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7살, 15살 (4/21)

Chapter 3. 7살, 15살

오후의 햇살이 무척 따뜻했다. 나는 황녀궁 뒤편에 자리한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와 책을 읽고 있었다.

밥을 배부르게 먹은 데다가, 어려운 책에 한참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음…….’

꾸벅, 꾸벅. 그러는 와중에 한가롭게 백일몽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다가 나는 퍼뜩 잠에서 깨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 저 아래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나는 햇살을 가리기 위해 손차양을 하고, 날 부르는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정체는 자세히 훑어볼 필요도 없었다.

반짝이는 금색 머리카락은 마치 태양처럼 눈부셨다. 야트막하긴 해도 동산인데, 그는 그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단숨에 내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아이샤, 나 왔어!”

이시스는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이시스 오라버니.”

그를 향해 나도 마주 웃어 주며 인사했다. 계절은 계속해서 순환했고, 나는 태어나 벌써 일곱 번째로 봄을 맞았다.

눈앞에 있는 이시스의 생김새도 꽤 많이 달라졌다. 키가 훌쩍 큰 것은 물론, 더욱 멋있어지고 이목구비는 훨씬 뚜렷해졌다.

아마 머지않아 변성기도 오게 되겠지. 그리고 그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중 역시 가장 큰 변화는 육체적 변화였다. 간신히 다섯, 여섯 걸음을 걷던 것에서 나는 이제 자유롭게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줄줄 새던 발음도 또렷하게 바뀌었다. 이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거의 모두 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키도 한참이나 더 컸고, 머리도 성장했던 덕분에 좀 더 고차원적인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생아일 적에는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지려고 하면 너무 졸려서 잠에 들곤 했었다.

그것에 비하면 정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는 이 변화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7년을 견뎠지?’ 싶을 정도로 아기의 몸은 너무나도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주변인들의 반응이 변했다. 첫 번째 생일 연회 이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사람들에게 옹알이도 하지 않고, 낯을 무척 가리는 어려운 아기였다. 하지만 마음을 서서히 열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눈을 꼭 마주치고 미소 짓는 내 모습에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감정 표현이 적다는 이유로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의 의견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대신 나를 더욱 예뻐해 주기 시작했다. 이번 생의 첫 목표였던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대신 얻게 된, 더욱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바로 새 가족이었다.

봄볕 햇살보다 더 따스하고, 밝고, 환한 나의 가족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시스는 내가 웃자 마냥 좋다는 듯 같이 활짝 웃었다. 그러곤 익숙하다는 듯이 내 옆에 앉았다.

“뭘 읽고 있었어?”

그에 나는 내가 읽던 책의 표지를 보여 주었다. 딱딱한 양장본에는 엘미르 제국어와 고대어가 동시 표기되어 있었다.

‘고대어의 형성 역사와 그 추상적 발달 원리에 대하여.’

“…….”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런 거 좋아해?”

“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아이샤는 똑똑하기도 하지.”

그의 말은 숫제 푸념에 가까웠다.

“보통 일곱 살들이 이런 책을 읽나?”

나는 그저 가만히 미소 지어 주었다. 사실 고대어를 공부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아무리 이시스에게라고 해도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과거를 회상했다. 감정 표현이 적다는 것은, 발달이 더딘 아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함께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마음을 열기로 한 나는 동시에 내 능력을 한껏 펼쳐 보이기로 결심했다. 마음가짐이 바뀌면 행동도 바뀐다.

나에게 찾아온 환생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귀중한 기회일지 모른다. 새로운 인생을 더, 열심히, 잘 살아 보고 싶다.

게다가 내 옆에는 내 행복만을 바라는 새 가족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결심 덕분에 나는 3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 채글 일거 보고 시퍼요.’

사실 그때부터도 이미 나의 어휘력은 완성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내가 3살부터 글자를 배우고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글자를 배우는 척이었지만) 책을 줄줄 읽어 나가기 시작하자 나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똑똑하다’로 그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때 이시스가 나를 향해 보이던 반응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 글자를 배우고 엄마, 아빠, 개, 집, 이시스…… 뭐 이런 수준의 단어를 쓰고 놀고 있었다.

아직 소근육이 많이 발달하지 않아서 글자는 자연스럽게 삐뚤빼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걸 보고 이시스는 엄청나게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던 것이다.

‘우리 아이샤는 천재구나!!!’

그의 눈동자가 어찌나 빛나고 있던지,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천재 행적기’는 말이다. 글자를 뗀 나는 동화책을 읽었고, 일곱 살이 된 지금은 동화책을 넘어 더욱 어려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너무 발달이 빠른 나를 약간 걱정하시는 한편, 그런 나를 무척이나 뿌듯해하셨다. 나도 내가 너무 천재라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함은 안다. 황녀인 내가 정치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꿈을 물을 때나,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을 때면 ‘학자의 탑에 들어가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라고 말해오고 있었다.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앞으로도 조용히 살려고 노력한다면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휴우.’

나는 속으로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내가 조금 과하게 들떴던 면이 있던 건 인정한다.

하지만 상상해 보라, 항상 침대에 누워서 심심해하기만 했는데 처음으로 재미난 것을 찾은 기분을.

그게 어린아이들이 읽을 법한 북부의 설화에 대한 동화책이든, 이미 아는 엘미르 글자를 여러 번 겹쳐 쓰는 것이든 간에 뒤집기 연습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짜릿하지 않겠는가?

매일같이 심심해하던 나날들에 비하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에 가까웠다. 게다가 지식을 얻음으로써 이 제국, 더 나아가서 대륙에 대한 정세와 소식, 그리고 나에 대한 탐구를 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제일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정령’들에 대한 것이었다.

항상 내 눈앞에서 뛰노는 정령들을 보고 있으면 당연하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마음을 열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었을 때 정령들은 나의 유일한 위로이자 친구였으니까.

아마 정령들이 나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나를 보듬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시 태어난 이후로도 줄곧 이 세상에 정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정령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오랫동안 황궁 도서관을 들락날락하곤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령사의 맥은 끊긴 지 오래여서, 제국에서 가장 책이 많이 모여져 있는 황궁 도서관이라고 해도 정령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고뇌하던 내가 영감을 얻은 곳은, 바로 고대어로 된 서가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고대어를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대어로 된 서가는 찾아보지 못했다.

고대에는 정령사들이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했다고 한다. 만약 고대어를 배운다면 서가에서 정령에 대한 책을 찾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매일 고대어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

황녀궁 뒤쪽 동산에 올라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고대어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리고 검술 수업을 마치고 나를 찾아온 이시스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

이 시간들이야말로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시녀와 호위 기사가 붙어 있긴 해도 책을 읽고, 이시스와 대화하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복잡한 고대어는 글자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시스는 항상 햇살처럼 밝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나에게 다가와 준다.

나는 이 생활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이시스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이샤, 이런 딱딱한 책 말고 동화책 읽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가 읽어 줄 수 있는데.”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은 옛날 옛적에 다 읽은걸요.”

그러자 그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이건 내가 그저 짐작한 거지만, 그는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싶어 하는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림 그리는 건? 내가 귀여운 토끼도 그려 줄 수 있어.”

“토끼는 제가 더 잘 그릴걸요?”

사실 이시스는 그림을 잘 못 그린다. 계속된 나의 거절에 이시스는 풀이 죽은 듯했다.

나는 몰래 속으로 조금 웃었다. 나쁜 취미지만, 그를 놀리는 것은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시무룩해졌던 이시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저 멀리, 푸른 황궁의 숲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꽤 거센 바람이었다. 스치는 바람에 내 옷자락이 크게 펄럭일 정도로.

이시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이샤는 나보다도 더 어른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속이 순간 철렁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참 동안의 망설임이 속 안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역시, 지금 말하는 것은 너무 일렀다. 입을 벙긋거리던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다.

단 한 줌의 거짓이라곤 없는 듯했다.

“……기분 탓일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그는 씨익 웃었다.

“이게 다 아이샤가 너무 천재라서 그래.”

나는 애써 웃으며 받아쳤다.

“오라버니도, 천재이신걸요.”

그가 나를 천재다, 천재다, 라고 띄워 주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도 진정한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기사의 제국인 엘미르 제국에서도 그의 창검술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나와 한 기사의 맹세를 지키기 위함일까,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거듭했다. 이미 성인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실력이 된 그에게 거칠 것은 없는 듯했다.

내가 그의 앞에서 천재 행세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나는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서 정령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가 곧은 성품의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일까.

정령들은 유난히 그를 좋아했다.

“…….”

맑은 존재인 둘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금 쓸쓸해지고 말았다.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령을 배우려고 한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이덴베르를 향한 복수, 그것을 위하여.

* * *

엘미르 제국에서도 이덴베르 제국의 소식은 빠르게 들어오는 편이었다.

서적이면 서적, 신문이면 신문.

내가 딱히 황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딜 가도 이덴베르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 두 제국이 오랫동안 앙숙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몇백 년을 싸우다가 화친을 시작한 것이 몇십 년 사이다. 아직도 서로에 대한 악감정과 관심은 여전하겠지.

나는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저 아래로 보이는 나의 황녀궁은 오후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복잡한 상념들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나에게 누명을 씌웠던 마리안느는 지금도 여전히 성녀 취급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내 사형을 주장했던 1황자 라키아스는, 올해 황태자 책봉식이 열릴 예정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소식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듯싶었다.

‘……하하.’

나는 메마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가 없어도, 내가 죽어도 다들 아주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어째서 내가 죽었는데도 세상은 이렇게 멀쩡한가. 물론 나의 곁에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새 가족이 있다.

하지만 알리사로서의 비참했던 과거에 저절로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분노에 내 근처로 정령들이 왔다.

―괜찮아?

―기운 내.

개중에 몇몇은 나를 토닥이며 응원해 주었다. 특히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보았던 빛의 하급 정령 ‘루’는 나를 어떻게든 웃게 해 주기 위해서인지 나를 향해 빛가루를 날려 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해.’

나는 정령들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순수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아이들을 다룬다고, 어떻게 복수를 이루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외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지금은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마법사의 제국으로 유명한 이덴베르 제국의 황녀로 살 때에도, 정령사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복수를 할 때, 내가 정령사인 것은 비장의 패가 되어 줄 것이다. 만약 내가 잘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했던 대로 계속해 나가야지.

고대어를 공부하고, 정령에 대해 탐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눈을 잃기 전, 사형장에서 보았던 마리안느의 붉은 눈…….

그것은 무척이나 음산하고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마리안느의 눈이 금색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었다.

시녀 출생이었던 그녀가 당당히 황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증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마 마리안느가 남자였더라면, 그 황금 눈만으로도 후계자로서의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그녀가 성녀 취급을 받게 된 것도 그 천사 같은 외모와 황금 눈, 낮은 자들에게 베푸는 선행 덕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은 틀림없는 붉은빛이었다.

루비 같은 보석의 붉은 투명함이 아니라, 어딘가 질척한 느낌을 주는 검붉은 색.

‘……하아.’

나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시스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아이샤, 무슨 일 있어?”

나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것은 대답할 수가 없는 주제였다. 아무리 이시스에게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하는 동시에,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복수를 하려면, 나 홀로 할 수밖에 없겠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이시스 오라버니…….

물론 나는 가족들을 설득해서 이덴베르 황족들과 대적하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전생에 관련된 문제였다. 평화 협정을 맺고 있는 지금,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가족들을 설득하는 것은 너무나 큰 폐가 될 것 같았다.

결코 그들에게 부담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 이시스는 구태여 더 캐묻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시스는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옆에 온종일 붙어 있었던 덕분일까. 그는 가끔 나보다도 나를 더 잘 파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마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이샤.”

“네, 오라버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그가 내 머리에 손을 탁 얹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자 그가 나에게 웃어 보였다.

“어떤 일이든 좋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녹음보다도 더 푸르른 초록색이었다. 바람이 한차례 또 불어왔다.

웃자란 풀들이 내 발목을 살랑이며 간지럽혔다. 봄의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의지해 주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싱긋 웃었다.

‘…….’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이시스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이시스와 헤어져 돌아오며 나는 복수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작다. 일곱 살의 손이란 이렇게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황녀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내게 어떤 능력이 있겠는가. 나는 손을 꾹 쥐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정령술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에게 남은 유일한 패이니까.

언덕을 모두 내려와 황녀궁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 황녀궁에서 시녀들이 꽤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전담 시녀나, 호위 기사에게 물어도 그들은 짐작 가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오후 시간에 동산에 올라가서 책을 읽는 것은 이미 시녀장을 포함해서, 모든 황녀궁의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없어져서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누군가가 황녀궁을 방문하기라도 한 걸까? 내가 동산에서 내려오는 시간은 항상 비슷비슷하니까, 시간에 맞춰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나의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내가 황녀궁에 막 들어서자 시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전하! 이제 오셨군요.”

“무슨 일 있었어?”

“황후 폐하께서 방문하셨어요. 황녀 전하를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니가?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무런 말 없이 오실 분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방문도 반가웠던 나는 얼른 영접실에 달려갔다. 문을 열자,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나는 그대로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폭 안겼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은 향이 솔솔 풍겨 왔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 주셨다.

“왔구나, 아이샤.”

“어머니.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나는 아주 어른스럽게 안부 인사를 건네었다. 누가 들으면 굉장히 오랜만에 어머니를 본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실은 근 사흘 만에 본 것인데도.

하지만 나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매일매일 보던 어머니가 황후로서의 일 때문에 바빠지자, 나는 마치 어머니를 뺏긴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시녀들에게 네가 동산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네, 책을 읽는 건 항상 즐겁거든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자랑스럽다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요즘 황궁에 대소사 중 하나인 ‘봄의 제전’의 준비에 정신이 없으셨다.

엘미르 제국에는 계절마다 하나씩의 큰 행사가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봄의 제전, 여름의 하지, 가을의 수확제, 겨울의 신년회.

각각 그날의 앞뒤로 일주일 정도의 기간을 가지고,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각종 축제를 열곤 한다.

한 해의 가장 큰 행사들인 만큼 황궁에서도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준비한다. 황후이신 어머니가 그 준비에 바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봄의 제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요?”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웃고 있지만 숨기지 못한 피곤이 어머니에게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늘 똑같지. 사실 그게 문제란다. 항상 비슷하다 보니 사람들이 지루해한다는 게.”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봄의 제전을 여는 게 벌써 9년째였다.

“뭔가 새로운 행사를 열어보고는 싶지만,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어머니의 얼굴에 서린 근심을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럽게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내가 봄의 제전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보다, 아이샤.”

어머니는 본론을 얘기하려는 것처럼 말문을 열었다.

“요전번에 오셨던 알민 학자님을 기억하니?”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분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네.”

나는 얌전히 내 자리에 앉아서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알민 학자는 엘미르 제국 아카데미 수석 교수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오게 된 까닭은, 내 학습 능력을 재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던 것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어울려주는 셈 치고 대충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침 옆에서 시녀가 내 몫의 차를 따라 주었다. 기분 좋은 차의 향기에 나는 그 차를 무심코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게 말이다, 아이샤.”

하지만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차를 뱉어 낼 뻔했다. 어머니의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네 능력이 무척이나, 무척이나 훌륭했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더구나.”

어머니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네가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고 말하지 뭐니.”

나는 매우 당혹스러워지고 말았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어휘력이면 어휘력, 사고력이면 사고력. 수리력도 뛰어나고…… 어쩌면 그렇게 널 칭찬했는지 모른단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좀 더 멍청하게 대답했어야 하는 건데.’

속으로 후회했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내 7살 때가 어땠는지 가물가물하다 보니 나는 가끔 선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니, 부담스러운걸요.”

그 말에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샤.”

무언가 뜻을 담은 것 같은 그녀의 부름에 나는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네, 어머니.”

그녀가 중요한 말을 할 것이라는 감이 왔다. 그건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얻게 된 촉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너는 미래에 무얼 하고 싶니?”

“……네?”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묻는 거란다.”

어머니는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총명하다는 사실은 옛날 옛적부터 알고 있었단다. 어릴 적에도 너를 가르치러 온 귀부인이 감탄했던 걸 기억하니?”

나는 볼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새삼 알민 학자의 말을 들으니, 너에게 앞으로 무얼 해 줘야 할지 더욱더 고민이 되더구나.”

“…….”

“뭐라도 좋단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 무엇이든 밀어줄게.”

그녀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너는 어릴 적부터 학자가 되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었지. 새로운 공부를 해 보고 싶다면 학자분들을 모셔 오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면 넓은 세계를 보여 줄게.”

“저는…….”

나는 어물어물거렸다. 내 반응에 어머니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었다.

“내가 너무 조급하게 말한 것 같구나.”

어머니는 조금 쑥스러워 보였다.

“잘 생각해 보렴.”

내가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셨다.

“네가 무슨 길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널 응원할 거란다. 게다가…… 아직 너는 7살이잖니. 무한한 가능성이 있단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라.

“아니면…….”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혹시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네?”

“이번에 봄의 제전이 열리잖니.”

봄의 제전.

그것은 생명이 움트는 봄이 도래한 것에 빛의 신께 감사드리고, 기도를 올리는 행사다.

제전의 첫날부터 사람들은 신전에 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일주일 내내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이외에도 황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 즉, 황후가 대대로 주최하는 다도회 등이 있다.

“봄의 제전에서 다른 또래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면 하고 싶은 걸 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니?”

또래 아이들을 만난다니. 나는 꽤 놀라고 말았다.

나는 공식 석상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족들이 나를 너무 끼고돈 탓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이시스 오라버니 나름대로 자기가 나를 지켜 줄 거라며 주변을 엄청나게 경계했고, 어머니는 내가 낯을 가린다는 이유로 남들 앞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너무 소중해서 바깥에 내보냈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냐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놀이 친구 한 명 없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또래의 놀이 친구는 너무 정신 연령이 맞지 않아서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일곱 살이나 됐으니, 어머니는 슬슬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시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나라고 해서 다른 귀족 아이들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어머니의 제안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 볼게요.”

어머니는 활짝 웃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내 방에 혼자 들어왔다.

늘 깊은 생각을 할 때면 앉는 창가 앞의 책상.

미래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예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복수.’

나는 복수를 꿈꾸고, 이덴베르 제국의 생각을 하며, 전생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과거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뱅글뱅글 맴돌고 있는 것이다.

전생의 가족들을 용서하거나, 적어도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런 끝맺음을 짓지 못한 나는, 용서는커녕 잊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행복해지도록 매일같이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을 아예 외면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너무나도 어렵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봄의 제전 일은 그렇다고 치자.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때다.

* * *

이튿날, 나는 황궁 도서관에 방문했다. 아침 이슬이 채 가시기도 전인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그토록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나는 어제부로 초급 고대어를 다 떼었다.

어렵긴 했지만, 기본적인 어휘를 대강 배운데다가 형성 원리를 깨우친 덕에 그 문자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그 뜻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실전으로 들어갈 차례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황궁 정원을 지나쳐, 도서관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사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한 황궁 사서였는데, 내가 어려도 결코 내 수준을 만만히 보지 않고 항상 양질의 책을 추천해 주곤 했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사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황녀 전하, 오늘은 매우 일찍 찾아오셨군요! 새로운 책이 들어왔는데 추천해 드릴까요?”

