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3권Chapter 7. 리오텐 공국의 사자 (12/21)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3권

목차

Chapter 7. 리오텐 공국의 사자

Chapter 8. 전쟁

외전 4. 아르센 로스토프

Chapter 9. 새로 만난 정령왕 (1)

Chapter 7. 리오텐 공국의 사자

나의 이름은 아이샤 드 엘미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며, 올해 14살의 생일을 맞았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데뷔탕트도 치른 데다 내 전생의 나이까지 합친다면 정신 연령은 그것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나이에 청혼서가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3일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 * *

그날도 나는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땀방울이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여름은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왔다. 데뷔탕트를 치른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아쉽게도 아직 상급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 채였다.

대신 훈련을 통해 정령들을 다루는 솜씨는 무척 늘어났다. 루는 한순간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강한 빛을 낼 수가 있게 되었고, 리미에가 부리는 빛의 화살들은 몇 다발로 늘어났다. 게다가 둘을 소환하고도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했다.

‘휴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나에게는 날 때부터 주어진 넘치는 정령 친화력과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급 정령부터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정령 친화력과 마력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야.’

가끔씩 비온 공자나 이시스 오라버니, 혹은 부모님까지도 와서 나를 응원해 주고 가곤 했지만 그 응원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문득, 룬 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령왕인 그에게 해답을 구한다면 혹시 그 부족한 ‘한 걸음’을 메울 수 있지 않을까? 깊게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편법 같아.’

그건 그렇고, 수련도 좋지만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오늘 나와 오라버니에게 티타임을 제안하신 것이다.

우리 둘에게 할 말씀도 있으시다나?

훈련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간 나는 깨끗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시간에 맞추어 황제궁으로 향했다.

시종장이 안내해 준 응접실에는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를 위해 비워진 의자 하나가 곱게 놓여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응접실 안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했다.

‘새로 식물을 들이셨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좋은 오후예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요?”

그 말에 다들 앞다투어 대답했다.

“절대 아니란다. 우리도 방금 막 온 참인걸.”

“어서 와서 앉으렴.”

“오늘도 얼굴을 봐서 기쁘구나, 아이샤.”

내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자, 시종장이 내 몫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어머.”

나는 자그마한 감탄사를 내었다. 응접실을 가득 채운 향기로운 냄새의 정체를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초록색의 찻물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평소 마시던 차와는 다르네요?”

어머니는 보통 꽃차를 즐겨 마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기호에 맞추어 가족들이 모일 때면 항상 꽃차를 고르곤 하셨고 말이다.

그런데 이 차는 향기와 색으로 미루어 볼 때, 최상품의 잎차인 듯싶었다.

“한번 마셔 보렴.”

어머니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한 모금 마셔 보니, 따뜻한 온기와 이국적인 꽃향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무척 향기롭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반응을 본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리오텐 공국에서 보내온 차란다. 이번에 공국과 제국 간의 사치품 관세를 낮추는 방안을 협상하고 있거든. 몇 개 시험 삼아 들여놓아 보았지.”

“입에 맞는다니 몇 개 보내 줄까?”

“네!”

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만큼 이 차의 향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떄문이다.

얼른 한 모금을 더 마셔 보았다. 연노랑색과 연초록색의 중간색인 차가 흰 도자기 찻잔 안에서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향과 맛이었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리오텐 공국과 그렇게 협상을 자주 하고 있나요?”

지난번의 군사 협정도 그렇고, 점점 리오텐 공국과의 사이가 긴밀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우방국을 넘어, 두 나라 간의 사이를 아예 돈독하게 다지기로 결정하신 걸까?

“안 그래도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단다. 이시스, 너도 들으렴.”

“예, 아버지.”

아버지가 가볍게 말을 받았다.

“이번에 리오텐 공국에서 공자와 공녀가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단다.”

나는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가 이어 말했다.

“우리 엘미르 제국의 문물을 보고 배우며, 각국의 사이를 좀 더 돈독하게 다지고 싶다는 이유라고 하더구나.”

그 말을 들은 오라버니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온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래서 너희들이 할 일이 있지.”

할 일이라고? 비로소 나는 이 일이야말로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를 부른 진짜 용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자세가 곧게 펴졌다.

“제가 할 일이 뭔가요?”

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묻자, 세 사람은 한꺼번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뭐, 뭐지.’

세 사람은 저마다 내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미닭이 처음으로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이러할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샤가 벌써 이만큼 커서, 이렇게 똑 부러지는구나.”

세 사람의 얼굴은 짠 것처럼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사춘기 이후부터 가족들은 툭하면 아련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뭐라도 하려고 할 때마다 저렇게 기특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는 것이다.

“음, 네. 그래서…… 할 일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응? 아, 참. 그렇지.”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제야 아버지에게서 황제의 위엄이 조금 살아났다.

“리오텐 공국의 제 1공자와 1공녀. 그 둘을 너희들이 에스코트해 줘야겠다. 이시스는 동생인 공녀 쪽을, 그리고 아이샤는 오라버니인 공자 쪽을 부탁한다.”

“……제가 공자를 맡는다고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남성 귀족, 그것도 외국인을 맡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동안 정식으로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아서 기회가 없었던 것도 있지만, 나를 과보호하시는 아버지가 일부러 공자를 붙여 주신 것이 의외였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래, 원래라면 네게 공녀를 붙여 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연회장의 파트너 역할을 하려면 공자를 맡는 게 나을 것 같더구나. 이시스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아하…….”

하긴, 그들이 오면 환영회다 뭐다 해서 파트너가 필요할 일이 생길 텐데, 그 역할에는 나와 오라버니가 적격이겠지.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아이샤도 이제 데뷔탕트를 치렀잖니. 나는 우리 아이샤가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다, 당연하죠!”

나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외교 사절로 온 외국의 귀빈들을 대접하는 일이라니!

정말로 어른스럽고 멋지지 않은가. 의욕이 절로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줄곧 이런 일들을 기다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시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니까 나에게도 이렇게 큰일을 맡겨 주시는구나.

나는 기뻐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시스 오라버니가 대답했다.

“예, 최선을 다해서 공녀의 에스코트를 맡겠습니다.”

“그래. 이시스. 믿고 있겠다.”

아버지가 웃으며 우리 둘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가 뭉게뭉게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멋지게 해내서 엘미르 제국의 국격을 올리고, 황녀로서의 품격을 보여 줘야지.’

응, 할 수 있을 거다. 궁에 돌아가면 첫 번째로 리오텐 공국의 공자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격은 어떠한지. 그러면 공자가 왔을 때 실수 하나 없는, 훌륭한 파트너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리오텐 공자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교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멋진 내 모습이! 나는 나도 모르게 헤헤,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어머니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전할 게 있었는데.”

“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게.”

어머니는 더할 나위 없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별것 아니라는 얼굴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긴장 없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니고 이시스, 아이샤. 너희 둘에게 청혼서가 도착했단다.”

“아, 청혼서요? 그렇군요. ……네?”

맞장구를 치던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삐끗하고 말았다.

‘청혼서? 음, 나한테 청혼서가 도착했구나.’

나는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아무 생각 없이 향기 좋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소화된 다음 순간, 나는 오라버니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청혼서라고요?!”

“청혼서라니요!”

“청혼서래요, 오라버니!”

“그래! 청혼서!”

나와 오라버니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보았다면 무척 웃겼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이런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차를 마시고 계실 뿐이었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경악하며 말했다.

“아, 아니. 아버지. 어머니. 청혼서라니요? 저라면 모를까 아이샤는 아직 14살이라고요? 다들 왜 그렇게 태연하신 겁니까?!”

“그야.”

아버지가 툭 던지듯이 대답했다.

“거절할 거니까 말이지.”

“…….”

아버지도 어머니도, 말 한 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셨다. 이시스 오라버니와 나는 서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14살밖에 안 된 나에게 청혼서가 도착했다고 하면 제일 들고 나설 분들이 어쩐지 태연하시다 했다.

‘이미 거절할 생각이셨으니까 그랬던 거구나.’

“그 말도 함께 해 주셨어야죠. 괜히 놀랐잖습니까.”

이시스 오라버니는 투덜거렸다. 괜히 난리를 피웠다는 듯 오라버니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오텐에 달려가서 청혼서를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싶었지만?”

“그쪽에서는 단지 우방국으로써 그만한 호의가 있다는 뜻으로 예의상 보낸 것 같더구나. 그래서 내가 아주 참았지.”

나는 아버지의 팔불출 같은 모습에 조금 웃고 말았다. 하지만 두 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시스, 기억하렴. 네 말처럼 아이샤라면 모를까. 네 나이는 충분히 혼인을 하고도 남을 나이라는 걸.”

그 말에 오라버니의 얼굴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아직 배움에 뜻이 있다 하여서 일부러 들이밀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혼인서는 계속해서 들어올 것이다.”

아버지는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오라버니를 들었다 놓은 모양이셨다.

“그리고 우방국인 리오텐 공국에서 온 혼인서다.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겠지. 거절할 건 거절하더라도, 이번 방문에서 공왕족에게 최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하렴.”

“네, 아버지.”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연애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가문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결혼을 하셨던 것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둘은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다.

‘내가 설령 정략결혼을 한다고 해도…….’

결혼하게 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는 걸까? 나는 문득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평범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이 내 옆에 서 있다. 나는 흰 베일을 걸치고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그와 함께 손을 잡는다.

‘……그걸로 괜찮을까?’

생각이 저절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휴.’

내가 한숨을 쉬는데 어머니가 나를 슬쩍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을 받잡겠습니다. 리오텐 공자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엘미르 제국이 리오텐 공국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강국이긴 하지만, 사절단은 엄연히 손님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비단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대접할 생각이었다. 나는 생긋 웃었다.

“방문하실 날이 기대되네요.”

“나도란다.”

차를 홀짝이던 아버지가 대답했다.

* * *

리오텐 공국에서 귀빈들이 방문하는 날은 3주 후.

한 나라의 사절단이 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나와 어머니는 함께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도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 리오텐 공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디 보자.”

나는 시녀들이 가져온 서류를 천천히 읽었다.

이름은 알디에프 리오텐. 나이는 올해로 딱 스무 살. 연초록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으로 현재 공국의 유일한 공자인 동시에, 후계자이다. 가족 구성은 공왕, 공왕비, 동생인 공녀까지.

‘가족 구성이 나랑 비슷하네.’

서류를 넘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

리오텐 공국은 예술로 이름 높은 문화 강국이니, 아마 그런 곳에서 공자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술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을 테다.

“좋아…….”

나는 중얼거렸다. 묘사를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까탈스러운 상대는 아닌 듯싶었다. 아마 예술을 사랑하는 조용한 신사가 아닐까?

“그렇게 어렵진 않겠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봤다 싶어서 나는 서류 더미를 탁,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향해 시녀가 말을 걸었다.

“마차를 준비시킬까요?”

“응.”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일을 돕는 것과 더불어, 사교계에 들리는 것도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데뷔탕트를 치른 이후 나는 사교계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황녀인 나를 문전박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오늘 향하는 곳은 수도의 어느 귀부인이 여는 살롱이었다.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들이 와서 종종 친목을 다지는 부담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될 수 있으면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었지만, 클로에는 바쁜 일이 있었고 로즈와 애슐리는 집에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나는 아쉽지만 혼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자!”

나는 살롱에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난 뒤 서둘렀다. 생각보다 서류를 읽는 데 시간이 지체해서 얼른 출발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내가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이 있으니…….

알디에프에 관련한 서류 중 마지막 장에 작은 글씨로 급히 추가한 듯한 대목, 그 한 줄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놓친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 줄도 모르는 채, 나는 그저 마냥 신나서 살롱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 * *

귀부인의 살롱에 들어서자 조금 긴장되었다. 하지 연회 이후로 처음 오는 사교계다. 아직도 나에게 있어 사교계란 낯선 장소이기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 또래의 영애들과 어울리는 일이라면 더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긴장한 것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었다.

“어머, 황녀님!”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을 뵈어요.”

“너무 잘 오셨어요! 여기에 자리하셔요!”

그 열렬한 환영에 나는 조금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환영에 감사드려요.”

나는 티파티를 가지고 있던 영애들의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으응?’

뭔가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영애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이렇게 나를 부담스럽게 보는 거지?’

정말 끈적할 정도로 깊은 시선이다. 나는 순간 내가 무얼 잘못한 것은 없나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오래간만에 얼굴을 비춰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것 하나로 퉁치기에는 영애들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들은 나를 환영한다는 둥, 너무 기쁘다는 둥…… 갖은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말을 걸었지만, 어쩐지 본론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전해졌다.

‘대체 뭐지? 빨리 본론을 말하란 말야.’

나는 겉으로는 하하, 호호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황녀라지만 역시 사교계의 화법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얼른 말해 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내 바람이 통했음일까. 어느 영애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사람들이 모두 나를 주목했다.

“황녀님!”

“……네?”

나는 웃는 낯을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람.

그런데 그 뒤에 영애가 이은 말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 이번에 신관님께서…….”

영애가 눈치를 보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어느 성격이 급한 영애인지, 한 영애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이번에 하지 연회 때 황궁을 방문하셨던 신관님이 그렇게 잘생기셨다면서요?!”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네?”

“그, 신관님 말이에요.”

그녀도 조금 부끄럽기는 한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무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간 궁금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신관님이라면…….”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어린 영애들은 서로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대다수는 하지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영애들인 듯했다. 아니면 참석했어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든가.

“듣기로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백금발을 가지고 계신다던데.”

“저도 들었어요. 황궁을 드나들던 시종이 그분을 보고 꿈을 꾸는 줄 알고 집으로 다시 자러 갔다나요?”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시길래 그러는 걸지 너무 궁금하네요.”

어린 영애들의 조잘조잘거리는 목소리에는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역시 미남은 세계의 보물인 것이다. 그때, 어떤 영애가 입을 열었다.

“저, 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어, 어떻던가요?”

“정말 소문대로인가요? 과장된 건 아니지요?”

“소문은…….”

그녀의 얼굴은 흐물흐물하게 풀리다 못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았다.

“소문은…… 축소된 이야기예요.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저는 하지 연회에서 그분의 얼굴을 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음료수를 모두 무릎에 쏟은 뒤였어요…….”

“꺄악!”

“그, 그 정도란 말씀이세요?!”

영애들은 저마다 자신의 손을 꼬옥 부여잡고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룬 님 때문에 이렇게 다들 들뜬 거였단 말이지?’

나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소문이 나지 않으려야 나지 않을 외모가 아니었다.

아마 하지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과 시종들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겠지. 거기에 어린 영애들의 상상력이 부풀려졌겠고, 그러다가 나에게 질문을 하겠다는 대담한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만큼은 이해가 되었다. 우선, 빛의 신전은 가정을 꾸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 않다. 다산의 신만큼 결혼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도 있고 축복을 받을 수도 있다.

어느 신은 신관들의 결혼을 아예 금지시키기도 했는데 그에 비하면 무척 관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빛의 신관에게 연심을 품는 것은 딱히 신에 대한 불경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음, 룬 님의 미모라면 불경죄를 감수하고서라도 연심을 활활 불태우는 영애들이 넘쳐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니.

영애들은 열띤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죠?”

“룬, 룬 님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간결해서 외우기도 정말 쉽네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신전에 기도를 갔을 때 들었는데, 그분께서 차기 대신관 감이라고 하시지 뭐예요?”

“정말요?!”

꺅, 꺅. 영애들은 행복한 비명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옆에서 다른 영애가 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정말 멋져요. 그렇죠, 황녀님?!”

기어코 그 화살이 나에게도 돌아오고 말았다. 다들 들뜬 얼굴이었기 때문에 나만 분위기에 초를 칠 수는 없었으므로, 나도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하하…….”

“황녀님께서는 좋으시겠어요.”

맨 먼저 말을 꺼냈던 영애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그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네? 어째서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영애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이시스 황태자 전하. 비온 공자님. 그리고 이번에 새로 오신 신관님까지. 황녀님께서는 세 분 모두와 인연이 있으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숨길 일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간 어린 영애들의 첫사랑 상대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이시스 황태자 전하, 다시 말해 나의 오라버니와 벨트모어의 후계자 비온 공자로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번에 룬 님이 화려하게 등장해서, 그 안에 룬 님까지 포함이 된 모양이었다.

어느 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녀님께서 하지 연회 때문에 룬 신관님과 함께 연회를 주관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랬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눈을 빛냈다. 마치 먹이를 낚아챈 매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들의 목소리는 꿀이 떨어질 듯 달짝지근하고, 은근했다.

“궁금한 게 있답니다. 황녀님.”

“……뭘까요.”

나는 애써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대체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한 명이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새빨간 얼굴로 질문했다.

“세 분의 이상형은 혹시 어떻게 되나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에게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취향이나, 좋아하는 음식이나, 아주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요!”

“황녀님은 아시겠죠?! 제발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세요!”

나는 당황, 그것도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상형이요?”

“네! 이상형이요!”

어린 영애들은 예를 들어, 오라버니가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온다면 당장 머리를 모두 탈색한 뒤 새빨갛게 물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과격해 보였다. 마치 눈 속에 불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그, 글쎄요.”

하지만 내가 영 떨떠름해하자 그들은 약간 실망한 듯했다.

“……정말 사소한 거라도 괜찮은데.”

그들이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그 시무룩한 모습에 나는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떡하지.’

이시스 오라버니의 이상형을 알아내는 건 쉬울 것이다. 그리고 비온 공자의 이상형도, 직접 물어보지 않더라도 이시스 오라버니라면 아마 알고 있겠지. 둘이 친구가 된 지도 벌써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니. 그러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룬 님께 어떻게 감히 이상형을 물을 수가 있겠어. 난 못 해.’

나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이래서 아는 게 병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얼굴을 살피던 영애가 고개를 떨구는 것이 보였다.

“……저희가 너무 무리한 이야기를 꺼냈나 봐요.”

그러자 다른 영애들도 동조했다.

“죄송해요. 황녀님. 저희가 너무 들떠서 무례를 저질렀어요.”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요.”

축 처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한번, 여쭈어는 볼게요.”

“네?!”

그러자 모두의 얼굴이 확 펴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영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인가요?!”

그들의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속으로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대신!”

나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룬 신관님의 이상형은 물어보지 않을 거예요. 세속을 벗어난 신관님께 실례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애썼다. 솔직히 말해서 사심이 들어갔다는 것은 인정한다. 물어보는 것은 둘째치고, 룬 님의 이상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었던 것이다.

내 말에 영애들은 그래도 좋다는 듯이 웃었다.

“네, 황녀님만 믿을게요!”

“저는 원래부터 비온 공자 파였어요!”

분위기가 다시 즐거워지자 나는 생긋 웃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 * *

그래서 말인데. 세 사람의 이상형은 어떻게 될까?

‘흠.’

나는 지금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어제 영애들이 물어보았던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일단 세 사람의 특징과 성격을 말해 보겠다.

첫 번째는 이시스 드 엘미르. 바로 나의 오라버니.

이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자인 동시에 황태자로서, 올해 22살이 된 오라버니는 어엿하게 차기 황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무척이나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어서, 황궁 기사단 안에서도 그를 상대할 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무에 뛰어난 데다가, 자상하고 부드럽기까지 한 오라버니는 심지어 얼굴마저 잘생겼다. 화려한 금발과 녹음이 담긴 것 같은 아름다운 녹안을 가졌던 것이다. 다른 영애들이 오라버니에게 열광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상형을 딱히 물어본 적은 없었다. 오라버니의 이상형을 알 이유도 딱히 없고. 하지만 평소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아마 오라버니라면 황후에 잘 어울리는 책임감 있는 여성을 좋아할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비온 벨트모어.

우리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벨트모어 대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그는 마법과 동시에 검술을 쓰는 일명 마검사로 유명했다.

거기에 뛰어난 머리와 깊은 학식까지. 그는 정말로 모든 방면에서 우수했다. 그런 그를 한 마디로 가리키자면 ‘반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세상 혼자 사는 사람의 표본이랄까.

심지어 붉은 머리카락과, 그에 대조되는 차분한 청안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그 또한 말할 것도 없는 미남이었다. 그가 오라버니와는 3살 차이가 나니, 올해로 19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오랜 친구 사이였다.

