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평화 사자
엘미르와 이덴베르.
부족에서 왕국, 그리고 제국이 되는 시간의 흐름 동안 이웃한 두 나라는 끝도 없이 싸워 댔다. 둘은 오랜 라이벌이었고, 서로가 한쪽을 잡아먹기 전까지는 영원히 투쟁을 계속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국민들과 지도층은 점차 피폐해졌다. 더 이상 무의미한 싸움으로 흘리는 피가 없도록, 양국의 선대 황제들은 휴전을 제안해 왔다.
휴전 이후 여러 번의 회담 끝에 두 제국은 서로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몇십 년 전이다.
그럼에도 나이 들거나 오래된 귀족들은 서로의 존재를 여전히 탐탁지 않게 여긴다. 평생토록 싸워 왔던 대상이 협정을 맺었다고 해서 금방 사이좋아질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협정에는 추가적인 조약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평화 협정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몇 년에 한 번꼴로 서로의 제국에 평화 사자를 보내는 조약’이다.
내가 알리사였을 때에도 이덴베르에 오는 엘미르 귀족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내가 엘미르 황녀로 다시 태어나게 될 줄 꿈에도 몰랐기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보통 사자들로 뽑히는 것은 고위 귀족을 비롯한 젊은 귀족층이었다. 명목뿐인 전통이라곤 해도 거의 협정 초기부터 이어져 왔던 전통이므로, 사자들에게는 서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이 평화 사자는 꽤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평화 사자가 시작된 이후 과거였다면 서로의 제국 쪽에 머리도 대지 않고 잤을 사람들이 점차 교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긍정적으로 섞여 갔다. 덕분에 나를 포함해, 평화 조약이 만들어졌을 때 태어난 많은 세대들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점점 윗세대들도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설명을 하고 있냐고?
바로, 올해가 평화 사자를 교환하는 해였기 때문이다. 물론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전통이기 때문에 나는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유독 나에게 특별하게 와닿은 것은 바로, 며칠 전 일 때문이었다.
그때로 한번 돌아가 보자.
* * *
시기는 바야흐로 리오텐 전쟁이 끝나고 난 몇 개월 후, 새해가 밝아 신년회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었다. 새해가 왔다는 것도 그렇고, 한 살 더 먹은 것에 싱숭생숭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양궁으로 찾아가니 그곳에는 오라버니와 어머니까지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약간 심각한 얼굴이었다.
“제국의 태양과 달, 그리고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내가 예의를 갖춰 인사하자 아버지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잘 왔다. 아이샤. 가까이 와 보렴.”
잘 살펴보니 어머니와 오라버니도 약간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내가 아버지의 앞에 서자, 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이샤.”
“네, 아버지.”
“이번이 이덴베르와 평화 사자를 교환하는 년도라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그래…….”
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 이덴베르가 평화 사자에 관련해서 문서를 보내왔더구나. 무슨 일인가 해서 펼쳐 보았더니….”
“……?”
“평화 사자로서 성녀인 너를 볼 수 없겠느냐고 일부러 정중하게 요청을 해 오더구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를요?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단순히 이덴베르가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과연 괜찮을까요?”
이덴베르가 리오텐 공국과 전쟁을 벌인 게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과연 마음 놓고 이덴베르 제국을 방문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황녀였다. 평화 사자는 서로의 제국에 사람을 보내 약 한 달간 머무르면서 문화를 교류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신들이 서로의 국가를 왕래했지만, 그 사신들 중에 황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족이 움직이는 데는 많은 예산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철통같은 보안이라든가.
게다가 황족이란 한 제국의 정체성이자 가장 귀한 피다. 굳이 황족이 다른 제국에 사신단으로 갈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나를 지목한 이덴베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들도 평화 사자에 황족을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이런 나의 의문을 풀 듯 아버지가 대답해 주었다.
“사신단으로 황족을 보낸 전례가 없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럼…….”
거절하실 건가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쪽도 자기네들의 황족을 보내겠다고 하더구나.”
“……!!!”
나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놀라고 말았다.
“이덴베르 황족을요?”
“그래. 그 이름이…… 를르스 델 이덴베르였지?”
아버지의 말에 옆에 있던 대신이 대답했다.
“예, 올해로 24살이 되는 6황자입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를르스.’
그 이름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 아이는 이덴베르 황가에서 가장 어렸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차분한 청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이던 작은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머니는 달랐지만 나는 그 애를 많이 아꼈었다.
물론, 다른 것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를르스가 나에게 퍼부었던 지독한 폭언들을.
하지만 미련하게도, 기억 속에는 좋은 것들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그 아이가 나의 뒤를 졸졸 따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황궁 정원에서 노란색 나비를 쫓던 그 아이의 아장아장한 걸음걸이까지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혈육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도. 추억의 힘이란 이래서 참 무서운 것이다.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폐하, 아무래도 아이샤에게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 아이샤.”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텐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아직 힘들겠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생각이 없다면 편하게 말해다오. 다른 귀족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네. 아바마마.”
