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전쟁 (13/21)

Chapter 8. 전쟁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미냐를 포함한 사절단이 이덴베르의 도발 건으로 일찍 돌아가게 된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빠르게 이덴베르가 발톱을 드러내 올 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작은 분쟁이라면 좋겠는데.’

나는 미냐와 리오텐 공국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하지만 내 기도와는 다르게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들 모두가 리오텐의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방국인데다가 군사적 동맹까지 맺은 참이니 지원군을 보내야 할 텐데 그 병력이나 각종 문제에 대해서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금 황궁은 두 파로 갈라져 있다고 했다. 리오텐을 도와서 이덴베르를 적대시해야 한다는 파와 리오텐이 아무리 우방국이라 하지만 이덴베르와 평화 협정까지 맺는 마당에 괜히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파였다.

리오텐에게는 안타깝게도, 후자의 의견이 더욱 대세를 얻고 있었다. 엘미르 사람들이 이덴베르를 매우 싫어하기는 하지만 평화 협정 이후로 이어진 평화로운 날들의 가치를 깨달은 것이겠지.

그렇게 탁상공론만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새 이덴베르 군은 리오텐의 수도 근처까지 내려왔다고 했다. 그 여파가 수도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하니 나라 전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한 리오텐 공왕은 엘미르에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 * *

“고귀한 엘미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바로 리오텐 공왕이 엘미르에 파견한 사신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알미냐나 알디에프가 없었다. 아마 공왕의 핏줄인 그들은 지금 수도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사람들을 다독이는 데에만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리오텐의 대신들로,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는 나이 든 귀족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이런 전쟁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전쟁이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어마어마한 공물들을 가지고 엘미르에 찾아왔다.

엘미르에게 군사 지원을 부탁하기 위함이 틀림없었으리라.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냐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너무나 걱정이 되었기에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답변이 없었다. 매우 상심해 있거나 무척 바쁘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나는 최소한 미냐가 바빠서 대답할 겨를이 없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동맹국인 엘미르 제국에 지원군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길디긴 리오텐 사신들의 말이 끝났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잠에서 퍼뜩 깨어나듯 제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있었던 것은.

어리둥절해 하던 나는 그것이 사신들이 모두 나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왜?’

내가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사신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

“염치없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말하며 사신들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 앞이라곤 하나 독립된 다른 나라의 사신들로서는 정말 최선의 예의를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빛의 성녀, 아이샤 드 엘미르 황녀 전하의 파견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나는 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사신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나뿐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잘 듣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의 시선부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무어라고?”

아버지의 말은 짧았지만 그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시선에 꿰뚫린 사신들은 거의 사색이 되었지만, 맨 앞에 있던 사신 한 명만큼은 지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무리한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는 거의 고개를 땅까지 조아리고 있었다.

“지금 리오텐에서는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약은 이미 모두 동나거나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는 형편이고, 간단한 치료만 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의원들도 모두 나서서 치료를 돕고 있지만…… 매일같이 실려 오는 사람들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서 시체들이 산처럼 쌓입니다. 그러니, 제발…… 성녀님이 아니면…….”

‘……그 정도라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리오텐 공국의 상황이 심각하다곤 듣고 있었지만, 그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겪은 사람의 입에서 듣는 것은 완전히 그 무게가 달랐다.

사신의 표정은 무척이나 절박해 보였다. 내가 그의 말을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을 때였다.

쾅!

아버지가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듣거라.”

“……예.”

“황녀의 나이가 14살인 것은 아는가?”

“……그것이.”

“그대는 지금 14살밖에 안 되는 어린 황녀를 전쟁터에 내몰라는 이야기인가?”

“저, 절대 전쟁터에 와 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그저 환자들을 공왕성에서 치료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듣기 싫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의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같았다. 사신의 말을 냉정하게 잘라 낸 아버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버지의 흉흉한 기세에 사람들은 모두 질린 듯했다.

게다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또한 보기 드물게 화가 난 듯했으니까 말이다.

“사신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게 도가 지나친 요구임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

“…….”

“내 앞에서 다시는 황녀의 이름을 꺼내지 말도록 하십시오.”

옆에서 아버지가 말을 거들었다.

“지원군은 준비하마. 그대들의 말대로 군사 동맹을 맺은 우방국이니만큼.”

“……은혜에 감사드립…….”

“하지만 황녀의 도움은 일절 없을 것이다. 더해서 황후의 말대로, 다시 한 번이라도 황녀의 이름을 꺼낸다면 그 지원조차도 전혀 없을 것이다.”

“폐하…….”

“그저 내 앞에서 황녀의 이름을 꺼내고도 무사한 것이 다행으로 여기도록 하여라. 만약 전시가 아니었다면 네 혀를 뽑았을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사신은 희게 질려서 몸을 떨었다.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모두 사신의 말에 크게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전쟁터 같은 곳은 너무나도 위험하니까.

사신의 희게 질린 얼굴이 안쓰럽기는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이 맞다. 내가 리오텐 공국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족들의 걱정을 끼쳐 가면서까지 전쟁터에 갈 이유는 더더욱.

만약 치료가 필요하다면 다른 신관들을 추가로 요청했으면 될 일이다. 내가 꼭 필요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된 것이리라.

* * *

하지만 그 뒤에 의아한 일이 하나 있었다. 사신들이 나를 만나고 싶다며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혹시 아까 말했던 전쟁터에 대한 이야기일까. 나는 한숨을 쉬고 시녀에게 대답했다.

“일단 들어오시라고 말하렴.”

타국에서 온 사신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나는 사신들을 응접실에서 맞았다. 나에게 온 사람은 총 열 명이었다. 이번에 온 사신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다.

늙은 대신들은 나를 보자 거의 우상이라도 만난 표정이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을 우르르 감쌌다. 그 열렬한 반응에 내가 흠칫 놀랐을 정도다.

“오오, 성녀님!”

“이렇게 만나 뵐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어찌 이리 귀한 분을 뵈었을까!”

올해 생일 때도 느꼈지만, 내 명성이 정말 널리 퍼지긴 한 모양이었다.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내가 가볍게 인사를 되돌리자, 그들은 더더욱 흥분한 모양이었다.

“제가 살아서 성녀님을 뵐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랄 것까지야. 나는 그저 그 말을 흘려넘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저희가 성녀님을 꼭 뵙고자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일부러 그래서 사신단에 자원하기까지 했지 뭡니까. 허허허.”

“그 이유가……?”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야기했다.

“저…….”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들이었다.

“성녀님께 가호를 받으면 어떠한 칼과 화살을 맞아도 멀쩡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고, 튼튼한 두 팔과 다리를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희에게도 그러한 가호를……!”

“설마 성녀님이신데……. 저희같이 약한 늙은이를 모른 척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들의 눈에는 탁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런 말은 어디에서 들었지요?”

“그, 비밀리에 도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성녀님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희에게만 그 자비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실 수 있다면……!”

“도, 돈이 필요하시다면 부족하지만 모아 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심지어 그들은 선심을 쓰듯이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가호를 내려 주셨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제발 제 가족들에게 자비를…….”

“사람을 구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

나는 그제서야 이해했다. 아까 사신들이 했던 말을. 어째서 아버지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살 걸 알면서도,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성녀’인 나를 원했는지.

열 명의 목소리로 응접실은 그야말로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만약…… 리오텐 공국에 오셔서 가족들 모두에게 주시는 게 어렵다면, 저, 적어도 저에게만이라도……!”

그 목소리는 날카롭게 내 귀에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했기 때문에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모두 동일했으니까.

‘나만은 살고 싶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째서 이리도 추하게 느껴지는 걸까?

영지민을 버리고, 나라의 안위 따위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가족들까지 저버리는 그들에게서.

나는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눈치를 보다 다시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엘미르 제국에 망명할 수는 없을까요?”

“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기를 판매하고 있어서, 전쟁이 터지니 꽤 돈벌이가 되더군요. 충분한 대가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비를!”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성녀님? 어째서, 성녀님?”

“대답을, 호, 혹시…… 안 된다는 건…….”

그들은 밖까지 나를 따라올 기색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나는 무척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나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고, 그런 가호 따위는 내릴 줄 모릅니다.”

“……!?”

“거, 거짓말이시지요?”

“다시 나를 찾지 마십시오. 찾는다면, 당장 이 나라에서부터 추방하겠습니다.”

나를 간절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에서 나왔다. 응접실에서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화가 왜 이렇게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열한 사람들을 보아서? 그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엘미르 제국으로의 망명을 요구하기에? 아니면 그런 그들을 돌보아야 할 미냐가 가엾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리오텐 공국 사람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냐가 말해 주었던 리오텐 공국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나라였었다. 그런 리오텐 공국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환상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보 같은 이야기다. 어차피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텐데.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녀장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었다.

‘나를 방문하려는 리오텐 공국 사신들이 있다면 모두 거절할 것.’이라고 말이다.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지만 시녀장은 내 피곤한 표정을 보고 무언가 짐작한 표정이었다. 가타부타 없이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잠들기 전에 차를 마시곤 하는 작은 방에 앉아서 홀로 곰곰이 생각했다. 리오텐도, 미냐의 얼굴도, 가족들의 얼굴도 스쳐지나갔다. 너무 깊게 생각에 빠졌기 때문에 내가 나도 모르게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복도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돌아가세요. 황녀 전하께서는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잠을 방해받은 나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고 말았다. 지금 이 시간에 나를 절박하게 찾아 댈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리오텐의 사신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사신은 도무지 나갈 기세가 안 보였다. 시녀장도 타국의 귀족 출신인 사신을 내쫓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문을 열고 천천히 복도 밖으로 나갔다.

“나를 방문하려는 리오텐 사신들이 있다면 모두 돌려보내라고 말했을 텐데.”

나는 차갑게 말했다. 나를 발견한 시녀장은 죄송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어서 돌려보내도록 하겠…….”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신이 지나가는 시녀들이나 시종들이 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어 버리고 말았다. 시녀장은 물론이고 나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어나세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로부터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다, 그가 아까 아버지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말을 꿋꿋이 이어 가던 그 사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신들보다도 유난히 젊은 편이었다. 젊은 남성에, 귀족이라면 전쟁터에도 충분히 나갈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어째서 그가 사신단에 뽑힌 것일까? 하지만 그의 모습을 모두 살핀 이후 나는 그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의 다리 중 한 곳이 유난히 비틀려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그는 다리를 성히 가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도 멋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그에 대한 탐색을 모두 마친 나는 냉정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도 나의 가호를 바라나요? 들어줄 수 없어서 아쉽게 되었군요.”

“……예? 가호?”

경악하면서 고개를 들었던 그는 내 얼굴에서 다른 사신들의 배신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으니까 말이다.

“……아니, 아닙니다. 황녀 전하! 저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돌아 가세요.”

“전하, 전하!”

그가 나를 향해 뒤에서 소리쳤다.

“황녀 전하! 제발, 단 한 번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단 5분, 아니, 3분이라도 괜찮습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내 방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가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은.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 가족이…… 동생이 전쟁터에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제발……!”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절박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그것을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나를 향해 기듯이 다가왔다.

“……제발, 제발, 단 1분만이라도…….”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치료사가 부족하다면 몇 명 정도 빛의 신관을 보내드릴 수는 있습니다.”

“저, 전하!”

“하지만 그것도 그들이 자원해서 갈 때입니다. 그들의 뜻에 반대해서 신관들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잠깐 밝아진 것 같았던 사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내가 리오텐 공국에 가는 것은 이미 아버지 폐하께서 한번 거절하신 일입니다. 황녀인 나에게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신관을 설득해 전쟁터로 가게 하는 것만으로도 내 몫은 충분했다. 이마저도 친구인 알미냐 공녀의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가세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습니다.”

“……황녀 전하, 단 한 번이라도……. 한 번만 봐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약간 울컥한 나는 기사들을 시켜서라도 그를 쫓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엎드려, 머리를 바닥까지 조아리며, 하나뿐인 자비를 구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굶어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엎드려 있을 것 같았다.

‘……시체를 치우기는 싫으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내 인내심이 길지 않으니 짧게 말하도록 하세요.”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는 무척이나 놀라고 기쁜 듯했다. 그는 환희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예. 물론입니다!”

그가 품 안에서 유리 수정구처럼 보이는 동그란 물건을 꺼내 들었고, 그것을 본 나는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나의 모습을 찍어 간다면서 그것을 보여 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꺼내 드는 이유가 뭐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가 천천히 그 영상구의 재생을 시작했다. 영상구는 하얗게 빛나더니 이윽고 마력의 힘으로 조금씩 어떠한 화면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리오텐 공국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에 휩쓸려 폐허가 되어 버린 리오텐 수도였다.

한때 이 예술의 나라는 반짝이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의 여파로 흙먼지와 깨진 유리 조각, 쓰레기, 무기력한 사람들만이 널브러져 참혹한 인상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영상구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신이 말했던 3분, 아니 5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지만…… 그곳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팔다리를 잃은 군인들이 술에 취해서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진통제가 없어서 싸구려 술에 의지한 탓이리라. 그런 그들을 도와줄 의원이나 신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길바닥, 그것도 골목은 더욱 처참했다. 사과 하나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조차 할 수 없어 쪼그려 앉아 그저 배를 곯아 가고 있었다.

배가 부른 임산부를 돕는 이 하나 없었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이 한 명 없었다. 그 거리 너머로 성이 보이자, 나는 문득 미냐를 떠올렸다.

‘……미냐는 괜찮을까?’

영상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전쟁터에는 심지어 나보다도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칼에 베인 사람들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고, 주인은 잃은 육체들은 텅 널브러져 있었으며, 텅 빈 눈동자들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무력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은 바로, 이덴베르 군인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전공을 세우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영상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흑색의 투구를 쓰고 칼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옆에 있던 사신이 주저하며 말을 첨언했다.

“……그가 바로,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입니다.”

어쩐지 남들보다 기세가 남다르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는 잔혹하게 전장을 누비고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냉혹해 보였다.

그리고 그가 영상구 쪽을 노려보면서 투구 안의 눈을 번뜩였을 때, 흡사 그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 착각에 심장이 덜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총사령관의 이름은 뭐지요?”

그는 영상의 중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이 영상의 끝이 짐작되었다. 그가 칼을 높게 치켜올리자 영상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을 찍고 있던 사람의 손이 흔들린 탓이겠지.

은빛의 칼날이 햇살에 반짝이고, 칼이 떨어졌다. 주인을 잃어버린 영상구는 땅바닥으로 떨어져서 바닥을 비추었다. 영상의 마지막이었다.

“……아.”