잘 웃고 유쾌한 성격인 오라버니와 무뚝뚝하고 과묵한 비온 공자. 성격이 정반대이긴 해도 십 년이 되도록 같이 친구를 하고 있다는 건, 그래도 그 둘의 상성이 잘 맞기 때문이라는 거겠지?

역시 공자의 이상형은 알아본 적이 없다. 딱 봐도 연애결혼보다 가문과의 결혼을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의 이상형은 가문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려나. 오라버니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따뜻한 차를 음미했다. 여름도 갔기 때문에 이제는 차가운 차보다 따뜻한 차를 내놓을 계절이 되었다.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의 이상형을 생각해 보는 것까지는 쉬웠다.

문제는 바로 다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룬.

짧고 간결한 이름. 신관이기 때문에 성은 없다.

알아보니 최근 사교계에서, 아니 귀족 사회 전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이라고 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매끄러운 백금발과 진한 금안, 바라만 보아도 몽롱해지는 꿈결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장본인으로도 유명했다.

거기에 능력도 출중해서, 지금 그는 빛의 신전의 차기 대신관 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지.’

나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룬 님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 나로서는 그를 만날 때마다 경외심이 들 뿐이었다.

그 정체는 바로 루미나스. 이 제국의 빛의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빛의 정령왕’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정령왕인 그에게 이상형은커녕, 연애 감정이라도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그가 인간에 대해 흥미가 많기는 하다. 그러나 감정을 이해하는 것과 직접 감정을 가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 그 사이에는 은하수만큼 넓은 거리가 존재했다. 어쨌거나 그처럼 초월적인 존재에게 ‘사랑’ 같은 걸 바라는 건 무리일 테지.

‘……그래. 이건 멍청한 짓이야.’

나는 룬 님의 이상형을 생각해 보는 것을 관뒀다. 어차피 영애들에게는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의 이상형을 알려 주겠다고 말해 둔 참이다. 그러니까 다음에 만날 때는 그것만 준비해 가면 될 테지.

‘그래서, 그 둘의 정확한 이상형을 어떻게 알아낸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결심했다.

‘역시,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게 최고겠지?’

아마 오라버니는 지금쯤 궁에 계실 거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나의 수석 시녀를 불렀다.

“레나!”

“네, 황녀 전하. 무슨 일이신가요?”

“오라버니의 궁에 가려고 해. 준비해 줘.”

오라버니라면 분명히 내 말에 꼼꼼히 대답해 줄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래간만에 오라버니의 궁에 갈 시간이었다.

* * *

엘미르의 각 궁은 그 주인의 품격과 특성에 어울리도록 꾸며져 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궁인 ‘태양의 궁’은 거대한 황금문과 직선, 넓은 규모와 웅장함으로 가득 무장한 곳이다.

그에 반해 어머니의 궁인 ‘달의 궁’은 우아함과 곡선, 그리고 섬세한 건축물로 가득찬 아름다운 곳이고 말이다.

나의 궁인 ‘은의 궁’은 두 분의 궁을 반반쯤 닮은 느낌이다. 그 외에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내 궁으로 이어진 황궁 정원을 가꾸는 것이었다.

정령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 궁의 정원은 유난히 꽃이 아름답고 싱싱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 외에도 대체로 내 궁은 자연과 어우러진 듯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 오라버니의 궁, ‘청의 궁.’

내가 지금 향하는 그곳은 오라버니의 쾌활한 성격과도, ‘푸르다’는 뜻에도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오래간만에 놀러오는 느낌이야.’

궁의 문 앞에 서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보통 때라면 오라버니가 나를 방문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내가 그의 궁을 방문하는 것은 꽤 낯선 일이었다.

‘오라버니가 놀라시겠는걸.’

나는 생긋 웃었다.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나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가 유독 많은 그 정원은 어렸을 때 내가 뛰놀던 그대로였다.

그곳에는 이미 야외 테이블 자리에 앉아 있는 오라버니가 있었다. 나를 본 그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아이샤!”

그는 연푸른 정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아마 정무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초가을이기는 해도 아직 오후의 햇살은 따뜻했고, 오라버니의 금발을 비추는 햇빛은 눈부셨다. 나는 오라버니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아이샤가 왔답니다. 혹시 일하시는 데 제가 방해를 했나요?”

그러자 오라버니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 오히려 네가 놀러 와서 무척이나 기쁘구나.”

내가 배시시 웃자, 오라버니는 문득 아련한 얼굴을 했다.

“어릴 적에는 더 자주 놀러 왔었는데 말이지…….”

“…….”

내 사춘기 소동이 있었던 이후로 가족들은 틈만 나면 과거 회상을 하려 들었다. 나는 오라버니의 상념을 치워 버리기 위해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오라버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괜찮을까요?”

“그야 물론이지.”

그가 씩 웃었다.

“네가 온다는 말에, 주방장에게 얼른 주문했단다.”

“뭘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손을 들어 시종에게 손짓했다. 나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주방장이 우리를 위해 디저트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 가장 위에 올려진 것은……!

‘레몬 소르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 중의 하나였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어릴 적에 오라버니의 궁에 오면 가장 자주 먹던 디저트기도 했다.

주방장의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그리고 이 소르베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먹다 보면 항상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오라버니를 조르곤 했었다.

그러면 오라버니는 나를 거절하지 못해서 조금씩 더 퍼 주다가…….

‘나는 머리가 찌잉, 하고 울려서 인상을 찌푸리곤 했었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 입맛을 기억해 일부러 소르베를 주문해 준 오라버니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어서 먹으렴.”

주방장이 모두 올려놓기도 전에, 오라버니가 재촉했다. 나는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내가 수저로 레몬 소르베를 가장 먼저 뜨자, 오라버니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 그래.”

오라버니는 그저 내가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얼굴이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레몬 소르베는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저트 접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라즈베리 에클레어, 초콜릿 파이, 복숭아 케이크, 건포도 쿠키 등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오라버니와 티타임을 즐기던 꼬마 시절로 말이다. 내가 소르베를 한입 꿀꺽 삼키자, 오라버니가 말했다.

“맛있니?”

“최고예요!”

그 말에 오라버니는 뿌듯한 표정을 했다. 그는 나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 작정한 사람처럼 나에게 이것도, 저것도라며 권해 주었다.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보다도 더 많이 먹어 버렸다.

저녁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나는 홍차 한 모금을 마셨다.

‘응? 잠깐만.’

나는 그러다 잠시 제정신을 차렸다.

‘여기 온 목적은 아직 하나도 얘기하지 않았잖아?’

오라버니의 환대와 맛있는 디저트에 홀려 있다 보니 본론을 까먹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오라버니가 뒤늦게 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고 있니? 리오텐 공국에서 사람이 오는 것 때문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고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괜찮아요. 그보다는 아직 상급 정령을 소환하지 못한 게 좀 아쉬워요.”

“너무 걱정하지 말렴. 분명히 잘해 낼 수 있을 거란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그런데…….”

나는 잠깐 고민했다. 오라버니의 이상형을 대뜸 묻는 것은 조금 그랬다. 쑥스럽다고 해야 하나? 오라버니도 갑자기 내가 이상형을 묻는다면 난처해하리라.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일단 우회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상형을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바로 비온 공자의 이상형 말이다. 그렇게 말문을 트다가 슬쩍 오라버니의 이상형도 물어봐야지. 그러면 분명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니? 뭐든지 물어보렴.”

오라버니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내가 묻기만 하면 황궁의 기밀까지 줄줄 불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 마주 화답하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오라버니라면 분명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오라버니 이외에 대답해 주실 분은 마땅히 없으실 거예요.”

그래, 그래. 비온 공자의 절친한 친우인 오라버니라면 분명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겠는가?

만약 오라버니가 모른다면 비온 공자에게 직접 묻는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영애들과 약속을 했다지만 그건 조금 창피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저, 비온 공자의 이상형은 어떻게 되나요?”

그 순간 오라버니의 얼굴이 쩍하니 굳은 것 같았다.

“……비온의, 이상형?”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가볍게 긍정했다.

“네, 이상형이요.”

“…….”

“혹시…….”

나는 약간 실망스러운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말로 비온 공자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모르시나요?”

그러자 오라버니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한한 갈등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알려 주자니 싫고, 그렇다고 모른다고 인정하기에는 오라버니로서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그런 얼굴?

“……그건…… 왜 물어보는 거니?”

“그야, 오라버니의 절친한 친우 분이시니까 오라버니가 제일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요.”

‘그치만 나에게 비온 공자의 이상형을 알려 주기 싫을 이유가 딱히 없잖아.’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오라버니는 낭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게…… 꼭 듣고 싶니?”

“네!”

내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갑작스레 오라버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 중얼거리길.

‘비온 이 녀석, 두고 보자……. 감히 아이샤에게…….’

이러지 않는가? 비온 공자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그가 대체 갑자기 잘못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오라버니의 과보호적인 기질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재빨리 오라버니에게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비온 공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 그럼?!”

오라버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다짜고짜 물어서 오라버니가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아는 영애들이 물어봐서요.”

이시스 오라버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사교계에 요즘 이런 소문이 퍼져 있답니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최근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사람은 바로 이시스 오라버니, 비온 공자, 그리고 룬 신관님이라고 말이다.

“재미있죠?”

내가 생긋 웃자, 오라버니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구나.”

생각보다도 차분한 반응에 나는 조금 시시해지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이 제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라는 건데, 기분 좋지 않으세요?”

내가 오라버니에게 묻자, 오라버니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 보니, 먼 얘기이기만 해서.”

‘하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라버니는 황제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 영애들에게 인기가 있든 없든 시큰둥할 수밖에.

‘하지만 그러다가 우리 오라버니가 노총각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아직 아버지는 정정하신데다가, 황위를 물려주실 때까지는 꽤 시간이 있는 듯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쓰러운 얼굴로 오라버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조카도 못 보고, 오라버니는 혼기를 놓쳐 독신으로 늙어 죽고…….’

물론 오라버니가 황태자인 이상 혼인처가 없어서 결혼을 못 하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여자에게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오라버니를 보니 어쩐지 위기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매일같이 일, 수련, 일, 수련만 반복하는 오라버니다. 조금쯤은 숨통을 틔워도 될 텐데 황태자로서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시스 오라버니…….’

나는 오라버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는 게 아닌가.

“……아이샤?”

“네?”

“왜 날 그렇게…… 불쌍하다는 얼굴로 보는 거니?”

“……음, 그게요.”

오라버니가 결혼도 못 할까 봐요,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냥요.”

오라버니는 수상하다는 얼굴이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참, 그래서 비온 공자의 이상형은 어떻게 되나요?”

이제 내가 비온 공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오라버니는 순순하게 대답해 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없지만?”

“그 녀석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흠, 수수하지만 심지가 굳은 여인을 좋아할 것 같군.”

‘아하. 수수하지만 심지가 굳은 여인이라.’

왠지 감이 왔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한 떨기의 백합이나, 은방울꽃 같은 여인이려나?

“그리고 왠지 연상을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지.”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보를 알려 주면 분명히 사교계에서 성숙하지만 수수하고 우아해 보이는 스타일링이 유행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뭐,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야. 틀릴 가능성도 있어.”

오라버니가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항상 옆에 계셨던 오라버니니까, 아마 맞겠지요.”

이어서 물었다.

“그러면 오라버니의 이상형은 어떻게 되시나요?”

내 질문에 오라버니는 눈을 깜빡였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 이상형이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음, 어떤 거라도 좋으니까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한참 뒤,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나도 연상이 좋을 것 같군.”

“연상이란 말씀이시지요.”

그렇군, 일단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 둘 다 연상을 좋아한다. 나는 마음속에 깊게 새겨 두었다.

“그리고, 아, 그래. 황후로서의 능력도 무척 중요하겠지. 지성과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라면 좋겠군.”

“저도 동의해요. 오라버니의 반려자라면 이 나라의 황후가 되실 분인데, 물론 그만한 능력을 갖추어야겠지요.”

“그리고 귀여운 것보다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느낌이라면 좋을 것 같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느낌…….”

“그러면서도 밝은 성격과 상냥함을 가지고 있고, 아이를 좋아했으면 좋겠군.”

그 뒤로도 오라버니의 이상형은 줄줄이 이어졌다. 나는 처음엔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지만, 점점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식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오라버니.”

“으, 으응?”

내 표정에 오라버니는 당황한 듯했다.

‘오라버니의 양심은 어디로 간 거죠?’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실 오라버니는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연상에 우아하면서도 품위와 매력을 갖추고 있고, 그러면서도 밝은 성격을 가진 데다가 상냥하고 부드럽고, 아이를 좋아하며, 황후로써 잘 어울리는 지성을 갖추었고 결단력과 상냥함을 동시에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어이가 없어서 오라버니를 바라보자, 오라버니도 자신의 요구 사항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이, 이상형은 이상형이니까.”

나는 오라버니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그 길디긴 이상형 조건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곱씹어 생각하다 보니, ‘그럴 만도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자면 오라버니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다정하고 상냥한데다가 강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데다가 학식도 뛰어나고, 문무에 능한데다가, 차기 황제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니까 말이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신랑감이다!

‘음……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생각이 짧았다. 오라버니가 말한 것쯤은 되어야 우리 오라버니에게 어울린다고 할 수 있지. 콩깍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오라버니의 결혼이 아주아주 미뤄질 것 같은 기분이지만.

내가 속으로 납득하고 있는데, 문득 오라버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네?”

“룬 신관 말인데. 그와 그 뒤로도 만난 적이 있니?”

“네? 룬 신관님이요?”

나는 뜨끔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수도로 놀러 갔던 기억이 퐁퐁 솟아올랐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시치미를 떼고 말았다.

“그럴 일이 없죠. 저는 황궁에, 그분은 신전에 계시는데요.”

“그래, 그렇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나에게 물었다.

“그의 이상형을 아니?”

“…….”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룬 님의 이상형? 그건 이쪽에서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걸 오라버니가 궁금해하다니……!

‘설마……!’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따져 보자면, 룬 님은 오라버니보다 아득하게 연상이시긴 하다. 우아하면서도 품위와 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고. 밝은 성격…… 이나 아이를 좋아하는 건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오래 사신 만큼 깊은 지성의 소유자이시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룬 님은 안 되어요. 오라버니!”

나는 새파란 얼굴로 소리쳤다.

“오, 오라버니가 설마 그분께 마음이 있는 줄은……!”

지금까지 오라버니가 룬 님의 앞에서 차갑게 굴었던 것은 사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 어려워서 했던 연기였을까?

맙소사, 오라버니가 룬 님께 마음이 있으셨을 줄이야……!

눈앞의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지? 심지어 눈물까지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라버니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야!”

“……네?”

오라버니의 격렬한 반응에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나는 그저, 그에게 이상형이 있다면 그 비슷한 사람을 그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을 뿐이야.”

“……?”

나는 의아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왜요?”

둘이 사이 안 좋지 않았던가? 내 질문에 오라버니는 어딘가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실언이었다.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갑작스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일까? 아리송할 뿐이었다. 그 뒤로도 나와 오라버니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라버니는 이런 얘기도 해 주었다.

“그 룬이라는 신관이, 이번에 정식으로 황궁 사제가 되어서 말이다.”

“황궁 사제요?”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황궁 사제란, 빛의 신전과 황궁을 드나들면서 의식을 도맡아 하는 신관을 가리킨다. 번거롭기는 해도, 직위로는 꽤 높았기 때문에 룬 님이 그 일에 발탁된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욱 자주 뵐 수 있겠구나. 황궁에 자주 드나드실 테니까.’

그 소식을 들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룬 님과 사이가 나쁜 오라버니의 기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속으로 좀 웃은 뒤에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리오텐 공자와 공녀가 방문하는 것 말인데요. 저는 한 번도 그분들을 본 적이 없어서 기대가 되어요. 혹시 오라버니는 두 분을 뵌 적이 계신가요?”

기억을 더듬는 듯, 오라버니는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둘 다 보기는 했었지. 공녀 쪽은 먼발치에서 보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공자와는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어.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흠,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의 반응으로 보아서 역시 이상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동생분은 알미냐 공녀라고 했던가요? 그분도 좋은 분이시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오라버니의 파트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라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구나.”

나는 생긋 웃었다. 귀빈들이 오는 것이 정말로 기다려졌다.

* * *

나중에 영애들에게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의 이상형을 전했더니, 그들의 얼굴이 아주 묘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품위가 깊은.’

‘아이를 좋아하고…… 황후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비온 공자님은 연상을, 흑…… 어머니, 아버지! 왜 저를 늦게 낳아 주신 건가요!’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이상형이 그렇다는데. 나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서 어느새 리오텐 공국에서 귀빈들이 방문하는 날이 왔다. 아침부터 리오텐 공국에서 온 마차들로 황궁은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에 못 이겨, 살짝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정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연초록색으로 칠해진 아름다운 마차들이 정원 안에 빼곡했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리오텐 공자와 공녀, 국방대신과 재무대신이라고 했던가? 맨 처음 환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몫이므로 나는 오전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리고 오후의 차를 마시는 시간에 맞추어, 청의 궁에 자리한 정원에 찾아갔다. 정원 한곳에 있는 온실에서 리오텐 공자, 공녀,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함께 차를 마시기로 했던 것이다.

야외 정원에는 이제 한물간 장미와 새로 피어나는 등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곧 있으면 가을 사냥회도 열릴 테지. 그때가 되면 사람들도 또 바빠지리라. 정말 쉴 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황실의 규칙대로라면 호위 기사와 시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야 했겠지만, 나는 그들을 청의 궁까지는 데려오되 정원 밖에 두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너무 데리고 가면 리오텐 공녀와 공자가 거북해 할 것 같아서였다.

길을 헤맬 염려는 전혀 없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 드나들었던 덕분에, 청의 궁은 내 안방과도 다름없었다. 저 멀리에서 흰 온실의 모습이 보였다.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나의 눈에 한 사람이 서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야외 정원의 온실로 향하는 흰 문 바로 옆이었다.

보자마자 나는 그가 외부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종이라기엔 너무나 화려한,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정복을 입고 있었던 데다가 그의 머리 색이 궁에서는 처음 보는 독특한 색이었기 때문이다.

햇빛에 닿았더니 살짝 금빛으로 빛나는 연녹색 머리카락은 무척 특이했다. 마치 찻물의 색 같았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한 손을 등 뒤에 숨기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시간을 확인하는 듯 품에서 금 회중시계를 꺼내서 보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을 때였다.

그도 나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강렬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주 깨끗한 색의 자안이었다.

나와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이내 그가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짐작 가는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기도 했거니와, 그의 외양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가 한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저는 리오텐 공국의 1공자, 알디에프 리오텐이라고 합니다.”

“……아.”

그래, 그가 바로 리오텐의 공자였다. 나는 옷자락을 들어 재빨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그런데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그리곤 자신의 등 뒤에 숨기고 있던 한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흰 장미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가 나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척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 제국의 하나뿐인 별, 아이샤 황녀 전하가 맞으시지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꽃, 받아야 하는 거겠지?’

그러라고 나에게 건네준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여 나쁠 것은 없으리라. 어떤 처리를 한 건지 꽃은 방금 정원에서 딴 것처럼 아주 싱싱했다.

“오늘 티타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꽃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되돌렸다.

“아, 저야말로 엘미르 제국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미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만나 보셨겠지요?”

“물론입니다.”

그가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아이샤 황녀 전하께서는…….”

“네?”

“두 분의 아름다운 점만 골라 닮으신 것 같군요.”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깐의 고민 후, 나는 무난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갈까요?”

그가 익숙한 듯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그는 장갑을 끼고 있어서, 맨 살갗이 닿을 염려는 없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일지도…….’

분명히 예술을 사랑하는 조용한 신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오늘치 당황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막상 온실에 도착한 나는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는 알디에프 공자와 매우 비슷하게 생긴 여성이 앉아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둘이 남매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김새였다. 머리색과 눈색도 거의 똑같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내가 왜 놀랐냐고? 그녀가 평범하게 앉아서 오라버니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더라면 놀랄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 내가 놀란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아, 하세요. 황태자 전하!”