원래라면 그와의 대화를 꽤 오랫동안 나눴을 것이다. 그가 얘기해 주는 책들은 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서두르고 싶었다. 어서 고대어 서가에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으응,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나는 한쪽 구석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러자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뒤에서 불러왔다.

“어어, 황녀 전하. 그쪽은 고대어 서가입니다만.”

그가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그, 저…….”

그가 무척 당황해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의문에 답하기보다 당당히 걸어서 고대어 서가로 가는 쪽을 택했다. 뒤에서 그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설마 어리신 황녀 전하께서 고대어를 깨우치셨다는 말씀은…….”

그 설마가 진짜다. 그리고 나는 이내 창고처럼 방을 터놓은 서가에 도착했다.

호위 기사와 시녀들에게 한쪽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후, 나는 책장을 훑어보았다.

고대어 서가에는 책장 하나를 빼곡히 메울 정도로 책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서가들에 비교하면, 이 서가가 무척이나 작기는 했다.

‘……제국의 모든 책이 모이는 곳인데도 이만큼밖에 자료가 없구나.’

어쩔 수 없지.

나는 이 정도에라도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 중에 단 한 권이라도 정령에 관련된 책이 있다면, 고대어를 열심히 습득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서가 안에서는 오래된 책의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그 책들의 제목 하나하나를 열심히 살펴보던 나는, 이내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읽을 수가 없어.’

역시 아직 나에게는 무리인 걸까? 제목을 훑어보고 있는데, 모르는 문자가 반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책등의 돋을새김된 글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환상…… 사전.’

‘……만드는 법.’

‘……공용 ……서적.’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뜻을 유추해 보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휴.’

나는 조금 축 처지고 말았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 중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샅샅이 책들을 뒤졌다. 그러자 그 정성이 하늘에 통한 것일까, 나는 드디어 유용해 보이는 책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령의 역사.

‘그래, 이거야!’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청나게 기뻐하자, 내 근처에 있는 정령들도 내 감정에 영향을 받은 건지 신나게 날아다녔다.

‘이 책을 공부하면, 조금이나마 정령에 대해서 알게 될 수 있겠지.’

그 책을 품에 안아 든 나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만약에 정령이 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아이샤, 아이샤.

몇몇의 정령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한 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거.

―봐 줘.

그들이 가리킨 쪽에는 아주 낡은 책 하나가 있었다.

‘봐 달라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낡을 뿐만이 아니라 무척 얇기도 했다.

이 고대어 서가에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오래 보존하기 위해 가죽으로 양장 처리를 해 두었는데, 그 책은 그저 일반 종이에 필사를 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물끄러미 정령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들은 나와 말을 주고받을 수는 있지만, 추상적이거나 아주 구체적인 대화는 나눌 수가 없었다.

그게 내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혹은 이 정령들이 아직 어려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면 서툰 어휘력으로 의지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나에게 필사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읽어 줘.

―읽어 줘야 해.

‘읽어 줘야 한다고?’

나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다가가서 책을 꺼내 들어보니, 역시나 이상한 책이었다.

책등에도, 표지에도 제목이 없었다. 오직 하나 있는 것은 표지에 그려진 이상한 마법진 하나뿐. 아마도 마법에 관련된 책인 듯했다.

하지만 정령들이 나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르는 거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도 함께 빌려 가기로 했다. 내가 그 책을 뽑아 들자, 정령들은 기쁜 듯이 자기네들의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잘한 것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았다.

‘그럼 이 책을 가지고 돌아가 볼까.’

호위 기사와 시녀들을 데리고 이제 막 서가를 나서려고 하는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왔다.

“아이샤!”

이 목소리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었다.

학자분들이 내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함인지, 그의 손에도 책들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그렇게 묻던 그는,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나는 아차, 하고 말았다. 낡고 마법진이 그려진 책은 내가 보기에도 뭔가 수상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책을 뒤로 숨기고 말았다.

“……아이샤?”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나는 변명하듯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어…….”

“…….”

“여전히 고대어에 흥미가 있어서요. 고대어 서가에서 읽을 만한 책이 없나 보고 있었어요.”

“……그래?”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것인지,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

“네?”

나는 움찔했다. 최근 들어서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숨기는 것이 많아졌기에, 양심이 찔렸던 것이다.

만약 뭘 숨기고 있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해야 할까?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가 꺼낸 말은 아예 다른 주제였다.

“알만 학자님이 왔다 가셨다고 들었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학자님께서 너를 천재라고 하셨다며?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역시 대단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리스 님께서 네 진로에 생각이 많으신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앞날에 무얼 할지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단다.”

“…….”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 무얼 하든 우리들이 지지해 줄 테니까.”

나는 이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그럼 나는 이만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네? 아, 네.”

그 담백한 인사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인사를 한 그는 정말로 먼저 떠나가 버렸다. 항상 나와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고 하던 태도와는 달랐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뒤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나는 책을 빌리고 궁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보통이라면 수상해서 물어볼 법도 한데, 이시스 오라버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주제를 넘겨 버렸다. 마치 내가 무얼 숨기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순간 가슴이 덜컹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령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나, 사실은 환생을 했다는 것을 이시스 오라버니가 짐작이라도 할 리 없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니까.

‘……그 언제가 되든 말할 수는 없겠지.’

나는 조금 쓸쓸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덴베르 제국의 제 4황녀였고, 환생해서 이곳의 황녀로 태어났다는 말을.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설령 내가 그런 말을 듣는 입장이라도, 너무 비현실적임에 코웃음을 치고 말리라.

고개를 저은 나는 서가에서 빌려 온 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쉬고 싶다는 이유로 시녀들과 호위 기사를 모두 물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서가에서 빌려온 두 종류의 책.

한가지는 ‘정령의 역사’였으며, 한가지는 제목조차 적히지 않은 이상한 마법진 책이었다.

나는 우선적으로 ‘정령의 역사’를 펼쳐 보기로 결심했다. 마법진 책은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테니, 집중력이 필요한 역사서부터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황녀이지만, 아직 어린 나에게는 딱히 주어진 일이 없었다. 예법을 배우거나 사회학, 산수, 문학 등 기본적인 과목을 배우긴 했지만 시간은 내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오늘 모든 시간을 빼 두었다.

고대어책을 느긋하게 읽기 위하여.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치자, 가죽으로 된 두꺼운 표지가 천천히 열렸다.

‘정령의 역사.’

멋들어진 고대어로 쓰인 그 표제를 읽으며,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의 궁금증이 풀릴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책은 지루하지만 나름대로 이론에 충실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쩌다가 정령사의 명맥이 끊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정령사들은 ―――――를 통해 ―――――하게 되었고…….’

하지만 흥미로운 것과는 별개로, 역시 내 고대어 능력이 너무 낮았던 탓에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아마 정령들 간의 싸움이 있었고 정령사들이 그에 말려든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꼭 고대어 공부를 더 해서 읽어 보자.’

그 파트를 넘기고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나는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책 안에는 ‘정령을 태어났을 때부터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서술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어떤 존재인 거지?’

나는 새삼 나란 존재에 더욱 의문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짧은 삶이었지만, 이제껏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상담할 사람도 없으니, 이 능력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숨만 푹푹 쉬던 나는 다음 순간, 눈을 반짝 빛내고 말았다.

‘정령 소환’

소제목은 단정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정령 소환이라니!

지금까지 내가 이제껏 제일 바라오고, 궁금해하던 부분 중 하나다. 비록 동기가 복수로부터 시작됐긴 했어도, 나는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이 정령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정령 소환이 가능할까? 표의 문자인 고대어는 한 글자 한 글자 읽는 게 무척 어려웠지만, 최대한 집중하니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짚어 중요한 부분을 속으로 읽어 보았다.

‘정령 소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용자의 마나와 정령 ―――이 필요하다.’

이 ―――는 뭘까?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준비되었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바로 정령 소환진이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되어 온 마법진으로, 정령과 이 세계를 이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구나! 나는 뛸 듯이 기뻐하고 말았다.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마나와 정령 ―――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찾아봐야 하리라), 그리고 정령 소환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소환진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재빨리 다음 줄로 눈을 돌렸다.

나에게도 정령을 소환할 능력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정령 소환진에 대해 따로 다루지 않는다. 저자의 다른 저서인 ‘정령 소환진’에는 누구라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정령 소환진 그림이 나와 있으며, ‘정령의 역사’와 동일한 가격으로 판매 중이다.’

그리고 그 뒷줄에는 이러한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정령의 역사’를 구매한 독자에게는 ‘정령 소환진’ 특별 할인 중.’

“…….”

나는 고개를 털썩 떨구었다.

‘……장난해?’

저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다른 저서에 대한 강력한 홍보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래, 작가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책이 많이 팔리길 바라는 법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우롱당한 기분이 드는 걸까?

내가 몇백 년 전 사람이었더라면 이 서술을 보고 화딱지가 나서 책을 뜯어 버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야 정령 소환에 대해, 그리고 정령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놈의 정령 소환진, 그게 없어서 소환이 불가능하다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그때, 정령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 아이들은 항상 내 곁을 맴돌다가 내가 특히 슬프거나 힘들 때 나를 위로하러 다가오곤 했다.

―무슨 일 있어?

―힘내. 아이샤.

자그마한 정령들이 나를 빤히 보며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응원에 애써 심호흡을 하려 노력했다.

‘그래, 너무 흥분했어.’

잠깐 쉬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정령의 역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차라도 마시기 위해 시녀를 부르려던 때였다.

‘…….’

나는 슬며시 눈길을 돌려 내가 빌려 왔던 또 다른 하나의 책을 떠올렸다.

아무런 제목도 없고 저자의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책.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령들이 그렇게 읽으라고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평소에 그렇게 절박한 적이 없었던 정령들이 애원한 책이다.

‘……한번, 읽어 볼까?’

어차피 오늘 시간은 남아돈다. 그러니까 한 번쯤 살펴본다고 해도 시간 낭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책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제발.’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 책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또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고대어 실력을 늘리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일단 내려오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이어야만 한다.

제발.

엘미르 제국의 황녀인 나는, 엘미르의 제일신인 ‘루미나스’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든 나는―.

환희하고 말았다. 책 안의 마법진 위에는 자그마한 손글씨로 ‘정령 소환 계약진.’이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나는 기쁜 낯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야 정령들이 나에게 온 힘을 다해서 이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기본적으로 정령들은 외로운 존재였다.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볼 수 있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 만큼 내가 자신을 소환해 주기를 무척 바랐던 것이리라.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얇은 책에서는 묵은 먼지내가 폴폴 났다. 안에는 여러 가지의 계약진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잉크가 번지고 지워진 탓에 쓸 수 없는 계약진도 있었다.

그에 조금 실망했지만, 나는 가장 첫 페이지에 ‘하급 정령 소환 계약진’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지금 가진 능력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급 소환이라면, 어쩌면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옆을 뛰놀고 있는 정령들을 흘긋 바라보았다.

나는 정령의 역사에 쓰여 있는 정령 소환법을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떠올렸다.

1. 정령 계약진을 준비할 것.

2. 사용자의 마력이 부족할 경우, 마법석을 준비할 것.

3. ―――이 부족할 경우, 상급 정령사와 함께 할 것.

계약진을 그렸다면, 그 위에 손을 올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외우라고 되어 있었다.

“……이 땅과 하늘과 바람과 불과 물을 이루는 정령들이여. 나에게 와서 힘이 되어다오.”

나는 눈을 감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주문을 외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뭔가가 내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빠져나간 무형의 기운은 공중에서 머무르는 것 같더니, 이윽고 한 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약간 생경한 기분이긴 했지만 그다지 힘든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 점에서 정령 한 명이 소환되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잠깐 두리번거리는 것 같던 그 애는 이내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앗, 소환됐다!

그 아이는 흰색에 가까운 백금발, 그리고 황금색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 깜짝 놀라 외쳤다.

“루, 루 아니야?”

―네, 맞아요!

그 아이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해왔던 빛의 정령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소환진에서 튀어나온 것에 감동을 느끼고 말았다.

―저와 계약하시겠어요?

루는 포르르, 날아와 내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기쁘고 얼떨떨한 와중에 나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눈을 감고 내 이마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 애가 내 몸에 닿은 기분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마치 가벼운 새털이 내려앉은 듯한 기분과 동시에 따뜻함을 머금고 있었다.

눈을 감았던 그 아이가 눈을 떴을 때는, 반투명하던 그 아이가 뚜렷하게 변한 채였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모, 몸이 바뀌었어?”

“네, 주인님. 계약을 하면 정령들은 이 세계에 머무르는 실체를 가지게 된답니다.”

기분 탓일까. 나의 의지로 소환된 정령은 평소의 개구지고 장난스럽던 모습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똑똑해 보였다.

‘……정령 계약이라는 게 이렇게 쉽다고?’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루는 나에게 활짝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원래 정령과의 계약이 이렇게 쉽지는 않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친화력이 남들보다 훨씬 특출하셔서 단번에 저를 소환하실 수 있으신 거랍니다.”

“그, 그런 거야?”

“네! 제가 주인님께 소환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거예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령을 바라보았다. 정령은 비단 몸이 뚜렷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항상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오던 목소리도 이제 귀에 똑똑히 들려오게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정령과 긴 대화를 나누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계약을 하면 원래 이런 걸까? 나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말을 술술 잘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어?”

그 애는 기분이 좋은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나에게 대답했다.

“원래 소환되지 않았을 때의 정령들. 특히 하급 정령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기 때문에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저를 소환하신 뒤에는 서로의 정신이 이어져서 자아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다시 한 번 소개하자면, 저는 빛의 하급 정령 ‘루’라고 해요. 앞으로 루라고 불러 주시어요, 주인님!”

루는 자신의 흰색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귀엽게 인사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들이 흔히 상상할 법한 요정 그대로의 깜찍한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루. 나는 아이샤, 아이샤 드 엘미르라고 해. 내 이름은 알고 있었지?”

나는 그 아이를 손으로 살포시 안아 올렸다. 내 손에 폭 앉은 루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는 주인님을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 왔는걸요. 게다가 주인님께서는 얼마나 유명하신데요! 이전에 정령왕님께서도…….”

“응?”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유명하다고? 정령왕님은 또 무슨 소리야?”

“아, 그. 그게…….”

정령들 사이에도 유명인이 있다는 소리는 정말 처음 들어 본다. 게다가 그게 나라고? 루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명백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유, 유명하신 이유는 그러니까…… 계약하지 않은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주인님이 유일하셔서 그래요.”

“뭐?!”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령사가 거의 희귀해진 지금, 내 재능이 특별하다는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니.’

나는 내 등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지금은 아직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 그쳤다지만, 언젠가는 그보다 더 상위의 정령도 소환할 수 있지 않을까? 들뜬 나는 루에게 계속 질문했다.

“너보다 상급인 정령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니? 그리고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루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했는지, 책상 위로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우선적으로 모든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은 동일해요. 소환진, 주인의 마력, 그리고 친화력이 충족된다면 어떠한 정령이라도 소환할 수 있어요. 정령이 거부하지만 않는다면요. 하지만 지금 주인님께서는…….”

“나는?”

나는 조급한 마음에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동시에 나는 아까 정령의 역사에 쓰여 있었던 단어를 드디어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소환진, 마력, 그리고 ‘친화력’이었구나. 루는 내 말에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주인님께서는 마력이 부족하세요. 아직 몸이 어리셔서일 수도 있겠지만 친화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하신 건 맞죠.”

“마력이 부족하다고? 그건 어떤 현상인데?”

나는 열성적으로 질문했다. 루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친화력이 마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마력은 그에 고이는 물이에요. 물과 그릇이 크고 많을수록 상급 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어요.”

물과 그릇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주인님께서는 빛의 정령과 가장 친화력이 좋으세요. 그래서 하급 소환진에서 제가 나오게 된 거고요. 원래 처음 소환을 할 때는 가장 상성이 좋은 정령이 소환되거든요.”

“그, 그렇구나.”

나는 새로운 정보들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대었다. 루는 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중급 정령님은 리미에. 상급 정령님은 루디온. 최상급 정령님은 로니안. 그리고 정령왕님께서는 루미나스라는 명칭을 갖고 계시답니다.”

“……잠깐만, 루미나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몸을 다시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루미나스는 빛의 신의 이름 아냐?”

나는 줄곧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다. 이곳 엘미르에서 가장 숭상하는 첫 번째 신, 빛의 신 루미나스.

제국에서는 그를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했다. 또, 빛이 없다면 어떠한 생물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만물을 풍요케 하는 신이기도 했다.

당장 이번 봄의 제전만 해도, 한 해의 시작이 잘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빛의 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의 이름과 정령왕의 이름이 일치한다고? 단언컨대, 그게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니라.

“아, 요즘은 그렇게 부르지요?”

루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담긴 뜻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 그러면 옛날에는 아니었단 말이야?”

내 말에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이내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음유시인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옛날에, 세상이 아직 혼돈이었을 때. 창조신께서는 낮과 밤을 만드셨답니다.”

“…….”

“그리고 그 안에서 정령왕들께서 태어나셨지요. 왕들께서는 이 세상을 무척 사랑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고, 생물들이 살아가도록 자신의 몸을 깎아 숲과 바다를 만들었답니다.”

루의 목소리에는 마치 노래하듯 운율이 담겨 있었다.

“인간들은 왕들을 깊이 경외했지만, 그분들이 가진 권능의 끝자락만 겨우 배견할 수 있었어요. 시대가 흐르는 동안 왕들을 부르는 호칭은 바뀌었고, 그중 루미나스 님께서는 한때는 낮의 지배자로, 한때는 밤의 대적자로. 그리고 지금은 빛의 신으로 불리고 계신답니다. 하지만 그분의 본체는 정령이시지요. 고귀하고 고귀한 우리의 왕이시어요.”

나는 이제껏 어느 때보다도 가장 놀라고 말았다.

“그, 그러면 이덴베르 제국이 제일신으로 삼은 셀레나 님은? 사실 모든 신은 정령인 거야?”

“아니요. 모든 신이 정령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랍니다. 다만 정령과 신은 다 같이 인간들을 굽어보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종종 헷갈릴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루는 신보다는 정령이 인간들의 삶에 개입하기에 쉽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 왔던 어떠한 책들보다도 풍부한 정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신이라고 철석같이 믿어 왔던 루미나스 님이 사실은 신이 아니라 정령이었다니.

‘진작 정령과 계약해 볼걸.’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다. 루는 내가 그녀의 반응에 놀란 게 뿌듯했는지, 다시 신이 나서 공중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루미나스 님께서는 창조신께서 빚으신 창조물 중에서 가장 잘생기셨기로 유명하시답니다. 아, 창조신께서는 모든 신들의 가장 위에 서시는 분이에요. 루미나스 님은 겉보기에는 인간 남성과 비슷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시지요.”

“신이 빚으신 창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네, 빛이 머무르는 듯한 환한 백금발과 아름다운 금안을 가지고 계셔요.”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지금껏 정령들을 관찰해 본 결과, 인간들과 정령들의 미추 개념은 비슷했다.