영상이 끝난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것은 영상의 처참함 때문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얼굴이 내가 알던 사람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번뜩이던 은회색 눈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뒤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옆에서 사신이 속삭였다.

“총사령관의 이름은…….”

“…….”

“아르센 로스토프 공작. 전장의 학살자라고도 불리우는 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들은 옛친구의 이름 때문이었다.

* * *

‘아르센 로스토프.’

그가 누구인가. 그는 내가 예전 알리사이던 시절, 둘도 없는 나의 친구였다.

동시에 그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10대의 나이로 마탑의 최연소 학자가 되기도 했다. 머리가 무척 명민한 데다가 신중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책을 읽으며 순수하게 미소 짓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라고? 나는 그가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약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가 이제는 자비를 찾아볼 길이 없는 이덴베르 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나와 함께 황궁의 숲을 뛰어놀던 그 아이가 그렇게 되었을 리 없다고.

하지만 충격에 젖은 나의 앞에 사신은 증거를 내보였다. 그가 이야기하기로 총사령관의 전적은 아주 화려했다. 5년 전에 로스토프의 공작 위를 물려받은 아르센은 국내외의 크고 작은 전쟁들에 항상 참가해 왔다고 했다.

특기이던 마법과 냉정한 판단력을 이용해서 뛰어난 전공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공작 위를 활용해서 이덴베르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 넓혀 갔다고 했다. 결국 서른 살 안팎의 그 젊은 공작을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의 이명이 학살자인 이유는, 그가 지나가고 난 곳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다고 해서라고 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욱…….”

밀려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려 노력했다. 그러자 시녀장이 깜짝 놀라 내 등허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황녀 전하?!”

“……윽…….”

나는 내 눈에 눈물이 배어 나온 것이 헛구역질을 참기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영상을 본 여파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저, 전하…….”

사신의 목소리에 나는 심호흡을 했다. 가파르게 차올랐던 숨을 진정시키고 나니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르센이 그렇게 변해 버렸다고……?’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고 한들, 순수했던 청년이 어떻게 완전히 변해 버리고 만 것일까.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알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전쟁터에 있지.’

어떻게든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전쟁이 끝나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가 이덴베르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그를 더 만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때, 나는 사신이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 황녀 전하……?”

그는 나의 상태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자신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보내 달라고?’

리오텐 공국에 가면, 아르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치료를 위해서 리오텐 공국에 와 달라고 했지.’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라면, 내가 말했던 것처럼 빛의 신관들이 대신 가도 되는 문제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 총사령관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예? 이자를 직접……?”

“그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생각을 더듬는 듯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열흘 뒤에 공왕 전하와 총사령관의 정상 회담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여하시는 것 이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상 회담.”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쿵,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상 회담이라면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차라리 이쪽이라면 가족들을 설득하기 더 쉬울 것이다. 문제는 내가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느냐인데…….

‘아무래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지.’

성녀로서 참여하는 것.

내가 제3국의 인물이라곤 하지만, 성녀의 권위는 전세계에 통용된다. 만약 회담을 평화적으로 이끌기 위해 참여하고 싶다고 한다면, 평화를 원하는 리오텐에서는 나를 열렬히 반겨 줄 것이다. 이덴베르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것이고 말이다.

게다가 마침 리오텐에서도 나의 치유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치료를 하는 동시에 회담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자.’

생각을 마친 나는 사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채였다. 문득 그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다른 사신들은 오히려 자신의 나라를 떠나지 못해서 안달인데, 어째서 그만큼은 그렇게 필사적인가.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이토록 설득하고자 하는 거죠?”

“……그건…….”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가 순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전쟁터에 제 동생이 나가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저를 대신해서이지요. 제 동생도 언제 죽거나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밤낮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

“그리고…… 제 동생뿐만이 아니더라도,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일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의 올곧은 푸른 눈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아르센의 일이 아니었어도 나는 그에게 귀를 귀울였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눈빛이 너무나 순수하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던 시녀장의 얼굴은 흠칫 굳어졌다. 나를 오랫동안 봐 와서 그런지, 나의 표정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말리지는 못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영상구를 본데다가, 사신이 이렇게 사정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어요.”

“황녀 전하!”

“……!”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대신 나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정상 회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예요.”

사신은 그 말에도 마냥 좋다는 듯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어찌나 세게 끄덕이는지, 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예, 예! 지금 당장 전서구를 보내서 공왕 전하에게 황녀 전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좋아요. 가족들은 내가 설득을 해 볼테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가, 감사.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인사를 하더니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걸어나갔다. 남은 것은 시녀장과 나뿐이었다.

“황녀 전하!”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

하지만 그 딱딱한 얼굴도 잠시,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말았다.

“……어째서 황녀 전하께서는 이렇게 책임감이 강하신 건가요.”

‘……응?’

분명히 무모한 짓을 한다고 혼이 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책임감이라고?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시녀장은 말을 이었다.

“정상 회담에 참여하셔서, 평화를 이끌어 내실 생각이신거지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시녀장이 울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가 성녀님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계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는 아직 어리신걸요. 물론 훌륭하신 황녀 전하이시라면, 잔악하다는 총사령관도 교화시키실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녀는 갈팡질팡하는 듯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대륙의 평화에 성녀로서 책임감을 느껴서 리오텐에 가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되짚어 보던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괜찮은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까.’

부모님께서도 내가 성녀로서의 책임감을 느껴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허락해 주실지 모른다. 항상 내가 빛의 성녀이고, 고결한 황녀 전하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던 두 분이셨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가서 훌륭하게 회담을 이끌어 낸다면 엘미르의 입지도 올라갈 테고…….’

이 생각을 시녀장에게 덧붙여 말하자…….

“아아, 황녀 전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나를 껴안고 말았다.

“황녀 전하의 고귀하신 마음씨는 알겠어요. 너무나 위험한 곳에 손수 향하는 그 고결함까지도…….”

“에, 엠마.”

“그래요. 전장의 학살자이든 뭐든, 아르센 그자가 황녀 전하께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건 당연하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엘미르와 이덴베르가 전쟁을 시작할 테니. 아니, 전 대륙이 이덴베르에게 칼을 들이댈 테니까 말이에요.”

‘그, 그건 좀 과장인 것 같은데.’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나에게서 떨어진 그녀는 눈물이 살짝 어린 얼굴로 웃어 보였다.

“황녀 전하를 믿어요.”

슬프지만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족들이 종종 보여 주던 눈빛이기도 했다. 나는 시녀장의 눈빛에 문득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나는 헛기침을 했다.

“……큼, 어쨌거나.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어.”

“예, 황녀 전하. 준비시키겠습니다.”

열흘 뒤에 회담이 있다고 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바로 아버지가 계시는 태양궁으로 마차를 타고 달려갔다.

시종장이 이르길, 태양궁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함께 마침 빛의 신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그에 나는 조금 의아해지고 말았다.

“빛의 신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고?”

내 의문에 답하듯, 시종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번 지원군에 신관들을 포함시키는 건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황권과 신권은 별개이다 보니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신관들의 권한에는 참견을 할 수가 없다. 대신관이 아버지께 존중을 받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니 아버지도 명령이 아니라 설득을 하고 계실 텐데, 그 이유를 생각하자 마음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사신들 앞에서는 냉정하게 구셨지만, 리오텐 공국의 민간인들이 걱정되셨던 모양이구나.’

시종장이 영접실 앞에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나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와 십수 명의 신관들이 앉아 있었다. 신관들 대부분은 난색을 표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긴, 그들이 아무리 신관이라곤 하나 갑작스레 피와 전투가 난무하는 전쟁터에 가겠다고 말하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그리고 그 안에는 룬 님도 있었다.

‘룬 님…….’

나는 그곳을 잠시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으로나마 그에게 인사를 남긴 채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천천히 아버지와 어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과 달,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뵙습니다.”

“아이샤.”

가족들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어쩐 일로 찾아온 거니?”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가족들을 잘 설득해야 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해 보거라.”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리오텐 공국으로 향하는 지원군에,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쾅!

누군가가 땅바닥에 책을 떨어뜨린 듯했다. 하지만 그 소리에 일말의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숨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영접실 안이 조용해졌다.

“……뭐, 뭐라고?”

가장 먼저 이시스 오라버니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안 된다.”

아버지는 짧은 말로 내 의견을 축약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저는…….”

“안 된다고 말했지 않느냐.”

아버지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의 위압감 때문인지 몇몇 신관들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위압감에 익숙해진 탓도 있고,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이유가 나를 걱정하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는 ‘성녀’로서 리오텐과 이덴베르의 전쟁을 말리러 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내내 냉랭하던 아버지가 흠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쟁을?”

“예.”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뒤에 리오텐과 이덴베르에서 정상 회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해서, 회담의 결과가 종전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하지만 아이샤…….”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회담에 참석하려는 저를 해치려는 세력도 없을뿐더러, 아시다시피…….”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만약 저를 해치려고 한다면, 대륙의 그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시녀장의 말을 들었던 것을 떠올려 작은 허세를 부려 보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내 말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황녀 전하를 건드릴 사람이 이 대륙에 있겠어……?’

‘그렇긴 하지……. 누구라도 엘미르와 빛의 신전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아 할 테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매우 힘을 주었다. 아무리 가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한 말이라곤 해도, 사실상 ‘대륙의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 같은 말을 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부끄러움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오라버니…….”

내가 그들을 더 설득하려고 하는데, 오라버니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안 된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오라버니의 눈에는 혼란과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네 말도 맞긴 하다. 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전장이야. 14살의 나이로 전쟁터에 떠나겠다고 하면 한갓 시정잡배라도 두 손 들어 말릴 텐데, 귀하디귀한 황녀인 네가 떠나겠다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그의 말에 영접실 안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오라버니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결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미 단단히 결심한 채였기 때문이다.

“아까 저는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무슨……?”

“14살의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하면, 누구라도 말릴 거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리오텐에서는요.”

나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저보다도 어린아이들. 고작해야 열 살쯤이나 되었을 아이들이 지금 전쟁터에서 싸우고 죽어 가고 있어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걸까요?”

“……아이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리오텐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의 가족일 테고, 친구일 테고, 사랑하는 사람일 거예요. 이시스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저는 그런 그들에게 성녀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말릴 수 있다면 이 전쟁을 꼭 말리고 싶어요.”

오라버니는 할 말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샤, 네가 성녀로서의 책임감이 큰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그곳까지 갈 이유는 없지 않겠니. 네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있고…….”

“하지만 성녀는 저 하나뿐이지요. 그리고…….”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이 회담에서 성공적으로 평화 협정을 이끌어 낸다면, 엘미르의 입지가 분명히 커다랗게 올라갈 거예요.”

“아이샤. 그건 정말로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강하게 말했다.

“아니요. 저도 한 명의 황녀인걸요. 제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오라버니도 자신의 몫을 하는데, 저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요.”

내가 주장하자, 사람들은 곤란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의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민하는 듯했다.

“리오텐에 가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전쟁을 말리고 싶어요. 무리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절대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허락해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리오텐에 가서 아르센을 만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말에도 거짓은 없었다. 도울 수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 그런 내 진심을 느꼈는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은.

“황녀 전하께서는 성인이 되면 순례 여행을 떠나야 하셨지요.”

그는 바로 대신관이었다.

“대륙 곳곳에 가장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순례 여행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전쟁터만큼 사람들이 힘든 곳이 없지요. 만약 황녀 전하께서 이번에 리오텐으로 떠나신다면, 그것으로 순례 여행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표정이 조금 바뀌고 말았다. 안 그래도 두 분은 내가 성인이 되어 순례 여행을 떠나는 것을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

순례 여행이라는 것이 워낙에 기약도 없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보니 그 염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만약 리오텐에 가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굳이 나를 대륙 곳곳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

게다가 기한도 정해져 있는 데다가, 리오텐에 엘미르 군사를 보내 나의 안전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러니 두 분으로서도 아마 이 이야기는 거절하기가 어려우리라. 나는 속으로 대신관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영접실 안의 분위기도 점점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울림이 좋은 낮은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디, 저도 함께 보내 주십시오.”

빛을 한 줄기, 한 줄기 뽑아내어서 머리카락으로 빚어내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환한 백금발이 저절로 빛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금빛의 눈을 한 ‘그’, 룬 님이 나의 뒤에서 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 전하의 안전을 위해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비록 이름은 얻지 못했지만 저는 대신관님에 필적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위로써 모자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룬 신관!”

대신관은 꽤나 놀란 듯했다. 신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룬 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그 특유의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뻔했다.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긴 했어도, 사실 나는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그가 나를 지지해 준다는 사실이, 도와준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허허,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대신관은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신관이 먼저 나서서 위험한 전쟁터에 향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신관들이 손을 들기 시작한 것은.

“……저, 저도 지원 행렬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영접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 신관에게로 모두 쏠렸다. 젊은 나이의 그 신관은 그 주목이 부담스러운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손을 꿋꿋하게 들고 있었다.

“저도 가게 해 주십시오! 성녀님과 룬 신관께서도 이렇듯 위험한 전쟁터에 선뜻 나서는데, 저만 물러나 있지는 않겠습니다. 비록 미력한 힘이나마 돕겠습니다!”

“시, 실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부디 보내 주십시오!”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아래를 돌보시는 성녀님!”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나는 환하게 미소 짓고 말았다.

‘……다들…….’

지금까지 내가 그들과 그저 인사나 나누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녀랍시고, 신관들이 나를 믿고 나를 따르겠다고 하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아바마마,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단 한 번이라도 이제껏 무리한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티끌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계속되는 호소에 아버지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이미 마음을 정하신 모양이었다. 나와 같이 아버지를 바라봐 주고 계셨으니까.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시스 오라버니 또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허가한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멎었다.

“……아바마마!!”

나는 뛸 뜻이 기뻐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내가 리오텐 공국에 가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게요!”

아버지는 고집 센 나에게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에는 나를 향한 신뢰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장소에는 아직 납득하지 못한 한 명이 있었다.

“아바마마!”

이시스 오라버니가 크게 외쳤다. 그의 초록색 눈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고 한들, 저렇게 어린아이를 어떻게 전장에 보내시겠다고 결정하실 수 있습니까. 폐하!”

오라버니의 외침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한 일이다. 이시스. 받아들이거라.”

“아니요. 어린 동생을 전장에 보내 놓고 어찌 제가 황궁에서 편히 잠들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시스?”

“차라리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이제 그는 나 대신 아버지께 간청하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비록 저에게 아이샤처럼 치유의 힘은 없지만, 전쟁터의 선봉에서 싸워 전쟁을 종결시키겠습니다. 리오텐과 이덴베르의 회담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대신 저를 보내 주시고, 아이샤는 이곳에 남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전쟁터에 선봉에 서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아직 모른다. 게다가 후계자인 네가 회담에 참여한다면 리오텐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반발만 얻겠지.”

