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하지 연회 (9/21)

Chapter 5. 하지 연회

내가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몇 주째. 시간은 흘러 여름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펜으로 종이를 톡, 톡 두드렸다.

봄의 제전, 여름의 하지, 가을의 수확제, 겨울의 신년제. 이것들이 엘미르 제국의 4대 행사이다. 이제는 ‘하지 연회’가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는 1년에서 가장 해가 오랫동안 떠 있는 날로, 우리 제국이 빛의 신을 추종하는 만큼 제국 사람들이 아주 신성하게 생각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번 하지에도 황궁에서 뱃놀이와 하늘에 등불을 띄우는 큰 의식이 있을 예정이었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서 하지에 대한 기획을 검토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신관 초청’에 관련한 서류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듣기로는 얼마 전 빛의 신전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다음 대 대신관, 어쩌면 교황이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신관이 나왔다고 했다던가. 그 말에 황궁에서는 원래 계획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취소하고, 그 김에 그 신관을 포함하여 빛의 신관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전체적인 행사는 어머니가, 신관들의 대접은 내가 맡기로 했다. 아직 미숙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는 아주 열심히 일할 예정이었다.

‘조금 나른하다.’

나는 살짝 하품을 했다. 지나가던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차를 더 가져다드릴까요?”

“응, 그래 주면 고맙지.”

테이블 위에서 같이 서류를 보는 것 같던 루가 어느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무척 행복해 보이는 그 얼굴에 문득 루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나도 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잠깐 펜을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내 방에 이어져 있는 테라스에서 똑똑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내 방은 3층이다. 설마 벽을 타고 테라스에 사람이 내려왔을 리는 없고.

‘새라도 들어왔나?’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본 나였지만, 다음 순간 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조금 기뻐지고 말았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푸른 황궁의 숲을 배경으로 그가 서 있었다. 빛의 정령왕인 그와 푸른 숲의 정경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루미나스 님, 바로 그였다. 나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 옆의 시녀들에게 신경이 미쳤다. 마침 시녀가 나에게 새로운 찻잔을 가져와 차를 내려 준 참이었다.

“드세요. 황녀 전하.”

“아, 고마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

“네, 황녀 전하.”

내 말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네?”

시녀장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내 말이 무척 뜬금없었으리라.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나는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어, 그게.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다들 자리를 좀 비워 주겠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안 와도 괜찮아.”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얼떨떨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들은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순순히 방 밖으로 나가 주었다. 이윽고 방에 나밖에 남지 않자, 나는 곧장 테라스로 얼른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숲의 상쾌한 향기와 더불어 눈부신 여름의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루미나스 님.”

몇 주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가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가?”

“네?”

그에 내가 되묻자, 그가 친절히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인간들에게는 사생활이 있다고 했었으니, 몇주에 한 번 정도로 찾아오는 건 괜찮냐는 뜻이다.”

“아…….”

나는 그의 말에 놀라기도 하고,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루미나스 님이 조금 그리웠던 탓이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그가 전처럼 불쑥불쑥 나타나지 않은 게 나를 신경 써서 배려해 준 것이었을 줄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네, 괜찮아요.”

사실은 좀 더 자주 찾아와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그렇군.”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잔잔하게 웃었다. 순간, 다시 한 번 심장이 뛰었다.

‘……건강검진에선 이상이 없다고 나왔는데.’

내가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까지 모두 뛰어와서 어디 아픈 곳이 없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그리고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이상 하나 뜨지 않았다.

‘내가 정령사라서, 그의 기운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새삼 그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과 햇살처럼 눈부신 금안. 그리고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모습까지. 눈부신 여름숲을 배경으로 한 그는 정말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정령이었다. 그렇게 그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방문하신 건가요?”

“별일은 없다.”

그는 비스듬하게 창문가에 기대었다.

“인간 세상에서 신분을 만드는 것도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지.”

“아, 맞다. 역시 신관이 되실 건가요?”

“그래.”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번 하지 연회에서 만나 뵐 수도 있겠네요. 하지를 맞이해서 황궁에 신관분들을 초대하거든요.”

“들었다.”

“아, 그러면 이것도 아시겠네요. 이번에 빛의 신전에서 차기 대신관이 될지도 모르는 분이 나왔다고 들썩거리고 있…….”

말을 잇던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말았다. 잠깐, 어라……?

‘차기 대신관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오는 일이, 과연 흔한 일일까……? 게다가 그 신관이 아주 최근에 나왔다고 하던데.’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거의 신성력이 교황감이라고 하던데…… 그, 그분과 제가 같이 이번 행사를 주관하게 되어서요.”

“그렇군.”

“……그래서…….”

나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루미나스 님께서는 신관이 되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저어.”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루미나스 님이…… 그 신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하지만 신은―여기서 신은 빛의 신이겠지― 나에게 잔인했다. 루미나스 님은 미소를 지었다. 한여름의 햇살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그렇다만.”

“…….”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루미나스 님이 그 신관이라고? 게다가 내가 루미나스 님과 행사를 주관?’

갑자기 어지러워졌다. 나는 쓰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안 될 게 있나?”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보고서도 루미나스 님은 태연했다. 오히려 나에게 되묻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의 더할 나위 없는 태평한 모습을 보자,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별문제가 없나?’

물론 반쯤 이해는 된다. ‘그’ 루미나스 님이 평사제로 들어간다고? 남한테 존댓말을 해야 하고, 독한 수련을 견뎌야 하는?

‘절대 안 어울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미나스 님은 말 그대로 남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아버지인 황제 폐하를 매일 같이 보고 산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나스 님에게 종종 압도당하곤 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 어쩌면 잘된 일이야.’

결국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루미나스 님이 신전에서 차기 대신관급이라면 적어도 그에게 감히 함부로 구는 사람은 없겠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어떻게 차기 대신관의 자격을 얻게 되신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저 빛의 능력을 조금 보여 줬더니 아이들이 펄쩍 뛰더군. 굳이 대신관이 될 생각은 없지만, 필사적으로 부탁하길래 그러기로 했다.”

“‘아이들’이요?”

“신관들 말이다.”

“……우와.”

나는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신관들을 아이라고 부르다니. 그중에는 팔순을 넘어가는 신관들도 있는데 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억겁의 시간을 산 그로서는 모든 인간들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순인 신관이 아이로 보인다면 난 뭘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빛의 능력을 조금 보여 준 것만으로도 그가 차기 대신관감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절절하게 와 닿은 때가 없었다. 그가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

그제야 나는 내가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방 안을 가리켰다.

“부, 부디 들어오셔요.”

그가 매끄러운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왔다. 왜인지 그가 들어오자마자 방 안이 한층 더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다행인 것은 아까 시녀가 내 앞에 새로운 찻잔을 놓고 간 덕분에 그에게 대접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괜찮으시면 드시겠어요? 대접이 초라해서 죄송합니다, 루미나스 님.”

“상관없다.”

그가 내 앞에 앉았다.

“와아, 왕님!”

테이블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던 루가 어느새 일어나 루미나스 님께 찰싹 붙었다. 그런 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루미나스 님은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맛이 좋군.”

“가,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 차를 탄 시녀에게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호로록 쉬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뵈어서 무척 기뻐요.”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런데 그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뭐지?”

나는 마차에서의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그 마차에서. 어째서 실체를 쓰고 계셨던 건가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실례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만…….”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또 나왔다. 그 ‘호기심’ 말이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떤 호기심이요?”

“그때 네가, ‘오라버니’라는 존재는 무척 소중하다고 했었지.”

“네…….”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게 소중한 존재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

나는 입을 확 다물고 말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당황스러움에 목소리가 갈라진 채였다.

“그, 그, 그러셨군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차를 마시려고 했지만, 내 몫의 차는 이미 다 비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애꿎은 찻잔만 들었다가 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루미나스 님은 나와는 다르게 무척 태연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 생활은 어떠신가요? 불편하신 점은 없나요?”

“없다.”

“어, 신전도 하지 연회 준비로 바쁘지 않던가요? 이곳은 연회 준비 때문에 무척 바쁘거든요.”

일 얘기를 하니 조금 침착해질 수 있었다. 나는 하지 연회에 대해서 설명했다. 등불을 올리고, 뱃놀이를 하고, 연회를 열고…….

그 얘기를 들자 루미나스 님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즐겁겠군.”

“그, 그렇지요?”

그의 웃음을 본 것이 좋아 나는 헤헤, 웃었다. 그 뒤로도 나와 루미나스 님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에 대한 얘기는 물론이고, 절벽에 대한 이야기 등을 말이다.

루미나스 님은 카스카 협곡에 있는 절벽에 가끔 가곤 한다고 했다. 대륙에서 가장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깨끗하고, 편안하다나? 그런데 나는 거기서 뜻밖의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제가 꾸었던 꿈이 루미나스 님께서 만드신 게 아니라고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담 그 꿈은 무엇이었지? 나를 보던 그는 슬쩍 말했다.

“어쩌면 네 기운과 내 기운이 반응해서 예지몽 비슷한 것을 꾸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있나요?”

“글쎄, 그렇게 따지자면 네가 맨눈으로 정령을 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도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인 그라면 내가 모든 정령을 보는 것에 대한 비밀도 모두 풀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얘기가 있긴 한데.”

“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앞으로 쭉 빼었다. 정령왕인 그가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면 대체 무엇일까?

“어떤 이야기인가요?”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몸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짧은 침묵 후에, 그의 입이 열렸다.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그의 말에 나는 순간 기운이 쭉 빠지고 말았다. 바쁘신 일이라도 있나? 그런데 그 말과 동시에, 방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아이샤 옆에 있지 않고 왜 바깥에 나와 있는 거지?”

오라버니의 목소리다. 나는 순간 뜨끔하고 말았다. 그에 대답하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샤 황녀 전하께서는 혼자 있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네, 그래서 저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소일거리를 하면서요.”

“뭐?”

오라버니의 목소리에는 큰 당황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것은 아니온 듯싶은데…….”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보며 루미나스 님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지?”

“아, 그, 그게…….”

오늘 그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정령왕인 그는 현신하지 않을 때에도 하급 정령들과 다르게 반투명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몇 번 보니까 알겠다. 현신하지 않은 그는 지금처럼 정령의 기운을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현신하지 않았다고 해도, 또 그와 함께 오라버니를 맞이하기에는 내 간이 너무 작았다.

“……죄송합니다.”

“별로.”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티타임은 즐거웠다.”

그의 말과 동시에 똑똑,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샤, 들어가도 괜찮을까?”

“그럼, 이만 나는 가지.”

“아, 네. 조, 조심히 가세요.”

나는 그를 배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대답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루미나스 님은 테라스의 문을 직접 열고 햇빛 사이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상념을 깨우듯, 다시 한 번 문이 두드려졌다.

“아이샤?”

퍼뜩 정신을 깬 나는 외쳤다.

“아, 네. 네! 들어오셔요.”

그러자 문이 열렸다. 그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시스 오라버니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이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어쩐 일로 혼자 있겠다고…….”

“아, 별거 아니에요. 오라버니. 잠깐 하지 연회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고 싶어서요.”

나는 황급히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의아해서 그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는데…….

다음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 바로 루미나스 님이 앉았던 자리에 빈 찻잔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찻잔은 다른 사람이 쓴 흔적이 역력했다.

“……아이샤.”

“……네?”

“여기 누가 왔다 갔니?”

나는 침묵하고 말았다.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티푸드를 먹고 있던 루의 모습이었다.

“……루와 같이 티타임을 하고 있었어요.”

쿠키를 반쯤 입에 물었던 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어쨌거나 루도 티타임에 참여하고 있었으니까 결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가끔 이렇게 루와 티타임을 할 때가 있어요. 그치?”

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와 함께?”

“네, 네! 루는 좋은 티타임 친구니까요!”

나는 억지로 환하게 웃었다.

‘……들키진 않았겠지?’

내가 속으로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였다. 오라버니의 표정이 풀어졌다.

“뭐야, 그런 거였구나. 깜짝 놀랐다. 네가 혼자 있는 일은 드무니까.”

“오라버니도 참, 제가 따로 만날 사람이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말하고 나니 슬프다. 그래, 나 친구 별로 없다…….

억지로 웃던 나는 얼른 화제 전환을 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어쩐 일이세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놀러왔단다.”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도 놀 친구가 없는 걸까…….’

내 안쓰러운 얼굴을 본 것인지, 이시스 오라버니는 얼른 말을 이었다.

“요, 요즘 네가 하지 연회다 뭐다 해서 바쁘잖니. 그래서 얼굴 본 지도 까마득한 것 같아 이렇게 내가 직접 온 거야.”

“네, 그러시군요…….”

내가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이자 그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어릴 적의 아이샤는 오라버니밖에 모르는 동생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오라버니를 전혀 찾지 않아서 너무 슬프구나.”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항상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잖니.”

“그건 오라버니였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내 궁에 방문하는 것은 오라버니 쪽이었다. 물론 그런 오라버니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내 유년기는 오라버니와 어머니, 아버지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 시녀장과 유모, 그리고 내 궁의 시녀 시종들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 그때, 오라버니가 제안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니? 나랑 정원 산책이라도 할래?”

“네? 오라버니도 바쁘지 않으세요? 듣기로 할 일이 많으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너와 산책할 시간 정도는 있지.”

나는 약간 고민했다. 아까 루미나스 님이 방문한 덕분에 하지 연회에 대한 일이 아직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고민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았다. 잠깐 산책을 하는 것 정도로 일이 엄청나게 쌓이지는 않는다.

“네, 그렇게 해요.”

내 말에 오라버니가 씩 웃었다. 여름의 해바라기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바야흐로 황궁의 정원에는 연꽃이 한창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나온 지도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아깝게도 말이다. 오라버니가 말했다.

“날씨가 참 좋지?”

“네, 오라버니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도 보게 되네요.”

“나야말로 너와 오랜만에 산책을 하니까 기분이 좋구나.”

오라버니는 불어오는 여름의 바람을 만끽하듯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정원을 얼마쯤 걸었을까, 오라버니가 잠깐 발을 멈추었다.

“내가 하나 알려 줄 게 있단다.”

“네?”

“이번 하지 연회에서 놀라운 일이 있을 거거든.”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게 뭔데요?”

“글쎄, 그건 아직 비밀이지.”

“치사해요.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조르듯이 오라버니를 바라보자 오라버니는 갈등하는 듯했다.

“네? 말씀해 주세요. 궁금한걸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체에…….”

“기대하고 있으렴.”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분명 네가 좋아할 거란다.”

물론 그럴 것이다. 가족들이 나에게 나쁜 일, 싫은 일을 만들어 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결국 오라버니를 따라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알겠어요.”

우리 둘은 다시 황궁 정원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햇빛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즐거운 산책을 마치고 궁 안으로 돌아왔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 뒤의 나날들이었다.

그날 이후 종종, 루미나스 님이 나를 방문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를 남들이 있는 곳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밖에 내보내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 소문을 직접적으로 듣게 된 것은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불려 간 자리에서였다.

하지 연회가 몇 주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꽤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무슨 일이시지?”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오랜만에 그냥 식사나 같이 하시려는 걸까?”

