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빛 속으로
내 눈앞에는 모빌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어린 아기에 어울리는 앙증맞은 모빌이다. 그것을 보며 나는 우거지상을 했다. 유모는 나에게 다가와선 활짝 웃었다.
“귀여우신 황녀님!”
오늘도 그녀는 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나는 유모의 눈을 피했다. 늘 그렇듯이, 최악이었다.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내 사정을 대충 알게 되었다.
나는 이덴베르 제국의 라이벌인 ‘엘미르’ 제국의 제 1황녀로 환생하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이덴베르 제국인은 아니었지만, 엘미르 제국에 태어난 것, 다시 아기가 된 것 등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으로 삼켰다. 할 수만 있다면 따박따박 말로 해 줄 텐데, 나는 아직 옹알이나 겨우 할 수 있는 몸이기 때문이었다.
“어머, 기분이 안 좋으신가?”
그래도 유모가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지으며 나를 웃기려고 시도했다.
“…….”
물론 나는 그에 웃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로서의 본능인 것인지, 반사적으로 시선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유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새로운 인형을 가져왔어요. 귀엽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새 인형을 내 베개 옆에 넣어 주었다. 알록달록한 토끼 인형이었다.
‘……하.’
나는 속으로 한숨만 지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반기고, 뭐든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내가 이덴베르의 4황녀였을 때도 이 정도로 환영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나에게 쏟는 관심은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런 내가 어디가 좋은지, 유모와 시녀들은 내게 항상 웃음만 지어주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어머니인 ‘아이리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북부의 권세가인 루셀 후작의 외동딸로, 이전에 있던 황후가 몸이 약해 서거한 이후 새로 궁에 들어온 황후이기도 했다.
‘부모를 잘 만나서 호강하게 되는구나.’
나는 냉소했다. 수많은 삶의 갈래 속에 이번에도 황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스우면서도 어처구니없었다.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엘미르 제국의 황손은 무척이나 귀하다고 했다. 그것은 이 제국의 황제가 일부일처제인 것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후궁이라는 이유로 얼마든지 여자를 들일 수 있는 이덴베르 제국과는 무척 달랐다.
거기에 더해, 어째서인지 여자아이는 더더욱 귀했기에 사람들은 내가 태어난 것이 나라의 홍복이라고 앞다투어 말했다. 나에게는 과연 홍복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엘미르의 하나뿐인 황녀 전하.
마치 푸른 보석이 박힌 것 같은 두 눈동자와 구름처럼 폭신한 은발. 이제 고작 10개월쯤 되는 아기한테 하는 칭찬으론 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덕분에 나는 내 모습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이전 생에서 나는 흑발과 초록색 눈동자였다. 거울을 본 적이 없어서 아직은 모르지만, 머리 색이나 눈 색뿐만이 아니라 아마 얼굴도 완전히 달라졌겠지.
‘아.’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나는 전생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잊고 싶은데, 전생의 기억은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오곤 한다.
나는 바람에 빙글빙글 도는 모빌을 바라보며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새로 태어난 나에게는 두 가지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한 가지는 전생의 기억― 그러니까 ‘알리사 델 이덴베르’로서의 14년간 기억이 들어 있다는 것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나는 속으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얘들아.’
내 의지에 반응해서 무언가가 꼬물꼬물 몰려들었다. 그것은 자그만 빛으로 이루어진 빛의 정령들이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것들.
나는 눈이 보이기 전에도 이것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눈이 트인 후부터 이들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희귀하다는 ‘정령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것도 자연 개체로 존재하는 정령을 볼 수 있는 엄청난 정령사로.
엘미르 제국은 빛의 신을 추앙하는 국가이다. 내가 빛의 정령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여 준다면, 아마 나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아지리라.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나에게는 삶의 의지가 없었다. 유모가 먹여 주는 젖도 그저 조금 빨다 말뿐이었다.
사람들이 오면 눈을 피했고, 옹알이도 하지 않았다. 아기로서의 본능이 있다 보니 움직이는 것에 눈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본능도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질려서 나를 방치한다면……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우 끈질겼다.
계속해서 내게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며 조금이라도 나를 기쁘게 해 주려고 안달이였던 것이다. 내가 그에 화답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 정성만큼은 인정한다.
‘그래도 몇 년 동안 계속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나를 포기하겠지.’
내가 이러는 데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지쳤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 태어나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죽지 않을 만큼 호흡하지만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으리라.
다만, 그 계획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이샤! 잘 있었니?!”
또, 또.
그가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 방을 열며 등장한 그를 보며, 유모가 눈치도 없이 반갑게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 오늘도 황녀님을 보러 오셨나요?”
“응! 아이샤는 어때?”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 사람.
저 사람이 바로 문제의 원인이다.
나의 오라버니라는 ‘이시스 드 엘미르.’
그는 올해 9살로,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자이자 황태자이기도 했다. 전 황후의 소생이기 때문에 나와 어머니가 달랐지만, 그는 마치 나를 친동생처럼 대했다.
오죽하며 내가 그의 얼굴을 유모나 어머니보다도 더 많이 보았을까. 그는 아무리 내가 무시하고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만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런 그가 무척이나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샤!”
그가 활짝 웃으며 요람 곁으로 다가왔다.
“잘 지내고 있었어?”
그는 나를 보며 자신이 가져온 것을 건네었다. 커다란 연분홍색 꽃이었다.
“오늘은 꽃을 가지고 왔어. 아마 궁에서 가장 예쁘고 큰 꽃일 거야.”
나는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가져온 꽃은 이 나라의 국화인 ‘엘미르 꽃’이었다. 유모는 수다쟁이였기 때문에, 이 시절만 되면 엘미르 꽃이 들판 가득 넓게 피어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연분홍색의 꽃잎이 겹쳐진 그 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이내 딴청을 피웠다. 황태자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황태자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이샤는 정말 낯가림이 심한 모양이구나…….”
아니야. 나는 속으로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라, 다만 너희들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그런 의미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설마 자는데 계속 치근덕거리지는 않겠지? 이런 내 계획이 성공했는지, 이시스는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아이샤? 자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나가 버려.’
눈을 꾹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그러자 얼마 안 지나서 그가 있던 곳이 조용해졌다.
‘갔나?’
조용해진 걸 봐서, 드디어 간 모양이었다. 자는 척하는 게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앞으로도 이 방법을 자주 써야지.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
“……꺄아!”
그가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몇 배는 크게 보였다.
내가 펄쩍 뛰자, 이시스는 외려 자기가 더 당황했다.
“미,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은 실수였다. 나는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황녀 전하께서 너무 감정 표현이 적은 게 아니냐며 슬그머니 걱정하는 분위기지만…….
그것마저도 내 계획대로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서 남들의 관심을 식게 만드는 것.
‘그런데 저 녀석은 왜 이렇게 끈질기냔 말이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이샤, 놀라게 해서 화났어?”
풀죽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
황태자인 주제에 그렇게 가볍게 사과의 말을 입에 담다니. 완전히 황태자 실격이다.
‘이제 좀 가라.’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계속 내 옆을 지켰다. 지루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작게 열어둔 내 방 창문에서 바람이 가볍게 불었다. 그에 모빌이 춤추며 오색 빛과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소중한 내 동생.”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몸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또 그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계속 들은 소리다.
그의 나이가 9살, 내가 10개월.
그는 나를 세뇌라도 하려는 것처럼 예전부터 이 말을 반복해 왔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소중한 내 동생.
하나뿐인 내 동생.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꾸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나를 내버리고, 등을 돌리며, 돌을 던지고 침을 뱉던 그들이 생각나서.
‘…….’
나도 모르게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걱정스러운 듯이 나에게 물었다.
“괜찮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요람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금방 떠날 분위기는 아니다.
“아이샤.”
그는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요람이 슬쩍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눈만 데굴 굴려 확인하니, 그가 내 요람을 살살 흔들고 있었다.
‘지겨워 죽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화사한 금발과 녹음을 가득 담은 초록색 눈,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를 닮은 아주 잘생긴 외모였다. 거기다 그는 9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어른스러우며 상냥했다.
항상 내가 그를 무시해도 계속 찾아오는 걸 보면 인내심도 무척이나 뛰어난 모양이고. 여러모로 참 대단한 아이였다.
“아이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감격한 듯 나를 불렀다.
“내 동생…….”
그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웠다. 나는 그런 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좋은 걸까?’
하지만 어째서? 아무리 우리 둘이 혈육이고, 남매라고 해도 이 정도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혈육이라고 해서, 남매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직도 ‘라키아스’가 사형을 주장하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아기라는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만약 물어볼 수 있다면 그걸 제일 처음 물어봤을 텐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표정이 어두워졌던 걸까? 이시스가 걱정스러운 듯 내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이샤, 어디 아픈 거야?”
“…….”
나는 침묵했다. 그가 나에게 보이는 관심도,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애정도 불편했다.
차라리, 그래. 죽기 전처럼 나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다면 나을 텐데. 혹은 무관심하거나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샤.”
조근조근한 그 목소리는 햇볕처럼 따뜻했다.
“내가 비밀을 하나 알려 줄게.”
비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고 이어진 그 말에 나는 순식간에 긴장하고 말았다. 그의 말은 마치 내가 태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내가 태어날 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혹시, 혹시라도 그와 내 환생이 관련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하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는 내 의문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동생이 가지고 싶어서 오랫동안 어머니를 졸랐었거든.”
아, 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나를 기다렸다는 게 그런 의미였구나.’
매일 같이 똑같은 천장을 보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답답한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이시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몸이 약하셔서 동생을 갖는 건 무리셨어. 그리고 점점 몸이 약해지시다가…….”
처음 듣는 그의 이야기였다. 턱을 괸 그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2년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지.”
“…….”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숲속의 푸른 나무처럼 아름다운 이시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쓸쓸함을 머금었다.
“처음에는 많이 원망스러웠어. 어머니를 대신해서 들어오신 아이리스 님도. 세상도, 아버지도. 하지만…….”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이리스 님이 오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셨으니까. 그분이 계셔서 나는 정말로 행복하단다.”
그는 내 손가락을 소중하게 잡았다. 나의 손과는 다르게 크디큰 손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가족…….’
“그리고 아이샤, 너의 존재도.”
이시스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찾아온 건 마치 기적 같았어.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
“…….”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무 좋아서 매일 아이리스 님께 오곤 했었어.”
그는 활짝 웃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어머니의 목소리만큼이나 자주 들려왔던 어린 소년의 목소리. 그것이 황태자 이시스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 건 태어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만큼 매일 같이 들리는 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나.
“예전에도 말했었지. 아이샤.”
이시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 순수한 애정이 나에게 흠뻑 쏟아졌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사랑한단다.”
노래하듯이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잘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한 가지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내가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나를 매일 같이 돌보아 주는 유모도, 밤마다 나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인 황제 폐하와 심지어는 궁 안의 시종들에게까지.
그 모두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였다.
“아이샤,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 줄게.”
그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흔들어 주는 요람 안에서 나는 조금씩 흔들렸다. 바깥은 봄이었다.
새잎이 올라와서 꽃대를 이루는, 아름다운 봄.
* * *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시스를 하루아침에 믿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그가 나의 편이라고 말한다고 한들, 이미 내 마음은 굳게 닫힌 채였으니까.
하루하루 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아직 나는 아기였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야 했다.
유모가 먹여 주는 이유식을 먹고 눈만 몇 번 깜빡여도 어느새 금방 해가 지곤 했다. 밤이면 종종 과거의 꿈을 꾸었다.
그럴 때마다 이전 삶의 가족들이 꿈에 등장했다. 본래 나는 이덴베르 황후의 적녀였다.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이덴베르의 법률상, 황제께서는 많은 황비를 들이셨다.