“……괜, 찮습니다.”

그녀가 나의 오라버니에게 과일을 들이대며 ‘아’하고 있었고, 오라버니는 무척 예의 바르게 그녀의 포크를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람?’

나는 당황해서 쩍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알디에프 공자는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러곤 공녀에게 말을 걸었다.

“황녀 전하를 모셔 왔단다. 미냐.”

“어머! 제 정신 좀 봐. 오신 줄도 몰랐네요. 호호호.”

그제야 미냐라고 불린 여성, 리오텐 공국의 제 1공녀 알미냐는 나를 눈치챈 듯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딱 붙어서 과일을 먹여 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나에게 인사해 보였다.

“황녀 전하, 만나 뵈어서 너무나 반가워요.”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십년지기 친구를 오래간만에 본 것처럼 반가움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다. 연기라면 대단하고, 진심이라면 더더욱 대단하다.

“제 이름은 알미냐 리오텐. 리오텐 공국의 제 1공녀랍니다. 미냐라고 불러 주셔도 괜찮아요. 오호호.”

“아, 반갑습니다. 아이샤 드 엘미르예요.”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라버니는 뒤에서 눈으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내가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알미냐 공녀가 그에게 들이댔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 대목이었다.

알미냐 공녀는 내가 상황을 더 살필 시간도 주지 않고 얼른 내 손을 잡았다. 그에 나는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황녀 전하!”

“네, 네?”

“황녀 전하께서는 14세라고 들었어요. 저는 18살이랍니다. 딱 성인식을 앞둔 나이이지요.”

“저는 올해로 스무 살이 됩니다.”

알미냐 공녀가 자기소개하는 가운데, 옆에서 알디에프 공자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말인데!”

알미냐 공녀가 눈을 반짝였다.

“저를 그냥 언니처럼 편히 여겨 주셔요! 말도 편하게 하셔도 된답니다. 호호호!”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크게 당황했다. 언니라니. 그 호칭의 생경함은 둘째치고 공녀인 그녀가 나에게 언니라는 말을 꺼낸 것은 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내가 먼저 제안했다면 모를까.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꿍꿍이가 있는 듯싶었다. 그때, 오라버니가 재빨리 나를 도와주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앉지.”

살았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남몰래 고마움의 눈길을 보낸 뒤, 최대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나와 오라버니의 자리는 양옆이었고, 맞은편에는 알디에프 공자와 알미냐 공녀가 앉아 있는 구조였다.

‘원래 테이블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던가?’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테이블 사이가 가까운 것이 아니라 알미냐 공녀가 몸을 쭉 빼고 앉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런지 알미냐 공녀가 오라버니에게 보내는 뜨거운 시선을 아주 잘 느낄 수가 있었다.

“황녀 전하. 차를 드시겠습니까?”

그때 알디에프 공자가 말을 걸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수 나의 찻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그 차를 보고 나는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그 차는 내가 지난번에 가족들 간의 티타임에서 무척 맛있게 마셨던 차였다.

“이 차가 리오텐 공국의 명차라고 들었어요.”

내가 반가워서 이야기하자, 알디에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관세 협상 품목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향기가 매우 좋지요?”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그 차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온실 안은 어느새 향기로운 차의 내음으로 가득 찼다. 찻잔 안에 채워진 찻물의 색은 공자의 머리 색과 아주 비슷한, 옅은 초록색이었다. 설명을 마친 뒤, 그는 또 나에게 웃어 보였다.

‘……엄청나게 자주 웃네.’

나는 슬슬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공자와 공녀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몇 주 전, 어머니와 아버지가 별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던 것 말이다.

―청혼서를 보내왔더구나.

‘하, 하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반박했다. 그때 분명히 두 분은 말씀하셨다.

청혼서는 그저 우방국으로서 형식적으로 보내는 것일 테고, 아마 리오텐 공국 쪽에서도 적극적인 혼인 의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게다가 두 분은 나와 오라버니가 아직 결혼에 뜻이 없다면서 이미 한참 전에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리오텐 공국, 사실 엄청나게 진심을 담아서 청혼서를 보낸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 둘의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알디에프 공자는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눈웃음을 보였다. 혹은 구태여 나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거나.

알미냐 공녀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과일을 먹여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포크에 과일을 찍어 열렬하게 권했다.

“엘미르의 과일은 무척 맛이 좋네요.”

―라면서 말이다. 당연하지만 사교계에서는 너무나 친근하다 못해 무례하기까지한 행동이었다. 오라버니는 진땀을 흘리면서 거절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시간을 두고 관찰한 결과, 그들의 행동은 한 점의 결론을 향해서 모였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미인계?’

나는 심란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짐작은 갔다.

우리 제국이 리오텐 공국의 우방국이자, 서로 군사 동맹을 체결한 상태라곤 하나 그런 것은 국제 정세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공국에 비해 제국의 크기는 너무나도 컸다. 만약에 제국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작정하고 리오텐 공국을 배신하고자 한다면, 공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리오텐 공국의 초대 대공이 백 년 전, 엘미르 제국에서 독립해 나온 황자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피는 이미 옅어질 대로 옅어졌고, 이제 남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니까.

그러니 리오텐 공국에서도 이웃한 대제국에게 최대한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게다가 이런 경우에 보통 가장 흔한 외교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답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국혼이다. 만약 알미냐 공녀, 혹은 알디에프 공자가 엘미르 제국의 유력한 귀족과 결혼한다면 리오텐은 바라 머지않던 아주 든든한 후방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혼 상대가 만약 황태자인 오라버니나, 황녀인 나라면 더더욱. 알미냐 공녀는 열심히 오라버니에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고 나니 허탈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옆을 보아하니 오라버니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라버니도 고생이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디에프 공자는 그래도 공녀보다는 나았다. 그녀처럼 바짝 의자를 붙여 오지 않고, 나에게 과일을 들이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산점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그도 나에게 계속해서 눈웃음을 보내오는 것은 똑같은데.

어색한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얼마쯤 그렇게 있었을까. 오라버니가 헛기침하며 말문을 텄다.

“두 분과의 티타임,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제 그만 오늘 저녁 환영 연회를 위해서 두 분 모두 궁으로 돌아가 피로를 푸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아이샤, 너도 이만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나는 퍼뜩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눈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눈길을 받아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게다가 멀리서 오신 두 분께서는 아무래도 준비하실 게 많으시지 않겠어요?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는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남은 이야기는 이후 연회에서 계속하도록 해요.”

내가 그녀를 설득하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오늘 파트너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옆에서 알디에프 공자가 말을 거들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내젓는 중이었다. 이 둘, 막강한 적이었다.

* * *

폭풍 같던 티타임이 끝나고 나는 그 길로 바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황후궁에 계셨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며, 어머니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어머, 어쩐 일이니. 아이샤?”

어머니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게요, 어머니.”

하지만 말문을 트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금세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왜 지난번에 청혼서를 보냈다 했더니, 이제 알겠어요.”

“……응?”

“알미냐 공녀는 물론이고, 알디에프 공자까지 단단히 준비하고 온 모양이던데요! 옆에서 보는데 오라버니가 불쌍하기까지 했다고요.”

어머니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말을 듣자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꽤나 놀라신 모양이었다.

“……그랬니?”

“네!”

나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세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랬구나…….”

어머니는 턱을 괴고 잠깐 생각에 잠기셨다. 나는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 정말이지 제대로 거절하신 게 맞으시죠? 그렇지 않고서야 다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런데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할 말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말이다. 사실은.”

“네?”

어머니의 말이 이어지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리오텐 공국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면서 또 청혼서를 들고 왔었다고요? 이번 방문에서?”

“그렇다니까.”

맙소사,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리오텐 공국에서는 정말 진심으로 큰 꿈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알미냐 공녀가 혹시, 아주 혹시라도 우리 오라버니의 아내가 되는 상상을 말이다. 그 상상 속에서 오라버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고, 알미냐 공녀는 그런 오라버니의 팔짱을 끼고 오호호, 웃고 있다.

‘……알미냐 공녀가 오라버니의 아내가 된다고?’

이 제국의 국모가?

말도 안 돼!

난 결사반대야!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재빨리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당연히 거절하실 거죠? 아무리 우방국이라곤 하지만!”

“그럴 거긴 하다만, 아이샤, 들어 보렴.”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공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네 의사를 따르겠지만, 알미냐 공녀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구나. 사실 아무리 누가 반대한대도 만약 이시스가 원한다면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 애의 선택을 지켜보자꾸나. 이시스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죠. 가장 중요한 건 오라버니의 의사죠.”

그 말을 되짚던 나는, 이내 고개를 들고 어머니께 생긋 웃어 보였다.

“그렇죠! 중요한 건 본인의 의사!”

“……?”

어머니의 말이 맞다.

‘그래!’

얼굴이 저절로 펴졌다.

‘오라버니가 알미냐 공녀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지. 오라버니는 우아하고, 품격 있고, 마음이 따뜻하고…… 또 뭐였더라.’

하여간 그 이상형과 알미냐 공녀는 거의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득, 나는 한가지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잠깐만.’

나는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어머니는 자기 얼굴에 무언가 묻기라도 했냐며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여기 있네?

오라버니의 이상형이.

우아하고, 품격 있으며, 마음이 따뜻하고, 황후에 잘 어울리고, 상냥하고, 결단력이 있고, 아이를 좋아하며…… 기타 등등.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는 어머니를 매일 보다가 눈이 너무나 높아져 버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라도 어머니와 같은 분이 있다면 반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최고니까!

“어머니!”

“아이샤?”

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머니에게는 포근한 향기가 났다.

“갑자기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진 거니?”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어머니의 품에서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어머니는 의아해하셨지만, 나는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내 안의 생각이 더욱 구체화 되었다.

그래. 적어도 엘미르 제국의 국모이자 황후가 되려면 우리 어머니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선에서 탈락시켜 버릴 거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내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레나와 시녀장을 향해 당당하게 주문했다.

“오늘 있을 연회를 위해 최고로 꾸며 줘!”

“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던 내가 갑자기 돌아와 뜬금없는 주문을 하니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번 연회에서 가장 빛나고 싶어. 그러니까 평소보다 훨씬 예쁘게 꾸며 주었으면 해.”

그제야 둘은 이해한 듯싶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미냐 공녀!’

나는 투지를 불태웠다.

‘당신이 정말 우리 오라버니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는, 내가 봐 주겠어요!’

나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에 레나가 당황해서 빗을 놓칠 뻔했다는 것은, 아주 작은 소동이었다.

* * *

오묘한 광택이 흐르는 라일락색 드레스에, 등 뒤로 자연스럽게 묶어 내린 남청색 리본. 그리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팔찌, 티아라. 하나로 땋은 풍성한 은발의 머리카락과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는 파란색 눈동자.

나는 거울 속을 면밀하게 들여다보았다. 레나와 시녀장의 솜씨 덕분에 오늘따라 나는 한결 더 빛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들 눈에도 과연 그런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뒤쪽에 있던 시녀들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어떤 것 같아?”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님이세요!”

바로 시녀들의 열광적인 반응 덕분이었다. 아무리 우리 황궁 시녀들이 나에게 콩깍지가 씌어 있다지만, 저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라면 그래도 평소보다는 낫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 반응에 조금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시계를 보니 알디에프 공자가 나를 에스코트하러 찾아올 시간이었다. 방 밖으로 걸어 나오자 과연, 나는 근처에 서 있던 그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알디에프 공자님.”

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는 베이지색 정복에, 암녹색 조끼를 입고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세련되게 손질한 머리카락과 주머니에 늘어뜨린 금시계줄이 그의 매력을 더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인사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예.”

그에 나는 살짝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아닙니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가 눈웃음을 쳤다.

“그저…….”

“……?”

“너무 아름다우셔서 말입니다.”

나는 조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그가 신기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런데 황녀 전하…….”

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을 끌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드리고 싶은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혹시 제가 황녀 전하를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까요? 물론 황녀 전하께서도 저를 알디에프라고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교계에서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친근하다는 표현이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허락해도 될까? 먼저 말을 꺼낸 그를 단번에 거절하는 것이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알디에프 공자가 말을 이었다.

“같이 파트너가 되었는데 서로를 호칭으로만 부르는 것도 어쩐지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음…….’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가 이 엘미르 제국에 있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그의 파트너가 될 텐데, 이름 정도를 허락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샤라고 불러 주세요. 알디에프 님.”

내 말에 그는 슬쩍 웃었다.

“예. 아이샤 님. 그럼 가실까요?”

그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나는 나의 목표를 되짚었다.

오늘 연회는 결코 방심할 수가 없었다. 알디에프와 파트너라는 것도 그랬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나마 나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게 있었다면, 뜻밖에 만난 친구들이었다. 클로에와 로즈, 거기에 애슐리까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세 사람의 모습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 다들 오랜만이야! 왔었구나!”

그런데 세 사람의 얼굴이 약간 이상했다.

‘……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알디에프도 그렇고, 사람들의 반응이 한 박자씩 늦다. 그때, 로즈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외쳤다.

“오늘 정말 예쁘다. 아이샤! 눈이 부실 정도야!”

그에 애슐리도 맞장구를 쳤다.

“정말, 천사가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어.”

“과찬이야…….”

내가 쑥스러워서 중얼거리자, 클로에는 전혀 과찬이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보다 다들. 여기 리오텐 공국의 공자님을 소개할게. 알디에프 리오텐 공자님이라고 하셔.”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알디에프를 소개하자,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 블라임이라고 해요.”

“저, 저는 애슐리 롤랑이랍니다.”

“클로에 디몬트라고 해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모두 제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서로를 소개시켜 줄 수 있어서 기뻐요.”

내 말에 친구들과 알디에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를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다들 음료수 잔 하나씩을 집어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로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꾸민 이유가 있어? 설마…….”

설마?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로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이 연회에 왔다든가?”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오늘 내 드레스는 전투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선 제압.

나는 리오텐 공녀의 전략―오라버니에게 들이대기― 를 무찌르기 위해, 드레스라는 갑옷을 입고 사교계라는 전장에 참석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니. 오늘의 나는 그런 달콤하고 부드러운 일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애슐리의 말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 사실 다른 영애들이 엄청 꾸민 건 그 분 때문이거든. 그 지난번에 하지 연회에서도 뵈었던 신관님.”

“……하지 연회의 신관님이라면, 룬 님?”

룬 님이 또 여기에 오신다고? 내 의문에 클로에가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응, 그분이 이번에 황궁 사제가 되셨으니까. 리오텐 공국에서 귀빈이 오셨으니 그분께서도 환영의 의미로 오시나 봐.”

“그랬구나……. 아니, 그런데 나도 모르는 걸 다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멋진 분에 대한 소문이라면, 사교계의 정보통이 제일 빠르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모습을 살폈다.

‘음, 오늘 차려입고 나와서 다행이야.’

적어도 그의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큼큼, 헛기침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알미냐 공녀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어디 있지?’

나는 알디에프,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알미냐 공녀를 찾기 위해 연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알미냐 공녀가 먼저 나를 향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옆에 이시스 오라버니를 낀 채였다. 그녀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아이샤 황녀 전하! 계속 찾고 있었답니다. 호호호.”

“어머. 그러셨군요.”

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나를 향해 더욱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세 분들은 친구이신가요?”

“네, 소개해 드릴게요. 클로에, 로즈, 애슐리. 이분은 알미냐 리오텐 공녀님이셔.”

아까와 비슷하게 친구들은 알미냐 공녀를 향해 인사했다.

“클로에 디몬트라고 하여요.”

“로즈 블라임이랍니다. 엘미르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애슐리 롤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호호.”

그녀는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가워요. 황녀 전하의 친구분들이라면 저도 모쪼록 친하게 지내고 싶은걸요. 저를 언니처럼 여겨 주신다면 기쁠 거예요.”

친구들은 아까의 나처럼 무척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녀에게서 진하게 느껴지는 호의가 대체 무슨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미냐 공녀는 그에 그치지 않고 오라버니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샤 황녀 전하께는 좋은 친구분이 정말 많으시네요. 오라버니로서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의도한 것처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이 엘미르 제국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이대로 여러분들과 짧은 시간만 함께하고 돌아간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영! 원! 히! 이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호호호!”

벌써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라버니와 결혼해서 엘미르로 옮겨 오는 상상이 가득한 듯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오라버니의 얼굴은 좀 피곤해 보였다. 그런 그가 알미냐에게 마음이 없는 것은 명백해 보였기에, 나는 잽싸게 끼어들었다.

“어머,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오라버니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라버니께서는 아직 배움에 뜻이 있으셔서,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시간이 없으시답니다.”

내 말에 알미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내가 잘 되어 가는 일에 재를 뿌리고 있다는 듯했다.

“물론 황태자 전하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죠. 하지만…….”

그녀는 가지고 온 깃털 부채를 확 펼쳐 들었다.

“남녀의 일은 아주 기묘하답니다. 세상엔 생각지도 못한 만남 속에 불꽃처럼 싹트는 사랑이 존재하니까 말이에요. 황녀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찡긋 눈인사를 해 보였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 불꽃처럼 싹트는 사랑?’

불꽃은커녕 한숨만 나오는 오라버니의 피곤한 얼굴만 봐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저어.”

친구들은 이 분위기에 조금 어색해진 모양이었다. 애슐리가 나를 부르기에, 나는 입가에 생긋 미소를 달았다.

“무슨 일이야. 애슐리?”

“음, 그게…….”

그녀는 예쁜 청보라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걸고 싶었는데 할 말이 없어서 말을 찾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그러자 클로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언제 보아도 순발력이 좋은 그녀였다.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네. 춤이라도 한 곡 추는 게 어때?”

“아!”

그 말에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와 로즈는 둘 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아서 마땅한 파트너가 없었다. 클로에도 딱히 오늘 파트너를 데려오지 않은 것 같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나와 오라버니, 그리고 알디에프 공자와 알미냐 공녀뿐이었다. 의외로 오라버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트너에 대한 책임감일까?

“알미냐 공녀님, 춤을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공녀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가 그 신청을 당연히 수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저……. 황태자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긴장했더니 아무래도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요.”

그녀가 오라버니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춤은 무리일 것 같은데……. 혹시 부축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신사였다.

“물론입니다. 머리가 많이 아프신가요?”

오라버니가 그녀를 살짝 부축하자, 알미냐 공녀는 대놓고 오라버니의 품에 조금씩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나는 연회장 안에 있는 다른 영애들의 살기를 피부로 느꼈다.

‘감히!’

‘우리 황태자 전하께!’

아마 그 시선을 말로 통역한다면,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알미냐 공녀는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었다.

“휴…….”

그 가련한 모양새에, 오라버니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군요.”

“네, 저어…….”

그녀가 살짝 반쯤 눈을 내리깔았다.

“어디 같이 테라스 같은 곳이라도 가시지 않겠어요? 바람을 쐬면 좀 나을 것 같은데…….”

‘…….’

티가 나도 너무나 티가 나는 연기였다. 주위에서 영애들의 눈초리가 한층 강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니, 머리가 아프시면 바람을 쐬시는 것보다는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으실까요. 가을인데 차가운 바람을 쐬시면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오라버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알미냐 공녀가 순간 말을 더듬었다.

“……네, 네?”

“약을 가져다드릴 테니, 이만 궁에 돌아가서 푹 쉬시지요. 그러고 보니 여독도 아직 덜 풀리셨을 테고요.”

오라버니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근처의 시종을 향해 알미냐 공녀를 모시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 말에 알미냐 공녀는 재빨리 몸을 바로 세웠다.

“아, 아뇨. 생각해 보니 다 나은 것 같아요.”

“네?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사이에 두통이 다 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별로 심각하지 않았던 거겠지요. 지금은 머리가 아주 맑답니다. 오호호호…….”

정말 가관이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순수한 반응이 알미냐를 물리쳤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알미냐 공녀는 억지웃음을 짓더니 오라버니에게 제안했다.

“머리도 아프지 않으니, 같이 춤을 추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음. 예.”

오라버니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파트너가 춤을 요청하는 데 거절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둘이 댄스홀로 걸어나가자, 남은 것은 나와 알디에프 공자였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려는 것 같자, 나는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오라버니와 공녀님께서 돌아올 때까지요.”