내 말에 시녀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가족들이 워낙 다 바쁘기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과 만나게 된 게 기쁘기도 하고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옷을 차려 입고 만찬장으로 갔을 때였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이미 먼저 도착한 다음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제가 늦었네요. 다들 좋은 점심이에요.”

내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인사를 하자, 세 사람이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해 보였다.

‘……뭐지?’

그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들이 차례로 한마디씩 던졌다.

“오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도 와 줘서 고맙구나.”

“고마워, 아이샤.”

“……네? 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와야죠.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점심인데요.”

그러자 그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감동한 듯했다. 뭔가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얌전히 냅킨을 들었다. 전채는 샐러드와 차가운 수프였다. 그런데 내가 스푼을 들려고 할 때,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아이샤.”

“네, 어머니?”

“음, 그게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눈빛 교환을 하더니,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니?”

“네? 아니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차가운 수프를 한 입 떠먹어 보았다. 감자 수프의 풍미가 무척 좋았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맛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다들 안 드세요?”

그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 온 것은.

“안다. 아이샤.”

“……네?”

오라버니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얼굴이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짐작한 것이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무슨 때요?”

14살 때? 아니면 소녀 때? 어떤 때를 말하는 걸까? 내가 의아해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이샤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어,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이 어머니는 다 이해한단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아이샤.”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세 명의 얼굴에는 다들 아련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우리 아이샤가 이렇게 자라 버리다니.”

“자그마했을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아이샤…….”

“……다들 대체 왜 그러세요?”

나는 내가 오기 전에 그들이 먼저 뭔가 먹고 있지 않았는가 확인했다. 뭐 이상한 거라도 먹어서 이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이나 오라버니나 나를 과보호해서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애써 손을 슬쩍 떨어뜨리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들이 조금 진정한 다음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물론, 내가 이 황궁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어떠한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만약 루미나스 님을 만난 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그걸 들켰을 리는 없었다. 자연체의 정령을 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거라는 자신을 모두 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천천히, 선고하듯이 말했다.

“그야, 네가 요즘 사춘기인 것 같아서 말이다.”

“…….”

나는 순간 이미 들이켰던 물을 다시 뿜을 뻔했다. 그만큼 어머니의 말이 황당했던 것이다. 오라버니는 물론, 아버지까지 나를 아주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이샤, 나는 네 마음을 이해한단다. 사춘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야.”

“맞다. 네 나이쯤 되면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고 말고.”

“사랑하는 나의 딸. 앞으로 무슨 일이든 어려운 일이나 모르는 게 있다면 상담해 주렴.”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리벙벙해지고 말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여기에선 대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억울하게 외쳤다.

“다들 왜 제가 사춘기일 거라고 단정 짓는 건데요?”

그랬다. 내가 사춘기라고 생각될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던가? 딱히 예민해진 적도 없고, 평소랑 다른 행동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러자 가족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고선 서로 눈빛을 나누면서 말하기를…….

“그게…….”

“자꾸 혼자 있고 싶고…….”

“싱숭생숭하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고…….”

“사춘기가 그런 거 아니겠니?”

‘……아.’

그 말을 들으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요즘의 생활에 대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루미나스 님을 만난답시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다. 물론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난 것은 덤이다.

……그런데 그게 사춘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었을 줄이야. 안 그래도 시녀들이 내가 요즘 혼자 있는 것에 묘하게 납득하는 것 같더라니…….

내가 침묵하고 있자 가족들은 나의 심기가 상한 것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다들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아이샤. 혹시 사춘기 얘기를 꺼내서 화가 난 거니?”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우리가 섬세하지 못했어.”

“……아니…….”

가족들이 나를 무슨 떨어지면 바로 깨지는 크리스털 잔처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족들은 나를 달랬다.

“아이샤, 앞서 말했지만 사춘기는 당연한 과정이란다.”

“그래,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더 있다간 가족들이 울지 말라면서 달래 줄 기세였다.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나는 한숨을 포옥 쉬고는 말했다.

“저는 사춘기가 아. 니. 에. 요.”

그러자 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라버니가 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다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이 술 취했다고 말하는 것 봤니?’라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아니, 진짠데.’

그에 나는 조금 발끈하고 말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래, 믿어. 아이샤…….”

“아, 정말…….”

나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무리 내가 아니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진짜라니까요.”

“그래, 그래.”

가족들의 대답은 영 시원치 않았다. 나는 침묵했다. 나를 사춘기로 믿는 가족들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사춘기가 올 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어머니?”

내가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자,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웃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였다.

“후후후…….”

“……?”

어머니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나도,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몫의 수프 그릇을 흘긋 바라보았다. 감자 수프가 차가운 음식이어서 다행이다. 따뜻한 수프가 다 식었으면 아까웠을 테니까 말이다. 어머니가 한참 웃고 난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

눈물까지 닦으며 어머니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렇지 않나요, 폐하?”

아버지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어머니의 눈에는 부드러운 웃음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린 줄만 알았더니 아이샤도 벌써 14살이고, 이제 반쯤은 성인이라고 해도 괜찮겠구나.”

“사춘기도 오고.”

“사춘기는 아니라니까요.”

내가 부루퉁하게 말하자, 어머니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을 더 웃었다.

“그래, 그래.”

어머니의 말에 뾰루퉁해지는 건, 정말 내가 사춘기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이어지는 오라버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샤.”

“네?”

“내가 조만간 멋진 일이 있을 거라고 했지?”

“어머, 이시스. 벌써 말한 거니?”

“아니요, 어머니.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어머니와 이시스 오라버니,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내가 묻자, 세 사람은 비밀을 교환하듯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알려 주세요!”

내 말에 아버지가 씩 웃었다. 장난을 꾸미는 듯한 즐거운 웃음이었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가 선언했다.

“이번 하지 연회 때에, 네 데뷔탕트를 열기로 했단다.”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네?”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데뷔탕트. 말이다.”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이미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모양이었다.

“제, 데뷔탕트요?”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되짚어 보았다.

‘나의 데뷔탕트?’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됐잖니. 보통 14살 즈음에 데뷔탕트를 여는 게 보편적이니까.”

“그, 그렇긴 한데.”

나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말았다.

“데뷔탕트라니…….”

데뷔탕트에 대한 기대,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섞였다.

‘나도 드디어 데뷔탕트를 여는구나.’

멀게만 느껴졌던 그 단어가 갑자기 확 와 닿는 느낌이었다. 데뷔탕트를 열게 되면 사교계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은 물론, 이제 반쯤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얼른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데뷔탕트를 하지 연회에서 연다고요?”

하지 연회에서 데뷔탕트를 여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내 의문에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래, 이번에 네가 하지 연회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으니 그날 데뷔탕트를 치르면 더 빛날 거라고 생각했단다. 아이샤, 네 생각은 어떠니?”

“부담스럽다면 다른 날로 미뤄도 된단다.”

“저는…….”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하지 연회라면 여름의 가장 큰 연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몰려와 나를 축하해 줄 것이다.

주목받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생애 단 한 번뿐인 데뷔탕트라고 하니까 그것마저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너무 기뻐요!”

나는 환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하지 연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다면 최고일 것 같아요!”

내 말에 세 사람은 안심한 듯했다.

“다행이구나,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했단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깜짝 선물이었네요.”

“내가 멋진 일이 생길 거라고 했지?”

오라버니가 말했다. 깜빡 잊었다는 것처럼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아, 그래. 그리고 그 데뷔탕트에서 차기 대신관감이라는 신관이 축복을 해 주기로 했단다.”

“……네?”

나는 그 순간, 굳고 말았다. 빛의 신전을 국교로 두고 있는 우리 제국에서는 중요한 자리에 서는 사람을 빛의 신관이 축복하는 의식이 있었다.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신관의 직위도 높아진다.

황녀인 나라면 당연히 대신관에게 축복을 받는 게 맞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굳은 게 당황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달래듯이 말했다.

“원래는 대신관이 축복을 내려 주기로 했지만, 그가 정중하게 거절하더구나. 이미 일선을 벗어난 자기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새로운 신관이 축복을 내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고, 모습도 보기 좋지 않겠냐며 말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미 대신관에 필적할 만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결코 축복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거란다.”

“그, 그야…….”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그 신관의 정체가 바로 ‘루미나스’ 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주춤하고 말았다.

그 말은 루미나스 님이 직접 내 데뷔탕트 날에 축복을 내려 준다는 뜻이 되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닐까.’

세상에 정령왕에게서 직접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와…….’

두 손을 모아 살며시 댄 가슴에서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울리고 있었다. 정령사인 나에게 정령왕이 직접 내리는 축복만큼 영광인 것은 없었다,

“정말 기대되어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런데 내가 웃는 걸 보던 가족들의 표정이 어쩐지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에 나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역시, 데뷔탕트는 조용히 치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네? 왜요?”

오라버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야, 이 제국 귀족들이 너를 보고 모두 반해 버리면 곤란하잖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 말을 듣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생각만으로도 걱정이 되는군.”

“그러게요. 이시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나는 눈을 반쯤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줬다 무르긴 없기예요. 아시죠?”

“…….”

“…….”

나의 강렬한 눈빛에, 세 사람은 헛기침을 했다.

“그, 그렇지.”

“큼. 큼.”

“우리는 단지 아이샤 네가 점점 커가는 게 서운해서 그렇단다.”

어머니가 그 말을 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우리 아이샤, 언제 이만큼 컸을까.”

나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커도 저는 어머니,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영원한 아이샤인걸요.”

어머니의 손길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따뜻했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따스함이었다.

“데뷔탕트라니.”

“아이샤도 동의했으니, 준비할 게 많겠구나.”

“드레스나 연회의 준비도 빠뜨릴 수 없겠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샤에 대해서라면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걸요.”

“어머, 어머니의 직감을 무시하지 말렴.”

그런데 그 평안함도 잠시, 금방 가족들은 투닥거리고 말았다. 저마다 자기가 제일 나를 많이 안다는 것이었다. 그 어이없는 다툼에 나는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때, 내 어깨에 타고 있던 루가 나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저도 주인님을 무척 잘 아는걸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결국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나를 아껴 주는 소중한 존재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따뜻해지고 있었다.

“물론, 알지.”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루가 헤헤 웃어 보였다.

‘데뷔탕트라.’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하지 연회까지는 이제 몇 주 남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정령왕님께 직접 받는 축복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

그런데 가족들은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저마다 제일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총책임자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눈을 뜨고 세 사람의 다툼에 끼어들었다.

“제 의견도 빼놓지는 마세요. 당사자라구요!”

“그래, 그래. 물론이지.”

“그래서 말인데, 아이샤는 어떻게 생각하니?”

음식이 식어 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 * *

그날부터 시작된 데뷔탕트 준비는 예상했던 대로 무척, 아주 무척 바빴다. 연회는 하지로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컨셉은 따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드레스부터 보석, 액세서리, 그 외의 기타 준비도 해야 했고 특별히 예법을 다듬는 둥 할 일이 많았다.

물론 가족들은 ‘네가 곧 사교계의 법이다’라며 굳이 예법을 다듬을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이왕 여는 데뷔탕트에서 남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게다가 데뷔탕트까지 앞으로 남은 시일이 빠듯한 감이 있었다. 사람들도 무척 바빴고,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드레스를 대어 보고 있었다.

“황녀 전하, 이 드레스는 어떠세요?”

유모가 자신 있게 꺼내 놓은 드레스는 흰 바탕에 연초록 레이스가 군데군데 달려 있는 여름용 파티 드레스였다. 가벼우면서도 발랄하고, 사교계의 최신 유행을 따른 디자인이라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드레스이기도 했다.

“그것보다 이거, 이것도 잘 어울릴 것 같으신데요.”

그런 유모에게 반박하듯, 시녀장이 내놓은 드레스는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잔뜩 부풀린 밑단은 고전적이면서도, 화사하고 귀여운 느낌이었다. 시녀장은 열변을 토했다.

“데튀탕트라면 역시 소녀들의 꿈인 분홍색 드레스이지요. 이건 전통 아니겠어요? 이걸 입으신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상상이 안 될 정도인걸요.”

“어머, 하지만 시녀장. 이 연초록색 드레스를 보세요. 보기만 해도 아이샤 황녀 전하의 깜찍함이 배가 되는 것 같지 않나요? 마치 여름의 요정처럼요. 정말 사랑스럽고 황녀 전하께 잘 어울리는 옷이에요.”

둘의 말다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드레스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그 중간에 낀 황실 수석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였고 말이다.

게다가 그 둘 중에 하나를 정한다고 해서 완전히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토너먼트처럼 드레스 후보군을 하나하나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세상에 드레스가 이렇게 많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투닥대던 두 사람이 나에게 고개를 돌린 것은.

“황녀 전하!”

“어, 응?”

딴생각하던 게 들켰나?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하지만 둘은 전혀 웃지 않은 채 나에게 두 개의 드레스를 들이대었다.

“황녀 전하의 의견은 어떠세요?”

“이거? 아니면 저거?”

“내 의견?”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내 의견은…….”

입을 잠시 다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연초록 드레스이냐, 분홍색 드레스이냐. 둘 다 아름답기 때문에 쉽게 못 고르겠는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굳이 내 의견을 묻는다면 말이지.

“……잠깐만 쉬면 안 될까?”

정말로 녹초다. 아까부터 몇 시간 내내 드레스만 잡고 있었더니 지쳐서 죽을 것만 같다. 내가 흐물흐물해지는 것을 본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너무 지나쳤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그럼 조금만 쉴까요.”

“그래도 역시 이 연초록 드레스가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찌릿, 시녀장과 유모의 눈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취향이 명백하게 갈리다 보니 나에 관한 일이라면 종종 이렇게 다투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옹다옹하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시원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 고마워. 레나.”

“그리고…….”

그녀가 은쟁반 하나를 가져왔다. 나는 매우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게 뭐야?”

다투고 있던 시녀장은 이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 그것은…….”

그녀는 싸움도 멈추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유모가 냉큼 그 대답을 가로채고 말았다.

“편지입니다.”

찌릿, 시녀장이 유모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모는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편지라니, 누구에게서 온?”

가볍게 물은 질문이었다. 별 중요한 사람에게서 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함은 이미 제쳐둔 채였다.

“로즈 블라임 후작 영애와 클로에 디몬트 공작 영애의 편지입니다.”

“뭐?!”

그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른 그것들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은쟁반 위에는 두 개의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여기 편지칼 좀!”

나는 레나가 건네는 칼로 재빨리 편지를 개봉해 보았다. 우선은 로즈의 편지부터였다. 진분홍색 편지에는 로즈다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인사말이 몇 줄 적혀 있었고, 바로 본론으로 이어졌다.

―아이샤!

내 이름을 부르는 로즈의 목소리가 편지를 넘어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편지를 읽고 있었다.

―네가 데뷔탕트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 축하해!!

―하지만, 그런 소식은 당연히 먼저 알려 줬어야지! 신문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아차, 내 실수다. 그러고 보니 준비에 정신이 너무 없어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이게 다 친구 없던 시절이 너무 길어서야. 미안, 로즈.’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계속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번에 클로에 집에 묵으면서, 네 데뷔탕트에도 참여하기로 했어. 친구로서 당연한 일이지!