개중 진짜 황궁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황후와 3명의 황비, 그리고 나를 포함한 6명의 황자와 황녀들.
나의 어머니인 황후께서는 자식들에게 무심한 성격이었다. 가족 같은 것보다는 공적인 일을 중시하는, 어찌 보면 한 제국의 황후로선 걸맞은 성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로서는 크나큰 실격이었다. 단 한 번도 나는 어머니에게 따뜻하게 안겨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대신 나에게는 동복 남매인 라키아스가 있었다.
그는 남들에겐 무척 차가웠지만 나에게만큼은 따뜻한 오라버니였다. 황궁의 남매들은 꽤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나이를 먹고 라키아스가 후계자로 반쯤 내정되고 나서부터는 점점 사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마리안느가 들어온 이후로는 더했다.
그 아이를 중심으로 황궁이 밝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 아이가 무척 고마웠다. 아마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라키아스는 마리안느를 독살하려 했다는 나에게 더욱 배신감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그가 틀렸다. 나는 마리안느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를 믿어 주지 않았던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믿어 주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슬프지 않을 텐데.
“……녀님, 황녀님.”
나는 눈을 살그머니 떴다. 내 시야에 유모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그 꿈을 꿨구나.’
아.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쁜 꿈을 꾸셨나 봐요.”
그렇게 말하며 유모는 가제 수건으로 내 눈가를 쓸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쉬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더 이상 악몽은 없을 거란다.”
포근한 향기가 나는 품이었다. 그녀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엄마가 있잖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이리스 황후, 나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온화한 붓꽃색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것도 잠시, 고개를 홱 돌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황후는 나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 다시 말해 황후와 황제가 나들이를 가는 날이라 했던가?
이런 나들이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아직 내가 어리기도 했고, 사람을 무척 피하는 성격 탓에 나는 자주 나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의 나들이라 황후도 나를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것이리라.
“자, 아이샤. 준비를 해야지?”
황후가 나를 내려놓자, 유모와 시녀장은 앞다투어 다가왔다. 아침을 먹은 이후, 나를 꾸며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릴이 잔뜩 달린 앙증맞은 드레스를 나에게 입히고, 머리에는 예쁜 리본 머리띠를 씌워 주었다. 물론 프릴과 머리띠 곳곳에는 진귀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고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한창 꾸며대는 동안 나는 그저 무심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황녀님!”
유모는 내 옷의 리본을 마지막으로 묶어주었다.
“오늘 나들이 가시니까 기분 좋으시죠?”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아기의 육체는 불편하기만 하고, 즐거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시큰둥한 나의 어디가 좋은지, 유모는 귀엽다는 듯 호호 웃었다.
“치장하시는 동안 칭얼거리지도 않으시고, 너무 장하세요.”
“맞아요. 게다가 항상 얌전하시고 말도 잘 들으시고 말이에요.”
“이렇게 귀여운 황녀님을 모실 수 있어서 가문의 영광이에요.”
사람들은 앞다투어 나를 칭찬했다. 칭얼거리지 않는다고 칭찬받는 것은 정말로 희귀한 경험이다.
아니, 그것 이외에도 나는 ‘울지 않는다’, ‘밥을 잘 먹는다’, ‘트림을 잘한다’, ‘뒤집기를 잘한다’와 같은 각종 자그마한 일에도 칭찬을 받곤 했다.
그 쏟아지는 칭찬에 내가 속으로 창피해하고 어이없어하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전하, 한번 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유모는 나에게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눈을 반짝 빛내었다. 거울을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가슴이 조금은 두근거렸다.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게 나라고?’
내 생각보다도 외모가 너무 귀여웠던 탓이다. 아기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맑은 거울 속에 담긴 귀여운 여자 아기는 눈부신 귀여움을 뽐내고 있었다.
환한 은발은 세상의 빛을 모두 담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고, 조막만 한 얼굴 안에 담겨 있는 푸른 눈동자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발그레한 볼은 콕 찔러 보고 싶을 정도로 통통했고, 체리색 입술은 무척이나 말랑말랑해 보였다. 마치 날개 없는 천사가 하늘에서 똑 떨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울을 보다가 이내 곧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과거의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초록색 눈동자였다.
외모가 달라진 것을 보니, 내가 정말 환생했다는 실감이 더욱 다가왔다.
“전하, 거울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유모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제야 나는 너무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가요.”
유모는 거울을 멀리 치워 버렸다. 내가 잠자코 있자, 황후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았고 그 뒤를 시녀들이 따랐다. 그녀의 품에 안겨 얼마쯤 걷던 나는 잠깐 후원의 근처를 지나갈 수 있었다.
내 근처를 항상 맴돌던 빛의 정령들이 봄 햇살에 특히나 즐거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쁘다.’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전생에서 지하 감옥에 갇혔던 트라우마일까. 다시 태어난 나는 유독 빛에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빛 속으로 손을 뻗자 황후는 위험하다며 나를 고쳐 안았다.
복도에는 대리석 기둥이 곧게 서 있었다. 몇 개의 기둥을 지나쳤을까, 나는 이내 넓은 실내 정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어머니가 나직하게 말을 고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실내 정원 안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과 따뜻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나와 황후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샤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정원에 모인 궁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무릎을 수그렸다.
“제국의 광명을 뵙나이다.”
“뵙나이다.”
그 인사를 들으며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을 받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 기세가 마치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선 포식자와 같았다.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소문으로 듣기에 황제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은 무서워서 오금을 저린다던데, 아기인 내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와 눈을 마주친 나는 깨달았다. 나를 위해 그가 일부러 위압감을 줄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보통의 아기라면 아무리 그가 조심한다고 해도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울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내가 다치는 것을 염려하는 듯 나를 자주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지금 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배려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 14살의 알리사가 함께 있기 때문이리라.
‘…….’
물론 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계속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눈을 금세 내리깔았다. 황제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다가와 나의 머리를 따스하게 쓸어 주었다.
“정말로 많이 자랐군.”
내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따뜻한 목소리였다. 나는 불현듯 그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금실을 뽑아낸 듯이 진한 금발에, 가을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 그가 바로 내 아버지이자 이 제국의 황제인 ‘티리온 드 엘미르’였다.
주위 나라를 정복하고, 제국을 키워 정복국으로부터 수도로 이어지는 영광의 길을 만든 장본인. 훌륭한 치세를 펼치는 천하의 명군. 더할 나위 없는 전쟁영웅.
하지만 평소에는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한 그가, 가족들을 대할 때면 달라진다는 것은 황궁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수도의 백성들에게 금화를 뿌리고 신에게 직접 축성을 드렸다고 한다. 가벼운 죄를 지은 죄수들은 사면하고 굶주리던 자들에게 빵을 주었다.
신분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나의 탄생을 축하했다. 심지어 황제 자신도 하루 종일 크게 웃으며 황후궁을 돌아다녔다나.
제국의 비화이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인 얘기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날 하루 종일 나의 이름인 ‘아이샤’가 제국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사랑받는 황녀님 ‘아이샤 드 엘미르’를 위하여.
황후는 후후, 웃더니 황제에게 말했다.
“안아 보시겠어요?”
그는 조금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뻗다가, 다시 거두고 말았다.
“……안 되겠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작으니, 만지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 같다.”
나는 조금 황당해지고 말았다. 내가 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유리세공품처럼 와장창 부서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나 소중해서 그는 나를 건드리지조차 못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내 딸.”
그는 나를 안기를 포기한 대신,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 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감쌌다.
“부서지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
“아이샤도 이제 벌써 10개월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나는 손을 꼬물거렸다. 아직도 내 손이 이렇게나 작은데, 벌써 내가 다시 태어난 지 10개월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황제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1살 생일이 오면, 기념으로 연회를 열려 하네.”
“연회요……?”
어머니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괜찮을까요? 아이샤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
괜찮겠냐는 듯,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항상 사람들을 피하는 버릇 때문에 황후는 그런 오해를 한 듯싶었다. 황제가 대답했다.
“얼굴을 보이는 건 첫날 잠깐만이어도 괜찮겠지.”
“연회를 오랫동안 여실 생각이신가요?”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회의 규모와 화려함은 그 주인공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보여 주는 기준이기도 했다.
보통 귀족들은 하루 이틀, 많아 봐야 사흘 동안 연회를 열곤 했다. 하지만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낼 정도니, 내 연회가 적어도 하루 이틀로 끝나지는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황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날 동안 생일을 축하해야지. 무엇보다 아이샤의 첫 생일 아닌가.”
“……그러면 얼마 동안 여실 예정인가요?”
나는 모르는 척하려 했지만, 자연스럽게 귀가 쫑긋거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길, 한 일주일 정도가 딱 무난할 것 같았다. 그가 내 첫 생일을 굳이 기념하고 싶다면 말이다. 일주일이면 적당히 신경 쓰는 티가 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일주일 동안의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예산과 인력이 소요될 테니 사실 일주일도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그도 그가 얼마나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동네방네 자랑할 셈이 아니라면 그 정도가 딱 무난하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제는 자신의 딸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실내 정원에 울려 퍼졌다.
“한 달.”
“…….”
그 말에 시종들과 어머니가 소리 없이 경악하는 게 느껴졌다.
“……하, 한 달 동안 생일 연회를 여시겠다고요?”
황후의 의견이 내 의견이다. 이시스 황태자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가 황태자 책봉을 받았을 때 한 달 동안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유모에게 들은 적이 있다.
금이 날아다니고, 보석들이 사람들의 눈을 홀리는, 도저히 이 세계의 연회로 보이지 않는 연회였다고 하더라.
그러나 그것은 이시스가 그만큼 중요한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 하지만 예산이…….”
“사랑하는 딸의 첫 번째 생일인데, 예산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황제는 진지하게 황후를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 달 동안이라니, 싫어!’
부담스러운 데다가, 피곤하기까지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나서서 황제를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황후가 혹시 말려 주시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은 너무 과하잖아.’
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단념하고 말았다. 아까보다도 황후의 눈이 더욱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이라니…….”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벅참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입지가 조금 낮았다.
지금은 몸이 약해 죽었지만, 이전에 있었던 황후 ‘테티스’가 공녀 출신인 데다 아직도 그녀의 사람들이 황궁 곳곳에 있는 것도 한몫했다.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황족의 자리가 보통 외척의 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로서는 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불안을 완전히 날려 버리듯, 황제는 나를 위해 한 달씩이나 연회를 선언한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황궁 사람들이 모두 나를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
나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으니, 그녀가 이토록 기뻐할 수밖에.
황후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더욱 껴안았다.
“그리고 그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초대한다면 좋겠군. 내가 사람을 보내지.”
“……!”
황후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황후의 외가, 그러니까 나에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되시는 ‘루셀 가’는 북쪽 국경을 지키고 있는 후작 가문이다.
당연히 수도에 올라올 일이 거의 없었다. 황제는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황후가 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내 생일 연회가 오랫동안 열리면 어머니로서도 부모님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길 테고 말이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다가 가슴속 한 곳이 문득 아련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전생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직 후계자인 라키아스뿐이었고, 자신의 배로 나를 낳은 어머니라 할지언정, 나에게 무신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래도 아버지께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기는 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녀 마리안느. 그녀 말이다. 그녀를 생각하니 문득 머리가 아파졌다. 내가 신음성을 내자, 그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린 황후는 나를 고쳐 안았다.
“왜 그러니, 아이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걱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
그 눈을 마주보자 나는 어쩐지 두통이 물러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얌전해지자 황후는 잘됐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살짝 흔들어 주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실내 정원에는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코끝에 감도는 홍차의 향기와 귓가에 울리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꿈결처럼 아름답다.