나는 대답하며 오라버니의 얼굴을 흘금 보았다. 오라버니는 시종일관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가족들 중에 유일하게 내 전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욱 걱정이 될 테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나는 궁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라 일조량이 부족한 탓에, 낮인데도 약간 어둑하게 느껴졌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내 뒤를 따르던 시녀가 물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게…….”
나는 그녀에게 이덴베르가 전해 온 말을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 말해도 되는 이야기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시녀에게 털어놓기에는 꽤나 중대한 사안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고민되는 일이 있었어.”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나는 일부러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궁 산책로를 걸었다. 며칠 전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길 한쪽에는 하얗게 빛나는 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덴베르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그러자 흰 숨이 공중에 번졌다.
‘오라버니에게 상담해 볼까?’
하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오라버니라면 당장 ‘가지 말렴.’이라고 말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당연히 ‘위험하다’겠지. 사실 우리 오라버니는 내가 어딜 가도 위험하다고 할 분이지만. 아마 세 걸음 이상 걷는 것은 위험하다고 나를 업고 돌아다닐 사람이다. 나는 잠깐 웃고 말았다.
‘……하아.’
웃음도 잠시, 다시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들 내게 특별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리오텐 전쟁 이후로 특히나 이덴베르와의 관계가 중요해진 시점이었다.
앞으로의 대응에 따라 국제 관계가 평화로워질 수도 있고,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이덴베르에 가서 평화 사자의 역할을 훌륭한 해낸다면 양국 간의 완만한 정세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이기에는 걱정이 되고…….’
이덴베르로 가는 것은 적진으로 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쪽도 우리에게 황자를 보내온다고 하니 조금 안심되긴 하지만 말이다. 나와 그는 양 제국의 국경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제국으로 향하리라.
그리고 이덴베르로 간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아르센을 만날 수 있어.’
더 이상 친우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아르센과 나는 한배를 탄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마리안느가 나, 다시 말해 알리사를 죽이도록 조종한 범인이라고.
아직 파헤치지 못한 사건들이 많았다. 마리안느의 붉은 눈에 대해서도 더욱 조사해야 할 테고,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아르센의 긴밀한 협력이 꼭 필요하다. 나는 이덴베르에 한 번쯤 방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이덴베르에 간다면……모든 황족들을 만날 수 있을 테지. 나는 멍하니 이덴베르 황족들을 얼굴을 떠올리고선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다.
‘……라키아스, 엘시스, 아드린느, 를르스…….’
그리고…… 마리안느.
나의 죽음을 비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리안느가 내 죽음을 조종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누명을 씌우기 위해 뒤에서 조작을 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더 나아가 그녀가 적극적으로 사술을 쓴 것일까?
‘그 아이는 마법 같은 걸 쓸 줄 모르던 평범한 아이였는데.’
하지만 아르센이 말했었다. 그도 마리안느의 붉은 눈을 보았다고 말이다. 그것이 어쩌면 마리안느가 가진 힘의 원천일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마리안느의 모습이 그 아이의 전부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아르센과 협력해야 해.’
이덴베르로 향해서 모든 진실을 밝혀야 했다. 물론 걸리는 것은 있었다. 만약 내가 이덴베르로 향한다면, 가장 먼저 국경에서 를르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과연 를르스의 얼굴을 보아도 멀쩡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아이뿐만이 아니다. 이덴베르에 가서 마리안느를 포함한 다른 황족들을 보고 내가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정처 없이 황궁을 거닐었다.
‘……대체 그 애는 왜 그랬을까?’
내가 마리안느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누명을 쓰고 잔인하게 죽을 만한 잘못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마지막 순간이 생각났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배고팠던 순간만큼이나 괴롭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욕설을 던지고 나를 외면하던 그 순간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미웠던 걸까……?’
걷고 또 걷다 보니 나는 어느새 본궁까지 와 있었다. 거대한 본궁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한 존재를 떠올렸다.
‘……상담할 만한 사람.’
생각해 보니까 있었다.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에게 조언을 구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말이다.
‘뭐, 정확히 따지자면 사람은 아니지만.’
내내 축 처져 있던 몸에 조금씩 활기가 도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본궁에는 황궁 사제가 쓰는 기도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금방 그 기도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황궁 사제로서 일하고 있는 룬 님의 기운을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실체를 가지고 있으면 룬 님의 기운이 한결 옅어지기는 하지만, 상급 정령사가 된 이후로 나는 훨씬 더 기운에 예민해졌기 때문에 이 정도쯤은 가뿐했다.
기도실은 1층 복도의 가장 끝 방이었다. 나를 따르는 수행원들을 1층의 홀 앞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자그마한 태양의 인장이 붙은 문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기도실 앞은 다행히 한산했다. 혹시라도 대담한 영애들이 기도실로 룬 님을 찾아와서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똑똑, 두드려 보았다.
“……계시나요?”
그런데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
분명히 룬 님의 존재감은 느껴지는데, 왜 대답이 없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 중일까? 나는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코앞에서 문이 열린 것은.