“정말?!”

나는 읽다 말고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시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클로에도 아마 편지할 거라고 생각해. 휴, 나도 얼른 데뷔탕트를 열고 싶다.

―하여간 다시 만날 그때까지 몸 건강하게 잘 있어야 해!

―너의 로즈가.

편지를 읽은 것뿐인데도 로즈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로즈가 내 데뷔탕트에 온다니. 하긴, 나라도 로즈가 데뷔탕트를 연다면 당연히 참석할 테지만 말이다.

이번에 나는 클로에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고급스러운 은색에 은방울꽃이 그려져 있는, 차분한 느낌의 편지지였다. 역시나 클로에다운 매끄럽고 우아한 필체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엘미르의 단 하나뿐인 별, 사랑하는 나의 아이샤에게.

―아이샤, 잘 지내고 있어? 나는 무도회가 끝난 뒤에 블라임 후작님의 저택에서 며칠 더 머무르다 이제 수도에 올라왔어.

나는 그것을 읽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편지에서부터 두 사람의 개성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신문에서 보고 네가 데뷔탕트를 연다는 걸 알았어. 무척이나 축하해. 떨릴 걸 알지만 아이샤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나보다 한 살 많은 클로에는 이미 작년에 데뷔탕트를 치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어른스럽게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이번에 로즈와 함께 네 데뷔탕트에 참석하려고 해.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때 만날 수 있겠지.

―다시 만날 때까지 네가 무탈하기를 빌고 있을게.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야.

―너의 클로에가.

나는 두 사람의 편지를 모두 읽고 테이블 위에 소중히 올려놓았다.

“너무 기쁘다. 그치, 루?”

내 기분에 감응한 것인지 루도 기뻐서 공중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클로에와 로즈가 온다면 데뷔탕트가 더 멋져질 것이다. 분명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잠깐 그 편지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역시,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애슐리 롤랑 영애 말이다.

‘애슐리는 이 연회에 오려나?’

롤랑 영지는 남부에서도 구석, 나쁘게 말하면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늦을 가능성이 있었다.

‘온다면 좋을 텐데. 애슐리도 로즈와 화해하고 싶어 했었고…….’

어릴 때는 사이가 좋았다던 두 사람이다. 이번 기회로 서로 화해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게 있었다. 빛의 신전의 의도 말이다.

* * *

대신관을 포함하여, 빛의 신전의 신관들은 이번 하지 연회를 통해서 룬, 그러니까 루미나스 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차기 교황감으로도 언급되고 있는 루미나스 님을 성녀라 불리는 나와 함께 세워 놓는다면 선전용으로 아주 딱 좋겠지. 그 김에 교세가 더 확장된다면 더 좋을 테고 말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신전의 축복을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제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을 잃지 않는 거야.’

나는 어깨를 곧게 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

‘가족, 정령들, 그리고 친구들…….’

신전에서 선전을 원한다면 기꺼이 어울려 주겠다. 다만, 그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넘어가는 일이다. 성녀로서의 나의 입지가 올라가면 제국에 도움이 되고, 결국 황족인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말이다.

‘잘하자,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분명히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루미나스 님이 내 편이니까!’

정확히 내 편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얼굴을 본 정이 있는데 설마 나를 무시하시겠는가?

‘음…….’

정령에게 정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원한 차를 모두 마셨을 때였다.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자마자, 나를 향해 쏟아지는 두 목소리가 있었다.

“황녀 전하, 충분히 휴식은 취하셨나요?”

“자아, 다시 드레스를 보실까요?”

“…….”

나는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이 두 명의 악마, 시녀장과 유모를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려 댔다.

‘……하아.’

지금은 신전 이전에, 두 사람 앞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판이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시 일해야 할 때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황제궁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데뷔탕트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있다나? 그래서 나는 시간에 맞춰 황제궁으로 향했다.

데뷔탕트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직 드레스를 최종적으로 고르지 못한 게 좀 걸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물으러 다니고 있으니 곧 내 드레스가 결정될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구나.’

맑은 하늘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아침 이슬 덕분에 황궁 정원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했다. 드레스 자락을 들고 총총, 대리석 바닥을 걸었다.

‘그런데 데뷔탕트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한다는 게 뭐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굳이 나를 부를만한 일이라는 게 잘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문득 내 시선을 붙잡은 게 있었다. 황궁의 넓은 공터 앞에 못 보던 마차가 하나 서 있었다. 온통 순백색으로 칠해진 그 마차는 고풍스러웠고, 머리 부근에 태양 모양의 황금색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그 마차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저건?’

나는 입을 조금 벌리고 말았다. 내가 갑자기 멈추어 서니 시녀들도 따라서 조용히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황녀 전하?”

“어, 어…… 아냐. 아무것도.”

시녀장이 나에게 물어오기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은 이미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 상태였다.

황금색 태양의 장식물, 그리고 순백색의 마차. 그것은 빛의 신전에서 이용하는 마차였다.

‘신전에서 사람이 온 걸까? 그럼 혹시…….’

저절로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뒤에서 시녀들의 의아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혹시, 그 사람들 중에서 루미나스 님이 계시진 않을까? 그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다.

빠르게 걸어서 황제궁의 앞에 도달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 곳은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쓰곤 하는 대영접실이었다. 황금과 귀한 대리석으로 치장한 대영접실의 문이 열리고, 나는 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깜빡하느라 반응이 늦었다.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선 인영이 있었다. 후광 때문에 자세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오, 황녀 전하. 정말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

그는 내가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라 바로 빛의 신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자, 대신관이었다.

이제 일흔이 가까워진 나이의 그는 인자한 웃음을 띠며 나를 반겼다.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그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존재를 기대하고 있었던 탓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대신관님.”

“나날이 더 성장하고 계시군요. 늙은이로서는 무척 마음이 기껍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신관은 껄껄 웃었다. 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했다.

‘대신관님이었구나. 루미나스 님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내가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 앞의 기둥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두꺼운 기둥이 그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흰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목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빈틈없이 채운 신관복은 그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마치 그 옷을 입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비록 그의 본 신분에 비하면 그 옷이 초라하고, 단추는 상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단추였다지만…….

“……아…….”

나는 계속해서 말을 잃고 있었다. 그가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제국의 황녀에게 대하는 태도로는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 태도가 어울리게 만드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이 찰랑거리면서 흔들렸다. 이 세상의 것과 같지 않은 아름다운 금안도, 그 외모도 여전했다.

“……루…….”

내가 얼떨결에 그의 이름을 부를 뻔하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에 나는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입으로 삼켰다.

내가 한참 동안 그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내 상념을 깨부수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나는 끼거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해진 고개를 애써 돌렸다. 황제인 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겨우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선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루미나스 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마법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분은 이번에 새롭게 신관이 되신 분이라고 한단다. 지금 대신관님과 함께 막 도착한 참이었어. 때를 아주 잘 맞췄구나.”

“……아, 네.”

“나도 있단다. 아이샤.”

불쑥,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평소보다 약간 불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질문하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어쩐 일로 이곳에……?”

“나도 데뷔탕트 준비를 돕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샤.”

그렇게 말하며 오라버니는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제야 제정신을 좀 차렸다. 대신관님도, 루미나스 님도 이번 하지 연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황궁에 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하지 연회의 책임자이자, 데뷔탕트의 당사자로서 연회 준비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명료해진 머리에 나는 가장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아차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

남들 앞이기 때문에 일부러 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에 두 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딸을 참 잘 키웠지,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달까?

한쪽에 서 있던 대신관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자리가 만들어져서 매우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의 데뷔탕트가 열린다는 것도 들었는데 겹경사가 따로 없군요.”

“대신관, 그대가 축복을 다른 이에게 미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 무척 놀랐지.”

그 말에 아버지가 화답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그대의 차기 대신관 후보라고 했을 때는 납득했다네. 게다가 실제로 직접 보니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걸 한눈에 알겠군. 이름이…… 룬이라고 했던가?”

룬. 성은 없다. 신관들은 모두 신에게 귀의한 자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일원이라는 증거인 성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관이 되기 전의 과거를 묻는 것 또한 실례였다. 신관이 된 순간 속세의 과거 또한 모두 버리기로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심지어는 오라버니마저도 루미나스 님에게 흥미가 무척 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질문했다.

“원래 귀족은 아니었는가?”

가족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루미나스 님에게서 태생적으로 배어 나오는 고귀함 같은 것은 도무지 감추려야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것도 한몫하겠지. 그런데 그때, 대신관님의 얼굴이 굳는 것이 보였다. 인자하고 온화한 평소의 대신관님답지 않았다.

‘뭐지?’

“그,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

그가 얼른 루미나스 님의 앞에 나섰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째서?’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루미나스 님의 모양 좋은 입술이 열렸다.

“아니었다.”

“…….”

“…….”

그리고 그 대답에, 우리 가족들은 물론 대신관님마저도 쩍하고 굳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대영접실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나간 줄 알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루미나스 님의 말을 되짚었다.

“……아니었다. 라고?”

아버지는 그 말을 못 들어서 되물으신 게 절대 아니셨다. 이 거리에서 말을 못 알아들을 리도 없으니까. 다만 의자의 손 받침대에 올려둔 아버지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감히 제국의 만인지상이라고 불리우는 황제에게 눈앞에서 반말을 한 것이다. 아무리 루미나스 님이 차기 대신관 후보라곤 하나, 현재 대신관님께서도 아버지께 존댓말을 하고 계셨다.

다시 말해 방금의 행동은 무례해도 어마어마하게 무례한데다가, 당장 처벌을 받아도 마땅하단 뜻이다.

대신관님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이제야 대신관님이 왜 초조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처럼, 루미나스 님이 아무에게도 존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신전에서는 그게 정상참작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차피 그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은 대신관님밖에 없었을 테고, 차기 대신관 후보라는 직함도 있으니 대신관님께서는 루미나스 님의 행동을 너그러이 넘기셨겠지. 하지만…….

‘루미나스 님…….’

나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께까지 반말을 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어쨌든 지금은 평사제으로 위장하고 계신 상태인데…….’

물론 이해는 한다. 황제보다 신이 높으리란 건 어린애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나만 해도, 감히 루미나스 님께 존댓말을 듣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서 심장이 멈출 것만 같다. 하지만 문제는 사정을 모르는 우리 가족들이었다.

‘아아…….’

피눈물이 날 것 같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루미나스 님을 이제 숫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이 제국을 이끄는 태양과 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일진대 감히 그대가 어느 안전이라고 반말을 지껄이는가?”

오라버니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대영접실의 점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루미나스 님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에게 귀의한 신관에게 있어서, 신 이외의 인간들은 모두 평등한 존재일 뿐. 그렇지 않은가?”

“…….”

루미나스 님은 대답을 요구하듯 대신관님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도 더욱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대신관님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고 있었다.

그분 또한 아무리 그래도 루미나스 님이 이러한 대형 사고(?)를 칠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론상으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할 장소가 틀렸다.

황제 폐하인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마치, 당신이 길거리의 평민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아아악!!!!’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미 이곳의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막아야 한다.’

막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날지 모른다. 나는 재빨리 뛰쳐나갔다.

“아, 하, 하, 하. 정말 교리에 충실하신 신관님이시군요.”

내가 아버지와 루미나스 님의 중간에 서로를 가로막듯 서자, 아버지의 열렸던 입이 닫혔다.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루미나스 님도 마찬가지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어머니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도 기분이 좋지 않으셨던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 뭐라도 말해야 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서, 성녀로서.”

“……성녀로서?”

이거다. 나는 재빠르게 주문을 외우듯 좔좔 읊어 댔다.

“서, 성녀로서 이분과 함께 신전의 교리에 대한 깊고도 심후한 토론을 한 번 나누어 보고 싶어지는걸요!”

“아, 아이샤?”

“이렇게 날씨도 맑고, 루미나스 님께서도 지켜보시는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목소리가 높아져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대신관님! 저는 성녀로서 아주 잠! 깐! 만! 이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고 오겠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갈게요!”

“아니, 잠깐……!”

오라버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모두 무시한 채 재빨리 루미나스 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그를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튄 것이다.

* * *

다행히 루미나스 님은 순순히 나를 따라와 주었다. 시녀장이 보았으면 ‘황녀 전하께선 뛰시면 안 됩니다!’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화를 피하고, 루미나스 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니까!

“……헉, 헉. 헉.”

단순히 가까운 기도실에 들어왔을 뿐인데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인해서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빛의 신을 믿는 우리 제국의 특성상, 황궁에도 작은 기도실이 몇 개쯤은 만들어져 있었다. 거기에서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제단에 꽃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바로 빛의 신인 루미나스 님과 함께 들어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숨을 고르고 있는데 루미나스 님은 아주 태연하게 기도실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는 이렇게 생겼군.”

그 목소리는 태평하기 그지없었을 뿐이다. 나는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어떻게 루미나스 님을 이끌고 이곳까지 오기는 했다. 아버지의 화도 일단은 피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떡하지? 루미나스 님에게 무턱대고 존댓말을 써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그가 꽤 자비로운 정령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과 이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언어는 정신을 지배한다. 누군가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정령왕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흥미롭군.”

이런 상황에서도 루미나스 님은 제단에 헌정해 놓은 꽃을 바라보면서 느긋한 소리나 할 뿐이었다.

“흥미로우신가요…….”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흥미롭다고?’

뭔가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은 듯했다. 루미나스 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그에게 우회적으로 존댓말을 부탁할 수 있는 방법이 말이다.

나는 아까보다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갈라지기에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큼, 큼. 루, 루미나스 님?”

“왜 그러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헌화의 꽃잎을 살짝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가 만지니까 꽃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꺾여져 조금 시들시들했었는데…….

‘……말하지 말까?’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새삼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와 닿았다. 그에게 인간 세상의 규칙을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하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적응해야 해! 왜냐면……!’

입을 열었다.

“루미나스 님께서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시다고 하셨지요?”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어떻게 보면 당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랬지.”

“그, 그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답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나온 듯했다. 루미나스 님은 쉽게 대답했다.

“인간들, 특히 너에게 흥미를 느껴서였지.”

“바로 그거예요!”

나는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루, 루미나스 님께서는 인간들의 규칙을 배우실 필요가 있으세요!”

내 말에 루미나스 님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가 의문을 가지기 전에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아무리 인간과 저에게 흥미를 가지셨다고 해도 만약 지금처럼 어, 인간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저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말하다 보니 나도 설득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외쳤다.

“왜냐하면, 정말 인간 틈에서, 인간과, 인간처럼 함께 섞이지 않으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영영 배울 수 없을 테니까요!”

“…….”

내 말에 그는 잠깐 정지했다. 잠깐의 침묵이 좁은 기도실을 지배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런가?”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모습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를 들어서…… 방금 존댓말도 그래요. 인간은 신분을 중요시하게 여기니까 꼭 높은 사람들에게는 존댓말을 써 줘야 해요.”

“……흠.”

“어, 어차피 존댓말을 하실 분도 얼마 없으실 것 아니신가요. 신전에서는 모든 분께 반말을 쓰셨죠……?”