“아이샤, 여기 엄마와 아빠가 있잖니.”
황후는 따뜻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무서운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주었다.
“들었지? 한 달 동안이나 생일 연회을 열겠다고 하시는구나.”
황후는 환하게 웃었다.
“모두가 네 생일을 축하해 줄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암흑이 찾아오면, 물조차 마실 수가 없어서 목이 비쩍 말라가던 그때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햇볕에 누워 황후의 손길과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잠자코 있던 황제가 말을 보태었다.
“아이샤가 우리에게 와 주어서 짐은 너무나도 기쁘네. 이 연회로 그 기쁨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군.”
“황공하신 말씀입니다.”
황후는 눈을 감은 나를 위하여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달콤한 노랫가락이었다. 나를 끌어안는 그 따뜻함에, 나는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 *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어느새 나는 내 궁에 다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어둠이 깔린 시각이었다. 황궁의 지엄한 법도에 따라서 나와 황후는 따로 잠을 잤기 때문에,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어두워서 싫어.’
조용한 가운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정령들을 불렀다.
‘얘들아.’
그러자 정령들이 하나둘, 내 곁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아주 처음부터, 내가 다시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곁에 있었던 아이들.
나에게 있어서 정령들은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새 삶을 이미 포기했을 거야.’
내가 마음속으로 속삭이자, 그 아이들이 마치 나를 위로하듯 나를 토닥여 주었다.
‘……으음?’
그런데 어쩐지 정령들이 조금 이상했다. 특히, 빛의 정령들이.
그들은 허공을 바라보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해져서 조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그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커튼이 살짝 휘날리며 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더 빨랐다.
겹겹이 쳐진 흰 커튼 뒤에 샛노란 달빛이 스며들어 오고, 휘황찬란한 그 빛은 방 안을 온통 비출 것처럼 밝았다.
만월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커튼 뒤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달처럼 빛나는 금빛 눈동자에, 흩날리는 백금발이 너무나도 신비로운 남자였다.
오직 달만이 지켜보는 이곳에서, 숨 막힐 듯한 고요가 흘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 지?’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그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커튼 뒤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푸른 눈동자와 그의 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눈도 돌리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게 정말이었군.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엘미르 1황녀의 침실에 갑작스레 침입했다는 것만으로도 경계 대상인데, 내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더라면 그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아기에 불과했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 것. 혹은 목숨을 위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그 순간 잔잔한 미풍이 불고, 커튼 자락 너머로 만월의 빛이 훅 들어왔다. 나는 두 눈을 떨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빛에 의해 드러난 남자의 외모는 내가 세상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남자는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백금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천천히 휘날렸다.
―재미있는 아이야.
내 옆에 있던 정령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왕을 뵙습니다.
‘……왕?’
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이 정령들의 왕이라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깨달았다.
그가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의지’만으로 나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과 비슷한 외관에 내가 착각했던 것이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이르게 찾아온 모양이군.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위압감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나는 점점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티리온의 앞에 있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압박감이었다.
―자아.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대었다. 그 손가락 끝은 빛이 머무는 것처럼 환했다.
―오늘 일은 잊어도 된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하지만 멈출 틈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어째서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눈에 담은 것은 마력을 담은 것처럼 아름다운 금안.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흥미로움.
그 금안을 마지막으로 나의 기억은 끊겼다.
* * *
“황녀님, 일어나셨나요?”
눈부신 아침 햇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눈을 살짝 떴다. 언제나처럼 유모는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한 번도 깨지 않으시고, 아주 푹 주무셨나 봐요.”
그랬나?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깬 기억이 없으니 아마 유모의 말이 맞을 것이다.
‘…….’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인지, 눈앞에 환한 보름달의 잔상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어쩌면 잠을 자다가 비몽사몽 한 와중에 잠깐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제 나들이를 가서 들은 말이 떠올랐던 탓이다.
‘황제가 한 달 동안 연회를 열겠다고 선포했었지…….’
마침 유모가 그 얘기를 꺼내었다.
“귀여우신 황녀님, 아시나요?”
유모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의 생일 연회를 위해서 나라의 갖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다 부르시고 계시대요!”
원래도 그녀는 종알종알, 수다가 많은 성격이었지만 오늘 나를 꾸미면서는 그 정도가 더했다.
“초대형 초상화를 그리신대요. 그리고 황녀님을 위한 예술품이랑, 아름다운 보석 장신구를 잔뜩 만든다고 하시네요.”
“정말 잘 되셨어요.”
옆에서 시녀들이 맞장구쳤다. 얼굴에는 흥분이 잔뜩 묻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러실 만도 하지요. 황녀님께서 이렇게나 사랑스러우시니까요.”
나는 관심 없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황제의 선언은 결코 빈 강정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부터 황녀궁에서 생일 연회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시종들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다른 궁에서 새로운 인력들이 바리바리 차출되었다.
그 속에서 어머니와 시녀장, 유모는 전장을 진두지휘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생일 연회가 다가온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이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종들은 바빴지만, 나는 그저 그들이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옷이나 장신구를 댈 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귀한 황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항상 안겨 다녔으므로 피곤할 일도 거의 없었다.
나의 옷이나 장신구를 맞추러 오는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띄워 주었다.
어찌나 귀엽다, 사랑스럽다 말하는지.
평생 들을 칭찬을 다 들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결국 지루함에 못 이긴 내가 하품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 전하!”
갑작스럽게 불려 깜짝 놀란 나는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새 이가 나셨네요!”
유모가 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새 이?’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잇몸 한쪽이 간지럽고 아프다 싶었더니, 또 이가 하나 더 난 모양이었다. 연회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내게 새로운 이가 났다는 소식에 앞다투어 달려왔다.
“너무 귀여우세요.”
이제는 하다 하다 이가 난 것만으로도 칭찬받는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조금 붉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시녀가 말했다.
“이제 슬슬 말을 하실 때도 되셨는데 말이에요. 그렇죠?”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은 얼굴을 굳혔다.
“…….”
옆에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황후의 얼굴은 살짝 어두워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녀는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내심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감정 표현이 적은 아이라는 것은 황녀궁에서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항상 조용하고, 칭얼거리지 않아서 손이 덜 가는 편한 아이.
하지만 한쪽에서는 은밀하게 이런 말도 들리고 있었다. 혹시 황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까지 표현이 적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떼고도 남았을 ‘마마’, ‘바바’같은 옹알이도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이 나이쯤 되면 ‘엄마’나 ‘아빠’를 발음하게 될 시기도 될 법한데 말이다. 그래서 나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우리 궁에서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것이었다.
아마 저 시녀는 연회 준비 때문에 우리 궁에 새로 와서 사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모가 황후를 위해서인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이도 자라셨으니 말을 하실 날도 머지않았어요.”
황후는 조용히 웃었다.
“그렇겠지.”
“아무렴,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의 피를 이으신 훌륭한 황녀님이신걸요. 금방 말을 떼시고 줄줄 말하게 될 게 틀림없다니까요?”
유모는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을 닫는 것이 완전히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은 옹알이도 하지 않고, 낯을 가리는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항상 바라보곤 했다. 그들의 얼굴에 묻어 있는 애정은 진짜였다.
황후가 걱정하는 바를 안다. 불안해하는 사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직 육체가 덜 자라서는 절대 아니었다.
마음을 먹는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마음을 먹는 게 너무나도 무서웠다.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가슴이 탁 막혀 오곤 했다. 너무나 무서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전생에서 가족들에게 배신당했던 트라우마가 나의 온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아직도 나는 너무나 괴로웠다.
주변이 조용했다. 나는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마음이 아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따뜻한 손길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흠칫,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길을 피할뻔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다정해서. 너무나 따뜻해서.
“아이샤도 금방 말문을 열게 될 거야.”
황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단다.”
나는 멍하니 황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붓꽃색 눈동자는 슬픔보다도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나를 향한 애정. 그것이었다.
‘…….’
어쩐지 말문이 막혀 왔다. 맨 처음 말을 꺼냈던 시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것을 자각한 듯했다. 이윽고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아이샤. 그럼 오늘도 한번 걸어 볼까?”
시종들이 황급히 자리를 깔았다. 황후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푹신한 자리 위에 옮겨 앉게 되었다.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 바로 황후가 보는 앞에서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연습을 하는 일이었다.
다른 것에는 모두 시큰둥한 나였지만, 나는 이 걷기 연습 시간만큼은 열과 성의를 다했다. 얼른 남의 도움 없이 걷고 싶었다.
기분 뿐이기는 했지만, 한 발자국 더 걸을 수 있게 될 때마다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둘. 하나, 둘.”
황후의 목소리에 맞추어서 나는 발을 천천히 떼었다. 아직 다리 힘이 온전치 않기 때문에 걷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황후는 저 멀리에서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겹쳐 올랐다.
나의 옛날 어머니. 그러니까 이덴베르의 황후가 나를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 준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 번은 있었던 것 같다.
공식 석상에서 화기애애함을 연출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어머니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했기 때문이다.
‘…….’
억지로 다리 힘을 내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걸어 보았다. 주위 사람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하아.’
고작 세 발자국만 걸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까지 내가 최대로 많이 걸은 횟수는 세 걸음이 끝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나는 욕심을 내보았다.
‘조금만 더 가 보자.’
하지만 역시 욕심을 너무 부린 걸까. 나는 카펫 위에 폭,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듯이 옆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조금만 더 가면 네 발자국이었는데, 아쉬워요.”
“그래도 무척 잘 하셨어요. 황녀님.”
나는 폭신한 바닥에 폴싹 엎어져서 얼굴을 묻고 있었다.
“괜찮니, 아이샤?”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읏.’
나는 정말로 젖먹는 힘까지 끌어 올려서 다시 일어섰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긴 했지만, 더 해 보고 싶었다.
“장하세요!”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이 웃으며 칭찬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정신은 없었다. 나는 맨 앞을 보고 집중했다.
목표했던 황후의 앞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저기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 발자국은 더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 품에 거리낌 없이 안길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황후는 지치지도 않고 나를 향해 계속 팔을 벌리고 있었다.
생일 연회가 가까워짐에 따라 내가 머무는 황녀궁은 더욱더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시스가 방문한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나의 정보통인 수다쟁이 유모로부터 그가 봄맞이 사냥을 떠났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아이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그의 손에는 특별한 선물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던 나는 조금 황당해지고 말았다.
보통 때라면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이나, 예쁜 꽃을 가져다주었을 그인데 오늘 그의 손에는 조금 특별한 것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곰 가죽이야. 이번 사냥에서 내가 잡았어.”
바로 튼실한 곰의 가죽. 그는 헤실헤실 웃었다.
‘뭐? 곰을 잡아?’
그 말에 나는 딴청 피우던 것도 잊은 채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가 9살, 그런데 곰을 잡았단 말인가? 그가 원래 무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 범위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아이샤, 널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생일 선물이 있거든!”
그게 뭘까?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는데, 다음 순간 그가 손가락을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생일 때까지 비밀!”
그는 즐거운 듯 환하게 웃었다. 좀 황당하긴 했지만 생일 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황궁에는 귀한 손님이 도착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연회를 앞두고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되는 루셀 후작 부부가 도착한 것이다.
둘이 왔다는 소식에 황후는 매우 기뻐하며 뛰어갔다. 황궁의 법도에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만큼 기뻤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건 루셀 후작 부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서로를 보자마자 셋은 뜨겁게 포옹을 나누었다.
“잘 지냈니, 아가?”
루셀 후작은 푸른 눈에 은발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은 보라색 눈에 헤이즐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말이다.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어렴풋해서, 그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꽤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물론이죠.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황후는 마치 소녀처럼 쑥스럽게 웃었다.