그런 루가 찬양하는 데에다가, 신들 중의 신이 빚은 창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니.

얼마큼 잘생겼을지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그런데 백금발과 금안이라고?’

문득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기시감……. 마치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그 기분을 무시했다.

‘그랬을 리가 없지.’

아무리 내가 정령을 볼 수 있다 한들, 정령왕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까 루가 정령왕님께서도…… 라고 한 뜻은 뭘까?’

나는 루에게 그에 관해서 추궁했다. 하지만 루는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 뿐이었다.

아무리 졸라도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게다가 지금 나에게는 더 궁금해진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루, 혹시…….”

이게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나도 정령왕님을 소환할 수 있을까?”

정령왕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는 방금 들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령왕과 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정령과 계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덴베르 제국에 복수하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책 ‘정령의 역사’에서 서술하길, 인간과 계약한 정령은 이 현실 세계에서 머무를 수 있는 대가로 계약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쓰여 있었다.

‘제발, 제발.’

나는 루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는 고개를 휘젓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뭐? 어, 어째서?”

루는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력 때문이에요.”

“……마력?”

의외에 대답에 나는 말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네. 그릇이 아무리 커도 물이 부족하면 정령은 소환할 수 없죠. 그게 정령계의 규칙이니까요. 인간들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마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해요.”

그녀의 답변에 나는 순식간에 축 처지고 말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나는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정령을 소환할 때 마력석의 힘을 빌려도? 그래도 부족할까?”

“마력석은 보조일 뿐이에요. 중급이나 상급의 정령을 소환할 때 부족한 마력을 조금은 채워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해요.”

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긴.’

그렇게 대단한 정령인데 간단히 소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생각보다도 더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루미나스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빛의 신이라니.

이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어둠 속에서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고 다시 태어난 나는 빛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어둡고 좁은 곳에 들어가면 트라우마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빛이 잘 들어오는 자리를 찾아다녔다.

엘미르 제국의 황녀가 되어 빛의 신으로 종교가 바뀌었을 때도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빛의 존재가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알아 왔던 신이, 사실은 신이 아니었다니. 게다가 항상 내 곁에 존재하던 정령들의 왕이었다니.

왠지 모르게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턱을 괴고 루미나스에 대한 상상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봄의 제전에 대한 것에 생각이 미쳤다.

루의 말대로라면 봄의 제전은 사실 빛의 정령왕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행사가 아닌가? 그와 동시에, 어머니가 봄의 제전에 열 행사가 마땅치 않아서 고민하시던 것도 떠올랐다.

‘혹시 내가 어머니를 도울 수는 없을까?’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은 루미나스를 빛의 신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루의 말대로라면, 그는 정령왕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나는 힌트를 잡았다.

‘봄의 제전에서 정령들을 위한 행사를 여는 건 어떨까?’

내가 정령들을 계속해서 보아 온 결과, 그들은 인간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떠들썩한 축제를 무척 좋아했다.

루미나스가 어떤 존재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령들을 아끼는 왕이라면 정령들을 위한 행사가 열리는 봄의 제전을 기껍게 보아 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정령에 대한 의식을 개선시키는 일도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정령을 꽃이나 숲, 나무 등 원시적인 사물에 깃드는 요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정령사들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이겠지. 나도 다시 태어나 정령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정령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들이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안다.

앞으로 내가 정령사가 될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좀 더 정령사에 대한 인지도를 높혀 놓을 필요도 있었다.

생각은 점점 이어져 나갔다. 나는 이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종이를 찾아 하나씩 차근차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초안이 작성되었다.

‘됐다!’

나는 기쁜 낯으로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기획서를 만들면서 나는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너무 똑똑해 보이지 않게, 적당히 7살짜리처럼 보일 수 있도록 어휘를 써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획서는 꽤 괜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없었던 신선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도 이 기획이 마음에 드신다면, 아마 무리 없이 진행되겠지. 나는 오래간만에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요즈음 정령과 복수에 대해 생각하느라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이 들떠 올랐다.

어머니는 무리를 해도 겉으로 내색을 잘 안 하시는 분이니까.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성공적으로 복수를 끝마치게 된다면…….

……그 뒤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새 가족들과 같이 있고 싶었다. 새로 태어나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있었을 때 나를 다시 살게 해 준 사람들이니까.

그 고마움은 평생 갚아도 모자랄 테니까. 나는 설렁줄을 당겨 밖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어머님께 사람을 보내서, 내가 방문하겠다는 말을 전해 줄래?”

“말씀 받잡겠습니다.”

시녀를 보낸 동안, 나는 초고를 여러 번 다시 수정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이 온 것에는 빛의 신과 더불어, 꽃과 나무 등의 정령들이 함께 있었던 덕분이라는 것을 알릴 것이다.

그를 위해 정령에 관련된 설화를 모티프로 한 예술품이나 연극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제일 중요한 부분은 빛의 신을 찬양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조금씩 계획을 수정해 나가고 있는데, 시녀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운을 뗀 그녀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황제궁에 가 계시다고 하십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를 알현하고 계시는 거야?”

“네, 그렇다고 하십니다.”

“그럼 나도 황제궁으로 가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폴짝 내려왔다.

“아버지가 계시는 황제궁에 기별을 넣어 줘.”

그렇게 말한 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외출복을 차려입었다. 이윽고 치장을 모두 마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태양궁으로 향했다.

미리 언질을 두었던 덕분에, 나는 바로 두 분이 계시는 알현실에 금방 갈 수 있었다.

“제국의 광명을 뵙나이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자, 둘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나를 향해 손짓했다.

“딱딱한 인사는 됐다. 이리 오렴.”

“어머.”

어머니도 지고만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아이샤, 이리 오렴.”

주위에는 호위 기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질문은 곤란했다.

내 망설이는 얼굴을 보았음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아이샤는 나를 더 좋아한다’로 작게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두 분 다 싸우지 마세요.”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둘에게 다가가 한 번씩 안겨 주는 것으로 대체했다. 아버지의 품은 여전히 탄탄하고 따뜻했다.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도 여전했다. 어머니의 품은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났다. 거의 매일같이 보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좋았다.

지난 7년 동안, 나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감싸 준 부모님이다.

“우리 아이샤는 가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어머니는 내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아버지는 그런 우리 둘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두 분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다가, 이윽고 내가 온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오늘 온 건 이번에 있을 봄의 제전 때문이에요.”

“봄의 제전?”

“네, 제가 제전에 관련해서 하고 싶은 기획이 있거든요.”

나는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세부적인 내용을 낱낱이 얘기하기에는 약간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래?”

하지만 대충 거기까지만 들어도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를 도우려고 한 일임을 눈치챈 듯했다.

“학자들에게 듣자니 공부도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사이에 기획까지 만들었다니 너무 스스로를 혹사하는 게 아니더냐.”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요.”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자랑스럽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게다가.”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이것보다 훨씬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잖아요.”

후계자인 이시스 오라버니가 배우고, 일하는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그가 황태자라고 할지언정, 정말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물론 그만한 일을 결국 다 해치워 내고 마는 오라버니도 오라버니다. 그가 진정 천재라는 것에는 정말 이견이 없을 정도다.

하여간, 나도 같은 남매로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샤가 만든 기획이라니……. 어서 보고 싶구나.”

어머니는 눈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손을 배배 꼬았다.

“우리 아이샤가 했다는데 당연히 대단한 일이지. 자신감을 가지려무나.”

아버지는 내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면 오늘 오후 중으로 얼른 기획서를 보내 드릴게요.”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그 뒤에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시시콜콜한 내용들을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황녀궁으로 돌아오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봄비인가?’

나는 손을 들어 똑, 똑 떨어지는 그 빗방울을 맞았다. 내가 멈춰 있자, 시녀장이 나를 재촉했다.

“황녀 전하, 바람이 차요.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궁으로 돌아가요.”

“으응, 그래.”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온다. 동산에 올라가지 못할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 이시스 오라버니도 보지 못할 거고 말이다. 나는 조금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황태자 궁으로 찾아갈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어머니께 보낼 봄의 제전 일이 좀 더 급한 것 같았다. 제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만든 기획을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다면, 얼른 세세한 부분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작은 손을 꼬물거리면서 열심히 기획안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봄비는 며칠 동안 끊이지 않았다. 조금 그치려나 싶으면 다시 내리고, 그치려나 싶으면 또 내리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결국 동산에 오르는 것은 아예 포기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며칠 동안 이시스 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한 것은 물론이였다.

대신 나는 매일 같이 궁에 박혀서 봄의 제전에 대한 기획을 짜고, 정령에 대해 공부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내 기획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면서 무척 나에게 고마워하셔서, 나도 쑥스럽지만 매우 기뻤다. 정령들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책도 도움이 되었지만, 루와의 대화로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중에 가장 놀랐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령사가 오랫동안 정령을 소환해 놓고 있으면 마력은 물론이고 친화력이 늘어난다고 했다. 근육도 자꾸 써 버릇해야지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그 말을 들은 나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방에서 루와 떠들곤 했다.

“루.”

티타임을 즐기던 나는 그 아이를 향해 말을 꺼냈다. 루는 티푸드로 같이 나온 달콤한 과자를 두 손에 들고 야무지게 먹고 있었다. 간식을 먹고 있는 루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궁금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루미나스 정령왕님께서는 어떤 분이셔?”

내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던 루는 입가의 초콜릿 부스러기를 털어 냈다.

“무척 강하고, 무척 아름답고, 무척 멋진 분이세요!”

“……그게 다야?”

“하지만 정말인걸요.”

루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분을 보면 칭송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단 말이지….”

나는 그 애를 보면서 진저 쿠키 하나를 더 물려 주었다. 그러자 루는 활짝 웃으며 쿠키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루는 인간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그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살아있는 동안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때쯤 되면 힘이 모자라 루를 다시 돌려보내야 하곤 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그 애를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 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봄의 제전이나 정령은 그렇다 치고, 이시스 오라버니를 계속 보지 못하자 나는 무척 시무룩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내가 그를 찾아가거나, 그가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못 해도 이틀에 한 번쯤은 항상 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시스 오라버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환생해 눈을 떴을 때부터 이시스 오라버니는 항상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영 조용하니 괜히 불안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였다. 지금 나는 ‘안 그래도 해가 가려져서 어둠침침한데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우울해진다’라는 유모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그녀와 함께 소일거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모가 내 혼잣말을 듣고 대답한 것이다.

“이시스 전하 말씀이신가요?”

뒤에서 들려온 그 말에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자수를 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상했다. 무언가 오라버니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 듯했다.

“응, 유모는 알아?”

내가 묻자 유모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이시스 전하께서는 요즘 검술에 엄청나게 열중하시는 듯해요. 그래서 빗속에서도 연무장에서 연습하시다 몸살감기에 걸리고 마셨다네요.”

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몸살감기?”

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고 말았다.

“어, 얼마나 아픈데? 많이 심하대?”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엄청나게 놀라자, 유모는 그제야 아차 한 듯했다.

“아, 이건 비밀이었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말았다.

“비밀? 누가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그게…….”

그녀는 안절부절못하고 말았다. 수다쟁이인 유모는 원체 거짓말을 잘 못 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품에 매달려 조르기 시작했다.

“유모! 얼른 알려 줘. 비밀이라니. 나한테만 숨기기 있어?”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봐 온 유모는 내가 매달리는 것에 무척이나 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던 유모는 결국 나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이시스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뭐? 어째서?!”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왜 나한테 감기라는 걸 숨기는데?”

“그게…….”

유모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황녀 전하께서 병문안을 오셨다가 감기가 옮으시면 큰일이시니까요. 가뜩이나 황녀 전하는 어리시고…… 그러니 절대 말씀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

나는 유모에게 매달렸던 손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시스 오라버니는 내가 아플 때면 항상 병문안 와 줬는걸. 자기가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 그런데 나는 오지 말라니…….”

그러고 보니 이시스 오라버니가 아플 정도로 무리한 것도 이번이 처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이시스 오라버니를 보지 못했을 때면 그가 아픈 사실을 나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오라버니가 나에게 숨기는 건 싫어.’

나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는 항상 어째서 나에게 베풀어주려고만 하는 걸까. 나도 그에게 보답하고 싶은데.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문득,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그에게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그도 이미 감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항상 그 일들을 속으로 묻어 두었다.

그러면 이시스 오라버니는 그것을 묵인하고 넘어가곤 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의 비밀이 심각한 것이긴 했지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일이 있다고 한들, 자신에게 상담해 주고 의지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든 간에, 나에게 힘이 되고 싶을 테니까.

지금 내가 이시스 오라버니의 병문안을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바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항상 너무 나를 생각해 준다.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나는 천천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시스 오라버니라면 지금 이 상태에서 내가 병문안을 간들 기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물론 기뻐하긴 하겠지만 그만큼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겠지. 내가 혹시 감기에라도 옮을까 봐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몇 장의 종이들이었다.

‘……아.’

지금까지 기획안을 쓰느라 하얀 종이를 책상에 계속 쌓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고민이 확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편지를 쓰자.’

오라버니에게 병문안을 갈 수 없다면 편지라도 써서 보내자. 분명 그는 무척 기뻐해 줄 것이다.

‘내 마음을 전해 줘야지.’

오라버니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나도 오라버니의 힘이 되고 싶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나는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요람에 누워 있을 적 그가 나를 항상 찾아와 말 걸어 주던 때를.

한 살 생일에 나에게 기사의 맹세를 해 주던 그를.

커가는 동안 같이한 수많은 추억들을.

예전에 내가 처음으로 글씨를 썼을 때 ‘우리 아이샤는 천재구나!’라고 기뻐하던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나는 한 번도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써 준 적이 없었지?

돌이켜 보니, 항상 너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

‘편지를 받으면 분명히 기뻐하겠지?’

나는 생긋 웃었다. 아직도 미래에 대한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오라버니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에게 편지를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콜록, 콜록.”

방 안에는 연약한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화려한 방 안의 푹신한 침대, 그리고 두꺼운 이불 아래에는 소년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과 땀이 조금 흐른 이마.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는 멍한 초록 눈을 깜빡, 깜빡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또래의 소년 한 명이 익숙한 듯 물병에서 미적지근한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네었다. 물을 건넨 소년의 머리 색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이었다.

“체온이 도무지 내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아, 그래?”

이 제국의 황태자, 이시스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내뱉는 숨조차도 뜨거운 것 같았다.

“다음에는, 빗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그만둬야겠어…….”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신 겁니까?”

“언제, 어느 상황이라도 검을 휘두를 수 있기 위해…….”

이시스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친우인 비온은 그런 그를 무심하게 내려 보았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딱 봐도 알지 않겠어?”

이시스는 그를 흘겨보았다. 그다지 친절한 어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하루 이틀 보는 것이 아닌 비온 공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태도로 그걸 흘려 넘겼다.

“괜히 저에게 심통을 부리지 마십시오.”

“시끄러. 으, 많고 많은 기사단 녀석들 중에 왜 하필 네가 온 거야…….”

“왜겠습니까? 기분이 안 좋은 황태자 전하를 감당할 사람이 저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요.”

둘은 한동안 투닥거렸다. 하지만 이래 봬도 둘은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나이가 3살 차이 나는 데다가, 성격이 워낙에 달라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잘 믿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가 항상 가족들, 특히 여동생에게 심장이라도 퍼줄 것처럼 다정하기 때문에 종종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다정하기만 한 성격이 아니었다. 괜히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게 아닌 것이다.

어릴 적, 그러니까 전 황후였던 테티스 황후가 돌아가신 직후에는 더했다. 마치 상처 입은 어린 맹수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비온은 천천히 생각했다.

‘이시스 님도 사람 되셨지.’

이시스가 이렇게 다시 밝아질 수 있었던 것에는 타고난 밝은 성품도 있지만, 새로 들어와서 그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었던 아이리스 황후 폐하, 그리고 여동생의 도움이 무척 컸다.

그에 대해서는 비온도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비록 아이샤와는 말 한 번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이지만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이시스 궁의 시종장이었다. 이시스는 열 때문에 쉰 목소리로 외쳤다.

“아프니까 모든 방문은 사절하라고 했을 텐데.”

“그게…….”

그의 집사장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에 조금 의아해지려는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아이샤 황녀 전하의 궁에서 온 시녀입니다만…….”

그 말에, 이시스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샤의 궁에서 온 시녀라고?”

“예. 그래도 거절할까요?”

“자, 잠깐만.”

이시스는 재빨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열 때문에 침대에 줄곧 누워 있었더니 옷도 구겨져 있었고, 땀범벅이다. 아이샤의 궁에서 온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모두 정리하고 난 이시스는 목을 큼큼, 가다듬은 뒤에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그사이에도 이시스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아이샤가 시녀를 보낸 걸까?

‘……설마 감기 걸린 게 들킨 건 아니겠지?’

이시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두 손에는 작은 은쟁반을 든 채였다. 그녀는 공손하게 절을 했다.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아이샤 황녀 전하의 궁에서 찾아온 레나라고 합니다.”

“그래.”

이시스는 반가운 낯을 했다. 그는 레나를 잘 알았다. 그녀는 아이샤의 수석 시녀들 중 한 명으로, 항상 아이샤를 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시스와도 여러 번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레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가져온 것을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황녀 전하께서 저를 통해 황태자 전하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 명하셨습니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은쟁반 속에 숨겨 있었다. 뚜껑을 열자 보이는 그 연분홍색 무언가에 이시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뭔가?”

이시스는 그것이 마치 편지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의 질문에 시녀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편지입니다.”

“……?”

그 순간, 그의 사고회로는 정지하고 말았다.

“……편지?”

지금 그의 모습을 아버지인 황제 폐하께서 보셨다면, ‘황태자 실격이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완전히 얼빠진 모습이었으니까.

“……편지?”

이시스는 거의 고장 난 것만 같았다.

“……?”

그에게 있어 편지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입력하기까지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릴 듯해 보였다. 열심히 사고회로를 맞추고자 하는 그를 보다 못한 비온 공자가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

“그대가 황녀 전하의 편지를 들고 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시녀는 이시스의 괴상한 행각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기에, 비온 공자와 말이 통하자 안도의 기색을 보였다.

“그렇군. 수고했네.”

“아닙니다. 공자님.”

그 둘이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제야 이제 이해를 한 이시스가 소리쳤다.

“자, 잠깐만!”

“……?”

“그러니까 네 말은 아이샤가 나를 위해 편지를 썼고, 그걸 네가 가져왔다는 말인가?”

비온 공자는 외람되지만, 자신의 친우이자 주군인 이시스 황태자가 열이 너무 오른 나머지 바보가 된 것은 아닐까 약간 의심하고 말았다.

“…시녀의 말에 따르면, 그런 모양입니다.”

“……그, 그럴 수가.”

이시스는 은쟁반 위에 올려진 연분홍색 종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아기자기한 분홍색 꽃들과 곱게 봉해져 있는 봉투.

그것은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심지어는 물구나무를 서서 본다고 한들 편지의 모양새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봉해진 밀랍의 형태는 아이샤의 상징인, 푸른 엘미르꽃.

어딜 어떻게 보나 이건 아이샤의 편지다.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아.’