그냥 한번 예측해 본 것이었는데,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그랬지. 어차피 다 나의 아이들이니.”

‘대신관님.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아무리 루미나스 님이 신성력이 많다곤 했으나 분명히 구설수에 올랐을 행동일 것이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관이 매일같이 반말만 하고 다녔다면 말이다. 중간에 낀 대신관님만 힘드셨겠지.

그런 대신관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평소 때의 저에게는 말을 놓으셔도 괜찮으니 오라버니와 아버지, 어머니 이 딱 세 분들께는 존댓말을, 공적인 자리에서 저와 룬님이 상호 존댓말을 하는 걸로 해요. 루미나스 님. 앞서 말했듯, 인간의 규칙을 배우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고 그 규칙을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랍니다!”

이제 나는 두 손을 꼭 모아쥐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통할까?’

제발, 제발 통했으면 좋겠는데. 루미나스 님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정적이 흘렀을까, 루미나스 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세!’

나는 환해진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루미나스 님이 말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저, 정말요?”

“그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더 배우고 싶으니까.”

나는 승리의 기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그, 그러면 앞으로는 아버지나 어머니, 오라버니에게 존댓말을 써 주실 거죠?”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루미나스 님!”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네?”

“인간의 규칙을 따르기로 했지 않은가. 그러니 너도 내 가명인 ‘룬’이라고 나를 불러야지.”

“아…… 그러네요. 맞아요.”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은근히 허술하면서도 뭔가 고지식한 듯한 그의 사고방식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룬 님은 작은 기도실에서 조심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

* * *

밖으로 나와 대영접실로 나가니 대신관님을 포함하여 가족들은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표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대신 대신관님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진 걸 보아서 변명을 아주 열심히 하신 모양이시다.

‘수고하셨어요. 대신관님.’

나는 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니?”

“그래. 네가 갑자기 나가기에 무척 당황했단다.”

“음, 어. 말씀드린 대로…….”

나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렸다.

“성녀와 신관으로서의 이야기를 했답니다. 루미나스 님의 은총과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어……그런 것들에 대해서요.”

“그래……?”

가족들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반쯤은 납득한 듯했다. 일단 성녀인 내가 신관인 룬 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 성녀라는 위치는 정말 유용하구나.’

나는 헛기침을 했다. 루미나스, 아니, 룬 님도 설득을 했다. 이제는 실전에 들어가 볼 차례다. 그런 눈빛을 가득가득 눈에 담으며 나는 룬 님을 돌아보았다.

“그렇지요? 무척 유용한 대화였지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인지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아주 느릿하게 보였을 정도다.

“그렇습니다.”

“……!!”

완벽한 예법에, 완벽한 존댓말이었다. 룬 님의 모양은 그야말로 예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나는 아까 흘리지 않은 기쁨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올 것 같아서 간신히 가슴께를 부여잡고 감정을 진정시켰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신관이 엄청나게 경악한 표정으로 나와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에게 존댓말을 가르치신 겁니까?’

……라고 묻는 듯한 그의 얼굴을 애써 피하며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룬 님이 제대로 예의를 갖추자 아버지는 기분이 많이 나아지신 모양이었다.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룬 님을 향해 물었으니까 말이다.

“그대가 대신관에 필적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젊어 보이는 나이인데 아주 대단하군.”

“감사드립니다.”

룬 님은 길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 하나하나에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둘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속으로 완전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무엇보다 그대가 황녀의 축복을 맡은 장본인이니까 말이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룬 님이 내 말에 설득당했다. 내 말을 들어준 것이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대영접실 안을 휙 둘러보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대신관님은 이제 아예 감격한 표정이었고, 이시스 오라버니도…….

‘……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시스 오라버니만큼은 아직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계속해서 하지 연회에 대한 설명을 했다. 사람들의 앞에서 축복을 내리는 것과 연회에서 신관들과 함께 참석하는 것 등.

반쯤 이미 알고 있었던 사항이었지만 머릿속에 새겨 넣기 위해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나와 오라버니는 대신관님과 룬 님을 배웅하게 되었다.

궁을 나오자 파란 하늘의 눈부신 햇살이 우리들을 향해 내리쬐었다. 아침이슬은 모두 마르고, 대신 꽃들이 저마다 꽃잎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눈치를 살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오라버니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비해 룬 님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시스 오라버니를 상대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얼마쯤 길을 갔을까,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오라버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대와 내가 만난 적이 있었지?”

룬 님에게 말을 건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가시가 돋친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결코 룬 님께 즐거운 이야기를 할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차기 대신관 후보일 줄은 몰랐군. 오늘 그대를 보고 적잖이 놀랐어.”

“그러셨군요.”

룬 님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라버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존대는 없어도 되네. 그대에겐 도무지 존대가 어울리지 않는군.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는 것만으로 괜찮다.”

오라버니의 싸늘한 얼굴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싸움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룬 님은 여전히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거절도 않는군.”

둘은 서로를 탐색하듯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오라버니가 싸움을 걸고 룬 님이 적당히 그에 상대해 주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는 이 제국의 손꼽히는 무술가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내가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마조마하게 걷고 있는데, 대신관님이 슬쩍 다가왔다.

“저어, 황녀 전하.”

“……네?”

그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대화를 하셨기에 저분이 존댓말을 쓰시게 된 것입니까?”

“어…….”

그 과정을 말하자면 참으로 길어질 것이다. 나는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성녀…… 로서 침착하게 설득을 하였더니 저분께서도 받아들여 주셨답니다.”

“오오! 과연, 아이샤 님이십니다!!”

대신관은 정말로 감탄한 듯했다. 나는 기도실의 일을 생각하며, 대신관의 눈을 피해 저 멀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얘기하다 보니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어째서 룬 님께 대신관님이 공대를 하시는 건가요? 위치로 보자면 룬 님께서는 평신관이 아니신가요?”

“허허, 그야 물론 룬 님께서는 아직 대신관 후보에 불과하시죠. 하지만…….”

그는 푸근하게 웃었다.

“그분이 가진 신성력은 정말로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일선에 있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지요. 그런 그분께 어떻게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어떻게 보면 대신관인 그에게 있어서 룬 님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도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충분히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정말로 성직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의 눈에는 질시의 빛이라곤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저는 저분이 만들어갈 새로운 신전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아무렴, 교황이 될 수도 있다는 언급까지 있는 분이시니까요.”

교황이란 대신관과는 다르다. 대신관이 단순히 빛의 신전에서의 가장 우두머리라면, 교황은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신관들의 수장인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중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가 있겠다. 물론 그만큼 희귀한 자리였기 때문에, 교황이 된 자는 역사에서도 손을 꼽을 만큼 적었다.

“……정말 룬 님이 교황이 되실 수 있을까요?”

나의 질문에 대신관님은 껄껄 웃었다.

“허허, 앞일은 모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맞다. 나는 대신관님의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지. 웃던 대신관님이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황녀 전하를 오랜만에 뵙게 되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아,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랜만에 대신관님을 뵈어서 저도 마음이 매우 흡족했답니다.”

“7살 때 이후로 종종 뵙긴 했지만, 이렇게 길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니까요.”

“허허, 그렇습니다.”

그는 어딘가 아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자라셨군요.”

마치 우리 외할아버지 같은 말투다.

“하지 연회에 황녀 전하이 여시는 데뷔탕트도 성공적으로 잘 치르시기를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전에서 나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는 것에 이견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신관님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드려요. 열심히 할게요.”

나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룬 님을.”

그의 말에 나는 새삼 룬 님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긴 백금발이 조금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네. 그것도 열심히 할게요.”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뒤늦게 들었다.

“……이샤, 아이샤.”

“아, 네?”

오라버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만 손님께 인사를 드려야지.”

벌써 헤어질 시간이다. 대신관님과 룬 님은 앞서 타고 왔던 신전용 흰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인사했다.

“다시 뵈어요.”

내 미소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뵙겠습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에게, 축복을.”

그리고 마차는 출발했다. 왠지 그 뒤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었지만, 오라버니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라버니를 따라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면서 오라버니는 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저 신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하하.”

아무래도 룬 님은 오라버니에게 엄청나게 밉보여 버린 모양이었다. 음, 왜일까. 첫인상이 나빠서?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저렇게 딱딱해서 네 데뷔탕트를 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이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샤!”

오라버니의 얼굴은 진지했다.

“네. 오라버니?”

내가 눈을 깜빡이자, 이내 오라버니의 얼굴은 씩, 웃음으로 변했다.

“하지만 걱정 말렴. 이 오라버니가 네 데뷔탕트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 줄 테니까!”

오라버니는 데뷔탕트에 정말 많은 기대를 가지고 계신듯했다.

“네, 네.”

그에 웃어 버리고 말았다. 역시 내 가족들은 너무 나를 생각해 줘서 탈이다. 나는 오라버니와 다시 걸으며 가볍게 물었다.

“그나저나, 황태자 업무는 어떻게 되어 가고 계신가요? 설마 제 데뷔탕트 일 때문에 더 바빠지신 건 아니겠죠?”

“하하, 그럴 리가.”

이시스 오라버니는 빙긋 웃었다.

“염려할 필요 없단다.”

문득, 나는 오라버니의 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눈을 깜빡였다. 내 앞에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등만 보였다.

“…….”

무언가 내 감이 이상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접한 존재가 정령이라면, 아마 사람 중에서는 단연 ‘이시스 오라버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오라버니는 나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고, 나도 그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오라버니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감정에 민감했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오라버니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염려할 필요는 없나요?”

내 목소리에 오라버니가 반쯤 뒤를 돌았다.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조금 가까이 오더니,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래,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가 웃었다.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그 웃음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바람이 불어서 나와 오라버니의 머리카락을 다시 흐트러뜨렸다. 여름치고는 싸늘한 바람이었다.

* * *

당연하지만, 연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들어가다 보니 그 위를 어떻게 통솔하느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내 데뷔탕트 연회이기도 했지만, 나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열심히 하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1년에 있는 가장 큰 연회 중 하나이다 보니 할 일은 넘쳐 났다. 어머니를 도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러 뛰어다니다 보면 하루는 숨 가쁘게 흘러갔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바쁘다 보니 내가 아직도 데뷔탕트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지 못했다는 것.

시녀장도 유모도 어서 골라 달라고 성화였는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꼭 드는 게 없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 올라온 서류를 보고 있던 나는 잠시간 생각에 빠져서 펜을 내려놓았다.

토너먼트식으로 올라온 드레스의 최종 후보는 총 세 개. 디자이너가 꼽은 우아한 연보라색 드레스와 시녀장이 꾸준히 밀었던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 그리고 유모가 좋아하던 발랄한 연초록색 드레스였다.

모두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일이 없는 아름다운 드레스였지만 나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망설이고 있으면 디자이너가 실망하려나…….’

하지만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데뷔탕트 무대인데, 이왕이면 꼭 마음에 드는 걸 고르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도 의견을 여쭤볼까?’

어머니라면 분명히 날 위해서 꼼꼼하게 드레스를 봐주실 것이다. 게다가 마침 하지 연회에 대한 서류를 전달 드리기도 해야 하던 참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직접 황후궁으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궁 밖을 나서니, 햇살이 꽤 따가웠다.

여름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 어깨에 올라앉아 있는 루가 따뜻한 기운에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황후궁은 평소보다 무척 바빠 보였다. 연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와 시녀들은 금방 어머니의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황후궁의 시녀 말로는 마침 어머니가 잠깐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했다. 들어가기 전, 시녀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렴.”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오후예요. 어머니.”

“아이샤, 어서 들어오렴.”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방 안에는 홍차의 향이 퍼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티푸드와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티타임을 가지고 계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기 전, 못 박힌 듯 자리에 서고 말았다. 어머니의 방에 새로운 것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방 중앙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흰 드레스였다. 관리를 잘한 것인지, 그 옷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색을 뽐내고 있었다.

‘예쁘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네크라인은 시원하게 파여 있었지만, 그 위를 촘촘한 레이스가 덮고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종 모양의 소맷단과 풍성한 아랫단, 그리고 공단 리본과 레이스까지.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내가 그에 눈을 못 떼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어머니가 작은 탄성을 내었다.

“아, 저게 궁금한 모양이구나.”

어머니는 작게 웃으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옷걸이에 다가가서 그 옷을 자신에게 대어 보았다.

아쉽게도 그 드레스는 어머니가 입기에는 작아 보였다. 딱 내 나이쯤에 입으면 알맞을 법한 옷이었달까? 그래도 아름답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름답지 않니?”

“네, 정말 예뻐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 데뷔탕트에 입었던 드레스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어머니의 데뷔탕트에서요?”

“그래, 나도 14살 때 데뷔탕트를 치렀지.”

나는 그 드레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몇십 년이 지난 드레스라는 이야기인데,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깨끗했다. 얼마나 보관에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머니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그 드레스를 쓰다듬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지만, 아이샤 네가 데뷔탕트를 치르는 걸 보고 문득 생각났지 뭐니.”

그 얼굴에는 내가 몰랐던 추억들이 가득한 듯했다. 나는 어머니께 가까이 다가갔다.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 날이 어땠는지.”

“어머, 과연 재미있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환하게 웃었다.

“듣고 싶은걸요.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러자 어머니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딘가 소녀 같은 미소였다. 어머니는 나를 테이블에 이끌고 찻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그러곤 자장가를 부르듯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건 내 14살 여름의 일이었단다. 북부의 영지는 추운 날이 많아서 전통적으로 여름에 데뷔탕트를 여는 게 관례였지. 그래야 손님도 많고 날씨도 맑으니까.”

“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내 데뷔탕트 며칠 전부터 장마가 시작된 거야. 원래 북부에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장마 때문에 데뷔탕트가 완전히 엉망이 될 것 같아 나는 며칠 내내 울상이었단다.”

“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기다려왔던 날에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면 나라도 무척이나 서운하리라.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했다.

“거기에 더해, 내 데뷔탕트 파트너를 맡아 주기로 했던 사촌 오라버니가 말을 타고 나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졌지. 당연히 오라버니는 당일에 불참하게 됐고, 파트너도 없을 내 데뷔탕트가 너무 슬퍼서 나는 몰래 복도에 나가서 울고 있었어.”

왠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14살의 어머니. 서럽게 울고 있었을 그 모습이.

“그런데 그때였어.”

“그때?”

“어느 귀공자를 만났던 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울고 있던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

“비 때문에 손님들도 없지, 파트너는 다쳐서 불참했지. 완전히 데뷔탕트를 망친 것 같다, 라는 내 말에 그 귀공자는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렸단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지.”

어머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비를 그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파트너는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

“그 말에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을 바라보는데,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손을 내미는 거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어.”

어머니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완전히 망친 줄 알았던 그 날은 생애 최고의 날이 되었단다.”

“……그때부터셨나요?”

나는 어머니에게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아버지에게 반하셨던 날이?”

어머니는 눈을 찡긋했다.

“그건 아니란다. 그때 이미 그분께서는 황태자셨고, 절대 넘볼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긴 했지만, 한여름의 꿈이라고만 느꼈지.”

“…….”