알미냐 공녀의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것도 있었고, 그다지 춤을 추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알디에프와 춤을 출 때 그가 나에게 또 어떤 말들을 할지 몰랐으니 말이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웃어 보였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저 멀리에서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꽤 반가웠기에, 나는 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비온 공자님!”

그러자, 그가 고개를 휙 돌리는 것이 보였다. 먼 거리였는데도 그가 내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가 대단한 마검사이기 때문일까? 그가 나를 바라보자, 나는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여기예요.”

그가 성큼성큼 걸어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 공자님도 잘 지내셨지요? 아, 그리고…….”

나는 내 친구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클로에 디몬트, 애슐리 롤랑, 그리고 로즈 블라임이에요. 모두 제 친구들이랍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이번에는 알디에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신사분은…….”

“저는 직접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저는 리오텐 공국에서 온 알디에프 공자입니다. 성함이?”

“……비온 벨트모어 공자입니다.”

“아, 벨트모어 가문의 분이셨군요.”

둘은 서로 악수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말을 덧붙였다.

“알디에프 공자님께서는 계시는 동안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실 예정이시랍니다.”

착각이었을까? 악수하던 비온 공자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는데.

“……이번 사절단에 따라오신 모양이군요.”

무뚝뚝한 비온 공자가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다.

“‘짧은 시간’이시겠지만, 엘미르 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왜 짧은 시간이라는 비온 공자의 말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았을까? 나는 조금 의아해지고 말았다. 알디에프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샤 님께서 워낙 저를 신경 써 주셨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 되고 있답니다.”

비온 공자의 눈초리가 싸늘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샤 님이라…… 거리낌 없는 호칭이군요.”

“파트너를 딱딱하게 부를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알디에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비온 공자는 아무래도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둘 다 정반대의 성격인 것 같으니 그럴 만도 한가.

나는 멀뚱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비온 공자에 오라버니, 그리고 알디에프 공자라니. 오늘 영애들의 밤잠은 다 이루었겠군.’

안 그래도 곳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뜨거웠다. 그때, 연회장의 강한 향수 냄새 때문인지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졌다. 나는 작은 소리로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둘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감기에 걸리신 것은 아니시지요?”

나는 그들의 열렬한 반응에 조금 놀랐다.

“아니에요.”

내 대답을 들은 둘은 고개를 돌려 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던 와중에, 왈츠의 노랫가락이 드디어 끝났다. 한 곡이 끝난 것이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댄스홀로부터 들려왔다. 오라버니의 팔짱을 끼고 돌아오는 알미냐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알디에프가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말을 돌릴 틈도 없었다.

“저와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뜨끔하고 말았다.

“아, 저…… 춤은 서투른데.”

오늘은 그다지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상대와 춤 한번 추지 않는 건 실례겠지.’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내가 살며시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받았다. 그러곤, 허리를 숙였다.

“……?!”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손등에 키스하려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순간…….

갑자기 알디에프의 어깨가 양옆에서 잡혔다.

“잠깐!”

“……!”

그의 어깨 중 한쪽은 이시스 오라버니가, 한쪽은 비온 공자가 잡고 있었다.

“예?”

알디에프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하, 하, 하. 리오텐은 참 자유로운 국가인 모양이군요.”

그러자 알디에프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아름다운 그림과 음악, 멋진 시가 넘쳐 흐르는 예술의 나라랍니다.”

“하지만 이곳은 엘미르 제국입니다.”

비온 공자가 딱딱하게 말을 받았다.

“여기에서 파트너에게 함부로 손등의 키스를 하는 것은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약혼자라도 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비온 공자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과장하는 것 같았다.

“아, 그렇습니까?”

알디에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엘미르 제국의 풍습에 익숙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다행히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내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 어쨌거나,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성대한 제안을 받았으니, 춤을 춰야겠지.

오라버니와 비온 공자의 얼굴은 영 떨떠름해 보였고, 알미냐 공녀는 그런 오라버니의 마음을 돌리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했다.

‘그래, 어쨌거나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알미냐 공녀를 막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알디에프 공자와 함께 댄스홀로 나갔다. 궁정 악사는 마침 가볍고 발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연회 분위기에 딱 알맞은 노래였다.

게다가 알디에프 공자는 의외로 꽤 좋은 상대였다. 그는 부드럽게 나를 이끌어 주었고, 그와 춤을 추는 내내 나는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속삭였다.

“춤을 잘 추시는걸요. 겸양이셨군요.”

“……감사해요.”

나는 뒤늦게 말을 받았다.

“알디에프 님께서도 무척 춤에 능숙하신걸요.”

그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짧은 왈츠가 끝나자 근처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그에 손을 흔들어 주고, 우리 둘이 원래 자리로 향할 때였다. 근처의 영애들에게서 작은 비명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사교계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영애들의 비명이 어떤 느낌에서 나온 것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서운 것을 보아서 나오는 비명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잘생긴 사람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지르게 되는 감탄사.’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룬 님이 계실 거라는 것에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은 채로.

그러자 정말, 그곳에는 룬 님이 계셨다.

이번에 황궁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그는 환영식에 있을 작은 의식 때문에 이곳에 온 듯했다. 늘 그렇듯이 흰 신관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신성함이 느껴졌다.

그와는 반대로,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거의 쓰러질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몇몇 영애는 쓰러진 것도 같았다. 짧은 비명을 남기면서 말이다.

‘룬 님.’

나는 반가워서 속으로 외쳤다. 오래간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수도에 함께 나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던가?

어쨌거나 생각보다도 그는 신전에서 잘해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환하게 웃는데, 문득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

그의 금안을 마주하자, 나는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새삼스럽게 가슴이 떨려 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고 말았다. 옆에서 들려온 감탄사 때문이었다.

“……세, 세상에!”

“……?”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알미냐 공녀가 있었다. 그녀는 딱 봐도 멀쩡한 상태가 아닌 듯싶었다. 새빨개진 얼굴에서부터 그녀의 정신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은 몽롱하게 풀린 채였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그녀는 비틀거렸다.

‘……위험한걸?’

이런 반응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룬 님의 미모가 워낙에 강력해야지 말이다. 하지만 알미냐 공녀의 반응은 한층 더 격한 듯했다.

“마치…… 명화에서나 나올 법한 미모, 신이 지상에 내려오신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아름다워. 아름다워요.”

그녀는 풀린 눈으로 중얼중얼거렸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옆에 있던 애슐리나 로즈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은 마치 지난번 시내를 나갔을 때 룬 님께 비척비척 다가오던 사람들의 반응과 닮아 있어서, 나는 제법 불안해지고 말았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곁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이 격한 만큼, 그녀로부터 룬 님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발견한 룬 님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의 반응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숫제 홀린 듯이 그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러자 룬 님은 의아한 듯했다. 하지만 나에게 걸어오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으아아!’

나는 재빨리 나섰다. 그 둘의 사이에 서서, 알미냐 공녀의 앞을 막은 것이다.

“하하, 오, 오래간만에 뵈어요. 룬 님.”

그러고 나서 내가 룬 님에게 말을 걸자, 알미냐 공녀는 조금 정신을 차린 듯했다.

“룬…… 님?”

하지만 정신을 차린 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룬, 룬 님이라니. 어쩌면 이름도 이렇게 간결하게 아름다우실 수가…….”

그녀가 더 가까이 룬 님에게 다가가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룬 님을 소개했다.

“이분은 빛의 신전 신관님이시랍니다.”

그러면서 나는 은근슬쩍 단호하게 그녀의 앞을 막았다.

‘정신 차리시죠!’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팍팍 노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룬 님에게 단단히 홀려 버린 알미냐 공녀의 반응은 만만치 않았다.

‘저를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어찌나 강렬하게 룬 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녀의 눈은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비킬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막아야 했다. 그녀가 오라버니를 노리는 것도 나에게 있어선 크나큰 문제지만, 룬 님을 노린다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왜지?

‘…….’

나는 일부러 그 대답을 지워 버렸다. 알미냐는 하지만 나의 치열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룬 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성으로서는 굉장히 용기를 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안, 안녕하신가요. 제 이름은 알미냐 리오텐이라고 한답니다. 리오텐 공국의 공녀로서, 이 엘미르 제국을 처음 방문했어요. 시, 신관님이시지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알디에프도 그렇고 알미냐는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구슬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면 설레지 않을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역시 루미나스 님은 보통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 남자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시군요.”

그는 그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러자 알미냐는 매우 당황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룬 님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입니다. 황녀 전하. 하지 연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지난번 시내에서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한 채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나는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자 알미냐가 나와 룬 님의 얼굴을 살폈다. 명백하게 낭패한 표정이었다.

“두, 두 분은 서로 아시는 사이이신가요?”

조금 전에 내가 그녀에게 룬 님을 먼저 소개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우리 사이로 다가온 이시스 오라버니가 룬 님을 향해 덧붙여 말했다.

“아이샤는 요즘 상급 정령을 소환하느라 매우 바쁘다네.”

그렇게 운을 떼자, 로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급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 정말요?!”

정령에 관심이 많은 그녀로서는 매우 흥분한 듯했다.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황궁 안에서는 알음알음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아직 사교계로 퍼져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벌써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니.”

“역시 아이샤는 대단해.”

애슐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클로에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기의 천재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겠네. 멋져, 아이샤.”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 무뚝뚝한 비온 공자마저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금방 이야기의 주제는 나로 옮겨갔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대단하시군요.”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던 룬 님이 입을 열었다.

“노력하시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느낌이었다. 정령왕인 그에게서 직접 격려를 들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주변은 동시에 모두 굳어지고 말았다. 그야, 웃음을 띤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공녀는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에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알디에프 공자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룬 님과 잠깐 이야기를 하고 와도 괜찮을까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어떤 일로?”

“성녀로서, 긴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대충 납득한 표정이었다. ‘성녀’라고 신전에서 처음 줬을 때는 그다지 필요 없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받고 나니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을 줄 몰랐다.

나는 슬며시 룬 님께 눈짓했다.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룬 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와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초가을의 아름다운 밤하늘. 그 아래 테라스는 다행히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주위를 단단히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서 말을 걸었다. 성녀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저, 룬 님.”

“예.”

“아니, 루미나스 님.”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자 인간 예법을 지키고 있던 루미나스 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러지?”

나는 손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보고자, 그의 이상형이라도 물어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그만두었다. 지금은 진지해질 때였다.

“……긴히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정령왕님께요.”

일부러 호칭까지 바꾼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룬 님이라는 신관이 아니라, 정령왕님인 루미나스 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는 뜻.

망설이던 나는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건가요?”

나로서는 무척이나 절박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에게 물어볼 생각까지 했겠는가. 몇 달째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가 없었다.

루가 나에게 자질은 충분하다고 했는데도 그랬다. 어쩌면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마력이나 정령 친화력 이외에도 다른 것이 필요한 걸지 모른다. 정령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이라든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인간 흉내를 내지 않은 그는 평소보다 무심하고, 나른해 보였다. 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에 무언가가 필요하긴 하지.”

“……!”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종류는 사람마다 다른 데다가…….”

그가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기서 알려 주는 것은, 편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아.”

나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왕님과 인연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상급 정령을 소환하려는 데 있어 그에게 의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루미나스 님은 그것을 꼬집어 주시고 싶었던 것이겠지. 나는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괜찮다.”

우리 둘의 사이에는 침묵이 깃들었다. 나는 애써 입을 먼저 열었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그게 전부예요. 이만 들어갈까요?”

내가 그를 향해 묻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무얼 얻어야 하는 걸까. 그것을 알아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절로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기운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부터 제대로 알아보자. 훈련도 다시 시작하고…….’

내가 테라스 밖을 벗어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루미나스 님이 입을 열었다.

“기대하고 있다.”

“네?”

뒤를 돌아보자, 달빛 때문에 루미나스 님이 역광에 잠겨 있었다. 밤하늘의 보름달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루미나스 님이 말했다.

“너는 나를 소환하겠다고 말했지.”

“……네.”

나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그걸 기대하고 있겠다는 뜻이다.”

“……!”

“상급 정령을 소환해 내고, 나에게까지 오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루미나스 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고개를 떨궜다.

“……네!”

한층 각오가 더해졌다. 이내 나는 고개를 들어 루미나스 님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언젠간 꼭 소환해 내고 말 테니까, 그, 그때까지.”

“…….”

“기다려 주세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약간의 시간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듯, 내 몸 안으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

루미나스 님, 그러니까 룬 님과 테라스에서 나온 다음 나는 알미냐 공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에게 듣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그녀는 먼저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그녀도 자신이 안 좋은 꼴을 보였다는 것을 자각한 모양이었다.

‘뭐.’

이튿날이 돼선 나도 조금 자기반성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손님이고, 공녀인데 괜히 삐딱하게 군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나는 야외 정원에 나와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름도 물러간 선선한 가을, 지금은 딱 야외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에 좋은 날씨였다.

역시 나는 알미냐 공녀가 눈에 차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너무 소중한 나머지 내 기준이 높은 것도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인 것을 어떡하겠는가.

만약 내가 보기에도 오라버니와 정말 잘 어울리고, 오라버니도 기꺼워하는 상대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알미냐 공녀와 오라버니는 어울리지도 않는데다가 오라버니도 부담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될 수 있으면 알미냐 공녀와 오라버니가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레나가 나에게 말을 전달했다.

“황녀 전하. 손님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신데?”

내가 가볍게 묻자, 그녀가 대답해 주었다.

“알미냐 리오텐 공녀님이십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본인이 직접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와 다투러 온 거라면 어떡하지. 하지만 레나에게 안내되어 온 알미냐 공녀는 새롭게 기합을 다진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좋은 아침이지요?”

그녀는 옷자락을 살짝 들며 나에게 예쁘게 인사해 보였다. 나는 그에 화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는 속으로는 어쨌거나, 겉으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순순히 앉았다.

“마침 차를 즐기고 있었는데, 같이 드시겠어요?”

“어머, 물론이지요.”

그녀는 냉큼 대답했다. 그녀 몫의 찻잔이 준비되고, 찻물이 쪼르륵 그녀의 찻잔에 부어졌다.

“이 차는 리오텐의 차네요!”

그 향을 맡자마자 알미냐 공녀가 손뼉을 짝, 쳤다. 자신의 공국에서 재배된 차가 나온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고소하고 가벼운 이 차는 아침에 마시기 제격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이 차에 빠져서요. 자주 마시고 있답니다.”

그녀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

나는 그 모습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순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너무나 짧은 것이었기 때문에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와 나는 어색한 사이가 으레 그러하듯, 날씨와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날씨가 참 좋지요?”

“네,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네요.”

다시 한 번, 차를 마셨다.

“엘미르 제국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해요.”

“환대에 감사드려요.”

의미 없는 대화들이 흘러갔다. 나는 차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힐긋 알미냐 공녀를 바라보았다. 인내심이라는 모래시계 속 모래가 점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알미냐 공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 또한 지금의 대화가 무익하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그녀는 가볍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그 소리가 왜인지 매우 비장하게 들렸다면 착각일까? 그녀가 작게 심호흡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황녀 전하. 사실 오늘 황녀 전하를 찾아온 건…….”

“찾아온 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랍니다.”

“…….”

그 의도가 반쯤은 짐작이 되었지만 나는 일부러 모르는 채 되물었다.

“그게 무엇일까요?”

“어제 일을 사과드리고 싶어서예요.”

알미냐 공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황녀 전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이제 전략을 바꾸기로 한 걸까? 나는 조금 황당해지고 말았다. 오라버니에게 무작정 들이대는 거에서, 주변인을 포섭하는 걸로 말이다. 오라버니를 생각한다면 그나마 이게 더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시군요.”

내 떨떠름한 반응에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네.”

“저는 이시스 황태자 전하와 국혼하고 싶습니다.”

아까 자기 반성하던 것을 취소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녀는 결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성싶었다. 정말 당차기 그지없는 그녀였다. 무슨 말을 할지 몰랐지만, 나는 일단 침착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 내 모습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래서, 제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요?”

“네.”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가 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부탁도 영 못마땅하기만 했다.

내가 그녀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제가 공녀를 도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담백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없었다.

리오텐 공국이 우리의 우방국이라곤 하나, 엘미르 제국과 공국은 영토부터 몇 배나 차이가 난다. 공국이 우리에게 숙이는 처지라면 모를까 우리가 먼저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먼저 그녀와 결혼을 원한다면 달라지겠지만, 내가 앞서서 팔 벗고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어제 어느 신관님을 보시며 엄청나게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셨던가요?”

탁,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룬 님의 일을 지적했다. 그 말에 알미냐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개졌다. 그녀도 어제의 일이 창피하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룬 님의 얼굴에 마력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할 만한 행동으로는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그녀가 적극적으로 그 나라의 황태자에게 구혼하는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녀는 큼큼, 헛기침했다.

“그, 그야 잘생긴 건 잘생긴 거니까요.”

“…….”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

“그 어떠한 화가의 그림보다도, 장인의 조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그래요, 그분의 모습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문화재로 지정해도 되겠다 싶은 미모는 정말로 처음이었다니까요.”

몽롱한 얼굴로 말을 잇는 것이, 아직도 룬 님의 마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

“알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공녀께서는 무척 솔직한 분이시군요.”

“……큼. 어쨌거나, 제 입장은 한결같습니다.”

그녀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리오텐 공국과 엘미르 제국은 동맹국. 게다가 그 한 뿌리도 같으니 문화나 언어에 있어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만약 이 국혼이 성사된다면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공왕과 공왕비께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가요.”

“네, 모두가 기뻐하는 결혼이 될 거예요. 엘미르에서는 든든한 동맹국을 가지게 되고, 리오텐으로서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니까요.”

모두가 기뻐하는 결혼이라.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과 이시스 오라버니가 결혼했을 때의 이점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감 있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와 오라버니의 결혼이 희망찬 미래가 될 것이라고 완전히 믿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리오텐 공국은 여러 가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의 힘을 합치면 대륙의 패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지금 이덴베르 제국이 위협을 해 오고 있는 만큼 최대한 동맹을 많이 맺어 놓으면 맺어 놓을수록 좋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라 간의 이익을 떠난다면, 알미냐 공녀의 진심은 어떤 것일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해요.”

열심히 설명을 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인가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공녀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저를 떠보시기 위한 것인가요?”

“그냥 공녀의 마음이 궁금할 뿐이에요. 오라버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어머니도 말씀하셨지만, 나는 오라버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아무리 국익을 위해 결혼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왕이면 오라버니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그의 반려가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것들 중에 오라버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내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주 한참 뒤에서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무척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

“진심으로요. 정식으로 뵌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지만……. 오래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바로 알겠어요. 그분이 무척이나 좋은 분이시라는걸.”

알미냐 공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른 것들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정략혼을 한다고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리실 거예요. 굳이 어린 네가 나설 필요 없다면서, 충분히 외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에요. 두 분 다 끔찍하게 저를 아껴 주시거든요. 만약 국혼이 이루어진다면 부모님 앞에서는 황태자 전하의 눈부신 미모에 첫눈에 반했다고 할 생각이랍니다.”

그녀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이미 청혼서를 보내오시지 않으셨던가요? 저는 공왕께서 그걸 보내신 줄 알았답니다.”

“아니에요. 정확히는 저와 제 오라버니의 이름으로 보낸 거니, 굳이 아버지 폐하께 알리지 않아도 보낼 수 있었지요.”

“그렇게까지 엘미르 제국과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나요?”

“황녀 전하께서도 지금 리오텐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알고 계시겠지요? 이덴베르의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요.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

“저는 할 줄 아는 게 그다지 없어요.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나마 제가 생각해 낸 건 이 정도뿐이지요. 그리고 그 작전도 아무래도 점점 실패해 가고 있는 것 같고요.”

알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라버니의 곤란한 표정은 정말 안쓰러웠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가 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 것은 알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제가 많이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그녀가 눈치 없던 게 아니라, 내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건방지다고 하셔도 어쩔 수가 없어요. 가족들을 위해, 나라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보기로 했으니까요.”

“…….”