“하지만……!!”

오라버니는 한참 동안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내가 성녀이기 때문에 회담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 아무리 우방국이라곤 해도 제3국인 엘미르의 황태자가 회담에 참여할 명분은 없다.

게다가 만약 오라버니가 나 때문에 전쟁터의 선봉에 나서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가는 것을 포기하리라.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이시스 오라버니는 정말로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버지를 줄곧 폐하라고 부른 것도 그렇고, 아버지의 윤허가 떨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으니까 말이다.

나는 오라버니를 따라가려 했으나 아직 남아 있는 일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샤.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사람들의 해산을 명령했기 때문에, 넓은 영접실에는 곧 우리 셋만 남게 되었다. 조용해진 영접실 안에서, 어머니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리오텐 공국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지도 모른단다. 다른 사람들도 말했다시피,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전쟁터니까.”

“……네, 어머니.”

“하지만 그럼에도 보내 주겠다고 결정한 건 너를 믿어서란다.”

어머니가 가만히 팔을 벌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었다. 언제나처럼 어머니에게서는 포근한 향기가 났다.

“……네가 어렸을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벌써 상급 정령사가 된 데다가 이제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려고 하는구나.”

“……어머니.”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당장 돌아오렴. 그리고 항상 호위기사와 신관들을 데리고 다니고. 또…… 그래. 설령 회담이 잘 풀리지 않아도 절대 실망할 필요 없단다. 네가 간 것만으로도 너는 최선을 다한 거니까 말이야.”

나는 약간 울컥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길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로부터 마음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에게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다음은 아버지의 차례였다.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아이샤.”

“아버지.”

내 머리 위로 따뜻한 손이 얹어졌다. 아버지의 손이었다.

“솔직히 대신관의 말이 아니었으면 너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말이다.”

“……네…….”

“하지만 나중에 너를 기약 없는 순례 여행에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리오텐에 보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너도 이렇게 원하고 있으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것은 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이었던 모양이구나.”

아버지의 얼굴에는 약간 슬픈 기색이 어렸다.

“리오텐에 향하는 지원군의 병력을 1만으로 늘리겠다. 네가 안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나는 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라고, 또 기뻐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네 말대로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는 거겠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해라.”

“……네, 감사해요.”

나는 생긋 웃고 말았다. 아버지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시스에 대해서는 네가 찾아가 보렴. 그도 너를 이기지 못할 건 분명하다만.”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건 너희들이 처음으로 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처음으로 싸우는 일,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나와 오라버니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얼마나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 주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에는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내가 대견스러운 것 같기도, 걱정스러운 것 같기도, 어딘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와 시녀장의 표정과도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자리에 일어나서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의 다정함이 온기를 타고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 * *

복도를 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앞에서 룬 님이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룬 님!”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절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요?”

“그래.”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잠깐만 같이 걸을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그와 자연스럽게 걷는 척하며, 나는 우리 주위 사이에 방어막을 쳤다. 용도는 방음이었다. 이 방어막을 펼치면 외부로부터의 방어는 물론, 내부의 소리를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난 이후로부터 정령술의 숙련도가 매우 높아져 부릴 수 있게 된 마법이었다. 내가 룬 님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사과’였다.

“죄송해요. 룬 님.”

그에게 사과를 건네자, 그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

“그게, 저 때문에 괜히 같이 리오텐 공국에 가게 되었잖아요.”

“…….”

“제 일인데…… 저를 감싸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걸 알아요.”

그러자 그가 멈추었다. 그의 보폭에 맞추어 나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자, 그의 금안이 나를 마주 보았다. 언제 보고 있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게 사과할 이유는 없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 그는 지고지순한 정령왕. 누구 감히 그에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가 자의로써 나를 따라오겠다고 판단하고 결정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런 그의 무뚝뚝한 상냥함이 정말로 좋았다.

“그럼…….”

나는 대신 말을 바꾸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옷자락을 살짝 쥐어 무릎을 숙여 보이는 내 모습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다. 그보다…….”

“네?”

“상급 정령을 소환했더군. 축하한다.”

“아…….”

나는 모처럼 환하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도 아마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네! 드디어 루디온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잘되었군.”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작은 미소만으로도 나는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나이에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은 긴 역사를 둘러보아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아주 적었지. 자랑해도 된다. 너는 그만한 일을 해낸 거니까.”

“쑥, 쑥스러워요.”

그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쩔 줄 몰라 발끝을 내려다보던 나는 말을 돌리고 말았다.

“그보다…… 사실 걱정이에요. 이시스 오라버니 때문에요.”

겨우 리오텐 공국에 가는 것은 허락받을 수 있었지만, 이시스 오라버니의 걱정을 어떡하면 줄일 수 있을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오라버니는 룬 님이 사실은 정령왕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데다…… 나는 흘금 룬 님을 바라보았다.

‘룬 님께서도, 나를 지켜 준다는 보장은 없지.’

룬 님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늘 같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의 흥미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가 호위 기사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는 않았다. 내 몸은 내가 지키는 수밖에.

물론 그가 나를 지켜 준다면 나로서는 무척 든든하겠지만 말이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말했다.

“그는 아마도 자신에게 분노한 것이겠지. 미력한 자신에 대한 화가 났다고 볼 수 있어.”

룬 님의 분석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오라버니가 자신의 미력함에 화가 났을 것이라니. 그 생각을 해 보지는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감정에 서투르던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내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글쎄, 신전에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부딪치다 보니 그런 것 같군.”

“……헤…….”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에게서 배워 가는 것들도 있다.”

“저에게서 배우셨다고요?”

“그래, 나도 꽤 인간의 감정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일지도.”

“…….”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그가 이제 남들의 감정을 파악할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것이 말이다.

그가 인간의 감정에 익숙해져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까 아버지에게 예의를 차리던 모습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고, 웃는 얼굴도 많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룬 님은, 그러니까 루미나스 님은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싶고 나에게 흥미가 생겨서 내 곁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흥미가 빨리 떨어져 버린다면, 아니, 인간의 감정을 모두 배운다면…… 룬 님은 떠나 버리시는 걸까?’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령왕. 그가 나의 곁을 떠나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상상이 되어서 나는 순간 조금 눈물까지 날 뻔했다. 동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그를 소환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씁쓸했다.

‘……이시스 오라버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의 미력함에 화가 나는 기분’이란 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능력 있는 정령사였다면 그를 소환할 수 있을 텐데. 결국 부족한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남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그저 자신을 원망할 뿐인 것이다.

물론 열네 살의 나이에 상급 정령을 소환한 축복 받은 정령사로서, 이런 말을 한다면 다른 정령사들에게 지탄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어느새 내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인간의 감정에…… 너무 빨리 익숙해지시면 안 되어요.”

룬 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내가 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룬 님이 종종 보이는 습관 중 하나였다.

“너무 빨리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도 아차, 하고 말았다.

“아, 네. 그게…….”

‘……뭐라고 변명하지.’

이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진땀을 빼던 나는 대충 변명했다.

“……왜, 수프도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원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가?”

“네. 그…… 그리고 그런 속담도 있죠? 시간을 들이지 못한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고. 아무리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빨리 얻게 되면 빨리 잊는 법이랍니다.”

룬 님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 분 일 초가 마치 몇 시간 같던 순간이 지나고, 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일리가 있군.”

“……그쵸?”

나는 당황한 것을 애써 숨기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어떻게 잘 속여 넘겼을까? 그런데 그는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네?”

“아주 오랫동안 네 곁에 머물게 되겠군. 네 말대로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갑자기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볼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시다면야 저는 좋죠.”

“좋은가?”

“……네, 네…… 그…… 저희는 친구잖아요. 정령왕과 정령사끼리의 우정…… 뭐. 그런…….”

예전에 그와 나누었던 말을 주워섬기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다시 미소를 보이자, 나는 아무래도 좋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이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대로…….’

그는 다시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길게 드리워지는 그의 그림자와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는 지고지순한 정령왕. 그를 나의 감정으로, 그리고 인간 세계에 내 마음대로 물들여도 괜찮은 걸까.

‘…….’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를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의 뒤를 재빨리 쫓아갔다. 더 이상 멀어지지 않기 위해.

* * *

룬 님과의 대화도 일단락되었겠다, 그다음으로 내가 찾아간 곳은 이시스 오라버니의 궁인 ‘청의 궁’이었다.

분명히 그도 영접실에서 빠져나갔으니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나는 그곳에서 오라버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시종장에서 들은 말로는 이랬다.

“이시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개인 연무장에 계십니다.”

“개인 연무장…… 이라고?”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이 시간의 연무장이라니, 무척 드문 일이었다. 오라버니의 스케줄은 거의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침에 항상 훈련을 했고, 점심때나 오후에는 정무를 보고 후계자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오후에 개인 연무장에 가 있다고?

알 듯 말 듯했지만, 어쨌든 나는 시종장이 알려 준 대로 개인 연무장으로 찾아갔다.

“……!!”

그곳에 도착한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멀리서부터 창이 휘둘러지는 바람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강한 힘으로 창을 내려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 그는 연무장에 홀로 서서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초록색 창이 마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휘둘러지는 가운데, 그는 앞을 강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 벌써 연무장의 공기는 더웠고, 그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자세에는 흔들림이 하나 없었다.

오감을 집중해서 훈련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연무장 근처에 발을 디디자 그는 내가 온 것을 단숨에 알아차린 듯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

그러자 그가 나를 배려함인지, 창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어두웠다.

“……아이샤. 여긴 어쩐 일로…….”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

“…….”

“그런 슬픈 얼굴은 하지 마세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내 말에 그가 창을 꽉 쥐어, 손마디가 모두 하얗게 변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로 좀 더 다가갔다. 연무장은 흙바닥이었지만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흙먼지를 마시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 사이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고통이란. 나는 그의 감정에 나까지 전염이 된 것처럼 무척이나 슬퍼져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다들 내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랑을 이렇게 퍼부어 주는 걸까. 오라버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예전에 네가 말했었지.”

“…….”

“이덴베르에 복수하고 싶다고.”

그가 깨끗한 초록색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단다.”

“…….”

“……그것은, 너도 그렇겠지?”

씁쓸하기 그지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 동산에서 서로 맹세했던 것을 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라버니는 괴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동생이란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설사 이덴베르와 전쟁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와 그 맹세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어. 그런데 이런 때에 너를…… 그렇게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내게 되다니…….”

나는 룬 님의 말을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나 때문에 화가 났다기보다, 그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난 것이리라. 차라리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진심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혼자 보내게 된 것이다.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둡기에, 나는 한껏 웃으려고 노력했다.

“혼자가 아닌걸요.”

“……!”

“아버지께서 1만의 병력을 지원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리오텐 공국에서 현재 싸우고 있는 군사가 5천이고, 이덴베르가 몰려온 것이 8천이라고 했다. 리오텐에 1만의 군사가 더해진다면 리오텐 군의 상황이 훨씬 수월해지겠지. 물론 아버지의 말대로 내가 평화 협정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룬 신관, 그도 무척 대단한 사람이에요. 대신관님에 필적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니 언제 어느 때나 분명히 힘이 되어 줄 거예요.”

“…….”

“그리고 또, 저는 상급 정령을 다루고 있다고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정령사가 아니어서 잘 감이 안 오시겠지만, 거의 오라버니 다음 정도로 강하다고 보셔도 되어요. 그러니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시지도 마시고…….”

내 말에 오라버니가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나를 보내기로 했던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못내 원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믿어 주세요.”

나의 파란색 눈과 그의 초록색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입을 열어 달싹거렸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시는 너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지 않겠어.”

그가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에는 널 보내느니, 차라리 후계자도 다 때려치우고 전쟁터에 나갈 테니까.”

“오라버니!”

나는 기겁했지만, 말을 잇는 오라버니의 눈동자에는 점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알겠어?”

이내 말을 모두 마친 그는 싱긋 웃고 있기까지 했다. 그래, 그래야 나의 오라버니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어 보이고 말았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절대로 다음이 없도록 노력할 거다.

“다녀올게요.”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말했다.

* * *

리오텐 공국의 지원군은 빠르게 구성되었다. 사안이 워낙에 급한 일이기도 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웠기 때문에 군인에 자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 컸다.

우리 쪽의 총사령관은 ‘벨트모어 공작’이 되었다. 국방부 대신이기도 한데다, 이 제국의 제일 공작인 그가 이번 지원군에 참여하게 되자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대부분은 감탄과 안도의 목소리였다. 그는 전쟁 경험이 무척 풍부한데다가 전쟁터의 무신으로 유명했다. 그의 강함을 물려받은 비온 공자가 젊은 나이에도 그렇게 강한데, 경험과 중후함까지 갖춘 벨트모어 공작이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보여 줄지는 나로서도 궁금할 정도였다.

리오텐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소식을 계속 전해 받았다.

리오텐은 지금 북쪽으로 내려온 이덴베르의 군사에 맞서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전에도 몇 번 그러한 도발은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배 이상으로 큰데다가 아주 기세가 막강했다.

부디 우리 엘미르 제국에서 지원군이 갈 때까지 수도를 지키고 싸워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냐는 잘하고 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미냐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당당한 태도, 맹랑하기까지 한 그 자신감. 공녀는 나에게 꽤 많은 인상을 주고 갔었다.

‘결국 편지 답장도 못 받았고.’

그녀의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온 호위 기사들과 시녀 몇 명, 그리고 군인들과 신관들로 구성된 무리였다.

제일 먼저 선발대를 따라오는 것은 천 명 남짓한 최정예 멤버였고, 그 뒤를 따라서 순차적으로 9천의 군사가 우리를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룬 님이 타고 있을 신관들의 흰 마차가 저 멀리에서 어른어른 보였다. 그들은 신의 힘을 빌어서 부상자를 치유하고, 약자를 지킬 것이다.

그들의 머리가 되어서 성녀로서 움직여야 하는 것은 나이다. 그들은 나에게 감화되어 이 위험한 곳까지 따라온 것이니까 말이다.

‘……잘해 내자.’

두렵고 떨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려 전장에 가는 것이다. 상급 정령을 소환했고 전생의 기억이 있다곤 하나, 나는 아직 14살이었다. 그러므로 가슴이 불안하게 떨려 오고 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멀리에서 보이는 신전의 흰 마차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불안한 마음에 전염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모두 잘될 거야. 그렇지?”

“네. 주인님.”