운명은 정말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만남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시 만나 결혼하기까지 아주 많은 일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예감이 들었지.”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울고 있었다곤 해도, 처음 보는 영애를 위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주셨던 그분의 다정함만큼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란 예감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는 어느새 이미 모두 식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멋져요.”

어머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깝기도 하구나. 저렇게 예쁜 옷인데, 이제 추억 속으로만 사라져야 한다는 일이……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입을 일이 없겠지.”

“……!”

그 말을 듣자, 나는 어머니를 찾아온 이유를 불현듯 떠올렸다. 그리고 벼락같은 아이디어가 반짝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어머니.”

“어머, 무슨 일이니?”

어머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어머니의 데뷔탕트 드레스를 제가 빌려도 괜찮을까요?”

“……?!”

어머니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드레스들을 보여 드리고 어머니의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어머니의 드레스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고, 제 데뷔탕트를 치르고 싶어요. 어머니가 다시 그날을 떠올릴 수 있게요.”

“하, 하지만 아이샤.”

“네? 부탁이에요.”

나는 어머니에게 졸랐다. 어머니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데뷔탕트는 온전히 너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지. 디자이너들이 멋진 옷을 지어줄 텐데 굳이 저 오래된 옷을 입을 필요가 있겠니? 나를 위한다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나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저는 저 옷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아이샤…….”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옷이니까요. 그리고 전혀 오래된 티도 안 나는걸요.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하게 옷을 아껴 오셨는지 알겠어요. 저도 아주 조심해서 입을게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약간 얼굴을 붉히셨다. 내심으론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 그렇다면 그 옷을 네가 가지렴.”

“네? 그, 그냥 빌리기만 하는 거여도 기쁜걸요.”

“어차피 나에겐 이제 너무 작아져 버렸단다.”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 옷에 새로운 추억을 덧입혀 주렴. 이제 이 옷은 네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드레스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소중하게 그 옷을 받아들였다.

“……후후.”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쑥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딸.”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너무 커 버리면 안 된단다. 언제라도 너를 껴안아 줄 수 있게 말이다.”

“어머니가 안아 주지 못할 정도로 커 버리면…… 그때는 제가 어머니를 안아 드릴게요.”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어머니에게 폭 안겼다. 이제 나는 거의 어머니의 어깨까지 오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드레스, 아니, 이제 나의 드레스가 되어 버린 그 옷을 품에 꼭 안은 채 말이다.

* * *

하루하루 데뷔탕트와 하지 연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레스를 정한 뒤에는 디자이너가 알아서 보석을 박고, 여러 군데 수선을 해 주었다. 덕분에 원래도 무척 아름다웠던 드레스가 더욱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그 이외에도 숨 가쁘게 연회의 준비를 맡아서 해 왔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바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하지 연회 날이었다.

아참, 나는 하지 연회의 주관을 맡았기 때문에 데뷔탕트 파트너가 따로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이 연회를 주관하는 빛의 신전 쪽의 룬 님이 나의 파트너랄까?

그에 어머니는 미안해하셨고, 평소 나의 파트너를 맡아 주던 오라버니는 아쉬워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무려 오늘 나는 룬 님에게 축복을 받는 것이다. 나로서는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무척 맑았다. 세상의 만물들이 내 데뷔탕트를 축하해 주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오늘이 하지라서 날이 맑은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얼른 깨끗하게 씻고, 예쁘게 단장하던 나는 유모가 가져온 보석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저녁에 이걸 끼는 거야?”

“네, 황녀 전하.”

유모는 활짝 웃었다. 내 앞에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목걸이, 귀걸이, 팔찌가 있었다. 어찌나 눈부신지 이 방 자체에 광채가 번쩍번쩍했다.

‘무서워서 목을 들 수는 있을까.’

옆에 있던 시녀장이 기쁜 듯이 이야기했다.

“황녀 전하가 물려받으신 리오텐 공국의 다이아몬드 섬에서 나온 가장 질 좋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물건이랍니다. 전혀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세상에…….”

그렇다곤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그런데 아직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혀를 내두르며 살짝 그것을 들어 보는데,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던 것이다. 그에 내가 어리둥절해 할 찰나였다. 시녀장이 부연 설명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이 보석들에 경량화 마법을 거셨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요.”

“…….”

보석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경량화 마법까지 걸려 있다니. 이것만 가지고도 수도의 저택 몇 채는 기본으로 사겠다.

“휴, 그래.”

드레스와 보석을 보니 행사가 코앞인 게 느껴져 긴장이 되었다. 나는 보석들을 살짝 걸쳐 보았다. 푸른 다이아몬드에서는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전에는 뱃놀이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굳이 나가지 않았다. 악단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황궁 호수에 배를 띄우고 색색의 등을 띄우는 뱃놀이는 아마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신관들을 맞이하기도 해야 했고, 데뷔탕트 준비도 해야 했다.

신전의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영접실에서 신관들을 한 명 한 명 맞이했다. 이 의식은 내가 황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 아이샤가 최선을 다해 여러분의 편의를 돌보겠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룬 님도 있었다. 나는 룬 님을 특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연회의 주관을 맡기로 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내가 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현재 빛의 신전과 황실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전에 그렇게 신관들을 대접하며 점심 식사를 마친 이후에, 오후에는 정신없이 꾸미는 데 집중했다. 데뷔탕트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보석 세트를 온몸에 장식하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데뷔탕트 드레스를 차려입은 나는 천군만마가 와도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지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창문 바깥의 하늘이 무척 푸르렀다. 황후 아이리스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하지를 기념하는 뱃놀이에 다녀온 참이었다. 하늘이 맑은 것은 하짓날이기 때문이겠지만, 지난날들보다도 왠지 오늘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호수도, 숲의 정경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이제 막 데뷔탕트를 치를 어린 아가씨를 축복하듯이 말이다. 황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이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너무 긴장하고 있지는 않으려나? 자신이 14살 때 치렀던 데뷔탕트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때는 참 긴장되고 설레었었지.’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후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샤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아이였다.

너무 마음이 착한 아이라 때로는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이리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어머니의 드레스를 빌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던 아이샤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숨기지 못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나갔다.

“황후 폐하.”

그때, 옆에 있던 시녀장이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슬슬 연회장으로 향하셔야 할 때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보구나.”

겨울이라면 벌써 해가 져도 한참 전에 졌을 때일 텐데, 여름이고 하짓날이다 보니 해가 아직 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가늠하기가 조금 힘들었던 것이다.

바라보던 하늘에서 눈을 떼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방 밖으로 나섰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나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어머, 폐하!”

그 앞에 자신의 남편이자, 이 제국의 지고한 황제인 티리온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같이 가지.”

그렇게 말하며 티리온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남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한 황제이지만, 티리온은 가족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황후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소중한 반려자이기도 했다.

“오신다고 미리 말씀을 하셨다면 앞서 나갔을 텐데…….”

황후가 말을 잇지 못하자, 티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오랜만에 그대를 기다려 보고 싶었다네.”

그 말에 황후는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나이를 먹었어도 그의 그런 말들에 설레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이 바로 티리온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후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 폐하.”

두 사람은 같이 걸어서 황궁에 있는 대연회홀에 도착했다. 둘이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인사를 해 보였다. 비단이 깔린 길을 걸어서 가장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 옛 생각이 났다.

루셀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로 태어나, 제국의 황후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직도 그녀를 향해서 쏟아지는 주목과 관심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앉게 되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자신의 가족들 덕분일 것이다.

아이샤, 이시스, 그리고…….

“왜 그러지?”

“……아.”

티리온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이리스는 자신이 티리온을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리스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행복해서요.”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황제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보였다.

“…….”

그는 따뜻하게 미소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티리온이 힘주어 아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가 무척이나 따뜻해서, 언제나 그랬듯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참으로 의지가 되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시스가 들어왔다. 아이리스는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물론, 그때에도 티리온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이시스는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하지 연회의 주관자 중 한 명이자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사람이 등장했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님과 빛의 신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시종이 목청을 높여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연회의 주역인 아이샤에 대해 다들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천천히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뒤로는 아름다운 소녀가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흰옷과 반짝거리는 보석들은 그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살짝 올려 묶은 은발과 푸른 눈동자에 담긴 당당함까지. 마치 여름의 싱그러움과 활기참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공식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아이샤의 어깨에는 늘 그렇듯이 루가 타고 있었는데, 연회에 들뜬 것인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구의 딸인지,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한 무리의 신관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웅성거리고 있던 귀족들 쪽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 무리 속의 한 신관 때문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백금발을 아무런 치장 없이 늘어뜨리고, 흰 신관복을 목 끝까지 차려입은 그는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었을 뿐이만, 그 자체로 마치 빛이 나는 듯했다.

신관 룬이었다. 황후는 순수하게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몇 번을 보았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 눈부신 미모였다. 아이샤와 룬, 그 둘은 이 연회장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어머.’

그런데 황후는 다음 순간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고 말았다. 신관들을 이끌며 상석으로 다가오는 아이샤의 모습이 옆에 있는 룬과 묘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아이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환한 웃음도, 단순히 이 자리가 기뻐서만은 아닌 듯했다.

‘……흠.’

아이리스가 고개를 살짝 갸웃갸웃할 때였다. 티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리스.”

“네?”

아이리스는 눈을 깜빡이며 티리온을 돌아보았다. 티리온이 속삭였다.

“저 옷…….”

아이리스는 그러고 보니 아이샤의 데뷔탕트 드레스에 대해서 티리온에게 설명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기억하시나요?”

무려, 수십 년 전의 일인 것이다. 아이리스가 놀라서 입을 가리자, 그 말에 황제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

아이샤가 입고 있는 옷은 예전 아이리스가 데뷔탕트 때에 입었던 옷이었다. 물론 약간의 수정을 가미해서 조금 더 세련되게 바뀌었다지만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티리온은 아이리스처럼 그 또한 과거를 되짚는 듯한 얼굴이었다.

“울고 있었던 그 영애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나.”

그 말에 아이리스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말았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다정함은 여전했다. 행복감에 절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이리스 드 엘미르. 그녀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이 제국의 황후라거나,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있고, 그녀를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껴 주는 남편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마음이 기꺼워지는 것이다. 아이리스가 티리온에게 설명했다.

“……아이샤의 부탁이었어요. 저 옷에 새로운 추억을 덧입히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랬군.”

티리온이 슬쩍 웃었다. 이제 아이샤와 신관들은 그들의 발치에 다가와 있었다. 이윽고,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 * *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신관들을 찾아갔다. 그들과 함께 입장하면서 신관들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나의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길고 흰 그 옷들은 성스러운 느낌을 배가 되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룬 님의 모습은 아주 특출 난 것이었다. 마치 그 옷이 룬 님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달까.

“안녕하세요. 신관 여러분.”

나는 그들을 향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민망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왠지 말이 없었다.

다만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모두 긴장한 탓일까? 열심히 꾸민 모습을 남들에게 처음 보이는 것이었는데, 다들 아무런 말이 없으니 괜히 머쓱해졌다.

‘너무 화려해서인가?’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신관들은 보통 액세서리 하나도 걸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볍게 납득한 나는 그들을 이끌었다.

“자, 연회장으로 같이 가요.”

그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얼마나 말을 잘 들어 주었는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을 정도다.

이윽고 연회장의 문 앞에 도착해서 나는 심호흡을 잠깐 했다. 이 앞에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와 수도 없이 많은 귀족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늘, 나는 데뷔탕트를 치른다. 떨리지는 않았다. 왜일까?

지난번의 생에서 나는 데뷔탕트는 물론이고, 연회 혹은 무도회 때만 되면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었다. 뭐라도 마시거나 먹으려고 하면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스트레스와 긴장이 어마어마했었다. 맞췄던 드레스가 스트레스 때문에 당일이 되자 헐렁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때에는 그렇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인정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전생의 황후와 황제에게 누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보 같지.’

실은 내 데뷔탕트 따위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달랐다. 나는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이번 생의 가족들은 ‘네가 법이고 사교계의 예절이다’라며 나에게 긴장 따위 전혀 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만에 하나 실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기죽지 말라고 했던가? 아예 그걸 새로운 예절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여간 과보호지만, 그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미소를 띤 채로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시종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별, 아이샤 드 엘미르 님과 빛의 신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눈부신 연회장 안으로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연회장은 은색과 푸른색, 숲의 청록색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샹들리에는 반짝이고 있었고, 비단으로 깔린 바닥은 매끄러웠다.

내가 입은 흰 드레스와 푸른 다이아몬드와도 무척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내가 이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신관을 소개하는 것도,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도 나였으니까.

사실 말하자면, 데뷔탕트는 큰 의식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데뷔탕트는 자신이 사교계에 나올 나이가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에 불과하니까. 첫 춤을 추고, 축복을 받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다른 귀족들에게 선보이는 게 끝이다.

하지만 짧아도 전통 있는 의식인 데다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인 만큼 귀족 영애들에게는 무척이나 큰 의미가 되었다.

내가 입장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시에 멎었다. 간간이 ‘헉’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마 그것은 내 뒤의 룬 님을 보고 내지른 탄성이 아니었을까? 그분의 미모는 인간을 초월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중앙으로 다가가자, 손을 맞잡고 계시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옆의 상석에서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에게 풀어진 얼굴로 웃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엘미르의 별. 아이샤 드 엘미르가 제국의 태양과 달, 그리고 작은 태양에게 인사 올립니다.”

“그래, 앞으로 오거라.”

아버지의 묵직한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일반 귀족들에게 허락된 거리를 넘어서, 같은 황족에게만 허락된 거리로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다가갔다. 속삭임이 들릴 가까운 거리에서 아버지가 속삭였다.

“긴장되니?”

나는 미소했다.

“아니요.”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오늘 데뷔탕트를 여는 네 앞날을 축복하마. 앞으로도 건강하길 빌겠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내가 가볍게 인사하며 뒤로 물러서자, 아버지는 연회장을 향해 외쳤다.

“나 티리온 드 엘미르는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도 없이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오늘은 무척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다. 우리 제국의 전통적인 기념일인 하지를 축하하는 날인 동시에, 짐의 여식인 황녀의 데뷔탕트 날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선언한다. 이 기쁜 날을 맞아 수도의 백성들에게 금화을 나누어 주고, 오늘 연회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신관들의 축복을 선사하겠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말을 미리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라고 있는 걸 보자, 어머니는 살짝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신전에서 일부러 신관들을 초대한 것도, 나의 데뷔탕트를 축하함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물론 신전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이윽고 아버지가 연설의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하지 연회의 시작을 알린다!”

“와아아아!!”

그 말과 함께 곳곳에서 샴페인이 터졌다.

펑!

그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황금색의 샴페인 줄기가 높이 튀어 올랐다. 풍요로운 광경이었다. 나는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 아이샤.”

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나와 룬 님을 이끌었다.

“데뷔탕트를 기념해서, 룬 신관의 축복을 받도록 하자.”

“……!!”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룬 님께 축복을 받는 이 영광스러운 순간이 말이다. 나는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리 약속된 절차였기 때문에, 룬 님은 순순히 내 앞에 다가왔다.

“…….”