“게다가 아이샤도 이렇게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고요.”
그러곤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자랑을 시작했다. 내가 벌써 다섯 걸음이나 연속으로 걸을 줄 안다.
잘 울지도 않고 얼마나 순한지 모른다. 애먹을 일이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아이샤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칭찬하는지, 가끔은 좀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다, 등등.
‘황후가 이렇게 팔불출이었나?’라고 다시 생각하게 될 정도의 수다였다. 루셀 후작 부부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 그래. 한번 보자꾸나.”
“벌써 이렇게 컸니?”
나는 황후가 앉혀 준 대로 작은 쇼파에서 그들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루셀 후작 부인은 육아에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나를 감싸 안아 올렸다.
“정말 귀엽구나. 겨울에 나타난다는 눈의 요정 같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야.”
루셀 후작은 옆에서 나를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 둘은 아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저 표정을 말이다. 응접실에는 곧장 우리들을 위한 자리가 깔렸다. 후작 부인은 황후를 향해 말했다.
“아이샤를 위해 장난감들을 좀 가져왔단다. 한번 보겠니?”
“어머, 그런 걸 다…….”
후작 부인이 종을 울리자, 시종들이 몇 명이나 줄지어서 들어왔다. 저마다 예쁜 리본에 묶인 알록달록한 상자를 한 아름 든 채였다.
그 안에는 예쁜 공들과 금 장신구, 튼튼한 가죽 신발, 아기를 위한 과자, 그리고 북부의 설화가 담긴 동화책이 있었다.
‘동화책?’
나는 약간 의문을 갖고 말았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지금도 엘미르어를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다른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도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직 읽을 수 없는 동화책은 어째서 가져온 것일까?
“나중에 컸을 때 아이샤가 북부 쪽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동화책을 가져왔단다.”
그 의문을 풀어 주듯, 루셀 후작이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영지와 북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수도에 올라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미리 선물해 두자 싶었지.”
순간 분위기가 잠깐 가라앉았다. 국경을 지키는 루셀 후작가인 만큼, 수도에 자주 올라올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황후는 그게 조금 슬픈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해 주었다.
북부 설화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내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으므로 나는 예쁜 공을 손에 쥐었다.
그 공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딱 내 손에 맞았다.
“그게 마음에 드니?”
후작 부인은 호호, 웃었다.
“내가 고른 선물이란다. 아이샤가 좋아해 주니까 나도 정말 기쁘구나.”
나는 그 공을 굴리기도 하고, 꼭 끌어안기도 하고, 통통 튀겨 보기도 했다. 요즘은 손아귀 힘이 강해져서 이렇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꽤 재밌어졌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그런 내가 너무나도 귀엽다는 듯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타임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오랜 뒤였다.
나와 함께 놀아 주던 황후와 루셀 후작 부부는 그제야 식은 차를 입에 대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내셨나요? 북부 사정은…….”
황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공을 가지고 노는 척하면서 그 목소리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이 제국이 굴러가는 정세 이야기라면 들어 놓아도 나쁠 것이 없었다. 정보는 무척이나 중요하니까 말이다. 루셀 후작이 자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덴베르 놈들 말이냐? 화친 협정 이후에는 조용하지. 조용하지만…….”
루셀 가문은 앞서 말했듯, 국경에 자리한 가문이다.
그리고 그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덴베르 제국’.
엘미르 제국과 몇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라이벌 제국이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화를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루셀 후작이 이덴베르 제국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국경을 수호하면서 자잘한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이덴베르 제국에 수도 없이 자신의 부하들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그 점에서 나는 루셀 후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이덴베르 제국을 욕하면 욕할수록 나는 속이 시원해졌다.
후작은 이덴베르 제국을 까 내릴 뿐만이 아니라, 정세에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가 이덴베르 제국의 이야기를 계속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확히는, 이덴베르 제국의 황족들 이야기를.
그것은 무척이나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들로부터 등을 돌린 나는 허무하게 웃고 말았다. 내가 죽은 지도 벌써 만으로 1년째다. 이덴베르 제국의 황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을지.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가슴속에서는 차갑고 파란 불이 이는 듯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소식이 궁금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면서 소문을 들었다.”
“어떤 소문 말씀이세요?”
후작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이은 것은.
“이번 생일 연회 때 이덴베르 제국에서 사신과 선물을 보낸다는 것 말이다. 사실이더냐?”
그 말에 나는 들고 있던 공을 나도 모르게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라이벌이라는 말은 적어도 서로를 자신의 호적수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옆 제국에 보내는 사신인 만큼, 대충 아무나 뽑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고위 귀족, 혹은…….
“설마 황족이 직접 오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샤의 생일을 축하하러 여기까지 오는 건 꽤 기특하다만, 난 그놈들의 얼굴을 보기가 싫구나.”
후작은 냉소했다.
‘……아.’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그것만큼은 참아 주세요.’
황족이라니.
그들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니.
물론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후작의 말에 그토록 귀를 기울인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만약, 내가 황족을 다시 만난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슴이 너무 쿵쾅거린 나머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후작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 안 그래도 거기 상황이 개집 꼴이라던데. 그 누구더라, 황족 중에…….”
거기까지 가자, 나는 더 이상 불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기의 몸은 불안을 해소할 방법으로 단 한 가지의 배출구를 선택했다.
“……으아아아앙!”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내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금세 맺히더니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울어 젖히는 나를 보고 황후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왜, 왜 그러니. 아이샤? 괜찮아?”
나는 대답도 못 하고 눈물만 방울방울 흘려댔다. 그러자 황후가 얼른 나를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녀의 품에서는 포근하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맡았던, 마음이 진정되는 향기였다.
내가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것은 루셀 후작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후작은 당황해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후작 부인이 후작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던 것이다.
어찌나 센 힘이었는지, 공중에선 바람 가르는 소리가 훅 났다. 얼떨결에 얻어맞은 그는 몸을 한껏 움츠렸다.
“아, 아니. 갑자기 때리기는 왜 때리…….”
“당신이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잖아요.”
그녀의 보라색 눈이 서슬 푸른 빛을 띠고 후작을 노려보았다.
“아기들이 얼마나 예민한데요. 당신이 목소리를 높이는 걸 듣고 불안해진 걸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자, 황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요. 아이샤가 얼마나 얌전한 아이인데요. 어서 달래 주셔요.”
“아, 어, 그런가? 어…….”
그는 금방 어물어물거리고 말았다.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아이샤, 미안하다…….”
그는 괴상한 얼굴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이리저리 까꿍을 하며 한참 나를 웃기려고 별짓을 다 했다. 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그걸 바라보면서 딸꾹질을 했다.
“자, 아이샤. 괜찮아. 엄마가 있잖니. 할아버지는 엄마가 혼내 줄게.”
황후는 조심스럽게 나를 앞뒤로 흔들어 주었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러자 후작은 땀을 닦았다.
그 짧은 순간 동안 꽤 마음고생을 한 듯싶었다.
“어휴, 괜히 내가 아이샤를 울려 버렸구나. 하여간 이게 다 이덴베르 놈들 때문이야. 그렇지?”
그는 멋쩍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민망함을 달래기 위한 말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자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덴베르 사람들은 다들 끔찍해.’
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나의 의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후작은 어리둥절해져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이샤도 이덴베르 놈들이 싫다고 하는구나.”
“……그러네요.”
황후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평소에는 별 반응도 없던 내가 이덴베르 얘기가 나오니까 울고, 고개를 끄덕거리니 그럴 만도 하리라.
내가 울음을 완전히 그친 걸 확인하자, 세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티타임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대신 나는 이번에 황후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그 품 안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황후는 내가 걱정되는 듯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무의미한 저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가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생일 연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루해하지 말라고, 아까 떨어뜨렸던 공을 내 손에 다시 쥐여 주기도 했다.
나는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그 공을 힘껏 잡았다. 그런데 너무 세게 잡은 탓인지, 공은 미끄러져서 의자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말았다.
“어머, 아이샤. 다시 주워다 줄까?”
황후는 나를 향해 물었다.
저 멀리로 굴러가는 알록달록한 공.
하지만 나는 그냥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이젠 가지고 놀 기력도 없다. 나는 결국 축 늘어지고 말았다.
‘다 싫어.’
기분이 울적해졌다.
* * *
그런데 황후는 그런 내가 아무래도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루셀 후작 부부가 손님들이 머무는 궁으로 돌아가고 난 이후 나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계속 말을 걸었으니 말이다.
“아이샤, 기분이 안 좋니?”
나는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자 곤란하다는 것처럼 황후가 근심에 잠긴 표정을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샤의 기분이 나아질까?”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곤 아까 내가 가지고 놀던 공을 가져와서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러나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멋쩍은 듯 손을 내렸다.
“아니면 과자를 줄까? 우리 귀여운 아이샤.”
나를 향해 부드럽게 말해오는 그녀를 보며,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황후는 그저 내가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내 기분이 나아지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에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애초에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 그저 내가 이덴베르의 이름을 듣고 울적해졌을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나에게 어린이용 과자를 권하는 그녀의 손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마치 만개한 봄꽃처럼 확 피어났다.
그때였다. 때를 맞춰 이시스와 황제 폐하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아이리스.”
“아이샤!”
둘은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앞다투어 황후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둘의 모습은 무척 비슷했다.
게다가 우리 둘을 부를 때면 세상의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태도도 아주 똑같았다.
“두 분께서 어쩐 일이신가요?”
하지만 나와 황후의 반응은 달랐다. 황후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한 것과 다르게, 나는 멀뚱하게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보기 위해 왔네.”
“그야 아이리스 님과 아이샤를 보기 위해서죠!”
둘은 동시에 그렇게 말하다가, 서로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자기들도 서로가 비슷하다는 자각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황후는 자그맣게 웃었다.
“일단 앉으세요.”
두 사람을 위해 새로운 차가 나왔다. 테이블에는 이시스를 위한 달콤한 과자도 함께였다. 이시스는 얼굴이 확 밝아졌으나, 내 앞이라 그런지 애써 그 표정을 자제하려는 것 같았다.
황제는 다정한 얼굴로 황후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이샤도, 당신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무척 다행이군.”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폐하 덕분이에요.”
황제는 이전의 황후, 테티스와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몸이 약한 그녀를 항상 염려하며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후, 그로서도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둘 수 없어 북부 권세가의 딸인 아이리스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테티스를 잃은 슬픔이 컸을 텐데도, 황제는 새로 황궁에 들어온 아이리스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녀를 무척 지극정성으로 대해 주었다. 옆에서 보는 나도 확연히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시스도 있고요.”
간식을 먹던 이시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이시스도 이시스였다. 배다른 동생인 나를 항상 더할 나위 없는 사랑으로 감싸 주고 있었다.
황위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나를 내치고, 경계한다고 한들 이상한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황후는 언제나 우리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 둘이 너무나 고마운 모양이었다.
“……두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응접실 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이제 이시스는 딴청을 피우는 나를 보며 놀아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홉 살 먹은 아이가 나처럼 어린 아기와 노는 게 재미있을 리도 없는데, 그는 항상 나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이샤, 아 할까? 자, 아.”
나에게 간식을 먹여 주려 하는 그를 보며 황후는 미소 지었다.
“언제나 아이샤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해요.”
온갖 수를 다 써서 내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던 이시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요. 저는 ‘오라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이시스는 생글 웃었다.
“아이샤는 제가 지켜 줄 거예요. 그렇게 맹세했어요.”
“어머, 믿음직스러워라.”
황후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라.’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나에게는 부정적인 의미밖에 되지 않은 말이었다.