내 품 안으로 파고드는 루를 안아 주며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리오텐 공국으로 가는 마차는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본디 엘미르 제국과 리오텐 공국과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리오텐 공국이 엘미르 제국의 영지였던 것이 그 이유다. 기사단과 마차의 수가 꽤 있었는데도 나흘 남짓 마차를 달리자 생각보다도 빠르게 리오텐 공국에 닿을 수 있었다.

도착한 날은 아침이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도시의 공기는 흉흉했고, 사람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언제나 이러한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힘없고 약한 서민들이다. 평소 때라면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녔을 도시의 광장들에는 영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수도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인파는 불안함과 반비례해서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이 먼저 나와 공왕 성으로 향하는 곳에 서서 꽃을 뿌리고, 격려의 함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제발 잘 부탁드려요!”

“저희 남편이 군대에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자비를! 성녀님!”

창문을 닫아 두어도 그 목소리는 마차 안까지 울려 들어왔다. 그들이 갖고 있는 절망이 나에게도 뼈가 시리도록 느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환영해 온 것은 일반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공왕의 핏줄들과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총사령관은 곧장 수뇌부를 만나러 갔다.

궁의 영접실에서 처음으로 만난 공왕은 알디에프보다는 미냐를 더욱 닮아 보였다. 치켜 올라간 눈매가 특히 그랬다. 오히려 알디에프는 부드러운 성격을 포함하여 어머니 쪽인 공왕비를 쏙 빼닮은 듯했다.

“먼길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 총사령관 각하.”

“감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총사령관 각하!”

공왕은 가장 높은 신분인 나와 공작에게 인사했다. 그 뒤로는 공국의 대신들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천천히 바라보니 그 안에는 내가 이전번에 만났던 사신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망명 타령을 했던 것이 찔리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눈을 피했으니까 말이다.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귀족들의 얼굴도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공왕의 뒤에 얌전히 서 있는 것은, 바로 미냐였다. 편지의 답장이 없길래 오래도록 걱정했는데, 그래도 얼굴빛이 아예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알디에프 공자도 있었다.

‘다행이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 또한 나를 보며 눈짓을 해 왔다. 나를 다시 만나 기쁘다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에서는 숨길 수 없는 슬픔이 조금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부디 힘을 합쳐 이덴베르 놈들에게 맞서 싸워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공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옆에 있던 공왕비는 내 말에 무척 감동한 듯했다. 옆에서 공왕이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짐을 풀고 쉬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미르의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무척 피곤하시겠지요.”

엘미르의 수뇌부는 모두 개인실을 배정받았다.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한 대접을 받으며 개인실에 온 나는 가장 먼저 루와 리미에를 불렀다. 둘은 허공에 빛 가루를 뿌리며 나타났다.

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나서 정령술이 더욱 능숙해진 나로서는 둘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부르셨나요, 주인님?”

둘은 내 말을 기다리듯 얌전히 서 있었다. 나는 일단 루에게 명령했다.

“루, 이 공국의 수도를 살펴봐 주렴.”

루는 하급 정령이기 때문에 정령사의 곁에서 떨어지는 데에 제한이 있었다. 그런 루에게는 가까운 수도가 어떠한지 살펴보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었다. 그다음 나는 리미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미에, 너는 전장의 근처에 가서 전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알려 줘.”

중급 정령인데다가 빠르고, 나의 곁에서 멀리 멀어질 수 있는 리미에에게는 이곳으로부터 꽤 떨어진 전장의 근처를 살펴보도록 요구했다.

둘이 탐색하고 오면 나는 그 기억들을 내 눈으로 직접 살펴볼 생각이었다. 수도에서 남들에게 그저 전달받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 둘에게 일을 시켜 놓은 나는, 아주 잠깐 쉰 뒤 바로 군사 회의에 참석하러 가야 했다. 군사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엘미르의 수뇌부 몇 명이었다. 그 안에는 나와 총사령관, 그리고 신관들의 대표인 룬 님이 포함되었다.

처음 홀에 들어섰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홀 안이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꽥꽥 소리를 지르느라였다.

서로와 싸우고 서로를 비방하는 데에 바빠서 회의는 시작도 전에 난장판이었다.

공왕은 이 대신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탓에 쉽지는 않았다. 항상 아버지의 위압감에 짓눌려 간신히 발언하는 엘미르 귀족들만 보았던 나로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내가 놀라고 있는데, 시종이 어색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나는 표정을 수습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와 엘미르의 수뇌부가 들자 그나마 홀 안은 조금이나마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로를 다시 물고 뜯기 시작했는데. 나는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내 옆에는 룬 님도 있었다. 그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상태로, 그가 여기까지 오는데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탓이었다.

그도 자신의 얼굴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긴 한 모양인지,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주었고 말이다.

‘룬 님께서는 이 광경을 어떻게 보실까.’

정령인 그가 자신의 안위에만 눈이 벌게진 인간을 보고, 혹시라도 인간들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룬 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나는 것만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

나는 반사적으로 룬 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키가 훌쩍 크고, 난 작기 때문에 후드 안에 숨겨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의 금색 눈이 차분하게 이 홀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아.’

엘미르의 총사령관인 벨트모어 공작이 발언하자, 그나마 대신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군사 회의’같은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일단 우리가 데려온 천 명의 병력으로 가장 급한 불을 끄겠다는 말에 공왕은 그저 고개를 깊게 끄덕일 뿐이었다. 귀족들은 엘미르 수뇌부의 말에 박수 치며 기뻐했다.

아직 대신들은 내가 성녀로서, 그리고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싶었다. 그것은 아직 일급비밀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중에 있을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이만 쉬는 것으로 하며, 회의 같지도 않은 회의에서 벗어나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노을이 내리는 아름다운 남서향의 방에는 루와 리미에가 사이좋게 침대 위로 앉아 있었다.

루와 리미에의 동글동글한 뒷통수를 보고 있으니 뭐랄까, 피폐해졌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루, 리미에. 보고 온 건 어땠니?”

“분위기가 무척 좋지 않았어요! 다들 힘들어 보이던걸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넓은 들판에 수많은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어요.”

나는 잠시 쉴까 고민했다가, 이내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너희들이 보고 온 것을 보여 주렴.”

나는 빛의 구를 허공에 띄웠다. 이 구를 통해 나는 내가 부리는 정령들이 본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마법 영상구의 원리를 변형하여 내가 직접 고안한 정령 마법이었다.

먼저 루의 차례였다. 지난번 리오텐 사신이 보여 주었던 수도의 길바닥 모습도 처참했지만, 이번에는 그 상태가 더욱 심각해진 듯했다. 골목 안을 점령한 거지들과 팔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아이들이나 노약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머리가 어질해질 지경이었지만, 아직도 보아야 할 것은 남아 있었다. 다음은 리미에의 차례였기 때문이다.

“리미에, 네가 보고 온 것을 알려 줘.”

그리고 전쟁터의 모습이 보였다.

“……욱.”

나는 오늘 내가 마차 멀미 때문에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했다.

붉은 옷을 입은 리오텐 군들은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이덴베르 군인들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군인들을 베었다. 총사령관이 그것을 종용한 것이 틀림없겠지.

“…….”

그것을 계속 보던 나는 밀려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려 노력했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 텐데, 내가 이것 하나 참지 못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억지로 속을 가라앉혔다.

“괜찮으세요?”

리미에가 나의 상태를 느꼈는지 빛의 구에 기억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다. 그쯤 되면 다 보았다고 생각되었기에, 나도 손을 내저어서 빛의 구를 흐트러뜨려 버렸다.

“……응, 괜찮아.”

나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 군사 회의에서 본 것과 루, 리미에가 가져다준 정보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리오텐 공국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국민들의 사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전투가 계속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계속해서 전쟁터로 착출되다 보니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올지 몰라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에서 다리를 잃거나 팔을 잃고 돌아온 군인들은 비싼 진통제 대신 싸구려 술에 진탕 취해 길거리에서 난리를 피우곤 했다. 그런 그들을 도와줄 인력도 신관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점차 사람들의 사기가 낮아질밖에.

두 번째로,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귀족들이 문제였다. 애국심이 없는 건 이해라도 하겠다. 가장 문제는 나라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나라의 암적인 존재였다. 지난번에 보았던 망명을 요구하는 대신들이 그랬다.

오늘 처음 본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직접 그들을 대하고 있었을 공왕과 멀쩡한 대신들은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후.’

나는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그냥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상황은 더 심각했다. 엘미르의 군대가 도와준다고 해서 그 지원을 제대로 받아먹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군량미를 따로 빼돌리지 않으면 다행일까.

‘이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말렸구나. 이런 모습을 보지 않게 막고 싶어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냉정하게 앞으로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을 때였다. 문 뒤에서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그 뒤에 있던 사람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샤 님.”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미냐였다.

“……미냐!”

나는 반가움에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많이 마른 것 같은 미냐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마른 것뿐만이 아니라, 얼굴색도 무척 창백해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미냐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미냐,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연락이 없어서 많이 걱정했어요.”

“……편지의 답장을 못 해서 죄송해요.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네요.”

그녀가 기운 없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예전의 그녀 같지 않아서 가슴이 조금 아파 왔다.

“자리에 앉으세요. 차라도 드시겠어요?”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노을의 주홍빛이 미냐의 옆얼굴에 내려앉아 그늘을 만들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주홍빛으로 물든 섬세한 속눈썹이 떨려 왔다.

“……사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차를 직접 준비하던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아이샤 님께는 늘 만날 때마다 부탁만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친구잖아요. 그 부탁이라면……?”

그녀가 심호흡을 하는 것이 보였다. 두 손은 너무나 꽉 쥐어서 새하얗게 변한 채였다.

“오늘 이곳에 오셔서, 짧은 시간이지만 공국의 문제점은 충분히 보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냐.”

“영민하신 황녀 전하니까 금방 알아채셨겠지요. 공국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요.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썩은 귀족들과 아파하는 백성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자조적으로 변했다.

“무능한 저와 공국의 수뇌부들까지요.”

“미냐…….”

“다들 아무런 손을 못 쓰고 우방국인 엘미르에게 의지하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려 하는 게 지금의 상태이지요. 심지어는 다른 나라에 망명하려는 귀족들도 넘쳐흐르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슬픔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나도 그런 귀족들을 직접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와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를 앞에 놓고 보니 그녀의 마음이 더욱 와닿는 것 같았다. 귀족 작위와 영지를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나라로 망명할 정도라면 정말 나라의 국운은 다했다고 보아도 될 정도이리라.

미냐는 쓸쓸하게 웃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리오텐 공국은 엘미르나 이덴베르처럼 대제국도 아니고, 전쟁이 이렇게 터져 버렸으니…… 도망가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로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는걸요.”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이덴베르의 군대가 수도까지 진격해 오기 전에, 가족들과 도망쳐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다면…… 대체 목숨보다 소중한 게 뭐가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물론, 약한 소리예요.”

그녀의 붉은 눈에서는 마치 불꽃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더 소중한 것은 있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들의 뛰노는 웃음소리, 시끌시끌한 한낮의 광장과 저녁때가 되면 식사를 만드는 집집에서 나는 훈내, 단란한 가정과 밤이 되면 아무런 걱정 없이 눈을 감고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평화로움…….”

미냐는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지키고 싶어요. 누구보다 이 나라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라도.”

이내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이번 회담에 참여하게 되셨다는 걸 들었어요.”

“……들으셨군요.”

“네, 제 부탁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부디 총사령관을 설득시켜 주십사 하는 거예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전쟁을 멈출 수 있도록…….”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절박해 보였다.

“……저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리오텐에 와서 변해버린 아르센을 확인하고……. 그리고 만약에, 할 수 있다면…….

‘……아르센을…….’

그를 말리고 싶었다. 내가 한 생각에 나는 스스로가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이 되었다. 그가 변했음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서 넘칠 정도로 확인한 채였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변명해가면서까지 굳이 이곳, 리오텐까지 왔다.

그저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바로 아르센을 말리고 싶었기 때문에. 과연 그게 가능할까? 변해 버린 그를 내가 막을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걸. 더 이상 물러날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런 나의 목적은, 미냐의 목적과 정확히 일치해 있었다. 아까 보았던 전쟁터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르센을 설득할 수 있다면 이 전쟁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의 최종 결정권자는 이덴베르의 황족들이겠지만, 적어도 총사령관으로서 이 전쟁의 전권을 부여받은 아르센의 말을 그들이 무시하지도 않으리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마치 미냐는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아이샤 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

“단순히 아이샤 님이 황녀나 성녀라서가 아니라, 저는 아이샤 님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나에게 갖는 무한한 신뢰에 대해, 그리고 내가 그것을 과연 보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미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 국내에는 엘미르 군이 리오텐을 도와주러 오는 것을 저어하는 세력들도 존재한답니다. 혹시라도 전쟁을 빌미로 내정간섭을 당할까 봐 염려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아이샤 님이 나선다면 다들 알아줄 거예요. 아이샤 님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하신 분인지 알면 누구라도 아이샤 님의 진심을 믿어 줄 테니까요.”

그녀가 살짝 웃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의 당당한 미소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내 진심을 믿어 줄 거라니.’

정말 그럴까? 한 나라의 정치에 간섭한다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냐의 말대로 내정간섭을 염려할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미냐의 말을 믿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이 전쟁을 말리고 싶은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에는 전쟁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감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이덴베르가 승리한다면 리오텐을 밟고서 우리 엘미르 제국까지 쳐들어오는 것도 금방일 테니까.

이시스 오라버니는 이덴베르에 대한 강력한 적의 때문에 금방이라도 이덴베르와의 전쟁을 속행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엘미르의 황녀로서라도 나는 이 전쟁을 막아야 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냐.”

“……아이샤 님.”

미냐의 절망한 얼굴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감사…… 윽, 감사해요…….”

그녀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았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 볼 때였다.

* * *

이튿날, 나는 수뇌부들이 있는 홀에 갔다. 회담에 관련해서 해야 할 말도 있었던 데다가, 오늘부터 바로 내가 환자들을 치료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미냐는 수뇌부들의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미냐도 함께였다. 그녀에게 인사를 보내자 그녀가 살짝 웃어 왔다. 어제보다 훨씬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자리에는 다른 신관들도 있었다. 신관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어 인사한 뒤,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제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상황을 눈치챌 수가 있었다.

‘내가 회담에 참여한다는 것이 알려졌나 보구나.’

대신들은 불편한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뒤에서 나를 보면서 수군대고 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내가 엘미르의 황녀인 이상 아무래도 내정에 내 입김이 들어가는 것을 저어하는 것이겠지.

‘하아…….’

그들이 걱정하는 바도 이해는 가지만,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무척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만약 평화 협정이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 가장 이득을 볼 사람들은 리오텐 사람일 텐데도 말이다. 미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시종이 내게 와서 알렸다.

