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4권Chapter 10. 새로 만난 정령왕 (2) (16/21)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4권

목차

Chapter 10. 새로 만난 정령왕 (2)

Chapter 11. 평화 사자

Chapter 12. 습격

Chapter 13. 전쟁

Chapter 14. 결전

Chapter 15. 그림자

Chapter 10. 새로 만난 정령왕 (2)

하이넨 님의 그 무기질적인 눈이란. 그가 정말로 나를 빠뜨려 죽인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주춤하고 말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의 정령왕인 그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다. 그에게 루디온이 통할 리도 없으니까 말이다. 남은 것은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저를 여기서 죽이실 건가요?”

그는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그도 아직은 고민하는 중일지 몰랐다. 거기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얻은 나는 강하게 말했다.

“저를 죽이지 마세요.”

내가 또박또박 말하니 하이넨 님은 약간 불쾌한 얼굴을 했다. 고작 인간에 불과한 내가 정령왕인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물러설 길은 없었다.

“하이넨 님의 말씀은, 제가 룬 님을 소환하지 않은 채 곁에 두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래.”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제가 그분께 감히 무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곳에 머무르시는 건 그분의 자유 의지니까. 다만…….”

나는 그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지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룬 님을 소환해 보이겠습니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룬 님을, 아니, 루미나스 님을 소환해 보일 테니……. 부디 조금의 시간을 주세요. 부탁드리겠…….”

“넌 안 돼.”

그가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네?”

나는 두 눈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정령왕을 소환할 수가 없어.”

그 말은 느릿하게 내 귀에 파고들었다. 그 뜻을 깨달았을 때는 전신에 싸늘한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더듬었다.

“……어, 어째서요?”

그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냉정했다.

“네 한계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은 절대 무리라는 걸.”

“……그런…….”

“너는 앞으로 상급 정령을 몇 정도 더 소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가 네 끝이다. 루미나스는 몰라도 더 오랫동안 살아오며 많은 정령사들을 지켜봐 온 나라면 알 수 있어.”

나는 숨을 멈추었다.

“……아.”

하이넨 님의 청록색 눈은 싸늘했지만, 적어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소환할 수 없다고?’

그의 말을 천천히 되씹어 보았다.

‘……룬 님을?’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나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지금 와장창, 하고 부서진 느낌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룬 님을 소환할 수가 없다면, 그는 결국 내 곁을 떠나가게 되는 걸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룬 님은 그의 의지로 내 곁에 오래 머무르겠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령계의 규칙은 그조차도 피할 수 없으리라.

복수는 또 어떡하지? 정령왕을 소환함으로써 이덴베르 황족에 대한 복수를 이루고자 했다. 내가 정령왕의 소환자가 된다면 그만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모르겠어.’

가슴이 답답했다. 룬 님에 대한 것도, 복수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와 함께 갔던 바다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다짐했었다. 룬 님을 소환하지 못한다면 그를 마음속으로부터 떠나보내기로.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는, 지금 느껴지는 이 마음의 고통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보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빛이었다. 움켜쥘 수 없는 것을 자꾸 내 손에 가둬 두려고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그의 곁에 있고 싶어서.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결한 정령왕이고, 나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그가 보여 준 다정함이 따뜻했다. 손으로 잡을 수는 없어도, 손을 내밀면 살며시 느낄 수 있는 햇살처럼……. 적어도 그가 내 옆에서 한줄기의 빛이라도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계속 옆에 있을 수만 있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었을 텐데.

“……윽.”

나는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하지만 거세게 터져 나와서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보려고 하다가, 흘러도 흘러도 끝이 없자 결국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하이넨 님이 보고 있음에도 그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하이넨 님은 그런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창피했지만 눈물은 멎을 길이 안 보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가 말을 걸었다.

“왜 우는 거니?”

“저는…….”

하이넨 님은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나에게 물어왔다. 대답해야 하는데. 눈물이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다가 숨이 멎을 듯이 울음이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저는…….”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마음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줄 텐데.

“루미나스가 떠나는 게 슬픈 모양이구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아까 그가 내 어깨를 감싸쥐던 것이 떠올라 흠칫하고 말았지만, 그는 다시 나를 위협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이넨 님의 서늘한 손이 눈물로 열이 오른 내 뺨을 식혀 주었다. 그가 속삭였다.

“그를 소환하고 싶니?”

그것은 마치 달콤한 유혹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럼 방법을 알려 줄게.”

“……방……법?”

거세게 울었기 때문에 목이 거의 쉬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말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방법…… 이 있나요? 소환할 수 있는 방법?!”

그러고 보니 그가 아까 나에게 말했었다.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고 말이다.

만약에 그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면……. 심장이 갑작스레 세게 뛰기 시작했다.

“제발 알려 주세요!”

나는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만약 룬 님을 소환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말한 그 ‘방법’이라는 것에, 나는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 방법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네 생명력을 바치는 거야. 다시 말해서, 수명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수명?”

나는 그의 말을 멍하니 되새겼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과 수명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네가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는 것은 네 정령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야. 오히려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지. ‘타고나는 자’의 장점이 그거니까 말이야.”

“그럼……?”

“문제는 마력이지.”

그는 쉽게 말했다.

“마력은 생명력과 일맥상통해. 마법이나 정령술을 쓰지 못하는 인간들도 소량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야. 수명을 대가로 마력을 늘리는 건 미래의 생명력을 당겨서 현재의 힘을 증가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

“네 마력은 상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이니, 수명을 조금 바친다면 충분히 정령왕을 소환할 마력을 얻을 수 있어.”

“……어느 정도를 바쳐야…….”

“글쎄, 몇십 년 정도?”