그때 갑자기 이시스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리스 님, 그리고 아이샤. 할 말이 있어요.”
그 말에 황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인가요?”
이시스는 비밀을 말하듯이 소곤소곤 우리들에게 속삭였다.
“저, 아이리스 님과 아이샤가 있어서 너무나 좋아요.”
그리고는 과거의 이야기를 읊조렸다.
“아마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저는 언제까지고 무척이나 쓸쓸했을 거예요.”
“……이시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항상 외로웠으니까요.”
“…….”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항상 밝은 것만 같았던 이시스가 이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은 무척이나 커다란 일이었을 테니까. 그저 내가 이제껏 그의 어둠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이시스는 봄날의 푸른 하늘보다도 훨씬 맑게 갠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저는 아이리스 님과 아이샤가 너무너무 좋아요. 둘과 함께 있으면 세상이 반짝반짝해요.”
“…….”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저에게 있다는 게, 저는 기적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결국 황후는 눈에 고인 눈물을 살짝 닦고 말았다.
“……저도요. 저도 이시스가 있어서, 아이샤가 저에게 와 주어서. 그리고 폐하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네.”
황제가 끼어들었다.
“이 넷이 함께 있을 수 있어, 짐이야말로 무척이나 기쁘단다.”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이시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이시스는 방긋 웃고 말았다.
나는 두 손을 꼭 쥐었다. 황후는 이시스에게 제안 하나를 했다.
“아이샤를 한번 안아 보시겠어요?”
어쩐지 예전, 티타임 때 아버지가 떠올랐다. 다만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시스는 사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될까요?”
과연 괜찮을까?
나는 슬그머니 염려했다.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된 이시스에게 내 몸을 맡기는 건 나로서도 꽤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속을 남들이 알 수 있을 리 없었으므로, 나는 결국 이시스의 품에 조심스럽게 안기고 말았다.
“이렇게, 손으로 엉덩이를 잘 받쳐서 안아야 해요. 안 그러면 몸이 젖혀져서 불편하거든요.”
“……와아…….”
이시스는 황후에게 배운 대로 나를 꼬옥 안았다. 생각보다 이시스의 팔 힘은 굉장히 셌기 때문에 내가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이시스의 얼굴은 두근거림과 설렘, 그리고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짓 하나 없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따뜻해.”
그는 무겁지도 않은지 나를 한참을 안고 있었다. 나는 그 품에 안겨서 이시스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나에게 생긴 새로운 가족들.
이들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이시스, 황제, 황후, 그리고 나.
전생의 나는 황족들이 모두 차갑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마치 타오르는 화롯불 같은 따뜻함이었다.
나는 나를 안아 오는 그 자그만 품속에, 나도 모르게 기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나자, 저녁 시간이 되었다. 황후는 나를 위해 직접 저녁을 챙겨 주었다.
그녀가 챙겨 주는 밥을 먹고, 다시 조금 놀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위가 깜깜해져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황궁의 법도상, 아무리 어린 황족이라고 해도 어머니와 따로 잠을 자야 했다. 황족에게는 황족에게 필요한 예법이 있는 법이므로.
그런데 오늘따라 왠지, 그 법도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어두워진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이샤.”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감쌌다. 황후였다. 그녀는 나를 감싸 안고는 품에 안고 볼을 비볐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잘까?”
그 말을 듣고 있던 시녀장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궁의 법도가…….”
“이번 한 번만 모르는 척해 주렴. 에밀리.”
황후는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오늘은 아이샤와 떨어지고 싶지가 않구나.”
나는 물끄러미 황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녀장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다면 아이리스 님의 뜻대로…….”
“고마워.”
시녀들은 나의 방에서 내가 늘 베고 자는 인형들과 쿠션, 그 외 갖은 아기 용품들을 가져다주었다.
은색 머리를 내리고 얇은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황후는 나를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자, 오늘도 즐거운 꿈을 꾸자. 아이샤.”
그렇게 말하며 황후는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그에 나는 스르륵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달콤한 가락의 자장가.
그것은 마치 황후의 사랑처럼 나의 마음속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리스 님과 아이샤가 있어서 너무너무 좋아요.’
이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 넷이 함께 있을 수 있어, 나야말로 무척이나 기쁘단다.’
황제의 목소리도 함께 말이다. 나는 졸음 때문에 눈이 반쯤 감긴 채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곱게 눈을 휘며 웃어 주었다.
‘…….’
나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
아직은 너무나도 먼 호칭이었다. 과거의 옛 그림자가 그 단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떠올릴 때면, 조심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나의 생일 연회가 다가왔다. 황제가 연회를 한 달씩이나 선포한 것은 수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놀랍기도 했지만, 건너 듣는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대대적인 광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도 연회지만, 수도나 전국 각지에서는 한동안 축제가 이루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나를 위한 연극, 예술제, 내 이름을 달고 이루어지는 빈민들을 위한 구호 사업 등…… 하나하나 열거하려면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과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들였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생각하니 조금 고맙기도 했다.
오늘은 바로 그 연회의 첫날이었다. 나는 안전상의 문제와 낯을 가린다는 이유로 생일 연회 첫날에만 얼굴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각종 볼거리나 선물 개봉식은 연회 첫날에 몰려 있었다. 내 생일날,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나를 선보이는 시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알겠지? 오늘은 황녀 전하를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야 해!”
“원래도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우신데요!”
“그래도! 오늘은 완벽 이상의 완벽을 추구한다!”
“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어찌나 신나서 나를 꾸미고, 꾸미고, 꾸미던지. 결국 나는 연분홍색의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앙증맞은 은색 티아라를 쓰게 되었다.
거울을 보니 이제 나는 더 이상 날개 없는 천사가 아니었다. 뒤에서 날개가 팔락이는 환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오늘의 나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기의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일부러 경량화 마법까지 걸었다는 티아라에는 그야말로 내 주먹만 한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듣기로는 황제가 나를 위해 국보를 털었다지.
황후도 치장을 마치고 와서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나와 맞춰 연분홍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셨다.
그녀는 내 뺨에 뽀뽀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내 사랑스러운 딸.”
그러고는 나를 안고 영접실 안쪽으로 다가갔다. 창가의 흰 레이스 커튼을 착 열자, 오후의 빛이 가득 쏟아졌다.
항상 내 근처를 맴도는 빛의 정령들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애들도 오늘이 흥겨운 날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한번 볼래?”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유리가 물처럼 맑았기 때문에 탁 트인 수도의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
수도는 완연한 축제 분위기였다. 연분홍색 꽃잎이 수도에 가득 뿌려지고 있었다.
얇고 하늘하늘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엘미르꽃이리라. 황후는 나를 향해 속삭였다.
“네 생일을 위해서 다들 저렇게 축제를 여는 거란다.”
나는 물끄러미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모두가 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
나는 나도 모르게 황후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자 황후는 어머, 하더니 기쁜 듯 살짝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사랑이란 뭘까?
황후와 황제, 그리고 이시스의 사랑은 마치 상처에 잘 듣는 약과 같았다.
쓰린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해 주는 약.
저 멀리에서 흥겨운 축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우리들은 한참이나 창문 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황후는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첫 번째 생일 축하한단다. 아이샤.”
벌써 내가 다시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났구나. 나는 황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미소 짓고 말았다. 오늘 나는 황후, 이시스와 함께 연회장에 입장하기로 했다.
오후부터 진행되는 식에는 수도의 온갖 귀족들이 모두 밀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궁 앞을 가득 메운 마차와 그 안에서 내리는 귀족들의 끝도 없는 행렬…….
그 기세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이시스는 우리를 찾아 영접실로 찾아왔다.
그가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것은 이제 이미 완전히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아이샤!”
그는 금단추가 달린 연푸른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직 어린 그지만, 그 단정한 모습에는 벌써부터 황태자다운 품위와 위엄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예뻐! 귀여워! 사랑스러워!”
하지만 그 위엄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내 근처를 뱅글뱅글 돌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외칠 듯했다.
“역시 내 동생이 최고야.”
그는 행복한 듯이 환하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나랑 함께 오래오래 같이 있어 줘야 해?”
그는 마치 아기 새인 양 나를 보면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황후는 그런 그를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한참 동안 나에게 귀엽다고 말하던 이시스는 황후를 향해 조르듯이 물었다.
“혹시 제가 연회장까지 아이샤를 안고 가도 괜찮을까요?”
“연회장까지?”
황후는 잠깐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여기서부터 연회장까지의 거리는 꽤나 먼데, 이시스가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곰도 때려잡은 이시스의 능력을 믿은 듯했다.
“네, 하지만 놓치지 않게 조심하셔야 해요. 아이샤는 연약하니까요.”
“물론이에요!”
결국 나는 이시스에게 안겨 입장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시스는 그게 무척이나 행복한 듯 환하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연회에 입장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접실을 빠져나와서 대연회홀까지.
우리의 뒤를 따르는 수도 없이 많은 시녀들 덕분인지, 아니면 창밖으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수의 귀족들 때문인지.
나는 물론이고 황후에게도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긴 복도를 걸어 우리는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자, 그럼 들어갈까요?”
시녀장의 말에 우리들 앞에 서 있던 문지기 두 명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 앞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귀족들이 나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내 행동은 하나하나 그들의 주목을 받겠지. 마치 이전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황후 소생의 황녀였던 나는 12살의 데뷔탕트 이후 사교계에서 완벽한 행동을 하기 위해 늘 노력해 왔다.
그래서인지 항상 연회가 열릴 때면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들이켤 수가 없었다. 긴장감에 모든 음식물이 넘어오는 것 같아서다.
‘괜찮을까.’
그때의 기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을 때였다. 이시스는 마치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단단히 나의 몸을 잡아 왔다.
그가 나를 향해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샤, 웃자!”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갑자기 왜 웃자는 거야?’
그런 나에게 이시스는 설명했다.
“나는 아이샤가 오늘 무지막지하게 행복하길 바라. 그걸 위해 이 연회가 열리고 모두가 여기 있는 거니까.”
“…….”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아이샤는 그냥 오늘 하루 여기에서 웃고 즐겼으면 좋겠어.”
말만 하지 않고 이시스는 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낯을 많이 가리는 나를 알고 그런 말을 해 준 것이리라. 내가 알아들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
우습지만, 나는 그의 말에 감화되었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긴장하지 말자.’
나는 지금 1살짜리 아기다. 그냥 편안히 앉아 있다 오기만 해도 칭찬을 받을 거다.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예전처럼 서로를 물고 뜯는 사교계 자리도 아니다.
괜찮을 거다. 나는 마음을 여유롭게 먹기로 했다.
이시스의 말이 끝나자, 문지기는 거대한 연회홀의 문을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그러곤 목청을 높여 문 안으로 소리쳤다.
“아이리스 드 엘미르 황후 폐하. 이시스 드 엘미르 황태자 전하. 그리고…….”
나는 숨을 조금 들이켰다.
“아이샤 드 엘미르 황녀 전하 드십니다!”
* * *
그 시각, 귀족들은 아이샤의 모습을 볼 생각에 매우 들떠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아이샤 드 엘미르라는 이 제국의 첫 번째 황녀는 극도로 외부 노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전상의 문제로 황족들이 공식 석상에 서지 않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아이샤 황녀의 경우는 그 정도가 무척이나 심했다.
궁인 이외에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니 그 정도가 짐작 되리라.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성대한 연회를 열 이유가 있었나?’
물론 이시스의 첫 번째 생일과 황태자 책봉식 때도 이렇게 연회가 길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시스가 후계자라는 명목이 있었다.
‘그저 공평함을 위해서인가?’
사람들은 궁금함에 못 이겨서 황제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대체 어떤 분이실까?’