“……!!”
문 앞에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룬 님의 얼굴과 한 뼘 사이를 두고 마주치고 말았다. 룬 님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 심장이 쿵,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인지 그는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라면 흰 신관복을 입고 있었을 그였을 테지만, 오늘은 옷차림이 무언가 달랐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옷을 바라보았다.
아침 미사를 보고 난 뒤였는지 그는 띠와 제의까지 챙겨입은 채였다. 제의는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자수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옷차림이 매우 화려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다 물었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서 오셨습니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문을 활짝 열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들어오시죠.”
나는 속으로 짧은 기합을 넣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차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아마 그는 미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던 모양이었다.
황궁 사제의 방에 들어온 것도 거의 처음이었지만, 룬 님이 생활하는 방에 들어온 것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방 안에는 작은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이 공간은 룬 님이 집무실로 쓰는 곳이고, 아마 저 작은 방이 신도들이 들어가는 기도실인 듯싶었다. 기도실의 책상 위에는 노란색 싱그러운 프리지아가 몇 송이 꽂힌 화병이 올려져 있었다.
집무실 안에는 업무를 보기 위한 단출한 책상과 채광이 잘 들어오는 창, 티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있었다.
‘……여기가 룬 님이 일하는 곳이구나.’
방 안에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은 모습에서 룬 님의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뒤에서 달그락거리는 자그만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룬 님이 나를 위해 티테이블에 찻잔을 하나 더 올려놓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가 새로이 차를 우려내고 있기에, 나는 테이블에 다가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작은 집무실 안에 차의 향기가 확 퍼져 나갔다. 백목련 차였다.
내가 연노랑 색의 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에, 그는 제의를 벗고 그것을 곱게 개어 한쪽에 놓아두었다.
‘……신기하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제의를 정리한 그는 테이블에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곧 나는 그의 모습을 태평하게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청 가깝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테이블이 작았던 탓에 내 앞에 앉은 룬 님의 백금색 속눈썹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고민이 있다고?"
“……네?”
그 모습에 눈길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뒤늦게 알아듣고 말았다.
“아, 네. 고민이 있어서요.”
나는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목련차를 들이켰다.
“차, 차 맛이 좋네요.”
이건 예의상의 인사였다. 사실 지금 정신이 붕 떠서 차 맛이 무슨 맛인지도 모를 정도였던 것이다.
“고맙군.”
룬 님이 짧게 말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서 목련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뒤늦게 차가 정말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련차의 따뜻한 기운 덕분인지 나는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말을 던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도실이 한산하네요. 혹시라도 영애들이 찾아와서 바쁘시진 않을까 했어요.”
그저 장난스럽게 건넨 말이었을 뿐인데, 그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어라?’
왜 대답이 없지? 설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찾아왔었나요?”
“……처음에는 복도가 가득 찰 정도로 왔었지.”
맙소사, 나는 웃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정말로 그렇게 사람이 많았단 말인가? 나는 심각해지고 말았다. 다들 어째서 그렇게 룬 님을 찾아온 거지?
“……다들 무슨 일로 오던가요?”
“글쎄, 대표적으로는 연애 고민이 있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나는 룬 님의 대답에 내 입가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연애 고민이요?”
‘그 연애 고민이 과연 고민이었을까?’
혹시 영애들의 룬 님을 보기 위한 핑계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룬 님이 그들에게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모두 이야기를 들어 줬다.”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황궁 사제라는 직함이 연애 고민을 들어 줘야 할 정도로 한가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찾아온 그녀들도 신자니까.”
룬 님의 고지식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그러니까 그녀들도 신자이기 때문에, 사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그들의 고민을 들어줬다는 건가?
“……대단하시네요.”
내 말에 룬 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방문자가 줄기 시작하더군.”
“……어쩌다가요?”
“아무래도 영애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전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복도가 다 찰 정도로 영애들이 많았다고 하니, 모든 사람을 다 만날 수는 없었겠지.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못 만나는 것에 대해 영애끼리 다툼을 벌였을 게 틀림없다. 룬 님이 말을 이었다.
“결국 연애 고민은 사랑의 신의 신전에 찾아가 보는 것으로 서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이제 찾아오는 사람들은 사제로서의 의식에 관련된 사람이나 죄를 짓고 고백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그렇군요……”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고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연애 고민에는 아무리 나라 해도 해결책을 주기 힘들더군.”
룬 님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룬 님에게도 연애는 어려운 문제인 모양이었다.
영애들이 매일 같은 고민을 가지고 오는 것도 왠지 이해가 갔다. 그녀들이 룬 님의 얼굴에 홀려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몰랐을 거라고 나는 내 다이아몬드 광산을 걸 수도 있다. 절대 내가 그랬던 적이 있어서는 아니다.
“……제가 연애 고민이 있다고 하면 쫓아내실 건가요?”
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있나?”
그의 시선에 나는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농담이에요.”