그제야 이시스는 ‘아이샤가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라는 것을 비로소 머리에 입력했다. 그리고 감동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게 바로 부모의 마음인 것일까? 아니, 이시스는 오라버니이니 굳이 따지자면 오라버니의 마음쯤 되겠다.

처음으로 여동생에게서 편지를 받아 보는 게 이렇게 뿌듯할 줄이야. 혹시라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편지를 쓰다 지치지는 않았을까?

자신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며 편지지를 한 장 한 장 채웠을 아이샤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시스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

너무 감동스럽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이시스는 편지를 재빨리 개봉해 버렸다.

‘안! 안이 궁금해!’

편지를 열자, 편지지 위에는 아이샤와 참 잘 어울리는 동그랗고 귀여운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시스 오라버니께.

“아이샤…….”

이제는 숫제 눈물을 흘릴 기세다. 이시스는 자신의 눈물로 편지를 적시지 않도록 주의하며, 한 줄 한 줄 편지를 세심하게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몸은 어떠신가요?

―오라버니께서 최근 몸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들어 이렇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크으…….”

이시스는 손을 떨고 말았다. 아프다는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 줄 생각을 하다니. 아이샤의 마음 씀씀이가 훈훈하게 온몸을 데우고 있었다.

‘벌써 병이 다 나은 기분이야.’

이시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편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라버니가 언제나 열심히 하는 것은 알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아 주세요.

―남에게서 오라버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세요?

―오라버니가 아프면, 저도 걱정이 되는걸요.

‘미안해, 아이샤.’

이시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이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했던 행동이, 아이샤에게 서운함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편지는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아이샤의 진심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느낄 기회가 적었는데, 오라버니가 옆에 없으니 너무 쓸쓸해요.

―이시스 오라버니가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리고 오라버니의 동생일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다시 한 번 느껴요.

―얼른 나으세요. 오라버니. 봄의 제전에서는 건강한 오라버니의 모습을 빨리 뵙고 싶어요.

―그때까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아이샤가 기도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끝나는 편지는, 귀여운 하얀 새가 한 마리 그려져 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편지를 다 읽은 이시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 벅찬 감정을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입을 한참 다물고 있던 이시스는, 비온 공자에게 명했다.

“비온, 고개를 돌리도록.”

“…….”

비온은 속으로 이시스가 참 별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명령이니, 순순히 고개를 돌리기는 했다. 이시스의 얼굴이 감동으로 새빨개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을 친구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겠지. 비온은 그 마음을 이해했다.

“……아이샤.”

이시스는 자신의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아이샤가 정말 자신의 주먹만큼 작던 때가 선했다.

작고, 또 작아서 건드리기만 해도 톡 부러질 것만 같이 연약해 보이던 아이샤가 어떻게 이렇게 편지를 쓸 정도로 컸는지.

또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생각해 줄 정도로 자랐는지.

그리고 한편으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동생인 아이샤가 너무나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이시스는 하얀 새가 그려져 있는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한 번 쓱 훑었다. 이시스, 그는 이 제국의 후계자였다.

누구보다도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귀족들을 현명하게 다스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시한 학자들은 그에게 항상 눈이 어지러워질 정도로 많은 과제를 내려 주지만, 이시스는 거기에 불평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새 이시스의 눈이 진지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이샤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샤가 똑똑하고 대단한 만큼, 그가 더욱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현명해져야 한다.

‘아이샤.’

이시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애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음을.

한때에는 그것이 서운하기도 했었다. 아이샤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곁에 있었던 것이 자신인데, 그런 이시스에게마저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라는 것이.

고대어를 공부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숨기던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서운함이 더더욱 증폭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깊이 생각했다. 그와 아이샤의 거리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샤의 마음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나온 결론은, 이시스가 아이샤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니, 원래부터도 이시스는 아이샤를 항상 믿고 있었지만 말이다.

서운함을 느끼면서 이시스는 한층 더 성장했다. 15살이란 그런 나이이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해하고, 그리고 성숙해져 가는 나이.

아이샤가 만약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일 것이다. 믿고 지지해 주는 것. 그것이 오라버니로서 자신이 아이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시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내가 다 쓰러뜨려 주겠어! 우리 아이샤를 괴롭히는 놈들은!”

“아서십시오. 그러다가 무리하셔서 쓰러지셨잖습니까.”

옆에서 비온 공자가 시큰둥하게 말을 걸었다.

“애초에 빗속에서 검술 특훈을 하시다니, 제정신이 아닌 행동이라고 지탄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었어.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거든.”

그렇게 말하는 이시스의 초록색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 이제 감기에 한번 걸려 봤으니, 다시는 빗속에서 훈련을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말한 이시스는 시종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종장, 편지지와 펜을 가져다주겠나.”

“예, 전하.”

“……편지지, 말씀이십니까?”

비온은 의아한 듯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런 자신의 친우를 향해 이시스는 씩 웃었다.

“모름지기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한 그는 시종장이 들고 온 편지지를 기쁘게 받아 들였다. 편지지를 눈앞에 두니, 아이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편지를 쓸 때면, 받는 사람에 대해서만 온전히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 그 사람이 무얼 좋아했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등등…….

아마 편지를 쓸 때의 아이샤도 그랬겠지. 그렇기 때문일까, 멀리 있는 데도 아이샤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했다.

그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감각이었다. 이시스는 천천히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아서 자신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감기를 감춘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자신도 무척 아이샤를 사랑하고 있으며, 아이샤의 존재와 가족들의 존재가 얼마나 자신에게 있어 큰 기쁨인지에 대하여.

편지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바깥에서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즐거우니 그것마저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시스는 환하게 웃었다. 한편, 비온은 할 일이 없어진 나머지 그저 이시스를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도 여동생이 좋나?’

공작의 외동아들인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동생을 가진 오빠나 형의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주변의 경우를 보았을 때, 이시스의 경우가 특별한 것은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형제자매 따위 골칫덩이라고 고개를 젓곤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시스를 이렇게 만든 아이샤 황녀가 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 밖에서 스쳐지나가듯이 보고 간 것이 만남의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꼭 얘기를 나누고 싶군.’

둘 모두가 아이샤를 생각하는 와중에, 비는 점점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 * *

어느새 비는 그치고 수도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지나가던 유모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네요.”

“그러게.”

손으로 턱을 받치고 창밖을 응시했다. 황녀궁에서는 저 멀리 있는 황제궁과 황태자궁이 보였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짓고 말았다. 눈치 빠른 유모는 내가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황녀 전하, 황태자 전하께 편지가 오셨다면서요?”

“응.”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편지를 받자마자 나에게 답장을 되돌려 주었다.

“너무 기뻐.”

나는 속삭였다. 게다가 오늘은 봄의 제전이 시작하는 날. 이날을 맞아 딱 비가 그쳤으니, 이것도 나라의 경사이다.

유모는 흐뭇하게 웃었다. 더할 나위 없이 사이가 좋은 남매가 너무나 기특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푸른 하늘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나의 이름인 ‘아이샤’는 엘미르 고어로 ‘하얀 새’라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했을 때 흰 새가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꿈을 꾸었기에 지은 이름이라나.

태몽이나 이름에 뜻을 두는 것은 이덴베르 제국에는 없는 문화였기 때문에, 어린 나는 그게 꽤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다녔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눈동자의 색을 딴 ‘붓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태몽인 ‘사자’에서 따온 것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시스 오라버니의 뜻은 ‘무지개’였다. 나는 궁금해져서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라버니의 태몽은 무지개였나요?’

내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는 이내 눈웃음을 보였다.

‘아니, 아이샤.’

내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는 것처럼, 그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비 온 뒤에 떠오르는 무지개처럼.’

‘내 앞날에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거뜬히 헤쳐 나가기를 바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란다.’

과연. 나는 납득했다. 비 온 뒤에 떠오르는 무지개. 그것은 이시스 오라버니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아름답고, 고결하며, 고난를 겪은 후에도 다시 일어나는 그 강인함. 다정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이름이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푸른 하늘에 걸린 무지개와 그 하늘을 흰 새가 날아가는 풍경을. 여러 번 상상했었다.

* * *

봄의 제전. 이날 아침부터 황궁에는 고위 계층의 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행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넓은 홀에서 사람들은 눈을 감고 빛의 신, 루미나스를 향해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아버지인 황제 폐하도 예외가 없었다. 그만큼 신앙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이제 루미나스가 신이 아닌 정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남들이 빛의 신에게 기도할 때, 나는 정령왕 루미나스에게 기도했다.

우리 가족들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 뒤에는 여러 가지 의식이 이어졌다.

신관이 성수를 축성하기도 하고, 성가대가 나와 성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신관들이 병든 자를 치유해 주는 의식이었다.

다른 의식보다도, 이 의식에 뽑히고 싶어 하는 후보자들은 워낙 많다고 했다. 신관의 힘이라면 확실하게 나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관들이 그들을 모두 치료해 주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선발된 사람들만이 이곳에 나올 수 있었다.

뽑힌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신실한 성심을 가지고 있고, 억울한 사정으로 질병을 얻게 된 사람이었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집이 불타는 가운데 갇혀 있는 아이를 구하다가 화상을 입은 아버지였다.

“빛의 신의 가호를.”

“가호를.”

군중들이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신성력이 신관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그러자 전신 화상을 입었던 남자의 몸이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대단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도, 심한 화상이 점점 옅어지며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는 것이 눈으로 똑똑히 보였다.

그것을 보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기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루.’

나는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루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 앞이었으므로 루는 일부러 이 세계에 소환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와 소통할 수 있는 까닭은 단 하나, 내가 소환하지 않은 정령도 볼 수 있을 만큼 친화력이 좋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마나와 친화력은 거의 늘어나지 않지만, 대신 다른 사람들 몰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편리했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

금방 대답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있잖아. 지난번에 네가 루미나스 님은 신이 아니라 정령왕이라고 하셨지?’

―네! 그렇지요.

루는 자신의 왕의 이름이 나오자 신나는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 루미나스 님이 신이 아닌데, 신을 믿는 게 아닌 사제들이 어떻게 신성력을 쓸 수 있어?’

그 질문에 루는 아하, 하고 눈을 반짝거렸다.

―그게 궁금하셨군요!

루는 신나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음, 정확히 말해서 저 사제들이 쓰는 것은 신성력이 아니에요.

‘뭐? 하지만 진짜로 사람을 치유하잖아.’

―그건요. 빛의 정령들은 원래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고유의 힘이 있거든요. 루미나스 님의 사제들은 그분을 믿고 포교하는 대가로 그분의 권능을 한 조각 나누어 받은 것에 불과하답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그런 거야? 근데 그러면 거의 루미나스 님은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본질이 정령이라는 것뿐이지, 신전도 있고 신성력 비슷한 힘도 쓸 수 있는 사제들이 있잖아.’

그러다가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응? 그런데…….’

―네?

‘빛의 정령의 고유 능력이라면, 나도 치유 능력을 쓸 수가 있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질문했다. 있으면 좋겠고, 아니면 말겠지. 그런데 루에게서 나온 대답은 매우 뜻밖이었다.

―물론이지요!

‘……!’

게다가 그녀의 대답은 무척이나 자신만만했다. 나는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

‘진짜? 어느 정도로?’

―으음, 그게!

루는 잠깐 가늠을 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 하고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저 사제들만큼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보다 상급 정령을 소환하면 소환하실수록 그 능력은 더 높아지시겠지요.

‘…….’

루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걸 따지고 있었다.

‘하, 하지만 저 사람들은 일평생을 신을 따르고 마음가짐을 수련해서 겨우겨우 사제가 된 사람들인걸. 그런데 내가 저만큼의 신성력…… 아니, 빛의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그건 주인님께서 정령사이기 때문이랍니다.

루는 공중에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령 고유의 능력을 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친화력. 하지만 사제들에게 있는 것은 루미나스 님을 향한 믿음뿐이지요. 루미나스 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권능 한 조각을 내려 줄 만큼 자비로우시지만, 본질은 정령이시기에 정령의 고유 능력인 치유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것은 정령사로 한정해 두신 거랍니다.

‘……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충격적이었다. 새롭고 좋은 정보기는 했지만…….

‘일단은 숨기자.’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아직 하급 정령밖에 소환하지 못하는 데에도 화상을 치유할 정도의 힘이라고 한다.

만약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에 성공해서 점점 그 치유 능력이 나아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엘미르 제국의 황녀가 정령사라는 소문이 나도 좋을 것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 말이다.

“아이샤, 춥니?”

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 때문인지,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그에 얼른 고개를 저으면서, 단순히 조금 서늘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오후에는 가벼운 티 파티가 이루어졌다. 오전에 신전에서 있었던 행사는 경건하고 엄숙한 행사였기 때문에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와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잡담이라도 할라치면 누가 흠흠, 목을 가다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황녀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워진 지금 나는 그와 꼭 대화를 하고 싶었다. 감기 기운이 있다는 이유로 결국 나는 봄의 제전이 찾아올 때까지 이시스 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했다.

이시스 오라버니도 너무하지, 끝끝내 나를 만나 주지 않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편지를 받고 나서는 모든 서운함이 풀려 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효였다.

나는 웃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를 만나 이야기할 생각에 기뻤고, 봄의 제전의 분위기 자체가 사람을 들뜨게 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궁 정원에 설치된 야외 티 파티장에 들어가고 나자 그 기분은 일변하고 말았다.

‘……어휴.’

나는 티 안 나게 한숨을 살짝 쉬었다. 어머니가 예전에 ‘봄의 제전에서 또래 친구를 사귀어 보자’라는 뜻이 이런 것인지 몰랐다.

지금 나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이시스 오라버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물론 따로 자리를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배려에는 감사드린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픔은 슬픔인 것이다.

조금 떨어져 있다면 그래도 슬쩍 오고 가는 척을 하면서 그와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누어 볼 텐데, 이시스 오라버니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겨우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의 옆에는 무척 눈에 튀는 붉은 머리의 귀족 소년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 튀는 머리카락 색에서 그의 정체를 단번에 짐작했다.

‘비온 공자.’

흘긋 보던 나는 그가 이쪽을 바라보는 낌새가 없자 아예 대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 나라 재상인 공작의 외동아들이자 이시스 오라버니와의 오랜 친구였다.

검은 물론, 마법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나도 여러 번 이름을 들어 보았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데다가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뛰어나고, 인맥도 훌륭하니 정말 인생을 혼자 다 사는 사람이다.

마치 동화 속에서 소녀들이 그릴 법한 왕자님 같은 사람이랄까.

‘……휴.’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이 테이블 선정에 무척이나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테이블에서 나는 어린 축에 속했고, 개중에는 10살, 12살쯤 되는 아이도 함께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다니는 살롱에서는 자수 뜨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어요. 모두 연말에는 아름다운 자수 액자를 하나씩 가지는 것으로 유명하답니다. 괜찮으시다면 다들 어떠신가요? 황녀 전하께서는……?”

더없이 수다스러운 후작 영애가 내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장장 삼십 분간을 혼자서 떠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또래 친구를 사귀기 위해 나온 것이니만큼, 그녀의 말을 잘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끊임없이 하지?’

그녀의 수다는 정말로 그칠 줄을 몰랐고, 나는 이제 그녀가 슬슬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감탄하느라 내가 질문을 받은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을 정도다.

“아, 자수? 나는…… 그런 일에는 서툴러서.”

“어머, 괜찮아요! 황녀 전하! 물론 자수는 보기에 어려워 보이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누구나 조금씩 하다 보면 익숙해진답니다. 지난번에 어떤 영애는 말이에요……!”

‘아니, 나는 정말 괜찮은데…….’

나는 속으로 푹푹 한숨만 쉬었다.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영애들은 그녀보다 작위가 낮은 탓인지, 아니면 어린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기세에 질린 탓인지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고, 나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머리 아프다.’

이렇게까지 자기 얘기만 하는 것도 재주다. 게다가 그런 그녀의 눈빛에 순수한 호의만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그게 악의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도무지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팔짝 뛸 노릇인 것이다.

‘누가 날 좀 구해 주면 좋을 텐데. 어떤 왕자님 같은 사람이, 짜잔. 하고 와서 나를 구해 주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정말 기적처럼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잠깐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붉은색 머리카락은 어떤 것보다도 진한 루비 색상이었고, 얼굴 또한 낯이 익었다.

세상 다 해 먹는 재능을 가진 데다가 공작가의 후계자이기까지 한…….

‘비온 벨트모어 공자.’

그는 나의 놀란 표정을 보면서 천천히 양해를 구했다.

“이시스 님께서 잠깐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시스 오라버니께서요?”

나는 활짝 웃고 말았다. 드디어 이 자리를 벗어날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누구라도 몇십 분 동안 듣고 싶지도 않은 남의 사생활 수다나 듣고 있다 보면 자연히 얼굴에 꽃이 필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오라버니가 저를 부르셨다면 당연히 다녀와야죠. 그러면 저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보내셔요.”

이 자리를 떠나는 나를 보며 후작 영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도 부럽다는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비온 공자에게 따라붙으며 소근소근 말을 붙였다.

“감사합니다. 계속 있었다가는 행사가 모두 끝나기도 전에 탈진했을지도 몰라요.”

“확실히 엄청 무료하신 듯 보이더군요.”

“네, 엄청나게…….”

그의 말에 대답하던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티가 났나요?”

“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최대한 아닌 척하려고 했는데, 지루한 티는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후작 영애도 대단하지. 그럼 내가 지루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한참 동안 떠들었단 말인가.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갑작스레 비온 공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시스 님께서는 황녀 전하를 데려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오라버니가 나를 부른 적도 없는데, 일부러 나를 데리러 왔다고? 그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왜 저에게 오신 건가요?”

내가 그를 경계하는 것을 느꼈음인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거짓말이라곤 모를 것 같은 무뚝뚝하고 강직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낮춘 채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너무 곤란해 보이시길래, 제 독단으로 황녀 전하를 모셔 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셨나요?”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루비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푸른 눈동자.

그 눈은 딱히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서로 상반되는 강렬한 머리 색과 눈 색 말고도, 준수한 얼굴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올해로 그의 나이가 12살이라고 들었다. 아직 어리긴 해도 공작가의 후계자이기도 한데다, 얼굴도 저리 잘생겼으니 벌써부터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나는 별 감흥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천천히 걸어가며 비온 공자가 입을 열었다.

“이시스 전하께서도 계속 황녀 전하가 뵙고 싶다는 티를 내셨고 말입니다.”

‘흐음.’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비온 공자가 대범하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솔직한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고맙기는 했다. 후작 영애의 수다에서 정말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던 참이었으니까.

그러던 나는 무심코 그의 옷 한 곳에도 꽃이 붙어 있음을 깨달았다. 남자에게는 부토니에, 여자에게는 화관. 내가 기획한 봄의 제전 행사 중 하나였다.

봄을 맞아 만물에 깃든 정령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생화로 몸을 장식하는 것.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행사를 즐기고 계신가요? 사실 공자께서 끼고 계신 부토니에나, 제가 끼고 있는 화관은 저의 기획안이었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조금 의외인 듯했다.

“황녀 전하가 직접 행사에 참여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답니다. 공자의 감상이 궁금해요.”

내 말에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령들의 존재를 부각시킬 생각을 하시다니, 신기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정령들의 존재는 잊히기 쉬우니까요.”