“……항상 가족들에게 보호만 받던 제가 처음으로 세운 ‘목표’예요.”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한 이야기와 나의 결심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염치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손은, 숨기려 한 것 같지만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당차게 말하긴 했어도 그녀 나름대로 여기까지 찾아오는데 큰 각오가 필요했겠지.

어쩌면 나라도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알미냐 공녀처럼 행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알 수도 없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행동들이 조금씩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란 듯 자색 눈동자가 크게 뜨여진 채였다.

“……그, 그럼?”

“도와줄게요.”

“……!”

“공녀의 말대로 오라버니의 선택은 오라버니의 몫이니까. 괜히 방해하지도 않겠어요.”

“……황녀님!”

“그래도 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마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은 것뿐이니.”

그나저나, 도와준다면 무엇부터 도와줘야 하는 거지? 연애 사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에 잠겼던 나는 문득 또래 영애들이 예전에 나에게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오라버니의 이상형을 아시나요?”

“아, 아니요?”

“그러면 그것부터 알려 드릴게요.”

“어머머!”

알미냐 공녀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이상형이라니! 그대로만 따라 하면 완전히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어요!”

“……그렇죠.”

나는 약간 애도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시녀에게 부탁해서 필기구와 종이까지 준비했다. 적어서 모두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이제 설명해 주세요!”

“그럼, 설명할게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 오라버니는 우아하고 단아한 분을 좋아하세요.”

“어쩜, 그러실 것 같았어요. 화려한 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황후에 걸맞은 지성과 품위, 그리고 단결력을 가진 분을 선호하시지요.”

“당연한 이야기예요. 황태자 전하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나아가 이 제국의 국모가 된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백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 연상을 좋아하세요.”

“연상…… 저는 연하인데…….”

“또…… 그러면서도 밝은 성격과 상냥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 그러시군요.”

“또…….”

“……아직 더 있나요?”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줄줄 읊어 주었다. 그것을 처음에는 열심히 듣고 있던 알미냐 공녀는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점점 복잡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랍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얼굴로 자신이 적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황태자 전하께서는 우아하고 단아하신데다가 황후에 걸맞은 지성과 품위, 단결력을 가지고, 연상이시며, 아이들을 좋아하고, 밝고, 상냥한 분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이시지요?”

“……네.”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깊게 내려앉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일단 이상형은 그렇다는 거예요.”

“그, 그렇군요.”

“오라버니의 마음에 들고 싶으시다면, 지금처럼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거예요. 오라버니는 단아하고 우아한 분을 좋아하세요. 품위가 몸 전체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분이요.”

마치 우리 어머니처럼 말이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요……?”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

“그럼 그렇게 꾸며 볼까요?”

“네?”

그녀는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나는 레나를 불렀다.

“레나! 드레스룸으로 가자!”

“……?”

알미냐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혹시 오늘 오라버니를 만날 약속이 있나요?”

“아…… 마침 티타임을 하나 잡아 놓긴 했는데…….”

“아주 좋아요. 시간은 언제인가요?”

“두 시간 뒤…… 인데, 왜 그러시나요?”

“완벽하군요.”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타임을 위해서, 알미냐 공녀님을 꾸며 보도록 하겠어요.”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알미냐 공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 * *

드레스룸으로 향한 나와 알미냐는 수많은 옷들 안에서 방황했다. 드레스룸에는 나를 위한 완벽하게 재단된 옷들만 있어서 알미냐 공녀에게는 약간 작았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조금 컸던 것이다. 그래도 드레스 밑단이 길게 이어지는 옷을 고르면 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옷들의 향연에 어리벙벙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드레스 룸에 익숙한 나는 눈짐작으로 그녀에게 어울릴 옷들을 여러 개 포착해 내었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최종적으로 골라진 옷은 라일락색이 무척 아름다운 비단 드레스였다. 그에 곁들이는 리본은 짙은 보라색, 그리고 우아해 보이는 양산과 은색 수수한 팔찌. 너무 화려해 보이지 않도록 많은 액세서리는 차지 않았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선 그녀를 화장대 앞에 앉혔다.

“레나, 조금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스타일로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황녀 전하.”

레나는 심호흡을 했다. 화장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다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 모양을 다듬는 시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몇 배의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예쁘게 그녀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의자에 앉아 태평하게 구경했다. 남이 꾸미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꽤 재밌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왜 시녀들이 날 꾸미는 걸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러한 시답잖은 감상도 함께.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알미냐 공녀의 스타일링이 모두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녀의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연두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다이아몬드 머리핀과 보라색 머리 장식으로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를 최대한 살리는 수수한 화장과 라일락색 드레스는 평소보다 그녀를 훨씬 더 우아하게 해 주었다. 무척 흡족한 결과였다.

그것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는지, 알미냐 공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이게…… 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티타임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네요.”

그 말에 흠칫 놀라서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늦지 않으려면 얼른 가야겠지요?”

그러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감동을 받은 것인지, 그녀의 눈은 울망해져 있었다.

“가, 감사해요. 황녀 전하.”

“울지 말고요. 눈화장 번지면 어떡해요.”

“그, 그러네요.”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저, 그럼 다녀올게요.”

“건투를 빌어요. 내가 말한 거 잊지 말고요.”

“네, 네!”

그녀는 환한 표정이 되어서 밖을 나갔다.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할 도리를 한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품을 했다. 별거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다.

‘결혼이라.’

나는 물끄러미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은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소녀가 비치고 있었다. 알미냐 공녀는 확실하게 말했다. 만약에 그녀가 오라버니와 결혼하면 누구나 축복해 주는 결혼이 될 거라고.

‘……누구에게나 축복받는 결혼이란,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나는 물끄러미 그 창문 속에 보이는 나를 들여다보았다.

* * *

이튿날 아침, 나는 늘 그렇듯이 정원에 수련하러 나간 참이었다. 그제는 리오텐 공자를 맞이하느라 이것저것 바빠서 못했지만, 수련은 매일같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마치 어제처럼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누구일지 따질 것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리오텐 공녀, 알미냐였다. 아침부터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환했다.

“황녀 전하!”

그녀는 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활발한 움직임이었다.

“어, 어제 황태자 전하께 ‘오늘은 뭔가 다르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

수련하고 있던 나는 방해받은 것이 약간 떨떠름했지만 말이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조금만 자리를 옮겨 주시겠어요? 거기는 제 과녁이라…….”

그녀는 내가 항상 빛의 화살을 맞추는 나무 과녁 옆에 서 있었다. 루와 리미에가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네? 무슨 상태라고요?”

“제가 지금은 조금 바빠서…….”

“꺄아악!!!”

그런데 그녀가 갑작스레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닌가.

“……공녀?!”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버, 벌레!”

“…….”

나는 할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가 가리킨 곳에 큰 벌레가 하나 있긴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풀이 많으니까 거기에 벌레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쩔 수 없지요. 여긴 야외인걸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알미냐는 샐쭉하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저는 벌레가 싫어요.”

그러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말했다.

“게다가 훈련을 이런 곳에서 하시나요? 수풀이 무성해서 그런지, 가을인데도 덥네요.”

그 뒤로도 그녀는 이것저것을 투덜거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그래요. 그럼 자리를 옮겨요.”

어쨌거나 손님을 대접하기에 좋은 자리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자 문득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정말 어른스러우시네요.”

그녀의 얼굴은 조금 붉어진 채였다.

“죄송해요. 제가 투덜거리기만 했죠? 못난 모습만 보이고…….”

그녀도 자신이 투덜거리기만 했다는 자각이 생긴 모양이었다.

“자리는 옮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있어요. 제가 가고 난 뒤에도 계속 훈련을 하실 테지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가 간 이후에도 계속 훈련을 할 생각이긴 했다.

“그래도 마냥 서 있을 수는 없으니, 저기 벤치에 같이 앉아요.”

내 제안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네, 좋아요!”

나는 소환된 리미에와 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두 손에 내려앉은 정령들을 나의 명령을 기다리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가 다시 보자.”

“네, 주인님.”

“안녕히 계세요!”

빛무리가 서서히 흩어짐과 동시에 정령들은 역소환되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미냐는 약간 멍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 캐물을까 하다가 말았다.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어떡하겠는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와 함께 벤치로 걸어갔다.

적당히 데워진 그곳에 앉자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한동안 말이 없는 듯하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황녀 전하.”

“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정말로요.”

“괜찮아요. 제가 돕기로 한 거니까 당연하죠.”

그녀는 매우 쑥스러운 듯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정원의 풍경을 구경했다. 약간의 휴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때 미냐가 말을 이었다.

“……전하를 보고 있노라니 스스로가 좀 부끄럽네요.”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전하께서는 어리신데도 불구하고 벌써 수많은 일들을 해 오셨잖아요.”

“…….”

“공국에서 제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얼마나 철부지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어서요.”

그녀가 문득 말끝을 흐렸다.

“이래서야 가족을 지킨다고 해 놓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어요.”

“…….”

벤치에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졌다. 나는 할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던 알미냐 공녀는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전하께서는 저를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괜찮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걱정 말아요.”

내 말에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뭔가 다른 것 같다.’라고 들으셨다면서요?”

“……네, 그게요?”

“어제보다는 낫다는 거잖아요.”

나는 생긋 웃었다.

“분명히 나아지고 있어요.”

내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와서 자신이 없어진 건 아니겠죠? 어제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셨잖아요.”

“…….”

“리오텐과 엘미르가 이어지면 어떻게 될 거다. 나는 어떻게 할 거다. 그렇게. 그 답을 낸 건 공녀가 해낸 일이 아닌가요?”

그녀는 한참 입을 달싹거렸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아직 자신 있어요!”

그리고 씩 웃어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녀가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설령 제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해도, 가족들은 철부지인 저를 사랑해 주겠지요! 정 제가 안 되면 저의 오라버니가 미인계를 쓰는 걸로 하죠.”

“…….”

그 오라버니의 의사는 물은 걸까? 알미냐 공녀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저. 내일 오후에 혹시 시간이 있으신가요?”

“일정은 비어 있어요. 무슨 일이신가요?”

“답례를 드릴 건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황녀 전하와 티타임을 가지고 싶어요. 제가 리오텐 공국에서 가져온 맛있는 티푸드와 차도 내놓을게요. 네? 어떠세요?”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제안했다. 그녀의 나이가 19살. 나와 5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들었는데 이럴 때 보면 꼭 나보다 어린 것만 같았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몇 시까지 찾아가면 될까요?”

“오후 세 시…… 아니, 두 시요! 느긋하게 티파티를 즐겨요.”

알미냐 공녀가 활짝 웃었다.

“초대에 감사드려요. 그러면 저는 이만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네? 바쁘신가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정령술 훈련을 계속해야 하거든요.”

“아아…….”

그녀가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령을 좋아하시는군요.”

나는 그에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가시기 전에.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문득 그녀가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추었다.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

알미냐 공녀는 궁금한 게 정말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시고, 다만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말씀하세요.”

“이시스 황태자 전하의 이상형은 들었는데, 황녀 전하의 이상형은 어떠신가 궁금해서요.”

“…….”

나는 눈만 깜빡이고 말았다.

“제…… 이상형이요?”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의 이상형만 물으러 다녔지, 정작 나 자신의 이상형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아이, 그러지 마시고요. 음, 연상이 취향이신가요? 아니면 연하?”

알미냐 공녀가 나를 향해 바짝 붙었다.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상이 더 좋긴 한데.”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당황하고 있는데 알미냐 공녀는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연상이 좋으시구나! 그러면 아무래도 어른스러운 분을 좋아하시는 거겠죠?”

“……어, 어른스러운 사람도 좋고. 음…….”

나는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무뚝뚝한 것 같아도 속내는 따뜻한…… 보, 보기만 해도 간질거리는 그런 타입이 좋아요.”

“아하!”

그러자 알미냐 공녀는 손가락을 탕 튕겼다.

“이상형이 구체적이시네요. 마치 이미 마음에 두신 분이 있는 것만 같아요.”

“네? 아뇨, 그렇지는…….”

“모르는 척하시기는. 후후, 제가 다 알아요.”

알미냐 공녀는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나는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말았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맞추어 볼까요? 황녀 전하가 마음에 두신 분.”

“네?!”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 안 돼!’

하지만 내가 재빨리 그녀를 말리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떨어졌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온 공자님. 맞으시죠?”

하지만 답은 틀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네? 하지만 연상에다가, 좀 무뚝뚝하지만 속은 자상해 보이고…… 음, 간질거리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비온 공자님은 능력도 출중하시고 황녀 전하와 신분도 거의 맞지 않나요?”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가면서 대답했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려나? 하긴, 내 근처에 그나마 접점이 있는 사람이 비온 공자이니 알미냐 공녀가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나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에요. 물론 그분은 오라버니의 친우이신 데다가, 옛날부터 인연이 있어서 매우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분을 마음에 둔 건 아니에요.”

“정말요?”

알미냐 공녀가 그 자색 눈을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요.”

“……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좋아, 승산이 있어.”

“……?”

그녀가 입꼬리를 올린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멀뚱멀뚱하게 떴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활짝 웃었다.

“어쨌거나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요. 그렇죠?”

“그 말도 맞긴 하죠.”

“그래요. 어쩌면, 이상형과는 다른 운명의 만남이 어디선가, 어느 날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알미냐 공녀는 이제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 꿈과 사랑이 넘치는 공녀였다. 하지만 나는 슬슬 지쳐 가던 찰나였으므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둘의 마음이 통해서 저는 너무 기뻐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서는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황녀 전하. 잊지 말아 주세요. 내일 두 시. 황궁 정원에서 같이 티타임을 가지는 거예요. 꼭 나와 주셔야 해요!”

“물론이죠. 저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답니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미냐는 가는 그 순간까지 뜬금없는 것들을 물어보고 갔다.

남자가 머리가 길면 묶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늘어뜨리는 것이 좋은가. 선호하는 옷 스타일은 무엇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가.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살짝 묶으면 좋을 것 같네요. 단정한 옷이 좋아요. 좋아하는 색은…… 흰색?”

“알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녀는 활짝 웃으며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내일 꼭! 뵈어요, 황녀 전하!”

“조심해서 가요. 알미냐 공녀.”

나는 그녀가 사라지기까지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말 이상한 것을 물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열심히 훈련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나는 시녀들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니,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바로…….

“……바람둥이라고?”

나는 황당한 얼굴로 내 시녀를 바라보았다. 수석 시녀 중 한 명인 그녀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네, 황녀 전하. 듣기로는 공국에 알디에프 공자님을 연모해서 쓰러진 영애들이 적어도 한 묶음은 된다네요.”

“…….”

나는 어이가 없어서 리오텐 공자를 조사한 서류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특이 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음.’

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한걸.’

지금까지의 정황을 미루어 봤을 때, 그가 바람둥이가 아니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와 파트너를 했던 모든 영애는 거의 그를 향한 연심을 불태우고 있다나.

‘…….’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알디에프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열심히 다가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 아이샤 드 엘미르가 누구인가. 바로 엘미르 제국의 단 하나뿐인 별이자, 더할 나위 없이 잘생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옆에서 매일 보고 자란 사람이다.

얼마나 잘생겼든, 바람둥이이든 뭐든, 나는 절대 머리카락 한 올도 놀아나지 않으리라. 애초에 별로 만날 일도 없고.

어쨌든 간 나는 이튿날, 나는 알미냐 공녀와 약속한 티타임에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나고야 말았다.

“동생이 갑자기 두통이 심해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나오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부드럽게 웃는 모습, 그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흰 정복과 살짝 묶어 내린 연두색 머리카락.

‘……알미냐 당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는 알미냐 공녀의 오라버니이자 공국의 하나뿐인 후계자, 알디에프 공자가 서 있었다. 그제야 어제 알미냐가 왜 내 이상형을 꼬치꼬치 캐물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자기 오라버니를 나에게 선보이기 위해서였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와 잘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내가 분노로 이성을 잃어버리기 전, 알디에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알미냐를 잡으러 손님 궁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알디에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앉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설탕처럼 달콤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니요. 앉아야지요.”

그러자 그는 안심한 듯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와 그가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우리 둘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그 차는 내가 요즘 빠져 있는 바로 그 차였다. 그 차향을 맡고 있노라니 조금쯤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두고 보자, 알미냐 공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미냐 공녀에 대한 화가 풀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알디에프는 좋은 사람인 듯했으나, 바람둥이라는 면에서 경계심을 갖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이좋게 둘이서만 티타임을 갖고 싶은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가 속으로 알미냐 공녀를 향한 칼을 갈고 있는데, 알디에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동생이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티푸드를 잔뜩 보내 주었더군요. 부디 하나라도 입맛에 맞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가 가져온 티푸드에는 내가 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했다. 어느새 화내는 것도 잊고,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티푸드를 바라보았다.

개중에 가장 신기했던 것은 마치 보석들을 흰 가루에 굴려 놓은 듯한 알 수 없는 디저트였다. 색조차 알록달록해서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다.

“이건 뭔가요?”

내가 그걸 가리키자 그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리오텐식 젤리랍니다. 이름은 로쿰, ‘입안의 행복’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지요.”

“입안의 행복…….”

“한입 드셔 보시겠어요?”

나는 면밀히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색이 모두 다른데요. 맛도 차이가 있나요?”

“네.”

그는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이 붉은색은 장미맛, 초록색은 피스타치오, 갈색은 흑설탕을 넣은 것이고, 노란색은 레몬, 초콜릿을 넣어서 코팅한 것과 견과류를 넣은 것들이 있습니다.”

“와…….”

나는 고민하다가 제일 먼저 레몬맛을 조심스레 포크로 찍어 보았다. 입안에 넣자, 레몬향이 상큼하게 퍼져 나감과 동시에 기분 좋은 달달함이 올라왔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맛있어요!”

그가 빙긋 웃는 것이 보였다.

“다른 것도 한번 드셔 보십시오. 특히 장미맛은 리오텐 공국에서 직접 재배한 장미를 사용한 최상품 향료로 만들었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민 없이 이번에는 장미맛 로쿰을 선택했다. 최상품 향료를 썼다더니,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장미향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그 외의 초콜릿을 덧입힌 것과 견과류가 들어간 것도 맛있었다.

“처음 먹어 보지만 무척 마음에 드네요. 고르는 재미가 있어요.”

내가 들떠서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다른 맛이니까요.”

아,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는 약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왠지,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이 너무나도 바람둥이스럽게 들려왔던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상상 속에서 알디에프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채였다.

‘아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담.’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실례이다. 그래도 나는 그에 대한 경계를 다시 뒤집어썼다.

“확실히 그러네요. 하지만 저는 레몬맛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레몬맛 로쿰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하지만 예의 바르게 질문했다.

“엘미르에서의 하루하루는 즐기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이지요.”

“협상이 내일이라고 들었어요. 알디에프 님께서도 그에 참석하시겠지요?”

“예. 저도 리오텐 공국의 일원이니까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와 알미냐 공녀 쪽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리오텐 공국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협정도 꽤 긍정적으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리오텐 공국과도 더 많은 교류가 있겠지. 그에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이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리오텐 공국과 많은 교류가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저야 기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디에프는 웃었다.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그는 무척 웃음이 잦은 사람이었다.

티타임은 처음에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이 되었다. 그가 소개해 주는 디저트를 맛있게 먹고, 차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은 두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다음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뜻을 돌려 전했고, 알디에프는 이해했다.

“그러면 제가 황녀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바쁘실 텐데요.”

“아니요. 제 기쁨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정원을 걸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 옆에 선 알디에프는 시종일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에 나도 모르게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좋은 것 같은데.’

문득,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말았다.

‘내가 너무 시녀의 말을 의식한 걸까?’

사실 티타임을 함께하면서 알디에프가 생각보다도 좋은 사람인 걸 알게 되었다. 기운이 넘치고 발랄하다 못해 말괄량이인 공녀에 비해, 알디에프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꼭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서로와 정반대되는 성격을 고르고 나온 것처럼. 그렇게 나와 알디에프가 걷고 있을 때였다.

정원 앞에서 ‘그것’을 발견한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러자 알디에프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흰 마차에는 태양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빛의 신전의 마차가 왔네.’