“…….”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내가 연애 고민이 있다고 해도 룬 님께는 들려주기는 싫었다.
“그러니까……고민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래.”
“제가 이번에 이덴베르 제국에 가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그 말에 그가 눈가를 좁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화 사자 때문인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가 알고 있지?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대강 유추해 본 것이다. 이덴베르에서 공문이 왔다는 사실은 들었지.”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덴베르 측에서 저에게 특별히 평화 사자로 와 줄 수는 없겠냐고 요청했거든요.”
“…….”
“그런데, 고민이 되어요.”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도 괜찮을까. 이덴베르 황족…… 그들을 보아도 과연 내가 멀쩡할까…….”
“…….”
“물론 꼭 가야만 하는 일은 아니에요. 선택은 제 몫에 달린 거고, 만약 제가 싫다고 하시면 아버지께서도 거절하시겠죠.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고민이 되더라고요.”
“만약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가게 된다면…….”
이덴베르 제국에 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이덴베르와 엘미르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겠어요. 일반 사신들보다는 제가 황녀로서, 그리고 성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황족들이 서로의 제국에 방문하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니까, 좋은 기회라고도 할 수 있겠죠.”
길게 말을 늘어놓던 나는 심호흡했다.
“……여기까지는 엘미르 황녀로서의 입장이에요.”
“…….”
“저 개인으로서는…….”
룬 님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이덴베르 황족들을 조사할 거예요. 특히, 제 죽음을 조종했다는 마리안느와 그 진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번에 아르센과 협력하기로 했는데다, 제국에 직접 가 보면 볼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을 것 같아요. 이덴베르 황족들을 다시 보는 건 힘들겠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들어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속내를 다 털어놓고 나니 홀가분하면서도 두려웠다. 룬 님이 어떠한 말을 꺼내 놓을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했다. 차를 마시는 룬 님의 모습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내려놓은 결론은 맥빠질 정도로 쉬운 이야기였다.
“그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된다.”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룬 님은 나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네 말대로 이덴베르 황족을 보는 것은 힘들겠지. 하지만 이미 네 마음은 정해진 것 같군.”
“하, 하지만…….”
나는 머뭇거렸다.
“위험하기도 할 거예요. 그리고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게 아닌가?”
룬 님의 황금색 눈이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두려웠다. 혼란스러웠고,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덴베르에 가고 싶었다. 가서 그들과 보고, 진상을 내 손으로 파헤치고 싶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하나 있었다.
“……저는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확신이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것도, 황족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버겁기만 했다.
만약 확신이 있다면 모든 일들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내 말에 룬 님이 답했다.
“잘할 수 있을 거다.”
마치 불변의 진리를 말하듯,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믿는다.”
그의 말에 나는 한참 동안 말을 못 잇고 말았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룬 님께 확신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내가 아니고, 내 문제는 내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문제에 그가 결론 내주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큰 욕심일지 모른다.
다만 그는 나를 믿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떠한 말보다 그것이 가장 큰 용기가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 만약에 너무 힘들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
“……언제든지 돌아오라고요?”
“그래, 네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이니까.”
그 말에 새삼 가슴이 뛰었다.
“……내가 있을 곳.”
나는 그의 말을 읊조렸다. 그래, 룬 님의 말이 맞다.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물론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아이샤인 내가 앞으로 살아갈 곳, 평생 동안 사랑할 곳은 바로 이곳. 엘미르였다.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걸 룬 님은 알려 주셨다.
어떠한 때라도, 어디에 있더라도 다시 돌아올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룬 님. 룬 님은 좋은 고민 해결사세요.”
비록 연애 고민은 해결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마음을 정했어요. 이덴베르에 갈래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빌겠다.”
* * *
그렇게 해서 난 황족 최초로 평화 사자가 되어 이덴베르로 떠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 내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나를 위해 호위 부대를 꾸려 주셨다.
사신단은 나를 포함한 여러 젋은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그 안에는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던 영애와 영식도 있었다. 젊기 때문인지, 혹은 이런 행사에 자원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모두 이덴베르에 호기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라버니는 여전히 걱정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가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반대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몇 주 동안 이덴베르와 엘미르 사이에서 서신이 오갔다. 이덴베르는 나의 방문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나를 포함한 사절단 모두 대환영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눈이 녹아가는 시기에 나와 사신단은 이덴베르로 가는 길로 출발했다.
이덴베르는 우리 엘미르 제국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덴베르로 가는 길은 아무래도 좀 더 춥겠지만, 열흘에 가까운 일정 후에는 날씨가 더 따뜻해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리고 이덴베르로 가는 길에서 나는 반가운 얼굴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호위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내가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호위 기사들 속에 서 있는 그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멀끔해진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멈추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요한이었던가요?”
요한 디오스. 그는 내가 리오텐 공국에 있었을 때 팔을 재생시켜 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리오텐 공국에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내 의문에 답하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한 듯했다.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우렁찼다. 검술이 아니라, 목소리만으로도 적을 때려눕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마차를 출발시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잠깐, 누가 소리쳤는데?”