“그런가요?”

“그렇지요.”

나는 지금도 내 눈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루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내 곁에는 정령이 여러 명 붙어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마침 루가 눈을 반짝이면서 나에게 말했다.

‘저어기, 꽃의 정령들이랑 놀고 와도 될까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신난 모습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자기 친구들이랑 놀겠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 애가 얼른 사라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하긴.’

나야 매일같이 옆에 있는 정령을 보니까 그걸 느끼지 못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정령이란 굉장히 멀고도 신비한 존재일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전의 나도 그랬으니 이해가 갔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는데, 옆에 있던 비온 공자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

내 눈이 아쿠아마린처럼 반짝이는 푸른색이라면, 그의 눈은 심해처럼 깊고 푸른색이었다.

같은 파란색이긴 해도, 비슷하면서 다른 색이었다. 나를 왜 이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비로소 비온 공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듣던 대로…….”

“……?”

“황녀 전하께서는 정말 어른스러운 분이시군요.”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시스 전하 앞에서는 말을 못 하게 될 테니, 이 짧은 시간이라도 황녀 전하와 대화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오라버니 앞에서는 저에게 말을 못 하시는 데요?”

그 물음에 그는 처음으로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그건, 이시스 님께서…….”

“아이샤!!!”

그러나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시스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 둘은 이시스 오라버니의 근처에 온 상태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조금 놀랐을 정도로 컸다. 그는 우리를 보면서 엄청나게 기뻐했다. 정확히는, 나를 보아서 무척 기쁜 듯했다.

“오랜만이야!”

그렇게 말한 그는 바로 다른 사람들을 물리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소중하게 꼭 잡았다.

‘아.’

나는 아까 비온 공자가 이어서 하려던 말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에게 인사하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옆의 비온 공자를 배제하고 밀어 놓는 이 행동.

마치 나를 뺏기기 싫어서 수를 쓰는 어린애 같은 모습 아닌가.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하지만 밖으로는 얌전히 그를 향해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이시스 오라버니. 몸은 좀 어떠신가요?”

“아이샤가 걱정해 준 덕분에 모두 나은 것 같아.”

이시스 오라버니는 싱긋 웃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여느 때처럼 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그래요? 저도 전해 주신 편지는 잘 읽었답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시스의 얼굴에는 금방 홍조가 떠오르고 말았다. 그가 잡고 있는 손에도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는 걸까?’

나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그가 부끄러워하니, 어쩐지 나도 조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어쩐지 기쁘고, 마음속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나도. 편지 잘 읽었다.”

“…….”

“아이샤에게 처음 받은 편지라서 너무 기뻤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말로는 하기 어려운 진심들을 글로 담으니 왠지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편지 속에서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열심히 토로했었다. 그런 다음에 그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이다.

‘생각해 보니, 쑥스러울 만도 하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환하게 웃고 말았다.

“저도 오라버니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받아서 기뻤어요.”

그러자 이시스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한참 동안 웃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정말 사이가 좋은 두 분이시네요.’ 같은 말을 했다. 비온 공자가 우리 둘에게 ‘어디 한적한 곳이라도 가지 않겠느냐’라고 권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와 비온 공자, 이시스 오라버니는 정원의 한산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둘과 함께 앉아, 시종이 건네준 주스를 홀짝였다. 봄의 제전은 오늘부터 시작했지만, 진짜 중요한 행사는 이틀 뒤에 있다.

그것은 바로 이시스 오라버니가 후계자로서 제단 위에 기도를 올리고, 향을 피우며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다.

그날은 행사와 맞추어 아침나절부터 오후까지 거대한 축하 행진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저녁에 열리는 대연회는 일 년 중 가장이라고 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다.

오늘은 아직 전야제에 불과한 것이다. 그날이 무척 기대된다고 생각하면서 미소 짓는데, 저 멀리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붓꽃색 눈동자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차림의 어머니였다. 드레스 밑단에는 보석들이 잔뜩 달려 있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시스, 아이샤, 그리고 비온 공자.”

“어머니!”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비온 공자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는 어머니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어머니는 익숙하게 나를 안아 주며 우리에게 물었다.

“봄의 제전을 즐기고 있나요?”

“물론이지요!”

이시스 오라버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행사 곳곳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비온 공자가 거기에 첨언하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샤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주제를 정하는 데 큰 도움을 줬거든요.”

“어머니도 참…….”

나는 쑥스러움에 그저 미소 지었다. 내가 한 건 그저 작은 기획안을 꾸린 것밖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쁘기도 하고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이샤, 아까 내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뵈었단다. 아마 이 근처에 계실 텐데.”

“네? 두 분께서요?!”

나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경 쪽에서 살고 계시는 두 분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수도까지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네가 잘 크고 있는지도 보고 싶고, 오랜만에 수도 공기도 쐬고 싶으셨다지 뭐니.”

“어디, 어디 계실까요?”

나는 흥분해서 연회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기적같이, 눈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들이 보였다.

루셀 후작가의 두 분. 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 내가 그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분들도 우리를 발견하셨는지 화색을 띠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시스 전하, 안녕하십니까. 루셀 후작입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나에게 인사하기 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시스 오라버니 또한 내 어머니의 부모님 되시는 분들을 향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 그다음, 나를 본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환한 웃음을 머금으셨다.

“아이고, 잘 지냈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외할아버지는 그저 나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나를 쑥 들어 올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외할아버지의 돌발적인 행동에 비온 공자와 이시스 오라버니는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재밌어서 깔깔 웃을 뿐이었다.

주위의 시선도 상관 않고 나를 들어 올린 게 역시 외할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샤는 그새 더 컸구나.”

외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연푸른색 프릴이 겹겹이 겹쳐진 물망초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땋은 다음에 틀어 올려 보석 핀으로 장식했다. 나는 외할머니의 말씀에 첨언했다.

“키도 많이 컸어요. 이만큼!”

“그래. 그래.”

웃으며 대화하던 중, 나는 문득 다른 사람도 소개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시스 오라버니와는 인사를 했으니, 그럼…….’

나는 비온 공자 쪽을 가리켰다.

“이쪽은 비온 벨트모어 공자님이세요. 이시스 오라버니의 친우라고 하셔요.”

그런데 비온 공자는 누군가가 소개시켜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말에 냉큼 대답해 왔으니까 말이다.

“만나 뵙게 되어서 큰 영광입니다. 루셀 후작님. 후작 부인님.”

그의 인사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그런 그를 향해 외할아버지는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벨트모어의 공자님이시군요.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비온 공자는 말을 이었다.

“수도에서도 루셀가의 명성은 자주 들려옵니다. 꼭 뵙고 싶었던 분을 뵈어서 무척 기쁩니다.”

“루셀가의 명성이라니?”

“그야 물론, 그 대단한 기사단과 무력에 관해서입니다.”

비온 공자의 눈에서 처음으로, 투지 비슷한 것이 화르륵 타오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비온 공자는 오라버니와 같은 기사단에 소속해 있다고 했었지.

외할아버지는 그제야 그런 비온 공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험하듯이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탐색이 끝난 것인지, 외할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어리신데도 몸의 균형이 무척 뛰어나시군요.”

“영광입니다.”

외할아버지의 기사단은 국경을 수호하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기사단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수도 없는 싸움을 거쳐 온 외할아버지 자신의 무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비온 공자는 같이 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외할아버지를 순수하게 동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둘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비켜 줘야 하는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금방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이샤.”

“네?”

“황궁 구경이라도 시켜 주지 않겠니?”

외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비온 공자와 더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잠시 후에, 나는 외할아버지의 의도를 깨달았다. 외할아버지가 비온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하.’

외할아버지에게도 비온 공자에게 나름대로 호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저런 제안을 하신 거겠지. 거기에 번잡한 이곳보다는 조금 한적한 곳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눈을 덜 끌 테니 부담도 덜할 것이다.

나는 나 대로, 황궁을 구경시켜 드리면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고 말이다. 비온 공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외할아버지를 무척 동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요!”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 생긋 웃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배웅했다.

“아쉽지만, 저는 이곳을 통솔해야 해서 갈 수가 없네요. 즐겁게 다녀오세요.”

“네! 다녀올게요. 어머니!”

이렇게 해서 우리는 티파티가 열리는 정원을 벗어났다. 봄의 제전 기간에는 황궁에 손님이 많이 오기 때문에, 어딜 가도 외관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하는 기획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여러 가지 배웠기 때문에, 나는 일행들에게 열심히 이건 뭐고, 저건 뭐라는 등 설명을 이어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귀여운 모양이었다.

내 모습을 보던 외할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특이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아이샤, 이게 무언지 아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마치 수정구슬 같았다. 크기는 거의 내 손만 했고,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뭔가요?”

외할아버지는 대답했다.

“영상구란다.”

“영상구?”

“그래. 마법사들이 이번에 새로 개발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이걸 쓰면 이 영상구의 마력석이 다 닳을 때까지 풍경과 소리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화가들의 그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말이다.”

풍경과 소리를 저장할 수 있다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작은 구슬이 화가들이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써 볼까?”

“어떻게요?”

나는 그걸 요리조리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걸 사용할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거기, 엘미르 꽃 아치 아래에 서 보거라.”

엘미르 꽃 아치?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그 아래에 섰다. 내 키보다 조금 높은 아치에는 장미와 엘미르 꽃 아치가 섞여서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내가 그 아래에서 외할아버지를 멀뚱히 바라보는데, 외할아버지는 영상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약간의 조작 후에, 그 영상구는 조금씩 푸르게 빛나게 시작했다.

마침 바람이 불어서 아치에서부터 꽃잎이 살랑살랑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들어서 날아오는 연분홍색 꽃잎을 잡았다.

꽃잎은 내 머리카락에도, 내 옷자락에도 붙었다. 기분 좋은 꽃내음에 나는 살며시 웃고 말았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작게 속삭였다.

“멈추어라.”

그러자 영상구는 그 말과 함께 푸른빛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됐나요?”

“물론이다.”

“와…….”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영상구에서 푸른빛이 조금 났을 뿐인데 모든 게 끝났다니 신기했다.

‘역시 마법은 대단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외할아버지의 옆으로 돌아왔다.

“한번 재생시켜 볼까?”

으스대는 듯한 외할아버지의 말이 들리고, 영상구는 다시 푸른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영상구는 반쯤 투명해지더니, 그 안에서 풍경과 소리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있었다.

꽃 아치 아래에 서서 어리둥절해하는 모습. 그리고 바람이 사르르 불어오자 내가 꽃잎을 잡으며 생긋 웃는 모습까지.

나는 놀라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거울을 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야.’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이렇게 웃었던가? 나는 민망한데, 다른 사람들은 귀엽다고 난리였다. 특히 이시스 오라버니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 영상구, 복사는 안 되나요? 아니,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갖고 싶어요!”

오라버니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야기하자, 외할아버지는 콧방귀를 뀌었다.

“에잉, 이시스 전하께서는 아이샤를 매일 보시지 않습니까. 이건 제가 돌아가서 아이샤가 보고 싶을 때 보려고 일부러 제가 사 온 것입니다.”

“하지만!”

둘의 투닥거림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계속되었냐면, 황궁 구경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그 둘이 싸우는 게 창피해서 볼을 붉혔다.

그 다툼의 주제가 나라는 것이 더욱더 창피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아주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비온 공자였다. 그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공자?”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비온 공자가 변명하듯 서둘러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의 루비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그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가족 간의 사이가 무척 화목해 보인다고 생각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군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가요?”

“예. 특히나 저는 형제자매가 없기 때문에, 황녀 전하와 이시스 님의 관계가 조금쯤은 부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벨트모어의 공작가에는 후계자인 비온 혼자만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나는 새삼스럽게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마다 투닥거리고 있지만, 그만큼 사이가 좋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 어느새 내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네요.”

나도, 가족들과 있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 * *

봄의 제전 행사는 계속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 이튿날 곧바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 얼굴과 어머니 얼굴을 봤으니 이제 됐다나?

평화 협정을 맺은 지 몇 년째라, 지금은 조금쯤 쉬어도 괜찮을 텐데. 그런 철저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이끌어 내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시간은 지나, 드디어 제전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찾아왔다. 그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흰색 옷을 차려입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나도 흰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이시스 오라버니의 궁으로 갔을 때에는 궁이 꽤 한산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번에 처음으로 행사를 치르는 이시스 오라버니를 배려해 주기 위해 사람을 일부러 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샤, 왔니?!”

오라버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달려왔다. 그는 흰색 정장에, 금실로 자수를 새긴 겉옷을 입고 있었다. 한쪽 허리에는 예장용 검을 걸친 채였다.

원래도 오라버니는 무척 근사했지만, 그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더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그 옆에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흰옷을 차려입은 비온 공자도 있었다.

나는 제전 동안 비온 공자와 꽤나 친해진 상태였다. 겉으로는 조금 무뚝뚝해 보여도, 며칠 지내다 보니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라버니께서 비온 공자와 절친한 친구인 것인지 이해가 갔다. 나는 그에게도 인사를 한 뒤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그러자 오라버니는 방 한쪽에 있는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초록색 머리카락과 연초록색 눈을 가진, 대단한 미인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군지 안다. 바로 이시스 오라버니의 어머니인, 돌아가신 테티스 황후 폐하셨다.

“…….”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져서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아련한 눈으로 그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만약 어머니도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

“그다지 부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말야.”

그렇게 말하며 오라버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운 내세요.”

내 위로에 그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고마워, 하지만 걱정 말렴. 아이샤.”

그러면서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헤헤.”

그의 말에 나도 살짝 웃어 보였다. 가슴속에 따뜻한 파동이 물결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자, 비온 공자가 자리를 권했다.

“괜찮으시다면 자리에 앉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 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한 명 다가왔다. 그는 무척 숙련된 시종인지, 움직임 하나하나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차를 드릴까요?”

“응.”

나와 이시스 오라버니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트레이를 가지고 와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온 공자는 목이 마르지 않다며 거절했기 때문에, 찻잔은 나와 오라버니의 앞에만 놓였다.

“설탕을 넣으시겠습니까?”

설탕까지 직접 넣어 주는 걸까. 그런 건 내가 해도 괜찮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퐁, 퐁. 이시스의 찻잔과 내 찻잔에 설탕이 하나씩 사이좋게 들어갔다. 시종은 티스푼을 들어서 그 찻잔을 천천히 저어 주었다.

붉은 홍차색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을 유혹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색상에, 그윽한 향이었다.

“그러면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차 시중을 든 시종은 절도 있게 인사한 후, 총총 물러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 이시스 오라버니의 궁에 있었던가?’

차 시중을 들 정도라면 꽤 오랫동안 궁에서 근무한 사람일 텐데, 나는 그 사람을 처음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워낙에 궁에 사람이 많기도 하고, 행사가 생길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시종을 충원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낯선 얼굴이어도 딱히 크게 이상할 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홍차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따뜻하고, 향기로웠다. 김이 살짝 오르는 그 홍차의 향을 맡고 있으려니 온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긴장을 많이 해서 목이 탄 모양인지, 이시스 오라버니는 벌써 몇 모금 마신 뒤였다. 나도 오라버니를 따라, 기분 좋게 홍차를 들이켰다. 붉은색 액체가 나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어라?’

그런데 어째서일까? 평소와 달리 홍차의 맛이 좀 다른 것 같았다. 물론 차라는 것이 워낙 예민한 물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방법이나 보관 방법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큰 차이가 벌어지곤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홍차가 마치 약 같았다. 끝 맛이 쓰고, 텁텁했다. 나는 두어 모금을 더 마셔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잘못 우렸나? 아니면 상미기간이 지난 홍차?’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저만치 멀리에서 놀고 있던 루가 나를 향해 갑작스레 날아왔다. 그녀는 축제가 벌어지고 나서부터는 다른 정령들과 함께 노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인님!!

그녀의 얼굴은 희게 질린 상태였다. 반투명한데도 희게 질릴 수 있다니 신기하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홍차를 마시면 안 돼요!!!

“응?”

나는 남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루의 목소리가 급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루가 발을 동동 굴리는 것이 보였다.

―식물의 정령이 말하길, 그 차에 독이……!

독?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순간 나는 머리가 약간 멍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머리가 가동을 멈춘 것만 같았달까. 그리고 뒤따라 바로 코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얼굴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코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이시스 오라버니를 보았다.

“오, 오라버니.”

“아이샤?!”

그는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 때문인가? 아니, 나를 향한 걱정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중병을 앓는 병자처럼 창백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찻잔은 반쯤 비어 있었다.

“그 차, 더 이상 마시면…….”

그때, 목구멍이 이상하게 좁아지는 느낌이 났다. 속이 쓰리고 무척이나 아팠다. 참지 못한 나는 속 안의 것을 게워 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게워 낸 것은 새빨간 피였다.

“……피?”

나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안에서 흘러내린 피가 흰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는 뚝, 뚝, 흘러내려 나의 흰색 원피스 자락에도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시스와 나, 둘 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비온 공자가 의자를 드르륵 긁으면서 일어나 복도로 달려갔다.

“당장 어의와 신관을 불러라!!!”

급박한 목소리였다. 복도를 지나던 시종들이 깜짝 놀라 이곳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음독 사건이다!!!”

그런데, 느껴지기만 할 뿐이지 현실감은 없었다. 비온 공자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옆에서 들리는데, 어쩐지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진짜 이상한 기분이다.’

눈이 서서히 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것은 덤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눈에 담은 것은 이시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그 또한 피를 토하고 있는 주제에, 절박하게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시스 오라버니.’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이라니, 대체 누가 우리에게?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 *

비온은 그 누구보다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방금 우리에게 차를 따랐던 시종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그자를 빨리 잡아들여라!”

그러고 나서 그는 재빨리 담요를 가져와 두 남매에게 둘렀다. 체온이 식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민한 판단력과 행동력이었다.

‘독이 어디에 들어 있었던 거지?’

비온은 찻잔을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찻잎에서부터였는지, 아니면 설탕이었는지, 혹은 찻잔에서부터 이미 묻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시종을 잡아 심문해야 할 사항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이 제국의 빛인 황태자와 황녀가 쓰러진 것이다.

그것도 황태자가 이제 막 신의 제단 위에 기도를 올리려던 참에 말이다. 두 황족은 테이블에 몸을 묻고 있었다. 그들이 토해 낸 피가 흰 테이블보를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기랄.’

비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설마.’

설마, 아니기를 기도하면서, 그는 두 사람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짧은 순간 후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다행히도, 둘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얕은 숨이었다.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날 게 분명했다.

비온의 말을 듣고 마침 황태자 궁에 있던 아이리스 황후가 찾아왔다. 피를 흘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아이리스는 거의 실신할 뻔했다. 비온은 얼른 그런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비온 또한 덜덜 떨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두 남매의 동공을 확인하고, 기도를 확보했다.