“황녀 전하, 다친 군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만…….”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원래는 회의를 위한 홀이었지만, 리오텐 대신들은 나와 신관들이 군인을 치료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성녀로서 나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대신들이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아서 약간 불쾌하기도 했지만, 한 번쯤은 실력을 보여 줘서 그들을 입 다물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 나는 수긍했다.

물론 군인들이라고 해도 중요도는 있었기 때문에, 계급이 높은 군인들부터 먼저 치료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이 자리에 있는 대신들의 가족들도 있었을 것이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안으로 들것에 실린 많은 군인들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들것 위에 올려진 사람들 중에는 아예 정신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몇몇은 자기 힘으로 걸어올 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사정이 나았다는 것은 아니다. 칼에 찔리거나 이곳저곳 다친 사람들은 차라리 나았다.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마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탁상공론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에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두운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지만 전쟁의 참극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역시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서 바로 내 치유의 힘을 펼쳐 보이려고 했다. 그전에 어떤 군인이 난동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놔! 놓으란 말야!”

한 젊은 군인이 홀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옆에는 가문의 사람으로 보이는 하인이 있었는데, 깜짝 놀라 그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도,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이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치료는 무슨 놈의 치료!”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 군인의 얼굴은 빨갰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그의 상태가 왜 그런 것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술 냄새가 온 홀에 진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통제가 없어서 값싼 술로 그걸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도 저 정도로 심각하게 다쳤다면 비싼 진통제를 쓸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아 약값이 정말로 오르긴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저 취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그의 모습을 흘금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바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하반신은 마비된 것 같았고, 셔츠의 오른팔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팔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그런데 내가 그를 관찰하고 있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새빨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뭘 보십니까!”

“……!”

그의 눈에는 세상을 향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굳이 내 쪽을 향해 말을 한 것을 보아 나를 겨냥한 말이 틀림없어 보였다.

감히 황녀인 내 앞에서도 소리를 지르는 걸 보아 많이 취했거나, 담이 크거나, 혹은 두 개 다인 모양이었다. 그가 나에게 소리를 지르자 몇몇 귀족들, 특히 엘미르 귀족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가, 감히 황녀 전하께 소리를 지르다니. 무슨 무례를!”

“황녀 전하께서 직접 은혜를 베풀러 이 먼 곳까지 강림하셨는데, 배은망덕한……!”

엘미르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 군인에게 결투라도 신청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그들을 말렸다.

“진정하세요.”

전쟁에서 팔을 잃은 데다가, 하반신 마비까지 온 주정뱅이의 말에 열을 올릴 것도 없다. 엘미르 귀족들은 내 얼굴을 봐서 간신히 화를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그 군인은 다시 한 번 기름을 끼얹었다.

“하, 대단하신 성녀님 나섰군.”

그가 이죽거렸다.

“그래 봤자 다 똑같아.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도 않으면서, 쓰레기 같은 윗대가리들…….”

그 거친 언사에 리오텐 사람들마저 분노했다.

“저, 저 주둥아리를 찢어도 시원치 않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귀족들과 대신들이 핏대를 올리며 그를 욕했다. 저런 군인 따위는 치료해 줄 필요도 없고, 이런 모욕을 받을 바에는 그냥 돌아가자고 하는 엘미르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자 그는 오히려 더 화가 난 듯했다.

‘모든 것에 화를 내고 싶을 때지.’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에게도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 다른 사람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세상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을 증오했다. 그렇게 하면 속이라도 시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게 잘한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홀 안을 둘러보았다. 리오텐의 대신들 중 몇몇은 아직 내 실력을 못 믿는 이들도 있었다. 내 명성이 높은 만큼, 거짓이 진짜로 부풀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 그들에게 내 실력을 보여 줘야 할 필요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앞에 가서 섰다. 그의 키는 나보다 훨씬 컸지만, 들것에 실린 채여서야 무서울 리가 없었다. 내 고요한 눈빛에 그가 오히려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뭐, 뭐야!”

이제 그는 존댓말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요.”

“누, 누가 시키는 대로 할 줄 알고!”

내 말에 그가 있는 힘을 다해 들것 위에서 버둥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루를 불렀다. 소환된 루는 공중에서 빛 가루를 뿌리며 등장했다.

“묶어서 꼼짝 못 하도록 해 주렴.”

“네, 주인님!”

루는 즐거운 일을 만났다는 것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빛의 사슬로 그를 꽁꽁 묶었다.

“이건 또 뭐야?!”

그가 벌컥 화를 내었다. 하지만 루가 사슬을 한번 잡아당기니 그는 아예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지고 말았다. 남들 앞에서 이런 꼴이 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창피하다는 얼굴이었다.

“……이,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줄…….”

“당연히 무사하지.”

내 담담한 태도에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소리쳤다.

“……이익! 성녀면! 성녀면 다야?! 당신이 뭘 해 줄 수 있어! 내 팔이라도 다시 만들어 줄 수 있어? 있냐고! 아니면 나를 일으켜 줄 수 있어!”

그 외침에는 그가 신체를 잃고 느꼈던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기랄,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당신들은 이런 곳에서 안전하게 숨어 있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는 이제 숫제 줄줄 울고 있었다. 그 말에 아까까지 욕하던 리오텐 사람들이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쳐 줄 수 있으니까, 조용히 해.”

“……뭐?”

순간 군인의 얼굴이 벙찌고 말았다. 나는 그가 또 난동을 부릴까 봐 재갈을 물리는 것을 생각했으나, 재갈까지 물리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참았다.

“루.”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루는 그의 셔츠를 서걱서걱 잘랐다. 무척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군인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팔이 없었고, 그 부위는 너덜너덜하게 잘려서 보기만 해도 무척 끔찍했다.

실제로도 다른 귀족들은 그 상처를 보고 고개를 돌리거나,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봐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이 곳에 넘치는 게 환자고, 내가 지금까지 성녀의 일을 하면서 계속해서 봐 온 것이 환자들이다. 새삼 거리낄 이유도 없었다.

그가 들것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

거리가 무척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인지 그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뭐, 뭘 하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상처에 손을 가까이 대었을 뿐이다. 그가 움찔했지만, 나는 상처 부위에 닿기 전에 손을 살짝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전번에 리미에를 시켜서 마비를 치료한 적은 있지만, 아예 없어진 손을 다시 재생시키는 것에는 커다란 힘이 들었다.

그게 설령 아무리 상급 정령사인 나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정령들을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치료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좀 힘들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보지는 않았지만 내 눈앞에서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을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안에 있던 빛의 힘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내 힘이 집중된 군인의 팔과 하반신이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이미 없어진 것이 되었던 팔이 재생되어 가고, 상처가 낫고 있었다.

귀족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직접 내 힘을 받고 있는 사람만큼 가장 놀란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모든 팔이 재생되었다. 황금색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움, 움직여. 팔이…… 다시…….”

그가 더 이상 반항할 기색이 보이지 않기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한번 일어나 보세요.”

그러자 그는 홀린 듯이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버둥거리기만 했던 그였지만, 그는 처음으로 다리를 움직여 들것 위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치료는 모두 끝났어요. 다시 다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하지 않은 말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술도 끊고요.”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담히 다른 환자들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직도 남은 환자들이 많아서 모두 치료하려면 오늘 하루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 나는 순간 휘청이고 말았다.

‘……윽, 역시 너무 힘을 많이 부은 걸까.’

첫 번째 환자의 부상이 너무 컸던 탓도 있고, 오래간만에 힘을 많이 썼더니 어지러웠다. 그때였다. 나를 강하게 잡아 주는 손길이 있었다. 나는 어떠한 단단한 품에 기대고 말았다.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은 짧고 무뚝뚝했지만, 품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나를 잡아 지탱해 준 것은 룬 님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내가 얼떨떨하게 감사 인사를 하자, 후드를 쓰고 있던 룬 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차, 창피해서 그래.’

멋지게 치료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마무리에서 휘청거려서 창피한 거다. 그래, 그뿐이다.

‘게다가 룬 님 앞에서 치료술을 자랑하다니.’

나는 힐긋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평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의 앞에서 성녀랍시고 치료술을 행하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묘하게 홀 안이 조용했던 것이다. 나는 의아해서 홀 안을 쭉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했나?’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큰일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설마. 환자를 묶은 것 때문에 그런가?’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이 찔려 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가 난동을 부렸을 거라고. 의료 행위를 하기 위해서 당연한 절차였어.’

그렇게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한 곳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냐였다. 그녀는 그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녀의 생기 어린 얼굴이었다.

“역시 아이샤 님이세요! 너무 대단하셔요!”

‘……응?’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깜빡하고 말았다. 그때였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 대단하십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찬사가 담겨 있었다. 몇몇은 아예 눈물까지 흘릴 기세였다.

‘어, 어라?’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내가 환자를 거칠게 대해서 다들 이상하게 보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실려 있는 것은 나를 향한 존경심뿐이었다. 진심으로 다들 내가 행한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쿵!

내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내가 방금 치료해 주었던 군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녀님!”

그는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말했다.

“아무리 이제 다 나았다고 해도 그렇게 몸을 함부로 다루면 위험해요.”

하지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세게 내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는…… 저는……!”

그는 말을 못 잇고 나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 알 수 없는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아직도 아픈 곳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요?”

내 말에 그는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미 저는 성녀님의 은총으로 모두 나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 왜 이렇게 우는 건가요.”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까도 울더니, 은근히 눈물이 헤픈 군인이다. 아직 취해 있어서 그런가? 그런데 이제는 그가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께 감히 함부로 말했던 것을 참회하고 있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저를 위해 그토록 깊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군인은 내게 못된 말을 했던 것이 마음에 찔렸던 모양이었다. 눈물을 흘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군인이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아프면 예민해지는 건 누구라도 당연한 일이죠.”

감기에만 걸려도 기분이 안 좋아지는데, 팔을 잃은 데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이 군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나에게 무례했던 환자들이 한두 명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녀라 불리는 내 능력을 의심하고 깎아내리기 위해서 찾아왔었다.

물론 그럼에도 모든 병이 나았을 때, 그들은 기뻐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을 믿게 되기도 하고, 가족과의 불화가 사라지거나 새 삶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 뿐인데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다. 나를 믿지 못하는 환자를 만나도, 치료가 끝나고 그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하, 하지만……!”

군인이 머뭇거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길래 나한테 그랬을까, 라고 생각하는걸요.”

그 말은 군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홀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이다.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제, 제 이름은 요한 디오스라고 합니다! 디오스 가문의 장남으로,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성녀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울면서 말했다.

“이 다시 찾은 목숨, 성녀님을 위해 평생 바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는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부디 성녀님을 돕게 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에 나는 도움을 구하듯 홀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곤란한 나와는 다르게, 어째서인지 홀 안은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엘미르 귀족들은 더했다.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른 호위 기사가 방법을 알려 줄 거예요.”

나는 호위 기사 중 한 명에게 그를 맡겼다. 아마 그가 알아서 요한에게 방법을 알려 줄 것이다. 그가 은혜를 갚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아마 리오텐에 있는 동안 내 호위가 되어 주지 않을까?

아무튼간, 요한과의 일을 마무리지은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나에게 은근히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리오텐 귀족들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을 피부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저희들도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나에게 말했다.

“감히 성녀님의 힘을 의심한 것, 그리고 성녀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간과한 것 말입니다.”

리오텐 귀족들은 앞다투어 사과했다. 그것을 보는 엘미르 귀족들의 얼굴은 무척 자부심에 넘치고 있었다. ‘그것 보라지!’라는 듯한 얼굴로 리오텐 대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황녀 전하의 기적을 보면 누구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지요.”

내 호위 기사 한 명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눈을 굴렸다.

‘생각보다 나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기적이라고 띄워지기에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만 말이다.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사이, 무언가 웅성거리고 있던 리오텐 대신들이 고개를 들었다.

“황녀 전하.”

“네?”

그 진지한 얼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돌보시는 성녀님, 그 소문이 헛것이 아니었군요.”

“성녀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회담에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얼굴은 저절로 환하게 펴졌다.

“다행이에요.”

미냐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 이상 성녀님의 치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까까지 나의 실력을 시험하려 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들은 이런 말을 했다.

“성녀님을 믿겠습니다. 성녀님이라면, 그 간악한 이덴베르의 총사령관이라도 감화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무아지경으로 신관들과 함께 군인들의 상처를 돌보았다. 허리를 펼 때쯤에는 벌써 저녁 때였다.

리오텐 사람들은 나를 대접하겠다고 거창한 저녁을 차리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말렸다. 전쟁 때이니만큼 물자가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아무것도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주어진 개인 방의 테라스에 선 나는 허공에 한숨을 흘려보냈다.

‘……아르센.’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센은 밤의 검은 장막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과 별빛 같은 은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십몇 년 전, 청년이던 그의 얼굴밖에 없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나도 지나 버린 것이다. 순수하던 청년이 변해 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지 모르지.

현실은 현실이다. 그가 변해 버린 것도, 이 전쟁이 일어난 것도…… 그리고 이제 내가 그와 적이 되어 버린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그저 이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문득, 이러한 생각도 들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아.’

그에게 알리사였던 내 과거를 밝히고, 옛친구의 자비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가 설령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 정도는 꺼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불안이 혼란하게 뒤섞였다. 오늘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은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 * *

이튿날, 내 얼굴이 너무 좋지 않았던 탓일까. 엘미르의 총사령관인 벨트모어 공작이 나에게 물었다.

“얼굴색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그를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들인 비온 공자가 떠올랐다. 단순히 겉모습만 닮은 게 아니라, 무뚝뚝한 태도 아래에 배려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 두 사람은 닮았다.

“괜찮아요.”

나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엘미르 사람들을 위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벨트모어 공작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쉬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제부터 계속 치료를 하느라 무척 힘이 드실 텐데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아요.”

나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비온이 황녀 전하의 걱정을 무척 하더군요.”

“비온 공자가요?”

“예.”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하긴, 그와 내가 데면데면한 사이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오라버니의 친구였던데다가 여러 번 만났으니만큼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돌아가면 그에게 무사한 모습을 꼭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환자들이 홀에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홀 안에는 어제처럼 시험하듯 보는 것은 아니지만, 호기심에 나를 지켜 보고 있는 대신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상급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루디온, 나와 주렴.”

순간적으로 빛이 폭사하며 공중에서 나의 정령이 등장했다. 홀 안에서 소환된 루디온은 그 날개를 다 펼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거의 성인만 한 크기의 황금 새는 엄청난 박력을 풍기고 있었다.

“오오오오!”

“저것이 바로 황녀 전하의 정령!”

