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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새로 만난 정령왕 (1) (15/21)

Chapter 9. 새로 만난 정령왕 (1)

요즘 대륙이 들썩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엘미르풍의 드레스, 그중에서도 둥근 소매에 허리에서 리본을 묶고, 그 아래로 폭넓게 떨어지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자주 입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레스였다. 또, 사람들은 레몬 과자와 디저트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레몬이 너무 인기라 품귀 현상까지 생겼다고 했다.

레몬 또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서점에서는 ‘당신도 정령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었고, 엘미르에는 ‘그 황녀’가 있는 곳이라며 수도 관광이 늘었으며…….

더 말해 무엇하랴. 입만 아플 테니 여기서 그만하자.

하여간 사람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더할 나위 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추천하는 것, 자주 쓰는 것이라는 광고만 붙어도 그 물건은 그날 재고가 동나곤 했다.

이 열정적인 관심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부담스러워.’

그 얘기를 처음 전해 준 유모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나는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앞으론 사교계에도 못 나갈 것 같았다. 지난번에 무심코 무도회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나한테 모두 몰리는 바람에 나는 몇 분도 못 있고 금방 퇴장해야 했다.

이 현상을 하나로 정리하는 단어도 있었다.

그 이름하여…….

“‘아이샤 열풍’이라고 들어 보았니?”

티타임 도중, 어머니에게서 그 말을 들어 버린 나는 하마터면 차를 뿜어낼 뻔했다. 정말 겨우겨우 참아 내고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나요?”

“모를 리가 없잖니. 보통 아이샤 님 열풍이라거나, 엘미르 열풍이라고도 부른다면서? 그야말로 대륙의 문화를 선도하는 단어라고 하더구나.”

나는 몸둘 바 몰라 했다. 옆에서 같이 차를 들고 있던 아버지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내 딸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이 아비는 더 바랄 것이 없구나.”

그 말에 이시스 오라버니도 거들었다.

“리오텐에 가겠다고 했을 때만에도 엄청나게 걱정했는데 말이지. 다치지도 않고 훌륭하게 잘 돌아왔구나.”

가족들의 칭찬에 나는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과찬이세요.”

“과찬이라니.”

어머니가 말했다.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아니면 네 열성팬들이 쫓아와서 말 한마디 붙여 보려고 난리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사실 정말로 그런 적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황궁 길을 걷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귀족들이 ‘팬’이라면서 나에게 악수와 사인을 요구했었지.

그때에는 얼떨결에 그냥 해 주고 말았다. 그게 불러올 후폭풍을 차마 예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사인을 해준 게 소문이 되어서 열성팬들은 허구한 날 황궁에 들락날락하면서 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겠다고 난리라고 했다.

거기에 귀족들만 그러는 줄 아는가? 더 난리인 것은 신관들이었다.

고귀하신 성녀님,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고 말하는 신관들은 내가 지나가면 거의 울기라도 할 기세였다.

내가 엘미르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국적을 바꿔 이사한 사람까지 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이렇게까지 내 열풍이 퍼진 데에는 내가 리오텐 공국의 전쟁을 막고 성녀의 힘으로 평화를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붉어진 얼굴에 애써 손부채를 했다.

‘이렇게까지 영웅 취급을 받으면 너무 부끄럽다고.’

리오텐 공국에서 다시 제국으로 돌아오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먼저 예전에 약속해 놓고 아직도 가지 못한 클로에의 저택에도 놀러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과 수도 탐방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돌아왔으니 조금쯤은 맘 편하게 쉬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모두 무산되었다. 내가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단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황궁에 콕 틀어박혀서 뒹굴거리기.

하지만 애초에 내가 노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아무리 넓다고 해도 한곳에만 박혀 있으면 심심했기 때문에 나는 금방 지루해지고 말았다.

이런 날 보더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를 위한 무도회를 여신다고 했다. 물론 오래간만에 공식 석상에 서야 할 필요도 있고 두 분께서는 날 생각하셔서 여시는 거겠지만,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그런데 아이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니? 만약 있다면 이번 무도회에서 에스코트를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

……라면서 은근슬쩍 내 마음을 떠보려고 하기까지 하셨다. 필사적으로 피하느라 진땀을 뺐을 정도다.