이 와중에도 몇십 년을 ‘조금’이라고 표현한 데에서 하이넨 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이넨 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 방법을 선택하는 건 네 자유야. 수명을 깎는다는 게 인간에게 쉽지 않다는 건 알아. 다만 나는 방법을 알려 줄 뿐이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수명을 깎는다.’

백 년도 채 살지 못하고 스러져버리는 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거기에 더해 수명까지 깎게 된다면, 나는 과연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 수 있을까? 십 년? 이십 년?

나는 나도 모르게 룬 님이 사라져 버린 숲 속을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봐.

하이넨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네가 말한 대로 정말 그를 소환하고 싶다면, 지켜보겠어.”

배는 어느새 호수 가장자리에 와 있었다. 배에서 내려서 조금 정처 없이 걸으니, 그 어귀에서 룬 님이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룬 님.”

내가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하이넨.”

룬 님의 목소리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의 화난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제야 내가 눈물을 흘린 탓에 목소리도, 얼굴도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또다시 불러준 내 이름에 설렐 새도 없이, 나는 하이넨 님과 룬 님의 사이를 막고 말았다. 룬 님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게 마치 하이넨 님과 싸우기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 두 분 싸우지 마세요.”

나 때문에 그 둘이 싸우는 걸 원치 않았다. 하이넨 님이 잘못한 것도 없었다. 내가 울게 된 건 내 능력이 모자라다는 슬픔 때문이니까.

그러자 룬 님은 복잡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그의 눈길이 내 눈에 닿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 내 눈은 물고기처럼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부끄러워져 어디라도 숨고 싶어졌는데, 내 마음을 읽은 듯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눈 근처에 따뜻한 기운이 어리더니 눈 깜빡할 새에 쓰리던 눈이나 잠긴 목이 나아졌다. 그러고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내 몸에 활력을 주었다.

“……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룬 님의 치료를 받으니, 예전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루디온을 처음 소환했을 때 말이다.

그때 나는 루디온을 소환하고 실신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어났을 때에는 치유술을 받기라도 한 것마냥 온몸이 이상할 정도로 개운했었지. 왜 그랬었던걸까 궁금했었는데…….

‘게다가, 말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루디온을 소환한 걸 알고 계셨지.’

그때에는 그저 소문으로 들었겠거니 했는데, 생각해보니 빛의 상급 정령을 소환한 것을 정령왕인 그가 모를 리가 없겠다 싶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했다.

“예전에 루디온을 처음으로 소환해서 실신했을 때, 그때도 룬 님이 지금처럼 절 치료해 주신 거지요?”

“…….”

룬 님은 말이 없었다.

“그쵸?”

내가 채근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랬구나. 감사해요.”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가 생각보다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이넨 님은 아까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웃자, 룬 님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한숨을 흘렸다.

“잠깐 쉬어라.”

“네? 전 괜찮은데.”

“쉬어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멀뚱히 그의 뒤를 따라갔고, 그런 우리 둘의 뒤를 하이넨 님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룬 님이 향한 곳은 호수 앞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였다.

저기에서 쉬라는 듯이 룬 님이 눈길을 보내길래 나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정말 괜찮은데.’

빈말이 아니었다. 룬 님이 나에게 치유력을 부어 준 덕분에 몸이 한결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피로나 쓰림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네 기운이 불안정하다.”

“그런가요……?”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룬 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긴, 육체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조금 피로한 것 같긴 했다.

“뱃놀이를 오래했더니 어지러워서 그런가 봐요.”

나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사실 뱃놀이 때문이라기보다는 하이넨 님의 기운을 정면으로 맞선 까닭이겠지만 말이다. 룬 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런 나의 어설픈 거짓말을 넘어가 주었다.

그가 루디온을 소환했다.

“루디온.”

그러자 루디온이 빛과 함께 등장했다. 아무래도 룬 님과 루디온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알아차리는 모양이었다.

소환되자마자 루디온이 내 손을 잡아 이끌기에 어, 어, 했는데 그가 자신의 날개로 나를 감싸는 게 아닌가. 엉겹결에 루디온의 품에 폭 안긴 나는 그 품이 무척 폭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치유되는 기분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깃털을 쓱쓱 쓰다듬고 있었다. 깃털은 매끄러웠지만 동시에 무척 부드러웠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동물 치료제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 말하자면 루디온은 동물이 아니지만 말이다.

정자에 누워, 루디온의 품에 안겨 있으니 솔솔 잠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라곤 했지만 아까 울었던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날씨가 쌀쌀한데에 비해 루디온의 품이 따뜻하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하이넨 님은 그런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얄밉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더니, 어느새 나는 살짝 잠이 들고 말았다.

* * *

“……그녀…… 무슨 ……을…….”

룬 님의 목소리에 나는 반쯤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다고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은 아니고, 다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이넨 님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응? 별말 안 했는데?”

“거짓말하지 마라. 알 수 있어.”

“……음.”

“그 아이의 기운을 읽었으니까.”

하이넨 님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룬 님이 날 울린 하이넨 님을 추궁하고 있던 상황인 모양이다. 룬 님이 들은 적 없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경고하지. 괜한 접근을 삼가도록 해라.”

“……루미나스.”

하이넨 님은 그런 룬 님을 타이르듯 조근조근히 말했다.

“정령왕이 계속해서 정령계가 아닌 인간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물론 아직 머무른 시간이 짧다곤 하지만, 널 보고 있으니 네가 금방 돌아올 것 같지 않아.”

“…….”

“계약하지도 않은 인간과 계속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정령계의 규칙을 위반하는 일이야.”

“알고 있다.”

룬 님의 목소리에는 짧은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하이넨 님이 물었다.

“그녀가 네게 무슨 의미인 거지?”

룬 님은 대답이 없었다. 나도 그것이 궁금했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룬 님께 대체 어떤 의미인 것일까.