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룬 님은 나에게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룬 님의 손에는 따뜻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룬 님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빛의 힘이겠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야.’

나는 어딘가 멍한 기분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룬 님, 아니, 루미나스 님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현실을 되찾아 주려는 것처럼, 룬 님은 살짝 손을 내 이마 위로 올렸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빛의 힘은 따뜻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룬 님이 입을 열었다.

“아이샤 드 엘미르, 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별.”

“…….”

“그대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마음 깊이 빌겠습니다.”

짧은 축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렇게 말한 룬 님은 내 이마에 작은 성호를 그려 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이마로부터 내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내 얼굴은 빨개졌을지도 모른다.

‘꿈만 같아.’

내가 그렇게 계속 멍하니 있자,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이로써 의식은 끝이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룬 님께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별것 아닙니다.”

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인지 그는 나에게 존대를 쓰고 있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던 것이 그에게 아직도 유효한 듯했다.

“이제 다음은…….”

어머니가 말했다.

“첫 춤의 차례구나.”

아, 나는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축복 다음에 이어지는 첫 춤. 사교계에 데뷔하면서 추는 첫 춤인 만큼 아무래도 큰 의미가 있는 춤이었다.

‘어머니는 데뷔탕트 때 아버지와 추셨다고 했지.’

파트너가 없는 나는 아마도 오라버니와 추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쪽이 아쉬웠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룬 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룬 님께, 첫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은 무척이나 실례겠지.’

어쨌든 그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첫 춤이 특별하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오라버니께 첫 춤을 부탁하자.’

오라버니는 항상 기꺼이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둘의 호흡은 아주 척척 맞아서, 춤을 출 때면 항상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곤 했다.

‘모두 앞에서 멋진 춤을 선보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아쉬움을 버리려던 찰나였다. 나와 룬 님을 번갈아 바라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나섰다.

“그런데 말이다. 아이샤. 그리고 룬 신관님.”

“네?”

나는 어리둥절해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머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 춤은 파트너와 추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아, 물론이죠.”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는 오늘 파트너가 없는걸요. 연회를 주관하기 때문에 일부러 파트너를 찾지 않은 걸 어마마마도 아시잖아요.”

어머니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

“파트너가 없는 대신 같이 연회의 주관을 맡은 룬 신관님과 첫 춤을 추는 건 어떨까?”

“……네?”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네?”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경악하고 있는 오라버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어머니는 가볍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오라버니와 함께 춤을 추는 건 어쩐지 쓸쓸하잖니. 어머니로서 네가 파트너가 없는 것이 미안했던 참이었단다. 룬 신관님께서 부디 제안을 받아 주신다면,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게 어떨까?”

나는 어머니의 제안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말에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

생각보다도 강한 반발이었다.

“항상 아이샤와 춤을 추는 건 제 역할이었다고요. 게다가 데뷔탕트의 첫 춤이라면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이시스.”

그런 오라버니를 향해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얼굴에서 단호함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고 하면 착각일까?

“첫 춤인 만큼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게 의미가 있지 않겠니? 아이샤도 데뷔탕트를 치렀고, 언제까지나 가족들과 춤을 출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자꾸나.”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단호함에 깨갱, 하고 말았다. 나는 룬 님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키가 훌쩍 큰 그이기 때문에 그와 나의 눈높이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룬 님과 춤을?

‘아니, 가능할 리가 없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룬 님과 춤이라니, 가능하고 자시고 간에 떨려서 내가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룬 님의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룬 님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어머!”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시다면, 부디.”

룬 님은 거리낌 없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흰 손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럽고 고운 손이기도 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괜, 찮을까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행복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 같았다. 나와 룬 님이 연회장의 중간, 춤을 추는 곳으로 향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신관복을 입은 룬 님과 드레스를 입은 나의 조합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악단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조용한 댄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

다행히도 그 곡은 내가 아주 잘 아는 곡이었다. 우리 제국의 전통적인 음악이기도 했기에 굉장히 많이 연습하고 추어 본 곡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할 일은 없는 듯싶었다.

그런데 문득 나는 룬 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얼른 소곤거렸다.

“그런데 룬 님, 춤은 출 줄 아시나요?”

룬 님은 기묘한 표정이었다. 마치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들은 표정이었달까?

“정령들에게 있어서 춤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정령들도 연회를 무척 좋아하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루가 공중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 애의 치맛단에서 환한 빛가루가 떨어졌다. 이윽고 금방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열심히 춤을 배워서 다행이다.’

나는 데뷔탕트를 위해 혹시 몰라 다시 춤 연습을 했던 것을 마음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룬 님과 처음 추는 춤에서 결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와 룬 님의 춤이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선율에 맞추어 나는 한 발 내디뎠고, 그것은 룬 님도 마찬가지였다. 주위에서 자그마한 탄성 소리가 들렸다. 빙글, 한 번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손을 마주 잡는다.

턴을 할 때 오라버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둥에 기대선 오라버니는 어딘가 불퉁한 얼굴이었다. 룬 님께 첫 춤을 빼앗겨서 서운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 나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선율에 맞춰서 다시 한 번 돌았다. 룬 님과 시선이 마주치고, 떨어졌다. 그는 달빛처럼 아름다운 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선율 때문인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돌았다. 치맛자락이 핑그르르 원을 그리며 활짝 펴졌다. 그 모습이 마치 흰 꽃잎 같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몽롱했다. 아니, 내가 돌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너무나도 뛰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따뜻했다. 룬 님과 춤을 추고 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세게 돌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룬 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처럼 무뚝뚝한 그의 표정에서는 딱히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래, 나는 행복했다. 행복감에 가슴이 너무나 쿵쿵 뛸 정도로 말이다. 시간이 가지 않기를 이렇게 강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곡이라는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춤에도 마지막 스텝은 있기 때문에 결국 나와 룬 님의 춤은 끝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조급해졌지만,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나와 룬 님은 제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왜 눈물이 날 것 같았을까? 하지만 내가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위에서 엄청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세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얼른 웃어 보였다. 눈가가 조금 그렁해졌지만, 땀이라고 대충 속여 버리면 된다.

“다들 감사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몰려든 사람들 중 반쯤은 룬 님의 미모에 맛이 가 버린 듯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룬 님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는 일은 무척이나 피곤했다.

‘어휴.’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룬 님께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룬 님은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을 배우기 위해서인지 무뚝뚝한 와중에도 간간이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모습이 왠지 보기 싫었다고 하면, 나의 기분 탓일까? 잠깐 숨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나를 향해 달라붙는 사람들을 갈랐다.

“쉬고 싶어요.”

그 말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내 표정이 단호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복도에 나와서 기둥에 몸을 묻었다. 사람들과 떨어지니 조금 나았다. 조용히 숨을 내쉬고, 뱉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싶었다. 턴을 하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던 룬 님의 모습을. 그 황금색 눈빛을 기억하고 싶었다.

기억하고 기억해서, 이날의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정령왕님과 춤을 춘 것은 정령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나는 너무나 기쁘다. 너무나 행복하다.

“…….”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음 한구석이 조금 아팠던 것은. 그때였다. 저 복도 멀리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그곳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게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건 오라버니의 목소리인데?’

아까 연회장에 있었던 오라버니가 언제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라버니를 향해 다가가려고 했다. 만약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고, 그 내용을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리오텐 공국의 상황이 많이 어지러운 모양이군.”

그 말에 대답하는 어느 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규모 접전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래, 이덴베르 제국이 점점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침통한 이야기입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 뒤로도 그들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숨죽인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리오텐 공국이 우리 제국과 군사 협정을 맺은 것은 알고 있었다. 상황이 어지럽다는 것도. 그 협상의 대가로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다이아몬드 섬을 얻어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리오텐 공국이 어지러웠던 이유가 이덴베르의 군 확장 때문인지는 몰랐다.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덴베르의 정세에는 별 변화가 없다. 그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외부인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을 확장하고 있다면, 그 답은 누구라도 알 수가 있으리라.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덴베르의 황제는, 라키아스는, 대륙 정벌이라도 꿈꾸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리오텐 공국을 노리고 있다면 우리 엘미르 제국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리오텐 공국의 국경을 넘으면 바로 우리 제국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한참 충격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뚜벅뚜벅, 오라버니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떡하지?’

이야기를 모두 들어 버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때였다.

“아이샤.”

오라버니가 나를 가만히 부른 것은.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거기 있지? 숨소리를 듣고 알았어.”

“…….”

역시나 오라버니는 대단했다. 숨소리만으로 나를 추측하다니 말이다. 아마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그는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별수 없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 마주한 오라버니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오라버니.”

“……어딜 가던 참이었니?”

“잠깐 숨을 돌리려고 복도에 나와 있었어요.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데뷔탕트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 다 도와주셔서 저는 할 것도 딱히 없었는걸요.”

“그렇지 않아. 어머니께 네가 데뷔탕트의 준비는 물론, 연회 준비까지 많이 도왔다고 들었단다.”

“……황녀로서 당연한 일인걸요.”

“수고가 많았다.”

오라버니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사교계에 나서는 것, 피곤하지 않니? 네가 많이 지쳤을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이렇게 큰 무대는 처음이잖니.”

“괜찮아요.”

오라버니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계속해서 말을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화제는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평소라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만으로도 즐거웠을 우리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비로소 오라버니는 본론을 말했다.

“이야기, 모두 들었니?”

나는 오라버니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

내 대답에, 오라버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척이나 침통해 보였다.

“미안하다. 데뷔탕트 날에 안 좋은 소식을 듣게 해서.”

“…….”

나는 나의 흰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데뷔탕트 정말로 축하한다. 많이 자랐구나, 어릴 때는 그렇게 작았는데.”

“오라버니도 어린 시절은 있으셨을 거 아니에요.”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랬지.”

오라버니도 잠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가 기억나는구나.”

그때, 우리 둘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웠던 동산에서, 내가 나의 비밀을 말했던 그날. 꿈이라면 간절히 깨지 않기를 빌었던 날이었었다. 오라버니는 말을 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

“계속해서 너를 숨겨 놓고 싶구나.”

“…….”

“남부의 별장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서, 네가 환하게 웃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그게 세상의 전부일 것만 같은데.”

그의 말은 안타까웠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입을 열었다.

“리오텐의 현재 상황은 정확히 어떤가요?”

“……계속 이덴베르의 도발을 받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께서는 군사 협정에 따라 리오텐에 기사들을 파병하는 것을 생각하고 계셔.”

“…….”

“우리 제국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지. 어쨌든 이덴베르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하니까.”

“…….”

“근시일 내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오라버니의 씁쓸한 감정에 동화되어서, 내 기분마저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나는 속삭였다.

“오라버니가 출정하실 필요는 없는 거지요?”

이시스 오라버니는 말이 없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오라버니!”

나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하나뿐인 후계자이잖아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요?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한참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조급하게 그를 향해 애원했다.

“네? 제발, 약속해 주세요.”

얼마쯤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그 말에 나는 가슴속에 안도감이 확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약속을 지켜 줄 것이다. 오라버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상황이 그렇게 나빠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였던 라키아스는 선대 황제에게 황위를 물려받아 1년 전 황제로 등극했다. 그가 얼마만큼의 야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엘미르 제국에게 있어 위험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오라버니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네. 믿어요.”

오라버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의 얼굴은 매우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최고의 날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

“말했잖니. 네 데뷔탕트 날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 주겠다고.”

“……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게 했으니…….”

그제야 나는 오라버니가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 어깨를 잡고서, 내 데뷔탕트 날이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했었지.

“…….”

나는 문득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하는 오라버니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오늘은 제 최고의 날이에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나는 오라버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나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 상황을 몰랐더라면 결코 최고의 날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해 주신 오라버니께 감사해요.”

“……아이샤?”

오라버니는 의아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목표가 생겼어요.”

“……목표?”

“네, 새로운 목표.”

절박한 만큼, 마음속에서 그 목표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직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게 되는 날 당당하게 말씀드릴게요.”

“…….”

오라버니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약속드릴게요.”

“……그래?”

“오히려, 걱정해야 할 쪽은 저인걸요.”

나는 힐난하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일에서 저를 숨기기만 하시고. 아무것도 모르면 제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나는 내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이전에도 말했었죠. 저는 가족들을 지키고 싶다고.”

“…….”

“그러니까, 오늘은 제 최고의 날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

그제야 오라버니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너를 믿는다.”

그 속삭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복도로 이어진 황궁 정원을 바라보았다. 하지이지만 어느새 밤이 깊어져서 검푸른 하늘에는 노란 달이 떠 있었다.

“이만 들어갈래?”

“아니요. 저는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게요.”

“……그래.”

오라버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얼른 와야 한다.”

“……네, 금방 들어갈게요.”

내 말에 오라버니는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가 들어가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았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전생의 기억, 그리고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섞여서 아주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달은 환해서, 어두운 가슴속에 그나마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룬 님. 거기에 계시죠?”

“…….”

풀벌레 소리만 찌륵찌륵 울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정령의 기운이 무척이나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실체화를 푼 채로 복도에 서 있었다. 나와 오라버니의 대화도 모두 들었으리라.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룬 님.”

그는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연회장은 너무 번거롭더군. 사람도 많아.”

“…….”

그의 말에 나는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령들은 모두 연회를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아주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 행세를 하려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너는.”

“…….”

그의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무슨 이유라도 있나?”

그는 어떠한 이유로 나의 결심을 짐작한 듯했다. 그것은 어쩌면 정령왕으로서 정령사에게 갖는 예감일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예요.”

“…….”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요. 아주아주 오래전의…….”

나는 눈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 제 마음속에서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이제 그 일이 송곳처럼 저와 제 가족을 찔러 오고 있거든요.”

“…….”

“그렇기 때문에, 저는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덴베르 제국을 향한 나의 결심이었다. 룬 님은 흘러가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게 바로 네 마음에 어둠이 있는 이유인가?”

“……네.”

나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 일을 모두 해결하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만큼 저에게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이 말을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

나는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혹시 그가 나를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떡할까?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저!”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여, 열심히 노력할게요. 매일같이 공부도 하고, 정령술도 갈고 닦을게요.”

“…….”

“그, 그러니까……!”

나는 눈을 꼬옥 감고 외쳤다.

“언젠가는 루미나스 님을 꼭 소환하고 싶어요!”

말해 버렸다. 나는 내가 한 말에 스스로가 놀라 입을 헙, 다물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한낱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루의 말에 따르자면 이제껏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란 단 한 명도 없었고,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라는 걸 분명히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훨씬 노력하면.”

“…….”

룬 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듯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가능, 할까요?”

그가 아무 말도 없자 나는 자신감이 확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글쎄.”

룬 님의 어조는 늘 그렇듯이 무심했다. 나는 낙망하고 말았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을까?’

이덴베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새롭게 생긴 목표란 바로 루미나스 님을 소환하는 일이었다.

‘……역시 너무 건방진 말이었던 게 분명해.’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목표에 불과하다지만 감히 정령왕님의 앞에서 그런 선언을 한 자신이 부끄럽게만 느껴졌고, 눈물마저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내 머리 위로 손이 턱, 내려앉은 것은.

“……?”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손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그래.”

“……룬, 님.”