그 답을 알고 있을 황제는 옥좌에 앉아서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머지않아 그의 황후와 이시스, 그리고 아이샤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는 무척이나 흐뭇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닮았을까, 아니면 황제 폐하를 닮았을까?’
황족에 대한 생각치고는 좀 불경스러웠지만, 호기심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 쪽, 그러니까 티리온 황제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면 그녀는 아마 금색 고수머리을 가진 어린아이일 테다.
그들은 상상력을 한껏 돋궈보았다. 티리온은 10살이 되기도 전에 곰을 때려눕혔다고 했다.
그런 티리온의 2세, 그것도 여자 아기라.
자연스럽게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 손에는 날카로운 검을 쥐고,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를 가진 어린 영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에겐 아이샤가 한 살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티리온과 쏙 빼닮은 그녀는 당당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을 향해 엄하게 호령하고 있었다…….
‘……안 돼.’
귀족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솔직히 이 상상은 조금 무서웠다. 이시스가 올해 9살인데, 지난번에 그가 곰을 때려눕혔다는 소문은 사교계에 자자했다.
항상 방긋방긋 웃으며 다니는, 성인 가슴에나 겨우 올 법한 아이가 검을 휘둘러 곰을 때려눕혔다니…….
무시무시한 일이었지만, 만약 아이샤도 티리온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황궁 사냥터의 씨를 말리는 두 남매의 상상까지 가자, 그들은 필사적으로 상상을 전환해 보려고 했다.
‘어머니 쪽을 닮았을 수도 있잖아!’
만약 어머니를 닮았다면?
아이리스 황후, 궁에 들어온 지 햇수로 2년이 되는 그녀는 은색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붓꽃색 눈동자를 가진 대단한 미인이었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럽고, 그야말로 흐르는 물같이 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궁인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내심 그녀가 황후를 좀 더 닮기를 바랐다. 아이리스를 꼭 닮은 귀여운 여자아이라니, 보기만 해도 행복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론은 한가지였다. 어머니를 닮든, 아버지를 닮든 간에 만약 둘을 닮긴 닮았다면 아이샤가 굉장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이다.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특별 주화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매우 비쌌다. 그 이유는 황제가 굉장한 미남이기 때문이었다.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위엄에, 진한 황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가을 하늘처럼 푸른 눈을 가진 번듯한 미남은 모든 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아이리스도 그랬다.
은하수가 흘러내리는 듯한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에 오묘한 빛깔이 맴도는 보랏빛 눈동자, 아침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청초한 매력을 가진 아이리스.
그 둘이 합쳐진 황녀 전하는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들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이시스의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흠흠, 내가 듣기로는 이시스 황태자 전하께서 아이샤 황녀 전하를 무척이나 좋아하신다고 하더군.”
“오, 나도 들었네. 지난번에는 황태자 전하가 잡은 곰 가죽을 황녀 전하께 직접 선물했다지?”
그 외에는 자기 몸처럼 커다란 인형이라던가, 예쁜 꽃들이나, 특별히 귀한 과일 등을 다람쥐처럼 모아서 황녀에게 매번 선물하고 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도 동생을 생각하는 그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대단하냐며 궁인들이 앞다투어 칭찬했던 탓에 귀족들도 그 모습이 은근히 궁금하기는 했다.
“오늘도 황태자 전하께서 준비하신 무언가가 있다던데. 그게 혹시 무언지 아는 사람 있나?”
“글쎄,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뜻이 있으시겠지. 속이 깊으신 분이니까.”
연회장의 분위기는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궁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이 연회는 부족함이 없었다. 감탄만 하기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연회가 한 달씩이나 열리는 것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티리온 황제를 믿고 있었다.
그가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맹목적인 믿음.
‘아이샤 황녀님이 등장하면 알 수 있겠지.’
그러한 이유로 연회장은 아이샤 황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흠.’
황제는 그런 그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문지기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
“아이리스 드 엘미르 황후 폐하, 이시스 드 엘미르 황태자 전하.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문 앞으로 쏠렸다. 그리고 모습을 곧 드러낸 아기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입을 딱 벌린 귀족들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몇몇은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이란 오직 똑같았다.
‘천사다! 저건 천사야!’
구름같이 폭신한 듯 굽이치는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기는 그야말로 천사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씩 돌릴 때마다 뒤에서 흰 날개가 팔락거리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아이샤 드 엘미르, 제1황녀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주는 아기였다.
그저 아기에 불과할진대,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어딘가 부서질 듯, 연약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을 깜빡이면, 아기 본연의 귀엽고 맑은 느낌만이 들었다. 그야말로 한두 단어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이시스가 아이샤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황태자 전하가 직접?’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황태자는 황녀가 무겁지도 않은지, 그녀를 안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마치 ‘얘는 내 동생이야!’라고 주장하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여워.”
어느 귀부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홀린 듯이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이 시작이라도 되듯 여러 곳에서 비슷한 감상들이 튀어나왔다.
그랬다. 자그마한 여동생을 안고 있는 귀여운 오빠의 모습은 그야말로 명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심장이 위험하도록 귀여운 것은 물론, 영구 보존해야 할 법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이샤 황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았다.
그러자 몇몇 사람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야말로 귀여움으로 이 황궁을 제패할 수 있을 것 같은 두 남매였다.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수도의 예술제에 대해 맹렬히 생각을 뻗어 나갔다.
‘황녀 전하의 초상화가 예술제에 전시된다는 얘기가 있던데, 경매에 참가해야 할까?’
‘아! 너무 귀여워, 나도 저런 아이가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황태자님와 황녀님이 같이 그려진 초상화를 가지고 싶어!’
그야말로, 그들의 귀여움에 당해 버린 불쌍한 포로들이었다.
* * *
샹들리에의 빛이 휘황찬란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엄청난 인파였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려 버릴 정도로.
하지만 이시스는 익숙한 듯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이시스에게 안긴 나는 당연히 그의 발을 따라서 순순히 그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 긴장한 듯했었던 황후도, 천천히 그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 앞에는 황제가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늘따라 더욱더 따뜻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너무 섞여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귀를 기울여 보려고 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심 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곧 깨닫고 말았다. 말소리를 구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귀여우셔!”
작은 비명 같은 그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구석을 향해 울려 퍼졌다.
귀엽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뚱하니 입술을 내밀고 말았다. 황녀궁의 시녀에게도 매일같이 듣는 말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귀엽다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아기가 되었다는 실감이 더 나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입술을 쭉 빼문 게 사람들은 더욱 귀여웠던 모양이다.
“……아!”
어디선가 몇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결국 나는 입술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시스가 천천히 걸어 황제의 앞에 당도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던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자리에 내려와 이시스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
이시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의 몸짓은 명백했다. 마치 얼른 나를 달라는 듯 것만 같았다. 이시스는 불만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이샤는 내 동생인데.”
황제는 그 말에 어서, 라는 듯 눈짓했다. 그러자 이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어른스럽게 나를 양보했다.
황제는 씨익 웃으며 나를 품 안에 소중히 안아 들었다.
‘언제는 내가 부서질까 봐 못 안겠다고 하더니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우글거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나와 황후, 황제, 이시스 사이에만 특별한 보호막이 처져 있는 것 같았다.
결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견고한 벽.
이윽고 황제가 선언했다.
“짐의 첫 번째 황녀, 아이샤의 생일 연회를 축하하기 위해 와 준 그대들에게 감사하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모두가 그를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웃음을 지었다.
“한 달간 있을 연회는 오직 아이샤를 위해서 이루어질 것이네.”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구석으로 퍼져갔다.
“그러니 다들 즐기게나. 그리고 축하하게나.”
사람들은 고개를 빼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의 딸의 첫 번째 생일을.”
짧지만 박력 넘치는 그 말에, 사람들은 앞다투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그다음, 황제는 성수를 꺼내어 손에 적신 후, 내 머리에 살짝 뿌려 주었다. 이슬처럼 머리 위로 성수가 맺혔다.
빛의 신을 제일로 믿는 엘미르 제국인 만큼, 그 성수도 빛의 신전에서 축성한 것이었다.
빛의 신성력과 내 정령들의 상성은 꽤 좋은 모양이었다. 성수를 맞자 내 옆의 정령들이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아이들은 신나는 얼굴로 공중을 떠다니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기분이 무척 좋은가 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면서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빛의 하급 정령인 ‘루’가 내 손에 내려앉아서 나에게 행복하게 미소했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무심코 웃었던 걸까? 옆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봤어? 황녀 전하가 웃으셨어?’
‘응! 너무 귀여워서 숨이 멎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나는 황녀로서의 체통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귀여움’이라는 콩깍지가 쓰인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이윽고 나는 황제의 옥좌에 그와 함께 앉게 되었다.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하지만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사람들이 다가와서 축하를 이야기하고, 선물을 개봉하는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식은 작위가 높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 끝도 없는 귀족들의 행렬이란.
나는 수도 귀족들이 이렇게 많았나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공작들부터 시작해서 후작, 백작…….
그들이 주는 선물들은 다양했지만, 그 모두가 진귀한 물건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귀엽다는 듯 한참을 미적거리다가 자리로 물러가곤 했다. 시간은 지루하게 계속해서 흘러갔다.
처음에는 꽤 신기했지만, 식은 길고 재미가 없었다. 결국 나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하고 말았다.
‘……흐아아…….’
아기의 몸이어서 집중력이 약한 걸지도 모른다. 무희들의 춤도 보고, 악사들의 연주도 들었지만 그래도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마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시스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조금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눈을 깜빡이는데, 문득 그가 나에게 준다던 선물이 생각났다.
‘생일 때까지 비밀이라고 했었지? 그럼 지금 주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시종이 가져다주는 걸까?’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이시스는 가까이 내게 다가왔다. 여전히 그의 손은 텅 빈 채였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황제의 자리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는 황제의 옥좌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안고 있던 황제는 이미 그에게 언질을 들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 걸음 물러서 있던 시종이 붉은 비로드 쿠션에 올려진 검을 들고 황송스러운 듯 다가왔다. 검집에 싸인 금색 검은 장식용처럼 아름답고, 섬세했다.
‘나에게 검이라도 선물하려는 걸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시스가 나에게 검을 선물할 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 검은 물론, 단도도 들 수 없는 어린 한 살배기 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이시스였던 모양이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이시스는 천천히 나를 보며 무릎을 꿇고,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친밀한 접촉에 순간 놀라고 말았다. 안심하라는 듯이 이시스가 살짝 웃었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그는 싱긋 웃었다.
“네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한단다.”
그가 무릎을 꿇은 자세는 마치 기사들이 주군에게 보이는 예와도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연회장은 온통 고요했다.
천천히 황제가 일어섰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앉은 이시스의 동그란 어깨가 보였다.
“이시스 드 엘미르, 네 뜻은 미리 들었다.”
“예, 아바마마.”
“아이샤에게 기사의 맹약을 하고 싶다고 했지.”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헉,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그 속에는 황후도 예외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연회장 안은 마치 바늘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이 고요해졌다.
기사의 맹약.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사의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이 엘미르 제국에 존재하는 영원의 맹약이었다.
보통 그 대상은 연인이나 가족, 친우 등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명성과는 다르게 이 맹약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맹약을 한 그 기사는 자신의 온 신념과 명예, 목숨을 걸고서 맹약자를 지켜야 하니까 말이다.
단순히 허울뿐인 맹세는 아니었다. 이 맹세를 한 사람은 거의 대대로 맹약자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죽기까지 했다.