“……글쎄.”

문득, 내 머리카락 위로 따뜻한 기척이 느껴졌다. 룬 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듯했다. 그것은 한낮의 잠에 취하는 것보다 훨씬 달콤한 감각이었다.

“나는 다만…….”

“…….”

“그녀를 더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룬 님의 말은 어떤 뜻일까? 여전히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그 둘은 그 이후로 말이 없었다. 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밀려드는 피로에 다시 한 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눈을 또다시 떴을 땐, 벌써 반쯤 해가 져 있었다. 노을이 진 황궁 숲의 호수는 무척 아름다웠다. 부스스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하이넨 님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룬 님께 물었다.

“하이넨 님은 어딜 가셨나요?”

그에 룬 님은 짧게 대답해 주었다.

“정령계로 돌아갔다.”

“아…….”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온 것만큼이나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정령왕이었다. 룬 님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쉽나?”

“네? 아니에요. 그냥, 갑작스럽구나 싶어서요.”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노을의 붉은 기운이 룬 님의 백금발을 물들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룬 님,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하이넨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네.”

그의 걱정에 따뜻한 것이 마음속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척 멋쩍어지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돌아갈까. 네 시종과 기사들도 깨어나 있을 거다.”

“아, 정말요?”

“하이넨이 목숨이 아깝다면 그들에게 제대로 정리를 시키고 갔겠지.”

‘……그 정리라는 것은 혹시 세뇌를 말하는 걸까?’

그런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었다. 나는 옷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지금까지 나의 이불과 베개가 되어 주었던 루디온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루디온은 정말 따뜻하구나. 루디온 이불이나 루디온 베개 같은 장사를 해도 잘 팔리겠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자에서 내려온 그가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마치 나를 바래다 주는 것만 같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를 위한 무도회가 며칠 앞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새로운 사람과 춤도 춰 보렴’이라며 나를 부추기셨다.

‘……나는…….’

사실 새로운 사람과 춤을 춰 보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떠오른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건 바로 룬 님이었다. 어머니가 말한 기념 무도회에서 그와 첫 춤을 함께 추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망설였지만, 하이넨 님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언제 그가 돌아갈지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결심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저, 룬 님……. 사, 사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자연히 내 목소리가 떨려 왔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말이다.

“그게…….”

“……뭐지?”

룬 님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다. 넌 할 수 있어, 아이샤. 마음속으로 기합을 다졌다.

“저, 저, 저와 함께…….”

“너와 함께?”

계속 말을 더듬고 있자니 마치 세상에서 제일 가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긴 시간 끝에 가까스로 첫 글자가 흘러나왔다.

“추…….”

“……?”

‘춤을 춰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감 넘치게, 당당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룬 님의 황금색 눈동자에 나는 그만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

“……추…….”

“…….”

“추, 추리 소설 읽으실래요?”

“……?”

내 말이 끝나자 우리 둘 사이에는 차가운 침묵이 지나갔다. 나는 잠깐 혀를 깨물 뻔했다.

‘……뭐? 추리 소설?’

이 말이 대체 왜 나온 거지.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의 앞만 아니었으면 머리를 마구 흔들고 말았을 것이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추리 소설이란 말인가.

그런데 룬 님이 나에게 물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나?”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네? 아, 그, 그게…….”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웃어 보였다. 이제 와서 말을 다시 주워 담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조, 좋아해요. 밀실 살인 사건이라든가…… 범인을 찾는 재미가 무척 뛰어나잖아요. 마침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군.”

“그냥 한번 말씀드려 본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하, 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해 버렸을까.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룬 님이 말했다.

“작가를 알려 주면 언제 기회가 될 때 읽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원래 하려던 춤 신청은 물 건너가고, 졸지에 룬 님에게 책 추천만 하고 말았다. 내가 사서도 아닌데…….

‘내 궁에 가고 싶다. 궁에 가서,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마구 발로 차고 싶어.’

이렇게 쥐구멍이 절실해진 적이 따로 없었다.

“그럼 갈까.”

“……네.”

나는 애써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며 정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때, 룬 님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뭔가요……?”

이미 내 정신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기에,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에게 춤 신청을 못 한 게 슬펐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바보라서 그런 탓을. 그런데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이번 주에 있는 무도회에서, 나와 함께 첫 춤을 춰 줬으면 좋겠군.”

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정자 위에서 다 내려온 게 아니었다면 분명히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의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무도회? 춤? 룬 님과? 내 표정이 너무나도 이상해 보였는지, 룬 님이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번 주에 네 기념 무도회가 있다고 들었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였다. 그에게 춤 신청을 할 생각만 했지, 그가 나에게 말을 꺼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을 한참 더듬고 말았다. 내가 들은 것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 그, 그러니까 룬 님이 저, 저와 무도회장에서 처, 첫 춤을 추고 싶다는 마,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는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안 되는가?”

마치, 거절당할 것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나는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어…… 그, 그, 그게…….”

하늘에서 팡파르가 울리는 듯했고, 귓가에선 종소리가 뎅뎅거리는 것 같았다.

“그, 조…….”

“…….”

룬 님은 내 대답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혀를 굴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

나는 기쁨의 눈물을 삼키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좋아요…….”

내 대답을 듣자, 그가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서, 나는 다시 한 번 홀리고 말았다.

“그래. 그럼 이번 주에 또 보도록 하지.”

“네…….”

완전히 홀려 버린 나는 고개를 계속 끄덕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와 얼마간 걷고 나니, 벌써 숲의 초입이었다.

호위 기사와 시녀들은 저만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넨 님이 가기 전에 정리를 했을 거란 말이 맞아들어갔는지, 그들이 나를 보는 눈에는 한점 의문이 없었다.