“혹시 짐승이 나온 건 아니지?”
“황녀 전하, 황녀 전하는 안전하시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에 조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흠, 흠.”
내가 헛기침하자 요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목소리가 컸군요!!!”
“……네, 알고 있다면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예!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자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목소리가 많이 작아져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질문했다.
“그런데 요한,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가요? 당신은 분명히 리오텐 공국의 사람이 아니었나요?”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마치 그것을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술술 불어왔다.
“그, 리오텐에서 성녀님의 은총을 받은 이후에 저는 직접 공왕 폐하께 청을 드렸습니다. 비록 리오텐의 귀족이긴 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엘미르 제국에 기사로서 있을 수는 없겠느냐고 말입니다.”
“그걸 허락해 주셨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리오텐 공왕이 나를 은인으로 생각한다지만, 자국의 귀족이 다른 나라에서 기사로 활동한다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성녀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하니 공왕 폐하께서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는 엘미르 제국 기사단에 편입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일에도 자원하게 된 거지요. 이덴베르로 가시는 동안 성녀님께 개미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녀님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엘미르에 남아 있을 생각인가요?”
“그건 바로, 은혜를 갚을 때까지입니다!!”
나는 새삼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술에 취해서 붉던 얼굴은 아주 멀끔해졌고,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선 생기가 돌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은혜를 갚겠다니,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무척 기뻐요.”
“성녀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녀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런 거창한 일은 하지 않았는걸요.”
나는 생긋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여기 모여 있는 다른 모두도 마찬가지예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인사하자, 나와 요한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사들이 손을 올려 충성을 외쳤다. 그 이후 나는 이 행렬의 총책임자에게 다가갔다.
총책임자는 베오른 백작. 그 또한 아직 30대로서 아직 젊은 귀족인 데다가, 이덴베르어에 무척 능통한 사람이어서 책임자로 뽑혔다고 들었다.
그는 눈에 띄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보자 무척 긴장한 듯이 인사해 왔다.
“엘미르 제국의 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베오른 백작.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예. 준비는 거의 마무리가 되었고, 곧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보충해야 할 것은 없나요?”
“호위 기사도, 시종들과 마차도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잘되었군요. 무척 든든해요.”
내 말에 그는 약간 긴장이 풀린 듯, 미소를 지어 왔다.
“황녀 전하와 함께할 수 있어서 큰 영광입니다. 이번 이덴베르에 평화 사자로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저는 무척이나 감격했습니다. 먼길에 거친 여행인 데다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으셨는데 일부러 직접 나서시다니요.”
나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인걸요. 이번 평화 사자의 의미가 깊은 만큼, 저도 큰 기대를 하고 있답니다.”
그때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존귀하신 엘미르의 별, 황녀 전하. 그리고 베오른 백작님. 모든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빠진 부분은 없겠지?”
“예! 다만…….”
“다만?”
기사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했다.
“머지않아서 비가 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땅이 얼어 버리면 이동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 알겠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 이제 곧 출발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해 미리 마차에 올라가 주십시오.”
“이번 여행 동안 잘 부탁드려요.”
“영광입니다!”
나는 이번 여정 내내 타기로 한 흰 마차에 올라탔다. 여행용 마차라곤 해도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최고급 마차를 내어 주셨기 때문에 승차감은 매우 좋았다. 각종 마법이 걸려 있어서 덜컹거림이 없었고, 멀미도 나지 않았다.
쿠션은 빵빵하게 깔린 데다가 원한다면 온종일 마차 안에서 혼자 누워 뒹굴거릴 수도 있었다. 물론 황녀의 품위 상 자제해야겠지만 말이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는 미리 인사를 해두었기 때문에 특별한 절차 없이 빠르게 일이 진행된 결과였다.
창문 너머로 엘미르의 황성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짧게 잡아도 한 달 반 이상은 못 보게 될 풍경이었다. 가는 데에만 열흘, 오는 데에도 열흘. 이덴베르의 성에서 약 한 달은 머물러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황성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또 보자.’
* * *
이덴베르에 평화 사자로서 간다. 그것은 내 안에서 묘한 울림을 주었다. 아무래도 깜빡 나는 졸았던 것 같다. 마차 안은 무척이나 따뜻했고, 쿠션은 폭신했으니까 말이다.
할 일 없이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지만 금방 질리고 말았다. 밀려드는 졸음에 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꿈에서는 아주 옛날, 내가 알리사이던 시절이 나왔다. 아마 봄이었던 것 같다. 노란색 꽃들이 황궁 정원에 가득 피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 멀찍이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서둘러 뛰어갔다.
‘아스 오라버니!’
‘그래, 리스.’
라키아스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은 훈풍에 휘날리며 마치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뛰지 말고 조심하렴, 리스.’
그런 나를 보며 아드린느가 충고했다. 그녀는 엄격한 언니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매우 아끼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뛰어갈 때면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까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걱정했다.