이시스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황태자인 데다 이 전통을 아는 이상 맹세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그 맹세를 하려고 하는 것인가? 게다가, 어째서 황제는 그에 찬성한 것이지?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이다. 보물처럼 소중히 대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시스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맹세의 무게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거행하겠다.”
황제는 나를 안고, 옆의 시종이 든 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예식용 칼인 줄 알았는데, 검집을 열어 보니 무척 날카롭게 날이 들어 있었다.
검집을 공손하게 받아 든 시종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시스는 굳건한 얼굴로 황제의 의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든 검의 옆면이 이시스의 왼쪽 어깨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것은 영광이고.”
그리고 다음으로,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것은 신념이며.”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에 가볍게 내려앉은 검은, 샹들리에의 불빛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힘이다.”
그리고 황제는 검을 거두었다.
“네 모든 영광과 신념과 힘을, 맹약자를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하느냐?”
이시스는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초록색 눈동자를 나에게 맞추었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들렸다.
다음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물론…….”
“꺄아!”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큰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무척이나 급했던 것이다. 내가 소리 내어 팔을 휘젓자 나를 안고 있던 황제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누구 맘대로 내 동의도 없이 맹약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거야.’
나는 초조해졌다. 이시스도 둥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싫어. 나는, 나는…….’
그런데 나를 보던 황제가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그렇지. 당사자의 동의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
황제의 입가가 실룩였다. 저건 내 생각엔, 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래, 내가 웃기겠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와 어쩔 줄 모르겠지. 심지어는 이시스의 표정도 미묘했다.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팔을 휘젓고 있는 내가 너무나 깜찍해서 꼭 끌어안아 주고 싶다는 듯한 얼굴이다.
나를 지켜보던 다른 귀족들의 얼굴도 이시스와 똑같았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그런 부담스러운 맹세는 싫어.’
왜냐하면…….
아무리 굳건한 맹세라고 해도, 얼마나 깊은 맹세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걸.
언제 배신당할지도 몰라. 그러니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 편할 텐데.
“아이샤.”
그때였다. 이시스가 나를 불렀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예전에도 말했었지?”
언제를 말하는 걸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그는 나에게만 들리도록, 살짝 속삭였다.
“너는 나의 기적이고, 소원이고, 행운이야.”
“…….”
“앞으로 더 강해질 거야. 너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게.”
“…….”
“그러니, 앞으로 나를 더 지켜봐다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깊은 신념이 담겨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그를 말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바보.’
이시스는 바보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했는데. 고작 내가 그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쪽짜리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항상 넘칠 듯한 애정을 퍼부어 준다.
가슴속이 애타는 듯이 간지러웠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가 연회장 안을 울렸다. 그리고 정적이 가득하던 연회장 안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시스와 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방금 전의 의식이 무척이나 경건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잠시간 소강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 이후에는 다시 선물을 받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나는 감동의 여파에 잠겨 있었다. 이시스의 덕분이었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벅찼다.
‘……그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불행은 모두 끝났을지도 모른다.
나를 안고 있는 황제의 온기와 황후의 사랑, 그리고 이시스의 웃음…….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일들은 모두 끝났고, 나는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처음으로 나는 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하늘에 빛이 한 줄기 비추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셀레나 여신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벅차오르는 감동과 따뜻함에 감싸져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서 이르겠습니다!”
불행은 항상 행복 다음에 오는 것이기에.
나는 숨을 헉 들이켜고 말았다. 내가 결코 오지 않길 바랐던, 그 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이덴베르 제국의 사신의 차례입니다!”
나는 숨조차 겨우겨우 쉬었다.
“……아이샤?”
나를 안고 있던 황제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나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가장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 얼굴이 하얗게 변한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누구지?
누구일까?
설마, 사신이 내가 아는 인물이면 어떡하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시간을 멈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나의 시야로 푸른색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는 저벅저벅, 연회장 안을 걸어오고 있었다.
푸른색.
푸른색은 라키아스 1황자의 것이다.
그 특유의 군청색 머리카락과 물색 눈동자는 이덴베르 제국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매우 특이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설마.
그가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 왜 굳이 1황자인 그가 이곳까지 파견되었겠는가.
그래, 그럴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이샤, 괜찮니?”
주위의 가족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이 질린 것을 보고 황후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이샤!”
나는 눈을 꼭 감고 말았다. 무서웠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기도를 드렸다.
이번에는 이덴베르의 신, 셀레나가 아닌 엘미르의 신 ‘루미나스’였다.
‘제발, 제발 라키아스가 아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살며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앞에 당도한 사신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푸른색 로브를 쓰고 있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 로브를 벗자, 검은색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르, 센.’
푸른색 로브는 대대로 이덴베르 제국 마법사의 증표였다. 2년이 지났는데 그는 조금 마르고 키가 큰 것 빼고는 그다지 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아르센, 그는 알리사일 적 나의 친구였다.
‘여전하구나.’
나는 반가움에 눈물을 퐁퐁 흘리고 말았다.
엘미르 제국이 기사의 제국이라면 이덴베르 제국은 마법사의 제국.
이덴베르에서 국가적으로 육성하는 마법사의 탑에서 최연소 현자의 칭호를 받은 그라면, 이곳에 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제국에서도 꽤나 성의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하겠지. 그는 공작의 첫째 아들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와 매우 친했었다.
내 죽기 전 나이가 14살이었고, 그가 17살.
그리고 내가 죽은 후 2년이 지났으니 그는 어엿한 성인. 그는 이제 19살이 되었을 것이다. 로브 안의 얼굴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의 풋풋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몇 명의 마법사들이 더 서 있었다. 아마 함께 온 제국의 사절단이겠지. 그러나 나에게 선물을 건네는 대표는 그인 듯싶었다.
나는 울면서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아르센과 나는 황궁의 숲 속을 같이 뛰어놀던 소꿉친구였다. 무도회가 열릴 때면 몇 번 같이 춤을 추기도 했었다. 어쩌면 더 깊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 아이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과거의 사람인 그와는, 이미 인연이 끊겨 버렸다.
내가 눈물을 흘리니 황후가 가까이 다가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이샤, 괜찮니? 힘들어?”
몇몇은 적대적인 눈으로 아르센과 뒤의 사신단을 쏘아보고 있었다. 엘미르 제국에서 이덴베르 제국 사람들은, 그리고 이덴베르 제국에서 엘미르 제국 사람들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한다.
화친을 시작했다곤 해도, 오랫동안 앙숙 사이로 살아왔던 관계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르센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뒤늦게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깨달았다.
사람들이 걱정하겠지.
‘눈물을 그쳐야 해.’
하지만 눈물이 그쳐지지 않아서 곤란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시스가 갑작스럽게 냅킨을 하나 가지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이샤. 이거 볼래?”
그것은 푸른색의 무늬가 그려진 평범한 흰 냅킨이었다. 훌쩍훌쩍 울던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자, 이걸 이렇게 해서.”
그는 그걸 손으로 펄럭거리기도 하고, 공중에 던졌다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그것을 재빨리 채기도 했다.
평범한 냅킨이었지만, 그의 손길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양이 왠지 신기했다. 팔랑거리는 냅킨에 얼마나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을까. 이시스가 생긋 웃었다.
“짠, 됐지?”
어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냅킨에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멎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시스는 냅킨으로 작은 장미를 접어 내 손에 꼭 들려 주었다. 그야말로 마치 마법 같았다.
아기로서의 본능 때문에 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에 끌리거나, 금방 주위에 휩쓸리곤 했다. 이시스는 그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딸꾹.”
갑작스럽게 울었다 멎었던 탓에 딸꾹질이 조금 났다. 그래도 다른 가족들은 내가 눈물을 그쳐서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라는 듯했다.
가족들은 내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기분이 불쾌한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더 이상 내가 울지 않자, 잠깐 멎었던 식이 다시 진행되었다. 나에게 고개를 숙인 아르센은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 하나를 바쳤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밝은 빛을 내는 광물 하나가 들어 있었다. 설명이 이어졌다.
“황녀 전하의 생일을 경하드리는 의미에서, 이덴베르 제국에서는 가장 최고급 마법석을 준비했습니다. 이 안에는 보호 마법과 물의 마법이 함께 걸려 있기 때문에, 이 마법석의 착용자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조근조근한 설명은 그의 특기였다.
내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 아르센은 조금 의아한 듯했다. 나는 그에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아르센도 어설프게 마주 웃어 주었다.
나를 평범한 아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르센이 이미 과거의 인연임을 알지만, 나는 그를 다시 본 것이 조금 기뻤다. 다시는 못 보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니 말이다.
‘잘 살고 있어서 무엇보다 다행이야.’
나는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어딘가 아련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샤는 이만 쉬는 게 좋겠군.”
이덴베르 제국의 사신들이 장내를 벗어나자, 황제는 나에게 말했다. 황후와 다른 사람은 그에 동감한다는 표정이었다.
“네, 그러면 아이샤는 이만 자러 가는 게 나을까요?”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 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이 지루해서 이만 떠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혹시 괜찮다면 제가 봐도 될까요?”
어머니의 말에, 갑작스럽게 이시스가 불쑥 끼어든 것은.
그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돌볼게요. 아직 불꽃놀이를 보지 못했는데 떠나는 건 아깝잖아요.”
“아, 아직 그 행사가 남아 있었구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 수다쟁이 유모가 첫날 거대한 불꽃놀이가 있을 예정이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이시스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이샤, 아직 불꽃놀이를 본 적 없지?”
그는 나에게 갖은 몸짓으로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하늘에서 펑 하고 터져서 오색빛깔로 예쁘게 빛나는 거야.”
나도 불꽃놀이가 어떤지는 안다. 하지만 본 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엘미르 제국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니 꽤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시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이샤가 배고프지는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확실히 배가 조금 고팠다. 아까 밥은 먹었지만,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서 있다 보니 기력이 빠졌던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아이가 가장 잘 안다고, 이시스는 의외로 내 마음을 잘 알아차려 줬다.
“어머, 그러네요. 간식 정도는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황후의 말에 이시스는 얼른 일어나 테이블에서 사과를 들고 왔다. 그는 나이프로 사과를 잘게 잘게 잘랐다. 숟가락으로도 떠먹을 수 있을 만큼 부담 없는 크기였다.
황후는 감사 인사를 하며 사과를 받아 들었다. 이시스는 내가 사과를 냠냠 받아먹자 무척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나와 놀아 주는 이시스와, 안정을 되찾은 내 모습에 안심한 눈치였다.
“그러면 불꽃놀이까지만 보고 아이샤는 자러 가는 거로 하자.”
“네!”
이시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이시스의 품에 안겨서 자유 시간을 가졌다.
선물을 대신 받아 주는 것은 황제와 황후가 되었는데, 귀족들은 나를 못 봐서인지 그게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귀족들의 순서가 끝났다. 이시스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꽃놀이 보러 가자!”
그 아이다운 순수함에, 황후는 후후 웃고 말았다. 이시스는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나에게 불꽃놀이를 보여 주겠다며, 나를 테라스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동안에도 그는 종알종알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이샤의 귀가 아프지 않게 마법사들을 갈아서 일부러 소음이 적은 불꽃을 만들었지. 보면 알 거야, 무척 아름답다는 걸.”
테라스에서는 미지근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테라스의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나를 앉히고, 그 옆의 의자에 자신도 앉았다.
하늘에는 예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고, 주변은 딱 불꽃놀이를 보기 좋을 정도로 어두웠다. 테라스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공터에서는 사람들이 바쁘게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삼 황제가 이 연회에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힘이 많이 필요한데, 이덴베르 제국과는 다르게 엘미르에서는 마법사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떤 불꽃을 볼 수 있을지, 나로서도 기대가 되었다.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공터에서 시종들과 마법사가 한쪽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이시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곧 불꽃이 터졌다. 조용하던 하늘에 팡,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소음을 적게 했다는 그의 말대로 나는 굳이 귀를 막을 필요가 없었다. 불꽃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불꽃놀이에 나는 홀린 듯이 밤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그리고 보라색…….