룬 님은 그들이 보이자, 실체를 풀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마 숲에서 둘이 있었다는 게 그다지 보기 좋은 상황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호위 기사와 시녀들을 향해 달리듯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재촉했다.

“궁으로 어서 가자!”

아까까지만 해도 궁으로 가면 제일 먼저 이불을 걷어차고 싶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바쁘게 걸어 궁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선포하듯 시녀들에게 주문했다.

“나, 이번 주에 있는 무도회에 엄청나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그 말에 궁에 있던 모두가 의아해하는 것이 보였다.

“네? 황녀님?”

“무도회에 별로 관심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가장 예쁘게 보이고 싶으시다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어.”

바뀐 이유를 자세히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내 얼굴을 보던 시녀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녀님.”

“그래요.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은 바로 엘미르의 별인 황녀님이시니까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꾸며드릴게요!”

“믿고 맡겨 주세요!”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응! 잘 부탁해!”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나는 내가 했던 말을 1초 정도 후회했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꽃잎과 갖가지 향초로 가득찬 욕조에 풍덩 담기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각종 향유 마사지를 받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듬고 꾸미고……. 어찌나 할 일이 많은지 몰랐다. 그걸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장장 사흘 동안 계속했다.

덕분에 무도회 날 정오가 되었을 때 나는 벌써 지친 상태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다니기만 했는데도 말이다.

‘꾸미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나는 축축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붙잡으며 긴 소파에 눕다시피 앉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유모가 후후, 웃으며 말을 걸었다.

“황녀님,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꾸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거 없어.”

나는 유모의 말에 시치미를 떼었다.

“다른 사람들 말처럼, 이번 무도회는 내가 주역인 무도회잖아. 그래서 좀 더 꾸미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게 말하자 유모는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떠보기 시작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혹시 마음에 드는 분이 생기신 건 아니고요?”

떠보는 질문일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나는 붉은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요?”

“아니라니까.”

내 말에 유모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기만 했다.

“황녀님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가시는군요.”

추억을 떠올리는 듯 그녀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처음 말문을 트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셨을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유모.”

그녀의 말에는 나도 가슴이 조금 뭉클해지고 말았다. 유모는 내가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함께 나를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더라도, 그녀는 이미 내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된 지 오래다.

유모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왔다.

“어떤 분이라도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황녀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이라면 정말 멋진 분이시겠지요.”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예.”

그녀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던 나는 입을 열었다.

“……멋진 분이야.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정하셔.”

“어머나…….”

유모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분도 황녀님을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아니, 이미 좋아하실지도 몰라요. 이 유모는 알 수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황녀님께서도 이렇게 멋진 분이신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의 앞에서 그저 어린애나 타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연 유모는 엄격한 표정을 해 보였다.

“다만, 그래도 아직 황녀님이 어리다는 것은 아셔야 해요. 아무리 데뷔탕트를 치르셨어도 아직 정말로 성인이 되신 건 아니니까요.”

“알겠어, 유모.”

“그래요.”

내 말에 유모는 다시 웃었다.

“그러면 드레스를 한번 입어 보러 갈까요? 황녀님.”

“응!”

쉬었더니 기운이 다시 차오른 것 같았다. 나는 유모의 손에 이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는 이미 골라 둔 것이 있었다.

자수를 놓은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허리에서부터 연분홍색 옷감이 층층이 겹을 만들며 풍성한 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잘한 리본이나 프릴이 구석구석을 장식해서 드레스에 화려한 느낌을 더했다.

옷을 입고 한번 돌아봤더니 마치 봄날의 엘미르 꽃처럼 드레스 자락이 펼쳐졌다. 액세서리는 드레스 색에 맞추어 핑크색 다이아몬드 머리핀과 티아라를 썼다. 머리카락은 반묶음을 해서 땋아 내리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내려뜨렸다.

거기에 더해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니, 거울 속의 나는 내가 놀랄 만큼 아름다워져 있었다. 나를 꾸며 준 사람들은 모두 뿌듯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천사가 강림했다느니, 요정들도 황녀님의 미모에는 이길 수 없을 거라느니, 황녀님이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다느니. 정말 갖은 찬사를 다 들었다.

덧붙여 나를 데리러 온 이시스 오라버니마저도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아이샤, 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무도회에서 너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니?”

그 말에 잠깐 고민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첫 춤은 룬 님과 함께 추고 싶어.’

오라버니가 서운해할 건 알지만, 이왕 추는 거라면 의미가 특별한 첫 춤을 룬 님과 함께 추고 싶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홀에 가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나와 오라버니에게 몰려들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게다가 오래간만의 공식 석상이라 루를 어깨에 올려놓고 등장했더니 환호가 대단했다.

“여기 좀 봐 주세요!”

“황녀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오라버니에 대한 환호도 만만치 않았다. 대 제국인 엘미르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 너무나도 훌륭한 그에게 한 마디라도 붙여 보고 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영향력이 높은 귀족들은 물론이고, 특히나 아직 미혼인 오라버니에게 구혼하려 하는 영애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오라버니가 지나가는 길마다 눈길을 끌기 위해 영애들이 한두 명씩 풀썩풀썩 쓰러졌고,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이 기묘한 상황에 웃을까 말까 고민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라버니도 미묘한 얼굴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우리 둘은 제국의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연회장 안은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가을인데도 더울 정도였다.

“……우선 자리로 가자꾸나.”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탄성이 뒤따라왔다. 그것을 하나하나 다 받아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렸기에, 간신히 눈인사만 하면서 상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해 주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우리가 다가가자 두 분은 웃으며 맞아 주었다.

“아이샤, 이시스. 둘 다 정말 멋지구나.”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엘미르의 미래가 눈부시게 밝아.”