“열심히 해 보도록.”

그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이 세상을 비추어 온통 환한 지금, 이 세상에는 오직 나와 그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젠가는 꼭.’

그를 소환해 내고 마리라. 그래서 그의 옆에 당당히 서리라.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그건 그렇고.”

“……네, 네?”

“다른 사람들이 너를 찾고 있던데.”

룬 님은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앗.”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너무 오랫동안 복도에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나는 연회장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얼른 옷을 가다듬었다. 그런 나를 룬 님은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지 않으시나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룬 님은 검푸른 정원을 등지고 서 있었다. 달빛이 그를 비추자, 그는 마치 그 빛 사이로 투명하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나는 이곳에 있다 가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룬 님께서도 생각할 일이 있으실 거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나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연회장 안에 기쁜 손님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로즈! 클로에!”

그리고 심지어 그 곁에는…….

“화, 황녀 전하.”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슐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셋의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 보였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직 로즈와 애슐리는 화해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셋이서 마주쳤으니 어색할 수밖에.

나는 당황해서 어물어물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를 향해 클로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금색의 드레스를 입은 클로에는 무척이나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이샤, 오랜만이야. 데뷔탕트 축하해. 아까 춤도 무척 멋지던걸.”

“봤어? 고마워…….”

쑥스럽게 웃는데, 로즈와 애슐리는 아직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둘의 눈치를 살폈다.

“로즈, 연회에 와 줘서 고마워. 롤랑 영애도 오래간만에 뵈어서 기뻐요.”

내 인사에 둘은 그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아이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기뻐요.”

어색한 인사 뒤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발을 동동거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애슐리였다.

“……저어, 로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에 로즈는 눈을 깜빡거렸다. 망설이던 애슐리는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 지난번에…… 정령에 관련해서 무례한 말을 했던 것, 죄송해요.”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떨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했다. 그 말에 로즈의 눈은 커지고 말았다. 로즈 또한 애슐리에게서 먼저 사과를 받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리라. 애슐리는 말을 계속 이었다.

“이제 와서 사과해 봤자 늦었겠지만……. 그래도 정말 미안하다는 것만큼은 전하고 싶었어요.”

애슐리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로즈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약간 생각하는 것 같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렇게 사과를 하게 되신 이유는 뭔가요?”

“……황녀 전하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때의 제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다는 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슐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걸 특권처럼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그게 오히려 저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

“이제 정말 그런 짓은 안 해요. 무엇보다 더 이상 정령 소환에만 집착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흠.”

이야기를 다 들은 로즈는 잠깐동안 침묵에 빠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아이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아…….”

나에게로 질문이 와서 잠깐 당황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나에게도, 너에게도 사과하고 싶다고 했었어.”

“그랬구나.”

이내 로즈가 말을 이었다.

“그럼 그 사과 받아들일게요.”

“……!”

“아이샤에게도 사과했다고 하고, 아이샤가 용서했다면 나도 못 할 건 없으니까.”

그 말을 하면서 로즈는 씩 웃었다. 나는 얼굴에 웃음이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좋아, 그럼 다들 화해한 건가요?”

“네, 네…….”

“그럼, 나도 로즈와 같이 롤랑 영애의 친구가 될래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네?”

내 갑작스러운 선언에 애슐리는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번 애슐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녀와도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로즈와도 화해했다고 하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잘 지내봐요. 참, 롤랑 영애. 내가 말을 놓아도 될까요?”

“아, 부, 부디…….”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친구였던 과거가 있으니까 분명 다시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다 같이 뭐라도 좀 먹자. 저쪽에 황궁 파티셰가 심혈을 기울인 디저트들이 잔뜩 쌓여 있다고!”

내가 들떠서 외치자,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클로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찬성이야. 안 그래도 배가 좀 고팠거든.”

“난 시원한 걸 좀 마시고 싶다.”

“그, 그럴까요.”

우리 넷은 이내 연회장을 이리저리 탐방하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사람들의 눈을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디저트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색색의 과일 무스, 맛을 짐작할 수도 없이 화려한 케이크와 식사 대용으로도 먹을 수 있는 담백한 빵, 주스와 칵테일,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과일들과 크래커…….

다 말하려면 입이 아프다. 황실 주방장이 혼신의 힘을 다한 요리를 먹으며 우리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간간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받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 와중에 우리 넷은 다 같이 말을 놓기로 했고.

그러자 좀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 내가 새로운 디저트를 찾기 위해 잠깐 친구들의 곁을 벗어났을 때였다.

나는 눈에 익은 얼굴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비온 공자!”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그에 대조되는 청안. 고급스러운 감청색 정복을 입고 있는 그는 분명, 이시스 오라버니의 오래된 친구인 비온 공자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그를 본 게 매우 기뻐서 활짝 웃고 말았다.

“굉장히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고 계셨나요?”

올해로 열아홉인 그는 황궁의 근위대에 들어가 있었다. 마검사라는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받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황궁의 근위 부단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이시스 오라버니가 알려 주었다.

무척 고무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온 공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설마 내가 누구인지 그사이에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더 가까이 가려는 찰나,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그는 마치 잠깐 고장나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가 나에게 인사를 되돌렸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아, 이시스 오라버니가 간간이 소식을 들려주셨어요.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무척 기쁘네요.”

그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그러고 나서 비온 공자는 약간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는지. 이윽고 결심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아.”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비온 공자에게 칭찬을 들은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괜히 멋쩍어지고 말았다.

“그, 그런가요.”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했는데, 주변 사람들 눈에는 또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헤헤 웃었다.

“감사합니다. 비온 공자도 오늘 굉장히 멋있으셔요.”

무뚝뚝한 그답지 않게 그는 어쩐지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 년에 있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하지 연회이기 때문에, 그도 들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런데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나를 찾으러 온 것은 클로에였다.

“무슨 일이야?”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계를 가리켰다. 어느새 시간은 밤을 지나서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참.”

나는 깨달았다.

“등불 올리는 걸 봐야지!”

하지 연회에서 등불을 올리는 것은 전통적인 행사였다. 밤하늘을 발갛게 수놓는 등불을 올려, 늘 만물을 비추어 주는 빛의 신을 향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지금, 황궁의 공터에서는 등불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이끌고 얼른 테라스 쪽으로 갔다. 널찍한 테라스의 한쪽에는 오라버니와 아버지, 어머니도 와 계셨다.

‘역시 하지 연회에는 이걸 봐야 해.’

이때만큼은 황족이든, 수도의 일반인이든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소원을 빈다. 풍요를 빌고,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을 빌고, 마음속의 꿈을 빌고…….

공터에서 준비를 하던 시종들이 하나둘씩 등불을 띄워 보내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몽롱한 표정이 되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붉은 등의 고운 빛깔이 하늘에 가득했다.

“……예쁘다.”

그렇게 하염없이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이 테라스에 룬 님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신관들의 무리에 섞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나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 너머로 붉은 등불이 떠오르고 있었다. 해가 떨어진 하늘은 등불이 밝게 빛나는 만큼 어두웠다. 주위는 온통 조용하고, 다만 사람들의 감탄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문득 이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보였다. 코가 시큰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소원이.’

나는 중얼거렸다.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인 나와 너무나도 고귀한 당신.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세요.’

나의 소원이 흘러가는 하늘 위로 붉은빛이 수놓아졌다. 그것은 붉고, 아름답고, 무척 애달픈 빛깔이었다.

* * *

한참 동안 내가 못 박힌 듯 서서 소원을 빌고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이샤!”

“……응?”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로즈의 목소리에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즈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달까? 로즈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상에, 무슨 소원을 그렇게 열심히 빌었어?”

“응? 어, 나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즈는 나에게 뛰어들었다. 그러곤 나를 반짝이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나한테만 말해 주라! 평생 동안 비밀로 간직할 테니까!”

로즈가 나의 팔을 꼭 잡았다. 나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게…….”

“로즈에게 말해 줄 거라면, 나한테도 말해 줘.”

이번에는 클로에였다. 그녀가 다른 쪽의 팔을 잡았던 것이다.

“응? 말해 줘!”

둘이 나를 잡고 애원하길래, 나는 점점 더 곤란해지고 말았다.

“등불에 빈 소원은 비밀인걸! 다들 알잖아.”

“그런 게 어딨어. 우리 사이에는 비밀 없음이야!”

로즈가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그때, 이 다툼에 애슐리도 참전하고 말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 아이샤가 말해 주면 나도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려 줄게.”

“난 안 궁금해!”

나는 억울한 심정이 되어 외쳤다. 하지만 다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조잘조잘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들이랑 친구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이건 로즈의 소원이다.

“으음, 나는 가문의 일이 다 잘 풀리고, 번성하라고.”

이건 클로에의 소원.

애슐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그러다가 부끄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더 멋진 내가 되고 싶다고, 빌었어.”

나는 뒷걸음질쳤다. 다들 소원을 말하니까 나도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절대 말 못 해.’

말을 하느니 차라리 접싯물에 코를 박겠다. 그런 단호한 의지를 가지며 나는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친구들은 짓궂었다.

“얼른 말해 줘!”

“나, 나는 말하기가 조금…….”

그렇게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등 뒤에 무엇이 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테라스에 있던 테이블이었다. 아까 내가 여기에 주스를 올려놨었는데.

나는 친구들의 독촉에 목이 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명 내가 가져온 것이 이거였지.’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주스는 잔 끝까지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서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만큼 목이 탔던 것이다.

‘……응?’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어쩐지…… 맛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다.

‘설마 상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황궁에서 내놓는 주스가 설마 상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미 다 삼켜 버린 상태였고 말이다. 맛은 조금 시큼한 것 같기도 했고, 달달하면서도 묘하게 향이 깊었다.

왠지 다 마시고 나니 목구멍에서 불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라?’

이런 맛에 대한 묘사를, 어디선가 분명 본 것 같은데.

‘이거 설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기억은 처참하게 끊겨 버리고 말았다.

* * *

갑자기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아이샤 드 엘미르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이샤?”

“무슨 일이야?”

하지만 아이샤는 그 말에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뿐이다.

“……설마?”

클로에의 낯빛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황궁이 뒤집혔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 이시스와 황녀 아이샤의 독살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둘 다 죽을 뻔했지만 겨우겨우 목숨을 건졌었다.

“아, 아이샤!”

클로에는 새하얀 얼굴로 아이샤의 어깨를 잡았다. 클로에의 태도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인지 애슐리와 로즈 또한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샤의 주변이 시끄러워지니, 바로 달려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이시스 드 엘미르, 아이샤의 오라버니였다.

“무슨 일이냐!”

그는 벼락같이 외치며 한달음에 아이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아이샤가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청소년기의 트라우마가 말이다.

지금 아이샤가 축 늘어진 모습을 보자, 그 트라우마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서, 설마.’

또 그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겠지. 이시스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독을……!!’

아이샤는 다행히 그때처럼 피를 흘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경을 서서히 마비시켜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도 있으니까.

한달음에 아이샤의 곁에 달려온 이시스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날이라면 암살자가 들어오기에도 쉬웠을 텐데…….

‘……내가 안일했어.’

이시스의 눈이 푸른 열기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신관! 이리로!”

이시스는 거친 목소리로 신관을 불렀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신관들이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느려 빠지기는!’

그 반응에 이시스가 머리끝까지 돌아 버리기 직전. 갑자기 아이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아이샤의 얼굴은 독을 마셨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딘가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기는 했다.

“……아이샤?”

열병을 일으키는 종류인가? 이시스가 아이샤를 다급하게 살폈다. 이상한 것은 하나가 더 있었다. 고개를 든 얼굴에서,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아이샤. 어디 아프니?”

이시스가 거의 울 듯이 묻자, 그제야 아이샤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황당해지고 말았다.

“어어어어어어어…….”

“……?”

“……?!”

말끝이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이시스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아이샤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아이샤?”

“오오라버니이……?”

이시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샤가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오라버니의 양 뺨에 손을 착 대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잘생긴 오오라버니아니에요오오오.”

“…….”

“…….”

주변은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풀려서 맛이 간 눈, 꼬부라진 저 목소리와 붉어진 얼굴까지.

“……세상에.”

옆에 있던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술을 마시고 취했나 보군요.”

“술이네요.”

“술인가 봐.”

그러자 아이샤가 갑자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아냐! 나 안 취해써!! 안 취했다고!!”

“…….”

“…….”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박하기 그지없었다. 취한 사람이 자기가 취했다고 말하는 것 보았는가? 아무리 봐도 단단히 취한 아이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클로에는 아까 아이샤가 마셨던 주스 잔을 면밀하게 바라보았다. 포도 주스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 포도주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스라고 착각하고 술을 잘못 가져온 모양이에요. 단숨에 취하다니, 하필이면 독한 걸 마셨나 봅니다.”

“아니면 아이샤가 주량이 약한 걸 수도.”

“……후우.”

이시스는 이게 안도의 한숨인지, 곤란함의 한숨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데뷔탕트 날에 술을 주스로 착각해서 취해 버리다니.

“…….”

그나마 독이 아니어서 무척 다행이긴 한데…….

“무슨 일이 있니?”

“아이샤, 이시스.”

방금의 소란 때문에 황후와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시스는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아이샤가 황후와 황제의 품에 폭 안겨 버린 것은.

“아버지, 어머니!”

당연한 결과로, 둘 다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샤?”

“무슨 일 있었니, 아이샤?”

하지만 은근히 두 사람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아이샤가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애교를 부린 것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딱히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도 요즘 아이샤가 사춘기(?)가 온 탓에 애교를 부리는 것을 본 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말이다.

“헤헤헤.”

아이샤는 다 풀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두 분 다 너무 사랑해여! 최고!”

그러면서 두 사람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데, 누구라도 꼭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황제와 황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그래, 우리 딸.”

“사랑한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동생 사랑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 이시스 드 엘미르였다.

“저도 끼워 주세요!”

그는 간절한 얼굴로 아이샤와 황제, 황후의 앞에 섰다. 하지만 아이샤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아이샤, 오라버니도 최고라고 말해 주렴!”

“시른데.”

하지만 아이샤는 이시스를 놀릴 뿐이었다. 아이리스가 웃음 지었다.

“호호, 역시 엄마랑 아빠가 최고지? 아이샤.”

“치사하세요!”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이샤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급변한 그 분위기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말이에여.”

아이샤는 검지를 치켜들고 설교하듯이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너므 무모한걸…… 알겠어여? 어쩌구저쩌구…….”

그 뒤는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 취한 사람의 말이 얼마나 또렷하고 논리적이겠냐만 말이다. 이시스가 당황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물었다.

“아이샤에게 무슨 원망이라도 샀느냐?”

“그, 글쎄요?”

이시스는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아까 복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이샤.’

아이샤는 생각보다도 그 이야기에 마음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흔히 술을 마시고 하는 이야기가 본심이라고들 얘기하지 않던가. 이시스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아이샤가 이시스를 향해 얼굴을 들이대었다.

“알게써요?”

“으, 응?”

아이샤의 푸른 눈동자는 그야말로 창공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약간 풀리긴 했지만, 이 제국의 단 하나뿐인 별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눈빛이었다.