‘리스가 알아서 잘하겠지.’
엘시스는 티테이블 의자에 태평하게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가 휘청이기라도 하면 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나를 부축해 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누나…….’
를르스는 엘시스의 옆에서 우물쭈물하면서 내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수줍음이 많은 막내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내가 라키아스에게 뛰어가 그의 손을 잡으니,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기억 속의 오늘은 행복한 티타임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몬 머랭 파이나, 따뜻한 과일차도 있었다. 형제자매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오늘은 더더욱 특별했다.
우리는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아서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키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파이를 떠서 먹여 주었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파이를 받아먹었다. 덕분에 나는 내 손으로 은식기를 들 틈도 없었다.
엘시스가 말하고, 아드린느가 반박하고, 를르스가 우물쭈물 대답하고, 라키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속에서 마냥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알리사.’
라키아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네 생일이구나.’
‘뭐야, 벌써 리스 생일이라고요? 시간 참 빠르네.’
‘리스 생일은 달력에 이미 표시해 뒀었으면서 모른 척하기는.’
‘시, 시끄러워.’
엘시스와 아드린느가 투닥거리는 걸 무시하고, 라키아스는 말을 이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니? 아니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그 말에 다들 나를 주목했다.
‘뭐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엘시스는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내가 뭔가 갖고 싶다고 하면 그가 무엇이든 가져다줄 것을 알았다.
‘리스. 괜찮으니 말해 보렴.’
아드린느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는 듯싶던 를르스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나. 나도…… 뭔가 누나한테 주고 싶은데.’
나는 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바라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냥 이렇게 모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걸.’
꿈속의 한구석에는 알리사를 지켜보는 지금의 나, 아이샤가 있었다. 분명히 그랬던 때가 있었다.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나도 행복해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가.
‘하지만…….’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들은 모두 찢겨져 버렸다. 전부 조각나 버렸다. 불탄 것처럼 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꿈은 모두 허상일 뿐이다. 노란 나비가 날아다니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얼마나 행복하게 느낀다고 해도 모두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 증거로 아이샤인 내가 손을 흔들자 그들의 모습에 물결처럼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잊을 수 없다면, 적어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강철의 심장을 갖기 원한다.
나는 흐려지는 그들의 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꿈에서 깨야 할 때이다.
‘괜찮아.’
지금의 나에게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은 있으니까.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미 모두 과거의 인연이니까. 복수를 끝내기만 하면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꿈에서부터 깨어났다. 잠들기 전과 변함없이 넓은 마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벨벳 쿠션과 푹신한 등받이, 그리고 나를 위해 준비된 책들과 간식거리까지 모두 잠들기 전과 똑같았다.
‘아.’
딱 하나, 다른 것은 있었다. 내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어느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깨달았다.
나는 숨죽여 울었다. 그들의 꿈을 꾼 건 내가 이덴베르에 향하고 있어서일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던 탓에 나는 결국 닦는 것도 포기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쓸쓸한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늘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동하지 못할 정도로 거센 비는 아니었지만, 땅이 질어지고 있어 오늘 멀리 가지는 못할 듯싶었다.
‘……진정하자.’
나는 고개를 흔들고는 루를 불렀다. 그리고 우느라 퉁퉁 부은 얼굴을 치료했다.
“괜찮으세요, 주인님?”
루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애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그것은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창밖의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오늘 멀리 못 가리라는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황녀 전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시종이 마차의 문을 두드리고 문 건너로 말해 왔다. 나는 대답하기 전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치료를 한 덕분에 얼굴은 부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는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
마차의 문을 연 시종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황녀 전하. 아무래도 비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거리를 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첫날인 데다가 무리해서 거리를 이동하면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어.”
“그러면 저녁 준비를 하겠습니다.”
벌써 저녁때가 다 되었구나. 나는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한참 울어서 배고플 만한데도 그랬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식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후…….’
아무래도 그런 꿈을 꾼 탓인 듯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다행히 행렬이 멈추고 난 뒤에 비는 거의 잦아들었다. 창문 너머로 시종들이 저녁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기분 전환을 위해 잠깐 마차 밖에 나가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고 숲이나 다른 곳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기사들이 있는 앞마당까지만 말이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있던 시종이 놀라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황녀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서.”
“아…….”
내 말에 시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마차 안에만 계셨으니 답답하실 만도 하시지요. 그러면 식사는 돌아오시는 대로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응. 이 앞만 잠깐 돌아보고 올게.”
“예.”
나는 교대로 나를 따라다니는 호위 기사를 한 명 붙인 채로, 야영장을 돌아다녔다.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요리사들이 기사와 시종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들어 배급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기사들의 천막 너머로 저 멀리 귀족들도 보였다. 하지만 계속 울고 난 뒤라 피곤했으므로, 지금은 딱히 사교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앞마당만 조금 돌아다니고 있었다. 비가 온 뒤라 공기가 서늘하긴 했지만 그 대신 무척 상쾌했다. 마차 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던 참에, 나는 또다시 익숙한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요한이었다. 삼삼오오 몰려 앉은 기사들의 무리들 중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요한과 그의 곁에 둘러앉은 기사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스튜를 받고 식전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특유의 커다란 목청 덕분에 그가 기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삶의 기쁨을 알려 주시며, 저희들의 길을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요한은 굉장히 신실한 성자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릴뻔했다.