내가 아무리 빼도 끝까지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해 주렴. 알겠지, 아이샤?’라고까지 신신당부를 하셨으니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무도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에스코트를 부탁할 상대도 영 생길 것 같지 않고 말이다. 내가 무도회는 물론, 꾸미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니 어머니를 포함해서 내 시녀들까지 아쉬워했지만, 역시 귀찮은 일은 귀찮은 일이었다.

‘이럴 때 별장이라도 놀러가면 좋을 텐데.’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별장에 가도 사람들의 주목은 여전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수도보다 경쟁자가 적다고 사람들이 더 달려들지도.

“어휴.”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황궁 숲 산책이었다. 황궁 숲은 이곳에 오래 근무했던 사용인들도 모두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으며 깊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여기에 살았던 나는 다르지만 말이다. 오라버니와 황궁 숲을 뛰어놀며 그 미로를 외우며 자랐으니 말이다.

사람들 틈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호위 기사와 시녀들도 숲의 초입에 둔 채였다. 내가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웬만한 호위 기사 몇보다도 내 정령이 더욱 강력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나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기지개를 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정말 편했다. 가을이 된 숲에는 어느새 단풍이 조금씩 들고 있었고, 호수에는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루나 리미에가 내 말동무라도 해 주었을 텐데,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 그 둘을 항상 황궁에 풀어놓기 시작한 이후로 그 버릇이 계속되어 오늘 그 둘은 이 자리에 없었다.

호수의 물그림자를 바라보며 ‘그 둘을 다시 불러올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 것은.

“안녕.”

나는 그 순간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낯선 인물 한 명이 서 있었다.

“루디온!”

내 안의 정령력이 훅 빠져나가고, 금빛 새가 내 눈앞에 등장했다. 이렇게 인적 드문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루디온을 소환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살핀 다음 순간, 나는 조금 의아해지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서는 예전에 느껴 본 적이 있는 향기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어딘가 몽환적이면서도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향이었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그가 두 손을 가볍게 어깨 위로 들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나는 천천히 그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신비로운 청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푸른색 자수가 들어간 고풍스러운 흰옷은 이제 아무도 입지 않는 형태의 복식이었지만,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옆머리가 귀 옆에서 살랑거렸다. 그가 한 푸른색 귀걸이도 마찬가지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물빛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등 뒤로 내려뜨린 상태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 용모였다. 얼핏 보면 청년인 것 같기도, 다시 보면 아름다운 여인인 것 같기도 했다.

“……누구시지요?”

이렇게 튀는 인상에, 거대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결코 평범한 인물일 리 없었다. 그를 살피면서 나는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향기가 예전 애슐리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아스예요.

아직 나와 애슐리가 친해지기 전, 그녀는 뽐내듯이 자신의 정령을 보여 주었었다. 그녀가 소환한 정령은 물의 하급 정령 나이아스. 그 푸른 정령에서도 이와 비슷한 청량한 향이 났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

흰 손을 내밀며, 그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내 이름은 하이넨, 물의 정령왕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말문이 턱 막혀 버리고 말았다.

“……물의, 정령왕님이시라고요?”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인 정령왕. 그 존재를 벌써 두 번째로 만나고 있었다. 나는 경이와 혼란, 그리고 두려움에 젖고 말았다.

“물의 왕을 뵙습니다.”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루디온이 인사했다. 하이넨이라 자신을 밝힌 정령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러곤 내게 다시 말을 붙였다.

“네 이름은 아이샤지?”

“……제 이름은 어떻게…….”

나는 다시 한 번 한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내 이름을 모르면 몰랐을까, 그는 명백하게 나를 찾아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대체 왜?

다음 순간 낭패하고 말았다. 내 뒤에 딱딱한 고목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를 향해 하이넨 님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흰 손을 들어서 나에게 가까이 대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그가 나를 해코지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맞은 것보다도 더 당황하고 말았다.

쭈욱―.

“……아?”