“앞으로는, 저한테 숨기는 거 없기에여…….”

이시스는 곤란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그래, 라고 대답하면 아이샤에게 위험한 것들을 계속 알려 줘야 하는 처지가 되고. 아니, 라고 대답한다면 아이샤를 실망시키는 것이 된다.

어느 쪽으로도 이시스에게는 힘든 선택이었다. 물론 거짓말을 해서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아이샤는 지금 취한 상태였으니까, 나중에 기억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시스는 결코, 아이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 어떠한 상황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이시스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이샤,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

“네에?”

아이샤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조르듯이 말했다.

“약속해여, 약속!”

그렇게 말하며 아이샤가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

이시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조르고 있는 아이샤. 얼른 자신과 약속을 해 달라고 든 새끼손가락, 그리고 반짝반짝한 눈빛까지.

“……약, 속.”

이시스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아이샤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말았다. 결국 동생 바보는 동생을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앗!”

이시스는 그러고 나서 스스로가 한 짓에 놀라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샤는 꺄르르 웃을 뿐이었다.

“약속! 약속해써여!”

“……큭.”

져버렸다. 이시스의 눈에는 온통 낭패감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린 걸 어떻게 하겠는가. 이시스는 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로서 약속과 맹세를 소중히 하라고 어릴 적부터 줄곧 교육받아 왔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정중했고, 마치 예법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투를 그대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룬이었다. 아까 신관을 데려오라고 난리 쳤던 것 때문에 이제야 그가 온 듯했다. 이시스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고 말았다.

그는 룬이라는 이 신관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아이샤의 마차에 뻔뻔하게 올라타 있지 않나, 아이샤에게 말을 걸지 않나, 아이샤를 바라보지 않나, 아이샤의 곁에 서 있지 않나…….

감히 자신이 아까워서 아주 신중히 말을 걸고, 조심히 바라보는 아이샤에게 말이다! 이 정도면 팔불출도 병이었다.

하지만 이시스는 진지했다. 누가 보면―특히 그의 친우인 비온이 봤더라면― 매우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았겠지만, 이시스는 그만큼 자신의 동생을 아꼈던 것이다.

게다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이샤의 눈동자가 룬의 뒤를 조금씩 쫓기 시작했다는 것을.

‘절대 마음에 안 들어.’

딱 봐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 그런 데에 비해서 아직 아이샤는 열네 살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니,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해도 아이샤가 상처받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됐다. 상관할 필요 없네.”

그렇게 말하며 이시스는 슬쩍 아이샤를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시스에게는 안타깝게도, 아이샤는 이미 룬을 목격하고 말아 버린 뒤였다.

“아아아아아앗!”

그때, 아이샤가 갑자기 룬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아무리 그녀가 술에 취했다곤 해도, 아이샤가 이렇게 놀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이야?”

로즈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로즈는 흘금흘금 이 잘생긴 신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이샤에게는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아이샤에게서 흘러나온 대답이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잘생긴 사람이다.”

“…….”

“…….”

주위는 아까보다도 더 강하고, 차가운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황제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게 하는 게 좋겠군.”

황후는 이제야 아이샤가 음주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이 설명을 해 준 덕분이었다.

“술을 마셨다고, 맙소사. 아이샤.”

“실수로 마신 거니까요. 어쨌거나 지금은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샤를 황녀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데뷔탕트의 주인공인 그녀가 일찍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등불을 올리는 행사도 끝났고 연회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기 시러…….”

사람들은 어찌할지 모르고 난감해했다. 그런데 그때, 룬이 잠자코 다가왔다.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깨게 하는 마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력으로 뭔가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룬은 아무런 설명 없이, 밝게 빛나는 손으로 아이샤의 이마를 덮었다. 한 손에 덮이는 어린 이마는 이내 룬의 밝은 빛을 흡수했다. 다른 사람들은 신성력이라고 부르지만, 본질은 루미나스의 고유의 힘인 ‘빛의 힘’이었다.

그러자 아이샤의 숨소리가 갑작스레 규칙적으로 변했다.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자나?”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샤의 모습은 마치 천사와도 같았다. 룬이 덧붙였다.

“숙취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황후가 놀라서 말했다.

“어머, 신성력으로 숙취까지 없앨 수가 있나요?”

그 말에 룬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저는 가능합니다.”

“…….”

주위는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예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룬이라는 이 신관은 어지간히 자신의 신성력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정체를 안다면 당연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 그러시군요.”

“예.”

룬은 잠든 황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14살이 된 어린 황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백 년 동안 살아온 룬을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룬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처음으로 겪는 감정이 싹터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꿈을, 황녀 전하.”

아이샤는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헉.”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 눈가로 내려앉았다.

‘벌써 아침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테라스에서 등불을 보고 친구들과 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내가 알 수 없는 찜찜함에 한참 동안 이상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 전하. 저입니다.”

“아, 좋은 아침이야.”

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왜일까? 시녀장의 눈빛이 살짝 평소와는 다른 것은?

“……좋은 아침입니다.”

“내가 어제 데뷔탕트 때문에 너무 피곤했나 봐. 언제 어떻게 내 방까지 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나는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을 리도 없는데 기억이 끊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녀장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다. 그녀는 마치 ‘그럴 만도 하지요.’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큼, 황녀 전하. 그것보다.”

“응?”

“황태자님께서 황녀 전하을 뵙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아침을 같이 드시자며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저, 정말?!”

그 말에 나는 허둥지둥 일어서고 말았다. 오라버니가 와 계시다는데 계속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늘은 큰 연회의 이튿날이니까 아마 오라버니도 일정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식사를 함께하자고 온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침대에서 내려오던 찰나, 나는 이상한 부분을 하나 더 발견하고 말았다. 하여간 오늘 아침은 이상한 일들투성이다.

“응?”

놀랍도록 몸과 머리가 개운했던 것이다. 마치 치유 마법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시녀장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음…… 아니야.”

나는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세수를 하고, 빗으로 머리를 정리하고, 잠옷에서 실내용 옷으로 갈아입으니 오라버니를 맞을 준비가 끝났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안에 오라버니가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름 숲의 정경이 오늘도 푸르렀다. 방 안에 있는 정령들은 특히나 오늘 더 신난 듯했다. 아마 즐거운 연회의 이튿날이라서 그럴지 모른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어쩐 일로……?”

내가 그에게 묻자, 그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은 좀 괜찮으니?”

아하, 그는 데뷔탕트에서 무리를 한 내가 걱정돼서 일찍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더욱더 활기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네, 잠을 푹 잤는지 엄청나게 개운해요! 이상하죠? 어제 그렇게 춤을 추고 무척 바쁘게 돌아다녔는데도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라버니는 중얼거렸다.

“……그 신관, 돌팔이는 아닌 모양이군. 적어도 실력은 있는 놈이야.”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오라버니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내가 앉자, 오라버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게 말이다.”

내가 어째서 어제의 일을 기억 못 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들은 나의 얼굴은 하얘졌다, 붉어졌다, 다시 파래지기를 반복했다.

“……제가 술을 마시고…… 그런 짓을 했다고요?”

“……그래.”

맙, 소사…….

나는 당장이라도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단다. 다만 앞으로 주스는 잘 가려 마시는 거로 하자. 아니, 앞으로는 무조건 물만 마시렴.”

“……네.”

나는 거의 반쯤 울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는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 주었지만…… 데뷔탕트 날의 마지막이 음주로 끝나다니.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주정이나 부리고…….

내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한참 괴로워하고 있자, 오라버니가 당황해서 나를 위로했다.

“괜찮다니까. 아이샤.”

“…….”

나는 한숨만 크게 쉴 뿐이었다. 어쨌거나 더 수치스러워하려고 해도 기억이 다 끊겨 버려서 할 수가 없었다. 다들 이래서 술을 마시는 걸까?

‘하…….’

오라버니가 우중충한 나를 보며 내가 기분 좋아질 만한 일을 제안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하게,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가는 게 어떻겠니?”

“……네.”

우리 둘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를 걷던 오라버니가 문득,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네?”

설마 아직도 말할 게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새파래진 얼굴로 오라버니의 말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들었다.

“룬 신관이 너에게 신성력을 써 주었단다. 몸 상태가 괜찮다면 다행이구나.”

“…….”

그리고 나는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고개가 끼기긱 돌려졌다.

“……룬, 신관님 앞에서요?”

정령왕님 앞에서도 주정을 부렸단 말인가…….

‘……하하하.’

더 이상은 뇌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인생,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자 오라버니가 식당은 그쪽이 아니라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내 궁인데도 말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라버니는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해 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내 회색빛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오라버니가 말했다.

“아이샤.”

“……네?”

“사실 어제 너와 약속한 게 있단다.”

약속이라니? 오라버니의 초록색 눈은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이덴베르의 일도, 다른 일도 숨겨서 미안하단다. 그게 너에게 그렇게 걱정을 끼치게 할 줄 몰랐구나.”

오라버니의 얼굴은 약간 쓸쓸해 보였다.

“어제 너에게 앞으로 비밀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꼭 너와 상의하도록 하마. 네 의견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하니까.”

그런 약속을 했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나에게 비밀이 없다면 나도 좋았다.

“네, 오라버니.”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술에 취해 딱 하나라도 좋은 일을 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하지만 그건 그렇고, 다음부터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 괜히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내가 와 있는 곳은 황궁 정원의 깊은 곳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무척이나 좋다. 빛의 정령술을 연습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루와 리미에를 소환했다.

“루, 리미에.”

그러자 밝은 빛덩이와 함께 루와 리미에가 공중에서 튀어나왔다. 소환된 둘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주인님! 좋은 아침이에요!”

활짝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해 보이는 루, 그 애의 치맛자락에서는 금색 빛가루가 바스스 떨어졌다.

“오랜만에 뵈어요. 주인님.”

옷자락을 살짝 들어서 인사해 보이는 리미에. 작은 숙녀인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둘 다 좋은 아침이야.”

나는 마주 그들에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감정을 공유하는 내 정령들은 나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깊은 마음 안까지 읽은 듯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루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갸웃갸웃하는 얼굴은 꽉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리미에도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햇빛이 눈꺼풀 아래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둘 다 너무나 소중한 내 정령들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루. 리미에. 나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내 나이는 14살. 중급 정령을 7살에 소환한 것만으로도 천재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하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정령왕을 소환해 제국 최고의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일단 단기적인 목표는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거야.”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이야기했다. 다행인 것은, 내가 7년 동안 자라면서 충분히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머지않아 상급 정령은 충분히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뒷말을 삼켰다.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생긋 웃었다. 내 감정에 반응하듯 정령들도 살풋 웃었다.

“자, 그러니까 연습하자! 정령력을 더 늘릴 수 있도록.”

정령력을 늘리는 방법은 꽤 단순하고 쉬웠다. 일단 최대한 정령을 많이 소환해서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 첫 번째였다.

평소에도 항상 루를 소환하는 버릇을 들여 놓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힘들더라도 리미에와 함께 루를 소환해야겠다. 그렇게 하면 친화력이 훨씬 더 늘어나리라.

“그리고 한번 정령 마법을 연습해 볼까?”

지금까지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한 일들은 거의 모두 간단했다. 나를 날게 해 달라거나, 빛의 힘으로 치유를 해 달라는 것.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강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것이 남을 공격하기 위한 기술이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서…….”

빛을 가지고 화살을 날린다던가, 혹은 빛을 일시에 강하게 터뜨려서 눈을 잠시 멀게 한다거나.

나는 내가 생각한 것들을 루와 리미에에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루가 강렬한 빛을 뿜어 보이고, 리미에가 화살을 쏘아 보였다. 둘 다 꽤 효과적이었다. 특히, 리미에가 쏘아 보인 빛의 화살은 저 멀리 나무에 꽂혔다.

“잘했어, 둘 다!”

나는 생각보다도 능숙한 두 사람의 모습에 신이 나 외치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정령들과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나뭇가지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이곳은 황실 정원 안에서도 아주 깊은 곳이었다. 내 황녀궁과 가까었기 때문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길이 복잡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입니다. 황녀 전하.”

그 사람은 나를 위협할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자신의 몸을 드러냈다. 드러난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비온 공자?”

“또 뵙는군요.”

나무가 가득한 이 정원에서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 튀었다. 어떻게 보면 푸른 잎과 어우러져 마치 꽃잎 같기도 했다. 그만큼 곱고 아름다운 색이다.

낯선 이가 비온이란 걸 안 나는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황궁 근위대니까 이곳을 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마 지금은 교대로 있는 휴식시간인 모양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황궁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연회도 되돌아볼 겸.”

그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음주 사건 때문이었다.

“……제가 어제 혹시 무슨 실수를 하지는 않았던가요?”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자, 비온 공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시스 님께 조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나는 면밀하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닌 척해도 비온 공자는 은근히 거짓말에 능숙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음.’

그의 푸른 눈동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거짓말을 해서 동요하는 얼굴도 아닌 듯 보였고.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물게 그가 나를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보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나는 잠시 소외되었던 나의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정령들을 쓰다듬었다.

“정령술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실력을 더 늘리기 위해서요.”

“그렇습니까…….”

그는 무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시스 님도 걱정하실 테고…….”

“…….”

“황녀 전하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너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감사해요.”

그래도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최선은 다해 보고 싶어요.”

비온 공자는 오라버니와 다르게 늘 무뚝뚝한 편이라, 말을 하기 어색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그가 나를 신경 쓰는 걸 알게 되자, 기분은 꽤 좋았다.

오라버니의 친구인 만큼, 나도 그와 사이가 좋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온 공자도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응원할게요. 비온 공자의 곁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내 말에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얼마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황녀 전하의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방해가 아닌걸요. 하지만 바쁘실 테니 구태여 잡지는 않겠답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떠나기 전, 비온 공자에게 한마디를 했다.

“앞으로도 시간이 나신다면, 종종 또 찾아와 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비온 공자는 물러갔다. 즐거운 만남이었기에 나는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계속해서 정령술 훈련에 매진했다.

장소는 거의 황궁 정원의 깊은 곳, 혹은 내 황녀궁의 뒤에 있는 동산이 되었다. 선생도 없고, 다른 동료도 없기 때문에 훈련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내가 짊어져야 할 몫.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령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힘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아무리 힘들어도 더욱더 힘을 낼 수 있었고 말이다.

내가 정령술 수업에 매진하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고맙게도 나의 일정을 많이 비워 주셨다. 소문이 어디에서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시녀장이나 유모는 물론, 다른 시녀들까지도.

“황녀 전하! 꼭 상급 정령을 소환하실 수 있도록 기원할게요!”

그렇게 기합이 들어가서 외치는데, 나도 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게다가 어머니, 아버지도 부러 나를 찾아와 힘을 내라며 따뜻하게 격려하고 가시곤 했다.

“휴.”

정령들과 훈련을 하다가 힘에 부칠 때면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했다. 다만…….

역시 그래도 하루쯤은 휴식이 필요한 법이다. 어느 날, 유독 몸이 축축 처지고 왠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방 안에 리미에와 루를 불러두고 쉬고 있을 무렵. 그에 맞춰서 룬 님이 방문한 것은 정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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