“아름다운 데다가 신성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정령을 처음 보는 그들로는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루디온을 내 어깨에 내려앉게 했다.

그가 발톱으로 나를 단단히 잡았다. 날이 서 있지 않기에 아프지는 않았고, 다만 그가 가진 따스함이 나에게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루디온에게 부탁해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자, 이제 사람들은 숫제 열광하기 시작했다.

“믿습니다! 황녀 전하!”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제부터 바뀐 분위기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리오텐 공국 사람들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고, 엘미르 귀족들은 굉장히 뿌듯한 얼굴이었다.

마치 ‘그것 봐, 당신도 우리 황녀 전하를 찬양하게 될 줄 알았다니까!’라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황궁에 있는 우리 가족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성녀라는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함부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기에, 성녀는 어딜 가더라도 신을 믿는 국가라면 대접을 받고 신용을 얻을 수 있다. 이덴베르 제국에서도 복수와 달의 신인 셀레나를 믿고 있으니, 서로 교파는 다르더라도 성녀라는 이름의 힘은 통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어느새 회담 날짜가 가까워졌다.

* * *

회담 장소는 이덴베르 군과 리오텐 군이 서로 막사를 만든 곳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워텔 지방의 성이라고 했다.

최소한의 인원이 만나기로 했지만, 호위 기사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무려 우리 쪽 총사령관인 벨트모어 공작의 호위와 더불어 최정예 기사들의 호위를 받게 되었다. 혹시 몰라 신관들과 룬 님까지 같이 일행에 따라왔던 탓에, 다칠 일은 절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호위 무리, 리오텐의 수뇌부는 새벽부터 워텔 지방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워낙 새벽인데다가 마차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졸릴 만도 했지만, 나는 한숨도 붙일 수가 없었다.

이 길의 끝에는 이덴베르 군들이 있다. 그리고…….

‘아르센이 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심장 언저리에 얹었다. 불안인지, 긴장일지 모를 감정 때문에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거의 13년 전이었다. 그가 얼마나 변해 있을까. 그리고 그가 과연 내 말을 들어 줄까. 갖은 생각들로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길을 갔을까. 워텔 지방의 성에 도착한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성의 영주는 이미 우리 전에 온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 지방은 사방이 뚫려 있는 초원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군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부를 따끔하게 하는 적의까지도 말이다. 먼저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덴베르 군인들은 우리에게 적의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나이가 많은 군인일수록 더했다. 엘미르 제국과 오랫동안 앙숙 관계였던 세월이 길기 때문이리라.

그쪽에서 적의의 눈빛을 보내오자, 이쪽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나의 호위 기사들은 내 앞을 지키듯이 가려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서 있었다. 결코 이덴베르 앞에서 떨거나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덴베르 측의 수뇌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여섯쯤 되는 그들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잠깐 눈을 떨고 말았다.

그는 갑옷과 한 쌍으로 맞춘 투구를 한쪽 팔에 끼고 있었다.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가 투구를 벗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결 좋던 검은 머리카락은 조금 상한 듯싶었고, 목 아래로 뎅겅 잘려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듯하던 은회색 눈동자는 이제 빛바랜 잿빛이었다. 갑옷 아래에 로브를 입은 것은 총사령관이자 마법사인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어 주는 것만 같았다.

아르센이었다. 무려 13년 만에 만나는.

내가 그의 모습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그쪽도 눈치채었음이 틀림없으리라.

한순간 나와 아르센의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다음, 다른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산스럽게 막사에 들어갈 준비를 했기 때문에 우리 둘의 시선은 끊기고 말았다.

나는 팔을 쓸었다. 아주 잠깐 마주친 것만으로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정말 변해 버렸구나.’

나는 쓰게 웃었다. 그의 눈빛이 옛날과는 전혀 달랐다. 나를 보는 눈빛도 그저 무기질한 것을 바라보듯 무심할 뿐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감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들어가게 된 회의실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밝았다.

거대한 테이블과 의자들이 정렬되어 있는 가운데, 상석에 있는 의자가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보통 계약이나 협정을 맺게 될 때 신관이 앉곤 하는 그 자리. 그곳이 바로 나의 자리였다.

그 위에 앉으며 나는 숨을 죽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곤 노력했으나 긴장이 저절로 되었던 탓이다. 제3국의 사람인 내가 중립을 서서 평화 협정을 중재를 맡기로 했다. 이 점은 미리 전해 둔 터라 이덴베르 쪽에서도 큰 불만은 없는 듯했다.

이윽고 리오텐의 수뇌부, 그리고 이덴베르의 수뇌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방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첫 번째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먼저 리오텐 측에서 입을 열었다.

“우리 리오텐에서는 이덴베르와의 종전과 평화 협정을 원합니다. 수많은 도발과 전투를 참아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리오텐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자, 이덴베르 측에서도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이덴베르 측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가 있지?”

이덴베르 측의 말을 해석하는 리오텐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반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전해 주자 리오텐 사람들도 불쾌해진 듯했으나 대제국의 수뇌부인 이덴베르 사람들을 굳이 자극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일단 리오텐의 조건은…….”

리오텐의 수뇌부가 줄줄이 조건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을 듣던 이덴베르 측 사람이 말을 가차 없이 끊어 버렸다.

“우리 쪽의 조건은 이렇다.”

“……?”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리오텐의 공자를 볼모로 보내도록 해라.”

그 순간 회의장에는 싸늘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공물과 볼모를 보내라고? 그건 완전히 속국이 되라는 의미 아닌가. 그 어마어마한 언사에 리오텐 사람들 또한 분노한 듯했다.

“그, 그 무슨!”

“볼모를 보내라니! 어찌 그런!”

하지만 이덴베르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조건을 정하고 온 듯했다. 이덴베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는 그들이 작은 소리로 리오텐 사람들을 비웃는 속어들도 들을 수가 있었다.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회의는 금세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뭐라 말해도 이덴베르는 이 조건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르센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마치 도움을 구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 변하지 않은 냉막한 얼굴로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말이다. 이덴베르에게 협상의 의지가 없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만 회의는 끝내는 게 좋겠군요.”

리오텐 사람들이 반쯤은 분노하고, 반쯤은 절망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 않습니까!”

“이래서야 왜 회담을 받아들인 것인지……!!”

그제야, 아무 말도 없었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묵직했다.

“회담을 받아들인 건 공물과 볼모에 대한 조건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어, 어찌 그리 오만한!”

“하지만 역시 이런 자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 똑똑히 들어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는 나도 모르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평화 협상처럼 하품 나오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만약 평화를 원한다면…….”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차라리 이덴베르의 속국이 되도록.”

통역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통역했다. 그러자 리오텐 사람들은 분노에 차서 모두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붉어져 있었고, 아르센에게 삿대질이라도 할 듯했다. 이덴베르 측의 눈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안 돼!’

나는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잠깐만요!”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덴베르어였다. 순간적으로, 나도 내가 한 말에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14년 동안 이덴베르의 황녀로 산 기억이 있답시고, 이덴베르어를 다시 들으니 몸에서 자연스럽게 이덴베르어가 흘러나오는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그래도 잘된 일이었다. 굳이 통역을 거칠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 매끄러운 이덴베르어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잠깐, 둘이서만 얘기를 할 수 없을까요?”

아르센이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덴베르어에 매우 능숙하군. 황녀로서의 교양인가?”

“……잠깐만이라도 좋습니다.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무리 아르센이 변했다고 한들, 그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말했듯 엘미르의 황녀이자 성녀인 나를 건드릴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굳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실 생각은 없나요? 적어도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의 냉막한 눈에 얄팍한 흥미가 떠올랐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나는 리오텐과 엘미르 사람들에게 몸을 돌렸다. 이덴베르어를 알아들었는지, 벨트모어 공작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녀 전하, 아무리 그러셔도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은 위험하십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 단둘이서 말씀이십니까?”

“성녀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들 너무 지금 과열되어 있어요. 조금 머리를 식히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회담은 내일도, 모레도 남아 있잖아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진정하도록 하세요.”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도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는 자각한 모양이었다.

“안 됩니다. 황녀 전하. 너무 위험합니다.”

다만, 내 안위를 걱정한 벨트모어 공작만큼은 여전히 강경했다.

‘……어쩔 수 없지.’

방 안을 살펴보던 나는 룬 님을 향해 물었다.

“룬 신관님. 잠깐만 남아서 제 호위를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속세에 귀속되지 않은 신관이 남는다면 이덴베르 총사령관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되어요.”

룬 님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벨트모어 공작은 내가 혼자 남겠다고 했을 때보다는 훨씬 안심한 표정이었다. 룬 님이 대신관님에 필적하는 신성력을 가진 것도 유명한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룬 님을 제외한 신관들과 귀족들이 모두 나갔다. 이윽고 막사에는 나와 룬 님, 그리고 아르센 만이 남게 되었다. 내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막사 안에는 길디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로스토프 공작.”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아르센으로 부를 수 없다. 그는 나를 힐긋 돌아보았다.

“아이샤 드 엘미르.”

그가 내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별. 성녀님이 이곳에 강림하셨군.”

그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비웃는 것일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정상 회담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했다. 내 의례적인 인사말에 그가 나를 냉막하게 바라보았다.

“무엇이 됐던 짧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요.”

곁눈질하니 룬 님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내 전생에 대해서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룬 님을 더 믿을 수가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리오텐 공국에서 물러가 주세요.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투로 지금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

“그런 이야기라면 아까 리오텐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칼처럼 내 말을 잘라 내었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쪽에서도 본론으로 나온다면, 나도 앞뒤 따지지 않고 말할 뿐이었다.

“……리오텐은 희생양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덴베르가 노리는 것은 라이벌인 이 엘미르 제국일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절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 잠깐 이채가 떠올랐다.

“이덴베르가 리오텐은 물론, 엘미르를 집어삼키려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성녀로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 회담에 참석했나 보군.”

“물론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나는 내가 보았던 전쟁터의 풍경을 생각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진심입니다.”

“대단하신 성녀님 나셨군. 하지만 이덴베르는 물론이고, 나도 이 전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그가 나를 비웃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글쎄, 어린 황녀 전하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덴베르 내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거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예전 그의 모습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의문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원래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가 리오텐 전쟁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었지? 어째서 전쟁 따위에 참석하게 된 것일까.’

그는 본디 욕심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가 권력을 탐한다? 책만 있으면 행복하게 웃던 그가 전쟁에 나서서 직접 사람들의 목을 베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십몇 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라지만 말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도,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요.”

“……?”

한순간, 그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스쳐지나갔다.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군.”

“당연히 알고 있지요. 아니, 알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그가 믿어 줄까. 아니, 믿지 못하더라도 나는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에게 나는 내가 알리사였음을 말할 생각이었다. 이제 막 만난 그에게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언제 다시 헤어질지 모르는 데다가, 다시는 이렇게 일 대 일로 대화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적당한 때를 가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전생에 알리사였으니까.”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과거의 너는 그렇지 않았잖아. 어째서 총사령관이 된 거지? 이런 학살에 너는 어울리지 않아.”

이번 아이샤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나는 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것은 전생에 가까이 지냈던 아르센의 영향이 컸다. 항상 그는 연구와 논문에 몰두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이 멋졌다.

그래서 한 번쯤은 그와 같은 삶을 살아 보고 싶다고 몰래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만난 그는 깃펜 대신에 검을, 사람을 살리는 마법보다는 죽이는 마법을 쓰고 있었다.

그 차이가 더할 나위 없이 슬펐다. 우리 둘 사이에는 소름 끼치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믿어 줄까?’

나와 그, 서로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믿어 줘, 제발.’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믿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단숨에 믿은 것이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알리사’였다는 것을 믿어 주길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구나. 그랬기 때문에 아르센을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했던 거구나.

그 예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던 1살짜리 아기 때와는 달랐다. 나는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로 제4황녀 알리사 델 이덴베르의 삶을 살았어.”

긴장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증명할 수도 있어. 그때 같이 보냈던 시간을 모두 기억하니까. 오직 알리사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을 뭐든지 대답할게. 그러니까…….”

“…….”

“나를 믿어 줘…….”

나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드디어 그가 입을 천천히 여는 것이 보였다.

“…….”

하지만 그 입은 이내 닫혀 버리고 말았다. 대신 그는 싸늘한 비웃음을 입가에 매달았을 뿐이다.

“……그런 흉내를 내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았나?”

“……!”

그의 말에 나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 아르센.”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이제는 아무에게도 허락한 일이 없는 이름이니.”

그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미, 믿어 줘. 적어도 억울하게 죽었던 내 이름을 기억한다면……!”

“과연,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조사는 아주 열심히 한 모양이군.”

그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알리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 그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설마 그녀의 이름을 사칭할 줄이야. 그녀는 폐위된 황족. 이덴베르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 공식 석상에서도 그녀의 기록을 삭제해 버렸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이 그녀이지. 그런데 그 이름을 사칭할 발상을 하다니.”

“그, 건…….”

“게다가 네가 알리사였다고? 그건 결코 이름만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그녀와 한때 친구였음을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그가 위험스럽게 눈을 번뜩였다.

“적어도 엘미르의 정보력 하나만큼은 칭찬해도 되겠군.”

“……나는…….”

그가 오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기록에서 삭제되었다곤 하나 그 이전에 알리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당연히 엘미르에도 그 정보가 흘러들어 왔기 마련이다. 예전에 이시스 오라버니가 ‘알리사’의 이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알리사이기 때문이다. 그게 나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점점 화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내가 알리사의 이름을 들먹였을 때부터 그는 화가 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째서 아무 말도 못 하지?”

“……나는…….”

“어서 대답해 봐.”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그 큰 키로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결국 막사의 끝까지 닿은 나는 내 등 뒤에 있는 천의 감촉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이 내 턱을 잡았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나는 그의 잿빛 눈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매우 탁하고, 거친 눈빛이었다. 이윽고 그의 손이 목 아래로 내려갔다.

“……!!!”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은 스스로도 알 수가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궁금하군.”

“…….”

그는 나의 목을 큰 손으로 잡고 있었다. 꽤나 세게 잡혔지만, 그의 분위기에 나는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면, 전쟁이 시작되나?”

그리고 그때였다. 소리도 없이 ‘그’가 다가와 아르센의 손을 내친 것은.

그 손의 주인공은 내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룬 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존재를 잊고 있기도 했고,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룬 님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합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덴베르어였다. 그가 만약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고 있다고 한들 나는 놀라지 않았으리라.

“…….”

