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여름 소나기와 수도 모험
나는 팔랑팔랑 고서를 넘기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테라스 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게 아닌가. 놀랄 법한 이야기였지만, 이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야, 누가 찾아왔는지 뻔하니까 말이다.
나는 익숙하게 시녀들을 물렸다. 이번에는 정령술에 정신 집중을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사춘기라는 내 소문이 아직도 안 가신 건지, 아니면 정령술 훈련을 하는 나를 응원하고 싶었던 건지. 시녀들은 순순히 나갔다.
오늘도 날씨가 무척 맑았기 때문에 테라스에 선 룬 님의 얼굴은 아주 똑똑히 보였다.
“룬 님!”
내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하지 연회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잘 지내셨나요? 신전 일은 어떠신가요?”
내 속사포 같은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 지냈고, 신전은 별다른 일이 없다.”
“그러시구나.”
나는 싱긋 웃었다. 들뜨지 않는 그의 태도가 너무나 그다웠다. 나는 그가 열고 들어온 테라스의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숲.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황궁의 모습…….
평소라면 정겹게만 느껴졌을 그 모습이 오늘따라 왜 이리 고루하게만 느껴졌을까?
‘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룬 님.”
“왜 그러지?”
“혹시…….”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이다.
“오늘 저랑 같이 안 나가실래요?”
* * *
나는 한창 훈련과 공부에 지쳐 있던 참이었다.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지루하기만 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라면 수도에 나가는 짧은 외출을 허락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모험이 하고 싶었다.
남부의 별장에 있었을 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황궁에 돌아온 이후로는 하도 바쁘게 지낸 데다가 자유가 없어져서 다시 휴가가 절실해졌던 것이다.
‘네?’
내 말에 룬 님은 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보는 것도 좋겠지. 새로운 경험은 항상 도움이 되는 법이니.’
그 말에 내 표정은 환해지고 말았다. 사실 룬 님과 함께라면 호위 기사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변장을 하면 내가 황녀라는 사실도 다들 몰라볼 테고 말이다.
나는 시녀장에게 내가 훈련으로 정원에 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 그러자 시녀장은 평소의 내 행동 때문에 납득한 듯했다.
그러고 나선 변장의 시간이었다. 크고 깊은 모자와 함께, 내 옷장에서 가장 수수한 옷을 골랐다. 룬 님이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황궁에서 탈출하는 것은 쉬웠다.
바로 그 루디온을 사용해서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던 것이다. 매우 높게 올라갔기 때문에, 아마 황궁의 근위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굉장해요!”
나는 이 비행만으로도 벌써 오늘치의 짜릿함을 모두 즐긴 기분이었다. 루디온을 타고 우리가 날아간 곳은 수도의 골목이었다. 황금새를 숨기고 골목에 내려앉자, 수도의 왁자지껄한 웅성거림이 확 다가왔다.
“……와아.”
나는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누구의 호위도 받지 않고 나와 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자주 맛볼 수 없었던 해방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골목에서 나와서 수도의 길거리를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그 문제를 알아차렸다.
“허…….”
“허억…….”
“어머나!”
“……!!”
“…….”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이 홀린 듯이 룬 님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중의 몇은 룬 님을 바라보느라 꼼짝 못 하고 서 있었고, 몇은 들고 있는 물건을 떨어뜨렸으며, 나머지 몇은 지나가는 척을 하다가 다시 룬 님을 보러 슬금슬금 돌아왔다.
제일 위험했던 것은 멍한 눈으로 룬 님에게 다가왔던 사람이다. (우리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룬 님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룬 님께서는 너무 눈에 튀세요.”
내 말에 룬 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그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
그런가? 나는 상점가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숨기려고 일부러 가장 수수한 옷을 입고 나왔지만 옷은 당연하게도 최고급품인 비단이었고, 금실로 자수가 놓아져 있었다.
하급 귀족이나 평민들로서는 절대 구할 수 없을 법한 새하얀 모자도 그랬다. 누가 어떻게 보아도 귀족가의 곱게 자란 금지옥엽이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마침 눈앞에는 좋은 가게가 보였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새 옷을 한 벌씩 장만해 볼까요?”