두 분의 말에 나와 오라버니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내 자리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연회장에 사람이 슬슬 다 모인 것이 보였다.

“연회를 시작할 준비를 해야겠다.”

어머니의 지시를 받은 시종장은 홀의 한구석으로 가서 악사들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악사들이 잘 조율된 악기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홀의 다른 한구석에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간단히 요기할 만한 거리도 있었고, 든든하게 배를 채울 만한 끼닛거리도 있었다.

“이제 일어날까.”

“네.”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어머니가 부드럽게 그 손을 잡았다. 오늘 기념 무도회에서 처음을 끊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나이를 얼마나 먹어도 사이가 좋은 두 분이셨다. 둘이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나와 오라버니는 자리에서 서서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분이 홀 중앙으로 향하자, 그 두 분을 위해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봄날처럼 포근한 선율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춤곡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럽게 스텝을 밟았다.

‘아름답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첫 곡을 추기 시작하자 몇몇 사람들이 댄스홀에 따라 나왔다. 꽃과 같은 영애들과 영식들이 박자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았다.

저마다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는데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도 그분과 저렇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잘 어울려 보인다면 좋을 텐데.’

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오라버니가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아이샤, 왜 그렇게 멍하니 있니?”

나는 퍼뜩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크게 의아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와 같이 첫 춤을 추지 않을래?”

“어, 그게…….”

나는 눈을 깜빡였다. 파트너가 따로 없는 나에게 에스코트하는 오라버니가 춤을 신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꼭 누군가와 첫 춤을 추고 싶었기 때문에, 대답 대신 연회장을 쭉 돌아보고 말았다.

그 모습에 오라버니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아이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온 것은.

“아이샤 황녀 전하.”

그에 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기대하던 사람을 찾은 것처럼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 뒤에는 아쉽게도 바라던 그가 아닌, 바로 비온 공자가 서 있었다. 그의 루비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퍽 아름다웠지만 내가 찾던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실망감을 감추고 애써 웃어 보였다. 오래간만에 비온 공자를 만났는데 실망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이다.

“오래간만에 뵈어요. 비온 공자님.”

“잘 왔다. 비온.”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그가 나와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인사했다. 그도 이번 무도회를 위해 평소보다 공을 엄청나게 들인 모양이었다.

그는 보통 연회가 열릴 때마다 정복이나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오곤 했었는데, 오늘만큼은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왔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복의 깃이 무척 빳빳했다. 나는 그 점을 들어 말했다.

“오늘따라 더 멋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내 칭찬에 그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러곤 나를 향해 말을 되돌려 주었다.

“황녀 전하께서도 굉장히 아름다우십니다.”

나는 생긋 웃었다.

“감사해요. 그나저나 잘 지내셨나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그렇군요. 오래간만에 얼굴을 뵈어서 기뻐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비온 공자가 좀 달랐다. 평소와는 다른 옷차림도 그렇고, 말끝을 흐리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나와 대화를 하는데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달까? 오래간만에 보는 내가 어색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어째서일까?

내가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가 뭔가 결연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황녀 전하.”

“네?”

그는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내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놀랍게도 그가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나한테 손을 내미는 거지?’

나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손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검과 마법을 오랫동안 해 와서 굳은살이 박혀 있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비온 공자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그가 무어라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게다가 악단의 흥겨운 음악 소리가 홀에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온 공자의 말은 각종 소리들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니, 비온 공자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귀 끝이 조금 빨개진 상태였다.

“그러니까…….”

“……?”

무슨 이야기이길래 대체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짧은 시간 후에 공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첫 춤을 춰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비온 공자는 무척이나 긴장한 듯했다.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변화였지만, 몇 년 동안 그를 알고 지내 온 나였으므로 그것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내 옆에 있던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샤에게 첫 춤을 신청한다고?”

오라버니도 비온 공자가 나에게 첫 춤을 신청한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로 단 한 번도 그에게서 춤 신청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오라버니의 친구이니 몇 번 정도는 함께 춤을 췄을 법도 한데 말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가만히 있자 그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치 변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이번 전쟁에서 황녀 전하 덕분에 아버지께서 많은 도움을 받으셨기도 하고……. 아니, 그렇다고 아버지 때문에 춤을 신청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는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볼수록 점점 말은 꼬여 갔다. 결국 그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저와 첫 춤을 추어 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까. 그와 지금까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걸리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나도 그의 아버지와 이번 전쟁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의 신청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조금 망설여졌다.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웃던 사람들은 이제 다 같이 음악에 맞추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춤의 열기 때문에 연회장 안이 더웠다. 점점 무도회가 깊어지는데, 찾는 사람은 아직 보이질 않았다.

비온 공자에게 대답하기 전,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연회장 안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레 어떤 영식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황녀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름 모를 그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부터 황녀 전하를 깊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 엘미르의 별, 세계의 보물인 황녀 전하께 제가 감히 첫 춤을 신청해도 괜찮을까요?”

그는 대담한 듯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말을 마친 뒤에 그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어…….”

새로 온 영식의 인상은 좋아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춤을 추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게…….”

거기다가 누가 온다고 한들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곤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영식들이 나에게 앞다투어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기회를 찾기 위해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다가온 그들은 모두 나에게 한마디라도 건네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사실 저도 오래전부터 황녀 전하을……!”

“부디 단 한 번만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황녀 전하!”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영식들에게 질려서 한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갑작스럽게 이렇게 많은 춤 신청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간절하게 내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게…….”

그런 나를 보던 이시스 오라버니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샤, 당연히 나와 먼저 춤을 춰 줄 거지?”

그에 지지 않으려는 듯, 비온 공자도 한 마디를 보탰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황녀 전하.”

