

“……아이샤!!!”

“……헉, 헉…….”

나는 허리를 숙이고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많이 뛰어온 탓에 목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아, 아이샤. 왜…….”

오라버니는 얼마나 당황한 건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오라버니의 팔을 잡았다.

“……아이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동자는 더없이 깨끗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애써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가까스로 온전한 말을 내뱉었다.

“……오라, 버니…….”

“아, 아이샤.”

나는 문득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가지…… 마세요.”

“……!!”

오라버니가 눈을 커다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가지 마세요.”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하니까, 말하는 것이 쉬웠다. 이때까지 못한 말을 모두 풀어놓기라도 할 기세로 나는 말을 줄줄 내뱉었다.

“안돼요. 위험하니까, 가지 마세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아이샤.”

“혹시 다치기라도 한다면…… 저는, 전…….”

오라버니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난 어떡하지. 오라버니까지 잃어버린다면 나는. 나는 간절하게 오라버니를 올려다보았다.

“죽기라도, 한다면…….”

제발.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오라버니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샤.”

그가 부른 나의 이름에 나는 또다시 심장이 덜컹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에는 이미 답이 있는 듯했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라버니…….”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조근조근 말했다.

“가야 한단다.”

“…….”

“미룰 수도,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도 없단다.”

“…….”

“엘미르를 수호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나의 사명이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꼭 오라버니일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잖아요!”

젊은 그가 총사령관이 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그가 출전하지 않더라도 더 경험 많은 장군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야 한단다.”

“…….”

“게다가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니. 이덴베르를 네 앞에 무릎 꿇려 주겠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눈을 휘며 웃었다.

“오히려 나는 무척 기쁘구나. 너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오라버니…….”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가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아주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기사의 맹세를 했단다. 너를 위해서라면 정말로 내 심장을 내준들 아깝지 않을 거야. 하물며 전쟁터 따위가 무서울 리가 없지.”

나는 그가 내 첫 번째 생일날 했던 기사의 맹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허울뿐인 맹세라고 했더라도 나는 감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 맹세를 지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엘미르와 나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다.

“하지만 믿어 주렴. 다시 꼭 돌아올 거라는 걸.”

“…….”

“다치지도, 죽지도 않을게. 그러니 부탁한단다. 아이샤.”

그가 살짝 웃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위험한 곳을 향한다는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북부 영지에 이미 이덴베르 군사가 쳐들어왔다고 했지. 더 이상 내가 그를 잡고 지체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참았다. 그리고는 내 머리를 가볍게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풀었다. 그것은 내 눈의 빛깔과 닮은 푸른색 고운 비단 리본이었다.

“이걸……, 드리고 싶어요.”

먼 곳에 떠나는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표지를 주는 것이 엘미르의 전통이었다.

그 표지를 가지고 있는 동안 항상 나를 잊지 않고, 그 표지가 그 사람을 지켜 주길 바라며,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나에게 표지를 되돌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원된 행위였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나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가 없음을 알았기에 그의 행운이나마 빌어 주고 싶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내 앞날에 행운이 있을 것 같구나.”

오라버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 잘될 거야.”

“……오라버니.”

“하나뿐인 내 동생, 아이샤.”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덕분에 머리카락이 조금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서 웃었다. 오라버니는 전쟁터에 가는 사람답지 않게 밝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건강하게 있어야 한다.”

“…….”

그는 나의 머리끈을 검의 끝에 묶었다. 마치 부적처럼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전 신호가 내려졌다. 오라버니만 신경 쓰느라 몰랐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군사들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고, 황궁 공터는 서서히 비어 갔다.

오라버니의 이름은 무지개. 날이 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희망의 상징. 그리고 나는 그 하늘을 날아가는 하얀 새. 그렇게 영원히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머니가 천천히 내 곁에 다가왔다.

“아이샤.”

“……어머니.”

나는 중얼거리듯이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아 왔다. 그 손은 무척이나 보드랍고 따뜻했다. 때로는 말보다도 훨씬 많은 것들을 전해 주는 온기가 있었다.

“……추워 보이는구나. 궁으로 가자꾸나.”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궁으로 돌아오니 유모는 혼비백산해 있었다. 그동안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던 내가 사라져 있으니 놀랄 만도 했겠지.

“황녀 전하! 대체 어디를 다녀오셨던 건가요!”

그녀는 뒤늦게 어머니를 본 듯했다.

“어머나, 황후마마!”

나 대신 어머니가 유모에게 말했다.

“아이샤는 잠깐 이시스의 출전식을 보러 갔다 왔단다.”

“세상에, 미리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좋았을걸…….”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샤, 많이 피곤하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침대로 가 나를 앉혔다. 그러다가 얼굴을 살포시 찡그리며 말했다.

“그사이에 너무 말랐구나…….”

오라버니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그렇게 많이 야윈 걸까. 어머니는 유모를 향해 말했다.

“주방에 가서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내오렴.”

“알겠습니다.”

유모는 일언반구 하지 않고 냉큼 방 밖을 나갔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는지, 그녀는 금세 돌아왔다. 아까 보았던 야채수프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아무리 음식을 보아도 식욕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 아이샤.”

어머니가 다정하게 나를 달랬다.

“한입이라도 좋으니까 먹어 보자꾸나.”

“……저는…….”

나는 망설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입이라도 좋단다.”

그 순간,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결코 잊히지 않을 듯한 요한의 목소리였다.

―입맛이 없으시다곤 하셨지만 한입 드셔 보시고 나면 생각이 바뀌실지도 모릅니다.

“이 어미가 이렇게 부탁한단다.”

―그러니 제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요한은 머리까지 숙이며 나에게 부탁했었다. 그의 모습을, 그의 말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

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조금 벌렸다. 그리고 스푼을 들어 수프를 먹어 보았다. 따뜻했다. 목 너머로 수프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향긋한 야채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배가 수프를 반기고 있었다. 역시 요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작 수프를 한 숟가락 먹었을 뿐인데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하나 있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요리사가, 수프에 소금을…… 너무 많이 쳤나 봐요.”

어머니와 유모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식이, 너무 짜…….”

나는 수프를 한 모금 더 떠먹어 보았다. 역시 너무 짰다. 내 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수프가 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닫기 시작하자 눈물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어느새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말이 흘러나왔다.

“살아야겠지요……?”

요한이 말했다. 살아남으라고. 손이 떨렸기 때문에 스푼을 잡는 것이 힘겨웠다. 나는 아예 수프를 그릇째 들고 조금씩 삼켰다.

―성녀님, 음식을 먹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맛을 떠나서, 자신을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니까요.

안절부절못하면서 나에게 말하던 요한의 모습이 기억났다. 나는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살아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죽은 자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다시는 요한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지켜 주었던 기사들도, 시종들도, 귀족들도.

그리고 어쩌면 룬 님까지도.

하지만 아무리 슬퍼도 살아남아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어머니가 가만히 나를 안아 주었다. 울음에 지쳐 내가 실신할 때까지, 어머니는 내 등을 쓸어 주었다. 꽁꽁 얼어붙었다고 생각했던 바깥에는 한줄기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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