눈을 번쩍 뜨자, 하이넨 님이 내 눈앞에 바로 있었다. 그것도, 내 볼을 쭈욱 잡아당긴 채로 말이다.

“……으어?”

나는 현실 파악을 못 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 와중에 볼이 늘어나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더니 하이넨 님은…….

“귀여워라!!”

양쪽 손을 이용해 내 양 뺨을 쭈욱 늘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너무 귀엽구나. 깜찍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어어아니? (정령왕님?)”

나는 그가 내 볼을 조몰락조몰락 만지는 것을 보며 뻣뻣하게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손을 내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이넨 님은 이런 내 반응이 재미있는 듯 시종일관 웃으면서 내 볼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누군가! 도와줘!’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현실적으로 지금 나에게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그’가 계속 옆에 있을 만도 하지.”

‘그?’

나는 당황해하는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라고 하면…… 설마?’

설마, 룬 님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때였다. 익숙한, 하지만 오늘따라 더없이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우리 사이로 들려온 것은.

“거기까지 하지.”

그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숲의 그늘에서조차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운 백금발이 차르르 흘러내렸다.

“루미나스!”

하이넨 님이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그가 룬 님을 루미나스라고 가볍게 부르는 데에서 나는 하이넨님이 똑같은 정령왕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갑자기 룬 님이 나에게 인상을 썼다.

‘……내,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내가 지레 겁먹고 내 행동을 되돌아보는데, 룬 님이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하이넨 님에게였다.

“손 떼.”

‘……아.’

룬 님이 인상을 쓴 것은 내가 아니라 하이넨 님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조금 안심했다. 하이넨 님이 내 뺨에서 손을 떼자 나는 얼른 양 뺨을 문질렀다. 아마 보이진 않아도 빨개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말랑말랑했는데.”

하이넨 님은 아쉽다는 듯,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룬 님은 그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인간계에는 어쩐 일이지?”

하지만 하이넨 님은 룬 님이 노려보는 데에도 별반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야, 놀러왔지. 네가 얼마나 재밌게 살고 있길래 정령계에 안 돌아오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쓸데없는 참견이다. 그리고 놀려면 다른 곳에서 놀아. 꼴 보기 싫으니까.”

‘헉.’

나는 하이넨 님과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룬 님이 오늘따라 매몰찬데다가 냉랭하기 그지없어서 듣는 나까지 상처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냉정하기는,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니까 기쁘지 않아?”

하지만 하이넨 님은 전혀 상처 받지 않은 듯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 게다가 멋진 옷을 차려입었네. 신관복이지, 그거?”

룬 님은 무시로 일관하기로 한 듯, 나를 잡아끌었다.

“이만 가지.”

“어? 어…… 하지만…….”

룬 님이야 같은 정령왕이니 하이넨 님을 얼마든지 무시해도 괜찮겠지만, 일개 인간인 나로서는 사정이 다르다. 내가 우물쭈물해하고 있는데, 하이넨 님이 내 한 손을 잡았다.

“나랑 같이 가자. 아이샤.”

“예?”

내가 펄쩍 뛰자 하이넨 님이 서운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같이 놀면 안 돼? 오래간만에 인간계에 와서 심심하단 말이야. 루미나스랑은 오랫동안 있었잖아.”

“쓸데없는 소리.”

그에 룬 님이 내 어깨를 잡으며, 형형한 눈빛으로 하이넨 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하이넨 님은 끝까지 항변했다.

“너만 아이샤를 독점하면 안 되지. 우리도 어릴 때부터 아이샤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데.”

“……네?”

그건 정말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가 깜짝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자, 하이넨 님이 샐샐 웃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지? 나를 따라오면 다 들려줄게. 아마 루미나스가 모르는 것도 알려 줄 수 있을 거야. 이래 봬도 나는 루미나스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으니까.”

“……정말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는 룬 님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지만, 하이넨 님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그럼! 뭐든지 알려 줄 수 있어. 예를 들어서…….”

그의 청록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네가 어째서 소환되지 않은 정령들을 볼 수 있는지…… 라거나.”