아르센은 룬 님에게 채인 손을 한번 쓸고 있었다. 가벼운 접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손은 붉어져 있었다. 그 얼얼한 고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르센은 조금 냉정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에게 알리사란 어떤 의미인 것일까. 어째서 내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것에 이토록 분노하는가. 만약 내가 그에게 하나의 의미라도 갖고 있다면…… 어째서 그는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아르센.”

내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무래도 엘미르의 황녀는 정신이 이상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으면 세뇌라도 당해서 자신이 이덴베르의 황녀였다고 믿게 된 모양이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도무지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돌연, 그가 화살을 룬 님께 던졌다.

“안 그런가? 신관, 너는 전생 따위를 믿는가?”

분명 아르센은 내 말을 비웃으려는 의도로 말을 건넨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룬 님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믿습니다. 그것이 황녀 전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간 나는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동시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아르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녀뿐만이 아니라 신관까지 정신이 이상한 자군. 시간 낭비였어.”

고개를 젓던 그가 그대로 방을 나설 듯하기에, 나는 서둘러 그에게 외쳤다.

“잠깐, 내가 알리사였다는 증거를 보여 주겠어.”

단 하나지만, 그에게 보여 줄 증거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멈칫한 것이 보였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빠르게 이었다.

“만약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밤에 나오도록 해. 내가 정령을 보낼 테니.”

“알리사라는 이름을 팔아 동정심이라도 유도해 볼 생각인가.”

“난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든 써 보자고 생각했을 뿐이야. 너를 설득하기 위해서. 뭐가 나쁘지?”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너는.”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였다. 그에게 더 이상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음을.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나는 의문을 숨기지 않고 직접 물었다.

“너는 어째서 총사령관이 된 거지? 그리고 이덴베르 안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것은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

나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혼란과 동시에 두려움이 미약하게 숨어 있었다.

“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

“내가 살아 있다는 게, 기쁘지 않아? 믿기 힘든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아르센이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냉정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나는 문득 울컥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심장이 세게 뛰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만약 이덴베르와 리오텐, 나아가 엘미르의 평화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부디 시간을 비워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말씀하신 대로, 아직 회담은 내일과 모레에도 남아 있으니까요.”

내 사무적인 말투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감정이 더 폭발하여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전에, 나는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목깃을 올려 그가 내 목에 남긴 자국을 숨겼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물었다.

“황녀 전하, 어떻게 되었습니까.”

벨트모어 공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리오텐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나를 격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녀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이만 방으로 돌아가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일 회담도 남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방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룬 님과 단둘이서 걷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방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방문 앞에서 나는 퍼뜩 고개를 들고 말았다.

“……아.”

그는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 전에 한 얘기는…….”

아직 룬 님께 전생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약간 망설이고 말았다. 전생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도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목덜미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룬 님 특유의 치유력이었다.

“다친 곳은 괜찮은가.”

“……그게…….”

룬 님의 치유력이 내 목의 상처를 깔끔하게 지워내 주었다.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털어놓을 필요 없다. 다만…….”

“……다만?”

“나는 걱정이 되는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쉬어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 나는 아르센에 대한 생각을 했다. 아르센에게 증거로 내밀기로 한 것은 ‘마법의 맹세’였다.

마법의 맹세. 그것은 고위 마법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법이다. 그만큼 유명한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맹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법사 혹은 마력을 이용하는 정령사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호 맹세를 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맹세를 한 사람은 그 맹세를 어기는 순간,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마력을 빼앗기게 된다. 당연히 마법사는 물론, 정령사들이라도 한순간에 자신의 힘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력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거의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기사의 맹세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맹세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내가 알리사임을 맹세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겠지.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 보기로 했으니까.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 * *

식사도 거른 나는 밤이 되자, 방 안에서 조용히 리미에의 이름을 불렀다.

“리미에.”

그러자 그녀가 어두운 방 안을 밝히며 등장했다.

“부르셨나요, 주인님?”

“응. 부탁이 있어. 저 반대 진영에 있는 아르센이란 사람에게 몰래 찾아가서 나오라고 해 줘. 그는 가장 큰 막사에 있을 테니 아마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리미에는 고개를 끄덕이곤, 포르르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아르센의 대답을 들고 찾아왔다.

“여기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에 나는 뛸 듯이 기뻐지고 말았다. 그가 적어도 나와 대화를 할 생각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무되었던 것이다.

“응, 응!”

나는 재빨리 창문을 열고 리미에의 힘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깊은 밤이었다. 몇몇은 불침번을 서고 있었지만, 시종들이나 시녀들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리미에를 타고 조용히 날아간다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리미에의 힘으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한 사람― 아니, 한 존재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룬 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다가, 입을 탁 막고 말았다.

“……어, 어쩐 일로.”

그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에 대었다.

“따라가겠다.”

“네? 하, 하지만…….”

나는 우물쭈물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황금색 눈으로 나를 고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걱정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쉿, 가까이 오도록.”

내가 얼떨떨해하고 있는데,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알 수 없는 장막 비슷한 것을 둘렀다.

“……이건 뭔가요?”

내가 묻자, 그는 그림자의 장막을 둘러 빛을 차단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장막 안의 사람을 볼 수가 없다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것도 가능하군요.”

하지만 내 반응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일일 테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룬 님과 함께 루디온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어라?’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분명히 룬 님이랑 같이 갈 생각이 없었는데, 어쩐지 물 흐르듯이 같이 아르센에게 향하고 있었다.

‘…….’

나는 룬 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룬 님은 무언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루디온은 무척이나 빨랐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룬 님은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미에가 전해 준 말대로, 그는 오직 혼자 있었다. 마법사의 푸른 로브를 둘러쓰고 공터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째서일까,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룬 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야에 닿는 거리이니만큼 그 정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르센을 향해 다가갔다. 달이 우리 사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센 로스토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문득 나는 옛날의 추억에 잠겨 들고 말았다. 아르센, 그를 부르면 그가 나를 향해 알리사라고 대답하던 시절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알리사라고 불러 주기를.

하지만 현실은 냉정할 뿐이었다. 나를 본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엘미르 황녀.”

그 순간 추억은 와장창 깨졌다. 나는 감상에서 벗어나 사무적인 태도로 그 앞에 섰다.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했지.”

“……맞아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마법의 맹세를 하고 싶습니다.”

“마법의 맹세라.”

그의 눈에 잠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당신처럼 고위급 마법사라면 모를 리가 없겠지요. 마법의 맹세를 하고 거짓말을 하거나, 맹세를 깨면 그 상대가 마력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그 맹세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마법의 맹세를 걸어요. 맹세는 ‘이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그가 만약에 나에게 마법의 맹세를 건다면, 그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 줌의 거짓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게 네가 생각한 증거인가?”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저는 바로 마력을 빼앗기지요. 정령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형벌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어요.”

나는 두 손을 벌렸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칫하면 내 모든 힘을 잃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당당한 태도에, 그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맹세를 걸 생각은커녕, 서 있기만 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이 맹세마저도 믿을 수 없는 것인가요?”

나는 정령사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정령의 힘을 잃어버리면 성녀라는 직위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복수도, 정령왕을 소환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거의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미적지근할 뿐이었다. 그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딴소리를 꺼내었다.

“아까 막사로 돌아가서 리오텐 측의 제안을 생각해 보았다.”

“……?”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확하지. 이덴베르 군이 모두 리오텐에서 물러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맞아요.”

그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의 잿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원하는 것……?”

“그래, 리오텐이 전쟁에서 지면 엘미르에게도 그 여파가 갈 테니까 그것을 막는 것인가? 아니면 이덴베르와 엘미르가 평화 협정을 지속하는 것인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슷하지만, 달라요.”

그의 앞에서 나는 진실만을 털어놓기로 다짐했다. 그래야 그가 내 진심을 믿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이시스 오라버니에게만 털어놓은 것을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스산한 밤바람이 불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덴베르 황족들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샤로서, 나는 이전에 이덴베르 황족들에 의해 독살당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

“그 독은 황태자였던 오라버니를 겨냥했던 것이고, 오라버니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저는 그런 짓을 벌인 이덴베르 황족들을 끔찍하게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덴베르 황족들과 풀지 못한 일도 있었다. 아직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풀지 못한 의문은 십몇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계속 가슴속에서 사무치고 있었다.

어째서 전생의 가족들은 나를 그렇게 믿지 못했던 것일까? 재판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급작스러웠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보여 주었던 붉은 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그것은 아마 이덴베르 황족들과 직접 접촉해야지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라버니께서는 자신께서 당한 일도 있으시고, 저를 위해서라도 전쟁을 불사하실 생각이지요.”

“…….”

“이덴베르를 제 앞에 무릎 꿇리기 위해, 그리고 황족들을 심판하기 위해.”

나는 다시 눈앞의 아르센을 강하게 쏘아보았다.

“이덴베르의 황제가 엘미르 침공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전쟁도 말리고 싶어요.”

“그건 아마 불가능할 거다.”

“알아요.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할 수 있는 일…… 리오텐의 전쟁이라도 말리고 싶어요. 그들이 그저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모든 말을 쏟아내자 숨이 약간 가빠졌다. 그는 아직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알리사가 아니다.”

나는 그 말에 쓰게 웃고 말았다.

“아직도 그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제 충분히 알았다. 나도 인정해야겠지. 그에게 더 이상 옛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단 것을.

과거의 모습을 그에게서 계속 찾고 싶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제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도 되었다.

다만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에게 있어 알리사라는 이름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을 것인가다. 그가 나를 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알리사는 이미 죽었으니까.”

“…….”

그 말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다. 이미 알리사가 죽은 것은 단단한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너와 나의 적이 똑같다는 사실만은 믿어 주지.”

“……?”

그의 말에 나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당신과 나의 적……?”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힘을 길러 이덴베르에서 입지를 넓일 것이다. 웬만한 귀족들 그 이상, 거의 황족에 버금가도록 말이다.”

그가 입지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은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리고 힘을 기르게 되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5황녀, 마리안느의 심판을 할 것이다.”

“……뭐, 뭐라고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갈라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어째서 마리안느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거지?

“어, 어째서?”

내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알리사의 죽음을 조종한 것이 그녀, 마리안느이기 때문이지.”

“……!!!”

나는 순간 호흡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피가 온몸에서 싸악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죽음을 조종한 것이…… 마리안느?”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이 쉽게 믿겼다. 나의 죽음이 너무나도 갑작스럽다는 사실은 항상 생각했던 것이었다. 배후에서 내 죽음을 조종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부터, 아니 티타임을 했을 때부터 마리안느는 이상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던 것일까?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녀가 감옥에서 나를 만나러 왔던 거구나.’

마리안느는 자신의 계획대로 죽어 가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리라.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붉은 눈은 대체 뭐였지……?”

“뭐라고?”

내 혼잣말에 아르센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주춤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마리안느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단순히 잘못 보았겠거니 생각했지만…….”

“붉은 눈을 보았다고?”

그가 내 말을 끊었다.

“예.”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당신도 본 적이 있나요? 그 붉은 눈을.”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떨리는 눈에서 그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둘의 사이에는 침묵이 놓였다.

“……그걸 알고 있다니 이야기는 더 빠르겠군.”

그가 말을 꺼냈다.

“나는 마리안느가 범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죽임으로써…….”

그의 말은 마치 선고 같았다.

“알리사의 복수를 이룰 것이다.”

나는 급히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의 잿빛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지언정, 설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피바다인 전쟁에 출전하는 일이 될지언정.”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복수를?”

“그래.”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한참이나 입을 달싹거렸다.

‘나를 위해서?’

십몇 년. 내가 죽은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르센은 너무나도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변해 버린 사실이 슬펐다. 더 이상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았기에.

하지만…….

그가 변해 버린 이유는 나 때문이었구나.

‘아르센…….’

나는 문득 가슴을 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장장 14년 동안 이 착하고 무른 친구는 내 죽음에 슬퍼했겠지. 그리고 무디어져 갔으리라.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이라는 어두운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뭐라도 말해야 했다. 아르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만약 당신의 목적이 그렇다면, 협력하겠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당신도 나를 믿고 이야기해 준 게 아닌가요? 믿을 수 없는 건 오히려 제 쪽이에요. 당신은 이덴베르 귀족이니, 황족을 파멸시키고자 한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건 어려운 이야기지요.”

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

“믿어요.”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혹여나 그가 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오텐에서 물러가 주세요.”

나는 달밤의 마력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대신 약속할게요. 이덴베르의 황족이 당신의 목표라면, 우리는 같은 배를 탄 거예요. 당신과 협력하며 복수를 이루겠다고 맹세할게요.”

“…….”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

그가 처음으로 내 말을 믿어 주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엘미르 황족에게 빚을 하나 달아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그가 나를 믿어 주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알리사라는 것도 맹세할 수 있어요.”

내 말에 그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뛰어난 마법사인 그라면 마법의 맹세를 거는 것쯤은 간단할 텐데, 나에게 맹세를 걸지 않는다.

“그 말은 믿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마법을 걸 가치도 없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비웃었다. 그러던 그가 문득, 머뭇거렸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와 평원의 풀들을 눕혔다. 처음이었다. 다시 만난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것은.

“하지만 네가 그토록 알리사의 이름을 대고 싶어 하니…… 속는 셈 치고, 단 하나만 궁금한 것을 묻도록 하지.”

“……그건 뭔가요?”

그의 달싹거리는 입술은 이윽고 하나의 말을 만들어 내었다.

“……알리사는…….”

“…….”

“다시 태어나서, 행복했나?”

아, 그의 질문에 나는 그 순간 그와 함께 달리던 황궁 숲의 환영을 보았다. 밤은 사라지고 낮이 되었다. 가을은 물러가고 봄이 찾아왔다.

내 주위에는 온통 초록빛이 가득하고 봄의 햇살이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가 부르던 내 이름이 얼마나 좋았던가.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활짝 웃었었다. 그에게로 뛰어가던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었다. 그도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얼마나 그곳, 그 시간이 아름다웠는지.

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 이곳, 아이샤로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로 태어나서 갖게 된 모든 기억들이 내 머릿속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둡고 외로웠던, 아무도 믿지 못했던 과거. 그리고 새롭게 가족들과 정령들, 친구들과 루미나스 님을 만나서 점점 밝아졌던 나의 세계.

“응.”

나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소년의 마지막 한 자락을 엿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

“고마웠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알리사였을 때에는 미처 말하지 못했던,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와 나는 짧은 순간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이상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웃는 것을 너무 하지 않아서 웃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

나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더욱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알리사가 아닌 아이샤이고, 이만 떠나 나의 진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덴베르에게는 잘 말해 놓지.”

“…….”

그것이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떠나는 것을 망설였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

내 말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몸을 돌린 순간, 눈물이 고여 뚝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내 복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어렸을 적 독을 먹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7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는 끝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였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저 아르센과 헤어진 채로, 발길 닿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을 뿐이었다.