나는 그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하는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은 채,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누구의 에스코트도 없지만 큰 키와 긴 다리로 훌쩍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은, 내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룬 님!’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황궁 사제가 된 이후로 그가 자주 황궁에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렇게 근시일 안에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곁에는 평사제 몇 명이 있었다. 아마 룬 님은 그들과 함께 황궁의 기도실로 향하는 것 같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나는 잠깐 생각했다. 황궁 사제인 그가 특별히 궁에 들릴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내일 있을 협정 때문이겠지?’

제국에서는 협정의 공증인으로 신관을 세우곤 하는데, 그에 뽑힌 것이 룬 님인 듯싶었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룬 님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저, 알디에프 님.”

“왜 그러시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아는 분이 저기에 계시네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는 얼른 룬 님이 있는 곁으로 다가갔다.

“룬 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라 반가움의 표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는 나를 향해 멈추어섰다. 나는 활짝 웃었다. 인간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당당하고 멋졌다.

“또 뵙네요. 황궁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그가 좀 무뚝뚝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가 감정을 배워가는 중이기 때문일 뿐, 나를 싫어해서가 아님을 알았다. 나는 뒷짐을 지고 물었다.

“그러시구나. 혹시 리오텐과의 협정과 관련된 일인가요?”

“네.”

“내일까지 황궁에 계시겠네요?”

“말씀대로입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괜히 조급한 심정이 되었다. 그가 황궁에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은 좋았지만, 남들이 그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싫었다. 그렇다고 그가 얼굴을 가리거나 인간 흉내를 때려치울 수도 없으니, 그저 나만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그 말에 그는 처음으로 조금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더군요.”

그에 나는 웃을 타이밍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말에서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묻어 왔기 때문이다.

정령왕인 그로서는 인간 행세를 하는 것이 피곤할 만도 했다. 나만 해도 사교계나 황녀로서의 노릇을 하는 게 힘든데 그는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이곳에 머무르는 그가, 나는 괜히 좋았다.

“바쁘시다니 유감이에요. 언제 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평사제들이 웅성거렸다. 언뜻 들어 보니, ‘성녀님과의 대화라니’, ‘부럽다, 영광이다’라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시간을 내어서, 언제 또 찾아뵙지요. 황궁에 자주 오기 위해 사제직을 받아들였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황궁에 자주 오려고 일부러 사제직을 받아들이셨다고요?”

“예.”

그가 딱히 황궁에 관심 있어 하는 모습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제직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황궁을 들락날락하는 이유는…….

‘설마, 나를 보기 위해서인 걸까?’

나는 얼굴을 확 붉히고 말았다. 저절로 손이 꽉 쥐어졌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외의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왜 이곳에 오겠는가.

어물어물하는 나를 향해, 그가 처음으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 그 말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사제직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적어도, 그게 나를 향한 흥미 때문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것만으로도 마냥 기쁘기만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나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또 뵈어요.”

더 잡고 싶었지만, 내가 그와 얘기하자고 평사제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아쉽게 인사를 하곤 뒤돌아 걸어 나왔다. 그 발걸음의 끝에는 알디에프가 서 있었다.

“갈까요?”

내가 들떠서 그렇게 먼저 말을 걸자, 알디에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그의 얼굴이 아까보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알디에프 님?”

“아…… 네.”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몸이라도 안 좋으신가요?”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조금 상태가 안 좋군요.”

‘그게 그거 아닌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음, 그럼 이 앞까지는 저 혼자 갈게요. 어차피 황녀궁은 바로 앞이니까요.”

“아니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기에, 나도 얼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마차를 스쳐 지나가서 황녀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알디에프가 신전의 마차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 복잡해 보였던 것 같았다. 그건 왜였을까?

* * *

알디에프와의 티타임이 있었던 이튿날, 아침부터 나는 바삐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찾는 사람은 손님궁의 정원에 있었다. 시녀들과 수다를 떨면서 말이다.

“정말 정원이 예쁘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같아.”

“황후님께서 꽃을 좋아하셔서 정원을 정성 들여 가꾸고 있거든요.”

“그나저나 공녀님,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어제 아프셨다고 해서…….”

“아, 그거?”

나는 가만히 멈추어 섰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나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공녀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주! 멀쩡해! 상쾌하기까지 하다니까.”

“어머, 다행이에요.”

“호호호.”

나는 가슴께에 팔짱을 꼈다. 정원 곳곳을 산책하던 알미냐 공녀가 나를 발견하기까지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어, 머, 나.”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를 발견한 다른 시녀들도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좋은 아침이에요!”

시녀들의 인사에 나는 생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그래. 다들 아주 ‘상쾌한’ 아침이지?”

알미냐 공녀는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아아, 이상하다. 어제의 두통이 다 낫지가 않은 것 같네…….”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시다고 하셨잖아요.”

시녀가 의아한 듯 입을 열자, 알미냐 공녀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던 리오텐의 시녀가 공녀를 변호했다.

“아마 여독이 다 풀리지 않으신 거겠지요. 우리 공녀님.”

“그, 그래. 휴. 마차 여행은 정말 힘든 일이야…….”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좋, 은 아침이에요. 황녀 전하.”

“알미냐 공녀님과 긴히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말이에요.”

“제,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죄송하지만 오늘은 무리일 것 같은데.”

“어머.”

나는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도 제 궁에는 두통에 좋은 약과 의원이 있답니다. 부디 제 궁으로 초대하고 싶어요.”

“그게…….”

“설마…….”

나는 그녀를 째릿 노려보았다.

“어제로도 모자라 오늘까지 저를 바람맞히지는 않으시겠죠?”

그녀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네.”

나는 몸을 홱 돌렸다.

* * *

알미냐 공녀는 어쩔 줄 모르고 응접실 중앙에 서 있었다. 나는 테라스 창문에 커튼을 치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

내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낀 채로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는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저기…….”

“어떻게 그러실 수 있나요? 저는 알미냐 공녀를 도와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그러한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는 ‘아이고’라는 얼굴로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죄송해요. 황녀 전하. 결코 황녀 전하를 농락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나에게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냥 저는, 오라버니께서 황녀 전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에 그만…….”

“그럼 그냥 공자가 저에게 말하면 되잖아요.”

“아이참, 황녀 전하도.”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부끄러운 마음을 모르시나요? 너그러이 봐주셔요. 오라버니는 황녀 전하께 마음이 있으셔서 그래요.”

나는 그 말에 황당해지고 말았다.

“알디에프 공자님이요?”

“물론이죠!”

내 말에 알미냐는 신난 듯 말을 이어 갔다.

“오라버니가 여성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이번이 처음인걸요. 저는 그저 두 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같이 계실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정말로 그뿐이에요.”

“……알디에프 공자님은 바람둥이라고 들었는데요.”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나는 내 안의 본심을 그대로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차.’

* * *

“누군가요?!”

알미냐 공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가족을 앞에 두고 대놓고 바람둥이라고 말하다니, 내 실례다. 사과하려 하는데 공녀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게!”

“……헛소문이라고요?”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당연하죠! 우리 오라버니가 바람둥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바람둥이라고 불린 것에 무척 화가 난 듯싶었다.

“우리 오라버니는 결백해요. 아마 그건 오라버니에게 들이댔다가 거절당한 영애가 퍼뜨린 소문이 분명해요. 그런 식으로 앙심을 품고 헛소문을 퍼뜨린 영애가 종종 있었거든요. 딱 봐도 오라버니가 너무 잘났잖아요?”

“……네에.”

“하지만 오라버니는 공국의 후계자인 만큼 신중한 만남을 하려고 하셔요. 바람둥이라니,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절대로 없어요! 으, 엘미르 제국에까지 그런 헛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그녀의 강한 부정에 나는 알디에프와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럼 지금까지…….”

부드럽게 웃어 보이거나, 나에게 계속 말을 걸거나. 그런 행동들이 단순히 그가 ‘바람둥이’가 아니라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였다고?

‘…….’

나는 조금 많이, 당황스러워지고 말았다.

“그, 그랬군요. 그 부분에서는 내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나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알미냐 공녀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었다.

“아무튼 이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지만, 오라버니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부탁드려요.”

알미냐 공녀는 간절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털었다.

“생각해 보고요. 알미냐 공녀는 이미 한 번 저를 속였어요.”

“힝. 제발요.”

그녀는 마치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무시했다. 그러자 그녀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손뼉을 짝 쳤다.

“아!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께 드릴 것이 있었어요!”

“드릴 것?”

“어제 심심해서 짐을 뒤지다가 우연찮게 멋진 걸 발견했거든요!”

나는 그녀에게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군요. 두통인 와중에 심심하기까지 했다니, 정말 안타까워요.”

“…….”

그녀는 금세 할 말을 잃고 쭈그러 들었다. 나는 잠깐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멋진 게 뭔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다시 신이 난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되실 거라고 믿어요. 저희 리오텐 공국의 보물 서고에서 일부러, 특별히 가져온 거거든요!”

‘우연히 발견했다’와 ‘특별히 가져왔다’ 사이에는 거대한 모순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곤했으므로 굳이 그것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바로!”

“……바로?”

“정령술에 관련된 책이랍니다. 부디 전하께 아직 없는 책이라면 좋겠어요.”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령술에 관련된 책?”

“네!”

그녀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 서고에는 엘미르 대공이던 시절에 초대 공왕님께서 모아 두신 갖은 보물들이 있어요. 거기에서 마침 정령술에 관련된 책도 몇 개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어깨를 쫙 폈다. 처음으로 나에게 무언가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고무된 듯한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그 말에 나도 기대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엘미르 제국의 모든 도서관과 장서를 뒤져도 정령술에 관한 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가져온 책들 중에 내가 못 본 게 있다면?

‘상급 정령을 소환할 단서를 얻을지도 몰라.’

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지금 당장 그 책을 볼 수 있을까요?”

알미냐 공녀는 그 자색 눈을 곱게 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 * *

알미냐 공녀는 시종을 시켜 그 책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중 내가 새로 보는 책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손을 뻗고 말았다.

정령 마법학 개론, 역사에서 나타난 정령들과 소환주의 관계, 신비한 정령 이야기 등등…… 하나씩 제목을 읽고 목차를 살펴보던 나는 어느새 책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소환된 정령들은 대체로 계약자와 깊은 유대감을 가지며…….’

“……녀님, 황녀 전하. 아이샤 황녀 전하?”

어찌나 집중했는지, 알미냐 공녀가 나를 부르는 것을 몰랐을 정도로 말이다. 결국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네?”

그녀는 완전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찾으시는 책이 있나요?”

“아, 한번 다 훑어봐야 할 것 같아요. 책 제목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네요.”

나는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한번 쓸었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는 약간 실망한 듯했다.

“그런가요…….”

“그치만 일단 처음 보는 책들이 있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어느새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알미냐 공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 인사였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의 얼굴도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도,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알미냐 공녀가 두 손을 꼭 맞잡고 밝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약간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 곤란해지고 말았다. 손님, 그러니까 알미냐 공녀를 앞에 두고 책만 읽고 있는 건 무척 실례되는 행동일 것이다. 손님을 지루하게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은 얼른 읽어 보고 싶고, 알미냐 공녀에게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으니 저절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미냐 공녀는 마치 이런 내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제안했으니까 말이다.

“제 걱정은 마시고, 책을 편하게 읽어 주셔요. 저는 이대로 다시 궁에 돌아가도 괜찮으니까요.”

“아…….”

“아니다. 혹시 이건 어떠실까요?”

알미냐 공녀가 그 자색안을 반짝거렸다.

“괜찮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나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리오텐 공국에서 가져온 책들은 모두 고대어로 쓰여 있었다. 정령술이라는 것이 워낙 고대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하지만 공녀는 뻐기듯이 가슴을 당당히 폈다.

“이래 뵈어도, 저는 리오텐 공국의 하나뿐인 공녀예요. 물론 고대어가 여자의 일반적인 교양은 아니지만 혹시 쓸 곳이 있을까 해서 배워 두었죠. 아버지인 공왕께서는 여자라고 해서 결코 남자들보다 뒤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늘 배움을 권장하시거든요.”

“그렇군요.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그러니 저에게 맡겨 보세요!”

“하지만 바쁘시지는 않으신가요?”

내가 걱정이 되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바쁠 일이 뭐가 있나요. 오라버니야 오늘 협정 회담에 참석하시지만, 저는 특별한 일정이 없는걸요. 내일도 마찬가지고요.”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협정 회담이 있는 날이었다.

‘이번 회담은 어떻게 되려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속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일이니까 훌륭히 해 나가실 것이란 생각이 들어, 걱정을 놓았다.

“그러면…….”

나는 알미냐 공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 책 하나를 읽어 보시고 간략한 내용 설명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내가 열심히 고대어를 익혔다지만 아직도 책을 술술 읽어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가 우선 책을 읽고 설명을 해 준다면 나중에 내가 직접 읽었을 때 책 내용을 이해하기 훨씬 쉬우리라.

책을 한 권 건네자, 알미냐 공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그녀는 자신 있게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든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 * *

그녀가 고대어를 배웠다는 것은 정말인 듯했다. 물론 내가 10페이지를 넘길 때 그녀는 1페이지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그건 고대어 책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고대어를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 듯했다.

나는 열심히 책을 넘겼다. 간간이 그녀가 묻는 단어를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중간에 차와 디저트를 가져온 시녀들은 때아닌 공부 삼매경인 우리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황녀 전하. 그리고 공녀님. 무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나요?”

“정령술 공부를 하고 있어.”

“어머, 대단하셔라.”

시녀들이 우리를 응원하며 차를 놓고 갔다. 하지만 차가 식어서 차가워지기까지 우리는 책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우리가 집중했던지 우리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때였다. 그것도 중간에 시녀가 머뭇거리며 식사 시간을 알리러 와서야 겨우 고개를 들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나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게요.”

놀란 것은 공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멋쩍게 책을 내려놓았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나도 모르게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알미냐 공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황녀 전하?”

“……괜찮으시다면…….”

“……?”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책을 구해 주신 것도, 도와주신 것도 감사하고. 이왕 제 궁에 계시는데 함께 식사라도 하면 좋을 것 같…….”

“정말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녀의 자색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당연히 좋죠! 안 그래도 오늘은 오라버니가 바빠서 혼자 식사를 할 생각에 쓸쓸했답니다.”

“아…….”

“그리고, 이 책들도 재밌어요.”

그녀의 얼굴은 숨김없는 기쁨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고어 책을 읽는 거라 좀 어렵긴 하지만, 그만큼 공부가 되네요. 황녀 전하만 괜찮다면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책을 보아도 괜찮을까요?”

“저야 괜찮지만 알미냐 공녀님께서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아니다, 이렇게 해요!”

알미냐 공녀가 다시 정신없이 말을 꺼냈다. 이제 그녀는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여기서 식사를 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다시 책을 보아요!”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나 혼자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녀까지 빡빡한 일정에 말려들게 하는 것은 양심이 찔렸다. 그러나 그녀는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서요!”

그녀의 재촉에 나는 시녀를 불러 바로 알미냐 공녀의 식사까지 응접실로 옮겨오도록 했다. 테이블을 한쪽에 놓고, 음식들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음식들 중에는 해산물 요리도 여러 개 섞여 있었는데, 아마 공녀의 입맛을 고려한 것이리라.

창문 너머로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레이스 커튼은 살랑거리고, 슬슬 단풍이 들고 있는 정원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깊은 감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가을 햇볕이 무척 좋네요.”

알미냐 공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오후의 정경이었다. 나는 소화도 할 겸, 가볍게 말을 꺼냈다.

“조금 있으면 리오텐 공국에도 수확제가 열리지요? 리오텐 공국에서는 어떤 걸 하나요?”

“아, 그게…….”

그녀는 나에게 공국의 풍습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몇 개는 믿을 수 없는 것도 있었기에, 나는 해괴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머리에 호박을 뒤집어쓴다고요? 정말로요?”

“네에. 그걸 위해서 미리 호박 안을 파고, 씻고 말려 두지요. 하지만 주의해야 해요. 자칫 잘못 말렸다간 곰팡이가 슨 호박을 뒤집어써야 하니까.”

믿기지 않는 풍습이었다. 그 뒤에 우리는 다시 책을 읽어 나갔다. 혹시라도 내가 그녀에게 책 읽는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정령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게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녀가 읽은 책은 ‘신비한 정령 이야기’로 고대로부터 내려온 정령들의 설화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했다. 아쉽게도, 상급 정령을 소환할 힌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후,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지체된 것 같아서 이만 헤어지기로 했을 때였다.

“내일도 책을 함께 읽는 건 어떨까요?”

그녀의 제안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제가 너무 죄송스러운걸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한 번 도와드리기로 한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생각보다 그녀에게는 의리가 있었다. 거절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와 그녀는 3일 내내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 * *

‘정령 마법학 개론’

목차 : 정령 마법에 대하여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이미 하급 정령과의 계약을 마친 계약자일 것이다. 정령들의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하며, 그것은 정령 마법이라는 새로운 융합 학문을 탄생시키게 하였다.

본 저서에서는 각 원소별로 따른 정령들의 정령 마법을 이론과 실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계약자들은 자신의 정령과 맞는 마법을 구사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훈련에 매진하도록 하여라.

원소별 마법 : 물, 불, 땅, 바람, 어둠, 빛.

빛의 마법

1. 빛의 화살.

빛의 정령의 가장 기초적인 마법으로, 빛을 긴 화살로 형상화시켜 적을 꿰뚫는 마법이다. 빛의 화살은 정령력에 따라 하나부터 다수의 화살로 형성할 수 있다.

2. 빛의 방패

빛의 힘을 이용하여 단단한 정령력의 막을 만드는 마법이다. 정령력과 숙련도에 따라 점점 방패의 단단함이 강해진다.

3. 섬광

순간적으로 강한 빛을 터뜨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는 마법이다. 정령력과 숙련도에 따라 빛의 강도와 지속력이 강해진다.

‘……그렇구나.’

나는 책을 천천히 넘기며 머릿속에 그 지식을 새겼다. 그러다가는, 이내 노트에 그것들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깃펜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고급스러운 종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그 행위에 푹 빠져서 한참 동안 필기를 했다.

정령 마법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다양한 마법들이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좀 더 상위의 마법들이 소개되었다.

예를 들어서, ‘빛의 축복’.

이것은 빛의 고유 힘을 통한 치유 마법이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비어 있구나.’

단 한 번도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한 역사가 없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정령왕이 쓸 수 있는 정령 마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 빈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리오텐 공국에서 가져온 책을 모두 읽은 것이었다. 무거운 책이었기 때문에 책을 닫자 제법 육중한 소리가 났다.

“미냐, 다 읽었…….”

하지만 중간에 나는 말을 멈추고 말았다. 내 앞에서 책을 열심히 읽고 있던 알미냐 공녀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무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순수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깨우기보다 조용히 소일거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어날 때까지 마법들을 복습해 보자.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이…….’

지금까지 일단 빛의 화살과 섬광 비슷한 마법은 연습해 왔다. 앞으로도 계속 이 기술을 갈고닦고, 빛의 방패를 배우고…….

‘할 일이 많네.’

나는 점점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다른 정령왕님들은 어떤 분이실까?’

정령왕을 단 한 분이라도 만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삼을 만큼 희귀한 일이다. 내가 룬 님을 운 좋게 만났다고 다른 정령왕님까지 만나게 되는 일은 없겠지.

‘그래도 같은 정령왕이시니까, 룬 님과 비슷하게 무척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시는 분들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괜히 노트의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하.’

공녀 앞에서 내색하려 하진 않았어도, 나는 조금 실망한 상태였다. 결국 리오텐 공국에서 가져온 책을 모두 읽을 때까지, 상급 정령을 소환할 힌트를 얻지 못했다.

중급 정령술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령들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령 친화력, 마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간절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이다. 나는 저절로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의지가 부족하다는 걸까…….’

이렇게 원하는데, 간절히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나는 소환할 수가 없는 걸까. 얼른, 얼른 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그 뒤에 정령왕을 소환해서……이덴베르 제국에게 복수를 해야만 하는데.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음과 머리가 복잡했다. 마치 아주 어지럽게 엉켜진 리본처럼.