“……!!”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혹하고 말았다. 정령왕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알 줄 알았던 시절, 나는 룬 님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째서 세상에서 나만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 정령력이 넘쳐흐르는 것인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룬 님은 직접적인 답변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경우라고 했던가. 하지만 하이넨 님은 룬 님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그러한 경우를 이미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내 귀는 팔랑이고 있었다.

“……정말로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하이넨 님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하이넨 님에게서 나는 청명한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좋은 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룬 님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냄새 좀 없애지.”

“아, 이거?”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하이넨 님이 내 손을 놓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향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

나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하이넨 님의 향기는 무엇이고 룬 님은 어째서 그 향기를 없애라고 한 것일까? 내 의문을 눈치챈 듯 하이넨 님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 향기는 내 능력과 관련이 있단다.”

“능력이요?”

“그래, 루미나스가 회복과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도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룬 님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정령왕마다 고유의 능력이 다를 줄은 몰랐다. 나는 호기심에 질문했다.

“물의 정령왕님이 가지신 능력이 무엇이시길래요?”

“그냥 하이넨이라고 부르렴.”

“그럼…… 하이넨 님, 무슨 능력을 갖고 계신가요?”

내가 그를 그렇게 부르자, 그는 잘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샥샥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물음에 답해 주었다.

“최면.”

“……네?”

그의 더할 나위 없이 상큼한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만 나는 되묻고 말았다. 뒤에서 룬 님이 덧붙였다.

“최면, 환각, 환영. 하이넨이 가진 능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마약과 자백제, 진통제라고 할 수 있지. 그가 마음을 먹고 능력을 개방하면 그 누구라도 환각에 걸리지 않고 못 배겨.”

“그런데 내가 인간계에 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능력을 풀고 와 버렸습니다. 짜잔!”

“그럼 안 되잖아요!”

나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설마 지금 내가 보는 것이 환각은 아니겠지? 이런 고민에 대답하듯 하이넨 님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상급 정령사. 게다가 네 정도의 정령력을 가지고 있는 정령사가 쉽게 내 환각에 걸리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인데…….”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문득 내 호위 기사와 시녀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저. 숲의 초입에 제 호위 기사와 시녀들이 있는데…… 혹시 그들에게까지 영향이 가지는 않았겠지요?”

그에 하이넨 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음…… 그게…….”

당황하던 그가 물의 하급 정령을 소환해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나에게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아핫, 내 실수.”

“…….”

“숲에 사람이 더 있는 줄 몰랐지 뭐야.”

나는 짜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황급히 숲의 초입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룬 님과 하이넨 님이 따랐다. 호위 기사와 시녀들은 쥐죽은 듯이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얼른 입을 열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레나! 디폰! 로티스!”

하지만 그들은 답이 없었다. 다만 어쩐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내 옆으로 어느새 다가온 하이넨 님이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아서,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환상을 보고 있을 거야. 아마 환상에서 깨고 나면 잠깐 백일몽을 꿨다고 생각할걸?”

“…….”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오히려 좋은 꿈을 꾸게 해 준 나에게 감사하는 게…… 아야!!”

하이넨 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룬 님이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하이넨 님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이넨 님이 룬 님보다 훨씬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나는 마음속 한구석이 통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남의 호위 기사랑 시녀들에게 환각을 보게 하다니.’

나는 진절머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작용이나 위험성은 없겠지요?”

“내 환각을 뭘로 보는 거야. 전혀 없어. 전혀.”

“……다행이네요.”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내 목소리가 부드럽고 상냥했다면, 나는 성녀의 차원을 넘어 무언가 신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름은 아마도 ‘인내심의 신’쯤? 하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뾰족한 목소리가 나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하이넨 님이 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정령왕치고 (내가 아는 정령왕은 룬 님이 유일했지만 말이다) 굉장히 사교성이 좋은 데다가 대하기 편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환각이 깰 때까지만이라도 나랑 좀 놀아 주라.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나는 망설이면서 내 시녀들과 하이넨 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친근하다고 해도 정령왕은 정령왕.’

과연 내가 그를 따라가도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룬 님을 바라보는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가지.”