거기에 다른 사람들까지 한마디씩 얹으니 내 근처는 그야말로 시장 바닥 같았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발만 동동 굴렸다. 이 많은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그렇다고 그들의 요청대로 모두와 한 곡씩 추어 준다면 아마 나는 해가 다시 떠오를 때까지 쉼 없이 춤을 춰야 하리라. 그전에 너무 힘들어서 기절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휴…….’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와 춤을 추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첫 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차려입은 것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심지어 오늘 하루 전체까지도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같이 첫 춤을 추자고 말했으면서.’

밀려드는 실망감에 마음속 한구석이 허전하게 텅 빈 것 같았다. 그는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 먼저 춤을 추고 있는 걸까?

그가 약속을 해 놓고 잊어버리거나,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상상이 안 되지만……. 주위에서 그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척이나 인기가 많으니까.

결국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손을 내미려고 했다.

‘그 뒤에는 비온 공자와 함께 춤을 추자.’

괜한 분란거리나 가십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비온 공자를 빼면 다른 영식들을 거의 알지 못해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두어 곡을 추고 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날파리 보듯 영식들을 휘휘 내쫓기 시작했다.

“길이 막혔네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우리 곁에 있는 영식들을 눈으로 노려보았다.

“소란스럽군.”

그 눈빛이 아주 흉흉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식들은 ‘히익’하는 소리를 내며 도망가 버렸다. 혹은, ‘아,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군요!’ 하면서 말이다.

나는 저절로 황당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눈빛을 견딜 배짱도 없으면서 무슨 용기로 나에게 춤을 신청한 거람? 심지어 나는 1살 때부터 그 눈빛을 견뎌 내 왔는데 말이다. 내 곁에는 이제 이시스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만이 남아 있었다. 하여간 요즘 영식들은 근성이 없다고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왔다. 실크 장갑을 낀 어머니의 손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였다.

“아이샤.”

“네?”

내가 대답하자, 어머니가 눈을 휘며 웃었다.

“여기에서는 네가 주인공인 걸 알고 있지?”

“……주인공…….”

알고 있었다. 이번 연회가 나를 위해 열린 것이라는 사실도.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누구라도 좋단다. 네가 제일 추고 싶은 사람과 함께 춤을 추렴.”

그 말에 나는 눈을 떨고 말았다. 어머니의 말은 마치 내가 누구와 춤을 추고 싶은 것인지 짐작한 것처럼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사람들의 기나긴 인파를 헤치며 한 사람이 등장했다.

나는 마치 꿈처럼,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그’였다. 그는 처음으로 신관복이 아닌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와 검은색 예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가 왜 이렇게 늦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

“제발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세요!”

“아아, 너무 아름다우신 분…….”

이렇게 적극적인 영애들이 수십이나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하긴, 그에게 영애들이 따라붙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무도회는 엘미르 제국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나를 위한 무도회이니만큼 참석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아마 그 인파를 뚫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웃을 때가 아닌데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곤란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신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늦었다는 서운함도 어느새 싹 녹아 사라지고, 오히려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행복해서, 웃음은 입가에 자꾸만 맴돌았다. 내가 웃고 있자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딱딱한 말에는 드물게도 미안함이 배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사과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서운함이나 화는 다 풀려 버린 지 오래다.

“괜찮아요.”

“……그렇다면.”

그가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첫 춤을 추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룬 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보름달처럼 아름다운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온전히 내 모습만이 담기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꺼이, 영광이에요.”

그의 손을 잡고 연회홀로 나섰다. 우리 둘이 나오자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우리는 연회홀의 가장 중간에 설 수 있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아름답게 비치는 장소였다.

아까까지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던 홀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가 나를 향해 먼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도 그에 답례하듯,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그러자 조용하던 홀에 매끄러운 현악기의 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춤 곡의 시작이었다.

먼저 룬 님의 손을 잡고 오른쪽 발을 살짝 내밀었다. 긴장이 되어서 실수하면 어떡할까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아주 훌륭하게 나를 이끌어 주었다.

스텝은 아주 부드럽게, 하지만 너무 느리지 않게. 몇 스텝을 밟고 나니 바이올린의 독주에 다른 악기들이 합세했다. 그러자 아주 풍성한 음색이 만들어졌다. 깊어 가는 가을밤에 아주 잘 어울리는 낭만적인 곡이었다.

나는 룬 님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회복은 어디서 구하셨나요?”

내 질문에 그가 속삭였다.

“……아이리스 황후가 준비해 주었다.”

“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연회복을 준비해 주셨다고?

“신관복을 입고 이곳에 오고 있었는데, 중간에 만난 그녀가 ‘연회에 올 때는 예복을 무조건 입는 것이 예의’라며 나에게 옷을 빌려주더군.”

그 말에 나는 어머니가 있는 자리를 흘긋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은 어머니는 우리 둘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운 채였다.

귀한 것들을 보고 자라신 어머니의 미의식은 무척이나 훌륭하셔서, 룬 님과 흑색 예복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내가 룬 님을…….’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게다가 룬 님은 남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옷을 미리 맞춰 두지 않았더라면 마땅한 옷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대체 언제부터?’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처음 나에게 무도회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준비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왠지 내 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때, 룬 님이 나를 불렀다.

“조심해라.”

“……앗, 네.”

딴생각에 빠져 있다가 잠깐 휘청거릴 뻔한 것이다. 하지만 룬 님은 그런 나를 능숙하게 잡아 주셨다. 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에이, 모르겠다.’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이 시간을 즐기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쩌면 이게 소위 말하는 ‘어머니의 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나는 룬 님을 향해 말했다.

“같이 춤을 추는 건 이게 두 번째네요.”

“그렇지.”

데뷔탕트 때에도 나는 룬 님과 같이 첫 춤을 추었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긴장했던가. 그리고 가슴은 얼마나 뛰었던가.