그나마 그녀가 무가(武家)에서 태어나 다친 사람을 많이 보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응급 처치를 하는 그녀를 보며 비온은 물러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비온은 선생님의 말씀과 교본에 따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해 온 모범생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아주 다양했다. 검술, 웅변술, 마술, 궁정 예법…….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독을 마신 황족을 구조하는 법’ 따위는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고작 14살의 소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비온은 치료 마법을 할 줄 몰랐다. 소질이 없었던 것도 있고, 남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은 ‘공격’이라고 생각했기에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것만을 배워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토록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매일 같이 투닥거렸지만, 이시스는 자신의 주군이었고 둘도 없는 친우였다.

그리고 그런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인 아이샤. 만약에 둘 중 한 명이라도 무사히 깨어나지 못한다거나, 혹은 둘 다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

비온은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불길한 생각은 말자.’

부정적인 생각은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여서, 비온은 자꾸만 불안한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고, 입가의 붉은 피와 얼굴의 하얀색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몇 분 전까지,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고.’

비온은 누구인지 모를 사람에게 속으로 울분을 토해 내었다. 신인지, 혹은 무력한 자신에게인지, 아니면 독살을 시도한 범인에게인지 모른다. 그저 가슴이 너무 답답할 뿐이었다.

‘일단은 살리는 것에 집중하자.’

비온은 무거운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어의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 * *

황궁은 당연한 수순으로 벌컥 뒤집히고 말았다. 봄의 제전 날에, 황가의 두 남매가 독살을 당할 뻔하다니.

다행히 둘의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오늘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현장에 있었던 귀족들은 모두 소환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이고, 잡일을 맡던 사람도 예외는 없었다. 비온 공자의 지목으로, 두 남매에게 차를 가져다준 시종을 잡긴 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시종이 답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아마도 더 깊은 연결책이 있을 것이다.

그 연결책이 과연 누구이고, 배신자는 이들 중 누구일지. 완전히 뒤집힌 황궁에서, 봄의 제전을 위해 모였던 귀족들이 홀에 소환되었다.

황제는 침중한 얼굴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 남매를 모두 진찰하고 온 어의가 떨리는 발걸음으로 홀에 발을 내디뎠다.

그가 말한 결과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상대적으로 독을 조금 섭취하셨지만, 어리시기 때문에 더 그 효과가 강력하게 들으실 것입니다. 그, 그리고…….”

“그리고, 무엇이냐? 말을 똑바로 하거라.”

“……황태자 전하께서는 독을 많이 섭취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황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재촉했다. 어의는 무겁게 말을 마쳤다.

“……목숨이…… 위태로우실 것입니다.”

“허어어…….”

그 말에 사람들은 길게 탄식했다. 홀 안은 이내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마다 이 사건에 한 마디씩 보태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를 살려 내지 못한다면…….”

“안 그래도 손이 귀한 황가인데…….”

“황녀 전하도 마찬가지로 귀하신 몸이시고…….”

답이라곤 없는, 겁쟁이 개들이 짖는 소음일 뿐이었다.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우실 것입니다.’

‘거짓말.’

황제는 부정하고 싶었다. 이제껏 황제로서 수많은 일들을 해낸 그지만, 그 어떤 때보다 가슴이 크게 동요했다.

아이샤, 그리고 이시스.

심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그 둘이 독을 마셔 쓰러졌다. 게다가 둘 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한다.

‘…….’

황제는 입술을 세게 악물었다.

“남은 방법은 없느냐.”

어의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된 독을 밝혀내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대신관님께서 신성력을 써 주시는 것이온데…….”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통탄하고 말았다.

“하, 하지만 대신관님께서는 봄의 제전을 맞아 순례 여행을 떠나시지 않았는가.”

그랬다. 하필이면 대신관은 그를 따르는 수석 사제들을 데리고 봄의 제전 첫날 이후부터 대륙 이곳저곳으로 순례를 떠난 것이다.

연례행사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잡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누구도 짐작지 못했던 탓이리라.

그리고 아마 범인은 그것조차도 노리고 이 일을 계획했으리라. 아마 순례자들을 찾아서 다시 데려오려면 적어도 사나흘은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과연 아이샤와 이시스가 버텨 줄 수 있을까. 황제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후계자와 하나뿐인 황녀의 일이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최대한 빨리 주모자를 잡아서 쓰인 독을 밝혀내고, 그들을 해독해야 한다.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아이리스가 아이샤와 이시스의 옆에서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들었다.

그도 얼른 이 지긋지긋한 탁상공론은 집어치우고 그들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신성한 봄의 제전 날에. 그것도 제단에 오르려던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 말을 한 것은 북쪽에서 제전 때문에 올라온 백작이었다. 그의 얼굴은 영 못마땅하다는 듯이 찡그려져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독실한 신자로 유명했다.

“이것은 무척 불길한 징조가 아닙니까?”

그 말에 사람들의 말이 뚝 끊겼다.

“그건 무슨 뜻…….”

“저주가 아니겠습니까. 후계자가 자격이 없다든가, 혹은 제물이 모자랐다든가…….”

그는 침을 튀기면서 자신의 의견을 토로했다.

‘맙소사.’

그의 곁에 있었던 귀족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경악하며 그의 곁에서 슬슬 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겁이 없는 것이 광신도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물론 귀족들도 빛의 신을 마음 깊이 믿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옆에 있는 황제였다.

그런데 감히 어전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 그 백작으로부터 더더욱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를 피한 사람들 덕분에 백작의 주위로 동그란 공터가 만들어졌지만, 백작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였다. 그 헛소리가 황제의 귀에 들어갔음에, 황제는 직접 말을 끊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제멋대로 지껄이던 백작이 황제의 말에 찔끔하고 말았다.

“아, 저의 소견은…….”

“그대는 마치 내 아들이 불길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것이 아니라. 다만 불길한 징조라는…….”

황제는 푸른 눈을 들어 그를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그 모습에 백작은 감히 말을 더 이을 생각을 못 했다. 그런 그를 황제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피를 보는 것은 참겠다. 네 말대로 오늘은 신성한 제전 날이니.”

“……가, 감사…….”

“하지만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황족을 모욕한다면, 다음에는 네 혀를 잘라 개들의 밥으로 주도록 하마.”

그 말에 백작은 히익, 하고 말았다.

“제, 제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그도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려운지, 얼른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피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황제가 이 자리에서 그를 즉결 처형했더라도 다들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만큼 절대적인 황권을 휘두르던 그였으므로.

하지만 자식이 태어난 이후로 그도 많이 부드러워진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귀족들은 백작을 한심한 눈으로 보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늙으려면 곱게 늙어야지.”

“에잉, 쯧쯧…….”

하지만, 입을 가린 손 사이로 백작이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저주.’

앞으로 그가 내세울 단어는 이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진범의 연결 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작, 그와 누가 이어져 있는지 일반 사람들은 짐작도 못 할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세울 명분이다. 대중들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오히려 더 혹하는 법이니만큼.

후계자인 이시스에게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어디 보자, 불길한 힘으로 어미를 죽이고 자신마저도 신의 철퇴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어떨까.’

테티스 전 황후가 출산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을 못 살고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것과 함께, 오늘의 사건을 걸고넘어진다면 대중들은 혹하고 마리라. 앞으로 그가 내세울 것은 이러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덤으로 황녀까지 걸린 것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루미나스 신이시여. 나의 빛의 신.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은 빛의 신 따위 전혀 믿고 있지 않은 주제에.

* * *

한편, 그 시각 독을 먹었던 아이샤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방 안에는 은빛의 머리카락을 부스스하게 흐트러뜨린 여인과 어의, 그리고 사제가 앉아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아이리스 황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게 질려 있었던 아이샤의 얼굴은 신관과 어의의 도움으로 다시 혈색을 어느 정도 되찾은 차였다.

하지만 그 대신, 열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런 아이샤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손수 갈아 주며 딸을 간호하고 있었다. 어의가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독을 어린 나이에 드셨으니, 그 효과가 더욱 잘 듣는 모양입니다.”

“대신관님은, 대신관님은 어디에 가신 거죠? 이럴 때야말로 그분의 신성력이 필요한데.”

아이리스는 참지 못하고 다시 주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마법사들도 이 독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근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은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게 하는 것에만 그쳤다.

이럴 때에는 아예 독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는 신성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대신관, 그는 지금 부재하고 있었다.

사제는 아이리스를 향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봄의 제전을 맞아, 대신관님을 비롯하여 상급 사제들께서는 순례를 떠나셨습니다. 급히 사람을 불러 다시 그분들을 맞으러 가고는 있지만…… 지금 당장은…….”

그 말을 들은 아이리스는 아예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샤…….”

대신관이 올 때까지, 아이샤가 버틸 수 있을까? 이 작은 몸으로 피를 토했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아이샤…….”

아이리스의 눈은 다시금 충혈되고 있었다.

* * *

아이샤는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주 어둡고 어두움 어둠이었다. 손가락으로 어둠을 헤집던 아이샤는 깨달았다.

‘아, 이곳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장소. 바로 이곳은 지하 감옥 안이었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아이샤는 갑자기 족쇄에 묶인 것처럼 휘청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옥죄어 오는 좁은 방을 느낄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배가 고팠다. 목도 말랐다. 아이샤는 다시 14살인 알리사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날은 알리사가 ‘썩은 물만 먹으라는’ 명령을 받은 이후로 딱,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간수는 개구멍을 통해 그녀 몫의 물을 넣어 주었다.

알리사는 조급하게 그곳에 팔을 뻗다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물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물이 냄새나고 더러운, 썩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을 마실 거야. 물을…….’

그러나 너무 조급하게 굴었던 탓인가. 어둠 속에서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었던 탓인가. 알리사는 간수가 준 물컵을 손으로 쳐버리고 말았다.

‘……아, 아!!’

물이 쪼르륵,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 돼.’

알리사는 황급히 컵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물은 모두 엎어지고 만 채였다. 그녀는 개처럼 땅이라도 핥아먹을까 했다. 하지만 흙바닥이었던 탓에 물은 이미 다 땅바닥에 스며든 채였다.

‘…….’

허망했다. 이제는 나올 위액조차 없는지,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

사형이 나흘 후라고 말했으니, 내일이면 이곳을 나가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날은 삶의 마지막 날이 되겠지. 알리사는 메마른 웃음을 입에 담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배가 고파서? 목이 말라서? 지하 감옥이 차갑고 축축해서? 혹은, 아무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아서?

알리사는 감옥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가족들은 어째서 변해 버린 걸까?’

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왜 마리안느의 말만 믿고, 나는 믿어 주지 않는 걸까?’

참으려고 했지만, 알리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 버렸다. 믿었던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이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죽고 싶어.’

알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복수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빠른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죽고 싶어.’

어느새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긁어 대고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자해 행동이었다.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미쳐가는 알리사로서는 그런 행동이 차라리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을까. 그녀는 문득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말?

그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놀라고 말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누구지? 자신이 이제 정말로 미쳐 버린 것일까? 알리사는 홀린 듯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는 조근조근하고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실은 그렇지 않잖아.

‘…….’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

알리사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 말이 맞았다.

‘……맞아.’

알리사는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사실은 물어보고 싶었다. 복수 이전에, 죽음 이전에, 가족들에게 가서 어째서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왜 나를 죽이려 했냐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 믿어 주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모두가 이제 나를 미워하는걸. 다시는 내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하는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몸에 이렇게 수분이 많이 남아 있었나 의아해질 정도로. 그런데 그때, 확신에 찬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괜찮아.

‘괜찮다고?’

알리사는 눈물이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를 믿어 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있어.

‘…….’

그게 누구지?

―그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곳으로 오라고.

알리사는 고개를 찌푸리며, 그런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라키아스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족들 이미 그녀를 믿지 않는다.

몇 있는 친구들은 자신이 잡혀서 죽어 간다는 것도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거짓말이야.’

알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앞에서 불꽃이 터지는 환상이 펼쳐졌다. 알리사는 깜짝 놀랐다. 어둠이 마치 밤하늘 같았다. 그곳에서는 색색의 불꽃이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다.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기도, 그리고 아주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 그때. 자신은 분명히 마음을 열기로 했었다.

‘……그게 뭐였지? 누구에게였지?’

알리사는 필사적으로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 답을 알아낸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영상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오랫동안 지겹게 바라보았던 하얀 천장, 가볍게 흔들리던 요람, 소년의 노랫소리. 그리고 사랑스럽게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어머니의 손, 아버지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빛무리 같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길잡이가 되어 주는 등불처럼, 머릿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알리사는 깨달았다.

‘있었구나.’

나를 믿어 주는, 사랑해 주는 가족.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알리사가 아니야.’

그녀는 더 이상 알리사가 아니었다.

‘아이샤야. 아이샤 드 엘미르. 엘미르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야 해.’

―그래, 맞아.

목소리는 부드러운 한낮의 바람처럼 그녀를 감쌌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그녀가 알리사가 아닌 아이샤라는 것을 자각하자, 족쇄처럼 그녀를 옥죄고 있던 좁고 축축한 지하 감옥은 사라졌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었고, 걸을 수도, 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아이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이 어둠 속이 아니라, 환한 빛 속으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어…….’

자신의 손과 다리는 무력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둠 속에서 나갈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망스럽게 그녀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걸어 보자.’

그러다 보면 무엇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샤의 예상은 적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에서 빛무리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기나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나 뛰었을까.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그곳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째서지?’

한참 동안 달렸기 때문에 숨이 너무 찼다. 그녀는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보고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눈물이 다시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던 아이샤는 눈물을 닦기 위해 손을 들었다.

‘울지 말자.’

아이샤는 곰곰이 빛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곳으로 나갈 수 있을지, 깊게 생각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빛, 빛이란 무엇일까?’

아이샤에게 있어서 빛이란 그녀를 포근히 감싸 주는 따뜻한 무언가였다. 마치 그녀의 가족처럼.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빛이란 가족인 걸까?’

하지만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아니야.’

그 생각이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을. 지금까지 자신을 아껴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인해 받은 빛들.

그 빛들은 그녀의 몸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과거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고 지금 비틀거리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부터 받은 빛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빛을 믿자.’

아이샤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녀에게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나는 지금 아이샤잖아.’

알리사라면 할 수 없지만, 아이샤라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녀는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강하게 마음속으로 그녀의 ‘정령’을 불렀다.

―루!!!

그러자 그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세상이 일변했다. 눈이 온통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 공간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아름다운 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아이샤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한곳, 그녀의 세상에 어두운 부분은 남아 있었다. 캄캄한 지하 감옥의 기억들. 하지만 아이샤는 확신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그때에는…….’

좀 더 당당히 마주할 수 있으리라. 더 이상 떨며 울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빛을 따라서 그녀는 걸어가리라.

그렇게 아이샤는 눈을 떴다.

* * *

“……으음.”

눈앞이 흐릿했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몇 번이나 눈을 더 깜빡여야 했다. 그러고 나니, 확실하게 시야가 트였다. 트인 시야 앞으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 머니?”

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샤!”

그녀는 마치 죽었다가 깨어나온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했다.

‘아니, 죽었다가 깨어난 게 맞나?’

아무래도 나는 생과 사의 중간에서 헤맨 것 같으니까 말이다. 하여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나를 강하게 껴안아 오는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어머니의 볼이 어깨너머로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아이샤. 아이샤…….”

악몽 속에서 가장 그리웠던 것이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다시 깨어나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 말에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어머니의 체온이 따뜻했다.

나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 눈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이것은 기쁨의 눈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나에게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보았던 것은, 이시스 오라버니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오라버니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머니…….”

나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었나요?”

나보다도 더 많은 홍차를 마셨던 그다. 그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만큼 그의 소식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내 말에 어머니가 흠칫,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어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고개를 돌려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씩 마주 보았다. 그중에서 나는 신관을 한 명 발견했다. 그는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온 것일까? 나는 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잘 살펴보니 그의 옷은 평사제들의 옷이었다. 내 질문에 그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이시스 전하께서는…….”

“…….”

“황녀 전하보다 더 많은 독을 섭취하셨기에, 대신관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분께서는 봄의 제전을 맞아 전국으로 치료 순례를 떠나셨습니다.”

“……그런…….”

“지금 급히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하얗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그러면, 이시스 오라버니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이 막막한 현실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냉정한 목소리가 나에게서 흘러나왔다.

“……대신관님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실 예정이죠?”

“아마 빨라도 내일 오후쯤에나 오실 것 같습니다.”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방 안의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

나는 홀린 듯이,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참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억눌려져서 나왔다.

“오라버니는, 오늘을 견딜 수 있나요?”

홍차를 적게 마셨던 나도 겨우겨우 이렇게 일어났다. 짐작건대, 내가 일찍 일어난 이유에는 빛의 정령의 도움도 있을 것이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시스 오라버니는…….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상처받지 않게 배려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그 뜻은 명확했다.

나는 곧장 결심했다.

‘루.’

나는 마음속으로 루를 불렀다. 아까 내가 어둠 속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루는 나에게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소환된 그 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다. 항상 나를 향해 밝게 웃으며 달려오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 한구석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애가 얼마나 내 걱정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주인님,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요……!!

훌쩍훌쩍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나는 양손으로 따뜻하게 안아 올렸다.

‘괜찮아, 이제 깨어났잖아.’

―다시는, 다시는 이렇게 위험해지지 않도록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그치만 그것보다…….’

나는 결연한 눈으로 루를 바라보았다.

‘내가 중급 정령을 지금, 소환할 수 있을까?’

루는 멍한 얼굴을 했다.

―지금 당장이요?

‘응, 지금 당장.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안 돼요!

루의 반발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강경한 그 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지금 당장이라니요.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력도 부족하셔서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력, 그놈의 마력이 문제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정령의 역사’에 쓰여 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만약 마력석을 쓴다면? 그래도 어려울까?’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 그러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대답을 들은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중급 정령과 계약하겠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서.

하급 정령은 평사제의 신성력과 비슷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중급 정령과 계약해서 오라버니를 치유해야 한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이시스 오라버니의 숨을 붙이는 게 겨우겨우일 뿐이라도 좋다.

적어도 내일 대신관님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지키고 있겠다. 지금까지 나는 정령의 능력을 숨기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가족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

내가 나중에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서 오라버니를 잃게 된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리라.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머니는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아이샤! 더 누워 있어야 해!”

나를 말리는 것은 어의도 마찬가지였다.

“화, 황녀 전하. 더 누워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약도 드셔야 합니다. 이건 기력을 보충해 주는 약으로…….”

나는 어의가 건네는 약을 흘끗 쳐다보았다. 커다란 찻잔 위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이 가득 따라져 있었다.

‘……윽.’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것 같았다. 이런 것을 약이라고 가져오다니.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그것을 입에 담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꿀꺽, 꿀꺽.

‘……끔찍한 맛이야.’

다 마시고 난 나는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혀끝에 남은 맛을 지워 버리기 위해 머리를 털고 난 뒤, 멍하니 선 사람들을 향해 주문했다.

“제 침실 안에 있는 고대어책을 가져다주세요. 테이블에 놓인 두 권이 있으니 아마 보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마력석이 하나 필요해요.”

“마력석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그건 무슨…….”

사람들은 마법사도 아닌 내가 마력석을 이야기하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마력석을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지금 당장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요. 한시가 급하다고요.”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였다.

“저,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어의가 소리친 것은.

“마검사인 비온 공자님께서 이곳에 계시지요. 그분께 황녀 전하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면 빌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온 공자님이 아직도 여기 계시나요?”