“와, 정말? 무르기 없기다?”

하이넨 님이 시시덕거리며 룬 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성가시다는 듯 룬 님이 그의 손을 쫓아냈지만, 하이넨 님이 치덕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예전에 룬 님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물을 보고 있으면 ‘그 녀석’이 생각나서 싫다고 했었지. 그게 물의 정령왕님이었던 게 맞던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둘의 사이는 일방적인 것 같았다. 시시덕거리던 하이넨 님은 나를 뒤돌아보았다.

“하여간, 같이 얘기라도 나누자.”

하이넨 님의 청록색 눈이 웃음을 담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궁금한 걸 알려 줄 테니까 말이야.”

* * *

결국 나와 룬 님, 그리고 하이넨 님은 다시 그 호수로 돌아갔다.

“뱃놀이하자.”

그 어이없는 주장에 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배가 없는데요?”

“만들면 되지.”

그렇게 말한 하이넨 님은 손쉽게 물을 움직여 그것을 배의 모양으로 조각해 냈다. 나는 그 기적에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그, 그게 가능해요?”

“왜 못해?”

하이넨 님은 가볍게 대답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삼 정령왕들의 대단함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놀란 것은 나뿐이었다. 룬 님도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배 위에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안전하겠지?’

설마 물의 정령왕이 만든 배인데 물에서 가라앉을까.

나는 그렇게 믿으며 조심스럽게 조각배 위로 올라탔다.

물로 만든 배는 굉장히 이상한 촉감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탄탄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내가 그 물배를 쓰다듬어 보고 있는데, 하이넨 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쑥, 하고 그 물 아래로 내 손이 들어갔다. 그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꺄아악!”

잘은 모르겠지만 배를 만들던 힘을 내 쪽에만 살짝 푼 모양이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팔까지 물 안으로 들어가 버린 나는 공포에 젖어서 소리 질렀다. 이대로 호수 바닥 안까지 가라앉는 건 아니겠지?

그때,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나는 다시 단단한 등받이에 감싸였다.

‘……응?’

아니, 이건 등받이가 아닌데? 나는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것은 물로 만든 배의 등받이가 아니라, 룬 님의 품이었다. 룬 님은 나를 물에서 끌어 올려 준 것이었다. 나는 다른 의미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으으, 아파라.”

방금 전의 딱! 소리는 아마 룬 님이 하이넨 님을 쥐어박은 소리 같았다. 그가 끙끙대면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룬 님은 깔끔하게 말했다.

“계속 이딴 식으로 굴 거면 돌아가라.”

“신기해하길래 같이 놀아 준 것뿐인데.”

“이 녀석은 정령이 아니다. 물 아래에 가라앉으면 죽는다고.”

“아, 맞다. 그랬지?”

하이넨 님이 다시 하하 웃었다. 나는 룬 님처럼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가까스로 참아 내었다.

‘정령왕들끼리도 성격이 참 많이 다르구나.’

생글생글 잘 웃지만 어딘가 허랑방탕한 구석이 있는 하이넨 님과 차갑고 무뚝뚝한 성격이어도 알게 모르게 배려가 깊은 룬 님. 한쪽에 손을 들어 주라고 한다면, 나는 가차 없이 룬 님을 선택하겠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배를 출발시켰다. 턱을 괴고 호수를 관찰하던 하이넨 님은 내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까 전에 루디온을 소환했었지?”

“아.”

나는 하이넨 님의 말에 잠시 방금 전 일을 회상했다. 수상한 사람인 줄 알고, 여차하면 그를 공격하기 위해 루디온을 소환한 일 말이다.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처음 보는 분이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낯선 이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거지. 내가 말하려는 건 다른 거야.”

“어떤……?”

“그 나이에 상급 정령을 소환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타고났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칭찬에 조금 볼이 붉어지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매일 정진하려고 해요.”

“그래, 겸손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구나. 좋은 태도야.”

하이넨 님은 알 수가 없는 정령왕이었다. 장난기가 많은가 싶다가도, 지금처럼 어른스럽게 말을 하면 청록색 눈동자에서 오래된 세월의 그림자가 맴돌았다.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타고났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말해 볼까?”