우리 둘은 눈앞에 보인 양판점에 들렸다. 딸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양판점의 옷들은 그다지 고급은 아니었다. 물론 이건 내 기준이었고, 보통 부유한 상인들이 입을 만한 옷은 되어 보였다.
여윳돈을 아주 넉넉하게 들고 왔던 덕분에 나는 그 양판점의 옷을 모두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물론, 그 옷을 다 살 이유도 없고 짊어지고 갈 용기도 없었다.
‘딱 이 정도가 좋겠지.’
나는 싱긋 웃었다. 부유한 상인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 섞이기도 좋을 것이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로브를 하나 골라서 계산대의 근처로 갔다. 그런데 룬 님의 죄 많은 미모는 벌써 다른 사람을 홀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저…….”
“…….”
“어, 어떤 옷을 추천해 드릴까요?”
그래도 점원은 직업 정신을 투철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서 꾹 누르면 빨간 물이 나올 것 같았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휴.’
이럴 때는 내가 나서야 할 차례였다. 그나마 나는 룬 님의 외모에 아주 조금, 조금이나마 면역이 있으니까.
“남성용 로브 하나 주세요. 키가 크니 좀 긴 게 필요하겠네요.”
나는 룬 님의 신관복을 바라보았다. 흰 신관복을 모두 가리려면 꽤 긴 옷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사람들이 룬 님을 그렇게 바라보던 것은 룬 님이 신관이어서라는 이유도 있던 것 같다.
제국의 신앙이 빛의 신인 만큼, 빛의 신관을 만나면 그날 하루는 운수가 좋다는 미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뭐가 됐든, 너무 눈에 띄는 분이셔.’
점원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네준 검은색 로브를 룬 님이 걸치고 나니, 훨씬 룬 님의 후광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에 맞춰서 나도 아이보리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시야가 조금 가려지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을 만은 했다. 아까처럼 괜히 사람들이 들러붙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지요?”
“그, 그게…….”
점원은 한참 동안 옷의 가격을 헤매었다. 그건 룬 님이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였을지 모른다. 룬 님께서는 단순한 눈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심장은 타들어 가고 있으리라.
“……2실버입니다.”
“여기 있어요.”
나는 금화 한 개를 건넸다. 그러자 점원의 표정이 아연해지고 말았다.
“……저, 손님. 이건 1골드인데요.”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지세요. 대신, 오늘 우리 둘이 이 가게에 들렸던 것은 비밀로 해 주시고요.”
이미 광장에서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잔뜩 끌어 버린 우리지만, 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입막음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점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원래 가격의 50배나 해당하는 돈을 줬으니 그럴 만도 한가? 그녀가 상점 밖을 나가는 우리에게 허리를 팍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은 룬 님의 뒷모습에 집중된 채였다. 나는 룬 님의 죄 많은 미모에 다시 한 번 탄복하고 말았다. 그래도 로브를 쓰고 얼굴을 가리니 아까처럼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안도도 잠시, 이번에는 나에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룬 님.”
점심을 먹지 않아서 꼬르륵거리는 배가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웃어 보이고 말았다.
“배가 고파요.”
그에 룬 님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았다.
“그런가.”
“……네.”
“무언가 먹으러 가지.”
“……그럴까요?”
소소한 대화 뒤에, 우리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역시 수도이기 때문인지, 높고 넓은 음식점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곧바로 그곳으로 올라갔다. 1층, 2층, 3층……. 그리고 곧장 4층으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계단참에 서서 위층을 지키고 있던 웨이터가 우리를 막아섰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4층은 신원이 확실한 귀족분들만 가려 받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우리는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적절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돈이 많은 외국의 여행객이에요. 안 될까요?”
“그게…….”
그는 좀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책에서 보아 두어 알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다시 꺼냈다.
“팁이에요.”
가져온 돈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그에게 금화 한 개를 건네주자, 아까 점원처럼 웨이터의 눈도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자, 자, 잠시만요.”
그러더니 그가 금화를 깨물어 보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불쾌해질 뻔했다. 의심받는 것엔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엄연히 엘미르의 국화와 국기가 새겨진 정통 엘미르 1골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황금 동전 위에 그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웨이터의 태도는 정반대로 변하고 말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우리는 이제 방해 없이 유유히 4층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4층은 무척 널찍한 데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했다.