색색의 아름다운 불꽃들이 하늘에서 환하게 펼쳐졌다. 옆 테라스에 선 사람들이 감탄을 내뱉는 것이 들려왔다.
“훌륭한 불꽃이군그래.”
“정말 아름다워요.”
시간 차를 두고 느릿하게 피어오르던 불꽃이 공중에서 하얗게 번지고, 자그마한 불꽃들이 연속적으로 퍼졌다.
아름다운 꽃과 같았다. 게다가 불꽃은 그저 꽃처럼 피어오를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다양한 무늬를 그렸다.
그것은 동그란 원이 되기도 했고, 엘미르어로 ‘아이샤’라는 글자가 되기도…….
또 무지개가 되기도, 그리고 하얀 새가 되기도 했다. 눈을 조금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푸르고 흰 엘미르의 국기가 펼쳐졌을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사를 흘렸다.
정말 마법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공터 한쪽에서는 궁정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악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달보다도 밝고, 은하수보다도 반짝거리는 불꽃들의 향연이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그것은 이시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이시스는 홀린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가 나에게 이것을 보여 주고 싶어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기에, 꼭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피어오른 불꽃의 빛이 이시스의 옆얼굴을 물들이고, 그의 얼굴은 붉은색, 초록색,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그의 얼굴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가득했다. 세상의 평화를 모두 간직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이 이토록 따뜻한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사랑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이시스.’
나는 불꽃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음을 줄였다곤 하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감탄사에 묻혀서 주위는 시끄러웠다.
왠지,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리에 가려져서 그가 듣지 못할 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벙긋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히흐. (이시스)”
그런데 그때, 기적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공중에서 불꽃이 모두 터졌기 때문이었다. 조용해진 사위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드, 들었을까?’
이시스의 고개가 나에게로 빠르게 돌려졌다. 불꽃이 없어 주변이 깜깜했던 탓에 이시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른 불꽃이 다시 올라왔다. 불꽃은 조용한 하늘 위로 오르고, 오르고, 오르다가 탁 터졌다.
황금색 불꽃이었다.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힐 듯 커다란 불꽃이기도 했다. 나는 이시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왔다.
“……아이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이시스의 눈가에 맺혀 반짝 빛난 눈물 한 방울 때문이었다.
“…….”
나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지금, 나를 부른 거야?”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감격적이여서 할 말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기뻐하리라곤 생각했지만, 그가 울 줄은 몰랐다.
대체, 이시스는…….
나는 조금 울컥하고 말았다.
“……하호. (바보)”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뭐라고, 고작 이름 한번 불린 게 그렇게 좋다고 울어 버리는 건가.
이시스는 바보다. 딴청만 피우고, 냉정하고, 마음도 열지 않은 나를 매일 같이 찾아와 준다. 사랑해 준다. 따뜻하게 감싸 준다. 이시스는 정말 바보가 틀림없었다.
대가도 없이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해 주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런 그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는 걸까.
‘나도 바보야.’
그래. 나와 그 모두 바보다.
“아이샤, 아이샤, 그러니까, 어…….”
“이히흐.”
“나를 이시스라고 부른 거 맞지! 그렇지!”
‘그래. 맞아.’
나는 지레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이시스는 흥분해서 자신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인 듯했다. 눈가에 고여 있던 그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다시 한번 불러 봐. 이시스, 이시스라고!”
불꽃은 아름답게 펑펑, 터지고 있었다. 우리의 소란을 들은 가족들이 테라스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이시스?”
황후는 걱정스러운 듯이 이시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시스는 손을 파닥파닥거렸다.
“아이리스 님! 아버지! 그러니까 아이샤, 아이샤가요……!”
“아이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진정하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황후는 깜짝 놀라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얼굴에는 진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나는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전생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 그녀는 항상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나를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과거의 기억이, 따뜻한 색채의 기억들로 다시 덮어져 갔다.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나의 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벌써 이도 4개나 났다.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마마.”
아직 옹알이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똑바르게 어머니라고 발음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곧 나아질 거다. 이제 앞으로는 말할 수 있으니까.
황후는 내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리고 말았다. 내 새는 발음으로도 충분히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황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아, 아이샤…….”
황후는 입을 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얼굴에는 안도감과 행복이 뒤섞여 있었다. 이시스는 활짝 웃었다. 그 옆에서 황제가 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조르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나에게도 말을 해다오.”
나는 그에게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파파.”
“…….”
그 순간 황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포기한 황제는 나를 안아 올렸다.
“그래, 내가 네 아버지다. ……내 딸.”
튼튼한 그 품속에 있노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싶었다.
‘내 가족.’
그의 품에 안겨서,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은 눈을 감아도 어둡지가 않았다. 색색의 불꽃이 내 눈을 밝게 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가족…….’
마음이 따뜻해졌다. 더할 나위 없는 포근함이 밀려왔다. 눈물이 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참지 않았다. 흘려보냈다.
* * *
불꽃이 아름답게 터지다가, 잦아들었다. 아르센은 황궁 앞의 공터에 나와 있었다. 저 앞에서는 궁중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무척 듣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부러 연회장 밖으로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공작가의 아들이었지만, 사교 활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연회장의 분위기라면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이덴베르인에게 적대적으로 연회장도 달갑지 않았고, 엘미르 제국의 연금술 수준을 보고 싶기도 했다.
‘바람이 시원하군.’
그는 올라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는 연금술과 관련된 기술이고, 연금술은 마법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불꽃을 보며 아르센은 엘미르 제국의 연금술이 꽤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그 황태자.’
그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어리지만 꽤 대단한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을 극진히 사랑하는 것도 특히 눈여겨볼 만한 사항이었다.
‘대단해.’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젊은 축에 속하는 그는 두 제국이 화친을 시작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이다.
아직도 가끔 국경 쪽에서 분란이 있기는 했지만, 수도에서 나고 나란 그로서는 엘미르 제국에 열등감이나 반발심을 느낄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특이한 것이 있었지.’
그는 홀로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울던, 알 수 없는 아기.
이 제국의 첫 번째 황녀.
마치 매우 서러운 사람처럼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 모습에 아르센은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듣던 대로 낯가림이 심해서였을까? 아니면 혹시, 자신의 키가 커서일지도 모른다. 보통 아기들은 자기보다 큰 사람들을 무서워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그는 문득 시선을 둔 테라스에서 방금까지 생각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시스 황태자. 아이샤 황녀.’
그리고 다른 황족들까지. 그들은 무언가 기쁜 듯이 떠들고 있었다. 그는 의아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목소리 톤이 높은 것으로 보아 무언가 기쁘거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들이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그리운 사람이 생각났던 탓이다.
그렇게 얼마나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바라보느냐?”
“아…….”
아르센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드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그도 마법사인 듯, 풀을 먹인 푸른 로브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아르센과 동일했다.
“스승님.”
아르센은 기쁘게 그를 불렀다. 스승이라고 불리운 그의 이름은 델리움.
아르센이 최연소로 마법사의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가르쳐 준 은인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르센은 자신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아르센은 빙긋 웃었지만, 델리움은 무언가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르센이 바라보던 방향에서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유추한 모양이리라. 과연 이덴베르 제국의 오래된 현자다운 모습이었다.
“네가 왜 그곳을 보고 있었는지 알겠구나.”
“…….”
아르센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델리움은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황가라니. 우리 제국 황족들을 보면 아주 부끄럽기 그지없어.”
그 말에 아르센의 얼굴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명백한 황족 모욕이다.
“스승님!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아르센은 주위를 살피며 그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델리움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들으면 어쩐단 말이냐? 여기는 어차피 엘미르 제국 한복판이고,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늙은 나는 이제 목숨에 미련도 없다.”
델리온의 투덜거림에 아르센을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
“황족모욕죄는 심각하니까요.”
그 축 처진 모습에 델리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잉.’
이런 제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곳까지 그를 데려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 이후로 그가 계속해서 우울해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런 그를 조금이라도 기분 전환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사신단에 그를 넣은 것인데, 오히려 이렇게 역효과가 날 줄은 몰랐다.
어딜 갔나 찾으러 왔더니 홀린 듯이 황족들만 보고 있지 않나, 이렇게 기운 없이 있다니. 델리움이 눈썹을 구기고 있는데, 머뭇거리던 아르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르센.”
델리움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예. 압니다.”
“허, 나보다 간이 큰 놈일세.”
아르센은 델리움의 농담에 힘없이 웃었다. 그가 하려는 말은 방금 전 델리움이 한 것보다 훨씬 위험한 말이었다.
황족들의 재판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족밖에 없다. 게다가, ‘그 일’ 이후로 ‘그녀’의 일은 황궁 내에서 거의 엄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센은 참지 못했다.
“저는 어째서, 어째서 알리사가…… 그 애가 죽어야 했는지, 아직도…….”
기어코 아르센은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눈물이었다.
델리움은 그런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같이 뛰어놀던 그의 친구, 알리사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었단다. 그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마법사의 탑에서 얌전히 박혀 연구를 하던 아르센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다. 설령 목숨을 대신 내어놓거나, 위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그녀를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았을 때는 너무나 늦어 버린 후였다. 아르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른 황족들을 향한 분노 때문에.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감정이 점점 격해졌던 탓에 아르센의 호흡은 가빠졌다. 델리움은 결국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자, 진정해라. 아르센. 자신을 되찾는 거다.”
델리움의 말에 아르센은 눈을 감았다. 그가 마법 수련에 집중을 못 할 때면 델리움에게 주야장천 들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의 환상을 보았다.
환하게 웃던 모습, 황궁의 숲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모습, 그 외에도 그와 함께 쌓았던 많은 추억들.
그것들을 그는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말이다.
아르센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물은 그쳤지만, 대신 눈에 단호한 결심을 띈 채였다.
그것을 바라본 델리움은 속으로 탄식하고 말았다. 아르센의 고집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 고집과 독종 같은 성격 탓에, 그가 제국의 최연소 현자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는 직감했다. 이제 더 이상 아르센을 말릴 수 없을 거라는 걸.
“스승님.”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알리사의 죽음을 조사할 것입니다.”
“…….”
“조사해서, 그 진상을 밝혀내겠습니다.”
델리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짧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래.”
아르센이 걸어갈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안다. 황족들이 더할 나위 없이 아끼고 있는 마리안느가 겪은 음독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하지만 아르센은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겠지. 그렇다면 스승으로서, 그는 이 못난 제자를 도와줄 수밖에 없으리라.
앞서 말했듯 그는 이미 노인이었다. 더 이상은 목숨에 미련도 없었고, 더 해 보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다.
“네 뜻대로 해라. 나도 도와주마.”
“……!”
델리움의 말에 아르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아르센은 델리움이 반대한다고 해도 이해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주고, 지지해 주겠다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센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델리움은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이 녀석아. 감사하면 평소에 잘해라. 매일 와서 내 어깨도 좀 주무르고.”
아르센은 그저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 테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황족들은 사라진 지 오래인 듯했다. 불꽃놀이가 끝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샤 드 엘미르, 라고 했었지.’
아르센은 잠깐 그 아기를 다시 생각했다.
‘고마운걸.’
그녀 덕분에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다. 알리사도 한때 저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런 그녀가 하루아침에 사형당한 연유를, 그는 필사적으로 조사할 것이다.
‘설령,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눈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흘렀다. 엘미르 제국의 1황녀, 아이샤의 생일 첫날 밤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