배는 그가 휘젓지 않아도 마치 운전자가 있는 것처럼 호수 위를 매끄럽게 돌았다. 물 위가 아니라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하이덴 님이 말했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소환되지 않은 정령’을 볼 수 있었지?”

그것은 내가 계속해서 궁금해하던 소재였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그리고 그게 세상에서 저 혼자만이라는 걸 룬 님께 들었어요.”

“그래?”

그가 별말 없이 싱긋 웃기에, 나는 조급해져서 물었다.

“왜 저만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하이넨 님은 잠깐 룬 님을 바라보았다. 룬 님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루미나스도 모를 만하지. 이건 루미나스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거든.”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룬 님만 해도 정말 까마득한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이넨 님은 그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다니. 새삼 그들이 정령왕이라는 게 다시 한 번 실감이 났다.

“옛날이야기를 해 줄까?”

하이넨 님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눈을 반쯤 내리깔자, 청록색 눈이 촘촘한 물색 속눈썹에 반쯤 가려졌다. 그러자 그에게선 어딘가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아주 옛날에는 정령사들이 훨씬 많았지.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핏줄에는 가끔 너처럼 ‘타고나는 자’가 있었어.”

“제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리고 그들은 항상 어김없이 뛰어난 정령사가 되었어. 사람들은 그들을 ‘자연을 듣는 자’ 혹은 ‘만물과 소통하는 자’라고 부르곤 했지.”

낡은 역사책 속에서도 들을 수가 없던 이야기였다. 나는 점차 그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은 조금씩 잊혀 갔어. 그것은 나무를 자르고 돌을 부수며, 탑을 쌓아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정되었던 일이야. 기록들은 소실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정령을 믿지 않았지. 타고나는 자들이 나와도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주술을 부린다면서 화형시키기도 했었어. 끔찍한 과거야.”

“……그럴 수가.”

“정령들은 잊히기 싫어서 타고나는 자들에게 더욱더 집착했지만, 그들은 그럴수록 인간계에서 고립되어 갔고.”

“…….”

“나는 수많은 문명이 생성되고, 번성하고, 멸망하는 모습을 보았어. 어느샌가 타고나는 자들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멸망했다고 생각했지.”

그의 청록색 눈이 나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

“그래서 네가 태어났을 때, 네 탄생에 정말 놀랐어. 우리 정령왕들부터가 그렇게 놀랐으니, 아마 정령계에서 너를 모르는 존재는 없을 거야.”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령계에서 내가 그렇게 유명한 존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가까스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면, 타고나는 자들은 고대의 핏줄이라는 뜻이고…… 저는 그 일족 중의 한 명이란 뜻이네요.”

“그렇지. 너는 아주아주 낮은 확률로 그 능력이 발현된 거라고 할 수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호르르 한숨을 쉬었다. 하이넨 님이 해 준 말은 너무 멀기만 했다. 고작해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한테는 초월적인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랬군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비밀을 풀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째서 정령을 볼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 늘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그게 핏줄의 힘이었을 줄이야.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고 하이넨 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렸어요.”

그는 그런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그나저나 아이샤.”

“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뭐든지 말씀하세요.”

내가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하이넨 님은 잠깐 룬 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나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단둘이서만 해야 하는 이야기야. 네 능력과도 관련이 있지.”

“……단둘이서만요?”

나는 잠깐 고민했다. 아무리 정령왕이라지만 이제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그를 함부로 믿어도 될까? 룬 님에게는 비밀로 단둘이서만 해야 하는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고민하는 나에게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대신, 공짜는 아니야. 네가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단서를 줄게.”

그 속삭임에 나는 속내를 들킨 듯 펄쩍 뛰고 말았다.

“네가 루미나스를 소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놀라지 말고.”

하이넨 님은 씩 웃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룬 님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룬 님은 우리들의 대화에서 귀를 멀리하고 있었다.

만약…… 만약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내 반응에 대답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하이넨 님이 룬 님에게 말했다.

“잠깐만 둘이서 대화할 수 있을까?”