“사람들이 무척 작게 보이네요.”
“그렇군.”
하지만 룬 님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또다시 그가 정령왕임을 기억해 냈다. 공중으로 언제나 날아오를 수 있는 그로서는 높은 건물이 신기하지도 않으리라. 기다리고 있자, 웨이터가 헐레벌떡 메뉴판을 들고 왔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메뉴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메인은 생선과 육류로 나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룬 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나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룬 님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정령들이 아무것도 안 먹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우리 집 루는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것이다.
내 말에 룬 님은 쉽게 대답해 주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아니면 먹지 않는다.”
“헤에…….”
완전히 간단한 방법이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
“그럼, 저와 함께 식사를 하실 건가요?”
그의 황금색 눈길이 메뉴판에 닿았다. 잠깐 그것을 보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그 말이 무척 기뻤다. 역시 이렇게 나왔는데 혼자만 식사를 하면 쓸쓸했을 것이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메인은 육류로 하지. 나머지는 아무거나 상관없다.”
“물고기를 싫어하시는가요?”
그에게도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까? 내가 묻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물이 싫은 거다.”
“……?”
무언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 딱히 물과 빛이 상성이 나쁜 건 아닌데 말이다. 둘 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설마 물의 정령왕님과 사이가 안 좋다거나.’
에이, 그럴 리는 없겠지? 그가 육류를 시켰으므로 나는 생선 종류를 시켜보았다. 최고급 어종를 잡아 올렸다는 흰살생선은 부드러운 화이트 크림이 올려져서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
룬 님이 시킨 육류는 호쾌할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려져, 통후추가 잔뜩 뿌려진 쇠고기였다. 룬 님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메뉴였다.
맛은 그럭저럭, 항상 황실의 최고급 요리에만 익숙해졌던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다. 하지만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나는 꽤 잘 먹었다.
의외였던 것은 룬 님도 음식을 남기는 일 없이 모두 잘 드셨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요리란 어떤 의미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식사를 모두 마친 우리는 계산을 하러 점원을 불렀다. 그런데 식사 가격을 모두 합해도 1골드가 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다시 지갑을 열었다.
“남은 건 팁으로 가지세요.”
그렇게 말하니, 나를 담당했던 웨이터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면서 좋아했다. 아버지의 백성이 기뻐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향한 곳은 근처의 서점이었다.
수도의 서점은 꽤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정령술에 관련된 책이 없나 열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굳이 정령에 관련해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부끄럽지만 나를 기사로 낸 신문 정도였다. 그래도 서점은 굉장히 크고, 넓고, 번쩍번쩍했기 때문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신간을 뒤적여 보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게 없나 기웃거리다 보니 시간은 금방금방 갔다. 룬 님은 그런 나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덕분에 놓칠 걱정은 없었으니, 다행이다.
“다른 곳으로 갈까요?”
내가 말하자 룬 님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룬 님은 수도 근처를 아주 열심히 탐방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주 열을 올린 거지만 말이다.
극장의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새로 올라온다는 연극의 포스터를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하고, 꽃집에 가서 새로 나왔다는 품종의 꽃을 보기도 했다.
그 외에는 수도의 분수대에 가서 동전을 던지…… 려다가 말았던 일이 있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금화를 분수대에 던지면 사람들이 달려들 거라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계속해서 우리는 함께 돌아다녔다. 먹는 게 남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언뜻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룬 님과 아주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연인들이 자주 온다는 핑크빛 가게에는 그야말로 혀가 녹아 버릴 것 같은 달달한 컵케이크를 팔고 있었다. 나는 설탕을 잔뜩 넣어서 달아 죽을 것 같은 컵케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친구들이랑도 함께 와 보고 싶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다 같이 모여서 수도 탐방을 하기로 했었다. 재밌는 가게를 발견한다면 다음에 친구들과도 또 와 볼 생각이었다.
또, 시간이 되면 클로에가 자신의 저택에 놀러 오라고 했었다. 아직 하지 연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도 클로에도 바빴으니까 초대장은 오지 않았지만…… 조만간 오겠지.