‘…….’

얼마쯤 그렇게 있었을까. 어두운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구해 준 것은, 알미냐 공녀였다.

“……으음……?”

그녀가 잠에서 퍼뜩 깨어났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미냐 공녀, 일어나셨나요?”

“……앗…….”

그녀가 졸린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잠깐 잠들었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점심을 먹고 난 직후였으니 잠이 들어 버린 것도 이해가 갔다.

“그보다, 드디어 책을 다 읽었어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에 달라붙어 있던 졸음이 일시에 싹 사라진 듯한 얼굴이었다.

“저, 정말요?!”

“네. 정말요.”

그녀는 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더없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차, 찾으신 내용은 있었나요?”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아쉽게도 없었네요.”

그러자 알미냐 공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런…….”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알미냐 공녀가 나의 눈치를 살폈다.

“저…… 혹시 이 책에도 없을까요?”

그녀가 내민 책은 마지막으로 그녀가 갖고 있던 책이었다. 잠깐 낮잠을 자느라 마무리 짓지 못한 책이기도 했다.

“몇 페이지 안 남았으니까 제가 얼른 읽어 볼게요.”

그녀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책을 들어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평소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그녀가 매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내 책의 페이지를 모두 넘기고 나에게 책 설명을 해 주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책의 가장자리를 매만졌다. 어두운 표정의 그녀가 질문했다.

“그래도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요?”

“물론이에요. 어…… 이걸 한번 보시겠어요?”

나는 내가 필기한 노트를 보여 주었다.

“정령 마법학 개론이란 책에서 발견한 것이에요. 빛의 정령들을 이용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건데, 앞으로의 훈련에 무척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정말인가요?!”

그녀는 금방 환한 낯이 되었다. 내가 내준 노트를 꼼꼼히 살펴보며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 그런데…… 황녀 전하.”

“네?”

“여기 정령왕님의 페이지에는 왜 아무것도 적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론 지금까지 정령왕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있긴 했어요. 하지만 그들 중에 그것을 증명한 사람도, 정령왕님이 쓰시는 능력을 적어 놓은 사람도 없었지요. 그러니 그 페이지가 비어 있을 수밖에.”

“그분들의 능력은 미지수란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래요.”

설명을 마친 나는 잠깐 룬 님을 생각했다. 이 땅에서 룬 님과 마주쳤을 인간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또 룬 님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아마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단 몇 명뿐일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확률을 뚫고 나는 룬 님을 만났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것만으론 부족한 걸까.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런데 알미냐 공녀는 그것이 아마 실망 때문이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말해 왔으니까 말이다.

“저, 황녀 전하. 힘을 내세요. 전하께서는 분명 상급 정령을 금방 소환해 내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해요.”

나는 피곤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내 앞에 앉아 있는 알미냐 공녀의 얼굴도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알미냐 공녀,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아, 그, 그런가요?”

내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얼굴을 했다.

“…….”

하지만 정작 힘든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조금 더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힘든 이유가 있으면 나에게라도 말해 주면 안 될까요? 지금까지 공녀가 저를 도와주셨듯이, 저도 공녀를 돕고 싶어요.”

“……그게.”

“혹시 회담이 잘 안 되기라도 했나요?”

이 시점에서 고민할 일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떠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번에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건 아닐 듯싶었다.

“그럼…….”

나는 조금 머뭇거리고 말았다.

“이시스 오라버니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그랬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삼 일간 이시스 오라버니와 만나지 못했으니, 만약 고민할 일이 있다면 오라버니에 관련한 일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오라버니는 알미냐 공녀에게 마음이 없는 듯싶었으니까 말이다.

“……휴.”

그녀에게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결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황녀 전하께 부탁이 있어요. 먼저 말씀을 꺼내 주셨으니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말씀하세요.”

“저…… 이시스 황태자 전하를 마지막으로 한번 볼 수 없을까요?”

그녀는 무척 절박한 표정이었다.

“며칠 후에는 돌아가야 하니까요.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겠죠.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분을 만나고 싶어요.”

“며칠…… 이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네, 이제 회담도 끝났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또다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토록 얄밉던 공녀였는데 어느새 나는 그녀에게 정을 붙여 버린 듯싶었다. 그녀가 돌아간다는 말에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보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오라버니께서도, 황녀 전하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셔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나요.”

“알디에프 공자님께서요?”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만나 뵐 수 없을까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를 그녀와 만나게 하는 것과 내가 알디에프 공자를 만나는 것. 둘 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오라버니에게 부탁한다면, 오라버니는 기꺼이 들어주시겠지.

게다가 알미냐 공녀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그것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던 것은, 이걸 부탁하고 싶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주던 그녀의 뒷면에 사심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괜한 생각이었던 것을 말이다.

‘…….’

그녀의 눈은 맑고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3일 동안 머리 아픈 고대어 책을 읽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알현 요청을 하는 것이 더 빨랐겠지.

귀빈인 만큼 이시스 오라버니가 거절할 명분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계속해서 도와줬던 것은, 그녀의 순수한 호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으리라.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알겠어요.”

그런 그녀를 나도 돕고 싶었다.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늘이라도 당장 말씀을 드려 볼게요. 그리고 알디에프 공자님과도…… 오늘이라도 좋으니까, 만나 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황녀 전하……!”

그녀는 무척 감격한 듯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감사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야말로 알미냐 공녀에게 감사한걸요. 이 3일 동안 나를 도와주어서, 무척 고마웠어요.”

“별일도 아닌걸요.”

알미냐 공녀는 말 그대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털털함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러면 제가 궁에 돌아가서 바로 오라버니께 여쭈어볼게요. 궁의 정원에서 만나는 건 어떠신가요?”

“좋아요. 그럼 저도 이시스 오라버니께 연통을 넣어 보아야겠네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만남에 이별이 있듯이, 이제는 슬슬 서로에게 마지막을 고해야 할 때임을 알 수 있었다.

* * *

궁의 정원으로 나가자, 알미냐 공녀의 말대로 알디에프 공자와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림처럼 서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이샤 님.”

“좋은 오후예요. 알디에프 님.”

잠시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알디에프가 먼저 제안했다.

“잠깐 걸을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정원에는 벌써 이른 일몰이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노을이 내려앉은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알디에프가 입을 열었다.

“춥지는 않으신가요?”

“괜찮아요. 그보다…….”

나는 알디에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에게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그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나를 바라보는 자안은 무척 아름다운 빛이었다. 비록 노을에 비추어 지금 쓸쓸함을 머금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저는 이전에도 황녀 전하의 이름을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빛의 성녀, 정령의 소환사. 갖은 별명들이 있었고, 그 별명들의 주인공인 아이샤 님께 흥미를 가졌지요.”

“…….”

“그래서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 무척 기대를 했습니다. 실제로 만나면 과연 어떤 분일까. 내 기대와는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그가 나를 깊게 바라보았다.

“실제로 만나자, 당신이 소문보다도 훨씬 더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런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을 알디에프 님 앞에서 한 적이 있던가요?”

내가 그의 앞에서 한 것이라곤 별것 없었다. 아니, 한 번은 그의 여동생과 기싸움을 하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마이너스라면 모를까.

하지만 내 말에 그는 그저 고개를 저어 보일 뿐이었다.

“아닙니다. 그저…….”

“그저?”

“저는 아이샤 님의 눈이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눈…… 이요?”

상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나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고?

“사람의 눈은 그 무엇보다도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지요. 어딘가 슬프면서도, 당당하며,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내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웃었다. 평소보다 훨씬 개운한 듯한 미소였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이샤 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그가 말하려는 것이, 그가 오늘 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에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물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기다리겠습니다.”

“…….”

“만약 전하께서 ‘그러마’라고 대답해 주신다면요.”

그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저는…….”

나는 망설였다. 대답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정해져 있었다.

‘…….’

나는 속으로 휘휘 머리를 털어내며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알미냐 공녀가 자신과 이시스 오라버니가 이어지면 모두가 축복할 거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가 알디에프 공자와 이어진다면 나도 축복받는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그 길이 내키지 않았다. 망설이는 이유는 단지 그를 거절하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그동안 어쨌든 간 알디에프 공자는 최선을 다해 나에게 파트너가 되어 주고, 나를 배려해 주었다. 나도 그에게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 긴 침묵에서 그는 이미 대답을 읽어 낸 듯했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쉿.”

“…….”

“괜찮습니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그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황녀 전하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으니까요.”

“……알디에프 님.”

“괜한 부담을 얹어드린 것 같아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문득 불어온 바람이 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알디에프 공자는 밝게 웃고 있었다.

“잊어 주세요.”

고백에서 차인 남자답지 않게 무척이나 산뜻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알디에프가 나와 잘 맞지는 않았어도, 그가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물론 연애적인 의미로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가 보여 준 다정함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기억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그와 헤어지고 돌아와서, 멀뚱히 생각했다.

‘알미냐 공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궁에 찾아가 보면 오라버니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 * *

이시스 오라버니의 궁,에 도착하자 나는 정원에서부터 바로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가움에 그를 부르려는데, 나는 이내 그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고 말았다.

바로 알미냐 공녀였다. 아직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기둥 뒤로 숨고 말았다. 기둥의 그림자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마음은 고맙지만…….”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이면 알미냐 공녀를 거절하는 오라버니의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다정하지만 단호한 거절에, 혹시 알미냐 공녀가 상처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대리석 바닥을 소리 죽여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알미냐 공녀의 말이 이어지는 것이 들려왔다.

“그건 황제로서의 배움 때문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그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다른 이유? 멀리서나마 알미냐 공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최근들어 이덴베르와의 관계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걸 알아요. 만약 그런게 걱정되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리오텐과 손을 잡지 않으시겠나요?”

잠시, 말이 없던 오라버니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덴베르와 모종의 일이 있는 것도 맞고요.”

“……!”

“하지만…….”

보지 않아도 오라버니의 얼굴이 씁쓸할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지금……. 제 옆에 누군가를 두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

“저를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가 그래서였구나.’

이제껏 반려자를 들이지 않았던 것이, 아직 이덴베르와의 일을 해결하지 못해서.

알미냐 공녀와 이시스 오라버니가 두런두런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지만,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라버니도.’

하지만 그 마음만큼은 이해가 되었다. 오라버니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니까, 상대에게 언제나 진심만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소리 죽여서 오라버니의 궁을 벗어났다.

‘오늘 들었던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지.’

내 궁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 이른 잠에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었던 탓에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럴 때면 항상 그렇듯이, 나는 루를 소환해서 내 옆에 두었다.

‘루.’

내가 그를 부르자, 루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말하지 않아도 루는 이미 내 마음을 모두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아주 자그만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왔다.

‘다 잘되겠지?’

―네, 다 잘될 거예요. 주인님.

루가 고개를 세게 흔들자, 나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모두 다 잘될 거야.”

오라버니와 리오텐 공국과 이덴베르와…….

복수까지도.

어느새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맞게 되었다.

“황녀 전하!”

나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알미냐 공녀. 그녀는 보기 드물게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바로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나는 놀라고 말았다.

“어쩐 일이신가요?”

“그게…….”

그녀는 울상이었다.

“어제 이시스 황태자 전하께 고백했지만,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어요.”

나는 뛸 듯이 놀라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시녀들이 주위에 없기에 망정이었다.

귀족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고백을 한 것은 무척이나 대담한 행위인데, 거절당하기까지 했다니. 사교계의 두고두고 남을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알미냐 공녀는 참 솔직해. 아니, 리오텐 공국 사람들의 분위기가 다 그런 걸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의문을 속으로 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솔직한 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삼 나와 그녀가 꽤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라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을텐데. 지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당당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알미냐 공녀는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푸념을 대강 받아 주면서, 나도 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리오텐 공국에서 온 책을 모두 읽었는데도 상급 정령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 그것이 나의 초조함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더니, 알미냐 공녀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제안해 왔다.

“혹시 기분 전환이라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기분 전환이요?”

“네!”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간 계속 공부만 하시느라 지쳐 계실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방금까지 오라버니에게 거절당해서 시무룩해 있던 알미냐 공녀는 어디 갔나 싶었다. 솔직한 것도 솔직한 것이지만, 화제 전환이 정말 빨랐다. 그녀는 신이 나서 나에게 조르듯이 권유했다.

“제 궁에 가요. 신기한 물건들을 보여드릴게요.”

알미냐 공녀의 궁에? 그녀가 묶고 있는 엘미르 제국을 방문하는 귀빈들을 위한 손님궁으로, 나는 그다지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꽤 낯선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럴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조금 기운이 없어서 훈련을 쉬고 싶었던 참이다.

“네? 황녀 전하?”

“……그럴까요?”

“……!”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러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얼른 가요!”

나를 재촉하는 알미냐 공녀에 나는 얼떨떨하게 일어나고 말았다. 궁 밖으로 나가자 가을의 햇살이 쏟아졌다.

고대어 책을 공부하는 동안은 거의 나가지 않아서 몰랐는데, 날씨가 참 좋았다. 오래간만에 산책을 하고 있자니 기분 또한 상쾌해졌고 말이다.

‘왜 이걸 놓치고 있었을까?’

고대어 공부를 한답시고 책에만 파묻혀 있었던 시간이 조금 아까웠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이렇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을 가졌어도 좋았을 텐데.

알미냐 공녀는 손님궁으로 가는 내내 조잘조잘거렸다. 그다지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꽤 즐거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 기분을 낫게 해 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더더욱.

이윽고 손님궁에 도착하자 나는 꽤나 놀라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손님궁은 내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그것은 아마 한쪽에 쌓여 있는 여행용 가방과 바쁘게 돌아다니는 시녀들 때문일 것이었다. 내 의아한 기색을 느꼈는지 알미냐 공녀가 말했다.

“아, 좀 어수선하죠?”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며칠 후에 출발하니까요. 짐도 거의 싸 놓았어요.”

출발이라. 그 말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알미냐 공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황녀 전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아직 여기에 있어요. 이리 오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아까처럼 나를 재촉했다. 침실로 이어지는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각종 예술품들이 방 안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엘미르 제국의 화풍은 아니었고, 아무래도 알미냐 공녀의 개인 소장품인 듯싶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황홀한 듯 말했다.

“이것 봐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어느 그림은 리오텐 공국의 가장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 그림이었고, 어느 도자기는 왕실에 납품하는 장인의 단 하나뿐인 수작이라고 했다.

“너무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이곳에 올 때도 빠뜨리지 않고 가져왔답니다.”

그녀는 굉장히 감상에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그 예술품들을 돌아보았다. 리오텐 공국은 예술에 무척 강한 문화 강국이다. 그녀의 심미안은 그 배경에서 기인한 듯했다.

그리고 그 예술품들은 실제로도 무척 아름다웠다. 천천히 그 안을 돌아보고 있노라니, 마치 하나의 화랑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내가 진지한 눈으로 그 예술품들을 바라보고 있자, 알미냐 공녀는 무척이나 흐뭇한 듯했다.

‘어라?’

그러던 와중에, 나는 한 가지 독특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그림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러자 알미냐 공녀가 냉큼 말을 걸어왔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요?”

“아, 그게…….”

나는 그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알미냐 공녀에게 말했다.

“이건 호수가 아니죠? 바다…… 인가요?”

알미냐 공녀가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은 황금빛 모래사장과 푸른 물, 그리고 드넓은 하늘로 가득 차 있었다. 새가 하늘 위로 날아가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고, 경쾌한 터치는 보는 사람들의 근심 걱정마저 덜어 줄 듯했다.

“바다를 본 적이 없으신가요?”

“큰 호수는 본 적이 있어요. 남부에 여행을 갔을 때요.”

그녀는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이참, 호수랑 바다를 어떻게 비교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며 아련한 눈으로 바다가 그려진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그림을 무척 좋아해요. 바다의 광활함이, 그 푸른빛이 생생하게 와닿는 기분이거든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 다시 그림에 눈을 돌렸다. 바다가 광활하다고 해도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이 그림이 내 팔 길이만 한 작은 그림이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바다라.’

이덴베르 제국과 엘미르 제국은 모두 내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도 없었고,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생선이나 해산물은 종종 먹었지만 말이다.

“바다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오래간만에 호기심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리오텐 공국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반도 국가이다. 그녀라면 아마 바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 줄 수 있으리라.

내 질문에 알미냐 공녀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었다.

“바다의 좋은 점이라……. 글쎄요. 무어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그녀가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다시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

나에게는 책이나 그림에서만 존재했던 장소이다. 그리고, 한때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이 떠오르는 색이기도 했다. 한참 생각하는 것 같던 알미냐 공녀가 대답했다.

“무엇보다, 아름답다는 거지요.”

“……그것뿐인가요?”

나는 그 대답에 조금 맥이 빠지고 말았다. 이 황성에도 아름다운 것들은 충분히 넘쳐났다. 굳이 바다를 본다고 해도 특별한 감상이 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알미냐 공녀가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고작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세상에는 단 한 번 보더라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단 하루의 만남이라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사람이 있고.”

“…….”

“그와 같은 아름다움이랍니다. 말문을 막히게 하는.”

왜인지 그녀의 말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단 한 번 보더라도 잊을 수 없는 것. 단 하루의 만남이라도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 사람.

‘……잘 알고 있어.’

나는 홀린 듯이 다시 그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녀가 이어서 설명했다.

“그리고, 항구 도시의 활발함이나 생기는 그 어느 도시에도 비할 바가 없어요. 해가 떠서 바다에 붉은빛이 감도는 것이나, 오후의 빛에 바다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제가 ‘알미냐 리오텐’이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요.”

“‘알미냐 리오텐’이어서 행복하다?”

“네.”

그녀는 노래하듯 읊조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 아니. 리오텐 공국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시겠어요?”

“어머, 물론이죠!”

그녀는 신이 나서 리오텐 공국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리오텐 공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자신이 얼마나 그곳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해서, 보고 있는 나마저 뭉클해질 정도였다. 그녀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나에게 제안했다.

“황녀 전하, 언제 리오텐 공국에 방문하시겠어요? 바다도 그렇고,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조금 곤란해지고 말았다.

“아……시간이 되면 좋을 텐데요.”

아직 상급 정령을 소환하지 못해서 마음이 초조했다.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미냐 공녀는 그런 나에게 말했다.

“시간이 되실 거예요. 그야, 금방 정령을 소환해 내실 테니까요!”

그녀의 환한 미소에 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알미냐 공녀는 검지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조금 늦게 소환한다고 해도 뭐 어떤가요? 황녀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잖아요. 제가 14살일 때에는 아주 천방지축이었어요. 지금처럼 숙녀인 모습으론 짐작도 못 하시겠지만요.”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어린 그녀의 모습이 아주 많이 짐작되었다. 속으로 조금 웃고 있는데, 그녀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꼭 바다를 보러 와 주세요.”

짐짓 심각한 표정이었던 그녀는 이내 얼굴을 풀고 웃어 보였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과 공부에 매진하느라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소홀해지고 있었고,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바보 같았다.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니. 그녀에게 새삼 감사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알미냐 공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손뼉을 짝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책에서 봤는데, 혹시 아시나요? 물의 정령은 바다에서 더 잘 소환이 된대요. 그러니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물의 정령사가 나오기 쉽다고요.”

“그건 알고 있었어요. 무엇이든지 본질에 가까운 곳에서 소환을 하면…….”

나는 말을 잇다가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본질이라고?’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찾기 위해서 수도 없이 많은 책들을 찾아보았지만, 가장 기초적인 것을 까먹고 있었던 듯했다. 정령들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 정령들의 본질은…….

‘빛이지.’

나는 입을 벌렸다.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알미냐 공녀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이 깨달음을 얼른 펼쳐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저, 알미냐 공녀.”

“네?”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그녀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하니 말을 이었다.

“알미냐 공녀의 덕분이에요.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거든요.”

“정말요!?”

그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네. 실례지만, 이만 자리를 떠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응원할게요, 황녀 전하!”

그녀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허겁지겁 나의 궁으로 향했다. 그랬다. 내 정령들의 본질은 빛.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

정령들의 특징이 말이다. 그것을 깨닫자 가슴이 벅찰 듯이 차올랐다.

‘소환할 수 있어!’