그 말에 우리를 바라본 룬 님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짓을 더 하려고.”

“아이참,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 아이샤랑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그의 너스레에 룬 님은 한참 동안 믿지 못한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싫어? 아무래도 루미나스는 아이샤가 너무 좋아서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모양이네.”

하이넨 님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 참, 아이샤. 그건 알아?”

“네? 어떤 거요?”

“정령들이 정령계에 있어도 인간 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거!”

그 얘기는 처음 들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그의 설명이란 이랬다.

“정령계와 인간계는 이어져 있으니까. 보통 소환되지 않은 정령왕들은 정령계에 있는 거울로 인간계를 내려다보곤 하지. 아니면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하급 정령의 눈을 빌리기도 하고.”

왜였을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예전에 룬 님이 했던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리오텐에 오면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냐에게 바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종종 바다 그림을 보거나 바다에 대한 책을 찾아보곤 했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바다에 가 보고 싶네.’ 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룬 님이 내가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걸 알았던 걸까?’

그 생각을 떠올리자,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언젠가였던가, 루에게 ‘루미나스 님이 보고 싶다.’ 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내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질래야 붉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룬 님의 시선을 피하는데, 하이넨 님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보통 정령왕들은 정령계에서 잘 나오지 않지. 어차피 나오지 않아도 정령계와 인간계를 모두 볼 수 있는데 괜히 왜 나오겠어?”

그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럼 하이넨 님은 어째서 나를 보러 오신 거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령계에서 나를 지켜보아도 되었을 일인데 말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서 더 물어보려는 찰나, 하이넨 님은 기어코 룬 님을 밖으로 내쫓고 말았다.

“알겠지? 비밀 얘기를 해야 하니까, 저 멀리 가 있어! 가까이 오면 안 돼!”

“……귀찮아 죽겠군.”

룬 님은 정말로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하이넨 님을 아예 거부할 수는 없었는지, 하이넨 님이 물기슭에 룬 님을 내려 주자 그는 순순히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배는 호수 중앙으로 미끄러졌다. 룬 님이 사라지자 하이넨 님은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먼저 말을 꺼내고, 시종일관 떠들던 그였는데 말이다.

왠지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호수가 중앙으로, 가장 깊고도 넓은 곳으로 계속해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넨 님?”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 루미나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가 생긋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약간 다른 미소였다.

“너는 룬이라고 부르던가? 인간 세상에 아주 적응한 모양이야. 내가 루미나스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해 보이던걸.”

“……그런가요?”

나는 슬며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불안한 예감이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하이넨 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아이지. 정령왕은 홀로 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탄생했을 때에는 아무래도 조금 미숙할 수밖에 없어. 나는 그 애보다 훨씬 나이가 많기 때문에 그 애를 종종 돌봐 주곤 했지.”

“……그러셨군요.”

나는 처음으로 하이넨 님이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뒤로 몸을 뺐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내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네가 나타난 거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혀 웃음기가 담기지 않은 청록색 눈동자는 인간 같지 않은 무기질적인 빛이었다.

나는 심장이 덜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보니 그가 정령왕임을 다시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좋지 않은 징조야.”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정령왕이 소환되지도 않은 인간 옆에 머무르고, 정령계에 소홀하며 한 인간에게 빠져 있다? 세계의 균형을 부수는 일이지.”

나는 점점 하이넨 님의 의도를 알아차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정령왕들도 ‘타고나는 자’가 왜 생기는지 모른다고 했지? 거짓말은 아니야. 하지만 가장 오래된 정령왕인 나는 알 수 있어.”

“……어떤 걸…….”

“그들이 한번 태어나면, 어떠한 정령이 필연적으로 그와 인연을 맺게 돼. 몇만 년 동안 관찰해 온 결과니까 믿어도 좋아.”

“……그래서요……?”

이윽고 나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어. 더 이상의 타고나는 자는 정령계에도, 인간계에도 필요 없어.”

“……하이넨 님.”

그가 살며시 내 어깨를 쥐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너를 물에 빠뜨려 죽게 할 수도 있어.”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떨고 말았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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