“이상, 성녀 아이샤 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복창했다. 나는 황당해서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아이샤의 이름이라고?’
그건 나잖아.
‘……내 이름으로 기도를 하다니…….’
유명한 성인이나 신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누군가가 기도할 줄은 몰랐던데다가, 그 모습을 목격하기까지 했으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모든 기도를 마친 그들은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뱃가죽이 들러붙는 줄 알았어! 드디어 식사 시간이구만.”
“마침 메뉴도 스튜네. 이렇게 비 오는 날에는 역시 따뜻한 게 최고지.”
“……야, 잠깐만. 저기…….”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이 내 모습을 발견해 버렸다. 나와 기사들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것도 잠시, 요한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성녀님 아니십니까!”
그의 커다란 목청은 여전했으므로,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내가 내려온 사실을 눈치채고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큼, 다들 식사하고 있었나요? 제가 방해를 한 것 같네요.”
“아닙니다! 방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깜짝 놀라 앞다투어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자그만 사건이 하나 벌어지고 말았다. 손을 내젓던 기사 한 명이 자신 몫의 스튜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그는 아까 ‘뱃가죽이 들러붙는다’라고 표현한 기사였다. 나무 그릇에 담겨 있던 맛깔스러운 그의 스튜가 철퍽, 하고 바닥에 모두 쏟아져 버리고 말았다. 나무 그릇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나고, 그 이후로는 침묵이었다.
자신 몫의 음식을 떨어뜨린 기사의 얼굴은 너무나도 비참해 보였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에 절망하며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그 슬픈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근처를 지나가는 시종이 없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나가는 시종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시종에게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게…….”
절망하고 있는 기사를 대신해서,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황녀 전하, 음식은 딱 인원수에 맞게 조리되기 때문에 여유분이 없을 겁니다. 자기 몫을 떨어뜨린 이상 오늘 저녁은 굶는 수밖에 없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넉넉히 식량을 가져왔다곤 하지만, 먼 길이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의 말에 다른 기사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동료들의 말이 더한 타격이 되었던 모양인지, 스튜를 떨어뜨린 기사의 얼굴은 더욱더 절망에 물들어 갔다.
나는 그 기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첫날이라 많이 이동하지 않았다곤 해도, 산과 들을 오르는 것이니 매우 힘들었을 게 틀림없다.
게다가 남은 음식이 없으니 내일 아침까지 계속 굶어야 할 텐데. 한창 먹을 나이의 젊은 기사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떡할까 생각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괜찮으면…….”
내가 운을 띄우자, 기사가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몫의 음식을 먹겠어요? 나는 종일 마차를 타고 왔을 뿐이니,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거든요.”
내 말에 기사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재확인했다. 그러고서 다시 나에게 물어오기까지 했다.
“화, 황녀 전하의 몫을 말입니까?”
“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얼마나 놀란 것인지, 스튜를 떨어뜨린 기사는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게 그에게 있어 커다란 유혹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닙니다!”
그는 매우 결사적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감히 제가 어찌 황녀 전하의 몫을……!”
“음, 나는 정말 괜찮은데요.”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재차 권유했다. 내가 황녀라는 이유 때문에 사양하는 듯싶어도 아까의 반응을 보았을 때 그는 매우 배고픈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배고픈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안쓰러워지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권유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사실 식욕도 그다지 없거든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돌아가면 시종들이 나를 위해 저녁 식사를 올려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식욕이 없었다.
얼마 먹지도 못해 버려질 바에는, 차라리 절실한 기사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요한이 펄쩍 뛰었다.
“성녀님!!”
“네?”
내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혹시 그 뭐냐, 멀미라도 하시는 겁니까? 입맛이 없으시다니……!”
“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마차는 무척이나 편안하고 안락했던 덕분에 멀미 날 일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에서 자고 있었기도 하고 말이다. 식욕이 없는 것은 단순히 내가 아까 꾸었던 꿈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얘기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그냥 오늘따라 식욕이 없는 것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하지만 왜일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만큼 위태로워 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말아 쥐고 말았다.
“……저어, 황녀 전하.”
아까 스튜를 떨어뜨린 기사가 말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실수를 저지른 것은 저이니, 그 대가도 제 몫이지요. 황녀 전하께서는 제 걱정을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다만 황녀 전하의 말씀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저렇게까지 사양하는데 더 이상 권유하는 것도 오히려 부담되리라.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마차로 돌아가 볼게요.”
“예! 감사합니다!”
그때 요한이 나를 향해 재빨리 다가왔다.
“마차까지 배웅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바로 앞인걸요.”