어느새 내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할 수 있다.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 책과 노트를 펼쳐 들었다.

상급 정령 소환진이 그려져 있는 노트였다. 빛의 상급 정령. 그의 이름은 루디온, 그는 큰 황금색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전에 루미나스 님이 절벽에서 소환했을 때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손에 와닿는 그 깃털의 감각과 빛의 느낌도.

‘이제 알겠어.’

마침 시각은 정오였다. 한창 해가 따뜻할 때였던 것이다. 나는 햇빛이 내리쬐는 정원의 한 곳으로 나아갔다. 알미냐 공녀와의 대화로 내가 두 가지 떠올린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자연과의 조화이다. 정령력과 마력을 얼마나 퍼붓는다고 해도 그 본질을 깨닫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의 정령이 그 생명의 본질인 바다에서 잘 소환되는 것처럼, 나도 빛의 본질을 깨달아야 했다.

‘빛.’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는 것이 아니다. 빛은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다만 몸을 빛에 맡긴 채,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정령들의 또 다른 성질 말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외로움을 잘 타는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정령사가 없었던 덕분에 자신의 존재가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조급한 마음에 그를 ‘루디온’ 자체로 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상급 정령, 정령왕을 소환하기 위한 관문으로만 생각했었다.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을 소환했듯이, 어서 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그리고 그다음은 정령왕까지.

절박하다곤 해도,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무신경했으니 루디온이 오지 않을 만도 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빛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루디온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선택해야 함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할 수가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앞에는 눈부신 햇살이 있었다. 입을 열어 정령 소환의 주문을 외웠다.

‘이 땅과 하늘과 바람과 불과 물을 이루는 정령들이여.’

모든 것의 근원이 되고, 또한 본질이 되는 정령들이여. 그들이 내 말을 듣고 있다면, 부디.

‘루디온.’

나는 소환진 위에 손을 올린 채, 낭랑하게 루디온의 이름을 외쳤다.

‘나에게 와서 힘이 되어다오.’

그리고, 내 앞에 환한 빛이 폭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강하게 느껴지는 빛의 기운과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폭풍. 그 속에서 빛은 단단하게 뭉쳐져 가며 하나의 형태를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반동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몸에서부터 마력이 쭉 빠지는 기분은 7살 때 목숨을 걸어 가며 이시스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비슷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던 그 느낌은, 이윽고 빛의 형체가 모습을 다 갖추고 나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허억, 허억…….”

나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한편으론 가슴 떨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소환해 오려고 노력하던 정령이, 이제야 내 앞에 등장한 것이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내가 소환한 ‘루디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나와 계약하지 않아, 실체 없이 반투명했지만 그 자체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드디어 내 이름을 불러 주었군.

태양을 덮을 수 있을 것처럼 커다란 황금 새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힘차지만 부드러웠고, 어딘가 다정한 느낌마저 감돌고 있었다.

‘……마,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존대하고 말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하급이나 중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는 데다가, 어린 그 둘과 다르게 루디온은 굉장히 중후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절벽에서 보았던 루디온과는 다른 개체일 것이다. 하지만 정령들은 정신체이기 때문에 서로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고 책에서 보았으니, 아마 나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그가 말했다.

―언제쯤이면 나를 소환할 수 있을까 했지.

‘아, 알고 있었나요?’

내가 그를 소환하고자 했던 것을 말이다.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계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헤매는 모습도, 그를 계속해서 구하던 모습도 모두 보았겠구나.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정령계에서도 인간 세계를 지켜볼 수 있는지는 몰랐어.’

새로운 정보다. 정령들만이 존재한다는 정신계, 그곳에서 루디온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가슴이 무척이나 벅찼다. 내가 루디온을 향해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자,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 왔다.

―나와 계약하겠나?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순간인가.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닦아 왔다.

‘계약하겠습니다.’

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황금빛 깃털은 마치 금으로 뽑아낸 것 같았지만,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나는 그것이 아주 강렬한 힘으로 인해 뭉쳐진 기운 덩어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상급 정령이란 그런 것이다. 기나 긴 역사 속에서도 그를 소환했던 존재가 아주 드물 정도로 대단한 존재.

가까이 다가온 루디온은 살며시 내 이마 위에 부리를 대었다. 루와 리미에 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와 계약함으로써 나는 내 몸속에 더 커다란 기운이 소용돌이치듯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반투명하던 루디온의 몸은 물감이 번지듯 새롭게 실체를 찾았다. 그가 입을 열자 나오는 목소리도 ‘의지’로써 전하는 정신적 메시지가 아닌, 성대를 진동시켜 울리는 목소리였다.

―계약되었다. 네 부름에는 언제나 달려와 네 곁을 지키고 너의 의지를 수호하마.

나는 할 말을 잊지 못했다. 드디어 계약했다는 감격 때문이었다.

‘정말 계약을 한…….’

하지만 그다음 말은 잇지 못했다. 나는 순간 휘청거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에 재빨리 루디온이 나를 부축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몸 안에 있는 기운들이 어지러웠다. 마치 속이 진탕이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내 의문을 읽은 것처럼, 루디온이 말했다.

―아직은 네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얼핏 루디온의 눈은 조금 안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열네 살의 육신, 아무리 천재라 하여도 상급 정령의 실체를 담기에는 커다란 무리가 있지. 그러니 네가 지금 힘들어하는 것도 당연한 것.

‘……아.’

아무래도 루디온을 소환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마력과 정령력을 쓴 탓에 지쳐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7살 때 이시스 오라버니를 구하기 위해서 정령력을 끝까지 썼을 때 나는 거의 빈사 상태까지 이르렀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때 내가 독을 마시고 일어난 직후라는 특수 점도 있지만.

아직까지 내 정령술은 미숙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디온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또 얼마만의 기간이 걸릴까? 그리고 또…….

톡.

상념으로 복잡해진 내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루디온이 내 머리 위에 날개를 얹은 것이다. 나는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그가 말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할 필요 없다.

‘……그게.’

―쉬어라. 그게 지금 가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

아. 내가 또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디온의 말은 마치 마법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참으려 했던 피로와 고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지러운 머리가 이제 그만 쉬라며 달콤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될 텐데.’

지나가던 사람이 보기라도 한다면 기겁할 게 틀림없었다. 루디온은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알아서 해 줄 테니.

‘고마워요.’

―편하게 말해도 된다. 이제 너는 나의 계약자니까 말이다.

루디온의 낮은 목소리 때문일까, 혹은 어른스러운 태도 때문일까. 어쩐지 그에게서 룬 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문득 룬 님이 보고 싶어졌다.

‘……응. 고마워.’

나는 그의 부축을 받은 채로 서서히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사라지고 눈앞이 깜깜한 어둠으로 덮였다.

* * *

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마음이 놓여서였을까? 나는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숲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었다.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모습은 눈에 익기도 했다. 아주 옛날에,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서 푸른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보며 바다를 본다면 이런 색이지 않을까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머리카락의 주인공을 향해 기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아스 오라버니.’

그때 내가 불렀던 건,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 * *

“……헉!”

나는 짧은 비명소리를 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나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이곳은 내 방이었다.

‘루디온이 나를 옮겨 주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디온이 걱정 말고 나더러 잠들라고 했으니, 아마 그가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절에 머리가 지끈지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머리가 아주 상쾌했던 것이다.

‘이상하네. 잠을 잘 잔 건가?’

단순히 잠을 잘 잔 것만으로는 이 몸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신관의 치유술을 받은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그 의문을 흘려보내 버렸다.

캐노피 너머로 보이는 창문 너머로 날이 밝았다. 기절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것만 같은 시각이다.

‘한두 시간쯤 잤던 걸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음으로 시녀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시녀들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녀 중 몇몇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기까지 했다.

“너무 일어나지 않으셔서 걱정했어요!”

“잠깐 주무신 줄 알았는데, 하루씩이나 꼬박 잠들어 계시고…….”

“게다가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시질 않고…….”

“……응? 뭐라고?”

나는 시녀들의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하루나 자 버렸다고? 내가?”

“네! 어제 점심쯤에 소리 없이 들어오셔서 주무시고 계셨어요. 저희는 그저 황녀 전하께서 깊게 낮잠에 드신 줄로만 알았는데…….”

“깨워도 미동도 없으셔서 정말 피곤하신 줄 알았어요.”

“저희는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황제 폐하와 의원님께 달려가려던 참이었어요.”

“그, 그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딱 맞는 시간에 깨어난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상급 정령을 소환한 것 덕분에 쓰러진 거지, 전혀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내가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면, 기나긴 요양을 준비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제시간에 잘 깨어나서 다행이야.’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긋지긋한 요양은 또다시 겪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요양 기간에 들어가면 유모나 시녀들이 나한테 숟가락도 못 들게 한다니까? 그게 얼마다 답답한지는 겪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하지만 하여간 그건 넘어가고…….

‘……헤헤.’

나는 저절로 뿌듯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드디어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했다. 하루쯤 기절해 있긴 했지만 이쯤은 남들에게 자랑하고 다녀도 괜찮겠지. 무려 ‘상급 정령’이니까 말이다!

내가 환하게 웃자, 시녀들은 다 같이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선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어쩜, 황녀 전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아…….’

‘꽃들도 울고 갈 미모야. 정말 사랑스러우셔…….’

‘영원히 황녀 전하의 옆에서 황녀 전하만을 모시고,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속삭임을 듣던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아버지께 정식으로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게 되었다고 말씀도 드리고 싶었고, 하루 동안 일을 하나도 못했으니까 남은 일들도 정리해야겠지.

그리고 또…….

아, 그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미냐 공녀에게도 상급 정령을 보여 주러 가자.’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나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뵙고 싶어. 몸단장을 부탁할게.”

그런데 그 말을 듣자, 시녀들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미처 말하지 못했다는 듯이, 레나가 앞으로 나왔다.

“황녀 전하, 지금 두 분께서는 무척 바쁘실 것으로 아룁니다.”

“응? 어째서?”

두 분이 오늘이나 내일 공식 석상에 서는 일이라도 있었던가? 레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리오텐 공국의 사절단분들이 오늘 갑작스레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쯤 그분들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 순간, 그대로 굳고 말았다.

“……리오텐 공국의 사절단이 지금 돌아간다고?”

내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 내일모레 가는 게 아니었어? 갑자기 왜?”

“그게…… 아무래도 리오텐 공국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아마 국경을 수호하는 일에 관련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덴베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덴베르의 도발이 한차례 더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알미냐 공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 떠나게 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떠나진 않은 거지?”

“네, 하지만 식이 거의 정리되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 가셔도 시간을 맞출 수 있으실지…….”

그것은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일 테다. 황궁이 아무리 넓다 하지만, 나에게는 루디온이 있다. 나는 재빨리 몸단장을 했다.

‘금방 달려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아직은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한 말도 남아 있었다. 나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정말로 구름 없이 새파란 하늘이었다.

* * *

리오텐 공국의 하나뿐인 공녀, 알미냐 리오텐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하늘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식은 지루했고, 본국의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던 탓에 그녀는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오라버니인 알디에프 공자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안심시킬 여유도 여력도 그녀에겐 없었다.

‘……마지막이겠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방국이라곤 하나 공녀씩이나 되는 신분이 엘미르 제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의 목적이었던 ‘이시스 황태자 유혹하기’ 작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알미냐 공녀로서는 시무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역시 이시스 황태자를 꼬셨어야 하는 건데.’

그녀의 마음을 안 건지, 이시스가 약간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흥.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를 거절하다니. 나중에 울며 빌어도 소용없다고.’

알미냐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욱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째서일까?

알미냐 공녀는 식에 나온 황족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태자까지. 가장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그들이 몸소 나와서 마지막을 기념해 주고 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야 그도 그럴 것이…….

‘……아이샤 황녀.’

알미냐는 못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나와 주지 않았구나.’

물론 그녀를 배웅해 주는 것이 아이샤의 의무도 아니고, 그녀야 항상 바쁜 몸이니 이해할 수 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마지막일 줄 알았으면 어제 좀 더 시간을 보낼걸.’

알미냐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리오텐 공국의 상황은 아주 어지러웠다. 이덴베르의 도발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방 도시의 영주들이 분분하게 의견이 갈린 것도 역시나 큰 이유였다.

이덴베르에게 협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살길을 도모해야 하는가. 영민하신 부왕께서는 엘미르 제국과 협력하는 길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아직 불안정했다.

‘그나저나…….’

알미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하늘이 정말로 새파랬다.

‘아이샤 황녀도 이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지.’

생각이 났다. 아이샤의 푸른 눈은 마치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떠오를 정도로.

“……로서, 그대들의 앞날을 축복하노라.”

상념에 잠긴 그녀의 정신을 퍼뜩 일깨우듯, 귀족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 들려왔다. 드디어 식의 마지막이었다.

황제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나면, 알미냐와 그의 오라버니는 이제 마차에 올라타게 되리라.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샤 황녀는 결국 와 주지 않는 걸까?’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황제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식이 끝날 때까지도 오지 않았으니, 역시 오지 않는 것이 맞으리라.

‘몸이라도 안 좋은가.’

단순히 나오기 싫어서, 알미냐와 알디에프를 배웅할 가치가 없어서 오지 않았다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샤 황녀. 그녀는 정말 독특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길래 오만하고 콧대 높은 황녀일 줄로만 지레짐작했더니, 생각보다도 굉장히 착하고……정령에 열심인 모습도 보기 좋았고, 다정했고, 그리고 또…….

‘…….’

알미냐는 고개를 떨구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있으며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마차에 올라탈 때가 되어, 알미냐는 서서히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향해 시동들이 꽃잎을 뿌려 주고 있었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안녕, 엘미르.”

알미냐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것은 오직 그녀의 오라버니뿐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알미냐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곤 나타난 풍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설마?!”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알미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맑은 하늘 위로 아름다운 황금의 새가 날고 있었다. 태양처럼 눈부신 모습이었다.

그 위에 올라탄 은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마치 하얀 여신 같고, 그 푸른 눈동자는 마치 지금의 가을 하늘 같아서…….

“……아이샤.”

알미냐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와 주었구나.’

벅차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소환해 내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샤는 이제 세상에서 유일한, 빛의 상급 정령사가 되어서 당당히 등장했다.

하늘에 황금색 깃털과 빛가루가 흩날리고, 알미냐는 저도 모르게 그에 손을 뻗었다.

“아름다워, 정말로 아름다워요.”

알미냐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고 말았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웃음이었다. 황금 새에게서 내려온 아이샤는 재빨리 아버지인 황제 폐하에게 인사를 올렸다.

“무례에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 식이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전해 들어 다급히 자리에 왔습니다.”

“괜찮다. 그보다…….”

황제는 다른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할 만한 것을 질문했다.

“그 황금 새는 너의 정령이더냐?”

그 말에, 아이샤는 환하게 웃었다.

“네!”

그 말에 주위의 웅성거림은 일시에 확 커지고 말았다. 그들에게 선언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아이샤는 말했다.

“빛의 상급 정령, 루디온입니다. 어제부로 저는 빛의 상급 정령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겨우 14살의 나이에…….”

“말도 안 돼!”

그 모든 시선 속에서 아이샤는 당당하게 서 있었다. 문득 알미냐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몸이 안 좋았던 것은 정령을 소환하려 그랬던 모양이구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부끄러울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네가 이리 훌륭히 자란 모습을 보았는데 아버지인 나로서는 기쁠 따름이다.”

“감사합니다. 저…….”

아이샤는 황제에게 무어라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 번 웃었고, 그리고…….

알미냐와 아이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아이샤는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알미냐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를 수호하듯 아름다운 황금빛 새가 서 있었다. 마치 호위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마침내 마차 앞까지 도달한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상급 정령을 소환해 낸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할까 무척 긴장했는데, 처음 말은 맥빠지도록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마차 시간에 늦을 뻔했네요. 그래도 이렇게 왔으니까 다행이죠?”

그러자 어쩐지 긴장이 모두 풀리고 말았다. 알미샤가 살짝 웃음으 터뜨렸다.

“더 늦었으면 얼굴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뵈어서 기뻐요.”

“어제 하루 종일 기절해 있었거든요. 상급 정령을 소환하느라.”

“세상에, 몸은 괜찮으세요?”

아이샤는 잔잔하게 웃었다.

“지금은 무척 멀쩡해요.”

“다행이네요.”

“저, 공녀. 할 말이 있어요.”

그러고선 금방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공녀의 덕분에 저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니까. 상급 정령을 소환하게 된 것은 공녀의 도움 덕이에요.”

하지만 그 말에 알미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왜 제 도움 덕분인가요. 황녀 전하가 대단하시기 때문이겠지요.”

아이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리오텐 공국과 혼인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는 우방국이니까요. 리오텐이 어려운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달려가서 도울 것을 약속해요.”

그 말에 알미냐는 짐짓 농담을 건네 보았다.

“황녀 전하시라면 달려오실 것보다, 날아오시는 편이 더욱 편하시겠어요.”

“그렇죠?”

둘은 고개를 맞대고 웃었다.

“고마워요. 황녀 전하.”

알미냐는 물끄러미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가 고마웠다.

“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웠다. 솔직한 알미냐이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운 부분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아이샤가 말을 꺼냈다.

“다음에 리오텐 공국에 방문해도 될까요?”

그 말에 알미냐의 얼굴이 펴졌다. 아이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바다에 가고 싶어요.”

“…….”

“우리 둘이 루디온, 그러니까 제 상급 정령을 타고 바다 위를 날아갈 수도 있을 거예요.”

“…….”

“알미냐 공녀도 그건 해 본 적이 없겠죠?”

알미냐 공녀는 약간 목이 메는 것 같아서 짧게 대답했다.

“네.”

아이샤가 환하게 웃었다.

“같이 가요.”

덧붙이듯이, 알미냐는 조용히 말했다. 다시 만나요. 그 말에는 그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알미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기심에 가득찬 눈들. 이제 그만 그녀는 떠나야 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알미냐는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미냐라고 꼭 불러 주셔야 해요.”

“저도, 아이샤라고 불러 줘요.”

두 사람은 생긋 웃었다. 아이샤가 알디에프에게도 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엘미르 궁성이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소중한 친구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샤가 점이 되도록 알미냐는 줄곧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안 보이게 되었을 때에, 그제야 알미냐는 하늘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역시나. 오늘은 너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다.

“안녕, 아이샤.”

알미냐는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안녕’의 의미가 달랐다.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재회의 기대를 담은 인사.

‘꼭, 다시 만나자.’

* * *

남겨진 나는 마차가 점이 되도록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엔…….

귀족들과 가족들의 뜨거운 눈빛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하하.”

애써 웃음으로 넘겨 보려고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뜨거웠다. 가장 먼저 오라버니가 다가왔다.

“아이샤! 드디어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네, 어제부터 소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제 저도 상급 정령사예요.”

“아이샤…….”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나는 어머니와도 눈을 마주했다. 어머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랑스럽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아버지의 심각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상급 정령을 소환했으니 그 기념으로 연회를 열어야겠구나.”

무슨 말을 할까 했더니. 나는 아버지의 말에 조금 휘청하고 말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이제 연회는 너무 힘들다. 에스코트도, 무도회도, 뭐도! 다 너무 힘들어!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가족들은 이제 숫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또, 또 시작이다.

“기념으로 연회를 열어야 한다.”

“아버지! 그건 좀, 외부 사람들이 또 오면…….”

“아이샤를 위해서라면 저는 뭐든지 환영이에요.”

“어머니,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가족들을 보며, 귀족들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항상 위엄에 잠긴 모습들만 보다가 팔불출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려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귀족들의 놀람을 조금이라도 잠재워 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날아가듯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아, 물론 루디온도 함께였다.

“저도 이야기에 끼워 주셔야죠!”

생각해 보니 연회가 열리면 룬 님도 참석하나? 그렇다면 연회를 여는 것도 한 번쯤은 고려해 봄직하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마음이 놓였더니 기지개를 쭉 펴고 싶었다. 오늘은 하늘이 정말 푸르고 아름다웠다. 조금 멀지만, 리오텐 공국도 저 하늘 위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만나겠지.’

그런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리오텐 공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급보가 날아온 것은, 미냐가 돌아가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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