나는 그 질문을 했다가, 다음 순간 깨달았다. 이시스 오라버니와 그는 매우 절친한 사이다. 아마 그는 친구가 걱정스러워서 이곳에 남았으리라.

“부탁할게요. 어의.”

내 말에 어의와 신관이 재빨리 뛰어나갔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샤,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니?”

나는 심호흡을 했다.

“……제 곁에 계셔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또,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내 옆에는 루도 함께였다. 루는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내 왼쪽 어깨 위에 앉아서 나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바람 같이 달려갔던 어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온 공자에게서 마력석을 빌려 왔다.

사제도 마찬가지로 내 고대어책을 들고 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책의 한쪽을 펼쳐서 ‘중급 정령 소환진’을 꺼냈다.

그리고 한 손에 마력석을 굳게 잡고, 다른 한 손은 소환진 위에 가볍게 올렸다. 힘들긴 했지만, 제대로 주문을 외울 수 있었다.

‘이 땅과 하늘과 바람과 불과 물을 이루는 정령들이여. 나에게 와서 힘이 되어다오.’

그러자, 내 몸속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하지만 이내 가파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막혀 있던 수도꼭지가 풀린 듯이 말이다.

‘……허억, 허억.’

그게 생각보다도 훨씬 더 벅찼던 탓에,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힘들긴 해도 이대로만 간다면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가 내 행동에 경악하고 있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아, 아이샤! 괜찮니?!”

나는 입술을 반쯤 깨물었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반투명한 여성의 모습이 조금씩 내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의 중급 정령이었다. 소녀 같은 루와는 달리, 그녀는 어딘가 침착한 느낌을 주는 숙녀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나타내던 그녀는 이윽고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이곳에 드러내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공중을 타고 울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의 이름은 ‘리미에’. 빛의 중급 정령입니다.

드디어, 소환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아이샤라고 해.’

나는 계속해서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나에게 질문했다.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물어볼 정도로 내가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몸에 엄청나게 무리가 가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루가 이전에 친화력과 마력을 그릇과 물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자면, 나는 그릇은 크지만 물은 적은 경우였다. 어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선천적으로 부족한 타입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당장 마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급 정령을 소환하려 한 나는 힘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력석의 도움을 받아도, 내 안의 물이 모자라다 못해 바짝 메말라 나의 생명력까지 갉아먹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손안의 마력석을 콱, 쥐었다. 그렇게 하면 힘이 더욱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거의 쏘아보다시피 리미에를 바라보았다.

‘나와 계약하자.’

―좋습니다. 저 리미에는, 아이샤 님의 정령이 되기로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루와 마찬가지로 내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점점 그녀의 모습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아이샤, 그 요정은 뭐니?!”

“요정이 아니에요.”

나는 메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정령이에요.”

어머니가 숨을 들이켰다.

“정령? ……그럼 네가, 정령사라는 말이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시간만 있다면 어머니에게 지금껏 정령의 능력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의 능력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리미에를 소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으리라.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야 해요. 정령의 힘으로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에 어머니는 입을 한참 동안 다물지 못했다.

“위험해, 아이샤. 넌, 아직도 몸이…….”

“제발 부탁이에요, 어머니!”

나는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내가 아니면 안 돼…….’

한시라도 빨리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가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를 걱정시키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시스 오라버니를 구하는 것이 더 먼저였던 것이다.

“제가, 저만이 이시스 오라버니를 도울 수 있어요.”

내가 힘주어 말하자, 어머니는 잠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복도를 걷는 동안 나는 온통 주위의 시선을 받고 말았다. 쓰러졌다는 황녀 전하가 떡하니 걷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정령을 잠시 역소환시켜 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 정령까지 매달고 있었더라면 나는 자초지종을 묻는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걸어나갈 수가 없었으리라.

‘하…….’

나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무리한 결과였다. 호위기사가 나를 안아 옮겨 주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황녀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싶기도 했고, 괜히 어머니 앞에서 더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향해 어머니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나를 안아 올리셨다.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귀부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가느다란 팔목에 티스푼 하나 들기 어려울 것 같은 손목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가뿐히 들어 올렸던 것이다. 어머니가 무가 출신이라는 것이 그저 배경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 안겨 있으려니 안정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에게서 나는 포근한 향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덕분에 나는 다시 혼절하기 전에 이시스 오라버니가 있는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침실 앞은 시종장이 지키고 있었다.

“……황녀 전하?”

그는 나를 보고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모,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에……?”

“지금 당장. 오라버니를 보아야 해요.”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러자 그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했다.

“……황녀 전하. 오라버니를 생각하시는 마음씨는 잘 알겠습니다만, 지금 전하께서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러니…….”

“그러니 내가 가야 한다는 거예요.”

“예?”

나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시종장을 옆으로 떨치고 문을 직접 열었다. 그런 나의 뒤로 어머니가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아버지, 평신관과 비온 공자가 있었다.

“……아이샤?!”

나를 본 사람들은 매우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아니, 몸은…….”

아버지가 물어 왔지만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평신관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시스 오라버니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지만, 그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의 얼굴이 매우 창백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바로 선언했다.

“제가 이시스 오라버니를 돕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화, 황녀 전하께서 이시스 전하를 도우시겠다니, 대체 어떻게……?”

역시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리미에의 이름을 불렀다.

‘리미에.’

그러자 아름다운 숙녀의 모습을 한 리미에가 공중에서 튀어나왔다.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내 뒤에 있던 어머니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 그 요정은……?!”

평사제가 말을 더듬었다. 신관인 그도 정령의 정체를 간파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빠르게 리미에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 정령은 네가 소환한 것이더냐?”

과연 아버지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빛의 정령이에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들에게는 치유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아마 제가 신관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감탄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바로 이시스 오라버니의 옆에 앉았다.

불쌍한 신관의 입술은 파래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스 오라버니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매우 창백했던 것이다.

입술을 깨문 나는 그를 향해 손을 공중에 대었다. 단 한 번도 정령의 능력을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리미에의 지식이 나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왔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 안의 정령력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그것은 마치 신성력처럼 하얀빛으로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제발.’

나는 속으로 기원했다. 기도를 드리는 존재는 빛의 정령왕인 루미나스였다. 그가 만약 자비로운 정령왕이라면 내 기도를 들어주리라.

‘애초에 봄의 제전 때문에 순례를 떠나서 대신관이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나를 도와줘야 한다. 완전히 억지 논리이지만 나는 절박했다.

죽기 살기로 내 안의 힘을 모조리 끌어내자 점점 더 빛이 밝아졌다. 이어지는 빛에 오라버니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해 갔고, 새하얗던 얼굴에 핏기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어쩌면 그를 깨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시스 오라버니.’

나는 땀을 흘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온 공자의 마법석을 꽉 쥐고 있었던 탓에 손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으, 윽.”

‘……!!’

나는 이시스가 낸 신음 소리에 뛸 듯이 기뻐하고 말았다. 신음 소리를 냈다는 것은 적어도 육체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내 안의 힘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도.

힘이 모자랐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 버리고 말았다.

‘죽으면 안 돼.’

뜨거운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그랬다.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혹시나 죽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닦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저 내 온 힘을 다해서 빛을 내뿜어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잔인하게도 계속 흘러갔고, 이시스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모든 힘이 소진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틀거리던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침대에 털썩, 반쯤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샤!”

숫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보지는 않았지만 내 얼굴이 지금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은 짐작이 되었다.

나는 가쁜 숨을 쌕쌕거리며 내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게 달려왔다.

“……아이샤. 이제 그만 쉬자꾸나. 넌 최선을 다했어.”

어머니가 나의 등을 쓸어 주었다. 반쯤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얼굴이 창백하구나. 아이샤…….”

그 둘은 나를 위로하고, 그만 쉬게 해 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나로서는 부족했던 것일까?’

대신관님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좋다. 그를 돕고 싶었다. 살리고 싶었다. 오늘을 버틸 수 있도록. 그리고 어쩌면 그를 깨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과신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물은 쉼 없이 떨어졌다.

‘이시스 오라버니…….’

걱정과 불안으로 도무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여기는, 저승인가?”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많이 쉬어 있기는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의 목소리다. 나는 홀린 듯이 얼굴을 들었다.

그는 초록색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아니, 저승이라면 온 가족이 여기 있을 리는 없지.”

그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 너무 많은 기운을 써서 온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이샤, 넌 괜찮아?”

오라버니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시 돌아온 혈색이 똑똑히 내 눈에 담겼다.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왜, 왜 울고 있어? 역시 꿈인가?”

그 맹한 얼굴을 보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아쉽지만, 이승이랍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우리 둘을 동시에 껴안았다.

“이시스, 아이샤…….”

“흑, 흐윽, 흑……!!”

이시스 오라버니는 영문도 모르고 우리를 토닥였다. 아버지는 가까이 다가와 그런 우리를 꼭 껴안았다. 우리 가족은 결국 눈물바다에 풍덩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행이야.’

나는 울면서 생각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죽지 않아서.’

나만 살아난 데에는 의미가 없다. 이렇게 온 가족이 함께할 때에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이다.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다들 울지 마세요. 아이샤, 아이리스 님…….”

이시스 오라버니는 곤란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 * *

나는 이시스 오라버니가 어떻게 깨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내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는 한편,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이제서야 그 고대어책에 대한 비밀이 풀렸구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그 책을 숨겼던 일이 다시금 생각나서 조금 찔리고 말았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살아난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물론, 해결되지 않은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윽고 우리가 모두 눈물을 그치자, 같은 공간에 있었던 신관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황녀 전하.”

그의 얼굴은 매우 굳어 있었다. 올 것이 찾아왔기에 나는 눈물을 닦고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그는 나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강력한 치유력이라니. 혹시, 황녀 전하께서는…….”

그의 입에서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성녀님이십니까?”

“아니요.”

그의 물음에 나는 단칼에 대답했다. 나의 빠른 대답에 그는 더더욱 당황한 듯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아까도 말했듯, 정령사입니다.”

가족들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채, 루를 소환했다. 다시 리미에를 소환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였지만, 루를 잠시 동안 소환하는 것이라면 가능했던 것이다.

소환된 루는 자리가 자리임을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훨씬 차분한 태도로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빛의 하급 정령인 루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루를 보고 감탄했다.

“어머나…….”

“아이샤, 네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앞으로 네가 훌륭한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약속하마.”

생각보다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정령사라는 것에 펄쩍 뛰며 놀란다고 해도 이해할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그 반응에 안심하기도 잠시.

“하, 하지만 그 빛의 힘은…… 저희 빛의 신도들이 쓰는 힘과 거의 똑같은 듯이 보였습니다!”

신관은 흥분한 나머지 침까지 튀겨대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한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그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나온 결론이란 이러했다.

“빛의 신인 루미나스 님께서는, 빛의 정령왕이시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

“소환한 정령에게 들었어요. 루미나스 님께서는 빛의 지배자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빛을 관장하신다고요. 그래서 빛의 정령을 다루는 저도, 루미나스 님을 믿는 신관님들께서도 그분의 권능을 조금씩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당장은 그렇게만 말해 두었다. 현재까지 계속해서 루미나스가 신이라고 믿어 왔던 사람들 앞에서 사실 ‘루미나스는 정령왕이었습니다!’라고 말한들, 믿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황녀라지만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러니 그가 빛의 신인 동시에 정령왕이라는 직위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설명을 하는 게 제일 합리적일 것 같았다.

신관은 경악한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납득하는 듯했다. 내가 한 말이 이치에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 말을 남기고 한참 생각하던 신관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씀대로라면 황녀 전하께서 저희 신관들과 동일한 힘을 쓰신다는 겁니다. 저희 측에서는 황녀 전하께 성녀, 혹은 그에 준하는 직위를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령의 힘을 보이기로 했을 때, 남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신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만…….”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저는 신성력, 혹은 정령력이 있다고 하여 성녀의 칭호를 받는다고 하여도 속세를 떠나 종교인에 귀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 황궁, 그리고 가족들의 곁이니까요.”

어느 정도 불안하게 나와 신관의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만약 성녀라는 지위를 받게 된다면 나는 아예 신전과 무관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 가족들의 옆이라는 것을.

신관과의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비온 공자였다.

“……흠흠.”

그는 조용한 가운데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시스 오라버니는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온 공자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 비온. 너도 있었구나.”

“……정말 너무하시군요.”

비온 공자는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가 너무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이시스 오라버니는 다른 곳을 볼 틈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비온 공자는 그 나름대로, 황제 폐하가 계신 곳에서 함부로 먼저 입을 열기에 좀 그랬겠지.

“이야기도 정리된 것 같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도 무사히 나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볼까 합니다.”

가만히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본 일은 한동안 함구하도록 하여라.”

“물론입니다. 그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비온 공자는 진중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일단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막아 두시려는 듯했다. 내 생각에도 그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하.”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긴장이 풀려서일까, 갑자기 다리가 휘청했다.

“……앗.”

털썩! 다행히 나는 근처에 있던 탁자를 잡았던 덕분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샤! 괜찮니?”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얼른 나를 부축했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했지만 잘 먹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걱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시스도, 아이샤도 모두 쉬어야 하네.”

아버지의 말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와 오라버니는 각자의 궁에서 한참 요양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이만 방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이시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는 그 푸른 눈을 들어서 이시스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오라버니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요.”

“…….”

“아버지께서는 저와 아이샤를 감히 해하려 했던 그 치들을 잡아들이고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해 주시겠지요.”

그 초록색 눈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아, 나는 그제야 그도 무척이나 분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처음으로 본 그의 단호하고 냉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맞다.

귀족들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독살 사건의 주모자를 찾아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둘이 다시는 이러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아버지는 오라버니의 말에,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얹었다.

그 커다란 손이 오라버니의 금빛 머리카락을 다 덮을 듯이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오라버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오라버니는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물론이다. 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그 주모자를 찾아내마.”

“…….”

“그리고 절대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자의 혀와 사지를 자르고, 그의 친지와 식솔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 죽이고, 그 목을 성문에 걸어 까마귀들의 밥이 되도록 하마.”

아버지의 말이 계속될수록 그의 몸에서 점점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오싹했다. 등 뒤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이다. 이 사건에 가장 화가 난 장본인 중 한 명이 아버지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너희들은 몸이 낫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마지막 말을 하며, 아버지는 살기를 갈무리했다. 이내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나른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시스는 아버지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

“그들의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독약을 먹이게 하지요.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그렇게 말하며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러면 공평할 것 같습니다.”

비온 공자가 혀를 내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숨을 잠깐 참았다가, 다시 들이쉬었다. 아버지는 씩 웃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이시스 오라버니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더니 말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루어 주마.”

이렇게 해서, 그날 하루는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이시스 오라버니를 치료하고 난 이튿날 도착한 대신관님은 우리에게 직접 신성력을 퍼부어 주셨다.

평사제에게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나를 대할 때에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마 앞으로 신전에서 회의를 한 뒤, 그 결과를 알려 주리라.

어쨌거나 나는 당장이라도 모든 몸이 나은 것 같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엄격한 명령에 따라, 약 3주 동안 엄청난 요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침실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부산스럽게 내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시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모, 아무리 그래도 침대 위에서 밥을 먹는 건 조금…….”

아무리 내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황녀 전하. 그게 무슨 소리세요.”

하지만 유모는 내 말에 금세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연약한 몸에서 피까지 토하신 분이…… 안 됩니다. 황녀 전하는 절대안정이셔요. 황후 폐하께서도 황녀 전하가 침대 위에서 드시는 것만 허락하셨습니다.”

“……알겠어.”

내 침대 위로 테이블이 올려지고, 음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나는 유모에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한 숟가락씩 유모가 떠먹여 주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내가 더 이상 아기도 아니고…….”

“황녀 전하!”

유모는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제발, 이 유모가 황녀 전하의 절대안정을 돕게 해 주세요. 숟가락같이 무거운 건 들 생각도 아예 마셔요.”

“……아, 알겠어. 알겠다니까.”

‘……숟가락이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는 거야.’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밥을 받아먹었다. 내 모습은 숫제 어미 새에게서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였다.

유모는 혹시라도 내 식도가 다칠세라,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게 식사를 썰어 주었다. 당연히 식사 시간은 무한정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유식을 먹던 아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하.

그 어마어마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아는가? 식사 시간 후마다 어의는 내 맥을 짚으러 왔다.

어의가 눈을 감고 맥을 짚은 후 처방전을 쓰고 나면, 몸에 좋다는 약이 코스별로 줄줄이 등장했다. 약들은 아주 진귀한 약초들로 만든 것이었다.

얼마나 귀하냐면, 그 약초의 무게가 동량의 금, 은값과 같았을 정도랄까? 시종들은 약이 나오자마자 얼른 내 손에다 그 잔을 쥐어 주고, 그럼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약을 바라본다.

냄새부터가 역했다. 나는 죽은 몸이다, 라고 생각하고 그 약을 들이켜면…….

역시 돈값을 하는 약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약은 딱 금과 은의 맛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식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 마시고 난 뒤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에게 독살을 시도한 놈이 증오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뭐.’

나는 눈을 내리깔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결국 범인은 잡혔으니.’

약간 가슴이 씁쓸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범인을 잡아 주었다. 범인은 어느 광신도로 유명한, 북쪽 영지의 백작이라고 했다.

그를 고문한 결과, 사실 후계자인 이시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일을 계획했다는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신께서는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거라나?

웃기는 개소리다. 그래도 워낙에 그가 광신도로 유명했던 인물이라, 이유는 이해가 갔다.

반역죄를 저지른 자이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과 친지는 물론이고, 식솔까지 모두 잡혀서 떼죽음을 당했다.

두 명의 귀중한 황족을 죽일 뻔한 죗값에 비하면 매우 값싼 것이라고 아버지는 선언했다고 한다.

자신의 자비로움에 감사하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영광으로 알라며. 성문 앞에는 그들의 목이 걸렸고, 한동안 그 근처에 까마귀와 벌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 정령들과 시녀의 입을 통해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다.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직접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유모도 그저 ‘다 잘 해결되었어요. 황녀 전하.’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백작, 단순히 이시스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한 일이 맞을까?’

그렇게 큰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로는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은 설명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이시스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나까지 독을 먹일 이유는 뭐란 말인가.

차라리 엘미르 황족의 씨를 제거하려고 했다면 말이 되겠다. 게다가…….

‘그 독.’

그 독이 가장 걸렸다. 그 독은 내가 아는 독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독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심장이 아파 오는 것 같아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마리안느가 마신 독이, 그것이었지.’

나의 옷장에서 그 독약이 나왔다고 전생의 황제는 나를 그렇게 추궁했었다.

‘…….’

모든 것이 수상했다. 마치 나를 빼놓고 이야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후.’

나는 답답한 나머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때였다.

“황녀 전하!!!”

유모가 다시 울먹인 것은.

“왜, 왜 가슴을 부여잡고 계시나요? 혹시 심장이 아프신가요? 방금 한숨은 왜 쉬셨나요? 가슴이 답답하신 건 아니죠? 아니, 지금이라도 어의를 다시 불러서 진찰을……!”

“자, 자, 잠깐만. 유모!”