진영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는 있었지만, 돌아갈 방법조차 까먹은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물음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오텐 공국의 전쟁을 말렸지만, 엘미르와 이덴베르가 언젠가 격돌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아니,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알리사였나? 혹은 아이샤인가? 길고 어두운 새벽 속에서 나는 정처 없이 걸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좋았다. 내 앞에는 어느새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룬 님.”

홀린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마치 나에게 ‘진정하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특유의 황금색 눈이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은가.”

“……아.”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세월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그라면 내 고민에도 해답을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려 했을 때 그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일 것이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울고 있군.”

“…….”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앞에서 이런 어두운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가 옷자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던 것이다.

“울지 말아라.”

그의 신관복 소매가 나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루, 룬 님!”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러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덕분에 내 눈의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다. 혹시 룬 님은 이런 충격 요법을 노리신 걸까?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울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유달리 부드러운 듯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러 갈까.”

“기분 전환이요?”

“그래, 리오텐에 오면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에 나는 방금까지 울고 있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건가요?”

이전에 나는 미냐와 함께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해도 내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아니, 설마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나는 그 두려운 상상을 얼른 털어 내어 버렸다. 대신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

하지만 룬 님 또한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대답하시기 싫은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정령왕님이니까 어떻게 아시는 방법이 있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넘겨 버리기로 했다.

“가 보고 싶어요. 바다.”

내 대답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가지.”

“지금이요?”

내가 깜짝 놀라자 그는 대답 대신 루디온을 소환해 보였다. 아, 그렇지. 루디온을 타고 간다면 바닷가에 금세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상으로도 그렇게 멀지 않았고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루디온의 등 뒤에 올라탔다. 룬 님도 그 뒤에 올라타자 루디온은 날개를 펼쳤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검은 하늘 위로 황금 새가 날기 시작했다. 루디온은 스스로 황금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내 아래로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우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탁 트인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은 무척이나 짜릿했다. 어느새 나는 울었던 것도 잊고 있었다.

얼마쯤 루디온을 타고 갔을까. 넓게 펼쳐졌던 산과 평야가 끝나고, 어느새 눈앞에는 검은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는데다가, 루디온이 일부러 인적 드문 곳에 온 탓도 있는 듯싶었다. 미냐가 항구 마을은 무척 북적인다고 했는데 이곳은 민가와는 거리가 있는 곳 같았다.

이윽고 루디온은 바다 앞에 나와 룬 님을 내려 주었다.

“다 왔나요?”

“그래.”

내가 묻자 룬 님은 짧게 대답하곤 먼저 내려왔다. 루디온의 황금색 깃털이 은은하게 빛을 밝혀 주었던 것도 있고, 어느새 아주 조금씩 동이 트기 시작한 탓도 있었기에 앞이 어느 정도 보였다.

나는 주저하며 루디온의 등에서 내려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발이 푹푹 빠져요!”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휘청이다 룬 님의 소맷자락을 살짝 잡고 말았다. 잡을 게 그것 말고는 없었던 탓이다.

“조심해라.”

“죄, 죄송해요!”

나는 얼른 제자리에 서려고 노력했다. 민망함이 가시자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호기심이었다.

“이게 모래사장이라는 거군요?”

아마 아침에 왔더라면 하얀 모래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걸음마를 처음 배워 본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은 푹푹 발이 빠지는 대신 무척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와.”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냐가 호수와 바다는 무척이나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바다처럼 광활한 대자연 앞에 서 있다 보면 내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 거대한 것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난생처음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미냐가 말했던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바다에 와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가 모래사장 위로 밀려왔다가 다시 뒤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바다…….”

어쩌면 나는 이 모습을 몇 시간 내내 보고 있을 수 있을 듯했다. 새벽 동이 점점 트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은 희끄무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검던 바다는 그 빛을 받아 우윳빛을 반사했다.

삽화나 풍경화로 보았던 바다와는 천지 차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일찍 바다를 보러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바닷물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물결이 내 손을 간지럽혔다.

“……차가워.”

바닷가의 바람과 물에서는 희미하게 짠내가 났다. 새벽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바닷바람은 원래 센 것인지 몸이 조금 떨렸다.

그러자 룬 님은 나를 위해 정령을 하나 소환해 내었다. 소환된 정령은 도마뱀처럼 생긴 주홍색 정령이었다. 나는 가끔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말도 여러 번 붙여 보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샐러맨더였던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기억해 줘서 기쁘다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룬 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님께서는 자신의 정령이 아니어도 불러낼 수가 있군요.”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루디온이나 리미에가 빛의 하급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령왕이 되면 다른 속성의 정령도 다룰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모든 원소는 극에서 극으로 통하지. 내가 빛을 다루기에 그림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정령왕들에게는 원소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빛을 빼앗으면 그림자를 덮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극과 극이 통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극에 도달한 존재가 정령왕이기 때문에 다른 원소들을 다룰 수 있는 것이고?’

아마 그런 뜻의 이야기인 듯했다. 나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룬 님 말고 다른 정령왕님들은 무얼 하시나요? 룬 님처럼 이렇게 인간계에서 돌아다니시는 분도 계시나요?”

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보통 계약하지 않은 정령들은 인간계에 오지 않는다.”

“정말요?”

“그래.”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면 룬 님께서는 특별히 제 곁에 있어 주시는 거네요.”

그 사실이 못내 좋아서 나는 생긋 웃고 말았다.

“아, 동이 트고 있어요.”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불그스름한 게 돋아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나는 룬 님이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나요?”

혹시 내가 너무 건방졌나? 하지만 룬 님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에 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얼른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렸다. 바다 끄트머리에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계속 어려 있었지만, 해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나올까?’

나는 나도 모르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해가 뜨는 모습을 얼른 보고 싶었다. 그런 나의 기도를 들은 것처럼, 해는 이윽고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평선 아래에 있을 때에는 기다림이 굉장히 길었는데, 한번 떠오르기 시작하자 꽤 빠르게 해가 움직였다.

어느새 환한 빛으로 가득찬 주변은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장엄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홍빛, 분홍빛, 붉은빛, 노란빛…… 비단 하늘만이 아니라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옆얼굴에도 붉은빛은 내려앉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서 룬 님의 백금발을 헤치고 지나갔다. 가닥가닥 흩어지는 아름다운 백금발에 빛이 물들어 문득 주홍빛으로 빛났다.

넋을 잃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가 내 시선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를 훔쳐보고 있던 것을 들켰지만 나는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못 했다. 그저 압도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 순간이 멈추어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주위에는 파도 소리만이 아련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와 나, 둘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저어.”

“왜 그러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제가 아까 울었던 이유에 대해서요. 그리고 아르센과 했던 말에 대해서요.”

“…….”

“저는 전생에 이덴베르 황녀로서의 삶을 살았거든요.”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라면 내 말을 믿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에게 내 과거를 얘기했다.

“하지만 여동생을 죽이려고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고 말았어요. 그러고 나서 눈을 뜨니 엘미르 황궁이었지요.”

“…….”

“처음에는 삶이 지긋지긋해서 살고 싶지 않았는데…… 살다 보니까 그래도 행복한 일이 자꾸자꾸 생겼어요. 그래서 더, 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과거를 들어 주었다.

“아르센을 다시 만난 건 저로서도 의외였어요. 옛 인연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가 있어서,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저의 전생은 결코 끊어진 게 아니라, 제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

“룬 님께서 제게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한다고 하셨던 건, 아마 그 때문일지 몰라요. 어두운 건 그때의 아픔 때문이고, 밝은 건 새로 태어나 받은 사랑 때문이지요.”

“그렇군.”

그 담백한 수긍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내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룬 님의 말에 조금씩 손의 떨림은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은 전생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에 대한 호기심을 모두 채우시면 룬 님은 훌쩍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룬 님이 나를 처음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나에게 흥미가 생겨서,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졌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룬 님은 나에게 떠나 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차근차근히 인간의 감정을 배워 가고 있었고, 나라는 인간도 언제까지나 그에게 흥미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무 슬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내 욕심으로 잡아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광활한 바다를 보니 깨달았다. 그는 빛, 자연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상급 정령을 소환할 때 깨달았듯 빛의 본질은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움켜쥐려 한들, 그는 온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좁고 작은 나만의 곁이 아니라.

그를 소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 만약 그를 소환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를 마음속으로부터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그저 웃음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만 갈까요?”

이미 해가 떴다. 루디온을 빠르게 타고 돌아간다고 해도 사람들이 걱정할 것이다.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고 나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룬 님이 미동도 없었다.

“……?”

그에 내가 의아해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네?”

“네가 나를 소환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눈을 깜빡였다. 룬 님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룬 님이 말을 하려다가 마는 것은 처음 본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가 왠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말을 아꼈다.

“이만 가지.”

그렇게 말한 룬 님은 루디온을 소환한 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앗, 같이 가요. 룬 님!”

그를 부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이 좋았다. 그를 따라갈 수 있고, 그를 부를 수 있는 지금이 말이다.

바닷가를 떠나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해는 높이 떠올라 있었다. 새벽녘에 내가 슬피 울었던 것은 모두 과거가 된 것 같았다. 마치 모든 고민을 바닷속에 녹이고 온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돌아가는 내내 나와 룬 님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편 진영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나를 찾고 있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뿔싸.’

너무 늦게 돌아왔나? 심지어 벨트모어 공작마저 나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찔끔해서 서 있는데, 나를 발견한 공작이 황급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황녀 전하!”

“공작.”

“찾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미, 미안해요.”

나는 눈을 슬쩍 굴렸다. 돌아오는 길에 룬 님은 이미 신전의 마차에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둘이서 몰래 나갔다 왔다는 문책은 피할 수 있었다.

“바다를 잠깐 보고 왔어요. 기분 전환을 하러 간 거였는데 늦어져 버렸네요.”

“바다…….”

그는 무척이나 의아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레 무슨 바다를 보고 왔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내가 상급 정령사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루디온을 타고 가셨던 모양이군요. 다친 곳은 없으시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미안해요.”

내가 사과하자, 그도 가볍게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그는 총사령관인 만큼 책임감이 막중한 듯했다. 그런데 그때,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리오텐의 바다는 정말 아름답지요! 그곳을 보고 오셨다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리오텐 대신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얼굴이 죽상이 되어 터덜터덜 걸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라, 싱글벙글 웃고 있지 않은가.

설마 그게 내가 바다의 이야기를 꺼내서일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그걸 먼저 말씀드린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그가 자신의 이마를 찰싹 쳤다. 의아해서 진영을 돌아보니, 사람들 모두가 들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뚝뚝한 총사령관마저도 말이다. 그들이 나를 찾았던 것도 아마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덴베르 총사령관에게서 전령이 왔습니다!”

대신은 침을 튀기기라도 할 기세로 말했다. 나는 새벽의 그 밀담을 떠올려 냈다. 아르센, 그가 분명히 리오텐에서 물러가 주겠다고 했었지.

“무슨 말을 전해온 건가요?”

내용이 반쯤 짐작이 되었지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자 그는 활짝 웃어 보였다.

“리오텐 공국으로부터 이덴베르 제국 군인이 물러간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요!”

“평화 회담도 다시 열고 싶고 합니다! 이번에는 공왕 전하와 정식으로 서신을 보내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밤사이 이덴베르 총사령관이 마음을 바꾼 모양이지요?”

아르센이 적당히 알아서 이유를 꾸며내 주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생긋 웃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찬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예!! 그건 모두 성녀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황당해지고 말았다. 내 은총?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앞에 서 있던 대신은 거의 눈물을 흘릴 기세로 말했다.

“어제 이덴베르 총사령관이 성녀님과의 대화 이후에 돌아가셨을 때, 계시를 받으셨다고 하시더군요! 아아, 이것도 다 성녀님이 계신 덕분이지요. 그에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양국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율하겠다고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예?”

“성녀님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평화 회담입니다! 전쟁이 끝났다고요!”

“어…….”

나는 나도 모르게 저 멀리에 있을 아르센의 막사를 뒤돌아보았다.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꾼 건 맞지만, 그 이유를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뭐, 계시? 대체 누구한테 받은 계시란 말인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을 아르센의 얼굴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 하, 하.”

하지만 이것을 사람들은 기쁨의 웃음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성녀님께서는 수많은 목숨을 구하시고, 이 공국을 구원하셨습니다!”

“성녀님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오랫동안 노래로 불릴 것입니다!”

“성녀님, 만세!”

“만세!!”

대신들뿐만이 아니라, 사정을 들은 모두가 나와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진영이 떠나갈 듯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성녀님의 은총이 하늘에 가득합니다!”

“하하, 네. 은총…….”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존경과 경의가 가득했다.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겠지?’

평화 회담을 이루어 냈으니까 말이다. 한 발자국은 내가 떼게 해 줬으니, 이제는 공왕과 아르센이 알아서 할 차례이다. 옆에 있던 벨트모어 공작도 말했다.

“본국에 계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무척이나 기뻐하실 겁니다.”

“그, 그렇겠지요…….”

나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곳에 오는 것을 그렇게 걱정했던 가족들이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큰 성과를 올리고 돌아온 것을 알면 다들 기뻐해 주리라.

선언한 대로 이덴베르 군은 아주 빨리 돌아갔다. 아르센의 위치가 정말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덴베르에 허락을 받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황족들의 최종 승인을 받는 기간이 꽤 길었을 텐데 말이다.

그사이에 나는 공국의 수도로 돌아가 사람들을 치료했다. 돌아가자마자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미냐는 결국 울고 말았고, 알디에프 공자는 내게 경의를 표해 왔다. 공왕과 공왕비도 내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표현했다.

앞으로 나는 공국의 영원한 은인으로서, 공왕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선 나를 잡고 연회를 열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물론 모든 일이 모두 끝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덴베르 군인이 물러가긴 했지만, 평화 회담의 조약을 조율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특별히 그 협상의 자리에 미냐도 참석할 수 있게 부탁했다. 그녀가 보여 준 현명함과 배짱이라면 분명 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미냐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기뻐했다.

앞으로 양국 간의 사신을 보내면서 협상을 주고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엘미르 제국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가을의 하늘은 청명했고, 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왔을 때처럼 3일을 걸려서 다시 엘미르의 수도, 그 안의 황궁에 돌아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리운 황궁 정원과 아름다운 수목들, 그리고 넓게 펼쳐진 황궁들의 궁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기사 한 명이 말을 달려서 언제쯤 도착하는지 소식을 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그 셋은 나를 향해 서 있었다.

“다녀왔어요.”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품에 안겨 들었다. 소중하고 따뜻한, 나의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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