먼일이 아닌데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또다시 룬 님과 춤을 출 기회가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기도 했고, 아무런 말 없이 이 순간만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텝에 따라 빙글빙글 돌자, 봄날의 엘미르 꽃잎처럼 분홍색 옷자락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점점 음악이 빨라지면서 춤도 격해져 갔다. 우리 둘은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그가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어려운 동작이었지만 우리 둘은 평소에 같이 연습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소화해 내었다.

공중에서 옷자락이 물결처럼 퍼졌다가 다시 발목에 감겨 왔다. 춤추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던가? 나는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그건 룬 님도 마찬가지였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그의 유일한 파트너가 나뿐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저…….”

“무슨 일이지?”

그가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순간이 좋았다. 당신과 춤을 추고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어떠한 감정이 부풀어 올라서, 분홍빛으로 덧그려졌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라는 것이었다.

조금씩 음률이 느려지고, 어느새 곡은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곡이 멈추었다. 제자리에 멈추어 선 우리 둘은 서로를 향해 인사했다. 룬 님이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첫 춤을 함께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그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아.’

문득,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안타까워졌다. 춤이 끝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 속의 어느 공주님처럼, 12시의 마법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손을 다시 내밀었다.

“……?”

내가 그 손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자리로 같이 돌아가시지요.”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춤이 끝나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은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그가 인간의 흉내를 때려치운다고 해도, 혹은 내 곁에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둘이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설령 이 세상이 끝나 버린다고 해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손을 잡았다.

“……언제까지라도.”

* * *

춤을 마치고 우리 둘은 가족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가십에 예민한 게 사교계다. 룬 님과 함께 첫 춤을 췄으니 사람들이 이것저것 캐묻지 않을까 해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의외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게 곧 드러났다.

사람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신이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리오텐의 복식은 이제 꽤 눈에 익숙해졌던 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리오텐에서 찾아온 사신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리오텐 사신들은 연회장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옆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최대한 당당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어머, 왔구나. 아이샤. 춤은 잘 추었니?”

하지만 어머니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어머니는 뭐든지 다 짐작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룬 님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어머니께 속삭였다.

“……그나저나 룬 님의 옷은 언제부터 준비해 놓고 계셨던 건가요?”

“다 수가 있었단다. 혹시나 해서 준비해 두었던 게 도움이 되었구나.”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역시 '어머니의 감'인 모양이었다. 대단하다. 그때였다.

“성녀님!”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제국에 나 이외의 성녀가 또 있을 리 만무하니, 저 목소리는 분명히 나를 부르는 것일 텐데.

‘왜 나를 부른 거지?’

내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봐도 괜찮다는 거겠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서 사신단의 앞으로 가자, 그들이 크게 나에게 절했다.

“엘미르의 별, 한 명뿐인 성녀님을 뵙습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네, 다들 반가워요.”

그들은 기합이 딱 들어간 듯했다. 어째서 그들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콕 집어 부른 것을 보아 아마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내 옆에서 말했다.

“아이샤, 이 사신분들은 오늘 너를 위한 연회를 여는 걸 알고, 리오텐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전하러 직접 찾아오셨다고 하는구나.”

“정말요?”

나는 놀라는 동시에 조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리오텐에 있었을 때에도 감사 인사라면 끝없이 들었는데, 일부러 직접 찾아와 주기까지 하다니.

“먼길 오느라 힘들진 않으셨나요?”

내가 말을 걸자, 그들은 엄청나게 감격한 표정이었다. 앞다투어 나에게 대답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예! 성녀님을 뵙는 길이니,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공왕 전하나 공녀님도 오시고 싶어하셨습니다만, 전쟁의 수습으로 바쁘셔서……. 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꼭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이제 익숙해진 미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녀도 무척 바쁠 테니 오지 못한 것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잘 지내고 있겠지? 이어서 사신단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이건 성녀님을 위해 준비한 리오텐의 선물입니다!”

“……네?”

미냐의 생각을 하느라, 그리고 그들의 말이 뜬금없었던 탓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선물이라고?

‘생일도 아닌데 무슨 선물이라는 거지?’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사신단 중 한 명이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들 한 무더기가 내 앞으로 무언가를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옮기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큰 천에 씌워진 길쭉한 무언가는 아무래도 예술품으로 보였다. 리오텐은 예술의 나라로 이름 높으니 아마 나를 위해 예술품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길쭉한 무언가가 얼마나 컸던지, 그건 거의 내 키만 했다.

‘대체 뭐지?’

나는 마음속에서 설마, 설마 하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사신들은 내 표정과는 다르게 아주 뿌듯한 얼굴이었다. 흰 천으로 감싸진 ‘무언가’가 내 앞에 오자, 얼른 그걸 열어 보고 싶어서 안달난 것 같았다.

“성녀님! 이게 바로 저희 리오텐 공국에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무척 크네요.”

“예! 그럴 수밖에 없더군요!”

크면 큰 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또 뭔가? 내가 그 선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사신은 흐뭇한 얼굴로 천의 한쪽을 잡았다.

“성녀님 만세!”

그리고, 그의 외침과 함께 천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드러난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나잖아.

천이 벗겨진 곳에는 내가 있었다.

흐르는 듯한 흰 드레스 자락과, 아름다운 미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푸른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까지……. 모든 것이 나와 거의 똑같았다.

옆에서 사신이 설명해 주었다.

“머리카락에는 백진주를 곱게 빻은 가루를 뿌렸고, 눈에는 사파이어를 박았습니다. 그리고 이 조각상 전체는 모두 리오텐에서 채굴한 최상급 대리석으로 만들었습지요!”

“어머! 실물과 똑같아요!”

“아름다워요!”

“조각상의 수준이 무척 뛰어나요. 역시 예술의 나라답네요!”