당장 방을 달려나갈 뻔한 유모를 간신히 잡았다. 다음에는 내가 눈만 깜빡여도 ‘왜 눈을 여러 번 깜빡이시는 건가요? 혹시 눈에 문제가 생기신 건 아니시죠?’라고 물을 사람이다.

나는 이번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과보호도 이 정도면 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요양 3주 차가 된 이후로 매일 30분간의 산책이 주어진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나는 황녀궁 뒤쪽의 동산으로 가 햇볕을 쬐었다. 사실 이걸 허락받는 데에는 어의의 도움이 컸다.

햇볕 쬐기가 몸에 좋을 거라고 하면서 어머니와 유모를 설득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숨통이라도 틔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참 다행이었지.’

3주 차가 돼서도 계속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더라면 지루함에 반쯤 돌아 버리고 말았으리라.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외출복을 입었다.

봄이 깊어지고 있어서인지 동산으로 가는 길마다 갖가지 꽃이 가득했다. 그 길을 걷고 있노라니 자연히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흰색, 분홍색, 노란색, 보라색……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색상의 꽃들과 불어오는 향긋한 꽃바람.

아름드리 서 있는 커다란 나무는 정오의 햇살을 반쯤 가려 주면서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상쾌한 새소리, 날아다니는 흰색의 나비들.

그리고…….

‘……아.’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동산 위, 나무 그늘 아래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부서지는 햇빛 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있어도, 그늘 아래에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잠깐 굳어 있다가, 이내 그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이시스 오라버니!”

그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3주 만에 만나는 나의 오라버니였다.

* * *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아픈 데는 없어?”

우리 둘은 동시에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민망함에 어설프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척 괜찮아 보였기에 나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었다.

아마 그도 이 3주간 어마어마한 요양을 했으리라. 그도 이유식을 먹는 아기처럼 음식을 잘게 잘게 잘라먹었을까?

왠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나에게 멋진 오라버니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말도 마. 요양이랍시고 3주 동안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밖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어.”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는걸요. 심지어 저는 유모가 식사도 먹여 줬어요.”

“……그래?”

내 편을 들어주길 바랐는데, 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음, 유모가 옆에서 훌륭하게 요양을 도와준 것 같군.’이라는 표정이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넘어갔다. 우리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수행 시녀는 저쪽 동산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것이었지만, 아마 30분이 지나면 나를 데리러 다시 올라오리라.

그놈의 요양. 난 이제 정말 괜찮은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

“네?”

고개를 돌린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정말 몸은 괜찮은 거지?”

“네.”

나는 아까도 물은 것을 왜 또 묻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한참 망설이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오늘 너를 찾아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

나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오라버니가 비로소 말을 이었다.

“그 범인으로 잡힌 백작 말야.”

“네.”

바람이 스쳐지나가면서 나의 머리카락을 흩쳤다.

“사실은 배후가 따로 있어.”

나는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배후가, 따로 있어. 그가 마지막이 아니었어.”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당장 나만 해도 오늘 아침을 먹으며, 백작의 동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말을 직접적으로 이시스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왜 지금에야 알려 주시는 건가요?”

“아이샤.”

그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는 항상 어른스럽고, 침착하고, 현명했지.”

“…….”

“하지만 너는 일곱 살이잖니.”

그의 눈은 쓸쓸해 보였다.

“네 마음이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고 싶었을 거야. 너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도 나는 이해해.”

나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실을 숨겼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비록 아버지가 나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한 인물이라도, 그는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그리고 나 또한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고 말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 어울리는 냉정함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라면 내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진실만을 말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배려하고 싶어 하셨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입이 저절로 열렸다.

“오라버니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는 건…….”

“…….”

“들려주기 위해서지요? 그 배후를.”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달라.”

“…….”

“나는 네게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진정한 적은 누구인지 알아야지 너에게도 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겠지.”

이시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듣고 싶니? 그 배후를. 만약 원치 않는다면 그냥 모르는 채로 있어도 괜찮단다.”

“…….”

“만약 그렇다면 내가 지켜 줄게.”

그는 힘 있는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도 될 수 있도록, 내가 더 강해질게.”

“…….”

“나를 믿어 다오.”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정오의 햇살 덕분에 눈을 감아도 눈앞이 밝았다. 깜깜하지 않았다. 마치 항상 나를 비추는 가족들의 사랑 같았다. 눈을 뜬 나는 살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나요.”

“……?”

“만약에 네, 라고 말하면 저는 모든 일을 가족들에게 떠맡기는 게 되잖아요.”

“너는 그래도 돼.”

그는 급히 나에게 변명했다.

“넌 아직 일곱 살이잖니. 고작, 일곱 살….”

“…….”

그의 말이 내 가슴속으로 박혀 들어왔다. 그랬다. 아무리 내가 황가의 아이이고,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나는 아직 일곱 살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들이 지켜 주고 싶단다. 넌 어린애야. 아이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

“오라버니.”

나는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내 푸른 눈에 그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저도 오라버니를 지키고 싶어요. 아니, 지킬 수 있어요. 비록 어린애라도요.”

이 말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나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했던 적은 없었다.

“오라버니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에게 힘이 되고, 모두를 지키고 싶어요.”

그들이 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반대로 나도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지난번에 제가 오라버니를 치료했던 거 기억나시죠? 저에게도 분명히 힘은 있어요.”

“…….”

“그러니까 말해 주신다면, 저는 앞으로 더 정진할 거예요. 더 강해지기 위해서.”

“…….”

“제가 어린 건 알아요. 걱정하시는 것도.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만약 적을 알 수 있다면 대비할 지혜도 기를 수 있을 거예요.”

이시스 오라버니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니?”

“네.”

그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는 고요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입에서 진실이 나왔다.

“……백작은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 배후는 자신이 끝이라고. 그저 내가 후계자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죽이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어.”

바람에 풀잎들이 내 발목으로 스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눈치를 채셨어.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부족하다는 걸. 그래서 그의 배경을 더 파헤치다가 알게 되신 거야.”

그리고 나는 운명처럼, 그 이름을 다시 들을 수가 있었다.

“배후가, 이덴베르 제국의 황족들이었다는 것을.”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머리에 하얀색 물감이 번진 것만 같았다.

‘……뭐, 라고?’

나도 내 나름대로 이번 사건의 배후를 추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덴베르의 황족들이라고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까?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시스 오라버니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듣지 않게 되리라 믿었던 그 이름들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내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라버니는 걱정스러운 듯 내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누가 직접적으로 일을 꾸몄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는 있지. 그쪽은 아마 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운가 봐. 이번에 황태자로 즉위하게 된 라키아스 델 이덴베르에게 결점이 있어서 귀족들의 파가 갈린다고 들었어.”

“결점이라면……?”

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 이시스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의 친여동생인 ‘알리사’라는 사람이, 황족 시해 미수로 폐위되었…… 아이샤! 아이샤!!!”

‘그 이름’을 듣자 나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거의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이시스가 부축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이 육체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손과 발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샤, 괜찮아? 아이샤!”

“……아…….”

그가 등을 세게 두드려 주고 나서야 나는 겨우겨우 막힌 숨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호흡은 여전히 가쁜 상태였다.

“아이샤, 무슨 일이야. 대체…….”

그의 눈에는 오직 혼란과 걱정만이 가득했다. 나는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것과…… 독살 사건이 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요?”

“……아이샤, 이제 그만…….”

“안 돼요! ……제발 더 들려주세요.”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 가며 애원했다.

“왜, 그래서 왜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거지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이유까지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

“내 짐작으로는 이래, 그 황태자라는 사람이 국내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우리 제국에 파란을 일으키고자 했던 게 아닌가.”

“…….”

“일단 확실한 것은 그 백작은 이덴베르 제국의 스파이였고, 이덴베르 황족의 의지로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살해하려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 과정에서 너까지 말려들게 된 거야.”

“……오라버니.”

“미안하다.”

나는 알게 된 진실과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이전 삶의 나를 죽이고, 현재의 나를 죽이려 하고, 심지어는 내 가족까지 죽이려 들었구나.

증오가 내 몸에서 들끓어서, 몸 밖으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나는 가쁜 숨을 애써 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아이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계속해서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얕은 숨만 겨우겨우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30분이라는 시간이 벌써 다 지났던 것일까. 아래에 있던 나의 수행 시녀가 동산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우선 나의 오라버니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래.”

이시스 오라버니는 그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쓰러진 이후로 오라버니의 품 안에 줄곧 안겨 있었다.

시녀는 내 표정을 보지 못해 내가 그저 잠시 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 이제 슬슬 들어가셔야 할 시간이십니다…….”

그녀는 우리 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눈치를 살피던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이샤. 얼굴이 매우 안 좋구나.”

“…….”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이시스 오라버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산책 시간이 지났잖아. 황녀궁까지 배웅해 줄게.”

나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간 그렇게 있었을까.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요.”

목소리에 힘이 없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시녀에게 말했다.

“레나.”

“네. ……화, 황녀 전하……?!”

내 얼굴을 본 시녀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마 내 얼굴이 창백했기 때문이리라.

“미안하지만, 유모에게 지금 내려갈 수 없다고 전해 주겠어?”

“네? 하, 하지만…….”

“이시스 오라버니와 같이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야.”

시녀는 내 말을 듣고 한참 머뭇거렸다.

“그게…….”

내 몸상태를 생각해 나를 데려가야 할지, 아니면 나의 말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

지금도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의연한 척했다.

“괜찮다니까?”

내 대답을 듣고도 시녀는 한참 동안 더 머뭇거렸다. 그녀도 내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일단 말씀을 전달하고 올게요.”

“응, 고마워.”

이내 레나는 동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시스와 함께 의논할 중요한 일이라고 했으니, 유모도 잘 알아들을 것이다.

그녀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내가 할 말이 남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그래, 아이샤.”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씀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믿어 줄까?

정말로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누군가에게 내 전생의 이야기를 하는 날이 과연 올까.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믿어 주는 게 가능할까.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아픈 기억은 나 혼자 간직하고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입을 열고 있었다.

전생으로도 모자라 이덴베르의 황족들은 다시 한 번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덧붙여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까지.

“……제가 드릴 말씀은…….”

나는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애써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연하게, 황녀답게, 나의 말을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이시스가 무척 당황하는 것이 뿌예진 시야로 들어왔지만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샤.”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의 기억이 있어요.”

“……뭐?”

이시스의 얼굴이 멍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는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이곳에 태어나기 전의 기억도 있습니다.”

“……아이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저는 한때, 이덴베르 제국의 4황녀였습니다. 이름은…… 알리사 이덴베르.”

“…….”

“이시스 오라버니께서 방금 말씀하셨던, 황족 살해 미수의 죄를 안고 폐위당한 14살의 소녀였습니다.”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이덴베르 황궁에서 4황녀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서부터,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마리안느는 누구였고,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대하려고 했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가족들이 한순간에 바뀌어서 나를 죽이고자 했는지에 대해서.

“제가 마리안느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이었어요.”

나는 담담하게 얘기하려고 했다. 그것이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모두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가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좁고 어둡던 지하 감옥.

썩은 물을 마시던 기억.

그것을 설명하는 내 목소리는 풍랑에 휘말린 조각배와 같이 연약했다. 나는 그가 내 손을 잡아 주고 나서야 내 손이 다시 벌벌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한 적도 없는 일을 가지고, 그들은 저를 추궁했지요. 저의 옷장에서 독이 나왔다면서…….”

아직도 기억난다, 그 알량한 증거를 들이밀며 나에게 누명을 씌우던 그들의 모습을.

“……저는 절대 동생을 죽이려 한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뭐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돌변하고 말았어요.”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에 저는…….”

이시스가 나를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눈물이 팍,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울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결코 동생을, 마리안느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어요.”

나는 이시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온기가 옷 너머로 느껴졌다. 그것이 구명줄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잡고 또 잡았다.

“저는, 저는 마리안느를 해하려고 한 적도. 누구를 죽이려고 생각해 본 적도, 독을 탄 적도…….”

“…….”

“그 무엇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 같던 감옥 안에서의 생활. 나의 영혼은 이미 그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게 모두 배신당하고, 버림받았기에 내 영혼은 썩어 죽어 버리고 말았다.

“저는…… 결백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눈물이 너무 나와서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썩어 죽은 내 영혼은 엘미르 제국에 다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나는 나의 환생을 원망했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다시 또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봤자 어차피 다들 나를 배신했는데.

알량한 증거로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살해했는데.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나밖에 볼 수 없는 정령들. 인간이 아닌 오직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빛이 생겼다. 이시스와 어머니와 아버지. 나의 새로운 가족들이 죽은 나의 영혼을 다시 살렸다.

그들 덕분에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시스가 나의 말을 믿어 줄지, 아닐지 모르겠다. 내가 환생했다는 말을 믿어 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하고 싶었다.

왜일까? 어째서일까? 아, 그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믿어 주세요.”

이시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나를 믿어 주기를 바란다. 나의 빛이자, 새로운 삶인 가족들이 나의 과거를 믿어 주고 인정해 주길 바란다. 내 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 가고 있었다.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이시스의 말에 따라,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대답해 주세요.’

이시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말을 믿어 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가 내가 환생자라는 것을 믿어 준다면. 그리고 그렇기에 내가 괴로웠다는 사실을 알아준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리고, 이시스의 입이 열렸다.

“아이샤.”

그는 내 손을 힘있게 잡아 주었다. 땀으로 인해 축축해진 내 손이었지만, 그의 손길은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네 말을 믿어.”

나는 멍하니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

“네가 한때 이덴베르의 황녀였다는 말도.”

“…….”

“그리고, 동생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도.”

눈물이 뚝, 떨어졌다.

“모두 믿을 수 있어.”

그는 서투르지만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저, 정말요?”

나는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마, 말도 안, 되지 않나요.”

만약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더라면 나는 믿을 수 있었을까? 그만큼 어마어마한 이야기인데?

“환생이라니. 게다가 이덴베르의 황녀였다니.”

아니, 하지만…… 이시스는 나를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

나는 혼란 속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나를 믿는다고 했어.’

멍하니 내가 그를 바라보는데, 그때 다시 한 번 이시스가 힘 있게 내 손을 꽉 쥐었다.

“네가 한 말이잖아.”

그의 초록색 눈은 오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

“…….”

나는 입을 벌렸다. 충격 때문에 모든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한 말이기 때문에, 믿겠다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전생의 가족들 중, 아무도. 아무리 내가 피를 토하며 결백을 주장해도 다시 한번 사건을 조사해 보자는 말 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지.”

그는 나를 살짝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의 귀여운 동생은, 남을 죽일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아이라는 걸.”

“…….”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더래도, 나는 믿는단다.”

일곱 살 밖에 안 되는 나의 작은 몸은 그의 몸에 폭 안겨졌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아프게 심장으로 박혀 들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아이라니.’

다들 나에게 돌을 던지고 사형을 주장했었다. 네가 나쁜 거라고, 네가 한 일이 틀림없다고. 그러니까 사형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나는 처음으로 그 질문에 똑바로 대답했다.

‘아니야!’

아니다. 그래,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다. 내가 죽은 것은 부당한 일이다. 사형당해 마땅한 죄를 나는 저지르지 않았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그걸 믿어 준다. 아무도 해 주지 못했던 것을, 그가 나에게 주고 있었다. 나는 이미 눈물이 넘쳐 흘러서 홍수를 이룬 상태였다. 다시 태어난 걸 알았을 때 나는 이덴베르의 황족들에게 찾아가 외치고 싶었다.

나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믿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복수였다. 복수로서만이 나의 결백함이 증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다. 혼자서만 이 길고 긴 길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등을 돌리지 않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나를 온전하게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결백함을, 세상에 소리칠 수 있다.

그들을 위해서 강해지고 싶었다. 엉엉 울음이 터졌다. 이시스 오라버니가 너무 좋았다. 소중했다. 내가 죽었을 때는 아이샤로서의 나이에서 딱 두 배인 14살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어리긴 마찬가지였다. 미숙했고, 쉽게 상처받았으며, 여렸다. 다시 태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14살이었다.

내 육체가 자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나의 정신이, 트라우마로 인해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시스의 믿음을 통해 나는 조금씩 시간의 모래시계가 내려가는 환상을 보았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나를 믿고 얘기해 줘서 고마워, 아이샤.”

그는 내가 한참 동안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간간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는, 내가 울음을 조금 그치자 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이샤, 하나 약속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언제였을까.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리던 시절, 1살의 생일 연회였을까.

마치 그때처럼 말이다.

나를 지키겠노라고 선언하던 때처럼 그는 무릎을 꿇고 나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있다.

“외면하지 않을게.”

그 초록색 눈동자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네 진실을 저버리지도 않을게.”

“…….”

“너의 적은, 나의 적이다.”

“…….”

“너를 해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목숨을 걸어 내가 심판하겠어. 너를 지키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문득 생각났는지, 그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눈물로 얼룩져서 엉망인 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나는 하도 울어 버린 부작용으로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그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서 더더욱 구체화되기도 했다. 이시스는 나를 믿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사건이 끝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나의 새로운 가족을 상처입히고,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들을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를 하고 싶어요.”

나는 너무 울어 뭉그러진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진상을 파헤치고 싶어요. 결백을 밝히고 싶어요. 알리사였던 과거를 외면하고 싶지 않아요.”

그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손에 키스했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그는 웃는 동시에, 울고 있었다. 나의 슬픔에 전염되어서 그 또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덴베르 전체를 네 발밑에 무릎 꿇게 해 줄게.”

그의 눈동자는 차가웠지만 동시에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네 이름을 부르고, 네 자비를 구걸하며, 네 말에 땅바닥을 기게 만들어 주겠어.”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눈을 감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봄날의 바람과 따뜻한 햇빛,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소중한 사람.

“고마워요.”

……나를 믿어 주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 풀어진 마음속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로움의 바람이었다.

나와 이시스 오라버니는 한참 동안 동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많이 울었던 탓일까? 기력이 모두 소진된 나는 지쳐서 잠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국 나와 오라버니는 나무 그늘 아래에 등을 깔고 누웠다.

넓게 뻗은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나른한 오후였다. 쏟아지는 햇볕이 따뜻했다.

바람에 꽃들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졸려서 멍해진 정신을 애써 잡으려고 노력하며, 이시스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응, 아이샤.”

웃음을 보이면, 웃음이 돌아오는 세계.

나에게 너무나 상냥하고 따뜻한 이 세계.

“저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이것이 꿈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내 몸은 아직도 지하 감옥에서 웅크린 채로 배를 곯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웅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꿈이라도 좋아요.”

“…….”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 꿈을, 오랫동안 꾸고 싶어요.”

오라버니는 나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비가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너무나도 느긋한 오후다.

“아이샤.”

“네…….”

“꿈이 아니란다.”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도, 나도 이곳에 존재하고 있어.”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깨어질까 봐, 저는 두려워요.”

이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 꿈이라도 좋단다.”

“…….”

“내가 계속 꾸게 해 줄게.”

푹 자렴.

내 사랑스러운 동생.

이시스의 말은 마치 자장가처럼 다정했다.

언제까지라도 깨고 싶지 않은 이 평화와 행복을.

나는 힘껏 끌어안고 싶었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빛이 가득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