정말로,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내 마차가 금방 보인다. 하지만 요한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아니요. 언제 어느 때든, 세상사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황녀 전하를 위험에서 지키는 것만이 저의 기쁨이자 영광입니다.”
“……음…… 그래요.”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보통 고집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나와 요한은 마차 앞까지 걸어갔다. 말 그대로 코 앞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대화 없이도 우리 둘은 금세 마차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만.”
그렇게 말하고 내가 뒤돌아서려 하는데 요한이 문득 나를 불렀다.
“저어, 황녀 전하.”
의아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긁기도 하고, 손을 이리저리 꼬기도 하면서 망설이던 그는 이내 무슨 결심이 선 듯 나에게 말해 왔다.
“……괜찮다면 하나만 여쭐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가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음식을 자주 거르시는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말했듯이 오늘은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그렇습니까…….”
그는 대답을 듣고 난 뒤에도 계속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마침내 그가 말했다.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
“저도 식사를 거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무척 뜬금없었다. 그가 식사를 걸렀던 때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서로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요한은 말을 이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그의 눈에 어느샌가 씁쓸한 기색이 돌고 있었다.
“그때는 성녀님을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팔을 잃고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였지요. 이제 더 이상 저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하루하루 술만 퍼마셨습니다. 당연히 몸을 돌볼 생각은 아예 없었지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성녀님을 만나던 날에도 저는 술독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억나요. 그때 요한은 무척 거칠었었죠.”
“그, 그때를 떠올리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처음에 그가 나에게 난동을 부렸던 기억이 난 듯했다. 헛기침을 하던 그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술만 퍼마시던 그때의 저는 아예 그러다가 콱 죽어 버리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더 이상 살아갈 의지가 없으니까 음식도 먹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린 거죠. 그렇게 저는 영영 절망 속에 갇혀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돌연 요한은 어깨를 쫙 폈다. 씁쓸하던 얼굴에 자부심이 어렸다.
“하지만…….”
“…….”
“성녀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다시 보았을 때 그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살아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 뒤로 저는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한 식사가 얼마나 맛있던지, 흡사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이 삶에 저절로 감사를 가지게 되더군요.”
나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성녀님께서 지금 무척 표정이 어두워 보이시길래…… 괜한 오지랖이지만 걱정이 되어서…….”
“…….”
“성녀님. 음식을 먹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맛을 떠나서, 자신을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니까요.”
“…….”
“저어, 성녀님께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꼭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입맛이 없으시다곤 하셨지만 한입 드셔 보시고 나면 생각이 바뀌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그가 숙인 고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일렁였다.
이덴베르로 향하기 위해서 내가 했던 결심들. 황궁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들,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복수까지.
진정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좌절해 있을 수는 없었다. 요한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을 돌보는 일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요?”
“……?”
“평소보다 표정이 어두웠단 거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 보였다.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조금, 아주 조금 났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단순히 황녀나 성녀라는 직위를 떠나서, 그가 진심으로 내 걱정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것은 황성에 있는 내 가족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성녀님!”
그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식사를 꼭 챙겨 먹을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가 다시금 우렁차게 외쳐 보였다.
“그리고! 이번 행렬의 요리사는 무척 솜씨가 뛰어난 자로 선별했다고 들었습니다. 흠흠, 아마 성녀님의 입에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더 웃고 말았다.
“그래요. 그 솜씨가 기대되네요.”
그는 씩 웃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가 나에게 인사를 한 뒤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다음 순간 좀 황당해지고 말았다. 아까 스튜를 떨어뜨렸던 기사가 요한 몫의 식사를 몰래 퍼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발견한 요한과 기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나 참.’
진지해지려고 해도 진지해질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하지만.’
요한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평화 사자라는 중요한 임무를 갖고 적국인 이덴베르에 가는 것이다. 아직 이덴베르 국경까지도 가지 않았는데 이렇게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가온 시종을 향해 말했다.
“저녁 식사는 준비되었니?”
내 말에 시종이 살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올리겠습니다!”
시종은 마차 안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작은 테이블을 펴 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를 위한 저녁 식사가 올려졌다.
내가 황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이 첫날이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식사는 일반 기사들에 비해서 훨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가장 먼저 스튜를 한입 떴다. 아까 스튜 하나를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던 두 기사의 모습을 보고 났더니 스튜의 맛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던 것이다.
천천히 눈을 감고 스튜의 맛을 음미했다. 혀 속에서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양념이 밴 소고기의 맛이 느껴졌다. 큰 냄비에 푹푹 끓여서 그런지 고기가 살살 녹는 것 같았다.
요한의 말이 맞았다. 전혀 식욕이 돌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한입 먹어 보니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아까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고작 스튜 한 스푼, 그것만으로도 말이다.
창문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친 하늘은 투명한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쏟아질 듯한 별들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스튜를 한입, 또 떠먹었다. 양이 많았지만 어쩐지 음식들이 술술 들어갔다. 그렇게 먹다 보니 어느새 모든 그릇들이 다 비워졌다.
배가 불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