얼마쯤 컵케이크를 먹고 있었을까, 나는 문득 룬 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룬 님은 은근히 배려심이 있었다.
나와 이렇게 어울려 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챈 듯했다.
“왜 그러지?”
“네?”
‘……아.’
그제야 나는 내가 그를 너무 빤히 바라보았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 혹시 룬 님께서는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으신가 해서요. 제가 하루 종일 끌고 다닌 것만 같다는 생각에…….”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내가 가고 싶은 곳만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다.”
“정말요?”
“그래. 네가 가고 싶은 곳을 가도록.”
“아…… 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괜히 더 불안해지고 말았다.
‘정말 내가 룬 님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달콤하던 컵케이크의 맛이 갑자기 너무나도 쓰게 느껴졌다.
‘…….’
그런데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음일까. 나를 흘긋 바라보던 룬 님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정말 어디에 가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너와 같이 간다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이 얼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점점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지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어디에 가고 싶지?”
“아, 그…….”
나는 허둥지둥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어디인지도 잘 모르면서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다시 보니 그곳은 수도의 특산물을 많이 파는 상점 거리였다. 예전부터 한번쯤은 들려 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수도를 아주 샅샅이,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다.
춤과 정령술로 단련한 내 체력도 지쳐 가고 있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아직 해가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으면 시녀장도 의아해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잡화점에 들렸다가 쓸데없는 물건을 여러 개 구경했다. 이상한 물건들에 깔깔 웃기도 하고, 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오늘의 수도 모험이 비로소 끝났다. 나는 오늘 룬 님과 돌아다녔던 곳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 보았다.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면, 꽤 잘 다닌 거 맞겠지?
조금 아쉽기는 했다. 오늘의 모험은 정말 재미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야 하겠지.
나는 이 제국의 1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이니.
그렇게 다짐하며 상점의 처마 밑을 나섰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이마로 빗물이 톡,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
나는 곤란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우산도 없고, 비가 내리고 있으니 시녀장이 나를 찾으러 정원으로 올 게 분명했다. 루디온을 타고 가면 눈깜짝할 새 황궁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단 일 분 일 초라도 이 시간을 더 끌고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룬 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과 아름다운 옆모습이 보였다.
“…….”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의 심술처럼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여름 소나기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우산이 있는 사람은 여유롭게 우산을 펼쳐 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재빠르게 뛰거나 혹은 나와 룬 님처럼 상점의 처마에 들러붙은 상태였다. 나는 처마 밖으로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비가 내리네요.”
톡, 톡.
여름비가 내 흰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우산도 없는데.”
소나기여서인지, 비가 제법 거셌다. 내가 비가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룬 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치게 해 줄까?”
“……네?”
“이 여름비.”
그가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처럼 아름다운 두 금안. 그리고 그 눈 너머로 느껴지는 형용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나는 문득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그제야 그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이 세계에 둘도 없는 지고한 존재라는 사실을 현기증 나도록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일까? 어쩌면 가족들의 말대로 그냥 내가 사춘기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정령왕, 그리고 나는…… 황녀이지.’
남들 앞에서는 고귀한 신분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존재밖에 없는 정령왕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금 슬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우는 대신, 힘껏 웃어 보였다. 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잡화점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갔다. 물건 하나에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 없다고 실랑이는 가게 주인에게 억지로 돈을 안겨 준 뒤, 나는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저 왔어요!”
그는 늘 그랬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그것이 호기심이 생긴 한 인간을 관찰하는 것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천으로 만들어진 우산을 펼쳐 들었다.
“황궁까지 같이 걸어가요.”
그는 키가 높았으므로, 내가 손을 아주 높이 들어야 했다. 황궁까지 이렇게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황궁 앞에서 나를 발견한 근위대들이 얼마나 깜짝 놀랄지, 혹은 정원 내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시녀장이 얼마나 당황할지, 이 옷은 또 뭐냐고 유모가 캐물을지. 걱정되고 또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키가 닿지 않아서 끙끙대면서 팔을 올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가까이 붙어 있는 이 시간이. 그때, 그가 우산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잡아챘다.
“내가 들지.”
“…….”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네, 룬 님.”
빗물이 톡톡 우산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우리들을 위한 소나타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여름의, 너무나도 소중한 모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