곳곳에서 조각상을 향한 찬사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황망한 기분으로 그 찬사를 들었다.

‘……내 조각상?’

나는 천천히 그 조각상을 들여다보았다. 인정하자.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의 조각상은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사신의 말에 의하면 수도에서 제일가는 조각가 몇 명이 달라붙어서 작업한 것이라고 하니, 분명히 예술품으로도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일부러 선물을 준비한 성의도 무척 감사했다.

다 좋다. 다 좋은데…….

‘……이 큰 걸 어디다가 둬.’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 두기에는 창피하고, 가장 무난한 선택지는…… 침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내 실물 크기 조각상과 인사를 나눌 테지…….’

받고 나서 이렇게 고민이 되는 선물은 내 삶에서 이전에도, 아마 그리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조각상은 알미냐 공녀님께서 기획하신 특별히 물건이랍니다! 분명히 성녀님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예상했지요! 하하하!”

사신은 이제 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내 얼굴은 미묘해지고 말았다.

‘……미냐, 당신…….’

선물은 고맙지만…… 물론 고맙지만……. 나는 헛기침을 했다.

“리, 리오텐 공국에서 매우 신경을 써 주셨군요. 그런데 조금 과한 것 같기도…….”

어렵게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엄청나게 멋진 선물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황녀 전하의 신성함이 전달되는 멋진 조각상입니다.”

“황녀 전하는 이 제국, 아니, 이 세계의 보물이십니다.”

“전하께서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들의 큰 힘이 됩니다! 아예 황녀 전하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을 여러 개 만들어서 광장 같은 곳에 세워 두는 건 어떨까요?”

“황녀 전하의 궁 앞에 전시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기도실은 어떨까요? 황녀 전하의 신성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나는 질겁하고 말았다.

“아, 아니. 그건 좀.”

그랬다간 창피해서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척 조각상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룬 님마저도 그렇다는 얼굴이었으니 말 다 했지.

결국 주변의 대세에 따라 나는 눈물을 삼키며 사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리오텐 공왕님과 공녀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 주셔요. 무척……멋진 선물이었다고요.”

“예!”

사신은 환하게 웃었다. 옆에서 이시스 오라버니가 속삭였다.

“이제 엘미르 제국에 실물 조각상이 유행하게 생겼구나.”

“……하, 하하.”

아니나 다를까, 사신을 향해서 사람들이 앞다투어 질문하고 있었다.

“저, 저도 실물 조각상을 주문하고 싶은데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무척 마음에 드네요!”

“아, 그건…….”

사람들은 이제 줄까지 서고 있었다. 사신은 고국의 예술품을 칭찬하는 목소리에 무척 기분이 좋아진 듯, 마치 상점 정원처럼 열심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가 옆에서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예쁘구나, 나도 하나 갖고 싶어질 정도야…….”

“네?”

어머니는 저런 조각상이 취향이셨던 걸까?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아버지가 얼른 말을 받았다.

“문제없지. 그대가 원한다면 수도의 장인들을 오늘 밤이라도 당장 부르겠네.”

“어머, 정말이신가요. 폐하?”

살펴보니 이시스 오라버니도 저 조각상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머리를 굴리던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렇게 된 거 이시스 오라버니와 아바마마의 조각상까지 만들어서 가족 조각상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아예 회랑에 전시하게요.”

그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내 의견에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좋은 생각이군.”

“저도 찬성이에요.”

“초상화는 이제 흔하니까요. 가족 조각상이라니 무척 마음에 듭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호르르 내쉬었다. 조각상을 둘 곳을 찾아서 다행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황궁의 회랑에는 내가 1살 때부터 1년 간격으로 그려진 초상화가 십수 점 있었다. 나로서는 발도 들이지 않는 곳이었고, 가족들은 틈날 때마다 보러 가는 곳이다.

그때, 다른 사신 한 명이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아! 성녀님, 그러고 보니 알디에프 공자님께서 특별히 전해 달라고 부탁하신 게 있는데…….”

“뭔가요?”

사신이 품에서 하나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연초록색 편지 봉투였다.

“꼭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필 편지입니다.”

“알디에프 공자님께서요?”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초록색 편지 봉투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좋은 향기가 나네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의 강렬한 눈빛이 전해져 왔다. 내가 고개를 들자, 다들 아닌 척했지만 말이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이시스 오라버니, 비온 공자에……. 심지어 룬 님까지? 모두들 아닌 척하려고 노력했지만, 편지를 꿰뚫어 버리고 싶다는 것처럼 그렇게 강렬하게 쳐다봐서야 모른 척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 바람둥이……처음부터 알아봤어. 감히 아이샤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네?”

오라버니가 뭐라뭐라 중얼거리기에 되묻자,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내 머리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져 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버지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아버지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있어서 자랑스럽구나.”

“……아…….”

“아버지로서 네 존재에 깊게 감사한다. 너를 주신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란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 쑥스럽게 웃고 말았다.

“……저도 너무 기뻐요.”

기도를 올리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연회장은 아주 밝은 분위기였다. 나는 내 옆에 있는 룬 님과 오라버니,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한 명씩 천천히 바라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리고 오늘도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뻤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샤, 이제 선물도 받았으니 나랑 춤추러 가자!”

“그다음에는 저도…….”

비온 공자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냉큼 말을 받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치열하게 눈빛 교환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다 같이 추러 가요!”

그리고, 우연의 일치로 저 멀리에서 친구들의 모습도 보였다. 클로에, 로즈, 그리고 애슐리까지. 그들은 웃는 낯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이 기분 좋게 쿵쿵 뛰었다.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차서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춤을 추러 가기 전, 나는 룬 님을 향해 살짝 뒤돌았다. 룬 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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